(103) 갈등(葛藤)의 꽃 / 이태복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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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03) 갈등(葛藤)의 꽃 / 이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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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570회 작성일 2020-04-23 14:19

본문

<수필산책 103>
 
갈등(葛藤)의 꽃
 
이태복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언제부터 두리안 마니아가 되었는지 이달 들어 세 번째로 해발 3,142m 머르바브산 중턱 마글랑의 짠디 물요(candi mulyo) 두리안 마을에 갔다. 이 마을은 두리안으로 유명해서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마을 가는 길에는 두리안보다 마음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길가에서 마주친 화려한 진홍색 등꽃이다. 나는 오감 중에 미각보다 시각에 더 만족을 누리는 한량으로서 풍광이 좋으면 어디든 가는 스스로 산수 마니아라 말하고 싶다.
 
두리안 마을 가는 길에 한량의 마음을 붙잡아 두는 건 바로 꽃이었다. 먹는 것 보다는 보는 것에 더 행복해 하는 내가 꽃의 화려함에 마음이 빼앗겼으니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은 나비처럼 꽃밭에 가 있었고 동료들과 함께 하면서도 내심 두리안 마을 가는 일을 포기할까하는 갈등이 일었다. 그런 갈등이 있을 땐 마음이 쏠리는 곳에 있어야 만족하는 것이리라. 
 
 
등꽃을 보기 위하여 두리안 마을체험을 마치고 동료들만 차에 태워 보내고 운전수에게는 다음날 픽업하라 이르고 결국 꽃을 즐기기 위해 하룻밤 민박을 했다. 일정의 꽃은 만찬이기에 함께 못해 미안했지만 동료들은 별난 나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흔케히 놓아 주었다.
 
다음날 햇살이 쨍쨍한 정오 풍광 좋은 머르바브산을 바라보며 등꽃 그늘 아래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관상목을 재배하는 마을이어서 고객들을 유치할 수 있도록 예쁘게 꾸며 놓은 정원이었다. 홍등을 주렁주렁 걸어놓은 듯 붉은 열대의 등꽃 아래 있자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등꽃의 화려함에 취해 있었다. “세상에 어떤 물감으로 이런 화려한 빛깔을 낼 수 있을까?”
 
꽃은 곱고 화려하기까지 했다. 나도 이런 때가 있었는데 늙어가는 자신이 초라해 졌다. 과연 솔로몬의 영광이 이 화려한 꽃들만 했을까? 인생의 허망함을 질문한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총각시절 사모했던 여인을 보았을 때 마냥 가슴이 붉게 탔었다. 늙어도 마음의 빛깔은 등꽃보다 붉었다. 아마 모든 걸 사르고 재가 되기 전 절정의 불덩이 빛깔인가보다. 나의 늙은 가슴이 쿵쾅거리니 해괴한 박동에 기능이 쇠한 심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등꽃을 피게 한 건 넝쿨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밤마다 그렇게 울었던 서정주의 시처럼 등꽃이 화려한 꽃을 피우기까지는 꼬이고 틀어지며 숨 막힐 듯 압박해 오는 세월의 시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꽃을 피워낸 건 넝쿨이다. 넝쿨에 시선을 꽂았다. 뱀과 뱀이 싸울 때 서로를 꼬아 압박하듯 넝쿨이 꼬여 있었다. 그건 등꽃을 피워낸 과정이 어떠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등나무가 정자의 꽃을 피우기까지 뱀들이 싸우듯 스스로 옥죄인 숨 막혔던 시간들, 그 아픈 시간을 이겨내고 핀 꽃들을 보고도 내 어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등꽃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글자 그대로 갈등(葛藤)의 어원은 칡과 등나무다.
갈(葛)은 칡이고 등(藤)은 등나무다. 칡의 습성은 우로 감아 자라가고 등나무의 습성은 좌로 감아 자라간다. 칡넝쿨과 등 넝쿨이 서로 꼬이며 숨 막히는 세월을 버티어 내고 꽃을 피운다.
 
갈등의 단어 앞에 내게 제일 먼저 연상 되는 건 현 대한민국의 정치판 좌와 우가 연상되었다. 숨 막히고 답답하게 느껴지고 불안해 보이는 정치는 칡과 등나무처럼 서로 옥죄며 죽일 듯 숨 막히게 나아가고 있다. 이 세상에 진한 연보라 칡꽃만큼 아름다운 꽃도 파스텔톤의 연보라 등꽃만큼 가슴 뭉클하게 피워내는 아름다운 꽃도 드물 것이다. 얼핏 칡과 등나무는 싸우는 듯하지만 사실은 서로 기대고 옥죄며 자라 화려한 꽃을 피운다. 다툼이 아닌 상생의 경쟁인 것이다. 때로는 칡끼리 또는 등끼리도 옥죄며 경쟁하듯 자라가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같은 것으로만은 조화롭게 살수 없기에 서로 다름이 경쟁하는 듯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자연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칡과 등, 즉 갈등이 화합의 경쟁으로 피워낸 꽃보다 값지고 아름다운 건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노사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이념의 갈등 등, 무수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갈등이 부대끼는 건 뱀과 뱀이 싸워서 머리를 삼키기 위한 사악함이 아니라 경쟁으로 성장해가는 아름다운 과정일 뿐이다. 그것이 갈등이고 그래서 갈등의 꽃은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다. 선의가 바탕이 되는 갈등의 경쟁은 상처가 없이 결실의 꽃을 아름답게 피울 것이다. 어느새 등꽃이 한잎 두잎 떨어지고 있다.
 
뱀이 자라며 벗은 허물은 징그럽지만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하여 떨어진 꽃잎은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애절하다. “다음 계절에 다시 오마!” 나는 갈등의 꽃을 또 다시 기다리며 화려한 정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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