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 법원, 8월 반정부 시위 선동 혐의 활동가 4명에 무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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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5일, 자카르타에서 하원(DPR)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했다.(사진=자카르타경제신문/Aditya)
인도네시아 중앙자카르타 지방법원은 2025년 8월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선동 혐의로 기소된 인권활동가 4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7일
자카르타포스트에 따르면, 7일 열린 재판에서 하리까 노비 예리 판사는 로까따루 재단(Lokataru Foundation) 소장 델뻬드로 마르하엔과 직원 무자파르 살림, 학생운동단체 ‘그자얀 므망길(Gejayan
Memanggil)’ 소속 온라인 활동가 샤흐단 후세인, 리아우대 학생 까리크 안하르 등 4명에 대해 검찰이 제기한 모든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들이 지난해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이어진 전국 시위 기간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주도하며 학생과 미성년자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시위는 경찰이 한 시민을 사망하게 한 사건 이후 전국적인 소요 사태로 확대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2025년 8월 이들이 여러 플랫폼에 게시한 19건의 게시물이 시위를 폭력 사태로 고의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증거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에 출석한 증인 가운데 해당 게시물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힌 사람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일부 미성년자를 포함한 증인들이 해당 게시물을 알지 못했거나, 현장의 상황과 여론의 분노에 영향을 받아 시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하리까 재판장은 “시위대의 돌 던지기 등 폭력 상황의 확대는 경찰의 최루탄 사용과 아판 쿠르니아완의 사망에 대한 대중의 분노 때문이지 피고들의 게시물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판 쿠르니아완은 21세의 오토바이 호출 서비스(ojol) 기사로, 자카르타에서 시위 해산 과정 중 경찰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들의 게시물이 허위 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정보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아판의 사망과 관련한 내용도 공개된 정보와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미성년자를 군사적 목적 등으로 모집하거나 시위 과정에서 위험에 빠뜨렸다는 점 역시 입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25년 8월 시작된 시위는 국회의원들의 과도한 수당과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촉발됐으며, 이후 경찰의 강경 대응과 아판 사망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 소요 사태로 번졌다.
앞서 검찰은 피고인들이 #IndonesiaGelap(어두운 인도네시아), #ReformasiPolri(경찰 개혁) 등의 해시태그를 활용한 온라인 캠페인을 통해 시위를 선동했다며 각각 징역 2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해당 게시물이 정부에 대한 실망을 표현한 표현의 자유의 범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게시물에는 체포된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지원 정보도 포함돼 있었다고 재판부는 덧붙였다.
하리까 재판장은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형법은 규정된 범죄 행위가 아닌 한 국민의 사고와 의견 표현의 공간을 제한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델뻬드로, 무자파르, 샤흐단, 까리크는 미성년 학생들에게 소셜미디어를 통해 ‘무정부적 행동’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2025년 9월 체포돼 약 6개월간 구금됐다. 법원은 지난 2월 13일 도시를 떠나지 않는 조건으로 이들의 임시 석방을 허가했다.
이날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법정에 모인 지지자들은 환호하며 이들의 석방을 축하했다.
재판 이후 네 명의 활동가는 법원 밖에서 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샤흐단은 “6개월의 수감 생활이 나를 꺾지 못했고, 감옥 안팎에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도 멈추지 못했다”며 “의견 차이를 국민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델뻬드로는 이번 판결을 “수백만 젊은이들의 승리”라고 평가하며, 여전히 구금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다른 정치 수감자들에 대한 연대도 촉구했다.
한편 2025년 8월 소요 사태 전후로 경찰에 체포된 활동가와 학생, 시위 참가자는 7천 명 이상이며, 이 가운데 약 1,000명이 피의자로 지정된 것으로 정부 산하 경찰개혁위원회는 집계했다.
시민단체들이 실시한 독립 조사에서는 당시 정부 대응이 1998년 민주화 개혁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탄압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조사는 최소 13명이 사망한 소요 사태와 관련해 쁘라보워 수비안또 대통령이 국가 차원의 공식 조사를 거부한 이후 시작됐다.[자카르타포스트/자카르타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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