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회 문화탐방] 인도네시아 한인사 100년 기획탐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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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기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9-10-01 14:33 조회 5,848 댓글 0본문
인도네시아 한인사 100년의 발자취를 더듬다
기획 탐방 1. 인도네시아에 뿌리내린 최초의 한국인, 장윤원
글. 이영미 (한인 100년사 자료 연구 편찬위원)
-깊은 일정에 동참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인도네시아 한인들이 함께 발전해가는 계기가 되길 ( 박재한 한인회장)
-한 단계씩 밟아가며 한인 100년사를 정리해가는 분들을 응원 ( 류완수 영사)
-직접 발로 뛰는 현장 사람이 되어 한인사 100년의 발자취를 조명 (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 원장)
인도네시아 한국인의 원류를 찾아서
2019년 9월 21일 토요일. 14명으로 구성된 문화탐방팀은 ‘독립운동 망명객’으로 인도네시아에 최초로 뿌리를 내린 한국인 장윤원((張潤遠, 1883~1947) 선생의 흔적을 찾고자 기록문화 탐방 길을 나섰다. 오전 8시부터 저녁까지 꼬박 10시간에 걸쳐 장윤원 선생의 묘지, 아트마 자야 대학교, 국방부 청사, 대성당, 살렘바 형무소와 멘뗑 자택의 순서로 문화탐방을 하였다.
한인니문화연구원(원장 사공경)의 인도네시아 330회 역사문화탐방으로 진행된 본 탐방은 재인니한인회 박재한 회장과 주인니한국대사관 류완수 영사가 동행해 더욱 힘이 실렸다. 박재한 회장은 “바쁜 일정이지만 뜻깊은 자리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다. 9월 20일은 네덜란드총독부 고위관리의 권고로 장윤원 선생이 1920년 9월에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에 정착한 지 99년째 되는 날이라 의미가 남다르다.”는 뜻을 밝혔다.
장윤원 선생의 묘지를 가장 먼저 방문한 이유는 고국을 등지고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다 발각되어 쫓겨 인도네시아로 망명을 한 독립투사의 생에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장윤원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다
문화탐방팀은 장윤원 선생이 묻힌 자카르타 뽄독인다의 따나 쿠시르(Tanah Kusir Cemetery) 묘지부터 방문하였다. 세월의 흔적을 안은 묘비에는 ‘장윤원’이라는 한자와 일본식으로 발음한 ‘조 준 엔(CHO JUN EN)’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출생지 ‘서울’이 뚜렷이 새겨진 1.5평 묘지에는 1984년도에 별세한 부인 황항아와 차녀 장방기가 함께 합장되었다. 이 또한 자신의 혈통의 뿌리가 모국에 있음을 알리고 싶은 장윤원 선생의 깊은 뜻이 아닐까.
다음으로 문화탐방팀이 방문한 곳은 장윤원 선생의 차남 장순일 씨가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해 1960년에 설립한 아트마 자야 가톨릭대학교(Atma Jaya Catholic University)였다. 이곳에서 초대 공대학장과 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장순일 씨의 업적을 기리고자 공과대학 건물을 ‘장순일관(Gedung Paul Cho)’로 새겼다. 문제는 장순일 씨의 세례명 ‘파울’과 일본식 발음 ‘준 이치 조’에서 차용한 ‘J.P CHO’로 잘못 표기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식 이름표기를 ‘장순일관’으로 바꿔 다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몫이다. 이를 위해 박재한 회장과 류완수 영사가 아트마 자야 대학 측과 적극적으로 협의 중이다.
아트마 자야 대학교에서 부총장 이하 학교 관계자들과 한국인 유학생 강혜원, 최형윤, 조인정 씨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유학생들은 본인이 선택한 학교가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히며 문화탐방의 이후 일정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다. 아트마에서 정성스레 준비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 선물 중에는 장순일 교육자가 교황으로 받은 실버메달 훈장을 목에 걸고 부인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
이후 문화탐방팀은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게 끌려간 장순원 선생과 장남 장남해 씨가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헌병대(현 국방부)를 지나서 자카르타 주청사 발라이 꼬따로 이동했다. 발라이 꼬따 별관(뻔도뽀)은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이 1945년 7월 21일 군사 재판을 받았던 곳이다. 청년당의 핵심 당원들이 1945년 9월 1일 조선인민회를 결성한다. 이때 장윤원 선생은 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지금은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을 지운 채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 중인 주거, 관광, 교통 인프라 개발사업에 대한 상호협력 방안을 외국 대표들과 논의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자카르타 성 마리아 대성당(Gereja Katedral)에 들른 일행은 차분한 마음으로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자카르타 대성당 역시 장순원 선생과 연관이 있다. 살렘바 형무소 수감 중 출생한 막내딸 장평화가 1974년 한국출신 외교관과 결혼식을 올린 장소다. 늦둥이 딸의 이름을 ‘평화(Peace)’로 작명할 만큼 형무소에서 장윤원 선생이 얼마나 ‘평화와 자유’를 염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침 성당 안에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행은 숙연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지켜보며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빌어주었다.
인도네시아 근대 미술의 아버지 ‘라덴 살레’라 명명된 거리에 위치한 UPNORMAL (구 오아시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네덜란드 백만장자의 저택이다. 그 시대에 예술가들이 많이 다녔던 거리라고 한다. 장윤원 선생도 이 예술가의 거리를 걸으면서 학문과 예술의 자유(현 대한민국 헌법 제22조)를 꿈꾸었을까?
오후 일정은 헌병대에서 고문당한 장윤원 선생이 3년 반을 갇혀있던 살렘바 형무소(구 스트루스윅 형무소)와 멘뗑의 자택, 선생이 다녔을 법한 찌끼니 우체국과 거리를 돌아보며 진행되었다. 1960년 아트마 자야 대학이 시작된 고등학교 건물과 성당도 둘러보았다. (참고로 1967년에 스망기로 이전했다.)
살렘바 형무소는 한 울타리에 Penjara salemba(감옥)은, Lapas(교도소), Rutan(구치소), 소년원(LPKA) 세 개의 건물이 있다. 현재는 교도소에 1700명의 기결수와 구치소에 4500명의 미결수가 수용되어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으나 장윤원 선생은 현재의 소년원 건물에 수감 되었다고 한다.
손녀와 함께 힘든 일정을 소화한 노부인은 “낯선 곳에서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혹한 세월을 이겨낸 분들에 대한 추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문화탐방에 참여했다.”는 의사를 밝혔다.
철조망과 삼엄한 감시초소로 둘러싸인 형무소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을 장윤원 선생의 뜻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장윤원 선생의 멘뗑 자택은 현재 5층 건물로 BAPINDO 은행 소유이며 유통업체, 법률사무소, 보안업체 등의 사무실이 들어서 있어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인근 주택을 돌아다니며 장윤원 선생의 발자취를 탐문했으나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재도약을 위해, 불협화음을 잠재우고 한 단계씩 밟아가기
“소설가 최인훈은 《광장》에서 “인생을 풍문 듣듯이 사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설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풀이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본 문화탐방을 이끈 한인니문화연구원 사공경 원장이 일정을 마치며 소감을 전했다. 그의 고견을 더 들어보자.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편찬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할 목적으로 열심히 다녔던 오늘의 탐방지에 장윤원 선생님의 혼도 같이 다녔다고 확신합니다. ‘광장’을 가슴에 안고. 그래서 오늘의 문화탐방이 남다릅니다. 살렘바 감옥에서 선생이 봤던 하늘을 저도 올려다보았고, 어쩌면 선생이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냈을 법한 우체국 거리를 걸어보고 그가 마셨을 커피와 바람도 마셔봅니다. 구 네덜란드 예술관에서 제가 감상한 그림 앞에 선생도 오래도록 머물며 비통한 운명을 달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평소 직접 발로 뛰는 ‘현장’을 좋아한다는 사공경 원장의 소신이 묻어나는 말이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함께한 류완수 영사는 “불협화음을 잠재우고 한 단계씩 밟아가며 한인 100년사를 정리해가는 분들을 응원한다.”며 편찬위원회를 격려했다.
광장에는 언제나 역사의 바람이 분다. 힘든 일정을 소화한 참가자들과 함께하지 못한 교민들도 각자의 광장에서 운명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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