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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세가지 요구사항(Tritura)

김문환의 주간포커스 작성일201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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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9.30 공산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주도권을 잡은 수하르또 군부는 완전한 정권장악을 위해 수까르노 대통령의 잔존세력을 밀어내는 작전에 돌입한다. 우선 쿠데타 주모자들과 뿌리깊게 침투되어 있던 공산당 추종자들에 대한 말살정책이 시작되었다. 이때 자행된 인권유린 행위를 묘사한 ‘살인행위(The Act of Killing)’라는 기록영화가 금년도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라 있다. 59분짜리 이 기록물은 2013년 7월에 미국에서 처음 방영되었으며, 인도네시아 측 제작참여자들은 익명으로 올라 있다. 수하르또 진영이 취한 다음 조치는 1966년 초 UI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운동권을 조종하여 수까르노 추종자들을 무력화시키는 행동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들이 들고 나온 슬로건에는 “공산당해산, 물가인하, 내각해산”이라는 구체적인 항목들이 쓰여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 당시 시위대의 구호를 ‘국민들의 세가지 요구사항(Tritura/ Tri Tuntutan Rakyat)’라고 부르고 있다.
 
이로부터 8년 후, 수하르또의 집권이 10여 년을 바라보게 되자, 자연스럽게 후계자 문제가 밀실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때 2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양대 권력층이 충돌하여 터진 사건이 바로 1974년 1월 15일 다나카 일본수상이 자카르타를 방문하던 때를 맞춰 일어난 대폭동이었다. 당시의 권력실세들인 알리 무르또뽀/수조노 후마르다니 콤비와 수미뜨로/수또뽀 유워노 그룹이 대립하여 충돌한 이 사건을 후일 사가들은 ‘1월 15일의 대재앙(Malari)’이라고 부른다. 다나카 수상이 할림국제공항 트랩을 내리자마자 기다린 것은 시위대가 흔들어대는 ‘Tanaka Out’이라는 팻말이었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거리에 들고 나온 슬로건에는 ‘물가를 내려라, 대통령특보제도(ASPRI)를 폐지하라, 부정부패자들을 처단하라’였다. ‘TRITURA 66’과 ‘TRITURA 74’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물가문제는 공통사항이고, 국가가 파탄에 이른 원인 중 하나를 정부제도상의 문제점으로 규정하여 66년의 ‘내각해산’과 대비하여 74년에는 ‘대통령특보제 폐지’라는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공산당해산’은 당시의 시대적 자화상이었던 반면, 74년의 ‘부정부패척결’ 요구는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해묵은 국가적 난제로 고착되어 왔다.
 
74년 폭동 당시 11명이 사망하고, 807대의 일본제 자동차와 144채의 건물이 훼손된 ‘말라리 사건’이 지난 15일 4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당시 사건의 당사자였고, 일세를 풍미했던 알리 무르또뽀, 수조노 후마르다니, 수미뜨로는 모두 고인이 되어 말이 없다. 그러나 당시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이 남긴 유언은 아직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물가안정’ 문제는 서민들의 오랜 염원이며, ‘부정부패 척결’ 문제는 부패척결위원회(KPK)에 의해 과감하게 수술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바로 몇 달 전 현직 헌법재판소장과 인도네시아 홍일점 주지사를 감옥에 집어 넣더니, 캐사카우 역할을 해오던 모 부처의 비서총국장을 새로운 피의자로 옭아 메며 그 윗선까지 겨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권특혜와 오일가스 할당특혜 문제가 핵심인 이 사건은 재판이 진행되면서 무관한 척 큰소리 치던 국회 해당 분과위원들에게 그 불똥이 튀고 있는 양상이다.
 
국가적인 재앙이었던 ‘말라리’ 사건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아 권력핵심부의 교체를 가져 오게 된다. 무소불위의 직책이었던 국가치안질서회복사령부(KOPKAMTIB) 사령관이던 수미뜨로 장군은 물론, 그와 대립하였던 대통령 정치특보, 알리 무르또뽀 장군까지 모두 퇴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수도모 제독은 수미뜨로 장군의 업무를 즉각 인계 받았으며, 유엔대표부 부대표로 있던 요가 수고모 장군이 근무지인 뉴욕을 떠나 국가정보원장 자리를 수임하기 위해 이틀 후에 부랴부랴 귀국하였고, 주한 총영사이던 베니 무르다니 준장도 호출통보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이태원의 관저를 떠나 자카르타에 도착하자마자 대통령궁으로 직행하여 귀국보고를 올리게 된다. 이와 같이 ‘신군부 트리오’의 등장으로 인해 1970~1980년대 인도네시아 정치지도는 다시 그려지게 되며, 수하르또의 32년 장기집권의 튼튼한 버팀목이 된다. 특히 베니 장군은 이후 인도네시아 모든 정보조직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며, 군부의 정상에 올라 대권의지까지 내보였으나, 종교적인 장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지한파 장군으로서 한국-인도네시아 우호증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아주게 된다. “베니 장군을 빼고는 ‘한인발전사’를 논할 수 없다.” 라고 일갈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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