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가정교육, 비결 아닌 비결을 찾아서
본문
서예가 손인식의 경영 탐문 15
# 스리랑카, 콜롬비아 그리고 인도네시아
# 자녀 셋 모두 인도네시아 초등학교 졸업
# 가정교육, 유대인과 한국인 차이
# 부러움에도 자격이 필요해
# 가르치고 배움은 유형이 없는 것
용기와 지혜 그리고 믿음, 김현숙 여사의 가정교육
다윗, 모세, 사도 바울, 삼손, 솔로몬, 예수 그리스도, 모두 성서 속 인물로 유대인들이다. 철학자 헤겔, 전 미 공군참모총장 노턴 슈워츠, 살 떨리는 연기의 소유자 더스틴 호프만,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미국 정치의 한 맥을 쌓은 헨리 키신저, 1993년 아역 배우로 출발 지금까지 세계를 홀리는 스칼렛 요한슨 또한 모두 유대인이다. 역사 속이나 작금도 마찬가지다. 각계에 이름만 들추면 알만한 유명인 중 유대인이 즐비하다.
전 세계 인구 중 유대인 비율 약 2%,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 23%가 유대인, 세계 금융 산업 중심부 곳곳에 포진, 세계 영화산업과 방송, 신문 등 언론의 중심에서 다수가 핵심 역할, 미국 아이비리그 학생 30%가 유대인 후손. 이렇게 세계를 뒤흔드는 유대인들의 저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유대인을 연구한 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교육’이다. 그리고 거기에 반드시 하나 더 붙는 단어가 ‘가정’이다. 그러니까 유대인 성공의 핵심은 가정교육이다.
한국, 스리랑카, 콜롬비아 그리고 인도네시아
김현숙 여사(61), 그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서쪽 수까부미에 사는 가정주부다. 자녀가 셋, 딸 둘에 아들 하나다. 그녀의 가정교육, 그를 아는 사람 모두 그녀의 가정교육에 특별함이 있다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결혼식을 1986년 스리랑카에서 했어요. 친척 소개로 만난 남편의 근무 사정이 한국에서 식을 올릴 틈을 주지 않았지요. 첫째 아이는 스리랑카, 둘째는 한국, 셋째는 인도네시아에서 출생했습니다. 한국에서 둘째 출생 뒤 다시 콜롬비아로 갔었고, 92년 인도네시아에 정착했습니다. 아이들이 초 · 중 · 고를 모두 인도네시아에서 마쳤고요.”
결혼 당시 그의 부군은 유엔 세계식량농업기구 FAO 컨설터였다. FAO는 각국 국민의 영양과 생활 향상, 식량과 농산물 생산 · 분배 개선 등의 목적으로 활동하는 국제기구다. 개발도상국에서 식량과 농산물 생산 및 분배, 그리고 능률증진을 돕는다. 그러니까 그의 부군은 세계 각지 현장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2,000명의 FAO 스태프 중 한 사람이었다. 부부가 보람찬 10년 유랑을 마치고 정착한 곳이 지금 사는 곳 수까부미.
▲ 스리랑카에서 신혼 시절
▲ 콜롬비아에서 두 딸
▲ 인도네시아에서 출생한 남동생을 안고 즐거워 하는 두 딸
“세 아이 모두 초등학교는 인도네시아 현지 학교를 졸업했어요. 집 근처 학교죠.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부부에겐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고요. 아이들도 현지 학교에 관해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어요. 물론 학교가 낙후하죠. 주위에서는 현지 학교에 보내면 아이 바보 만든다고 만류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처음 교실을 보고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어요. 교실 꾸미기가 온통 폐품 활용이었는데 그게 신기했거든요.”
그는 거기서 교사와 아이들의 창의력을 봤다. 형편에 따른 자립심이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악기를 갖추지 못한 가난한 학교에서 두들기면 소리가 나는 물건들을 가져다 놓고 신나게 음악놀이 하는 것을 보면서 "재밌겠다"고 읊조렸다.
“현지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싫어할까 염려스러웠어요. 서로 차별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 될 수 있으면 새 옷을 사주지 않았어요. 다만 깨끗하게 빨아서 입혔지요. 좋은 물건도 마찬가지예요. 물건 아껴 쓰기와 헌 물건 손질해서 쓰는 것은 항상 시범을 보였습니다. 물론 때마다 설득도 필요했어요.”
부부는 1998년 IMF 때 작은 식품회사를 설립했다. 수까부미에 땅을 마련하여 농사짓기가 그 시작이었다. 부군의 직장이 IMF를 호되게 겪고 난 뒤 독립한 터라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음 안에 성공을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 고추 세우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 인도네시아 정착 후 뽕나무 농장을 배경으로
▲ 수까부미 인근 쁠라부안라뚜 노천 온천에서 즐거운 두 딸
▲ 인도네시아 일반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장녀 유승주 양
확고한 신념, 초등과정은 일반 현지 학교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진 현지 학교에 관해 선입견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수학능력이 부족하다고 들었었거든요. 제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아이 셋을 입학시켜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정해진 수업에 철저하더군요. 학기별 시험도 매우 효율적이었고요. 과목별 노트에 교사들의 평가 기록도 상세하고 철두철미해서 참 좋았습니다. 특히 막내 승일이가 학교 다닐 때 느낀 건데요 수학 영역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어요.
”학교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니 아이들과 대화도 소신이 분명해졌다. 아이들의 학교활동도 활발했다. 큰딸은 외국인임에도 학교 국기 게양식을 도맡았다. 학교 기부금이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주변을 돕는 일도 늘 앞장섰다. 기부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잇고 있다. 과외공부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시킬 데도 없었다. 오직 대화가 무기였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임을 대화로 깨닫게 했다. 작은 문제라도 혼자 고민하지 않도록 세심히 살폈다. 혹 자존심에 상처 입는 일이 생길까 염려를 놓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설득했다.
“막내아들 승일이가 학교에 들어간 뒤 신경이 더 많이 쓰였어요. 남자애잖아요. 항상 당당하되 남을 배려하라고 신신당부했죠. 그런데 사건이 일어났어요. 승일이를 종종 괴롭히던 학생이 있었나 봐요. 폭력까지 행사하니까 참지 못했나 봅니다. 몇 대 때렸나 봐요. 학교에 불려갔죠. 담임선생님과 그 학생에게 먼저 사과했어요. 다만 상대방이 먼저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생긴 일이니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자고 말했죠. 결론이 뻔했죠. 사과를 받았습니다. 모든 한국인이 그렇게 갚는 기질이니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도 했어요^~^.”
다행히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전화위복 막내아들 승일이에게 현지인 친구들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차례로 한국국제학교(JIKS)로 진학했다. 학제가 달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6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그런데 학교가 너무 멀었다. 약 100여km 거리에 수시 체증으로 소요 시간조차 측정이 어려웠다.
“편입 초기 큰 아이는 그 먼 거리를 군말 없이 통학했어요. 그것도 농장에서 쓰는 트럭을 타고요. 교문에 당도해 트럭에서 내릴 때 참 많이 불편했을 겁니다. 아이들의 수군거림도 그렇거니와 어떤 선생님은 가정형편에 대해 심각하게 물으시더래요. 그러나 큰 아이는 이미 그런 것에 저보다 더 의연했어요^~^”
날마다 먼 길을 오가게 할 수 없었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큰딸의 자취가 시작됐다. 본가를 지켜야 하는 김현숙 여사는 일주일에 한 번 가서 둘러보고 음식을 좀 만들어 주는 정도였다. 2년 뒤 둘째 딸이 자취에 합류했고 나중에는 막내아들 또한 그 대열에 섰다.
“아이들이 스스로 해쳐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해줬어요. 어쨌든 초등 과정을 일반 현지 학교를 마친 거잖아요? 하지만 셋 다 한국국제학교 시스템에 금방 적응했어요. 한국 친구가 많이 생기니 다들 좋았나 봐요. 제가 하는 일이란 학교 공부나 친구 등 어떤 이야기라도 싫은 내색 없이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었어요. 저는 저대로 이야기 듣는 것이 재밌었죠. 단 성적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어요. 스스로 알아서들 할테니 묻지 말래요. 그래서 시험 결과도 묻지 않았죠. 다만 한국으로 대학진학을 앞두고 일부 과목 학원 공부를 원해 그도 알아서 선택하도록 했지요.”
▲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을 갖춰 입은 가족
무관심과 관심 사이
자녀교육, 한국인의 자녀교육에 관한 열의는 이미 알려진 바다. 열의에 관한한 서두에 언급한 유대인을 능가할 정도다. 다만 살펴볼 때 방법과 과정에서 다소 차이가 드러난다. 우선 가정에서의 대화와 토론 방식이 다르다. 시험 점수나 등위에 대한 대처도 다르다. 이 부분 요즘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방법과 질에서 차이가 있다.
예컨대 한국인은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조용한 것이 미덕이다. 이는 전통이요 문화다. 유대인들은 아니다. 밥상머리가 시끄럽다. 밥알이 입에서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토론을 한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밥상을 물리고 토론을 이어간다. 상대가 어린이일지라도 의견을 존중한다. 토론 중이라면 어린이가 어른 말에 토를 다는 것쯤은 예사다. 어머니는 모든 일상에서, 아버지는 밥상과 베갯머리의 토론 담당이다. 물론 체벌이란 없다. 무엇이 더 나은가는 논란의 대상일 수 있다. 다만 사회적 결과가 서두의 통계처럼 다르니 유대인의 가정교육을 들추는 것이다.
김현숙 여사는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과연 녹음이 될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들려주는 내용은 마음을 쿵쿵 크게 울렸다. 과연 한국의 어머니다 싶다가 이런 뚝심을 지닌 어머니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는 분명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다. 유대인 자녀교육의 장점을 능가하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한국 어머니.
“둘째의 중학교 때 꿈이 일 년 정도 단기 유학이었어요. 가라고 했지요. 대신 스스로 찾아서 가라고 했어요. 영어공부에 열중이더니 EF 어학원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방법을 찾아냈어요. 당당히 시험에 합격했는데 학비나 기숙사비 포함 조건도 매우 좋았지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제가 맞는 호주로 떠났어요.”
중학교를 갓 졸업한 여학생, 낯선 타국에서 겪을 어려움이란 안 봐도 짐작되는 상황이다. 더구나 언어도 아직 불완전한 상태 아닌가. 그러나 도착 때부터 돌출한 난관 어느 것 하나 부모에게 하소연하지 않고 혼자 해결했다. 스스로 성적을 향상하지 못하면 자퇴를 하겠다는 각서를 교장 선생님 앞에서 쓰면서도 혼자 다 감내했다. 꿈도 영어로 꿀 정도로 노력을 거듭했다 했다. 그리고 일 년, 그사이 받은 상이 열 손가락 꼽기로 모자랐다. 정한 기간을 마칠 즈음 학교는 그에게 로칼 십을 부여했다.
“처음 약속대로 돌아 오너라.”
호주에 더 머물러 공부하고 싶어 하는 딸에게 내린 아빠의 결론이었다.
큰딸은 지금 서른두 살이다. 어려서부터 발레를 좋아해 서울대학교에서 무용과 경영학을 아울러 전공했다. 사위는 서울공대 출신으로 이미 창업한 전도유망한 사업가다. 공부를 즐기는 둘째 딸은 서울대 박사 후 과정으로 미국 하버드 의대 대학원에서 연구 중이다. 연구 관련 몇 가지 특허도 취득했다. 역시 서울대에서 맺은 인연과 백년 가약을 맺었다. 둘째 사위는 존스홉킨스 대학을 졸업하고 코넬대를 거쳐 서울대에서 박사를 품었다. ‘한국을 빛낸 사람들’에 세 번이나 선정된 그는 현재 존스홉킨스 의대 박사 후 과정 중이다.
“딸의 연구소는 의대 대학원에 속하지만 이공계열의 연구라고 해요. 암튼 첨단 의학 부분 연구인데 자세히 이야기 안 해요. 제가 잘 이해도 못 할 것이거니와 엄마가 여기저기 자랑한다고 자세히 밝히려 들지 않아요^~^ 자랑스런 한국인에 두 번 선정된 것은 주변에서도 알지요. 막내아들 승일이도 아직 공부 중입니다. 군 전역을 하고 한양공대에 복학했어요.”
부러움에도 필요한 자격
세 자녀는 어려서부터 매년 1월 1일이면 치르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모든 목표를 스스로 정해 기록하는 일이다. 물론 전년에 정한 약속은 얼마나 이루고 지켰는지 스스로 밝히는 것이 먼저다. 대학에 진학할 때면 아이들과 원칙을 정했다. 입학금은 주지만 학비는 졸업 후 갚기로 했다. 다만 장학금을 받으면 학비를 갚지 않아도 되거니와 그 장학금으로 땅을 사 후에 돌려주기로 했다.
“두 아이들 결혼 할 때 돈이 따로 들지 않았어요. 땅 값이 많이 오른 덕을 봤지요^~^. 형편이 안 좋을 때 아이들이 스스로 한 부분이 참 많아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부럽다. 그러나 부러워할 자격도 미달이지 싶다. 그처럼 현명하게 자녀를 교육하지 못했으므로. 자녀를 향해 그렇게 대범하지 못했으므로.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별로 없으므로. 김현숙 여사의 가정교육은 분명 아무나 실천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흔치 않은 실제다. 따라서 필자는 이 이야기를 가급적 많은 사람이 공유하기를 바란다. 특히 자녀가 학생인 부모 모두 김현숙 여사의 가정교육을 깊이 음미하고 참고했으면 좋겠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여러 경로로 이 부부에 관해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이번 프로젝트 기획 단계부터 이 부부 이야기는 꼭 쓸 것이라 마음 먹었다. 글 세 편을 올린 뒤다. 무려 네 시간여 먼 길을 더듬어 찾아갔다. 이웃 부부도 함께였다. 환대였다. 식사와 차, 한 잔 술자리까지 부부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인터뷰는 일언지하 사양이었다. 하마터면 그 사양의 미덕을 얌전히 존중할 뻔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간 알아온 부부에 관한 정보 그 이상을 눈과 귀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프로젝트 <경영 탐문>은 인도네시아 한국인의 귀한 성과와 지혜를 모으고 나누는 것이 목적 아닌가.
놓친 기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움이 더하는 법. 하여 살려낼 수만 있다면 되살려야 하는 것. 궁리 끝에 방향을 바꿨다. 가치 높은 부부 이야기에서 범상치 않은 자녀교육 이야기로. 세 아이 모두 현지학교를 보냈다는 소식, 우수한 성적과 좋은 품성, 일류대학 졸업 등 몇 가지가 다 크게 호기심을 끌지 않는가. 세 자녀를 지도했던 한국국제학교 교사 몇 분의 귀띔도 한몫을 했다.
만난 지 한 달여에 부부를 초청했다. 필자 일행이 그집을 방문 시 후한 대접을 받았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다시 대시했다. 부부를 다른 장소에 격리(?)해 부인을 설득했다. 이웃 지인이 나서서 적극 거들었다. 그로부터 무려 두 달여, 몇 번 갈림길을 오갔다. 그리고 드디어 이틀 전 오래 묵은 사진들을 받았다. 각설, 귀감 넘치는 이야기 내 것처럼 독자들 앞에 내놓을 수 있음에 얼마나 기쁜지. 김현숙 여사와 그 부군께 감사한 마음 크다.
가르치고 배움에는 정해진 유형이 없어
존경하는 인물로 시아버지 일초 유병철 옹을 꼽은 김현숙 여사, 일초 옹께서는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교육자시다. 2003년 8순 기념 시집(漢詩)을 발간한 시인이시다. 옹께서 그의 시집에 “효심이 지극한 자부”로 기록한 김 여사께서는 이미 알려진 유명인이다. 출중한 테니스 실력으로 2011년 92회 전국체전 해외동포 테니스 종목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때문이다. 그 후 동메달 세 번, 2016년엔 다시 은메달로 시상대에 올랐다.
“테니스는 스리랑카에 살 때 익혔습니다. 집 앞 호텔에 코트가 있었거든요.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시간이 날 때면 꾸준히 연마했고요. 작년부터 경기엔 안 나서고 있지만, 동호인들과 부부동반 게임은 늘 즐깁니다.”
▲ 2016년 전국체전 해외동포 테니스 종목 은메달을 수상하는 김현숙 여사(뒷줄 왼쪽)
▲ 전국체전 해외동포 테니스 종목에서 김현숙 여사가 거둔 상장과 메달
그는 테니스만 치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테니스장에서 공 줍는 일로 돈을 버는 아이들의 학비를 다 댔다. 어찌 내 자식만 가르치랴 싶어 집의 기사나 가사 도우미도 공부를 원하면 다 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성실하게 공부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면 반드시 좋은 곳에 취직을 시켰다.
“수까부미 사람 다 됐어요. 현지 이웃들도 스스럼없이 주민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저희는 한국 사람입니다. 현지 이웃들에게는 한국인 대표 아닌 대표죠. 더불어 열심히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 敎學無類 知行一致 必成(교학무류 지행일치 필성)
가르치고 배움은 일정한 유형이 없나니,
처한 상황 따라 앎과 행동이 일치하면 반드시 목적한 바를 이루리라.
이천십 또 팔 무술년 곡우지절 산나루 주인 인재 손인식 작
한국인의 가정교육 과연 무엇이 비결일까? 어떻게 하면 한국인 후손들이 지닌 능력과 기질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후손들이 국가와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할까? 오늘 김현숙 여사 부부의 용기와 지혜를 통해 하나의 길을 더듬어 봤다. 배울 것은 배우고 가르칠 것은 가르치자. 그리고 자신과 자녀를 믿자.
가르치고 배움에는 정해진 유형이 없다. 처한 상황에 따라 앎과 행동을 일치시키면, 반드시 목적한 바를 이루리니 …….
※ 이 프로젝트는 <자카르타 경제신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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