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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 창비)

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일2017-02-24

본문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병을 비우고 과자 한봉지와 페트 소주와 생수를 사가지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영경은 큰 소리로 외치며 걸었다.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은 모텔 입구에 멈춰 섰다.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갑자기 수환이 보고 싶었다. 오후에 면회 온 영선과 영미 생각도 났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 영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촛불 모양의 흰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울면서도 자신이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조절장애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는 그녀의 모든 신체작 감정적 반응들이 거짓이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NOTE
 
   돌이켜 보면 20대에 저질렀던 많은 실수와 엉뚱한 용기와 사랑이라고 믿었던 치기어린 감정들은 늘 ‘술’과 함께 기억된다. 문예창작과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시를 쓴다고, 소설이 잘 안 풀린다고, 혹은 이 시대에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한탄하느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던 거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보기는 한다. 술을 마시고서야 간신히 사람들 앞에서 나를 조금 열어보이거나 어제 읽었던 시를 낭독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참 찌질하고 부끄럼 많았던 나의 스물. 그러나 나는 무엇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 모든 것들이 조금도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지레 짐작해 버리고 말았던 것일까…?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를 읽으면서, 심지어 주정뱅이로 살기를 꿈 꾸기도 했던 나의 철없던 20대를 잠시 떠올렸다. 지금의 나는 맥주 두 잔이면 벌써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는 저질 체력의 소유자가 되어버렸지만, 권여선은 공공연히 스스로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밝힐 만큼 문단의 소문난 애주가란다. 그렇기에 깡마르고 홀죽한 볼살을 가진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술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소설집으로 펴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소설가이지만 마치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기묘한 친밀함을 가지고 있었던 듯 느꼈다. 
 
   소설은 서늘하고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비극적 기품이 담긴 글이라고 평했다. 과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고서야 가까스로 제 몫의 삶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 지나가버린 삶의 어느 순간에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나도 모르게 벌어졌고, 그 모든 기억과 이후의 현실들을 술을 마시며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일곱 명의 주인공들이 술병을 들고 가슴을 뜯으며 제 이야기를 하느라 울고 서 있었다.
 
    전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아이를 빼앗기고 술을 마시며 그 고통을 견디다가 결국 교사로 일하던 학교에서 조차 쫒겨나다시피 나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봄밤>>의 영경. 그녀는 늘 술에 취한 채 김수영의 시 <봄밤>을 소리쳐 외우는 것으로 아이의 부재를 잊는다. 그리고 어느 날 스무살에 쇳일을 시작해 서른셋에 사업을 일으켜 큰 돈을 벌지만 친구의 배신으로 부도를 맞고 아내에게 버림받는 수환이 그녀의 삶에 들어온다. 그는 신용불량자에 노숙자 신세가 된 적도 있었던, 지독히도 불행한 사람이었다. 각자 친구의 결혼식 하객으로 만난 두 사람. 역시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영경을 주시하던 수환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는다. 수환이 영경을 업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아직도 이런 행운의 몫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둘은 동거를 시작하지만, 곧 수환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 둘은 같은 요양원에서 각자 다른 방에 거주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닥쳐 올 마지막을 준비한다. 알코올 금단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요양원을 나가 몇날 며칠씩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영경과 그런 그녀가 편히 술을 마시고 오도록 웃으며 보내주는 수환. 두 사람의 봄밤은 아프고 쓰리다.
 
마지막에 내몰려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살아갈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한다. 삶의 가장 밑바닥을 맨몸으로 뒹굴며 사랑을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읽어나가다 수환의 죽음 앞에 다다르자 급기야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졌다. 모두가 삶에 찌들대로 찌들고 지칠대로 지쳐 있는데, 사랑 앞에서 그들은 아름답고 슬프고 치열하고 숭고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수환에게 톨스토이를 읽어준 뒤 웃으며 혼자 술을 마시러 요양원을 나서는 영경을 보며,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의 삶에 위안이 되어야 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서로의 상처와 결핍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다. 권여선은 편편마다 목울음이 차오르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독자들을 기어이 술 마시게 만든다. 영경이 술에 취해 울며 읊는 김수영의 <봄밤>을 꺼내 읽으며 나도 며칠 앓았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책을 덮고 혼자 울고 있을지 모를 세상의 모든 영경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안녕, 주정뱅이.
 
봄밤
             시/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 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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