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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단 하나의 질문 /하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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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2-02-25 11:07 조회 14,66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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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199 >
 
단 하나의 질문
 
하승창/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내가 사는 집 건너편 길모퉁이에는 빈 저택이 한 채 있습니다. 비바람에 퇴색한 외벽은 군데군데 금이 가고, 잎이 우거진 나무들과 제멋대로 자란 잡초가 마당을 둘러싼 담장 사이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집이지요. 나는 그 곳에 불이 켜져 있거나 사람이 나드는 모습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버려진 집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발코니의 낡은 천장이 내려앉거나 갈라진 페인트 껍질이 뭉텅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면 며칠 후에는 어김없이 손질이 되어 있으니까요.
 
어느날, 묵직한 구름이 내리깔린 오후에 나는 그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기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고 해야할까요. 낡은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이층 창문에는 불이 켜진데다 창 너머 누군가 나를 부르듯 손짓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동안 망설이던 나는 홀린 듯 대문을 들어섰고, 울창하게 가지를 펼친 망고나무와 꽃나무들 아래 무성한 잔디에 덮인 징검돌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지요.
 
 
비가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점점 흐려졌습니다. 이미 어둑해진 저택의 괴괴한 정적이 나를 잠깐 머뭇거리게 했지만, 위층 복도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불빛을 따라나는 마치 등불에 끌리는 나방처럼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그 방은 서재를 겸한 응접실로 쓰이는 듯 고풍스러운 느낌의 원목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고, 안쪽에 놓인 널찍한 책상에는 한 노인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리 와 한 잔 들지." 노인이 말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친근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끌려 다가서던 나는 그가 얼굴을 돌린 순간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아니, 아버지가 왜 여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노인의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뜯어보았습니다. 단정히 빗어넘긴 백발, 구레나룻을 타고 이어지는 소박한 턱수염. 분명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긴해도 정말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지요.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노인은 유리잔에 럼주를 남실남실 따르더니 능숙한 솜씨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어르신, 그걸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하고 물었지만 노인은 슬쩍 미소만 지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머쓱하여 "그냥 궁금해서요. 전에 쿠바에 배낭여행 갔을 때 어느 민박집 주인이 그렇게 만들어 주더라구요." 하고 말하니, 노인은 쉼없이 손을 놀리며"트리니다드에 있는 민박집?" 하고 묻길래 나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죠. 그 주인 말씀이, 원래 맛있는 모히또는..." 말하는데 노인이 끼어들어, "레시피가 심플하다고 했지." 하며 나에게 잔을 건넸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추억의 칵테일에 정신이 팔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쭉 잔을 들이켰지요.
 
정체모를 위화감이 내 몸을 휩싼 것은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던 순간이었습니다. 모히또에서 상쾌한 향과 새콤달콤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 방금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이 너무나 기묘했던 것이지요. '희한하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내 표정이 재미있는지 장난기를 듬뿍 머금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싱글거리던 노인이 마침내 왼팔 소매를 걷어올리며 말했습니다. "아직 모르겠나?" 그리고 그 팔뚝에 드러난 흉터를 본 나는 "어? 저도..." 하다가 그만 아찔하여 머릿속이 텅 비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자, 깊은 광채를 담은 노인의 눈동자에 촉촉이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나의 온몸이 확 달아오르며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더니, 그만 왈칵 넘치는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르신...아니, 너는..." 입을 열자 순식간에 눈물이 볼에 굴러떨어졌습니다. "잘도, 이렇게..."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목이 꽉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웃었습니다. 웃으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건네주는 쪽빛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나는 그제야 슬며시 왼손으로 오른손 검지를 감싸쥐어 뒤로 꺾어보았지요. 그리고 부드럽게 휘어져 팔뚝에 닿은 검지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꿈은 자각된 순간 붕괴하기 시작하니까요. 갑자기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번갯불이 하늘을 째더니, 사방의 창문들이 벌컥 열리며 거센 비바람이 방안에 몰아쳤습니다. 창밖으로 쓸려나가는 손수건을 잡으려 황망히 손을 내뻗는 나에게 그가 말했습니다. "그냥 놔 두게. 원래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이유는..." 내가 끼어들었습니다. "빌려주기 위해서지."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웃었습니다. 그러자 한없는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건만 준비 없이 만난 그 사람과는 이제 기약없는 이별을 해야 하니까요.
 
"나는 단 하나의 질문에만 대답할 수 있네. 그것이 오늘 너를 만나러 오기 위한 조건이었지. 무엇이든 물어보게." 그가 말했습니다. '고작 하나의 질문이라니, 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데...'헤매고 있는 나를 재촉하듯 집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서가에 꽂힌 책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했습니다. '이번 주 로또 번호는 뭔가? 00전자 주가는 얼마까지 갔나? 뭘 해야 큰 돈을 벌지?'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습니다. 진실로 아이를 아끼는 어른이라면 이런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을테니까요. '아내와 아이들은 건강한가?팬데믹은 언제 끝나지?' 하고 물어볼까, 아니면 쿨한 척 '밥은 먹고다니냐? 그 머리는, 심은건가?' 하고 농담을 해볼까, 망설이는 사이 어느덧 사방의 벽이 넘어가고 천장은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나?" 마침내 내가 물었습니다. 이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었을까요? 그는 빙그레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게. 하루에 충실하게 살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이제 그의 모습은 아득히 흐려지고, 뿌연 안개가 눈앞에 번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렸습니다."그리고 매 순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 하게." 그것이 내가 들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아쉬움으로 눈을 떠보니 창문을 덮은 커튼에 엷은 아침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젖은 베갯잇을 벗겨 욕실에 던져 놓고 옷을 갈아입은 후 길을 나섰습니다. 왠지 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지요. 그리고 그 집 앞에 나는 다시 섰습니다. 대문은 잠겼고, 창문들도 굳게 닫혀 있었으며 빛바랜 담벼락도 나무들도 그대로였습니다.
 
맑게 갠 하늘 아래 한 떼의 참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며 지붕에 날아들었고 높이 솟은 종려나무가지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쪽빛헝겊 조각 하나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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