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ear Indonesia

Page 1

My Dea r I ndones ia


52

04

사공경

2019, 나는 나의 페이지다

· 외로울 때 나는 해양 박물관에 간다

- 지난 호를 자축하는 짧은 서평

·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 발리를 키운 것은 팔할이 예술이었다

· 나는 나의 페이지다

- 자연과 종교와 예술혼의 합작품, 발리

- 자축의 말을 엮다

· 예술의 전당, 뚜구 꾼스뜨끄링 빨레이스

· 작품 하나에 생각 하나

08 김현숙

32

70 이강현

박정자

· 커피 몇잔

· 쿠키를 추억하다

· 바오밥나무 편견

· 트라우마

· 별이 되는 마을

· 위험한 봄 covid19

· 코로나19, October 2020

· 나무 깜보자꽃을 매일 떨구는

· 시절

18

· 영화 속 대사 하나가 · 섬 마타하리

노경래

40

· 자카르타 그리고 전염병

배동선

· 바오밥 나무와 나시고렝

·꿈

· 무대를 잃어버린 예술, 온델온델

· 파자르 부스토미와 부야 함카

· 플라타너스

· 백골의 향연 · 수라바야 전투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 4호

MY DEAR INDONESIA 발행일 l 2020년 12월 30일 펴낸곳 l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기획 l 김현숙, 조현영, 채인숙 글 l 김현숙, 노경래, 박정자, 배동선, 사공경, 이강현, 이동균, 이혜자, 조연숙, 조은아, 조인정, 조현영, 채인숙, 최장오, 홍윤경 사진 l 조현영 외 표지 그림 · 편집디자인 l 김영민 ©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하며, 이 책의 전부 또는 일부 내용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MY DEAR INDONESIA 02


106 조은아 · 보고르를 떠나며 · 한국의 가을이 그립다면 보고르로 떠나자 · 열일곱 소녀의 도전

118

136 채인숙 · 그린란드상어 · 아홉 개의 힌두사원으로 가는 숲 · 바뉴왕이의 무인도 · 밤의 항구 -순다2 · 다음 생의 운세

조인정

78 이동균

· 자카르타에서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보낸 7개월 ·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자카르타 슬럼에서 만난 아이들, 나 그리고 우리들의 꿈.

· 추억 ·길 · COVID-19 팬데믹 상황에 대한 단견

84 이혜자 · 자가격리 14일의 기록과 단상들 · 코로나19가 앗아간 2020년 봄 · 코로나19 극복 프로젝트 - 집에서 할 수있는 것들 공유하기

·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를 기원하는 새해 맞이 음식 우리의 떡국 ·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미술

128 조현영 · 인도네시아에서 살아남기 - 나만의 인니 연관 검색어

· 사적(私的)인 편지 - 인니에서 나고 자라서 떠나갈 나의 딸에게

· 잘 지내냐는 인사에

144 최장오 · 마음이란 게 · 맹그로브 숲에 가면 발가벗은 너를 만날 수 있다 · 실크로드 · 대나무 숲에서

154 홍윤경 · 무제 · 피아노 치는 남자

98 조연숙 · 신세 고와 한인2세 그리고 코로나19 ·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운 벽 · “사람이 책이다”

03 MY DEAR INDONESIA


2019, 나는 나의 페이지다

- 지난 호를 자축하는 짧은 서평

나는 나의 페이지다 - 자축의 말을 엮다

/ 박정자

한 자 한 자 적은 글을 지우고 또다시 지우게 되는 것은 글 쓰는 것만이 살아있음과 희망임을 증명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움, 아쉬움, 그리고 또 1년이라는 시간의 기억을 딛고 자라고 싶은 욕망으로 나를 토해내는 것이다 열망은 다 어디로 갔는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 되뇌며 나와 이웃을 더욱 격려하며 진화해가는 인작 4년차를 기대해본다 인니와 한국의 경계에 사는 주변인, 디아스포라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인생에 남을 한 페이지를 의미 있게 장식하길 고대해본다 짧은 파장 같은 삶, 무엇인가 정리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인작은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다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다 담담하고 심심하고 느슨한 연대 안에서 그렇게 인작이라는 시간이 쌓인다 배울 것 많고 부족한 도강생으로 숟가락 하나만 얹고 가지만 우리는 안다 서로 옆구리 따땃하게 지져줄 아랫목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살다가 문득 등불처럼 가슴을 환하게 밝히는 얘기들이라는 것을 촉수뱀을 꿈꾸며! 여전히 부끄럽지만 아무튼 자축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페이지이다

MY DEAR INDONESIA 04


작품 하나에 생각 하나,

- 김성석; 인니의 중앙은행 설립과 경제적 독립에 대한 글을 읽으며, 아직도 인니 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런 걸 묻는 사람이 있음을 떠올렸다. 그 런 오해는 혼란했던 통화체계와 외국자본 몰수의 과정을 겪었던 사회적 상처와 후유증 때문이라는 걸 알게 해 준 글이었다. - 김순정; 정치인과 출판, 국민과 독자에게 어필해야 하는 단 한 권의 책을 생각 한다. 작년말경 우리나라도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줄을 이었다. 정책이 아닌 정략의 책들은 위안을 주는 악기가 아니라 혼란을 부추기는 무기라 는 생각. 조꼬위 대통령 책에 한국대통령 사진이 누락되어 가장 아쉬웠다는 필자 의 말에 슬쩍 공감해본다. - 김의용; 도시 자카르타에 대한 지식과 시선에 놀라며 반하며 읽었다. 예를 들면 ‘다양한 색체의 알약이 수놓인 이 도시, 2019년 현재 인구 1000만의 도시에서도 광장은 외롭다’, ‘자카르타에는 다양한 켜들이 공존한다. 그래서 종종 길을 잃기 쉽다’ 이런 감성... 그의 건축 설계에는 분명 이런 감성들이 배어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사람의 향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 김현숙; <전철 안 도토리>가 영상처럼 흐르는 돌발의 유쾌함이라면 <아데니움, 그 사랑이야기>는 첫사랑의 기억과 꽃의 기억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놓은 가슴 저 린 고백, 사유와 회귀를 요구하는 시였다. 회화처럼, 음악처럼 떠오르는 시편들의 행간에서 김현숙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빛깔을 감지해본다. 그가 가장 좋아하 는 색은 초록색일까?

05 박정자


2019, 나는 나의 페이지다

- 지난 호를 자축하는 짧은 서평

- 노경래; 별을 보다 코코넛나무를 보다 그러다 어느새 무뎌진 나를 보 는 필자의 마음이 이즈음 내 마음과 꼭 닮았다. ‘가끔 낯선 곳에 막 도착 한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기를 실천해본다’. 이런 공감이 문학과 사람 을 친근하게 맺어주고 꽉 막힌 마음에 숨길을 열어주고 몰랐던 길을 찾 아 나서게 하는 힘이려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에게는 문학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해본다. - 배동선; 대체 그의 잠재력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것일까. 그의 작품 을 대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생각이다. 단편소설은 물론 <연관검색 알고리즘>과 <우리들의 시간>, 술술 읽히면서도 술술 놓아 줄 수 없는 사 념에 갇히고 마는 아이러니. 한때 인도네시아 주술에 대한 수소문을 열 심히 하던 그는 아마도 자신의 글에 주술을 걸 수 있는 능력을 선물 받은 것인지? 물어보면 분명 모른다거나 그럴 리 없다고 답할 테지. - 사공경; 인니의 역사와 문화전도사 사공경 선생은 그 일이 천직인 사 람. 빤쪼란 티하우스와 브링인 나무에 대한 이번 글도 직간접으로 얽힌 세세한 역사와 축적된 지식에 근거한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것은 그가 시인이 기 때문일 게다. ‘피지 않고 스스로 열매 맺는 브링인이여, 인도네시아인 들이여’. 그는 시의 문장으로 글 전체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많다. - 이강현; 자신을 이슬람신자라고 고백하며 무슬림 최고의 명절인 르바 란의 의미를 알려준 <라마단>, 가족 간에도 간간히 드러나는 문화의 차 이를 극복하려는 진솔한 노력 <사바르>, 아버지 구순 잔치를 준비하는 아들의 성심을 편지글로 옮긴 <아버지> 등 세 편의 글에서 인도네시아에 서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그의 삶과 의지를 읽는다. 치열하다. 그런데 소박하다. 이것이 한평생 그를 이끈 동력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 이동균; ‘비는 자기가 생명을 다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내가 동갑내기 이동균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찔레와 깜보자를 좋아하 는 그의 취향도 취향이거니와 앞에 소개한 글처럼 생명의 순환을 읽는 혜안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삶에 대한 편견이 없다. 시 <내일>에 서도 그가 추구하는 삶의 담론이 잘 승화되어 있음을 본다.

MY DEAR INDONESIA 06


- 이혜자; <“이 세상에 좋아할 것이 이렇게 많다는 게 너무 근사하지 않나요”> 제 목에서부터 빨강머리 앤의 들뜬 어깨가 절로 떠올랐는데, 글의 서두를 읽으며, 이 름자 끝에 e가 들어간 앤(Anne)의 말투를 흉내내어 감탄해본다. “세상에! 연분홍 산사나무와 초록지붕에서 얻은 영감으로 테이블을 세팅한다는 거 너무 근사하지 않나요?” - 조연숙; 유효기간이 있으면 ‘만남’, 유효기간이 없으면 ‘인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히는 만남이 있고, 헤어지고도 오 래 기억되는 인연이 있는 듯하다. 인작은 내게 ‘참 좋은 인연’이라는 것, 2년 동안 떠나 있어보니 확실히 알겠다. 그런데 세 번째 글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참는 사 람>이 나를 찌른다. 이유는 노코멘트. - 조은아; 다르면서 같은 두 개의 글, 풍경을 화두로 했다는 점에서 같고, 가족을 담은 풍경과 자연을 담은 풍경이라는 점에서 다른 풍경의 글이다. 진솔한 자기반 성을 담고 있는 글은 필자에게나 독자에게 자기정화의 힘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글을 쓰고 읽는 이유일 터이다. 그리고 ‘글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지. - 조현영; <뒷담화>, 이렇게도 글을 쓸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 그리고, 사진을 더 사진답게, 문장을 더 문장답게 하는 사진과 글의 매력에 빠져든다. 조현영 작가의 펀치가 이리 날렵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업이 있었을까. 나는 믿는다. 거저 얻 어지는 것 없는 세상이기에 노력에는 꼭 그만한 보답이 따른다는 것을. - 채인숙; 촉수뱀이 부럽다는 진짜 글쟁이. 인도네시아에 대한 애정과 그 안에서 의 활동을 소개한 이번 글들은 마치 채인숙 시인의 자기사랑법처럼 읽힌다. 내가 아는 그는 성실함과 발랄함을 눌러 새기는 마차바퀴처럼 늘 길과 길을 이으며 길 위에 있다. 그의 자기사랑법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해서 더 좋아보인다. 응원한 다. - 최장오; 정갈한 외딴 마을의 빈집과 정겨운 고향집을 둘러보다가 마호가니의 꿈이 서린 인고의 곁을 서성이다가 주홍글씨의 반전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래! 브로모, 너 여전히 활화산이구나!!!

07 박정자


2020년 예기치 않은 상황이 우리 인류의 일상을 망 쳐놨지만 올해도 인작은 그 일상을 지켜냅니다. 이렇듯 흔들리지 않는 회원들의 열정으로, 내 마음엔 맑은 샘물이 흐르고 가슴은 아이처럼 콩콩 뜁니다. 참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입니다.

MY DEAR INDONESIA 08


김 현 숙 Kim Hyun Suk 제17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수상 PT.Pythonia Geulis Leather 대표

09 김현숙


시절

/ 김현숙

새들이 퍼덕일 때마다 꽃잎은 지고 바람이 펄럭일 때마다 꽃잎은 날린다

꽃은 한 번도 스스로 진 적이 없어 져야되는 때를 모르고 져야 다시 피어난다는 걸 모르고

가을이 질 때마다 소슬바람 잎새 하나 겨울이 올 때마다 찬서리 아픈 기억

긴 세월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아무도 마음에 들일 줄 모르고 붙잡아도 허무한 인연인 줄 모르고

(사진=김현숙)

MY DEAR INDONESIA 10


<시작노트> 깨달음은 늘 한 발자국씩 느리다. 몰입과 집착은 아픔을 오래 유지하고 견디게 한다. 깨달음 뒤에도 몰입을 떨쳐내느라 시간을 쓰고 집착에서 벗어나느라 투쟁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남이 되고, 네가 이방인이 된다면 깨달음은 온전히 내게 온 것이다.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는 희망은 아직 없다.

11 김현숙


쿠키를 추억하다

/ 김현숙

쿠키 하나 눈부신 하얀 햇살 반짝이는 비늘하나 허공을 난다 무중력을 거스르고 땅에 닿으려는 몸짓, 이내 저쪽 어딘가로 사라진다 티셔츠에 박힌 털 하나 올 사이로 빠져 (일러스트=최고나)

가슴 안쪽을 찌른다 오래 전 가룻(Garut),

쿠키 둘

오른발이 꺾인 채 절룩이며 내게 오던 아이 그 이상한 몸짓이 골동품이 된 편견을 부수고 오랫동안 열지 않은

서로 비껴가는 운명을 만났다 설렘은 짧고 그리움은 길어 가룻의 골목마다 서늘히 내리던 그늘

냉동고 속 모성애를 달구었다 사려는 덜하고 자카르타 찌네레(Cinere), 가룻의 아이와 똑닮은 너를

열정은 넘쳐 땅속에서 부글거리던 뜨거운 눈물

이산가족 상봉하듯 만나고 '가룻'하고 입술을 내밀면 에델바이스 군락을 싸고돌던 맑은 바람소리가 났다

MY DEAR INDONESIA 12

살다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 단 한 번 가본 곳이 고향이 되고 그토록 짧았던 인연이 자식처럼 가슴에 묻히는 일이


(사진=조현영/manzizak)

<시작노트> 가룻(Garut)이 종종 그리운 가장 큰이유는 나의 애견, 쿠키와의 인연을 맺 어준 곳이기 때문이리라. 네덜란드 강점기에 '자바의 스위스'로 불렸다던 명성답게, 단내 나는 서늘한 공기와 초록으로 덮인 경치가 사뭇 이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곳에 사는 지인의 강아지가 눈에 밟혀 자카르타 오자마 자 헤어진 가족을 수소문하듯 찾아나섰던 아이가 바로 쿠키였다. 3년이라 는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 전부였지만, 우리가족 모두 서로가 그와 더 특 별한 사이였음을 은근히 자랑하곤 한다. 그 후로 가끔씩 나조차 낯선 나를 발견한다. 단 한 번 가본 곳을 고향인양 그리워하거나, 잠깐 스친 인연을 가 슴에 묻고 아파하거나.

13 김현숙


<시작노트> 나이가 든다는 건 이별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다. 어느덧 부모님을 여읠 나이가 되고, 또 다가올 어느 순간엔 형제와 친구들을 보내는 시간이 오리라. 고향이 그리운 건, 그 곳에 그리운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들이 하나 둘 별처럼 지고, 점점 어두워져 가는 마을에 마음이 아프다. 머잖아 어둠 속으로 수몰되어 사라질 고향을 바라봐야 하는 일, 참 무섭다......

MY DEAR INDONESIA 14


별이 되는 마을

/ 김현숙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저녁이면 개들마저 더 소란하던 마을이

정다운 이들이 하나 둘

이제 집집마다 불 하나 켜면 되었다

별이 되어 떠났다

불 켜는 이 없는 집들은 더 이상 돌아올 이도 없게 되었다

함석집 할머니, 탱자나무집 아저씨,

등잔불 밝히다 일찍 잠든 마을처럼

고향을 떠나 살던 젊은이들이

밤은 까맣고

반딧불 같이 깜빡이다

끝내 돌아갈 곳 없을 절망감이

낯선 땅에서 지기도 여럿,

그 칠흑보다 꺼먼 어둠 속에 나를 고립시켰다

15 김현숙


코로나19, October 2020

/ 김현숙

2020, 삶과 죽음의 경계에 요단강은 없다

공포에 떨던 나는

운 나쁘면 칼날같은 선 위에서 휘적이다

머리가 허옇게 희어지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람을 극도로 피하며

저마다 시한폭탄 하나씩 마스크에 숨기고

하루에도 수 십번씩 세정제를 뿌려댄

뇌관을 제거할 백신을 기다린다

손등엔 알콜성 개기름이 번들거린다

번호가 매겨진 확진자와

처음 한 달은 코로나를 원망하다

개죽음이 된 사망자의 계기판을 보며

둘째 달은 코로나를 공부하다

황당한 봄이

셋째 달엔 코로나와 싸워 이길

너덜너덜한 여름이

투쟁심에 불타다

창백한 가을이 내 옆에 서 있다

지금은 고개 외로 꼬고 뉴노멀에 굴복하는 중......

MY DEAR INDONESIA 16


"얘야, 뭔 이런 세상이 다 있다니!" 팔순 노모의 한탄이 내 가슴에 머물다 아들 가슴에 꽂히는 건 차마 주면 안 될 걸 물려주기 때문이다 너무 미안하기 때문이다

<시작노트> 당황하고 허둥대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다, 우울한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보낸 8개월. 뉴스에 오르내리는 미래에 대한 온갖 추측과 억측에 생각을 얹어보고, 희망고문에 속아도 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앞이 더 묘연해지는 건,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 들었음이 분 명하다. 이제부터라도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비싸 고 번지르르한 것 말고 받아서 행복한 선물 말이다.

17 김현숙


벌써 7개월째 한국에 머물고 있다. 서울 생활에 제 법 익숙해져 좋아하는 커피숍이 생겼고 단골 선술 집도 생겼지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환경에 억지로 끼워 맞춰져 사는 느낌이다. 무언가 억울한 기분이 들고, 괜히 서운한 느낌도 든다. 그런 가운데서도 웹진이 다시 나온다니 올 한 해 유별나게 강했던 비 바람을 이겨내고 한 해 농사를 수확한다는 느낌이 다.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만 될 것 같 다. 조만간 자카르타행 비행기에 오를 날을 기대한 다.참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입니다.

MY DEAR INDONESIA 18


노 경 래 Noh Kyong Rae 인도네시아에서 12년째 거주 중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2017) 출간 수박 한철 장사하듯 광물 트레이딩으로 먹고 삼

19 노경래


자카르타 그리고 전염병 / 노경래

남부 자카르타에 있는 리뽀몰 끄망에 자주 들렀다가 그럴듯한 레스토랑들이 있 는 끄망 라야로 가곤 한다. 리뽀몰에서 끄망 라야로 가기 위해서는 차량 두 대가 교 행이 어려운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그 골목길을 지날 때 마다 느끼게 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참 무던하다고……. 그 골목길의 초입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 오르막길이다. 그런데 그 오르막길 에는 항상 하수구의 물이 넘쳐 흘러내리고 있다. 오르막길 위쪽의 하수구가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걷는 자는 이 시커먼 물을 신발 바닥 에 적시지 않고는 이 길을 오르내리지 못한다. 그 오르막길 중간은 한 뼘 정도 깊이로 가로로 길게 파헤쳐진 포트홀이 있는데, 이 포트홀에 하수구 물이 고여 작은 시궁창이 되어 있다. 이 길을 지나는 차나 오토 바이는 이 포트홀을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물론 이 오르막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차 나 오토바이 바퀴에서 물이 튀기지 않을까 긴장하며 지나간다. 이 포트홀 옆 길가에는 조그만 와룽(warung)이 있다. 이 와룽에서 포트홀 쪽으로 1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다. 이 자전거는 흙먼지를 뒤집어 쓰 고 있어 이게 진짜 자전거인지 조각가 뇨만 누아르따(Nyoman Nuarta)의 작품인지 헷 갈린다. 이 자전거를 그렇지 않아도 좁은 길에 떡하니 놓은 것은 지나가는 차나 오 토바이의 바퀴에서 시궁창 물이 튕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와룽 주인의 기발한 아

MY DEAR INDONESIA 20


자카르타 북부 루아르 바땅 지역 수상가옥 (사진=노경래)

이디어로 보인다. 두 사내가 허리를 쭉 펴기도 어 려운 낮은 높이의 비좁은 와룽 속 에서 물건을 판다. 봉지 커피나 여 러가지 스낵과자들이 주렁주렁 매 달려 있고, 네모난 유리 상자에는

토요타 벨파이어를 타고 이 길

나, 우리가 관심을 갖고 행동하지

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궁

않는다면 말라리아 같은 유행성 전

창 물이 자신들의 신발에 묻는 일

염병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카

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이 더러운

르타에서 또 발생될 것이다.

물이 묻은 차 바퀴를 자기 손으로 직접 세차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자카르타는 지난 400년 동 안 여러가지 전염병을 겪었다고 알

여러 종류의 담배가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이 시궁창 길을 매번

려져 있다. 예부터 자카르타는 국

시궁창이 흐르는 길 옆에서 담배나

걷는 사람이나 오토바이로 건너는

제도시로 외국인의 출입이 잦고,

과자를 파는 것을 보니 입에 풀칠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더구나 유럽인들이 거주를 시작하

이나 할 수 있을런지 의심이 들지 만 그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도 담 배를 물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 히 보고 있다.

뭔가 잘못된 것에 대해 항의하 거나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다. 싫 은 소리 하기 싫어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기대하는

번뜻하게 들어선 리뽀몰과 바로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인접한 이 와룽, 와룽 앞 길을 흐르

애써 그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화가

는 시궁창 물, 그 길을 조심스럽게

난다.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좀 예민하 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

게 됨에 따라 각종 전염병에 노출 이 되어 왔다. 그것보다도 자카르 타의 열악한 공중보건과 위생이 여 러가지 전염병을 불러왔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바타비 아를 점령한 이후 바타비아는 여러 차례 콜레라를 겪었다. 바타비아에 도시가 건설되고 인구가 늘어남에

21 노경래


따라 슬럼가가 생겨나고, 거주자들

격리되었다. 이삼십년 전에 이 섬

대의 진흙탕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강에 쓰레기를 버리자 콜레라가

에서 수백 개의 사람뼈가 발굴되었

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인도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콜레

는데, 이 사람뼈와 접촉한 한 발굴

네시아 고고학자인 짠드리안 앗따

라를 무기로 전쟁을 하기도 하였

요원이 최근에 문둥병 증세를 보였

히얏(Candrian Attahiyyat)에 따르면,

다.

다고 한다.

망그로브 숲을 거주지, 항구, 어류

쿤(Coen) 총독이 지배하던 1629

동인도회사가 군무원이나 유럽

년에 마타람 이슬람 왕국의 술탄

인들을 위한 병원을 짓기 전에 중

아궁이 바타비아를 마비시키기 위

국인 공동체가 1640년에 먼저 바

해 강물을 막고 물에다 동물의 사

타비아에 병원을 건립하였다.

체를 버리는 전술을 구사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버려진 연못 등이 기생충을 옮기는 모기의 좋은 서식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 다. 1900년대 초반에도 바타비아는

그 전술은 실패했다. 어차피 네

푸스, 말라리아, 수두, 이질로 인한

덜란드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전

사망자를 기록하였다. 네덜란드 식

투가 아니었다. 역사학자 아돌프

민정부는 1800년대에 공중보건소,

예전에 자카르타를 휩쓴 병의

호이큰(Adolf Heuken)은 자신의 저서

백신 접종자 양성 학교, 병원 등을

병원체가 여전히 오늘도 존재하고

<자카르타 유적지들(Historical Sites

바타비아에 건설했다.

있다. 지금 건너고 있는 이 오르막

of Jakarta)>에서

“마타람 군인의 절

반가량이 굶주림, 병, 과로, 처벌 및 네덜란드 총탄으로 죽었다”고 기 록하고 있다. 쿤 총독은 1629년 당 시 바타비아에 창궐한 콜레라로 인 한 복통으로 죽었다. 술탄 아궁 자신도 1645년 전염 병으로 죽고 족자에서 인도양 쪽 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이모기리 (Imogiri)

언덕에 있는 술탄 왕족의

묘지에 묻혔다. 술탄 아궁 묘지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는 바타비아에 있었던 쿤 총 독의 묘지에서 도굴해 온 유품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들 의료 관련 시설들은 고위 층과 그 가족들을 위해 운영되었 고, 항상 전염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바타비아 원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원주민들은 전 염병(hawar)으로부터 스스로를 지 켜내기 위해 자무(jamu)나 주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바타비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 염병은 말라리아라고 할 수 있는 데, 1733년 말라리아로 2천명에 서 3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 었다. 말라리아는 적도 일대에서만 발생되는 전염병이지만 주로 사람 들의 열악한 위생 및 공중보건 시

바타비아에서는 1600년대에 문

스템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된다.

둥병이 발생하는데, 문둥병 환자들

말라리아는 1939년에도 바타비아

을 바타비아와 땅그랑 경계 지역에

에서 유행하였다.

격리시켰다. 몇 십 년 지난 후 이 지 역 문둥병 환자들은 뿔라우 스리브 섬 중에서 바타비아에서 가장 가까 운 비다다리(Bidadari) 섬으로 이전

MY DEAR INDONESIA 22

동인도회사는 1700년대에 장티

양식장 등으로 개조한 후에 이를

바타비아에서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는 바타비아 에는 망그로브가 자라는 해안 저지

연달아 콜레라로 거의 마비되었다.

길에 시궁창물이 멈추지 않는 한 자카르타에서 전염병은 다시 발생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 특히 이 지역 주 민 – 하수구를 연장하여 시궁창 물 이 이 길에서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도록 구청에 연락하여 조치를 취 하게 하거나 항의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항의하는 사람은 예의 없는 사람일 테니까…….


바오밥 나무와 나시고렝 마다가스카르 하면 바오밥 나무 가 떠오른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에서 개코원숭이들이 집처럼 뛰놀던 바로 그 나무다. 마 다가스카르 하면 또 인도네시아인 들이 Pisang kipas라고 하는 여행자 나무(Traveler’s tree)로도 유명하다. 마다가스카르는 면적 기준으로 세계 4번째 크기의 섬이다. 동아프 리카 해안으로부터 약 400km밖에 안 떨어져 있고, 자카르타로부터는 약 6,300km 떨어져 있다. 마다가 스카르와 아시아 또는 호주 사이에 는 인도양이 가로놓여 있다.

/ 노경래

2012년에 영국의 자연과학학 회인 Royal Society의 저널에는 약 1,200년 전에 30명의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 다는 논문(‘마다가스카르에서 발 견된 소규모의 동남아 여성 집단’) 이 실렸다. 대규모로 계획된 식민 방식이 아닌 소규모의 의도치 않은 대양 횡단을 통해 정착되었을 가능 성을 제기한 것이다. 2005년부터 시작된 이 연구는 인도네시아인 2,745명과 마다가스 카르인 266명의 개인별 미토콘드 리아 DNA를 테스트하였다. 그 결 과 Malagasy의 모계는 인도네시아 인들의 DNA가 지배적이었으며, 30명의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그들 의 DNA를 Malagasy인들에게 물려 주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료: Wikipedia

판구조론에 의하면, 마다가스카 르는 1억 3,500만 년 전에 아프리 카와 떨어졌고, 8,800만 년 전에는 인도와 헤어졌다. 마다가스카르에 살고 있는 사람 들이나 그들의 언어를 Malagasy라 고 한다. 마다가스카르에는 현재 크게 봐서 두 종족이 섞여 살고 있 다. 그 중 하나는 당연 아프리카 흑 인이지만, 또 하나는 얼굴만 보아 도 동남아시아인임을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논문은 유전학적으로 Malagasy인과 인도네시아인들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증거 를 명백하게 제시하였지만, 이 30 명의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인도네 시아의 어떤 종족에 속했는지 밝혀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이 과학자들 이 밝혀내지 못한 비밀을 밝혀내게 된다. Malagasy인들은 아시아인이 든 흑인이든 혼혈이든 모두 오스트 로네시아계 언어를 사용한다. 오스 트로네시아는 서쪽의 마다가스카 르에서 말레이 반도를 거쳐 동쪽의 하와이, 이스터 섬에 이르는 광대 한 대양의 섬 지역을 말하며, 그들

이 사용하는 언어를 오스트로네시 아어라고 한다. 오스트로네시아어 는 교착어(언어의 문법적 기능을 어근과 접사의 결합으로 나타내는 언어)를 사용하고, 명사를 두 번 반 복해서 복수를 표시하거나 강조하 는 어법이 특징이다. 언어학자들은 마다가스카르인 의 국어인 Malagasy가 마다가스카 르에서 약 7,000km도 넘는 광활한 인도양 너머 남부 칼리만탄에서 사 용되고 있는 마아냔어(Ma’anyan)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1614년 예수회 신부인 Luis Mariano는 Malagasy인의 언어가 칼리만탄 Dayak족의 한 부류로 칼 리만탄 남동부에 있는 Barito 강변 을 따라 살고 있는 Ma’anyan어로 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유럽인들이 처음 마다가스카르를 찾아왔던 1500년경에도 Ma’anyan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미 마다 가스카르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 여주었는데, 이것이 언어학자들에 게 그 동안 과학자들이 풀지 못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라비 아 숫자를 비교해보면, Malagasy어 와 Ma’anyan어가 거의 정확히 일 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총, 균, 쇠≫(1998)의 저자 재 레드 다이아몬드는 “이것이야말 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인문 지리학적 사실인 듯 하다. 이것은

23 노경래


자료: Wikipedia

가령 콜럼버스가 쿠바에 도착했을 때, 가까운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아메린드계 언어를 사용하는 아메 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쿠바 에는 스웨덴어와 가까운 언어를 사 용하는 푸른 눈, 금발 머리의 스칸 디나비아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 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도대 체 보르네오인들은 지도나 나침반 도 없이 배를 타고 항해하여 어떻 게 마다가스카르까지 올 수 있었을 까?”라고 하였다. 마다가스카르를 탐사한 고고학 자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적 어도 A.D. 800년 이전에 그곳에 도 착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럼, 약 7,000km나 되는 Ma’anyan인들의 대장정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A.D. 800년 이후는 이슬람 세력 이 확산되는 시기였다. 이슬람 상인 들은 순풍을 기다렸다가 인도양을 건너 동아프리카와 인도 사이를 왕 래하였고, 동 아프리카 해안에도 많 은 고고학자적 증거를 남겨두었다. 1497년 포르투갈의 선장 바스코 다 가마는 함대를 이끌고 폭풍곶 (그는 이름을 희망봉으로 바꿈)을 돌아 그때까지는 유럽인들에게 알 려지지 않은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 라가는 대규모 항해 끝에, 인도의 캘커타(현 Kolkata)에 도착하였다.

MY DEAR INDONESIA 24

당시에 인도에서 동쪽 방향, 즉 인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서도 역 시 활발한 해상 교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Ma’anyan인들은 남부 칼리만탄을 출발하여 이 교역 로를 따라 인도에 도착했다가 다시 서쪽의 교역로를 따라 동아프리카 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아프리카 인들과 합류하여 마다가스카르 섬 을 발견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마다가스카르는 얼굴 생김새 및 언어 뿐만 아니라 문화의 동질성도 인정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악기들이 마다가스카르 에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마다가스카르의 악기 인 발리하(Valiha)는 대나무로 된 둥 근 울림통에 12~24개의 현을 매단 마다가스카르의 전통 악기이다. 이 악기는 남부 칼리만탄에서 온 정착 인들이 이 섬에 전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물론 이 악기는 인도네시 아의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 다. Valiha가 NTT의 Sasand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건축 양식 또한 남부 칼리만탄의 건축 양식과 상당 히 유사하다고 한다. Malagasy인들은 아프리카인으 로서는 아주 드물게 삼시 세끼를

쌀을 식재료로 하는 나시고렝 등을 먹으며, 식사 후에는 숭늉을 마신 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은 인도네시 아인들이 마다가스카르의 정착 과 정에 실로 놀랍고 중대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왜 칼리 만탄의 Ma’anyan인들이 이역만리 마다가스카르까지 가게 되었는지, 그들이 혹시 전통적인 무역로를 이 용하지 않고 예기치 않게 표류하여 인도양을 가로 질러 –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 곧장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실제로 어떤 이유로 그리고 어 떻게 해서 인도네시아인들이 마다 가스카르에 정착했는지는 2000년 을 산다고 하는 바오밥 나무는 알 고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1998) - Murray P. Cox 등, A-small-cohortof-Island-Southeast-Asian-womenfounded-Madagascar(2012) - Charles Randriamasimanana, The Malayo-Polynesian Origins of Malagasy(1999) - Wikipedia, Malagasy language


(사진 1)Hotel des Indes(1829-1971, 현Duta Merlin Mall)의 호텔 증축 완공 기념 시 Ondel-Ondel 공연

무대를 잃어버린 예술, 온델온델(Ondel-Ondel) / 노경래

Ondel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

조상신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해졌습니다. Google에 들려주고 What’s this song?이라고 해도 나

Barong은 인도네시아 각 지역에

자카르타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

오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

따라 이름과 생김새가 조금씩 차

나 Ondel-Ondel을 쉽게 볼 수 있습

고 물어보니 Betawi 전통 음악인

이가 있지만, 그 상징성은 거의 유

니다. 그 생김새가 다소 우스꽝스

‘Sirih Kuning’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합니다. Ondel-Ondel은 중국의

럽고 음악 소리는 촌스럽게 들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있는 둥 마는 둥 그냥 지나칩니다. 어느 날인가 Ondel-Ondel이 음

Barongsai와 닮은 점도 있는 것 같 Ondel-Ondel은 예전에는

습니다. Ondel-Ondel은 한국으로

Barong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치면 장승인데 움직이는 장승이라

Barong은 Austronesian(南島語族:

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동남아시아와 마다가스카르, 태평양에 걸

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길거리

쳐 사용되는 언어들의 어족)

지역에서

1970년대 인도네시아 국민가수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귀에 익

힌두교 전래 이전부터 발견되며,

Benyamin Sueb가 부른 ‘Ngarak

은 저 음악이 무엇인지, Ondel-

재앙이나 악령을 쫓는 수호신 또는

Ondel-Ondel’이 유명하여, 이때부 터 자카르타에서는 Barong이 아니

25 노경래


라 Ondel-Ondel로 불린 것으로 추 정되고 있습니다. Ondel-Ondel이 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 지 설이 있습니다. 이 큰 인형의 건 들건들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 ‘Gondel-Gondel’ 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이 큰 인형의 머리에 있는 코코넛 꽃을 나타내는 산스크리스트어 ‘Kundil’에서 유래 했다는 설입니다. Ondel-Ondel은 Betawi 전통 예 술입니다. Betawi는 원래는 17세기 이후 Batavia 및 인근 교외에 거주 한 원주민 그룹을 칭했습니다. 그 러나 18세기부터 다양한 종족 집단 이 Batavia로 이주하고 서로 동화 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원주 민’이라 칭하는 것은 맞지 않게 되 (사진 2) Ondel-Ondel 생김새

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후반 또 는 20세기 초반에서야 말레이계, 순다족, 아랍족, 중국계 등이 혼합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후 자카

무함마드 형상은 찾을 수 없습니

된 Batavia 거주자들이 자신들을

르타 주지사 Ali Sadikin이 Ondel-

다. 그런데 조상신인 Ondel-Ondel

Betawi로 칭하였다고 합니다.

Ondel을 자카르타 문화의 아이콘

이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자카르타

으로의 변경을 시도하였습니다. 무

의 마스코트가 된 것을 어떻게 이

Ondel-Ondel에 대한 최초의

서운 모양에서 더 친근하게 보이

해해야 할까요? 인도네시아의 이

기록은 17세기 초로 알려져 있습

도록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가미

슬람이 현지 문화에 동화되었다고

니다. 영국 상인 William Scot이

하였습니다. 그 당시까지 Ondel-

해야 하나요, 아니면 다양성을 쉽

1605년 Batavia에 있었던 Abdul

Ondel은 무언극이었으나, 이때부

게 받아들이는 인도네시아 문화의

Mafakhir 왕자 할례 의식에 ‘Een

터 Betawi 음악인 Tanjidor 또는

특징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Reus Raksasa(큰 거인 인형)가 사용

Gambang Kromong 악단을 동행하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Ondel-Ondel 생김새(사진2)를 들여다보면, 몸통은 사람이 들어

Hotel des Indes(1829-1971, 현Duta

인도네시아가 거의 이슬람화 되

가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대

호텔 증축 완공 기념

었음에도 Ondel-Ondel이 오늘날

나무 또는 Kapuk 얼개로 되어 있

시 Ondel-Ondel이 공연되었습니다

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궁금해집

으며, 2m 정도의 키에 몸통은 지름

(사진1). 당시 ‘막스 하벨라르’를

니다. 이슬람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80cm정도입니다. 머리에는 섬유

지은 Multatuli가 이 호텔명을 Hotel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예술에서 사람

질에 코코넛 입의 주맥(主脈, midrib)

de Provence에서 Hotel des Indes

이나 동물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렵

을 종이 등으로 감싼 화관을 남자

로 바꾸도록 제안했다고 합니다.

습니다. 카펫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Ondel의 경우 25개, 여자 Ondel의

Merlin Mall)의

MY DEAR INDONESIA 26


(사진 3) Ondel-Ondel로 생계를 이어가는 동네 중부 자카르타 Kramat Pulo

경우 20개를 씌웁니다. 남녀 Ondel

로 Ondel-Ondel에 대한 자부심이

공히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남자

없는 것은 아닐까요?

Ondel의 얼굴은 붉고 두꺼운 눈썹 과 콧수염이 두드러지는 반면, 여

Ondel-Ondel로 생계를 이어가

자 Ondel의 얼굴은 희고 빛나는 눈

는 동네가 중부 자카르타에 있는

동자와 붉은 입술이 특징적입니

Kramat Pulo(사진3)입니다. 이 동

다. 남자 Ondel은 무늬가 없는 밋

네는 Ondel-Ondel을 만들어 악기와

밋한 셔츠에 Batawi Batik으로 되

스피커를 단 수레(Gerobak Musik)와

어 있는 숄과 벨트를 착용하며, 여

함께 대여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자 Ondel은 레이스가 달린 상의에 Betawi Batik의 하의와 숄과 벨트 를 착용합니다.

Ondel-Ondel은 ‘라마야나’ 또 는 ‘마하바라타’ 같은 서사나 스토 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상신이

Betawi들은 왜 Batik을 아주 일

말을 건네는 것이 이상할 수 있기

부만 Ondel-Ondel에 사용할까요?

때문에 Ondel-Ondel에는 스토리

Ondel-Ondel은 중국 문화의 영향

가 없는 것으로 이해는 됩니다. 스

을 많이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토리가 없으니, 누구나 맘만 먹으

여기기 때문일까요? 혹은 Betawi

면 어렵지 않게 길거리 공연에 나

들은 Batik을 완전하게 입힐 정도

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Ondel-Ondel 공연에는 Tanjidor 와 Gambang Kromong 등의 합주 단이 함께 합니다. Tanjidor는 19 세기 이후 네덜란드 군대 병영에 서 병사들끼리 연주하는 것으로부 터 유래한 Betawi 음악으로 알려 져 있으며, 요즘은 자카르타 주정 부 행사나 화교 공동체의 Cap Go Meh(정월 대보름)에 거리 축하 공 연 등에 사용됩니다. Gambang Kromong은 Gamelan 형태의 Betawi 전통 오케스트라 입니다. Gambang Kromong은 Gambang Kayu (Iron wood로 만든 음 판이 있는 실로폰)와 Kromong(5개 청동 Gong으로 되어 있는 Bonang)을

합한 것

입니다. 전통 Gamelan에는 없는 5 음계인 중국의 현악기도 사용되며,

27 노경래


(사진 4) Ondel-Ondel 버스킹을 위해 어린이에게 깡통을 들리기도 한다

MY DEAR INDONESIA 28


주로 화교 공동체에서 공연되어 왔

경우인데, 이들은 공연 장비를 대

원칙적인 이야기만 몇 년째 되풀이

습니다.

여하는 스튜디오(Sanggar)에 임대료

할 뿐입니다.

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행인들로부 Gambang Kromong의 대표곡

터 받을 돈을 공연자 머릿수 당 많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은 Sirih Kuning과 Jali-Jali입니다.

이 배분하기 위해서는 공연 참가

Ondel-Ondel의 미래를 아주 밝

이 2곡 모두 자카르타의 전통음악

자 수를 최대한 줄이며, 심지어 12

게 봅니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문

입니다. 이 노래가 무슨 의미인지

살 이하의 어린이로 하여금 플라스

화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기 마련

는 잘 모르겠지만 자카르타에 오래

틱 통이나 깡통을 들게 하고(사진

이며, 여기에 혁신적인 디지털 기

살았다면 이미 귀에 익숙한 음악일

4), 악기들은 Gerobak Musik으로

술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

것입니다.

대체하고, 남녀 한 쌍이 아닌 하나

어와 Ondel-Ondel의 공연 방식에

의 Ondel만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

도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올 것으

가 오면 완전 공치는 날이 되며, 가

로 생각합니다. 로봇이 Gambang

끔은 Ondel을 메고 하수구나 도랑

Kromong에 맞추어 멋들어지게

에 처박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춤을 출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Ondel-Ondel의 길거리 공연을 보면 이게 예술인지, 구걸인지 헷갈 립니다. 그 경계가 아주 모호합니 다. 그래서 거리의 악사(Pengamen) 에게 2,000 루피아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국가 초청 공연자인 Hasan는 초 등학교 1학년 때부터 Ondel-Ondel 공연 예술가인 부모님으로부터 전

Ondel-Ondel의 이미지를 이용한 예술가와 걸인의 경계를 왔다

예술 작품이 많이 나오고 아이디어

갔다 하는 공연자도 많은 것으로

상품도 개발될 것으로 보여 상업적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든 조상이

으로도 괜찮은 아이템이 되지 않을

그들의 배를 채우게 하고 있어 다

까 생각합니다.

행이라면 다행입니다. Ondel-Ondel은 지금은 무대를

수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

Ondel-Ondel 공연으로 버스킹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지만, 가까

가 돌아가신 후 17살 때 Full Moon

을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운 장래에는 화려한 아이콘으로 변

Duta Ambassador 공연단의 단장

것 같습니다. Pengamen들에게 기

모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는 무대로

을 맡았다고 합니다. 한때는 잘 나

꺼이 돈을 건네 주는 사람들은 그

복귀할 것입니다.

갔던 예술가였던 셈이죠. 그러나

들이 Betawi 문화를 보전하고 있기

거리에 차량과 행인이 점점 많아

때문에 공공질서나 교통 흐름을 방

져 공연하기가 힘들게 되고, 차량

해하지 않는다면 어디서든 공연하

과 반대 방향으로 가지만 차량 흐

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

름을 방해한다고 가끔 손가락질

대쪽의 사람들은 그들이 Ondel-

도 받는다고 합니다. 2.5시간 공연

Ondel 문화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

에 2,500,000 루피아를 받아 공연

하고 단지 구걸하는 것만 관심이

에 참여한 총 13명이 나눠 갖고 숙

있기 때문에 거리에서 추방해야 한

박비를 제외하면 Hasan의 손에

다고 생각합니다.

는 100,000 루피아가 남는다고 합 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Ondel-

자카르타 주정부는 거리에서 구

Ondel 공연에 열의가 없어졌다고

걸하는 것을 금하고, Betawi 전통

합니다.

복장을 하고 공연 장비를 제대로 갖춘 경우에만 특정 시간대에 공연

그와 반면, 버스킹을 위해

하여 관광객을 유인할 계획이라는

Ondel-Ondel을 이용하는 걸인의

29 노경래


플라타너스

/ 노경래

못생긴 이웃집 혜숙이 누님을 닮았다. 그래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줄기에는 덕지 버짐, 밑동에는 혹뿔이 너를 보면 발길질부터 하고 싶었다. 어느 가을 날 네가 놓아 버린 낙엽들은 너울 춤을 추며 보도에 떨어지더니 바스락거리며 후미진 곳으로 쓸려간다. 낙엽이 반쯤 진 너를 올려다보며 이방인 이름으로 이 땅에 와서 번듯한 이름 하나 얻지 못한 지난 세월 너의 서러움을 생각한다

MY DEAR INDONESIA 30


빈센트 반 고흐, 큰 플라타너스 나무(1889 년 作)

<시작 노트> 코로나 덕분에 오랜만에 서울에서 가을을 보내고 있다. 거리에는 말라 떨어진 플라타너스 이파 리들이 바람 따라 바스락거리며 여기저기 휩쓸리고 있다. 곱게 물든 은행나무나 단풍나무 앞에서 잠시 멈춰 사진을 찍어 보지만, 버짐 꽃을 덕지덕지 피운 플라타너스는 준 것도 없이 그 밑동을 한 번 차고 지나가고 싶어 진다. 그래서 플라타너스는 이 땅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우리말로 된 이름 하나 얻지 못했는가 보다. 내 처지와 닮은 점이 있어 플라타너스를 보면 애틋함이 느껴진다. 인도네시아에서 12년 넘게 살 았지만 나는 여전히 미스떠르~이니까… 플라타너스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영원한 주변인, 디아 스포라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니 좀 씁쓸해 진다. 그러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지 않는가. 너와 내가 달라서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 이다. 단풍도 들지 않고 바로 말라 떨어진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있기 때문에 은행나무와 단풍나 무가 오히려 이 가을의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31 노경래


머리로 쓰다가, 손으로 쓰다가, 몸으로 쓰다가, 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늘은 옷 한 벌 지어 입듯 인작을 입는다. 참 곱다!

MY DEAR INDONESIA 32


박 정 자 Park Jung Ja 시인

33 박정자


바오밥나무 편견 / 박정자

어린왕자의 말만 듣고 너를 쓸모없이 여 겼던 거야 생태계를 파괴하는 황소개구 리처럼 골치 아픈 무엇으로만 생각했던 거야 알아보고 판단하고 그럴 필요도 없 다고 무조건 그랬던 거야 나는 어린왕자 를 정말 많이 사랑하거든 우연히 만났지 이파리를 다 떨군 너의 맨 몸을 팔 벌려 안았어 어린왕자에게는 조 금 미안했지만 너와 귀엣말을 하고 싶었 어 어떻게 그 먼 별에서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나는 또 지구의 저편에서 날아와 너를 만나게 됐는지 어린왕자에게 대나무울타리를 보낼까 너 와 친구들에게 구역을 정해주면 너희는 착하게 그 안에서만 자랄 거고 언젠간 멋 진 쉼터가 될 거라고 엽서를 적어서, 그 래도 코끼리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추 신을 달아서

MY DEAR INDONESIA 34

어린왕자도 이제는 알겠지 여행을 오래 했 잖아 바오밥나무는 별이 부서질 만큼 크게 자라지는 않을 거고 바람과 햇빛과 물을 적 당히 흐르게 할 거고 새들이 모이는 아름다 운 가지를 뻗을 거라는 걸 그러다가 어느 바 오밥나무 하나가 장미와 너무 친해져서 어 린왕자의 질투를 사게 될지도 모르겠네, 너 희가 어린왕자와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싶어 참 고마운 일이야 우리가 여기서 만날 수 있 어서 네게 기대어 하늘을 보다가 알았어 편 견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그러니까 이제부 턴 짐작하지 않기 속단하지 않기 편견 갖지 않기 그것들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았으 니까말야


끄분 라야의 바오밥나무 (사진=박정자)

35 박정자


위험한 봄 covid19 / 박정자

진달래개나리산수유 꽃망울 터져 산 아래 비탈까지 문 열어 반기는 이 봄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눈길 멀리하는 사람의 마을은 지금 겨울보다 더 깊은 겨울 위험한 봄이라고 시린 손, 시린 손 마주 비벼서 장작처럼 불 지피는 사람의 마을엔 꽃보다 아름다운 꽃 손에서 손으로 번지는 마음꽃 봄 속 추운 봄을 건너고 있다 진달래개나리산수유처럼 웃음꽃 드높이 펼치기 위해, 사람의 마을에 봄빛 도란도란 다시 밝히기 위해

<시작 노트> 이 시를 쓰던 초봄만 해도 covid19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마스크가 귀하던 그때 자신의 마스크를 아껴서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주던 어린학생들이 있었다. 환자를 위해 봉사를 자원하고 성금을 모아 전달하던 시민들이 있었다. 다시 트윈데믹을 걱정하는 겨울이 오고... 우리 시대의 희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MY DEAR INDONESIA 36


나무 깜보자꽃을 매일 떨구는 / 박정자

처음엔 앞마당 새빨간 람부딴나무가 나를 홀렸는데요 그 나무가 가지를 산만하게 뻗는 걸 보고 굵은 뿌리를 사납게 땅 위로 드러내는 걸 보고 키 작은 풀잎들을 목마르게 하는 걸 보고, 한 해 두 해 참다가 견디다가 모조리 파내서 멀리 보내버렸네요 깜보자나무 두 그루를 한 나무로 합쳐서 심었는데요 손가락 같은 가지들을 하늘로 가지런히 뻗더니 옹기종기 노란 향기를 손끝에 피우더니 아침마다 꽃잎편지 몇 송이를 앞마당에 내려놓네요 오늘 아침엔 향긋하고 생생한 일곱 송이 편지를 받았어요 람부딴나무는 자신의 영토를 넓혀서 제 곁을 위협하는데 깜보자나무는 순하게 뻗어서 바람과 햇빛을 나누자하네요

<시작 노트> 내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게 된 것은 때마침 앞마당에 있는 람부딴나무가 빨갛게 익어서 탐스럽기도 하고 풍요롭기도 해서였다. 몇 년이 지나자 마당의 잔디가 차츰 죽어가며 온통 흙바닥이 되었다. 가지와 뿌리를 함부로 뻗은 람부딴나무 때문이었다. 보기에 언짢았다. 그 나무를 깜보자꽃나무로 바꿔 심었다. 이제는 햇빛과 바람이 마당에서 잘 놀다가 간다. 사람 사이 관계도 사람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겠지.

37 박정자


(사진=조현영 /manzizak)

영화 속 대사 하나가 / 박정자

그쯤의 나이가 된 것인지 심하게 앓고 난 탓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인지. 어느 날 문득 내 몸이 가볍게 느껴진 것. 서툴고, 편협했던 지난 시간들조차 당겨 안을 여유가 생긴 것. 창가에 앉아 나무와 새들과 오가는 사람들을 본다. 며칠 전에 본 영화를 생각한다. 바람 많이 불고 거세게 비 내리더니 오후의 햇살에 풀잎들이 가볍게 흔들린다. 난 이제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어 늙으니까 그게 좋아, 영화 속 대사 하나가 찻잔에 떨어진다. 맴돌다 가라앉는다.

MY DEAR INDONESIA 38


섬 마타하리 / 박정자

1 날 때부터 나는 그 섬의 주민이었다 마타하리 맨발로 새벽바다를 걷다보면 저만치 나무 사이로 햇살이, 잘 웃는 친구의 얼굴처럼 볼우물 한가득 장난기를 물고 달려왔다 2 섬청년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기타를 칠 때 배를 타고 오거나 떠나가는 외지 손님들은 손을 흔들었다, 그때 한 젊은이의 눈빛이 떨리고 있던 것을 누가 누가 보았을까 3 마타하리, 섬처럼 간결하게 삶의 동선을 그리리라 꾸밈말 덜어낸 짧은 시를 쓰리라 잠시 여행이 아니라 날 때부터 그 섬의 주민이었다고 내게 말하듯 가오리 한 마리 빙빙빙 발밑에서 돈다 4 어떤 섬은 사라지고 어떤 섬은 태어나고 있었다 인도양을 밀고 당기면서, 검푸른 물결 속에서

<시작 노트> 20년은 족히 지난 듯하다. 마타하리 섬에 갔던 기억은 아련하고 따스하다. 새벽산책, 나뭇 가지 사이로 벅차게 퍼지던 아침햇살, 저녁 무렵의 선홍빛 바람, 그리고 사람들을 마중하 고 배웅하는 악사들의 낯선 음색 사이로 너무 맑아서 슬퍼보였던 한 젊은이의 눈빛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섬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현장을 보고 온 날은 가슴이 몹 시 뛰었다. 요즈음, 내 몸이 내 마음이 바로 한 개의 섬이라는 의식이 점점 또렷해진다.

39 박정자


4년차 인문창작클럽이 팬데믹 와중에도 예년과 다 름없이 웹진을 발간하는 저력있는 모임으로 자리 매김한 것을 축하합니다. 그 옛날 예수가 그랬던 것 처럼 자신의 이전과 이후로 코로나가 역사를 양분 하는 것을 목도하며 한 개인이 불가항력에 떠밀려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은 아쉬우면서도 한편 나름 역사적입니다. 지난 4년, 즐거웠습니다.

MY DEAR INDONESIA 40


배 동 선 Bae Dong Sun 자의 반 타의 반 뒤늦게 뛰어들고 만 전업작가의 세계 어린 시절 열망했던 대로 피말리는 원고 마감과 씨름한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41 배동선


사랑이 그 또래 젊은이들은 물론 당시 학창시절을 보낸 40~50대 인 도네시아인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 이죠. 마치 <응답하라 1988>, <응답 하라 1994> 같은 한국 드라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파자르 부스토미와 부야 함카

그 속편 <딜란 1991>도 이듬해 520만 명 관객으로 2019년 흥행수 위를 차지하면서 인도네시아인들 이 품은 90년대에 대한 향수가 일 시적 현상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3 부작의 마지막편 <밀레아: 딜란의

/ 배동선

목소리> (Milea: Suara dari Dilan)가 올 해 2월 개봉해 310만 명의 관객을 모았는데 현재 코로나 사태로 극장

오늘은 영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후인 2018 년 1월 개봉된 <딜란 1990>(Dilan

2017년 9월에 개봉된 CJ 엔터테

1990)이

630만의 관객을 불러들여

인먼트 합작영화 <사탄의 숭배자

그해 로컬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하

>

(Pengabdi Setan, 조코 안와르 감독)에

면서 청소년 로맨스 장르가 급부상

420만 명 관객이 들어 그해 로컬영

합니다. 이 성적은 인도네시아 로

화 흥행 수위를 차지하면서 당시

컬 영화 전체를 통틀어 역대 2위 흥

인도네시아 영화판은 목하 호러 영

행성적이기도 했어요. 불과 30년

화 천지로 흘러갈 기세였어요.

전인 1990년대 학생들의 풋풋한

영업 재개 일정이 불확실한 현재, 이번에도 이 영화가 로컬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 니다. 일련의 영화 시리즈가 3년 연 속 흥행수위를 차지한 적은 없었으 므로 제작사인 팔콘픽쳐스(Falcon Pictures)와 Bustomi)

파자르 부스토미(Fajar

감독은 현지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셈입니다.

<딜란> 3부작

MY DEAR INDONESIA 42


가린 누그로호, 하눙 브라만티

어려움이 닥치면 이를 피하려

오, 리리 리자같은 유명 영화감독

편법을 쓰지 않고 정면으로 극복해

들을 배출한 자카르타 예술대학

가는 모습은 국적이나 직종을 떠나

(Institut Kesenian Jakarta-IKJ)

동문인

항상 감동적입니다.

년 감독 데뷔작도 <베스트프랜드

으로 그려낼까요? 함카는 16살이던 1924년부 터 이슬람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

파자르 감독은 청소년 로맨스 영화 의 전도사 같은 사람입니다. 2008

감 있는 일대기를 과연 어떤 모습

그런 그가 함카(Hamka, 1908~1981)의

전기 영화를 준비 중

내다가 이후 인도네시아 양대 이 슬람 단체 중 하나인 무함마디아

> (best friends?)라는 청소년 영화 로 25만 명 관객이 들었고 올해 3 월 12일 개봉한 청소년 로맨스 코 미디 <마리포사>(Mariposa)는 팬데 믹으로 극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급 히 스크린에서 밀려나는 불운을 맞 았지만 그 사이 74만 명의 관객을 모아 올해 로컬영화 흥행 7위에 올 라 있습니다. 참고로 웬만한 현지 제작 영화들은 관객 20만 명 정도 가 손익분기점이어서 파자르 감독 은 데뷔 이후 줄곧 제작사에 적잖 은 이익을 안겨준 흥행감독인 셈입 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난독증때문 파자르 부스토미 감독

에 정규 커리큘럼 소화에 많은 어 려움이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콘티로 보여주거나 누군가 잘 설명해 주지 않는 한, 글로 된 대본 은 그에게 가로세로 줄이 그어진 매트릭스처럼 보일 뿐이었어요. 그 래서 영화 디렉팅 전공과목을 낙제 한 그는 학교를 1년 더 다녔고 필기 대신 영화테마 실습과제로 A학점 을 받아 이듬해 졸업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죠. “장애로 인 해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 고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 다.”

이란 소식은 뜬금없기도 하고 사

를 통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는데

뭇 신선하기도 합니다. 미낭까바우

1942~1945년 사이 인도네시아

출신 성직자이자 사상가였고 유명

에 진주한 일본군에 협조한 일로

한 문인이었던 압둘 말릭 까림 암

한동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합니

룰라(Abdul Malik Karim Amrullah)는 훗

다. 그는 여러 저서도 남겼는데 특

날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

히 1938년 그가 30세 때 쓴 소설 <

아 국가 영웅으로 선정되는데 함카

반더베익호의 침몰> (Tenggelamnya

(Hamka)란

Kapal van der Weijk)은 곧 한국에서도

그가 메단에서 글을 쓰

던 당시부터 사용한 필명입니다.

첫 번역본이 출간됩니다. 2013년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이 작품

청소년 로맨스 영화의 대가가

에 그려진 미낭까바우 출신 젊은

함카 같은 역사적 인물의 생애, 그

남녀의 치열한 사랑이 파자르 감독

것도 수카르노 시절 반란혐의로 투

의 청소년 로맨스 취향과 코드가

옥되는 말년까지를 포괄하는 중량

맞아 떨어졌던 걸까요?

43 배동선


부야 함카

파자르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

일곱 편을 2027년까지 매년 한 편씩 개봉하기로 하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감명받아 영화감독

고 올해 그 첫 번째 작품인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

의 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Satria Dewa: Gatotkaca)가 촬영을 시작하는 등 인도네 시아 영화산업은 보다 풍성한 한 해를 맞을 예정이었

“자신을 옥에 가두었던 수카르노의 장례

습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말이죠.

식을 이맘이 되어 직접 집전했던 그의 꿋꿋 하고 진실된 인격을 좋아합니다. 이 영화는 나의 <쉰들러 리스트>가 될 것입니다.”

최근 수 년간 매년 100편 이상 로컬영화를 제작하 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헐리우드나 볼리우드, 또는 한 국에 아직 비할 바 아니지만 동남아에서 영화제작이

이 영화의 대본을 준비하는 데에만 4년이

가장 활발한 나라이고 2016년 현지 영화산업이 해외

걸렸다는 파자르 감독은 이렇게 자신의 최

자본에 개방된 이후 획기적인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

고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개

하던 중이었습니다. <써니>,<여고괴담>, <수상한 그녀

봉을 계획했던 이 영화는 코로나 사태에 밀

>, <7번 방의 선물> 등 한국영화 리메이크작들은 물론

려 사실상 언제 관객들과 만나게 될지 알 수

앞서 언급한 감독들이 만든 좋은 영화들도 꽤 많이 나

없는 상황입니다.

왔고요.

작년 조코 안와르 감독이 영화 <군달라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 그냥 지나쳤을 인도네시

>(Gundala)로 새롭게 열어젖힌 인도네시아 토

아 영화에도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좋은 영화와 좋

착 수퍼히어로 장르는 부미랑잇 시네마틱

은 감독에게 한인 영화애호가들도 조금 힘을 실어줄

(Bumilangit Sinematik)의 세계관을 토대로 <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의 파

스리아시>(Sri Asih),

<피르고와 스파클링스

자르 부스토미 감독의 함카 전기영화 개봉을 손꼽아

>(Virgo dan Sparklings)

등 후속작이 기획되어

기대합니다.

있습니다. 한편 또 다른 현지 수퍼히어로 세 계관인 사트리아 데와 시리즈는 와양 그림 자극의 주인공들을 각색한 수퍼히어로 영화

MY DEAR INDONESIA 44


[단편소설]

백골의 향연

/ 배동선

산 속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씨티는 깊은 계곡 바 위 틈과 정글 속 큰 나무들 밑에서 버섯을 따다가 해가 넘어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이 산의 마물들은 인간과 상극이지. 마그립 무렵 이상한 것들이 말을 걸더라도 절대 대꾸해선 안된다.” 이미 짙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 한 숲속에서,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기억해 낸 씨티는 갑자기 밀려드는 한기에 옷깃을 여몄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멀기만 했고 컴컴한 숲속에 서는 짐승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치 자신을 부르는 속삭임처럼 들렸습니다. “씨티”, “씨티야” 씨티는 귀를 막고 집 반대편인 산비탈 아래, 저녁 하 늘을 환하게 밝힐 만큼 출력높은 조명을 둘러놓은 벌 목장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거기서 저녁시간을 보내다

가 달이 높이 떠올라 밤길을 밝히면 그때 집에 가기로 씨티는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벌목장 쪽으로 발걸음 을 옮기는 동안 분명 누군가 뒤따라오는 것 같은데 뒤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구야? 누가 장난치는 거야?” 아무 대꾸도 없 습니다. 씨티는 짐짓 화난 듯 소리쳤습니다. “벌목장 사람들한테 꼼짝도 못하고 밀려난 것들이 날 여자라 얕잡아 보고 달라붙으려는 거야?” 벌목장 캠프가 들어서기 전엔 씨티는 버섯을 따러 다니면서 정글 속 짙은 그림자 속에 깃들어 있던 “그 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허락없이 그들 보 금자리 앞을 지나기라도 하면 온갖 살(煞)을 뿜어대며 패악질을 저지르고서도 정작 벌목이 시작되고 큰 나

45 배동선


무들이 속절없이 잘려 나가면 찍소리 못하고 더 깊은 정글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그들”이 씨티는 딱히 두렵지 않았습니다. “넘어간다!” 벌목장 쪽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 더니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던 나무 한 그루가 큰 소 리를 내며 넘어지고 있었습니다. 해진 후에도 일을 멈 추지 않는 벌목장 사람들은 부지런한 게 틀림없습니 다. 등 떠밀려 그러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넘어간다!” 또 큰 나무 하나가 굉음을 내며 수백 년의 생을 전기톱 앞에서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 바 람에 씨티는 더 이상 그쪽으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 아 발을 멈추었는데 마침 멀리서 눈이 마주친 벌목장 인부 한 명이 씨티를 가리키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 렀습니다. “하….한뚜!!” 숲에서 오래 살아, 명품 옷이 나 최신식 오디오 헤드셋을 차고 있지 않다 해서 한 뚜, 즉 귀신 취급을 받는 건 매우 불쾌한 일입니다. 그 런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든 씨티의 머리 위를 거대한 흰색 물체가 살짝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까 부터 따라오고 있던 것의 실체였습니다. 아까 벌목장 인부가 뻗었던 손가락이 조금 윗쪽을 향했음을 기억 했습니다. 그는 사실 그녀 등뒤에서 나타난 ‘저것’을 가리켰던 것입니다. 거대한 백골이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씨 티 머리 위를 넘어 벌목장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습니 다. 그 순간 살짝 뒤돌아보던 백골과 엉덩방아를 찧던 씨티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사실 눈이 마주쳤다고 하 기 매우 어색한 것이 백골 거인의 해골 눈 속엔 눈동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이 마주쳤다 느낀 것 은 씨티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달아나는 벌목 장 사람들과 중장비들을 뒤집어 엎는 백골을 보면서 씨티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바닥에 누워 버렸는데 마 주 보인 하늘에선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한뚜 떵꼬락이 또 나타났다구요!” 다음날 아침 산

MY DEAR INDONESIA 46

아래 이장댁에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소리지르고 있 었습니다. 수나르디 이장은 쯧쯧 하며 혀를 찼습니다. “어제 그 놈과 마주친 인부들이 몸이 펄펄 끓고 사 경을 헤매고 있어요.” “저 산은 원래 마물들, 귀신들이 들끓던 곳인데 무 작정 들어가 벌목을 하고 있으니….” 이장은 사람들 말을 끊었습니다. “회사에서 오신 분도 계시죠? 말 좀 들어봅니다. 원래 해 지기 전까 지만 작업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요?” 푸른색 유니폼 자켓을 입은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납기라는 게 있어요. 제재소에 물건을 보내기로 한 날짜가 있다고요. 그렇잖아도 너무 늦어 지고 있어서 납기를 맞추려면 야간작업은 피할 수 없 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마을에서 두꾼이라도 불러와 귀신들 쫒아줘야 하 는 거 아니오?” “이 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 마을이랑 이장님이 책임져 줘야 하는 겁니다.” 벌목회사에서 정기적으로 뒷돈을 받는 사람도 있 고 자녀가 벌목장에서 일하는 주민도 있으니 벌목회 사에 동조하는 이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 었지만 수나르디 이장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들 압두라흐만 알카드리가 누군지 아시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머리를 갸우뚱 했습 니다. 수나르디 이장은 말을 이었습니다. “서부 깔리 만탄에 뽄띠아낙 도시를 처음 세운 술탄이요. 그 도시 이름이 왜 뽄띠아낙…., 처녀귀신이란 뜻이겠소? 그 들이 파괴하여 도시를 세운 그 숲이 원래 귀신들, 마 물들의 것이었는데 알카드리가 정글 속으로 화포를


쏴대며 들어가 기어이 대대적인 개간을 통해 귀신 들 본거지에 뽄띠아낙을 세운 거요.” 회사 사람이 목에 핏대를 세웠습니다. “우리도 화포라도 쏘면서 벌목작업 하라는 뜻입 니까? 노력이 부족하다는 거요?” 이번엔 이장도 언성을 높였습니다. “원래 살던 이들을 내보내고 그 집을 차지하려면

수나르디는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우리 산이 황폐해지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 까?”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바라본 그 지역은 일견 온통 정글로 뒤덮혀 있지만 자세히 보면 산속 마을들을 중심으로 벌 목장과 광산들이 점점 그 면적을 확장해 가고 있었습니 다. 하루에도 축구장 몇 개 면적의 거대한 고목들이 잘 려나가는 벌목 현장들에서 오늘도 야간작업이 진행되 고 있었습니다. 아름드리 나무 하나가 또 잘려 넘어지 며 산 속에 굉음이 메아리졌습니다. “야간작업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회사가 너무하 는군.” 인부들이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정작 위험한 건 그것만이 아니잖아. 이 숲엔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맞아, 어제도 이웃 현장에 해골귀신이 나타났다지.” “요즘 세상에 귀신은 무슨….”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하는 거 아니오? 그런데 당신 들은 무작정 불도저 몰고와 정글을 갈아 엎으려 하 니 거기 살던 마물이든 뭐든 반발하는 건 당연하지 않소?” 마을사람들이 이장에게 닥달하듯 소리를 지릅니 다. “우리가 다 동의서 쓴 일입니다. 지역이 개발되 고 길도 놓여야 마을 사람들 생활도 나아지고 수입 도 생길 것 아니오? 이장은 산속 귀신들이 사람들 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오?”

“그것뿐이야? 사람인듯 아닌 듯 한 것들도 심심찮 게 보인다니까.” “단체로 술이라도 마시고 헛걸 본 거겠지” 그때 벌목장 한쪽에서 소란이 벌어지며 고함소리와 비명이 섞여 들려옵니다. “저 놈한테 잡히면 살아남지 못해! 장비 버리고 달 아나!” 잡담하던 인부들이 기겁을 한 것은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흰색 실루엣이 보였기 때문입니 다. 한뚜 떵꼬락이 정글에서 벌목장 공터로 모습을 드

47 배동선


러내면서 벤 나무를 끌고가던 중장비가 뒤집어지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면서 캠프는 아수라장이 되었 습니다.

“너희 어머닌 날 좋아하셔.”

씨티는 멀리서 그 소동이 마무리되기까지 한참동 안 지켜보다가 버섯이 가득 든 짐을 챙겨 산속 집으 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살던 곳에 서도 저런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는데 여기서도 또 다시 보게된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 우리 엄마랑 결혼해!”

오솔길을 오르던 중 또 뭔가 따라오는 느낌에 홱 뒤를 돌아본 씨티는 바로 등 뒤까지 따라붙은 흰색 연기가 꿈틀꿈틀 실루엣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 니다. 놀란 씨티가 털썩 주저앉자 연기는 키 큰 백골 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던 씨티는 그렇게 앉은 채로 오른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엄지 를 세우고서요. “람베르투스. 잘 했어.” 한뚜 떵꼬락 람베르투스는 머리를 긁적거립니다. “뭐, 그 정도 가지고.” 씨티는 날렵하게 일어나며 다시 산속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옷 밑으로 삐져나온 씨티의 긴 꼬리가 달빛에 파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 숲은 곧 없어지고 우 린 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겠지.” 람베르투스는 없는 혀를 차며 대꾸했어요. “너희 모녀는 내가 지켜줄게.” 씨티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내 꼬리 밟지 마!” 하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으므로 람베르투스는 헛웃음을 웃습니다.

MY DEAR INDONESIA 48

씨티는 또 다시 쏘아붙이죠.

하지만 로맨틱한 한뚜 떵꼬락 람베르투스와 호망 소 녀 씨티가 인간들로부터 숲을 지켜내는 것은 무척 어려 운 일입니다.

PS. 한뚜 떵꼬락: 주로 개천, 정글, 대나무 숲에 출몰 하는 백골 귀신으로 키가 3미터를 훌쩍 넘는다고 하 며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 딱딱한 것으로 집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동반한다. 떵꼬락 귀신을 만난 사 람은 심하게 앓게 되고 몸이 닿은 부분은 시퍼렇게 멍들거나 썪어 들어간다. 호망: 깊은 밤 숲속 오솔길에서 자주 마주치며 인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손가락 순서가 반대라 고 한다. 바딱 전설에 따르면 호망의 딸 마르기링 라 웃은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고 사리부라자와 결 혼해 시사라보르보르를 낳고 하라합, 루비스 마똔당 등 바딱 유명 가문들의 시조가 된다.


수라바야 전투

/ 배동선

1945년 8월 17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위 원회인 PPKI는 바로 다음날인 18일 정부 기본조직을 발표합니다. 일 본열도를 향한 연합군 반격이 말루꾸 최북방 모로타이 섬을 스치며 비 껴가 온존한 전투력을 고스란이 보존한 일본군이 최후 발악을 할 것이 란 예상과 달리 22일 순순히 패전을 인정하고 현지인들을 동원해 일 본군 하부조직으로 만든 보조부대 헤이호(兵補)와 총알받이 자경단 PETA를 해산하자 수카르노는 다음날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들을 국 민치안단(BKR)으로 규합합니다. 그 달 29일엔 독립준비위원회(PPKI) 가 국가중앙위원회(KNIP)로 명칭을 바꿔 총선 전까지 임시의회 역할 에 돌입했고 8월31일엔 수카르노와 모하마드 하타를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가 정식 출범합니다. 당 시 해방 공간의 한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전광석화 같은 속 도의 정부수립이었습니다.

국민치안단(BKR)은 각 지역 부대들이 군벌 성격을 띄면서 중앙 지휘를 듣지 않아 군대라고 칭하기 어 려웠습니다. 그해 9월 8일 연합군 선발대로서 영국군 공수부대가 끄마요란 비행장 상공에 흩뿌려지자 연합군에 맞서 인도네시아의 독 립을 지킬 무력수단이 절실했던 수카르노는 국민치안단을 국민치안군(TKR)으로 승격시 켰고 총독부 군대인 KNIL출신으로 네덜란드 에 충성맹세 전력이 있는 우립 수모하르죠 중

붕또모

49 배동선


장이 공석인 총사령관 대신 참모

기와 공습,함포 직원을 등에 업은

리푸딘 등과 함께 황급히 수라바야

장으로서 군권을 잡습니다. 그것이

영국군 제5인디아 사단 25,000명

로 날아가 10월 30일 영국군 사단

1945년 10월 5일. 오늘날 인도네시

에 맞서 인도네시아 공화국군 2만

장 호손 소장과 휴전을 맺습니다.

아가 국군의 날로 기념하는 날입니

명과 민병대 12만 명이 모여듭니

하지만 당일 휴전사실이 충분히 전

다.

다. 조국 수호전쟁이야말로 이슬람

파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군 멜러

최고 가치인 성전(聖戰)이라는 나

비 준장이 일선부대 방문 중 습격

하지만 신생 인도네시아군이 여

들라툴 울라마(NU)의 성명과10월

받아 전사하자 전투는 다시 불붙기

전히 갈팡질팡하는 사이 일본군 무

22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붕

시작했고 마침내 11월 10일 영국군

장해제를 위해 속속 상륙한 연합군

또모(Bung Tomo)의 격정적인 항전

은 항구와 주요 거점들을 맹폭격하

독려 연설을 듣고 각지의 젊은이들

며 시내로 짓쳐들어가기 시작했습 니다.

당시 인도네시아군 일부는 현 지 일본군 주둔부대에서 넘겨받은 야포와 탱크들도 보유했지만 운용 법을 몰라 오로지 소총과 죽창으 로 영국군을 맞았습니다. ‘알라후 악바르’를 외치며 죽어가는 무수 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죽음을 외면 하지 못한 600명의 무슬림 인디아 군이 무장한 상태로 전향해 인도네 과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는데 바

이 죽창을 들고 수라바야로 몰려왔

로 직전 태평양 전쟁 당시 버마전

던 것입니다.

어지지 않았습니다. 11월 10일 총 공세 이후 영국군은 치열한 시가전

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베테랑 영

MY DEAR INDONESIA 50

시아군에 합류했지만 전세는 뒤집

국군에게 실전 경험이 전혀 없던

훗날 ‘수라바야 전투’라고 불리

인도네시아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

게 되는 이 사건은 10월 27일부터

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수라바야에

11월 20일까지 수라바야와 그 일

서 바로 그 영국군 1개 사단과 정

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교전을 말합

면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그해 9월

니다. 전투 초창기에는 인도네시아

18일 시내 야마토 호텔 승전 축하

군이 영국군 인디아 병사 200명을

파티에서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한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리지만 독립

유럽인들을 격분한 시민들이 공격,

전쟁의 군사적 승리를 기대할 수

살해하면서 짙은 전운이 드리운 수

없어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던 수

라바야에 셔먼 탱크 24대 등 신무

카르노는 하타 부통령, 아미르 샤

을 벌이며 사흘만에 수라바야 대부 분을 점령했지만 인도네시아군은 3주를 더 버티며 끈질기게 싸웠습 니다. 그 결과 영국군이 600여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 인도네시아군은 그 23배인 16,000명의 목숨과 함 께 전투력 상당부분을 수라바야에 서 잃었습니다.

궤멸적인 손실에 충격을 받은


인도네시아는 이후 소모적인 전면

야 전투의 아이콘 붕또모는 해방된

나 쿠테타를 도모하다가 상황이 여

전을 피해 철저히 게릴라 전술을

인도네시아에서 1955년 8월 국무

의치 않자 미국으로 도망가서도 연

도모했고 그와 동시에 서방이 우호

장관이 되었다가 불과 8개월만인

금 꼬박꼬박 타먹는 기무사령관같

적으로 여기는 항일투사 출신 수

이듬해 3월 옷을 벗습니다. 천상 반

은 이들은 묻혀 있지 않은 것 같습

딴 샤리르를 총리로 기용해 외교협

골인 그의 쓴소리를 수카르노가 좋

니다.

상으로 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합니

아했을 리 없죠. 그는 수카르노를

다. 한편 영국군은 기껏 태평양전

끌어내리고 등장한 수하르토의 신

쟁을 끝내고서 이제 네덜란드에 대

질서 정권에 처음엔 환호하지만 곧

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즉 명분

긍지있는 언론인 출신답게 잘못된

도 없이 손실만 발생하는 남의 전

정책과 부정부패를 비판하다가 체

쟁에서 빨리 발을 빼기로 가닥을

포당하는 고초를 겪습니다.

잡습니다. 수라바야 전투가 한창이 던 11월 12일 족자에서 열린 전군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정권

사단장급 지휘관 회의의 투표에서

에 대한 쓴소리를 그치지 않았

KNIL출신 우립 수모하르죠 중장

습니다. 1981년 메카 순례 중

을 꺾고 당시 29세의 교사출신이자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

PETA 대대장 출신 제5사단장 수

난 그의 시신이 인도네

디르만이 공석이던 전군사령관에

시아로 운구되지만 평

선출된 것 역시 유럽군과 목숨 걸

소 그의 유지에 따라

고 맞붙던 당시 상황에 영향받았음

깔리바타 영웅묘지가

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닌 수라바야의 일반 묘지에 매장되었습니

영국군의 공세로 인도네시아군

다. 생전에 ‘가짜 영

과 민병대가 가장 많은 전사자를

웅’들이 잔뜩 묻힌 영

낸 11월 10일을 오늘날 인도네시아

웅묘지에 그들과 함

는 매년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께 눕지 않겠다는 의

기념합니다. 우리의 현충일과 같은

지를 분명히 했던 것

개념입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격인

입니다.

자카르타의 깔리바타 영웅묘지도 그날이면 더욱 많은 참배객들로 북 적거립니다.

하지만 최소한 인도네시아 의 영웅묘지엔 식민종주국의 주구로서 독립군을 때려잡다

물론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제가

가 건국영웅으로 신분 세탁한

인도네시아에도 있습니다. 수라바

김창용, 노덕술 같은 이들이

51 배동선


2020년 10월 하순, 서울은 가을 단풍의 한 가운데 에 있다. 잠시 다녀오겠다고 서울에 올 때만해도 벚 꽃이 휘날리던 때였는데, 벌써 형형색색의 단풍의 계절이 되었다. 화려한 단풍에 인도네시아의 붉은 부겐베리아 (Bougainvillea)와 노란 깜보자(frangipani) 가 오버랩 되어 보인다. 그냥 붉디 붉은 단풍에 막 무가내로 물들어 버리면 좋으련만, 스산한 마음의 한 켠은 늘 만리에 있다. 영원한 주변인, 디아스포라의 숙명인가.

MY DEAR INDONESIA 52


사 공 경 Sagong Kyung 한인니문화연구원장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JIKS) 사회과 교사 (1997~2010) 저서: <자카르타 박물관노트>와 <서부자바의 오래된 정원> 전시: “느린 영혼의 여행, 바틱” 6회 전시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수석집필

53 사공경


외로울 때 나는 해양 박물관에 간다 네덜란드 건물은 튼튼하다. 벽에 있는 거꾸로 된 Y자 모양의 지지대는 벽을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해양박물관 뒷뜰에서 (사진=사공 경)

/ 사공경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알고 싶 던 것도 많았던 시절, 외로울 때 나 는 바다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순다 끌라빠 지역에 있는 해양 박 물관(Museum Bahari)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나는 바다 향기에 흠뻑 취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해양박물관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유럽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던 육두구와 후추같은 향신료, 바틱같 은 직물, 커피, 차, 구리, 주석, 인디 고 염료 등을 보관하고 포장하는 창고였다. 이 상품들은 가까이 있 는 순다 끌라빠 항구를 통해서 아 시아와 유럽의 여러 항구로 나갔 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1652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여 여

MY DEAR INDONESIA 54

러 해가 걸려서 완공했다. 건물 가 까이 바다가 있어서 염분으로 건 물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식 에 강한 주석과 동을 건축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1718년, 1719년, 1771년 세 차례에 걸쳐서 보수했 다고 박물관 입구에 적혀 있다. 박 물관의 몇 개의 출입구 문 위의 돌 에 창고 수리, 확장 또는 추가가 된 연도가 적혀 있다. 건물을 지탱했 던 거꾸로 된 Y 자 모양의 큰 철 고 리가 건물 벽에 여전히 남아 네덜 란드 건물의 튼튼함을 자랑하고 있 다. 일본 통치기에는 군수품 창고로 쓰였다가 독립한 후에는 국영전력 공사(PLN)와 국영전화전보국(PTT) 의 창고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1976년에 자 카르타 주정부에서 4차 복구를 했 고, 1977년 7월 7일 자카르타 주지

사인 Ali Sadikin에 의해 해양박물 관으로 개관되었다.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은 VOC 시대부터 있었는데, 앞 에 있는 문은 박물관 부근에 위치 한 암스테르담 게이트에서 가져왔 다. 박물관 50미터 앞에 순다끌라 빠 항에 입출항하는 배를 감독하는 전망대가 서 있고, 길을 따라 있던 조개와 해산물을 파는 빠사르 이깐 (Pasar Ikan, 어시장)은 이제는 역사 속 으로 사라졌다. 진귀한 조개도 참 많았다. 닭발모양이나 뼈만 남은 생선을 연상시키는 조개나 꼬인 오 징어 발 같은 조개도 있었다. 모두 바다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해양박물관은 1,835 점의 수집 물을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되어 인 도네시아 해양 유산을 볼 수 있도 록 배치되어 있다. 특히 대항해시


(위)해양박물관에서 바라본 순다 끌라빠 항 전망대 (사진=사공 경) (아래) 해양박물관 서쪽 전시관에서 동쪽 전시관으로 연결된 다리 2층에서 본 해양박물관 전경 (사진=사공 경)

대의 신기하고 값진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 의 발달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여정과도 호흡을 같이 한다. 2009년 보수 후 한걸음에 달려 갔다. 가장 달라진 것은 서관 전시 실 2층에 순다 끌라빠 항구를 거쳐 간 유명한 탐험가와 바다에 관한 전설이 밀납 인형으로 실제 인물처 럼 전시되어 있었다. 유럽의 대항 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항해 로 동남아에 화교가 자리잡는 계기 를 마련해 준 정화장군, 호주와 뉴 질랜드를 발견한 쿡선장, ‘지구는 둥글다’라는 것을 입증한 마젤란 등도 있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 서 죽었고 마젤란 배와 남은 선원 이 이 항구에 도착했다.) 바다를 지 켜주는 빨간 드레스의 아가씨로 기 억되는 마조 여신, 배의 침몰을 예 견하는 네덜란드 유령선,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풍랑이 이는 험난 한 바닷길의 역사가 오롯이 이곳에 서 배어난다. 2018년 1월 16일 아침, 박물관 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반 정도의 건물과 많은 수집품이 불에 탔다. 이후 코로나 19 이전에 박물관의 반 정도를 오픈하고 있었다. 필자 가 마지막으로 간 것은 2020년 3 월이었다. 반쪽짜리 박물관에서 여 전히 풍랑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 다. 열도인 인도네시아에서 바다의 중요성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 다.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 가 아득한 수평선 너머의 다른 세 계와 부딪힐 때, 거기에는 늘 소중 한 목숨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상 대방에 대한 공평이라든가 배려라 든가 평등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

다. 불의란 힘 있는 자의 특권인가. 이에 저항하는 힘은 언제나 미약한 약자의 몫인가. 강요와 불평등 속 에서 이를 묵묵히 받아주는 건 오 직 바다뿐이었다. 인류가 바다로부터 얻는 건 엄 청나다. 우리는 바다에 잠시도 발 을 딛고 살지 못하고 본거지를 뭍 에 두고 살지만 바다가 없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다. 바다의 풍부 한 이미지들은 그 불가사의만큼이 나 차고 넘친다. 인류 역사상 아무 도 바다 전부를 읽어내지 못했다. 바다는 늘 미지의 바다로 남아있지 만, 인도네시아의 해양박물관엔 파 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그런 불가능 을 가능으로 바꾸려 노력한 이들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주 오랜 신화시대의 바다로부 터 18세기 순다 끌라빠 항구의 분

55 사공경


주한 저녁 풍경까지 그린 디오라 마는 우리를 경험하지 못한 과거 로 데리고 간다. 시대에 따라 변화 해 온 선박들의 모습과 항해, 어로 장비들은 길 없는 바닷길을 헤쳐나 간 발자국들이다. 이처럼 인도네시 아 각 지역의 배 모형들을 감상하 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항해의 모 든 것을 보여준다.

바다내음에 취하게 만든 기억에 남는 몇 전시품만 소개하고자 한 다. Dugong은 말레이어로 ‘인어’ 라는 뜻이다. 이처럼 인어로 불리 던 큰 두융(Dugong, Duyung)도 박제 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두융은 포 유류의 한 종으로 열대 바다에 퍼 져있고 작은 무리를 지어 산다. 길 이는 2-3m 정도이며 몸무게는 150-200kg 정도이다. 임신 기간은

12개월이며 한번에 1마리의 새끼 를 낳는다. 수컷의 엄니와 지방, 눈 물을 얻기 위해 많이 포획한다. 두 융의 눈물은 향수나 약으로 사용 되며 이 생선의 기름은 등불을 켜 는데도 사용했다고 한다. 선원들은 배위에서 보았을 때 헤엄치는 모습 의 실루엣이 사람을 닮아 두융(듀 공)을 인어로 생각했다고 한다. 동 성애자인 안드르센은 사랑을 고백 할 수가 없어서 그 아픔을 작품에 서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어버리 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안드 르센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인어 공주>라는 동화로 승화시켰듯이 눈물을 향수로 사용한다니 모든 아 픔에는 향기가 있는 것이다.

(위)서쪽 전시관에 있는 칼리만탄 문양이 그려진 칼리만탄 배 (사진=사공 경) (아래)통나무로 만든 원시 특유의 문양이 새겨진 이리얀지야 지역의 배. 뱃전 밖에 있는 기움 돛 줄대가 이채롭다. ( 사진=사공 경)

MY DEAR INDONESIA 56

삐니시 배(Kapal Pinisi)는 남부 술 라웨시의 부기스(Bugis)족과 마까 사르(Makassar)족에서 유래된 전통 범선으로 7개의 돛을 달고 있다. 중 요 돛대에 신앙고백이 적혀 있고, 7개의 돛은 이슬람의 성서 코란의 첫 번째 장 Al-Fatihah 기도문 7구 절을 뜻한다. 1500년대부터 삐니 시 배를 타고 바다를 탐험했지만 14세기부터 이 배를 만들었다고 한 다. 남부 술라웨시 루우(Luwu)왕국 의 사웨리가딩 왕이 청혼하러 삐니 시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으 로 삐니시 배를 탄 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삐니시를 타고 돌아 오다가 배는 3부분으로 갈라져, 남 부 술라웨시의 아라(Ara)와 따나레 모(Tanah Lemo), 비라(Bira) 3개의 마 을로 밀려왔다. 아라 마을 사람들 이 선체를 만든 후에 따나레모 마 을 사람들은 선체를 설치했다. 그 다음에 비라 마을 사람들은 7개의 돛을 올려서 마무리를 했다. 배를 고치라고 명령한 사람의 이름이 삐


돛을 내린 kapal Pinisi 1999년 촬영 (사진=사공 경)

니시라 비라 지역 사람들은 돛을 삐니시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 으나, 삐니시는 ‘바람과 파도 소리 를 들을 때 바다의 향기로 가득차 다’ 라는 뜻이다. 순다 끌라빠 항구 에는 아직도 삐니시 범선이 큰 돛 으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으로 펼 쳐져 있다. 여러 개의 깃발을 달고 네덜란 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인도네시아 의 암본까지 항해했던 배를 보면 나는 어느새 동화 속을 거닐고 있 다. 1700년대에 만들어진 배를 타 고 미지의 세계로 가고 싶은 충동 을 느끼게 된다. 당시 항해 기간은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생 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에 실 었다. 심지어는 닭을 키우는 닭장 까지 있었다고 한다.

배 앞부분에는 사자상과 여인상 이 놓여있다. 사자는 배를 지켜주 고, 여인은 성난 파도를 달래준다 고 믿었다고 한다. 이 배의 원형은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있는데 네덜 란드 정부가 이 배의 모형을 선물 했다고 한다. 이 모형 배는 예전에 배 멀미약인 Anytimo를 선전할 때 사용되었던 배의 실제 모델이다. 많은 기회와 희망을 주는 바다 를 마음껏 느끼며 인도네시아가 나 름대로 구축한 고도의 해양기술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 의 창고가 10개 넘게 있었다고 하 니 그 엄청난 착취량에 한숨이 절 로 나왔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통 당했을 인도네시아인들의 신음소 리가 들리는 듯하다.

외로울 때 나는 박물관에 들러 상상의 나래를 펴고 바다로 떠난 다. 다약족이 되어 카누를 타고 마 하깜 강을 누비기도 하고, 피터팬 이 되어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도 한다. 「날개」의 이상(李箱)처럼 박 제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삐니시의 의미처럼 새 한 마리 가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 다 향기 가득 마시며’ 순다 끌라빠 항구의 허공을 날고 있다. 뭍에 딛 는 인어공주의 다리의 아픔을 달래 주면서. 삐니시여. 돛을 올리자, 미래를 향해.

57 사공경


바틱 작업장인 ‘바틱 로소(Batik Rosso)’ 에 천연염색 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색색의 다양한 문양은 여러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작업장 뒤쪽에 펼쳐진 논밭에는 전형적인 자바 풍경이 평 온하게 펼쳐져 있었다. 1995년부터 직물박물관에 다녔 던 나는 박물관 직원인 아리(Ari) 와 여행도 하며 가까이 지냈다. 아 리는 바틱을 좋아하는 나를 좋아했 다. 아리는 족자에 가면 구루 사공 이 만나야 할 바틱 예술가가 있다

고 말하곤 했다. 로소(1970~2014년)는 족자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바틱 천연염색 예술가였다. 바틱 예술세계에서 주 목 받는 그는 천연염색 예술세계에 서는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다 양한 천연색깔과 문양을 타이-다 잉(Tie-Dying)과 바틱기법을 콜라보 로 만들기도 했으며, 바틱 만드는 과정을 춤으로 형상화하기도 한 춤 꾼이기도 했다. 또한 가믈란 연주, 다양한 패션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문화보존 영역에서 전문성을 인정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받아 일본·태국·인도 등에서 족자 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국제적인 상 을 여러번 수상하였다. 특히 2010 년 태국 방콕에서 아세안 국제 실 크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하였다. 내가 로소를 처음 만난 것은 그 의 작업장에서였다. 작업장의 뻔도 뽀(pendopo)에는 그의 작품이 전시 되어 있었고 정원에는 다양한 과일 나무가 있었다. 정원 안쪽으로 들 어가면 2층 높이에서부터 지상까 지 높게 혹은 낮게 펼쳐져 있는 젖 은 바틱 천은 바람이 불때마다 흔

/ 사공 경

패션쇼 피날레에서 모델과 함께 한 로소 /출처: youtube

MY DEAR INDONESIA 58


들렸다. 햇빛에 빛나는 바틱 천은 밝은 옷을 입은 무희의 아름다운 움직임처럼 보였다. 다채로운 색의 드레스를 입은 무희들의 우아한 움 직임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무희는 하늘을 닮은 인디고색 을, 어떤 이는 땅을 닮은 황색을, 어 떤 이는 나무를 닮은 소간색을, 어 떤 이는 나뭇잎을 닮은 초록색을 입고 바틱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었다. 뒤쪽에는 짠띵으로 그리는 바틱 뚤리스와 짭으로 찍는 바틱짭을 만 드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천 연염료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채색 과정을 잘 설명해 주었다.

로소 바틱 작업장과 로소 바띡 (사진=사공 경)

망고 잎에서는 녹색을, 심황과 낭까(Jackfruit) 나무껍질에서는 황 색을 얻었다. 천연 성분을 사용하 기 때문에 염색 공정이 오래 걸 리고 또 여러번 염색해야 한다고 했다. 소가 나무에서 갈색, 떼게 르(Teger) 나무에서 황갈색, 띵기 (Tingi) 나무의 붉은색, 잠발(Jambal) 나무의 붉은 갈색, 인디고 잎의 푸 른색을 추출하는 과정도 설명하면 서 인내 없고 자바 철학을 이해하 지 않고서 천연염색은 만들어 질 수 없다고도 했다. 왜 천연염색만 고집하느냐, 너 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심플하게 대답했다. “원래 자바 전통 바틱은 천연염 색을 사용합니다. 저는 전통을 지 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천연색은 사람의 피부 톤과 같습니다. 사람 이 곧 자연입니다. 자연과 사람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질서하 게 변화하는 디지털의 시간에서 벗 어나고 싶습니다.” 그는 천연염색의 불확실성을 좋 아한다고 말했다. 색상 결과에 따 른 여러가지 조건 중에서 예를들어 태양열에 많이 노출되면 밝은 색상 이 된다고 했다. 같은 색상의 색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더 창의적이 라고 말했다. 완전하지 않고 불확 실한 인생처럼. 2010년에 직물박물관에서 열린 바틱 전시회 오프닝 때 한 남자가 한 스텝 한 스텝 절도 있는 느린 춤 사위로 무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저 무용수가 누굴까? 멋지다. 당 시 막연하게나마 인도네시아와 한 국의 예술의 콜라보를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꿈꾸던 나는 다른 사람

들보다는 공연, 전시 등 예술활동 을 예민한 시선으로 보는 편이다. 그 춤사위는 강렬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부관장 아리에게 물 었다. 저 남자 무용수가 누구냐고. 족자에서 만난 그 바틱 예술가, 로 소라고 했다. 춤을 만들고 전시와 공연을 세련되게 연출하는 예술가 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단한 춤꾼인 줄은 몰랐다. 2011년에 한인니문화연구원이 개원한지 얼마되지 않아 로소가 찾 아왔다. 바틱 전시나 콜라보 공연 을 하고 싶으니 후원자가 되어 달 라고 했다. 당시 그런 능력이 없었 던 나는 짜증부터 났다. 처음 만났 을 때부터 로소의 예술성을 잘 알 게 되었고 보존해야 할 예술가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부담으로 다가왔 고, 부담은 짜증으로 표현되었다. 그 후, 탐방팀을 꾸려서 족자 피 닉스 호텔에서 그의 공연과 작은 전시를 봤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을 저 예술가가 고독하 게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은 한켠 으로 미루어 두었다. 나는 그를 무대로 불러내 한인 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 9월에 한인니문화연구원 주최로 ‘누산따라에서 한반도까 지’라는 음악회를 개최했다. 당시 민간 문화 교류 행사가 많이 없었 던 시절이라 반응이 좋았다. 로소 팀(2인)의 바틱춤 공연을 나는 숨 죽이면서 봤다. 바틱은 결과가 아니라 원사가 패션이 되는 과정이다. 그는 실을 뽑아내고 천을 만들고 바틱을 그리 고 염색을 하고 완성된 한 벌의 바 틱을 입고 뽐내는 장면을 춤으로

59 사공경


연출하였다. 그의 바틱 춤에는 인 내와 족자의 느림의 미학이 잘 표 현되어 있었다. 행사 후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 떤 공연이 가장 좋았으며, 어떤 공 연이 가장 어필되지 않았느냐고. 모든 공연이 수준 이상이었지만 굳 이 말하자면 로소 팀의 무용이 지 루했다는 대답도 있었다. 그의 예 술성이 표면적으로 강하게 드러나 지 않아서 나는 안타까웠다. 1년 뒤 그의 작업장을 다시 찾았 을 때 우리를 위해서 그가 춤을 추 었다. 바틱 작업 과정처럼 진지하 고 아름다운 춤이었다. 2014년 로소가 한인니문화연구 원에 와서 그가 걸어온 길과 로소 바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가 살아온 길에서 외롭게 서 있 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 사회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하겠지... 어두운 밤하늘 보다 더 짙게 내려 앉은 로소의 슬픔을, 사명감의 무 게를 나는 보았다. 2014년 6월에 한국과 인도네시 아의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교류 를 위해 로소가 이끄는 족자예술단 체와 한인회 한인니문화연구원과 MOU를 체결하였다. 체결을 축하하 며 자바 전통 복장을 하고 그는 춤 을 추었다. 직접 만든 바틱 춤을 추 었다. 이 춤이 그가 마지막으로 춘 춤이었다. 초췌한 모습에 좀 놀랐다. 옛날의 빛나던 모습은 아니었다. 2002년에 문을 연 작업장인 바 틱 로소는 오랫동안 경영난에 허덕 이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다짐했 다. 언젠가 내가 혹은 연구원이 기

MY DEAR INDONESIA 60

회가 생기면 로소의 무대를 만들어 주리라고. 그 무렵 연구원 또한 운 영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일들 이 쌓여 있었다. 여력이 없었던 나 는 로소의 예술성이 부담으로 다가 왔고 힘든 내 모습이 연상되어 눈 감아버리고 싶었다. 로소는 1970년 12월 족자의 반 뚤(Bantul)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 학교 때부터 다양한 콘테스트 및 패션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였다. 로소는 1990-1991년부터 PAPMI (Perhimpunan Ahli Perancang Mode Indonesia 산하 Yogyakarta Fashion School: 인도네시아 패션 디자이너 협회 산하 족자 카르타 패션 스쿨)에서 디자인을 전공

했으며, 1991-1992년에 바틱 의 류를 전공하여 패션 세계를 마스 터하고 ABA 족자카르타 (Akademi Bahasa Asing Yogyakarta 족자카르타 외국 어 아카데미)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 공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패션 세 계를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하면 서 인도네시아 패션계를 주름잡았 다. 2002년에 Batik Rosso를 오픈 하고 꿈을 펼치기 시작하였으나 전 통 천연염색보다는 실용을 추구하 는 시기였다. 2014년 8월 족자의 한인회 행사 에 로소 팀을 소개했다. 로소 춤이 보고 싶어서 족자로 갔다. 로소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로소의 제자들이 와서 행사를 빛내주었다. 로소 작업장에 가서 바틱냄새 자연 냄새를 맡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젊은 예술가 로소가 걱정이 되었다. 2014년 10월 제2회 문예총 종합 예술제에 로소 팀을 초청했고 공연 장인 한국학교에 로소가 제자들을

데리고 왔다. 8월 입원 이후 곧 퇴 원했다고 들었는데 지난 6월보다 더 수척하고 병든 모습이었다. 항 상 자바양반의 예의를 갖춘 그였지 만 예술가로서의 자부심 있는 당당 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꾼과 선녀”를 공연하였다. 그날의 공연은 주문한대로 빠르고 도 품위 있는 공연이었다. 이렇게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만나는구나 생각하며 공연 후 훌륭한 공연을 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곧 있 을 “제5회 인도네시아이야기 문학 상 시상식”에 초대하겠다고 말했 다. 공연장 한쪽에 바틱을 전시해 줄 수 있는지도 물었다.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구루 사공. 바나나 섬유 직물로 만든 바틱 드레스를 입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라고 작 은 목소리로 말했다. 2010년 로소는 바나나 줄기에서 나온 섬유에서 바틱 천을 만드는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다. 바나나 나무는 매우 경제적이며 손쉽게 얻 을 수 있으며 면보다 부드럽고 실 크보다 실용적이라고 언젠가 말했 던 것이 생각났다. 바틱 기법으로 만든 천연염색의 아름다움을, 바나나 섬유에서 로소 바틱 패션으로 변신하는 것을 한국 예술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뒷 뜰이 있는 전시장이면 좋겠어. 천 연바틱의 아름다움이 춤추고, 흔들 리는 바틱 천 아래에서 로소가 ‘바 틱 춤’을 추면서 오프닝을 해주면 좋겠어라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 았다. ‘그날이 언제 올까.’ 라고 생 각하니 좀 서글퍼졌다. 문학상 시상식에 초대하기 위해 그에게 여러번 전화를 했으나 받지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MOU 체결 후 축하의 춤을 추고 있는 로소 (사진=사공 경)

않았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2014년 12월 21일)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했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천연염색의 철학, 인생은 불확실하다는 것. 완전하지 않다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갔다. ‘그날이 왔다.’ 2016년, 2017년, 2019년 이어서 한국에서 바틱 초대전이 있었다. 그러나 로소는 없 었다. 2016년 6월 바틱 전시회, 한세 24 초대전 <Batik The Soul of Indonesia Exhibition>(서울 인사동)때 그 가 2005년에 무대의상으로 만든 것을 전시했다. 2017년 <Highlight Jogja Batik Exhibition>(한국문화 원) 바틱 전시회 때 한 공간에 나는 로소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를 기리며. ‘미안해’를 되뇌이며. 정체성과 작가 정신에 끊임없이 고민하던 한 예 술가가 무너져가는 모습을 나는 마음 아프게 바라 보며,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다. 정말 미안해. 그 때는 나도 정말 힘들었어요. 2017년, 다시 찾은 Batik Rosso에는 바람만 펄럭 이고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흔들 리던 자연의 몸짓은 없었다. 뒤쪽에도 천연색을 추 출하고 바틱을 삶고 하던 큰 솥만 덩그러니 놓여 있 었다. 옆의 논밭에서 아궁이로 휘어지던 불꽃도 없 었다. 잠자리 몇 마리 빨랫줄 위를 맴돌고 있을 뿐.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참고자료 https://travel.kompas.com/read/2011/12/19/15463331/Ketika.Rosso.Membagi.Ilmu.Membatik. Pesona Batik Warna Alam book by Rosso &Heni Nur Afni

61 사공경


발리를 키운 것은 팔할이 예술이었다 - 자연과 종교와 예술혼의 합작품, 발리 –

발리 오달란(Odalan) 축제에 제물을 들고 가는 여인들 (사진=사공 경)

/ 사공 경

여행을 가본 지역은 대부분 다 시 가지 않는다. 발리는 다르다. 발 리를 갔다 와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깊은 향수로 몸살이 나 다 시 발리를 찾게 된다. 발리를 태어나게 한 것은 자연과 인간을 만든 신의 손길이지만, 발리 를 키운 것은 무엇보다도 푸른 눈 을 가진 예술가들의 예술혼과 발리 문화를 서구에서도 통용되는 문화 로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우붓의 수까와띠 왕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 자연이 만든 발리 발리의 인구는 4.2백만 명(2015 년 기준) 으로

이 중 힌두교도가 85%, 무슬림이 12%, 크리스천 등

MY DEAR INDONESIA 62

이 3%이다. 발리의 서쪽에 있는 자 바와 동쪽에 있는 롬복은 무슬림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지역인데, 그 두 섬 중간에 위치한 발리가 이슬 람의 영향에서 벗어나 힌두교를 유 지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발리 는 다른 지역에 비해 외부의 침략 을 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발리는 북쪽으로 갈수록 표고가 높아지고, 아궁 산(Gunung Agung, 3,148m) 등이 위치하여 발리의 동서남북 간 이동 이 쉽지 않다. 동쪽으로는 산이 바 로 해안선까지 연결되어 있고, 서 쪽으로는 석회암의 침하로 많은 절 벽이 있어 농사를 짓거나 배의 정 박이 어렵다고 한다. 발리는 말루쿠 지역처럼 향신료 도 많이 나지 않고, 플로레스처럼

백단향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 세력의 관심이 적었다고 볼 수 있 다. 네덜란드가 발리에 관해 관심 을 가졌던 것은 발리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자바와 롬복 동쪽의 이 슬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완충지 로서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또 한 발리인들은 부지런하고 농사 잘 짓기로 유명하다. 항상 꽃이 지지 않는 나라 인도 네시아. 발리에 오면 파아란 하늘 때문일까. 발리 꽃들은 더 특별해 보인다. 그중에서도 ‘발리 꽃’이라 고 불리는 깜보자는 꽃잎이 5장으 로 되어 있으며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향기 때 문일까. 고혹적이다. 발리는 천리 향이라고도 불리는 깜보자 향기로 가득하다. 또 발리에서 해변에 줄 지어 늘어선 야자수 아래에 서면


(좌)발리 뻰조르(penjor),(위)브사키(Besakih) 사원 ,(아래)짜낭사리(Canang Sari) (사진=사공 경)

섬세하고 강렬한 햇빛 때문에 야자 수가 수묵화로 보이기도 한다. 발리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인도 양 맑고 푸른 바다나 수평선을 활 기차게 잘 연주하면서 불타는 석양 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영화 “에마뉘엘 부인”의 무대가 된 후에 는 발리 섬에서도 최고의 명소가 된 따나 롯 사원의 석양도 유명하 다. 울루와뚜 사원은 해발 75km의 절벽위에 세워져 끝에 서면 눈앞이 아찔하다. 이곳에서 께짝 댄스를 감상하면서 울루와뚜의 일몰을 보 고 있노라면 내가 살던 세상은 저 멀리에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발리 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무장해제 시 키기에 충분하다.

# 신이 만든 발리 ‘발리(Bali)’는 산스크리트어로 ‘바친다(Wali)’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신에게 제물이나 자신을 받친다 는 의미인지, 이 지역을 전체로 신에 게 받친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발리에 오면 언제나 축제를 만 날 수 있다. 집집마다 ‘뺀조르 (Penjor)’를 높이 올리고 끄바야 발 리를 정성껏 차려 입고 제물인 그 봉안(Gebongan)을 높이 이고 사원으 로 가는 제례행렬에는 종교적 신성 함이 느껴진다. 뺀조르는 끝이 휘어진 긴 대나 무 막대기에 노란빛 코코넛 잎인 자누르(Janur)로 꾸며진 것이다. 이 것은 발리 힌두교 신자들이 중요

한 의식에서 쓰는 도구이며, 산과 우주 공간을 상징하며, 발리인에게 가장 영적인 산인 구눙 아궁을 상 징하기도 한다. 또한 겸손한 마음 으로 신께 헌신하고 조상께 기도하 며 비옥한 땅을 주신 것에 대한 감 사함을 나타낸다. 뺀조르를 만들 때 자신의 염원을 담고 다음 생애 에는 좋은 생명체로 태어나기를 기 원한다고 한다. 자연물로 만드는 뺀조르는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다. 발리력은 일 년이 210일이다. 일 년에 한번 조상영혼이 지상을 방문 하는 날을 기리는 갈룽안(Galungan) 축제 때에는 대로변 양쪽에도 골목 골목 집집마다에다도 뺀조르를 달 아서 마치 숲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리 힌두의 최고 신인 상향위디와 사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발리는 온 통 축제 속에 들어간다. 뺀조르 숲

63 사공경


속을 걸으면 저절로 신이 주신 생 명에 감사하며 굽은 뻰조르처럼 머 리가 숙여진다. 뺀조르를 만들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굽은 대나무라고 한다. 갈룽안 축제는 보통 10일 동 안 열리며 마지막 날 축제가 꾸닝 안(Kuningan) 축제이다. 사원이 세워진 날을 기념하는 오달란(Odalan) 축제 또한 발리의 대표적인 축제이다. 오달란 축제 만도 6,000번이 열린다. 발리에는 6,000개의 힌두사원인 뿌라(Pura) 가 마을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리고 집집마다 신당처럼 꾸며 놓은 기도처가 있다. 축제 때 할머니들이 우아하게 춤 추는 것을 볼 수 있다. 발리 사람들 에게 춤은 또 다른 신과 신위에게 바치는 봉헌물이다. 축제를 통해 그 들은 신께 더 가까이가고 전통문화 를 전승시키면서 과거와 오늘을 살 아간다. 또한 축제를 즐기면서 유대 감이 생기고 신화적 이야기를 통해 창조적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축 제는 예술이며 역사이며, 문화이며, 전통이다. 이는 곧 인문학이다. 얼마 전 발리 힌두의 총본산인 브사키(Besakih) 사원 가는 길에 제 물인 짜낭사리(Canang Sari)을 사고 사진을 찍기 위해 재래시장에 내린 적이 있다. 택시 기사는 차문도 잠 그지 않고 꽃과 과자 등 제물을 골 랐다. 나는 불안해서 계속 차 쪽을 지켜보았다. 기사는 “힌두교는 곳 곳에 신이 있습니다. 외지인이 많 은 누사두아 쪽은 몰라도 발리인들 만 있는 이곳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가까이 느끼고 삽니다. 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MY DEAR INDONESIA 64

# 예술인이 만든 발리

적인 분위기, 널리 퍼진 위대한 예 술품을 주었다. 발리 무희와 결혼했 으며 발리에 정착한 그는 삶과 일 에 대한 꿈을 깨닫기 시작한다.

1920년~1930년대 발리의 르네 상스 시대를 이끈 예술가 중 한사 람인 멕시코 작가 미겔 코바루비 아스(Miguel Covarrubias, 1904-1957)는 「발리 섬」 (1937년)이라는 책에서 “발리만큼 자연과 사람, 신이 완벽 하게 조화를 이룬 곳은 없다”고 했 다. 그는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하다.

우붓의 기안야르 지역의 왕, 조꼬르다 그데 아궁 수까와띠 (Tjokorda Gde Agung Sukawati)는 안토 니오에게 땅을 주었다. 지금 안토 니오 박물관 자리이다. 그의 그림 은 낭만적이고 몽환적이다. 영원한 여성 화가이며 그에게는 여성이 곧 예술임을 알 수 있다.

코바루비아스의 <사누르 해변> 이라는 작품에는 코발트색 하늘을 이고 아름다운 인도양 해변에 앉아 있는 여인이 있다. 발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벼 이삭을 이고 가는 여 인들 뒤에는 우붓의 초록빛 전원이 펼쳐진다. 발리 회화에는 까인빤장

네덜란드 작가 루돌프 보넷 (Rudolf Bonnet, 1895–1978)은 1929년 발리에 도착하여 작가 월트 스파이 (Walter Spies, 1895–1942)와 우붓의 왕 궁과 가깝게 지냈다. 보넷은 우붓에 머물면서 의료 및 교육을 포함한 지역 사회 문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억류 수용소 에서 보냈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발 리 땀빡시링(Tampaksiring)에 궁전을 세운 후 보넷을 자주 찾아 방문했 다. 허나 보넷은 1957년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특정한 그림을 팔기를 거부한 후 발리에서 강제 추방되었 다. 그는 15년 후 노인이 되어서 돌 아 왔다고 한다. 그는 동성연애자로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발리의 예술 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헌신했으며 우붓의 뿌리 루키산(Puri Lukisan) 박 물관을 만들었다.

(Kain Panjang)만

입고 끔번(Kemben) 도 가슴에 두르지 않은 발리 여인 들이 논농사를 하거나 자연 속에 있는 그림을 보면 아름답다 못해 찬란하다. 1950년대까지 발리여인 들은 끔번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벼를 추수하는 여인들이나 벼를 이 식하는 관상적이면서도 생생한 그 림 앞에 서면 사람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예술임을 알 수가 있다. 예술의 열정으로 여성을 그린 스 페인 작가 안토니오 블랑코(Antonio Blanco, 1912-1999)는

1952년에 발리 에 왔으며 발리 회화의 대표주자이 다. 발리에 문명이 들어오고 관광객 이 들어오면서 옷을 입지 않는 문 화는 지킬 수 없었지만, 자신의 박 물관 내에서 1990년대까지 발리 문 화를 지켜왔다. 발리는 안토니오에 게 예술적 독창성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아름다운 풍경, 환상

보넷은 1978년 네덜란드에서 죽 는다. 1979년 발리의식으로 화장되 었고 유골은 그의 친한 친구 아궁 수카와티(Corkorda Agung Sukawati) 왕 자와 함께 바다에 던져졌다. 발리의 전설적인 독일 화가 이자 음악가인 월트 스피스는 1925~1940년 우붓에 살았는데 보


넷과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끄는 주도 적인 역할을 한다. 스피스는 무용가이기도 했다. 우리가 발리에서 만나는 께짝댄스나 바롱댄스를 재연출한 것도 스피스였다. 그 는 뛰어난 예술가였으나 참된 조국이 없는 문화적 방랑아이기도 했다. 그는 독일 국 적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성장하지만 1 차 세계대전 중 제2의 조국인 러시아에서 억류생활을 하게 된다. 조국인 독일에서도 동성연애자인 그는 적응하지 못한다. 우붓의 수까와띠 왕은 유럽의 예술가 들을 통해 발리예술을 세계화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아리 스미스(Arie Smith, 1916-2016)는 1938 년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에 파견되어 바타 비아에 있는 네덜란드 육군 지형 서비스의 석판인으로 일했다. 1942년 초 스미스는 싱 가포르, 태국, 버마에서 도로, 교량 및 철도 를 건설하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3년 반 을 보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스미스 는 석방되어 새로운 인도네시아 공화국으 로 돌아왔다. 그는 1951년 인도네시아 시민 이 되었으며 반둥공대(ITB)에서 그래픽과 리소그래피를 가르쳤다. 미술 상인 짐 판디 (Jim Pandy)의 초대에 따라 1956년 발리를 방 문하여 사누르 해변에 있는 작은 집에 머물 렀다. 그는 밝은 색을 사랑했으며 발리의 풍 경에 강렬한 빛을 사용한 색깔을 사용하였 다. 발리의 그림 발전에 대한 그의 역할을 인정받아 1992년 발리 주정부로부터 다르 마 꾸수마(Darma Kusuma) 상을 받았다. 테오 마이어 (1908-1982)도 손꼽히는 작 가이다. 스위스 화가로 타히티에서 놓친 열대의 원시적 단순성을 발리 사누르에 정착하고 찾는다. 타이티는 기독교가 들어 와 전통문화가 많이 파괴된다. 그는 월터 스파이를 비롯한 발리섬의 다른 예술가들 과 친구가 되었으며 수카르노의 신임을 받게 된다. 인니 작가 이다 바구스 뇨만 라이( Ida

(위)안토니오 블랑코(Antonio Blanco, 1912-1999) 작품 (아래)아리 스미스(Arie Smith, 1916-2016) 작품 (사진=사공 경)

등의 작품을 느까 박물관(Neka Art Museum)이나 아궁 라이 박물관(Agung Rai Museum of Art)에서 만 날 수 있다. 이들 발리 그림 속에서도 사람과 신과 자연이 조화 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붓에는 50여 곳 이 넘는 갤러리가 몰려 있다. 그림이나 목공 작품을 파는 작은 상점까지 포함하면 마을 전체가 갤러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붓이 있어서 발리를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붓은 유명한 예술촌이다. Bagus Nyoman Rai 1915-2000)

이렇게 발리는 자연, 신, 사람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 기 때문에 사람들은 발리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아름다 움은 그 자체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 되며 우리 삶에 색깔을 부여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다시 발리를 찾게 된다. 발리는 다르다.

참고자료 가종수 「신들의 섬 발리」 2010 노경래 「한국 인이 알아야할 인도네시아」 2017

65 사공경


잘리 잘리~~~. 경쾌한 리듬의 노래가 들린다. 전통 복장을 한 사내 둘이 삐꿀(pikul)을 어깨에 메고 주문한 요리를 실어 온다. 고사리처럼 여린 손가락을 쥐락펴락 하면서 무용수들이 인도네시아의 4행시 빤뚠(Pantun) 형 태로 되어 있는 브따위 포크 송, 잘리 잘리(Jali-Jali)에 맞 추어 춤을 추면서 다가온다.

capek sedikit tidak perduli sayang 내가 좀 피곤하긴 한데 상관없어

asalkan tuan asalkan tuan senang di hati 사랑하는 당신이 기쁘다면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Tugu Kunstkring Paleis)라 는 곳에서 고기나 야채 따위의 많은 요리를 곁들인 인도네시아 음식에서 기원한 네덜란드 쌀요리인 라이스트타펠(Rijsttafel)이라는 요리를 시키면 이렇 게 격식을 갖추어 서빙한다. 이곳에서 음식은 눈과 귀로 먹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뚜구 꾼스트끄링 빨레이스에 배어 있는 역사 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들 의 철학을 듣게 된다면 이곳은 더 자주 찾게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Tugu Kunstkring Paleis’는 ‘기념비적 예술 의 전당’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외 관부터 남다르다. 눈부신 하얀색 건물에 아치형 문 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유럽의 어느 궁전처

예술의 전당,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 사공 경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전경 (사진: 사공경)

MY DEAR INDONESIA 66


럼 절제된 아름다움이 품위에서 잘 나타난다. 2층을 올려다보면 빨 간색 차양이 드리워져 있으며, 외 벽에 ‘IMMIGRASIE DIENSTDJAWATANIMMIGRASI’라고 새 겨져 있는데 예전에 이 건물이 이 민국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다. 우리 같으면 건물 용도가 바뀌 면 그 전의 흔적은 지워 버리기 일 쑤인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얼마 나 지나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 는 지 알 수가 있다. 네덜란드 건축가 무젠(Moojen)은 흰색이 주는 순결함과 빨간색이 주 는 강렬함을 잘 조합해서 이 건물 을 지었다. 이 건물은 1913년 건축 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914년 4월 ‘네덜란드-인디세 동인도 예술그 룹’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부터 중 요한 전시장 역할을 함과 동시에 고급 사교장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1920년에는 ‘바타비아 예술관’ 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 빈 센트 반 고흐, 고갱, 파블로 파카소, 샤갈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전시회 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은 또한 외교관, 시인, 예술가, 음악가, 고위 공무원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그들 은 이곳에서 문화와 예술을 논하고 사교를 즐기며 와인과 함께 그들의 지적 호기심을 채웠다. 1942년~1945년에는 인도네시 아의 이슬람위원회 Al A'la 본부 (MADJLIS ISLAM ALA INDONESIA)로

사용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 단 벽에 결려 있는 옛날 사진 액자 를 보면 건물에 약자로 M.I.A.I 로 적혀 있다. 1950년에서 1997년까지는 중부 자카르타 출입국 관리사무소(이민

국)로 사용하였다.

1997년에 수하르또 전 대통령의 말썽꾸러기 아들 토미가 이 건물을 샀다가, 2003년 당시 자카르타 주 정부에서 이 건물을 사들였다. 2008년에 이 건물은 고급 클럽 인 ‘부다 바’(Budha Bar)로 바뀌었 다. 당시 인도네시아 불교계에서는 연일 시위를 했다. 크고 작은 불상 을 여기저기 모셔 두고 은은한 조 명 아래서 맥주나 와인 잔을 치켜 세우는 것을 불교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부 다 바는 2011년 문을 닫아야 했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뚜구(Tugu) 그룹이 이 건물을 운영하고 있다. 뚜 구 그룹은 이 건물을 이 예술의 전당 이 문을 열었던 99년 전의 분위기로 완전히 바꿔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 스란 이름으로 재개관하였다. 1층은 주로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살롱 문 화의 오아시스로, 2층은 전시, 공연 을 하도록 변경하였다. 이 개관식에 는 당시 자카르타 주지사인 조코 위 도도가 초대되었다. 뚜구 그룹은 인도네시아 군도의 아름다운 예술, 문화 및 역사를 재현 하는데 가치를 두는 것으로 유명하 다. 뚜구 그룹은 문화 예술의 자랑스 러운 중심지였던 이곳의 아름다움 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예술의 전 당을 보존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아름다운 예술 작품 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장엄한 인 테리어를 통해 건물에 새로운 생명 을 불어넣었는데, 뚜구의 많은 유 물, 장식물들은 설탕 왕 Oei Tiong Ham 가족으로부터 희사 받은 것 이며, 뚜구에서 보관하고 있던 수

(위)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1층 메인홀인 디뽀느고로룸 (사진=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가운데)무용수들이 잘리잘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입장하고 있다. (사진=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아래)물따뚤리 부조물(사진=사공 경)

카르노에 관한 유물은 2층 ‘수카르 노 방’에 배치하였다. 정문의 아치형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 금장식으로 된 MN라는 상징 문장이 들어온다. MN는 중부 자바 수라까르타 왕국이었던 망꾸 느가라(Mangkunegara)를 뜻한다. 이 문장을 지나 중심 홀에 들어서면 정 면 벽에 걸려 있는 대형 유화 그림 (9mx4m)이 우리를 압도한다. 벽에 는 중부 자바 수라까르타의 또 다른 왕국인 빠꾸부워노(Pakubuwono) 왕 국의 이니셜 PB가 적혀 있는 왕궁

67 사공경


근위대 초소 유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할 때는 웅장한 분 위기 속에서 정복을 차려 입은 근위 대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에서 식사 를 하는 것 같다. 정면 벽에 걸린 대형 유화의 제 목은 <자바의 몰락>이다. 이 그림은 1830년 3월 28일 중부 자바 마글랑 (Magelang)에서 네덜란드 식민정부 군대가 디뽀네고로 왕자를 체포하 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이 작 품은 뚜구 그룹 대표인 안하르 스 챠디브라따(Anhar Setjadibrata)가 그 렸다. 안하르는 작품 안에서 벌어 지고 있는 사건을 직접 바라보는 입장에서 디뽀네고로 왕자에게 마 지막 마실 물을 주는 인도양 바다 의 여신인 냐이 로로 끼둘(Nyai Roro Kidul)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JW Pieneman이 그 린 ‘Diponegoro 왕자의 체포’ 와 Raden Saleh가 그린 같은 테마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린 그림이다. <자바의 몰락> 유화 뒷편에 ‘물 따뚤리 방’이 있다. 안하르가 물 따뚤리라는 필명으로 <막스 하벨 라르>(Max Havelaar)라는 소설을 집 필한 에드와르드 두웨스 데커르 (Edward Douwes Dekker)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딴 방을 마 련했다고 한다. 이 방 입구 벽에는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가 합작으로 제작한 영 화 <막스 하벨라르>의 포스트가 벽 면에 붙어 있다. 영화 속의 하벨라 르와 사이자(Saijah), 아딘다(Adinda) 가 영화 포스트 안에 있다. 제작비 3백만불. 그러나 반뜬(Banten) 지역 주민들을 너무 참혹하게 그렸고 원 주민 군수가 악랄하게 착취하는 장

MY DEAR INDONESIA 68

면 등이 있다는 이유로 영화 검열 을 통과하지 못했었다. 상연 금지 의 실제 이유는 이 영화를 통해 수 하르토 정부의 부정부패가 최근의 일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악습임을 인식하게 되고 재확인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 방에는 막스 하벨라르 소설 내용과 시대 분위기를 전해줄 수 있는 다양한 장식물로 꾸며져 있 다. 예를 들어 당시 네덜란드 식민 통치자와 자바 지역의 귀족들의 초 상화들이 걸려 있다. 특히 배불뚝 이 모습의 자바 남자 귀족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는 같은 동족인 자 바인들의 고혈을 쥐어 짜는 것을 잘 상징하고 있다. 특히 물따뚤리가 굶어 죽지 않고 맞아 죽지 않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해 르박 지도 자들에게 연설하는 장면도 전시되 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거의 절규 가 저절로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오늘, 법을 어겨 가면서 획득한 더 러운 소득에 대해서는, 그리고 착취 를 통해 얻은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

면 그런 더러운 일은 여기서 일어나 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는 악랄한 귀족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우회적으로 연설한다. “자, 여러분, 여기 가난한 지역 을 개발하기 위한 우리들의 임무가 있습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만약 알라가 우리들의 삶을 보호한다면, 우리들의 비옥한 땅은 풍성하게 넘 쳐 날 것입니다.” 막스하벨라르 발간 이후, 1870 년 드디어 식민강제작물 재배 시 대가 종료되고 식민윤리정책 시대 가 시작된다. 마침내 1901년 빌헬 미나 여왕은 윤리정치를 인도네시 아 식민통치 정부의 정책으로 선포 하는데, 관련 사진도 이 방에 전시 되어 있다. 이 윤리 정치는 세 가지 중점을 두었는데 관개 치수, 교육 그리고 인구의 평균적 분산화였다.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한 율리아나 공주가 세례 받는 사진도 걸려 있다. 이 방에 강제 작물재배. 식민 윤리정책, 독립선포까지 다루 고 있다. 또한, 소설 제목은 1988년 ‘막스 하벨라르’표 커피로 다시 태 어나 공정무역의 지평을 열었다.


들의 삶은 나를 열정으로 휘감아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 여성의 치열한 삶을 뒤로 하고 2층으로 올 라가면 ‘고백의 방’이 나온다. 비 밀스럽고 우아하게 꾸며진 이 방에 들어서면 누군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디뽀느고로 룸의 정면에는 안하르 스챠디브라따가 그린 대형 유화 <자바의 몰락>이 걸려 있다.(사진=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물따뚤리 방’을 나오는데 헐벗 은 사이자가 아딘다를 생각하며 노 래하고 있었다. 잔인하게 죽어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서 달아날 수 없었던 붉은 세월 속의 물따뚤리가 거기에 있다. 진리와 정의를 신봉하 며 억압받는 민중의 보호자인 그는 더 넓게, 더 멀리, 더 깊은 곳까지 퍼 져 있는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다가 정작 눈앞에 당면한 간단한 행정 의 무들을 종종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 다. 가끔은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공 격하며 그 용기를 허비하기도 했다. 물따의 방에는 그의 삶과 죽음 이 있다. 1820년 3월 2일 네덜란 드 암스테르담 Korsiespoorsteeg 에서 출생한 집은 현재 물따 박물 관이 됐다. 그가 숨을 거둔 집의 사 진도 걸려있다. 친구들과 독자들이 마련해 준, 라인(Rhein) 강가에 있는 Ingelheim am Rhein에 위치한 집 이다. 그때가 1887년 2월 19일이었 다. 그의 유해는 1887년 2월 23일, 독일 Gotha에서 화장되었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수지 옹 바’(Suzie Wong Bar)도 있다. 이 방 에 들어서면 1960년대 홍콩의 술

‘고백의 방’ 맞은 편에 있는 인 도네시아 독립의 아버지이며 예술 을 무척 사랑했던 ‘수카르노 방’을 지나면 그 옛날 세계적인 예술가들 이 전시했던 전시장이 나온다.

집 풍경이 물씬 풍겨 나온다. 안하 르는 주인공 수지 옹의 자유분방했 지만 치열한 삶을 높게 보고 이 방 을 마련했다고 한다. 리차드 메이 슨(Richard Mason)의 유명한 소설을

전시장을 지나 베란다로 나가면 지나가는 기차 소리도 듣게 되고, 초록의 나무 사이에서 새들이 지저 귀는 소리를 듣게 되면 몽환적인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윌리엄 홀덴(William Holden)과 낸시 콴(Nancy Kwan)이 주연한 이 영화는 1950년대 후반, 아름다운 소녀 수 지옹(Suzie Wong)과 방금 홍콩에 도 착한 영국 화가, Robert Lomax 사 이의 쓰라린 사랑이야기이다. 아주 다른 두 명의 외로운 사람들이 모 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에 성공 한다는 줄거리로 당시 히트작이었 다. Suzie Wong Bar는 1960년대에 Menteng Jakarta에 있는 전설적인 영화관에서 가져온 두 개의 거대한 포스터로 장식되었다. 실제로 영화 에 등장한 전시된 인력거는 거대한 붉은 등불, 장식품들과 함께 1950 년대 전후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 아낸다. 영화의 세트 장면이 연상 되며 병풍에는 이 영화의 감독 주 인공 이름들이 적혀 있다.

Tugu Kunstkring Paleis는 혁명 의 거리이자 문화예술의 거리인 멘 뗑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든다. 브따 위 사람을 상징하는 ‘잘리잘리’가 있어서 예술의 거리이자 독립의 거 리인 찌끼니가 더 빛나 보인다. 내가 때로 힘들고 지칠 때는 이 곳에 들러 경쾌한 ‘잘리 잘리’ 음 악에 이색적인 음식 서빙을 받은 후, 세상에 온 몸을 던진 인물들로 부터 영감과 위로를 받고 싶어진 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알아보 고 기릴 줄 아는 뚜구 그룹의 열정 과 심미안을 닮고 싶다.

*Tugu Kunstkring Paleis: Menteng Jl. Teuku Umar 1번지 *잘리잘리는 브따위 사람을 상징

세상과 당당하게 대결했던 물따 뚤리와 디뽀네고로 왕자. 사회 악 을 외면하지 않고 진정한 인간의 길을 슬프고도 강렬하게 살아온 그

69 사공경


허무하고 한편으론 감사한 1년을 보냈다. 살다보니 이런 시간도 겪게 되는가 싶다. 움직이는 시간이 줄어들면 습작의 시간이 더 많으 리라 생각했건만 내놓을 글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죽었던 시간을 만회 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의 활동 의 폭을 더 강화 시키기 위해 더 힘차고 멋지게 살 아 보리라.

MY DEAR INDONESIA 70


이 강 현 Lee Kang Hyun 인니 거주 25년 삼성전자 28년 재직. 인니 전자협회장. 핸드폰 협회장 역임 현)인니 한인 상공회의소 수석 부회장 현)민주평통 아시아 남부 공공외교 위원장 현)현대 자동차 아시아 태평양 본부 부사장 현) 인문창작클럽 회장

71 이강현


커피 몇잔

/ 이강현

인도네시아에 살면서도 그 좋은 커피를 마실 줄 몰랐다. 그러다 몇 년 전에 큰 결심으로 커피 마시기 를 시작했고, 그때 그 신선함으로 ‘커피 한잔’이란 글을 쓴 적이 있 다. 그 후로도 나의 커피 사랑은 변 함없을 뿐 아니라 더욱 진해져서, 인도네시아 각 지방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그 지역 특산물인 커 피를 꼭 구매해서 맛을 보는 취미 가 생겼다. 한국에서 오는 지인들 에게도 어느 지역 어떤 커피가 맛 이 좋다며 안내하고 선물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인니 커피는 바디가 풍부하고 산도가 비교적 낮아 한국인 입맛 에 잘 맞는다. 적도를 중심으로 5천 킬로미터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독 특한 개성이 있는 커피가 생산되기 때문에 다양한 맛을 지닌 커피를 골라 먹는 재미가 솔솔하다. 시나르마스 그룹 프렝키 회장이 즐겨 마신다고 정기적으로 보내주 는 발리 낀따마니 화산 루왁, 람뿡

MY DEAR INDONESIA 72

에서 목재업을 하시는 민형님 사 모님이 직접 로스팅해서 보내주는 람뿡 루왁, 오랜 친구 이 변호사가 SCBD에서 취미로 운영하는 커피 숍에서 가끔 구매하는 토라자, 자 카르타 커피숍 어디에서나 만나는 아쩨 가요와 자와 커피, 쓴 맛이 강 한 파푸아와 플로레스의 브자와 커 피 등등, 종류도 정말 다양하다. 하지만 인니 석유 재벌 친구 아 들이 보내주는 만델링이 그중 단연 으뜸이다. 수마트라 만델링 특색인 신맛도 강하지 않으면서 혀끝을 감 돌아 입안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오묘한 보 물 같은 맛이다. 그 커피는 나에게 구매처를 가르쳐 주지도 않고 재고 가 바닥이 나면 또 보내주고 보내 준다. 마치 어릴 적 동사무소에서 극빈자 가정에 나누어 주던 밀가루 배급 받아 먹는 기분이 들 정도이 다.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마시다 보니 스타벅스나 시중에 파는 커피 는 입맛에 맞지 않아 대부분 커피 를 집에서만 마시게 된다. 저녁 9 시경에 초밥 하나에 280-350개의 밥알이 들어간다는 일본의 초밥왕 을 떠올리며, 원두를 70-80알 정 도 한 웅큼 손에 쥐어서 수동 그라 인더에 담는다. 쌉소름하며 향긋한 이 커피 한잔이 힘들었던 하루의 피로를 저만치 물러나게 하리란 기 대감으로 70여 차례 원형 돌리기 를 하며 커피를 가는 작업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그 다음엔 200L 정도의 뜨거운 물을 주둥이가 길게

뻗어나온 드립포트에 담아 조선시 대 도자기 굽는 장인의 마음으로, 누가 봐도 멋진 바리스타 간지가 나게끔 정성스레 감아 돌리며 부어 내린다. 커피와 물의 비율이 1대12 인지 15인지 개의치 않고 내린 커 피에 나만의 레시피로 다시 뜨거운 물을 감각적으로 조금 더 부어 아 메리카노보다도 약간 더 연하게 만 들면 모든 준비 작업이 끝나는 것 이다. 드디어 첫 모금을 마시는 순 간, 감미로운 발라드처럼 퍼져 나 오는 커피 향에 마냥 행복해지곤 한다. 날마다 새로운 희열을 느끼 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인니 교민 밴드에 ‘나무커피’란 밴드가 생겨서 회원 가입을 했는데 커피 머신도 판매한 다기에 밴드 운영자에게 연락을 했 다. 커피를 핸드 드립으로만 마시 다 보니 커피 머신으로 내리는 커 피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고 좀 더 커피를 공부해보고 싶어서였다. 운 영자는 구매 전에 직접 본인 집을 방문해서 본 후에 구매하라고 했 다. 시간을 내어 뽄독 짜베에 있는 아담하고 오밀조밀한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는 그분의 개인 주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집안에 온통 커 피 향이 묻어나고 작은 커피나무를 화분에 한그루씩 심어 판매하고 있 었다. 시베리안 허스키 두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찾아오는 손님들을 성심껏 대하는 첫눈에도 선해 보이는 사장님이 다 정하게 느껴졌다. 벽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을 보


니 인니 여성분과 국제 결혼을 했 고 서투른 한국말로 "아빠"를 부르 며 다가오는 아들을 보니 오래전 내 모습과 오버랩되며 더 친밀감이 느껴졌다. 반둥에서 직장 생활하 던 중에 차밭에서 광고 촬영 중이 던 인도네시아 모델과 우연히 마주 쳤고 결국 인생 배필이 되어 인도 네시아에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이슬람인 부인을 이해하며 한국 음 식과 말이 서투른 아내와 결혼 생 활을 하느라 외로움과 어려움도 많 았고 아들에게 한국 말을 직접 가 르치며 커피 비즈니스와 이런저런 유통업을 한다는 그 친구는 오지랍 도 넓고 삶을 긍정하며 맞부딪쳐 가는 용기도 엿볼수 있었다. 무엇 보다도 선하고 친절해서 짧은 만남 이었지만 안쓰럽기도 하면서 마음 에 끌림이 있었다. 그 친구도 예전부터 국제결혼 선배인 내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어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며

직접 우리집을 방문해 커피 머신을 셋팅해 주고 집사람이 때마침 만든 김치전을 맛있게 먹기도 했다. 한 국산 기계인데 나름 청소도 간편하 고 커피 맛도 좋아 커피로 맺은 좋 은 인연이 되었고 그 친구는 그 주 일요일에 양복을 차려 입고 가족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해서 양 가족 이 식사를 같이 했다. 아내는 그 친 구 부인에게 한국인과 결혼해 사는 동병상련의 지혜로움을 전수해 주 었고 그 집 아들도 내 막내와 인니 어, 영어, 한국어로 소통하며 즐거 운 시간을 보냈다.

게 되면서 정말 커피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생활의 단짝이며 활력소가 되어 버렸다. 커피는 이처럼 나에게 잠깐의 여유로움과 또 다른 인연을 맺어주 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10년 이 흐른 뒤엔 어느 골목에서 커피 를 내리고 있는 노년의 바리스타가 되어 있는 내 모습을 꿈꾸어 본다.

커피 머신이 집에 생긴 후로 집 사람도 그동안 즐겨 마시던 봉지 커피를 끊고 이제는 카푸치노나 라 떼를 아침에 한 잔씩 내려 먹게 되 었고 나도 퇴근 후 한잔씩 드립으 로만 내려먹던 커피를 이제는 평일 에는 두 잔, 주말에는 넉 잔씩 마시

73 이강현


/ 이강현

내가 인도네시아에 첫 주재 근 무를 시작했던 93년에 만나서 반 평생 희노애락을 같이 하며 나의 영원한 동반자라 여기던 나의 운전 기사가 한달 전에 시골에 다녀온다 고 떠났다. 일주일 안에 돌아온다 더니 시골에 있는 가족들이 더이 상 자카르타로 일하러 가지 말란다 며 미안하다는 메세지로 이별을 고 해 왔다.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았 다.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 낸 사람이기에 이런 이별은 너무나 도 충격이었다.

MY DEAR INDONESIA 74

가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매정 하다. 헤어질 땐 뒤도 안 돌아보고 고마움도 모르더라던 교민들의 얘 기를 들을 땐, ‘당신들이 잘못해서 그러겠지 난 일평생 같이 하는 기 사가 있어’ 라며 코웃음 쳤던 나는 소위 멘붕 상태에 빠졌다. 힘을 내 어 답신을 보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동거동락하며 보냈는 데, 가족들이 가지 말란다고 해도 자카르타로 다시 돌아와 어느 정도 의 서로가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 하는거 아니냐, 내가 새로운 기사 를 구하면 그 친구에게 내가 자주 다니는 곳들도 안내해 주고, 우리 가족들하고 제대로 이별 인사도 하 고, 퇴직금도 받아 떠나야지 그냥 이렇게 간단하게 그만 두겠다고 하 면 안된다고... 다음날 날라온 답신은 ‘미안하 다’는 단 한마디. 전형적인 인도네 시아 사람들과의 헤어짐이 이렇단 다. 당장 며칠 운전기사가 없어 불 편할 거란 생각보다는 머리 속이 하얗게 텅 빈 듯 사지에 힘이 빠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몇 년 전엔가 주변에서 자기 운전기사 욕하는 꼴 을 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의

가장 고마운 인연인 이 사람을 소 재로 글을 쓴 적도 있었는데, 물론 서로 나이가 들며 이 친구가 일이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 언젠가는 이별하고 시골 가족들에 게 돌아가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렇게 끝날 줄은 상상 도 못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급 하게 결정을 했을까란 물음이 하루 종일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며칠 전 회사 기사 중에 한 명이 코로나에 걸렸고 그 기사와 자주 시간을 보낸 다른 또 한명의 기사 가 코로나에 걸렸다. 회사 총무과 에서 기사들을 조사하다가 내 기사 도 접촉이 있으니 PCR 검사를 하 라고 당부했다. 내 기사는 회사 기 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데 이상 하다 여겨서 물었지만 자기는 같 이 안 어울렸단다. 그래서 총무과 에 그리 이야기했더니, 코로나 걸 린 기사가 보내온 메시지의 접촉자 명단에 내 기사 이름도 있다며 캡 춰해서 보내주었다. 그 사진을 내 기사에게 다시 추궁하듯 보내줬다. 그리고 다음 다음날 시골에 다녀오 겠다고 떠난 게 마지막이었다.


이 친구가 코로나에 걸려 도망쳤 나 아니면 내가 자존심을 건드렸나, 내가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옮겨 이 친구도 옛친구들과 헤어져 새로 운 회사 분위기에 적응이 힘들었나, 이전 회사 퇴직금도 다 받아 더이 상 남아서 나랑 근무를 해야 할 필 요가 없어졌나, 오만가지 아쉬움과 후회가 번갈아 가며 오랜 시간 날 힘들게 했다. 대책이 없어 일단 집 기사를 당분간 쓰기로 하고 집에서 일하는 남자애에게 면허증을 만들 어 주고 집기사로 대처하기로 했다. 새로운 기사와 같이 다니려다 보니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 예전에는 목 적지만 이야기하고 차가 정차하면 내리기만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구 글맵을 키고 차 안에서 쉬지도 못 하고 기사에게 오른쪽 왼쪽을 외쳐 야 했고. 주말에 나올 수 있냐며 기 사 눈치를 보게 되고. 저녁 식사가 늦어지면 먼저 가라 하고 내가 운 전을 하기도 했다. 당연하게 생각했 던 일상의 많은 일들이 그동안 모 르고 지나쳐버린 호사였다는 것을 점점 인지하게 되면서 일상의 불편 함보다는 아직도 받아 들일수 없는 헤어짐이 너무 힘들었다. 꿈을 꾸었다. 어제 새벽 꿈에 그 친구가 나타났다. 다시 일하러 왔 다며, 미안하다고 집에 돌아온 그 친구를 끌어 안고 한참을 흐느끼다 가 잠에서 깨었다. 아무 일 없단 듯 이 새벽 일찍 출근해서 세차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안방 커텐을 젖히 고 아래를 보았건만 여전히 그가 없다. 핸드폰엔 단축키란 기능이 있다. 1번은 보이스 메시지이고, 2 번에서 9번까지는 길게 누르면 자 동으로 상대방에게 연결되기에 연 락이 잦은 순서대로 번호를 입력해 사용하는데 내 전화기 2번은 이 친 구이며 3번이 집사람, 4.5.6이 아들 순서다. 요즘도 걸핏하면 2번을 누 르려다, 아 기사가 바뀌었구나 깨 닫곤 한다. 단축 번호를 바꾸려다 가도 왠지 모를 고집으로 아직 내 전화기 2번은 돌아오지 않는 그 친 구 번호로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방금 전 집사람에게 반 갑게 연락이 왔다. 어제 아침 식사 중에 내가 꿈에 그 친구가 나타났 다고, 도대체 왜 그리 허망하게 떠 났을까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었 는데, 그 친구가 오늘 오전에 집사 람에게 전화를 했단다. 식구들 안 부도 묻고 집에 기사 구했냐고 묻 더니 자기 다친 다리며 몸이 완쾌 되었다고 다시 일할 수 있겠냐고 물었단다. 당연히 언제든지 돌아오 라 대답했다면서 꿈에 나타난 게 맞았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알려 준 다. 아..그랬구나, 아팠었구나.. 말 도 못하고 떠나갔구나. 다시 눈물 이 흐른다.. 고맙기도 하고, 내가 믿 은 인간 관계에 배신 당하지 않았 다는 생각과 나는 인도네시아 사람

과 그리 쉽게 작별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생 각이 겹쳐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2주 전쯤, 시골에서 잘 지내냐 아픈 데는 없냐 라고 whatsapp을 보낸 적이 있는데 아직 읽은 표시 가 없어 이번에는 일반 메세지를 보냈다. 집사람에게 전해 들었다, 언제든지 돌아와라, 고맙다 라고...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거짓말처 럼 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미스터리 사야 우다 슴부. 볼레 끄 르자 라기(미스터 리, 저 다 나았어요. 다 시 일해도 될까요? ) 응, 언제든지 돌아 와라. 서둘러 올 필요도 없다. 왔다 가 힘들면 다시 돌아가도 좋다 대 답했더니, 2.3년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래, 시골에서 가족들과 좀 더 시간 보내고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 라. 왔다가 힘들면 다시 가라. 나도 좀 더 잘 할 수 있는, 만회할 수 있 는 시간을 주어라. 소리도 좀 덜 지 르고 당신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다시 예 전처럼 인생의 동반자로서 한동안 더 같이 있고 싶다.

75 이강현


얼마전 인니에 거주하는 한인 지인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다가

나에게도 트라우마가 된 사건들 이 있다.

우연히 최근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이민청 직원들의 한인 괴롭힘에 대

지난주 대사님과 하나은행 불완

한 얘기가 화제가 되었다. 코로나

전 판매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교

정국으로 돈벌이가 잘 안되는 이민

민 대표단과 만남이 있었다. 나도

청 직원들이 물불 안 가리고 한인

피해자 중에 한명이고 그동안 이

들 회사나 업소에 찾아가 꼬투리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 서서

잡아 추방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거

일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회의에

액을 요청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참석했다.

인 소상공인들이 밀접해 개인 소규 모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위자야

대표단으로 참석한 우리 5명은

센터에 여러곳이 이미 당했다고 한

본 사안에 대해 진솔하게 설명드리

다. 내가 이민청장부터 본청 국장

며 대사관에서 교민들의 어려운 입

들과 인맥이 있는걸 알고 있는 지

장을 이해하고 도와 달라는 부탁을

인들은 이런 문제점들을 좀 전달해

드렸고, 내가 그동안 들어 왔던 피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오래전부터

해자들의 억울하고 답답한 사례들

가끔 얼굴도 모르는 교민분들이 이

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

런 일을 당하고 다급하게 도움을

르게 흐느껴 울게 되었다. 대사님

요청한 적도 있었다. 몇번을 직접

이하 참석한 여성 대표자 분들 앞

나서 중재한 끝에 금액을 낮춰 주

에서 눈물을 보이고 만 내가 얼마

사람마다 트라우마가 있다. 트

었던 경험이 있던 나는 정확한 팩

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아, 이

라우마란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트를 사례별로 알려 줘야 내가 대

사건이 나에게 트라우마가 된 건

죽음, 심각한 질병 혹은 자신이나

변을 하지 않느냐 했다. 그랬더니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타인의 신체적 물리적 통합에 위협

한 친구가 얼마전에 이민청 직원들

작년에도 인도네시아 국회에 가서

이 되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이 들이닥쳐 벌어졌던 경험담을 이

국회의원들에게 문제 해결을 호소

후 겪는 심리적 외상을 말한다. 쉽

야기하며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

할 때 똑같은 맥락에서 울음을 터

게 말해 트라우마란 큰 정신적 충

이다. 그 순간의 기억이 얼마나 무

뜨렸고, 그 모습이 유투브와 인니

격을 준 사건으로 인해 겪는 심리

섭고 억울했으면 지인들 앞에서 눈

기자들을 통해 뉴스거리로 보도된

적 외상이다. 아마 많은 현대인들

물을 흘리는 것일까.

적이 있었다.

트라우마

/ 이강현

이 생활 속에서 겪는 정신적인 고 통을 하나쯤은 다들 지니고 살아 가고 있을 것이다.

MY DEAR INDONESIA 76


또다른 사건은 20여년 전에 일

코비드가 한창인 지금 타국 생

어났다.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공장

활을 하며 트라우마가 될 만한 얼

에서 근무하는 600여명의 직원을

마나 많은 사건들이 우리들 주변에

구조 조정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인

널려 있는가. 하지만 결국 트라우

니 폭동과 IMF 등으로 우리 공장에

마는 서로가 보듬켜 안고 이해하고

근무하는 직원 2300명중 600명의

돕는 과정에서 극복되는 것이 아닐

구조조정을 직접 해야만 했던 나

까 싶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

는 3개월동안 거의 매일 울면서 지

법중에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을

냈다. 자진해서 퇴사할테니 회사가

지지하는 사람들 곁에 있도록 노

잘되면 다시 불러 달라며 웃으면서

력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무슨 일

떠나는 직원들 보며 울었고, 자기

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고 당신을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계속 근

고문하고 삶을 즐기기 어렵게 만

무하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직원을

드는 기억들에 대한 감정을 외부

보면서도 울었다. 그 여파로 얼굴

로 표출하다 보면 당신을 신뢰하

안면 근육 마비가 와서 6개월 약을

는 사람들은 항상 당신을 지지하

먹었으나 아직 완쾌되지 않아서 지

고 공감해 줄 것이다. 그래서 자

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

신의 트라우마를 편하게 말하고

도 모르게 안면 근육이 굳어진다.

혹은 들어 주면서 감정의 카타르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들

시스를 느끼는 일이 필요한 것

려줄 때면 또 여지없이 흐느껴 울

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개인

게 된다

의 트라우마를 서로 토닥이며 함께 극복할수 있는 따뜻한 공

세번째 트라우마는 아직 어렸던 10살 무렵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

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으리 라 믿는다.

고 입관할 때 모습을 떠올리는 순 간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흐느껴 울게 된다. 나에게는 쉽사 리 지워지지 않는 3가지 트라우마 가 있다. 아마 누구나 이런 몇가지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걸 떨쳐 버리려 노력하 는가 하면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 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진=조현영 /manzizak)

77 이강현


2019년초부터 COVID-19 팬데믹이 광풍처럼 끝 이 없이 몰아치고 있다. 모든 기능들이 정상에서 벗 어나 마비되어가고 일상생활에도 제한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하고 각 자 삶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인작 웹진 발간을 하는 것 을 보니 대단한 용기(? )에 박수를 보내고 한편으 로 자부심을 느낀다.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모두 잘 극복하고 보람찬 미래를 맞이하길 바란다. 또한 인작이 영원히 무궁하게 인도네시아에서 발전하고 모든분들의 건강을 기원한다.

MY DEAR INDONESIA 78


이 동 균 Lee Dong Kyun 충북청주출신 2011년 제2회 한*인니문화연구원 인터넷 공모전 수필 <꿈은살아있다> 대상 수상 2013년 종합문예지 한국문인 <신인문학상> “나의 각오 외 1편” 수필 부문 등단 2016년 제18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수상 주식회사 둘석 인도네시아 대표이사

79 이동균


추억

/ 이동균

추억은 구름에 날아가고 사랑은 영봉에 걸려있다 아련한 기억들이 살아있는 것을 깨우쳐준다

지난 세월 호흡 가다듬고 뒤를 돌아보니

뿌린 씨앗 어느새 추억이 남아있는 열매 되어 행복으로 익는다

구름, 산, 사랑, 추억이여~~ 부디 너를 스쳐 간 사람을 잊지 말아요

MY DEAR INDONESIA 80


/ 이동균

붉은 장미 피었던 길은 뜨거운 태양이 길고 힘찬 가시를 뿜어냈던 정열의 길, 바람 부는 길 위로 붉은 꽃이 떨어진다. 빛바랜 작은 신작로에 누더기 인생이 보인다

(사진=조연숙)

추억의 영혼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간다.

마지막엔, 모든 길은 곧은 길, 구부러진 길의 선택에 놓였다. 빠른 길과 느린 길, 삶의 손끝으로 만든길 / 자연 속의 길, 경쟁과 상생.

어제의 하얀 뇌세포들이 그 길에서 나를 빙빙 맴돌게 한다. 오늘도 길모퉁이에 기대어 하루를 바라보면, 아쉬운 시간들이 길 위를 지나간다.

81 이동균


COVID-19 팬데믹 상황에 대한 단견

/ 이동균

인도네시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의 확산이 끝나지 않 고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 벌써 10개월이 되어간다. 처음에 중 국으로부터 감염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에 일상적인 수준의 독감보다 감염 전파력이 조금 더 강한 정도이고 길어봐야 몇 개월 정도면 끝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감염에 대한 후유증도 독감 바이러스 정도의 수준일 것이라 고 필자도 그런 생각이었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기온이 한국보 다 높아서 바이러스 전염력도 강하지 않고 일상적으로도 손과 발을 자주 씻어서 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러한 예상은 보란듯이 크게 빗나갔다.

전세계적으로 수십만 명이 이미 코로나 감염으로 사망했다. 심각한 문제는 현재까지 아직 코로나 감염이 끝나지도 않은 진 행형인데, 1차, 2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적 피해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그러면, 왜 아직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지속적으로 진행 되고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가? 문명이 발달된 현시대 에 살면서 누구나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견해 로는 이러한 바이러스 감염을 의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

MY DEAR INDONESIA 82


고 행정적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생 각하면서 무조건 통제 일변도로 나 아가는데 있는 것이다.

물론 감염지역을 통제하는 방식 은 초기감염에는 기본적으로 의미 가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장기간 시간이 지나 팬데믹이라는 환경으 인도네시아 코로나19 TF 홈페이지 캡처

로 변하면 경제적인 문제에 부딛히 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감염의 확 산방지를 위한 록다운 방법과 경제 를 살리기 위한 방법, 두 가지 방법

의학적인 소견으로도 초미세먼

먹고 잘 씻어서 각자의 위생원칙을

지보다 작은 코로나 19바이러스의

지키는데 중점을 두면 어떤 바이러

체내침입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

스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 아무리 철저히 마스크를 착용

기존 지병이 있는 사람은 그 병을

하고 추가적인 Face Shield로 방어

정상적인 수준으로 잘 조절하게 하

특히,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막을 해도 퍼팩트하게 막지는 못한

는 것이 선결 과제이다.

변형이 지속적으로 되는 것이라는

다. 흡사 의사가 완전 무균상태인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

병원 수술실에서 환자를 수술해도

따라서 자기 자신의 개인 면역

에 어느 곳이든지 어느 때든지 역

완전하게 감염을 막지는 못하는 것

력을 높이고 또한 면역력이 저하되

사적으로 보아도 바이러스와 같은

과 같은 이치다.

지 않게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어

을 조화롭고 적절하게 사용해야 추 후의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 이다.

병원균은 수없이 많았다. 단지, 건 강한 사람이라면 별다른 증상없이 인터페론이라는 자체 면역의 방어 체제가 몸에 형성되어 바이러스 감 염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 후에 어 느 일정 기간 동안 비슷한 바이러 스 감염에 저항력이 있어 재발을 막기도 한다. 흔한 감기, 독감도 인 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일종이지만 거의 대부분 건강한 사람들은 별다 른 치료 없이 쉬거나 일반적인 대 증적 치료로 며칠 후에 정상적인 몸 상태로 회복이 된다.

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현재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이겨내어

아무리 훌륭한 백신을 접종해도

야 하는가? 이것은 아주 원론적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능력이

인 곳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간

안 되면 무용지물인 것처럼 각자

단하게 말하여, 마스크 착용과 사

스스로 개인의 면역력을 얻는 것에

회적 거리 두기를 포함한 개인위생

최대한 많은 노력을 해야 될 것이

의 기본수칙을 철저히 숙지하게 만

라고 본다. 아무쪼록 모든 분들이

들고 영양상태를 양호하게 만들고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잘 균형 잡힌 식사를 하게 하면 누

잘 이겨내어 희망찬 밝은 미래가

구든지 이번 감염을 이겨낼 수 있

오길 기원한다.

다고 본다. 즉, 마스크 잘 쓰고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잘 쉬고 잘

83 이동균


아주 오래전 읽었던 글 내용 중에 가슴속에 "진심의 학교"를 세우고 모든 사람들을 만나라고 쓴 글을 늘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 사람의 인생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일 입니다. 저에게는 벌써 두번째인 책 발간을 앞두고, 특별한 인연 "인작" 여러분께 만날 수는 없지만 따뜻한 온기 를 담아 인사를 전합니다. "stay safe"

MY DEAR INDONESIA 84


이 혜 자 Lee Hye Ja 푸드 코디네이터 사범 마스터/ 티 마스터 / 리빙 디렉터 -2018년 11월 안동고택 투어와 푸드스타일링 "퇴계의 발자취를 찾아서"프로젝트 참여 -2018년12월27일~12월30일 한전아트센타 테이블셋팅 전시회 "아름다운 식문화 테이블 셋팅의 세계" -2019년 제6회 서울국제푸드엔테이블 박람회 테이플셋팅 부문 대상 전체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수상 -2019년 대한민국 국제요리&제과 테이블셋팅 경연대회 테이블 셋팅 대상 전체부문 대한민국 국회 교육위원장상 수상 -테이블셋팅 수업

85 이혜자


#Day 1

자가격리 14일의 기록과 단상들 / 이혜자

인천공항 아침 7시 도착, 텅 빈 활주로와 텅 빈 공항, 위생복을 입 은 수 많은 군인들. 코로나가 바꾼 풍경은 우리가 지금 팬데믹의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 게 한다. 입국장에서는 군인들이 해외에 서 입국한 사람들의 검역과 핸드 폰에 자가격리 앱을 설치 할수 있 게 도움을 준다. 건강검진표와 앱 을 확인하면 입국심사가 통과된다. 방역 택시를 타고 지역보건소로 이 동. 긴 면봉 같은 것으로 입안과 코 안 점막에서 검체를 채취하는 방식 이다. 보건소에서 대형쓰레기봉투와 마스크, 소독제를 나누어 주었다. 다음날 나온다는 검사 결과가 오후 가 되어 '음성'으로 판정되었다고 문자가 왔고 담당 공무원의 전화도 받았다. 자가격리 동안 중요한 일정 은 매일 낮12시를 기준으로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 체온과 건강 상 태를 확인해서 앱에 올리는 일이다. 이제 2주간의 자가격리가 시작 되었다. '자가격리'란 정해진 공간 을 벗어나지 않고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의 면역력을 길러야겠다.

MY DEAR INDONESIA 86

잠시 멈춘 일상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 생각해본 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Day 4 매일 조금씩 운동을 하려고 한 다. 몸의 움직임은 갇혀 있는 감정 과 긴장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 다. '의식적 움직임'을 통해 몸과 마 음의 건강을 함께 얻는다.

#Day 2 자가격리 기간 동안 그동안 바 쁘게 지냈던 나를 잘 쉬게 해주기 로 했다. 삶의 속도를 유지하고 일상에서 의 루틴을 지키는 일은 일상을 지 탱하는 힘을 준다.

#Day 5 남편과 떨어져 있는 동안 최대 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 무 엇보다 주방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 음이 컸었는데, 혼자 있지만, 정성 껏 음식을 준비한다. 매일 올바른 것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Day 6 “힘들어” 말하려다 조금 더 신 중하게 쓰고 싶었다. 정말로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Week 1

보건소에서 보내준 코로나19 검사결과 문자 (사진=이혜자 )

#Day 3 교보에서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 다. 책을 읽고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공부하고 음악을 듣는 시간은 온전 히 내 세상 같았다.

자가격리 1주 차가 되면서 '코로 나블루'라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단조로운 일상과 수백 명씩 늘어 나는 자카르타의 확진자 수와 그곳 에 혼자 남겨진 남편 생각에 마음 이 아파졌다. "당신 생각은 어때?" "행복해?" 매일 물어보던 남편의 물음들이 오늘 몹시도 그리웠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밤이다.


#Day 12 공항입국장에서 검역에 도움을 주는 군인과 코로나19 선별진료소 (사진=이혜자 )

따뜻한 차 한잔이면 되었다. 나 를 위로하는 일에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느꼈다.

#Day 8 날씨가 흐리고 몸도 무겁다. 오 늘도 창밖을 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마음은 안 그런데 몸 이 그런지, 최강의 달콤한 맛이 필 요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다 먹고 나니 기분도 다시 좋아지고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기분이다.

#Day 13 깜빡깜빡하다가 꾸벅 꾸벅하다 가 하루가 다 간 날. 별 볼 일 없는 일들로 가득한 오늘 하루의 마무리 는 밤하늘 별 보기.

#Day 14 #Day 9 이제는 이 집의 공간과 여름과 친구가 되었다. 지금은 집의 배려 를 받는 시간. "바람이 솔솔 불어와요".

#Day 10 새벽2시, 오후에 마신 커피 때문 인지 잠이 안 온다. 굳이 자려고 애 쓰지 않는다. 스탠드 등을 켜고 책 을 읽는다. 내일도 온전한 나만의 하루가 기다리고 있으니.

#Day 11 딸과 통화를 하다. "엄마 이제 며 칠 남지 않았어요. 금방 시간이 다 지나갔네", 딸의 시간은 또 다르게 흘러가나 보다. 하루가 길게 느껴 지는 날.

반가운 여름비가 내린다. 창문 밖에 여름이 있다. 내일이면 자가 격리도 끝이다. 오늘은 푹 잘 수 있 을 것 같은 마음이다. 평온한 밤이 다. 안전하고 안락했으나 조금은 외 롭고 지루했던 자가격리를 끝내고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누 군가의 희생과 수고로 나의 평범한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알 게 된 소중한 시간. 수많은 미래학 자는 코로나가 인류 문명사의 전환 점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하고, 다시 일상의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 야 하는지 기로에 서 있다. "의료진 덕분에 , 감사합니다. 존 경합니다 " "힘차게 코로나를 극복하고 세 계가 더 건강해지고 환해지기를 응 원합니다 "

87 이혜자


코로나19가 앗아간 2020년

이제 우리 인류는 전세계가 동 시다발적으로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는 과정을 통해 그전과는 다른 세상을 준비할 필요가 있어야 한 다. 코로나19로 우리는 많은걸 다 시 생각하게 되었고 재점검 할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봄 / 이혜자

4월 ,어느새 봄이다. 연두빛 어린 잎 사이로 봄의 전 령사인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지 만, 코로나19 사태로 우리는 지금 까지 없었던 계절에 살고 있다. '팬 데믹(pandemic)'이라니 , 마치 역사 속을 헤매는 듯하다.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 스 전파는 이제 전세계로 확산되었 다. 매일같이 언론에서는 세계각국 의 코로나19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보도한다. 그야말로 세계는 코로나19와의 전쟁 중이다. 인류는 바이러스라는 적으로부 터 무자비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을 지닌 것과의 전쟁(invisible war) 이다. 어떤 무기로도 대항할 수 없 고 결정적으로 치료제는 없다. 바 이러스의 창궐은 아주 긴 싸움이 될 것이다. 전염속도가 빠르기 때 문에 우리는 모두 위험에 노출되 어 있다. 가장 큰 해결책은 백신개 발이지만 앞으로 1년은 넘게 걸린 다는 전망이다.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매일 죽어가

MY DEAR INDONESIA 88

고 있는 참상을 지켜보고 있다. 세 계는 출구를 알 수 없는 공황상태 에 빠져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 기화되면서, 사람들은 지금껏 한번 도 경험해보지 못한 불안감에 휩싸 여 있다. 코로나19사태로 우리 인류가 얼 마나 취약한 문명기반에 살고 있는 지 깨닫게 되었다. 또한 세계가생 각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힘든 상황에서 도 사람들은 연대의식을 가지고 행 동할 때 힘을 갖게 되었고 긍정적 인 변화를 이끌었다. 또한 우리에 게 자본주의와 공공의료문제에 대 한 필요성과 효율성을 생각하는 기 회도 갖게 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국가적 재난으로 힘없이 무 너지는 경제시스템의 취약성도 알 게 되었다. 그중 가장 큰 깨달음은 아마도' 일상의 소중함'일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결 코 당연하지 않은, 얼마나 소중하 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된 참으로 귀한 시간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인내하고 기다리는 시간 을 보내고 있다. 시간은 어떤 상황 에서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지나 간다. 그래도 언젠가 이 상황은 끝 날테고, 백신도 개발될 것이고 다 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얼마 지나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서 로 조심하며 하루하루 건강하게 힘 을 내자. 불안감에서 벗어나 현재 의 상황을 이해하고 잘 이겨내겠다 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 삶에 존 재했던 시간을 잃어버린 지금. 내 가 누리던 소중한 일상의 중심에 는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이웃들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추며 손을 잡고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그날 우리가 힘들게 건너온 시간이 가르쳐준 것 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 좋겠다. 두려움 앞에서도 사람이 희망이라 는 것을 잊지 말자. 그때까지 계속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이어져가길 기도해본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stay safe, stay happy"


<아프리카 오지의 나라 차드의 아름다운 문인 무스타파 달렙의 글> "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 에 의해 흔들리는 인류 그리고 무 너지는 사회.. 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리우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 다. 보이지않는 어떤것인가 나타 나서는 자신의 법칙을 고집한다. 그것은 모든 것에 새로운 의문을 던지고 이미 안치된 규칙을 다시 재배치한다. 다르게...새롭게... 서방의 강국들이 시리아, 리비 아, 예멘에서 얻어내지 못한 것들 (휴전, 전투중지)을 이 조그만 미 생물은 해냈다. 알제리군대가 못 막아내던 리프 지역 시위에 종지 부를 찍게 만들었다. 기업들이 못해냈던 일도 해냈 다. 세금 낮추기 혹은 면제, 무이 자, 투자기금 끌어오기, 전략적 원 료가격 낮추기 등... 시위대와 조합 들이 못 얻어낸 유류가격 낮추기, 사회보장 강화 등등(프랑스경우) 이 작은 미생물이 성취해 내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공기오 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 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모르는 정도가 되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 해서 알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들

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은 이제 더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 고, 여행, 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 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 침묵 속에서 스스로 를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약함'과 ' 연대성' 이란 단어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 두 한 배에 타고 있음을.. 시장의 모 든 물건들을 맘껏 살 수도 없으며 병원은 만원으로 들어차 있고 더 이상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 님을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는 우린 모두 똑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 는 것도... 외출할 수 없는 주인들 때문에 차고 안에서 최고급 차들이 잠자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단 며칠만으로 세상에는 사회적 평등(이전에는 실현 불가능해 보였던)이 이루어 졌다. 공포가 모든 사람을 사로 잡았 다. 가난한 이들에게서부터 부유하 고 힘있는 이들에게로 공포는 자기 자리를 옮겼다.

우리에게 인류임을 자각시키 고 우리의 휴머니즘을 일깨우며.. 화성에 가서 살고, 복제인간을 만들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던 우 리 인류에게 그 한계를 깨닫게 해 주었다. 하늘의 힘에 맞닿으려 했던 인 간의 지식 또한 덧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확신이 불확실 힘이 연약함으로, 권력이 연대감과 협조로 변하는 데에는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인간은 그저 숨 하나, 먼지일 뿐임을 깨닫는 것도..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가치 는 무엇인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섭리가 우리에게 드리울 때를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직시하자. 이 전세계가 하나같이 직면한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서 우리 의 휴머니티가 무엇인지 질문해 보자. 집에 들어앉아 이 유행병이 주 는 여러가지들을 묵상해 보고 살 아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자."

89 이혜자


집에서 할 수있는 것들 공유하기 1.규칙적인 운동하기 필요한 장보기 외에는 외출도 안하고 밖에서 운동 도 못하는 나날들 이렇게 계속 생활한다면 머지않아 살이 '확찐자'가 될 수있다. 홈 트레이닝 유튜브를 잘 활용하면 집으로 개인트레이너가 와서 함께 운동하 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스미홈트 #레베카 루이즈 #주원홈트 #제니요가

3.집에서 문화생활 즐기기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부분의 문화예술 관련 공연 은 취소되었다. 전세계 상당수의 박물관과 미술관도 휴관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문화생활이 멈 춘 것은 아니다. 세계 유수의 공연이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방구석 1열 문화생활'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처럼 온것이다.

2.건강한 집밥을 먹자 코로나19 사태로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겪고 있으 면서 집에서는 모든 가족이 함께 있고, 외식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없으니 '삼시세끼 전쟁'이다. 건강을 최 우선으로 생각하는 지금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매일 먹으면 좋은 음식을 소개한다. #통곡물 #등푸른 생선 #다양한 과일과 채소 #마 늘과 양파 #올리브오일 #녹차

MY DEAR INDONESIA 90

#www.culture.go.kr/home # 내손안의 콘서트 #코 로나극복k-Arts온라인콘서트 #metropera.com #독 일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 #아트앤컬쳐-Google 4.책읽기 두려울 때, 불안할 때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읽 는 힘만큼 생각의 실력이 생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 에 대해서 통찰할 수 있는 힘, 저항할 수 있는 생각의 힘, 지적인 힘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생긴다. 독서는 내 삶을 강단 있고 내실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만든 다. 어떤 고난과 위험에서도 내 영혼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자양분은 책읽기이다.


#다시 고전 읽어보기 #미술사 읽기 #지금처럼 주어진 시간이 많을 때 역사관련 책을 읽어보자. 바 이러스도 역사가 있다. 5. 나에게 맞는 취미 생활 찾기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 다. 취미생활은 심리적으로 여유를 찾고 정서적인 안정을 가질 수 있다. 나만의 개성 가득한 취미생활 로 삶의 질을 높이고 그동안 몰랐던 재능계발도 해 보자. 6.마음밭 가꾸기 우리 마음은 몸과 연결되어 있다. 불안과 걱정 보 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자. 지금의 위 기상황에서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숭고한 희생과 많은 사람들의 봉사가 있어서 안전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길어진 재난상황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도 없어진 수입만큼, 사랑하는 마음은 줄어들지 않 도록 하자. 매일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오늘을 행복 하게 살면 어느 순간 행복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 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혼자는 아무리 큰 행복도 의미가 없다. 함께 나눌 때 행복의 가치는 더욱 빛 날 것이다.

91 이혜자


무병장수와 재물을 의미하는 가래떡 (테이블셋팅&사진=이혜자)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를 기원하는

새해맞이 음식 우리의 떡국 / 이혜자

며칠 있으면 추석과 더불어 우리민족 최 대의 명절 설날이다. 설날은 한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설'은 '설다' '삼가하 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낯설다' 등의 뜻이 들어 있다. 설날에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몸과 마 음을 새롭게 하고 서로의 복을 빌어주며 덕 담을 나누며 떡국을 먹는다. '첨세병' 이라고 해서 한살을 더 먹는다는 뜻이 있어서, 아이 들에게 나이를 물을 때 "너 몇 살이냐"고 묻 지 않고 떡국을 몇 그릇 먹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 비 로소 새해에 한 살 더 먹었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떡국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MY DEAR INDONESIA 92

1.새로운 한해 떡국의 흰색처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밝고 새롭게 시 작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2. 장수를 기원 떡국에 들어가는 긴가래떡처럼 길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라 는 의미로 무병장수를 뜻한다. 3.부를 의미 가래떡을 썰은 동전 모양의 둥근 떡은 재물을 의미하고, 풍요 롭게 살라는 뜻도 들어 있다. 4.따뜻한 봄날 가래떡은 따뜻한 양의 기운을 띠고 있다. 따뜻한 국물의 떡국 은 추운겨울이 곧 끝나고 따뜻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음식이다.


< 지역별 떡국의 종류 > 지방마다 특산물이 더해져 개성있 는 떡국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복을 기원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만 드는 마음은 같다.

새해 경자년에는 소원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하시고 건강과 행복이 가득 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1.경기도-개성: 조랭이 떡국 흰떡을 대나무칼로 잘라 둥굴둥굴 하게 만든뒤 살살 문질러 조롱박 모양으로 만드는 떡국 2. 충청도: 생떡국

설날떡국: 고명으로는 흰색-노란색 계란 지단과 초록색 파를 같은 길이로 썰어서 깨끗하고 담백한 우리의 정서를 나타냈다.(테이블셋팅&사진=이혜자)

익반죽한 쌀가루 반죽을 장국에 끓 여 만든 떡국.그래서 날떡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경상도: 굴떡국 남해와 인접한 경상도 지역은 해산 물이 풍부해 굴을 넣어 떡국을 끓 인다. 4.전라도: 두부 떡국 전라도 지역은 수질이 좋고 콩재 배에 알맞은 토양에서, 품질이 좋 은 콩으로 만든 두부를 넣고 끓인 떡국을 즐겨 먹는다.

설날 맞이 일인 상차림: 백자로 품위 와 격조를 표현하고, 수정과가 담긴 유리잔은 겨울의 얼음처럼 차가움을, 작은 화기에 버들가지는 다가오는 따 뜻한 봄을 나타냈다.(테이블셋팅&사 진=이혜자)

5.강원도: 떡만두국 북쪽과 남쪽이 만나는 위치에 있 어서 양쪽의 특징이 고루 나타난 다.진한 사골육수에 떡과 만두를 넣어 끓인다. 6.이북지역: 꿩만두국 원래 떡국은 꿩고기로 국물을 내는 것을 최고로 여겼으나 비싼 재료여 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닭고기로 육 수를 냈다고 한다. "꿩 대신 닭"이 라는 속담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한식 과일 디저트: 일인 청자 접시에 빨간사과와 연두사과로 맑고 정결하게. (테이블셋팅&사진=이혜자)

93 이혜자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미술

/ 이혜자

올해 3월 세계 보건기구(WHO)에서 팬데믹이 선 포되고, 우리는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세상에 살 고 있다. 코로나19사태는 전 세계인류에게 깊은 상 처와 고통을 남기고 있다. '잠시멈춤' '사회적 거리두기'는 지금까지 당연하 게 여기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근본적인 가치, 돌아가야 할 익숙한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 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겪고 있는 지 금의 폐쇄사회는 우리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 지도 깨닫게 한다. 불확실성만이 확실한 이 시대, 이제 우리는 지금 껏 경험한 적 없는 '뉴노멀'에 적응해야 할 뿐만 아 니라,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변형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코로나 이후 전세계에서 크고 작은 다양한 변화 가 있었다. 그중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전세 계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의 휴관으로 인해서 전 시장에서 전시를 관람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안으로 대부분의 유명 미술관들과 박물관들은 유튜브, 홈 페이지를 통해 다양한 전시를 가상현실, 온라인 전 시로 감상할 수 있도록 현재 대부분 온라인 서비스 를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문화체육관광부에 서 온라인으로 즐길 수 있는 공연, 전시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휴관된 국공립 미술관의 온라인 전시 투어가 활 발히 열리고 있는 반면에, 개인 갤러리 경우는 전시 를 위해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고, 서로 대면하지 않 도록 예약제로 전시를 보게 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MY DEAR INDONESIA 94

힘든 시기에 왜 하필 미술관이냐고 묻는다면, 그림을 통해서 마음을 환기시키고 코로나로 삶의 균형이 무너 지고, 움추려 들었던 우리 마음에 위안과 감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우리 미래를 바라보 게 하는 힘이 있다. 코로나시대, 이제 잠시 생각을 멈추 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다 볼 시간을 가져보자. 시 간을 넘어서,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작품과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면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APMA-CHAPTER TWO 아모레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고미술 - 소장품' 특 별전을 최근에 다녀왔다. 이제 미술관은 미리 예약하 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예약 으로 회차별로 관람객을 제한하고 있다. 입장시 시간 대별로 2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코로나 확산 방지와 안전한 관람을 위해서는 발열 체크와 QR 코드 체크인, 마스크 착용은 필수사항이다. 평소에 비해 불편하고 번거로울 수 있지만 2시간 동안 전관을 20명만 관람하 기 때문에 조용하고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다.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병풍, 회화, 도자기, 금속, 목가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모두 폭넓게 6개 전시실에 구성되었다. 전시는 유구한 시간과 미감이 오롯이 녹아내린, 고미술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또한 작품들을 한눈 에 마주하는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전시' 사진에는 담을 수 없는 섬 세함은 직접 봐야만 느낄수 있지만, 제가 느꼈던 감동 과 고미술의 아름다움을 함께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1 전시실] 고려시대부터 근대시대의 회화들과 벽 면을 가득 채운 병풍들. 또한 보물 제1426호인 '수 월관음도'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수월관음도

#모란도 8폭 병풍

모란은 옛부터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꽃으로 궁중의 다양한 행사에 배설되었다.

#고종 임인진년도 8폭 병풍

관음의 자부심을 맑은물에 비친 달빛에 비유한 수월관음도는 화려하면서 도 섬세함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귀족 불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어 보물 제1426호로 지정되어 있다.

[2-3 전시실] 선사시대토기 부터 조선시대까지 도자 공예품 #고려시대 상감도자기.청자

1902년 덕수궁에서 열린 마지막 궁중 연향을 기록을 목적으로 만든 계병

12~13세기에 전라도 강진, 부안에서 최고급 청자가 제작되었는데 옥처럼 맑고 영롱한 빛깔을 내는 비색청자는 당시 중국에서 '천하제일'이라 칭송 될 정도였다.

95 이혜자


#조선백자

절제된 형태와 눈처럼 흰 빛깔 당당한 형태에서 느껴지는 위엄과 부드러 운 곡선미가 아름답다.

[4 전시실 ] 혼례 때 사용되던 가마 ' 서인교'

#활옷

활옷이라고 불리우는 신부의 혼례복은 조선시대의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의복이다.

#댕기

신부가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쓸 때 쪽머리의 뒷쪽에 붙여 길게 늘어뜨린 뒷댕기를 말한다.검은색 비단에 꽃과 수복문을 금박으로 입혀 제작하였으며 옥, 호박 등의 패물, 색실을 엮어 두 갈래의 댕기를 연결하 면서 화려함을 더하였다.

#섬유소품 네 사람이 가마채를 들어 운반하는 서인교. 사대부 부녀자들이나 혼례 때 타던 가마. 불로장생을 뜻하는 십장생과 다산을 상징하는 포도 등 길 상물을 가마에 정교하게 부각하고 유리창에는 부부화합을 의미하는 화 조화를 그려 넣었다.

[5 전시실]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금속공예와 섬유공예작품. 조선시대의 화려한 바느질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

바느질의 기본도구인 바늘집과 바늘꽂이, 골무, 버선본 비단에 정성스레 수놓은 수저집과 화려한 색상, 패턴이 돋보이는 조각보는 정교한 바느질 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이다.

MY DEAR INDONESIA 96


#장도

[6 전시실] 주거와 실생할에 밀접했던 목가구와 목 공예품

#사각반

원래 남녀공용으로 사용하는 실용적 목적의 도구였으나, 조선후기 부터 는 절개나 충절을 상징하는 장신구 기능이 강조되어 노리개의 주장식으 로 사용

#뒤꽂이.동곳.지환

소반은 대체로 가내수공업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 전통적인 형태가 있다. 대표적으로 나주반, 통영반, 해주반으로 구분할수 있다.

#반닫이

뒤꽂이와 동곳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장신구. 지환은 두짝으로 이루어진 가락지와 한짝으로 된 반지로 구분된 다. 보통 은과 옥, 호박 등의 보석으로 만들었고, 박쥐나 수복문과 같은 길상적인 문양을 장식하기도 했다.

#노리개, 비녀 등 정교하고 세련된 장신구들

반닫이는 전면에 문을 달아 위아래로 여닫을 수 있는 수납가구이다. 네 면 의 모서리를 감싸는 귀장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통일감을 선사한다.

97 이혜자


2020년은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당황스럽게 시 작해 사방에서 조여오는 벽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아파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아픈 이야기는 글로 쓰지 못했다.

MY DEAR INDONESIA 98


조 연 숙 Cho Yeon Sook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99 조연숙


신세 고와 한인2세 그리고 코로나19

/ 조연숙

침 끝에 쑥을 올려서 태웠다. 쑥을 태우며 나오 는 열기가 침을 통해 몸으로 전달되는 방식이

“나는 중국을 몰라.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 기서 살고 있어. 나는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우리

다. 한국 한의사들이 침을 얕게 꽂은 후 전기자 극을 주는 방식과 다르다.

어머니는 중국에 가고 싶어 하셨어. 내가 중국에 간다면 여행이지 살러 가지는 않을 거야.”

2000년대 초반에는 늘 환자가 기다리고 있 어서 증세 말하고 침만 맞고 왔지만, 2010년대

신세 고. 중국이름 고칙민(Goh Chik Min). 1940

중반에 들어서는 환자가 줄어 우리만 있을 때

년대생. 인도네시아 독립 후 혼란기에 성장했고

가 많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여유가 생겼

9.30사태도 겪었다. 수하르토 집권기의 중국인

다. 침을 꽂고 누워서 ‘신세’라는 말의 뜻을 물

탄압도 기억한다. 하얀 맑은 얼굴은 누가 봐도 중

었다. “혹시 신세가 선생(先生)에서 온 말인가

국계 후손이다. 그리고 그는 인도네시아어, 중국

요?”라고 물으니, 그는 “맞아. 사람들이 선생

어(광둥어),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의학 관련 한

님이라고 부르던 데서 온 명칭이야”라고 확인

국말도 구사한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에서

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

중의학을 공부한 한의사이다. 신세는 인도네시

해, 인도네시아에 대해,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아에서 중국 한의사를 부르는 호칭이다.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중국을 몰라.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

신세 고는 한국인들에게는 중부자카르타 빠

서 살고 있어. 난 인도네시아인이야”라는 말이

사르바루에 사는 침을 잘 놓는 중국계 한의사로

내 귀에 꽂혔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중국에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그

가고 싶어 하셨어”라는 말까지.

에게 침을 맞으러 다녔다. 그런데 이건 내가 확인

MY DEAR INDONESIA 100

한 내용이고, 어쩌면 그 이전부터 한국인이 다녔

우리 아버지는 황해도에서 월남하셨다. 황

을 수도 있다. 나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다닌 것

해도만이 아니라 평안도와 함경도, 경기도 북

같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저녁에

부에서 월남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피난민, 실

는 어깨가 너무 무겁고 아팠다. 눕지도 앉지도 서

향민, 북한사람’ 등으로 불렸지만 이젠 거의 남

지도 못하다가 침을 맞고 오면 통증도 가시고 몸

한 사람들과 구별이 안 되고 그저 대한민국 사

도 가벼워졌다. 신세 고는 침을 깊숙이 꽂은 후

람이다. 지금도 그들은 고향에 가고 싶어하지


만 살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자신들의 삶이 시작됐고 어린 시절의 추억 이 남아있고 부모님이 묻혀 계시는 땅을 확인하고 싶은 정도이다. 그들 의 자녀들은 북한을 모르고, 모르는 만큼 북한이 별로 궁금하지 않고 북 한에 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신세 고는 9.30사태로 이후 중국과 교류가 자유롭지 않았고 중국계 임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을 살았고, 우리 아버지도 남북 분단과 반 공 이데올로기로 북한과 교류하거나 방문할 수 없는 세월을 사셨 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실각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민주화가 진행 되고 중국과 교류를 재개하고 활발해질 때도 인도네시아에 사는 중국인들은 중국계임을 드러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 전히 조심스럽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자유롭게 오가 던 시대에도, 남한에 사는 실향민들은 북한에 있는 고향에 갈 수 없었고 여전히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한인2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생 각을 할까. 그들은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수없이 오가며 양국의 좋은 점 들을 누리며 산다. 그들은 단절된 뿌리가 아니라 교류하고 도움이 되는 뿌리로서 한국을 인식한다. 그들은 신세 고나 우리 아버지와 달리, 국경 이 단절을 만드는 높은 장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 그 들은 국경을 장애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 19)

감염증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각국이 입국 절차를 강화했다. 열이

나면 비행기에 탈 수도 다른 나라에 갈 수도 없다. 나라마다 외국인에 대 아에서 자유로웠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달라질 미래. 코로나 19가 국경을 너무 높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과도 하게 구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조현영 /manzizak)

한 혐오가 강해지고 있다. 지난 20년 간은 한국인들이 비교적 인도네시

101 조연숙


벽이 생겼다. 아주 높은 벽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증(코로나19).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운 벽 / 조연숙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해 졌다. 멀리서 사람이 오면 먼저 거리를 두게 된다. 식당에 가 서도 환기가 잘 되는 입구 자리나 사람이 없는 쪽을 찾게 된 다. 친구와 만나려 해도 괜히 외출했다가 친구에게 문제가 생 기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카톡만 한다.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낯설어 하는 시선에 익숙해 있음에도, 올 초에 중국과 한 국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된 후에는 지나갈 때 쳐다보거나 경 계하는 시선이 더 불편하게 다가온다. 서울-부산보다 더 쉽던 서울-자카르타를 오가는 일이 부 담스러워졌다. 항공편이 줄어서 일정을 맞추기 어렵지만 정 기편이 유지되고 비자가 있으면 출입국이 가능한 것은 다행 이다. 하지만 자가격리 14일 때문에 어디서든 1개월 이상 머 물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움직일 수 있다. 중국 같은 일부 국 가는 항공편이 중단됐거나 외국인 입국을 제한해서 갈 수 없 고, 유럽국가들도 항공편이 크게 줄어서 서너번을 갈아타고 시간이 안 맞으면 환승하는 도시에서 숙박을 하며 어렵게 이 동한다고 했다. 주변에 기침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들짝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도 나에 대해 마찬가지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알레르기성 기침을 해서, 밖에서는 겉절이와 매운 찜 같은 음식을 잘 안 먹게 됐다. 공기가 나쁜 곳에 가도 기침이 나서, 기억 속에 기침을 했던 곳이면 약속을 잡을 때 꺼리게 된다. 먼지와 건조함 때문에 자동차나 비행기를 탈 때 마스크를 했는데, 이제는 집밖에서는 마스크를 옷처럼 착용 한다. 그리고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다가오면 겁이 난다. 자카르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기 전인 올 2월에 한 지인은 쇼핑몰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반 대편에서 내려오던 현지인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 키며 ‘Orang Korea!(한국인이다!)’라고 소리쳐서 당황스러웠 다고 했다. 며칠 전 소셜미디어에 서울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MY DEAR INDONESIA 102


쓴 승객이 마스크를 안 쓰고 앉아 있던 다른 승객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요구하며 폭행하는 장면이 올라왔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아시아인에 대한 폭행 소식이 들려 왔다. 지구촌 곳곳에서 나와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 을 증오하고 배척하던 흐름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더 강해지는 만큼,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 지 않도록 균형을 찾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불확실성 또는 예측불가능은 코로나19가 가져온 매 우 중요한 변화이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사람이 모이 는 행사나 여행 등의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졌다. 각국 이 내외국인의 이동을 제한하고, 확진자가 나오면 건 물을 일시적으로 폐쇄하면서 행사는 수시로 취소되고 이민국 업무도 중단돼 비자발급까지 꼬인 사람들이 여 럿이다. 가족여행은 취소됐고, 필자의 가족만 아니라 지인들도 자녀의 결혼식을 연기하면서 일정을 잡지 못 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다른 국가보다 더 변화무쌍하 다. 다른 국가들은 감염자 수가 꾸준히 낮거나 꾸준히 높아서 나쁜 쪽으로 든 좋은 쪽으로 든 상황이 일정하 지만, 한국은 중국에 이어 코로나19 진원지처럼 보일 정도로 감염이 확산되다가 감소해서 방역모범국이 됐 다. 하지만 최근 다시 우려할 수준으로 코로나19 확진 자가 증가했고, 이런 상황 변화에 따라 환율과 주가가 널뛰기를 하고 각종 일정이 수시로 취소되거나 미뤄지 고 있다.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태이다. 코로나19 이후 생활도 바뀌었다. 온라인 활동을 무 서워하던 나도 온라인 쇼핑을 하게 됐고, 온라인 강의 와 웨비나도 참여하게 됐다. 이제는 외출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온라인 강의와 웨비나가 편하게 느껴진 다. 물론 뭔가 답답한 부분도 있다. 디지털화 속도에 대 해 한국은 2023년쯤 구현되어야 할 디지털 기술들이 코로나19로 인해 3년이나 앞선 2020년에 구현되고 있 고, 지금 같은 비대면 상황이 계속되면 디지털화가 더 가속화할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후 활동 반경이 좁아지 고 만나는 사람도 줄었지만, 변화는 더 커지고 빨라 졌다. 극장도 공연장도 가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게 됐고, 가까운 이웃이나 반드시 일 때문에 만나야 하 는 사람들 외에는 만나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보이 는 또는 드러나는 생활은 위축됐고 생각이 편협해 지는 것 같다. 한편으로 보이지 않은 변화는 예측이 안 되어서 두렵다. 인도네시아만이 아니라 베트남 심지어 미국에서도 사업이나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 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해외에서 일단 멈춤 상태로 향후 변화를 주시하며 활동을 재개할 시기를 가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우리 는 이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단군신화의 곰 처럼 100일 격리를 마치고 나오면 널리 사람을 이 롭게 하는 ‘홍익인간’이 되어 있을까? 지금으로 서는 차별과 학살의 상징인 ‘나치’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경험 하지 못한 채 과장되거나 왜곡된 유튜브와 소셜미 디어의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더 편협하고 맹목적 인 사람이 되지 않을지? 타인에 대한 경계와 혐오 가 더 심해지고, 디지털로 이행한 사람과 오프라인 에 남아 있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더 커지고 빈부 격 차도 더 심해질 것 같다. 코로나19가 쌓고 있는 벽이 너무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코로나19가 쌓 은 벽을 허물고 혐오와 차별이 없는 세상을 향해 노 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당장은 코로나19 확산 을 차단할 수 있게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등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 것부터.

103 조연숙


“사람이 책이다” / 조연숙

MY DEAR INDONESIA 104


“사람이 책이다.” <인도네시아

성쇠를 함께 하며 수십년을 살아

JIKS에 다닌 사람과 영어권 학교에

한인100년사>(가제, 이하 한인사)

낸 사람들이다. 또 꼬마 때 부모님

다닌 사람은 생각하는 방식이 같을

를 취재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을 따라 인도네시아로 와서 한국

까? 한국인이 인도네시아에서 한

학교, 인도네시아 학교, 영미권 국

국어나 영어로 공부하면서 외국인

한국 기업이 인도네시아에 오

제학교, 한국 대학과 외국 대학 등

공동체에서 성장했을 때와 인도네

게 된 이유, 한국 기업이 파산한 이

을 다니며 성장기에 수많은 만남과

시아어로 공부하고 인도네시아인

유,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신발업

이별을 경험하며 경계에서 성장한

들 속에서 성장했을 때 현지에 동

체들의 지속가능성, 인도네시아에

사람들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계속

화되는 차이는? 이런 내용을 정리

서 자란 한국인 2세와 성인이 되어

살 사람, 고국으로 돌아갈 사람 또

한 책이 있나? 그 책은 이렇게 여

서 한국에 온 한국인 1세들의 다른

는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살 사람 등

러 모습을 한 한국인의 모습을 얼

점, 새로 온 사람과 거리를 두는 이

책에 없는 답을 하는 그들을 보며,

마나 기록했을까?

유 등. 뻔한 질문이고 뉴스, 책, 논

‘사람이 책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인도네시아 한인 1세, 1.5세, 2세

문 등 여러 가지 컨텐츠를 통해 쉽

그리고 3세들은 ‘다양성 속의 통일

게 답을 구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하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의 정

지만 나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인

체성을 규정할 수 있을까? 할 수

(Bhinneka Tunggal Ika)’을

만이 답할 수 있는 좀더 정확하고

있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고 있는 인도네시아만큼이나 다양

설득력 있는 답을 찾고 싶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

하게 살고 있다. 아직 글로 기록하

리고 한인사 인터뷰를 하며 그 답

으면서 처음 한인사 인터뷰를 시

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책장을 넘

을 사람들로부터 듣고 있다.

작할 때 예상했던 것보다 개개인

기듯 듣는다. 한인사에 기록할 다

의 경험이 훨씬 다양함을 확인한

양한 한인들의 모습을 통해 인도네

요즘 내가 만나서 질문하는 사

다. 인도네시아에서 자카르타한국

시아에 사는 한인들의 정체성이 드

람들은 목재산업, 봉제산업, 신발

국제학교(JIKS)에 다닌 사람과 한

러나길 기대하며…

산업, 전자산업 등이 인도네시아로

국에서 한국학교에 다닌 사람은 얼

진출하던 초기에 와서 기업의 흥망

마나 비슷할까? 인도네시아에서

모토로 삼

105 조연숙


휴교령이 내려져 학교와 학원이 문을 닫은 날은 그 토록 기다리던 큰 아이의 생일이었고, 작은 아이가 열심히 준비한 발레 승급 시험날이었습니다. 코로 나는 잠시 기다리면 피할 수 있는 소나기인 줄 알 았는데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은 오히려 2차 대 유행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재난 영화 안에서 새로운 ‘뉴 노 멀’이라는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 민하고 힘든 시기임에도 웹진을 발간할 수 있게 되 어 진심으로 축하하고 감사합니다.

MY DEAR INDONESIA 106


조 은 아 Jo Eun A 충북 청주 (주)청주MBC, 청주방송 작가 (주)스포츠 투데이 기자 현 한인뉴스 편집위원 한인니 문화연구원 수석팀장

107 조은아


보고르를 떠나며 / 조은아

“엄마, 이거!” 작은 아이가 또 등뒤로 다가와 주먹을 내민다. “노 땡큐!”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후딱 대 답해 버린다. 모르는 이가 보면 참 무심한 엄마구나 싶겠지만 나는 속 으로 떨고 있다. 그녀가 살금살금 다가와 손을 내밀며 나를 부를 때는 대부분, 손 가락 사이로 검붉고 연필만큼 굵은 지렁이가 꿈틀거리거나 자기 주먹 만한 귀뚜라미를 들고 있거나, 아 기 찌짝을 주먹 안에 감추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보고르 외곽의 이 산골에서 자란 우리 아 이들에게 왠만한 곤충은 그냥 애완 견 같은 친구다. 올해로 우린 이곳에 온지 10년 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 큰 아 이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카르타 시내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드디 어 하산이다. 솔직히 이 보고르 산골의 첫 인 상은 꽤 절망이었다.

였다. 스마트폰도 없었고 인터넷 광 케이블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 인터 넷 방송은 먼나라 이야기였다. 처음 5개월 동안 나에겐 동요 CD와 만화 DVD가 유일한 매스컴이었다. 말 그 대로 나는 오지에 살고 있었다. 남편이 회사를 가고 나면 세 살 짜리 큰 딸이 나의 유일한 대화 상 대였다. 병원도, 슈퍼도 뭐든지 차 를 타고 산을 내려가 고속도로를 달려야 했다. 기저귀와 아이 것으 로 꽉 찬 내 가방에는 무거운 영어 사전과 인니어 사전까지 무게를 보 탰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누가 말이라도 걸까 두려워 유치원 도서 관 구석에서 열심히 책 읽는 ‘척’ 을 하기도 했다. 나의 하루하루는 전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전원 주택에 살며 육아에만 전념하 는 행복한 주부였지만, 나는 백조 였다. 물 밑에서 숨차게 발길질을 해야 했던. 인도네시아 생활 첫 해, 달력의 12월은 첫눈의 설레임이 아닌 우기 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와 간 식을 먹던 큰 아이가 조잘조잘 학 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갑 자기 고개를 푹 떨궜다. “엄마...”

넓은 정원과 저 아래로 보고르 시 내가 한 눈에 보이는, 이곳은 그야 말로 공기 좋은 별장이었지만 처음 의 나에게는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

MY DEAR INDONESIA 108

“왜 아가?” “엄마, 우리 이제 그만... 비행기 슈 융 타고 할머니한테 가면 안돼요?”

“...” 세 돌도 안된 아이는 눈물을 뚝 뚝 흘리면서도 단호했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속으로 삼키고 삼키 다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나만 힘 들었던 게 아니었다. 아이에게 정 말 미안했다. 며칠 뒤, 나는 결국 우울증을 이 기지 못하고 아이들을 핑계로 한 국으로 가출을 해버렸다. 비장하게 아이 둘을 업고 안고 비행기를 탔 건만, 내 인생 첫 가출은 매일같이 아빠를 찾는 배신자들 덕분에 한 달 만에 마무리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현지 시 장에서 넉살 좋게 흥정도 한다. 곧 떠날 날이 아쉬워 괜히 낯익은 거 리를 다녀보곤 한다. 보고르에서의 10년은 내 인생의 발전기였다. 나 를 보듬어주던 보고르와의 이별을 앞두고 나는 새삼 감회에 젖는다.

내가 그리워할 보고르 끄븐라야. 시원한 나무 그늘 사 이로 걷는 아침 산책, 아이들이 신 나하는 곤충 채집과 식물 채집, 금 색 모자에 빨간 스카프를 맨 새하 얀 유럽식 대통령궁과 그 정원에 뛰노는 사슴들, 한 앵글에 다 담아 보는 것이 소원인 쌍둥이 거인나 무, 연꽃 가득한 연못과 넓디 넓은 정원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


집에서 보이는 구눙 살락(사진=조은아)

뿐짝. 사뚜 아라(Satu arah)를 노 련하게 이용해 달리는 잘란뿐짝, 새벽 이슬 가득한 구능마스의 차 밭, 뿐짝빠스에서 밤에 즐기는 따 뜻한 코코아와 하얀 입김, 찌빠나 스 중국 식당의 바삭한 개구리 튀 김과 삐상고렝, 찌보다스 끄분 라 야 트레킹, 물담배 냄새와 사과차 향 가득한 아랍 타운, 잘란뿐짝에 서 제일 유명한 Pak Haji Kadir 사 떼(Sate)와 아시난(Asinan)보고르. 센뚤. 레인보우 힐에서 내려다 보 는 경치와 정상에서 마시는 와룽 커 피, 파라다이스 공원의 비다다리 폭 포, 구눙빤자르 솔나무숲과 계곡, 파 인 포레스트에서의 야영, 이탈리아 아저씨가 화덕에 구워주는 따만 부 다야 핏자 식당, 정글 랜드 초입 식당 가 벤치에서 앉아 먹는 아이스크림.

직원들(전교생 30여명이라 모두가 가족 아침 등굣길에 자주 만나는 조꼬 위도도 대통령 행렬(매번 우리를 길에 세워두

같음. 내 생일도 학교에서 챙겨줌),

고, E-toll 카드 없이 고속도로를 진입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아이들에게 대통령의 꿈 을 심어주심.),

IPB 대학 여성회(지구

사랑 실천으로 나를 이끌어 준 이부-이부 (Ibu-Ibu)),

빠사르 잠부두아에 야채 가게 아저씨(매번 덤을 듬뿍듬뿍 넣어 줌), 단골 바나나가게 할아버지(언 제나 맛난 바나나를 저렴하게 주심). 그리고 그 누구보다 그리울 나의 친구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게만 느껴졌던 그때, 나에게 다가와 준 친구들. 지금은 케냐에 살고 있는 스위스인 미랭과 다니엘, 미얀마 근 무 중인 미국인 리사와 아론, 이스 라엘로 돌아간 에이미와 얼.

우리집. 창문을 열면 집안으로 밀 고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따스한 햇 살 아래 바짝 마른 이불들, 이층 테 라스에서 야경을 즐기며 먹는 삼겹 살과 소주, 밤 풀벌레 소리와 아침 새소리, 맨 발을 감싸는 정원 잔디의 포근함, 꽃 향기 가득한 밤 산책, 벽 난로에 구워 먹는 감자와 고구마.

리니, 빌리아, 리나, 테스, 비니 수많은 보고르 친구들. 10년 동안 그들은 내 가족이었고 자매들이었 다. 한국에 자주 가지 못하니 외로 울 거라며 시시때때 친딸처럼 챙겨 주시는 나의 인도네시아 부모님 꿍 꿍과 포포. 다시 못보게 되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마음이 아리다.

사람들. 우리 학교 선생들과 교

좁은 바닥이다 보니 우리는 모

르는 누군가가 우리를 기억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종종 있었다. 발리 따나롯에서 “보고르에서 왔지?”라며 반갑게 인사하던 현 지인 커플(보고르 어느 약국에서 우리를 본적이 있다함),

롬복행 비행기 안에 서 만난 애들 학교 동네 아저씨(우 리 애들 이름도 알고 있었음), 식물원 산 책길에 만난 아줌마는 내 친구 고 등학교 동창(너무 반갑게 인사해서 내 친구인 줄 착각함), 순식간에 내 시야 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재빨리 찾아 주는 토이 시티와 그란미디어 직원 들, 잘 알지 못해도 어디서든 만나 면 반가운 친구가 되게 하는 마법 의 도시가 바로 보고르였나 보다. 나는 이 여유 넘치는 곳에서 깨 알 같은 걱정들을 웃어 넘기고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아직은 많이 부 족하지만’ 남의 허물을 감싸줄 수 있는 관대함을 배웠다. 자연의 아름 다움과 소중함은 감사한 덤이었다. 이삿날은 아직도 두어달 남았는 데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콩콩 뛴 다. 이곳이 정말 많이 그리울 것 같 다. 보고르. 그동안 참 고마웠다.

109 조은아


구눙 살락 수아까엘랑 가는 길 (사진=조은아)

하늘은 마치 한국의 맑은 가을 하 늘처럼 높고 푸르다. 적어도 일년 의 반은 화창한 하늘과 짙푸른 산 과 아침 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 람과 함께 만끽할 수 있다. 자카르 타에서 그리 먼거리는 아니지만 당 일 여행으로는 다 둘러보기엔 산악 지역이라는 지리적 한계가 있다. ‘따만 사파리’가 있고, 나름 유 명한 자연 공원들이 빼곡한 휴양 지일 뿐 아니라 부유층들의 별장 이 즐비하기 때문에 주말과 휴일이 면 붐비는 차들로 르바란 연휴 못 지 않은 교통 체증을 앓는 곳이기 도 하다. 산악 지대로 올라가는 유 일한 도로인 잘란 뿐짝은 주말과 휴일엔 시간대별 한 방향 통행까지 하고 있어 제대로 된 정보가 없으 면 길에서 서너 시간씩 발이 묶여 있을 수도 있는 곳이다.

한국의 가을이 그립다면 보고르로 떠나자 / 조은아

자카르타가 치열하고 뜨겁게 성 장하는 동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위성 도시 중 하나인 보고르는 그 뜨거움에 지친 자카르타인들의 휴 식처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자고라위 고속도로를 통해 남쪽 으로 한 시간 쯤 달리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구름을 허리에 두른 높디 높은 봉우리들이 하나 둘씩 보이면 그 언저리가 바로 보고르다.

MY DEAR INDONESIA 110

자카르타 남쪽 60km, 인도네시 아에서 14번째로 큰 문화/관광의 중요한 중심지이자 산악 도시. 산 이 많은 만큼 지대가 높아 기후도 서늘하다는 점만으로도 이 더운 적 도의 나라에선 참으로 매력적이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 ‘비의 도시’라는 닉네임도 있다고는 하 지만 보고르는 하늘이 흐린 날이 거의 없다. 비가 오거나 맑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건기의 보고르

보고르 여행을 악몽으로 기억되 지 않도록 몇 가지 도움 되는 이야 기를 해 볼까 한다.

반나절의 여유 자카르타에서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는 센뚤 시티(Sentul city)는 놀 이 공원인 ‘정글 랜드’와 안쪽 깊 숙한 곳에 맑은 폭포과 우거진 숲 으로 이어진 트래킹 코스가 유명 하다. 특히 구능 빤짜르(Gunung.


Pancar)는

입구에서부터 길쭉길쭉 한 솔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데다 현지인들이 매달아 놓은 형형 색색의 해먹들이 장관을 이루는 곳 이다. 이곳을 시작으로 센뚤 온천 을 지나 ‘알프스’라 불리는 능선을 지나는 트레킹 코스가 매력이다. 활쏘기, 짚라인 등 야외 레포츠 를 즐길 수 있는 ‘따만 부다야’에 서는 전통 스파샵과 야외 펍, 머릿 수건을 두른 진짜 이탈리아 아저 씨가 직접 굽는 화덕 핏자도 맛볼 수 있다. 최근 센툴시티에는 예쁘 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커피숖 들이 앞다퉈 들어서면서 나름 핫한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잘란 빠자자란의 가장 중간 에 서있는 보고르의 상징인 Tugu Kujang을 시작점으로 Jl.otto iskandardinata, Jl.Ir. H. Juanda, Jl. Jalak Harupat로 이어져 다시 Padjadjaran의 Tugu Kujang 까지 연결된, 이 길은 마치 빠자자란이 라는 제일 긴 손가락에 끼워진 빛 나는 제왕의 반지처럼 도시 중심부 에서 가장 빛나고 중요하게 관리되 어지는 곳이다.

도 한다. 1817년에 건립된 이곳은 약 만 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데, 정문에서 길게 늘어선 카나리 야자 나무 가로수길이 특히 아름답 다. 식물원 안에는 연꽃 가득한 큰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보타니 컬 가든 카페가 유일한 식당이다. 여러 국적의 관광객들을 의식한 탓 인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도 맛있고 무엇보다 저녁 풍경과 라이브 음악 의 풍치가 그만인 곳이다.

또 센뚤 시티 초입에서 레인보 우 골프장을 넘어 구눙 굴리스까지 이어지는 길은 자전거 마니아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센뚤 시티의 다음 톨이 바로 꼬 따 보고르(Kota Bogor)다. 톨을 들어 서서 만나는 첫 번째 큰 도로가 보 고르의 메인 도로인 잘란 빠자자란 (Jalan Padjadjaran). 16세기경 자카르 타를 지배했던 서부 자바의 빠자자 란 왕국은 지금 보고르 심장부의 가장 큰 혈관으로 남아있다. 꼬따 보고르는 이 도로를 중심으로 주요 상권이 이뤄져 있으며 가장 큰 쇼 핑몰과 병원, 호텔들이 이 도로 좌 우로 늘어서 있다. 꼬따 보고르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끄분 라야(Kebun Raya) 식물 원과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이스타나 보고르(Istana Bogor) 도 이 빠자자란 거리에서 둥글게 이어지는 세 개의 일방 통행 길로 감싸져 있다.

트레킹(사진=조은아)

유일하게 인도가 깔끔하게 정비 되어 있어 천천히 걸으며 도시를 둘러볼 수 있는 한 시간 코스의 관 광지이자 보고르 주민들의 최애 조 깅 코스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돌면 오른편으로는 끄분 라야와 보 고르 성당, 우체국, 보고르 궁전 다 시 식물원의 정원을 만나게 되고 왼편으로는 빠사르 보고르, 시청, 도시 방위대와 각종 큰 은행, 호텔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일방 통행 이기 때문에 하나를 지나치면 다시 한 바퀴를 돌아와야 하니 주의가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보고르의 보물인 식물원 끄 분 라야(Kebun Raya)(입장료 : 외국인 26,000루피아, 끼따스 소지자 15,000루피 아)는

Botanical Gardens로 불리기

작은 도시지만 중앙 심장부에서 만끽하는 열대 우림의 시원한 그늘 과 각양 각색의 식물들이 내뿜는 평화로움이 이 도시를 이끄는 주된 기운이다. 보고르 전체를 둘러보기 에 시간이 없다면 단 반나절만이라 도 뜨겁게 달궈진 뇌와 가슴을 식 히기엔 충분한 곳이다. (돗자리와 음 식물 반입 가능하고, 평일에는 차량으로 관 람이 가능하지만 주말과 휴일에는 오후 4시 까지 차량 입장이 금지되어 있는데 주변에 별도의 주차시설은 없다.)

보고르 대통령궁(Istana Bogor)은 식물원과 안쪽 담을 공유하고 있지 만, 반대쪽 일방 통행로에서 그 넓은 정원과 순백색 네덜란드식 궁전의 전경이 더 잘 보이도록 되어 있다. 그곳에는 총을 든 군인들 대신 한가

111 조은아


로이 뛰어노는 천여 마리의 사슴들 이 그림 같은 유럽식 정원의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다. 자카르타나 찌안 주르의 집무실과는 차원이 다른 여 유와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곳이다. 일 년에 단 한번, 3일 동안, 미리 예약권을 받은 사람들에 한 해 궁 전 입장을 허락하는데, 굳이 사각 사각 들리는 사슴 똥 밟는 소리가 궁금하지 않다면 겉에서만 보는 것 도 나쁘지 않다. 복장 제한도 까다 롭고 선착순이라는 명목의 무질서 를 인내하기엔 그 공개 범위가 지 극히 제한적이다.

그랑오는 그 초입부터 늘 정체다. 잘란 뿐짝에는 아이들이 농장 체험을 할 수 있는 우유회사 찌 모리(Cimori), 수영장과 놀이 공원 등이 있는 따만 마타하리(Taman Matahari)가 있다. 저렴한 가격에 자 잘한 놀거리가 있어 현지인들이 많 이 이용하는 곳들이다. 그리고 뿐짝 필수 코스인 ‘따만 사파리’. 따만 사파리는 외국인과 끼 따스 소지자의 입장료 차이가 꽤 커 서 신분증 검사를 엄격히 하고 있으 므로 꼭 개인별로 하나씩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끼따스 소지자 Rp185,000 /미소지자 및 외국인 Rp400,000)

보고르 여행의 백미 ‘뿐짝’ 오르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뿐짝’은 보 고르 남쪽 정면으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 해발 3,019m의 구눙 빤그 랑오(Gunung Pangrango)다. 그 뒤로 2,980m의 구눙 그데(Gunug Gede) 와 구눙 마시깃, 구눙 링꿍, 구눙 뿌뜨리 등이 있고 남서쪽 수까부 미 방향으로 구눙 살락(Gunung Salak 2,211m)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구눙 살락은 보고르 시내를 경 유하거나 수까부미 방향의 국도 곳 곳에서 등반이 가능한데 아름다운 폭포와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 로의 등산로들로 사랑받는 곳이다. 트래킹과 캠핑 등이 가능하지만 산 새가 험해 주의를 요하는 곳이고 정상 등반은 꼭 현지 안내원과 동 행해야 한다. 구눙살락이 아직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반면, 잘란 뿐짝 (Jl. Puncak)이 유일한 입구인 구눙 빤

MY DEAR INDONESIA 112

따만 사파리를 지나치면 아랍 식당과 슈퍼 등이 즐비한 ‘아랍 거 리’를 지나 산 중턱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차 밭인 ‘구눙 마스’를 만 난다. 그 곳에서부터는 급경사의 산 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져 뿐짝 빠스까지 이어지게 된다. 가장 꼭대기인 뿐짝 빠스를 넘어서면 그데-빤그랑오(Gede국립 공원과 또 하나의 끄분라야 찌보다스(Cibodas), 꽃 공 원인 따만 붕아(Taman Bunga) 등이 가장 대표적 관광지다. Pangrango)

등산 마니아들의 필수 코스인 그 데-빤그랑오 국립 공원 등반은 1 월~3월까지는 폭우로, 8월 건기는 산불 방지를 이유로 입산이 통제되 며, 그 나머지 4월~11월에는 등반 이 가능하다. 하루 입산 인원을 통 제하고 있어 인터넷으로 반드시 예 약을 해야 하며, 가이드 동반은 필 수.(http://www.gedepangrango.org) 보고르 사람들은 주로 일을 마친 평일 저녁에 뿐짝을 올라 저녁을 먹

고 차 한잔 즐기며 산 너머 찌안주 르의 야경을 즐긴다. 지대가 워낙 높아 자켓은 필수로 입어야 하고 밤 에는 허연 입김도 불어 낼 수 있다. 자카르타에서 두어 시간 거리에 입김까지 불 수 있는 시원한 휴양 지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다. 문제는 이 매력적인 지역 은 늘 교통 체증이라는 문제로 외 부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는 것이다.

Satu Arah 극복하기 톨 찌아위(Toll Ciawi)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란짜마야(Rancamaya) 와 수까부미(Sukabumi)로, 왼쪽으로 는 뿐짝(Puncak)으로 길이 나뉜다. 올해 초 찌아위-수까부미(Ciawi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찌아위–찌곤봉(Ciawi-Cigombong)구 간이 열리면서 수까부미 방향의 정 체는 사라졌다.

Sukabumi)

주말과 휴일에 이 길로 수까부 미 진행을 원한다면 찌아위 톨에서 는 가장 오른편 게이트로 들어서 야 한다. 뿐짝 방향은 이른 아침부 터 이미 차량으로 가득 차 있는 경 우가 많아 수까부미 진행까지도 불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요즘은 보 고르 방향의 차선 하나를 수까부미 방향으로 열어준다. 허리 높이의 중앙선 때문에 잘못 들어서면 꼼짝 없이 뿐짝 방향이 풀릴 때까지 고 난(? )을 함께 해야 한다. 찌아위-뿐짝구간에서 주말과 휴일에 실시하는 시간별 한 방향 통행, 일명 ‘사뚜 아라(Satu arah)’ 는 지난해 까지만 해도 규정으로


정해진 시간이 없이 그때 그때 교 통 상황에 따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었다. 나름의 시간표가 있었 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하 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난 해 11월, 이 ‘한방향 시스 템’을 없애 보고자 ‘2-1시스템’, 즉 덜 밀리는 방향은 1개 차로, 반 대 방향은 2개 차로를 이용하게 한 다는 방법을 내놓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테스트를 했던 첫날, 뿐 짝 도로 전 지역이 차와 오토바이 로 뒤엉킨 아수라장이 되면서 밤새 도록 그 정체가 풀리지 않는 진풍 경을 만들어내고 사라져버렸다. 지금도 물론 공식적으로 발표된 시간표는 없지만 올해부터는 가늠 할 수 있는 나름의 ‘규칙성’을 유 지하기로 하면서 요령 있게 시간대 만 잘 선택한다면 큰 무리 없이 여 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험이 끝나는 5월 중순, 크리스마스 와 연말 전에는 오전 7시만 되어도 뿐짝행 차량이 센툴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반대로 뿌아사 기간에는 주말과 휴일에도 한가하 다. 단, 뿐짝 지역은 아랍인 마을이 있을 만큼 강성 무슬림지역이므로 뿌아사 기간에는 낮에 식사할 곳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단, 사파리나 국 립 공원은 정상 운영 된다. 보고르 경찰은 인스타그램과 페 이스북을 통해 한동안 ‘One way’ 의 시간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정보보다는 자체 홍보물 이 많은 편이라 차라리 뿐짝 어딘 가의 호텔이나 카페로 전화해 소통 상황을 물어보는 편법도 나쁘지 않 은 것 같다.

주말의 잘란 뿐짝만 아니라면 보고르는 늘 평화롭다. 수 백년 된 나무가 가로수로 뻗 어있는 빠자자란은 1998년 자카르 타 폭동 때도 평온했었고, 선거철 에도, 정권 교체 시기에도 평소와 다름 없었다. 마음도 머리도 뜨거운 날엔 반 나절 시원한 보고르 나들이를 추천 한다. 요즘은 자카르타에서 보고르 까지 고속도로를 달려 30여분이면 충분하니 말이다. 오늘도 보고르의 하늘은 홍시 한 입이 그리운 한국의 가을 날씨 처럼 화창하다. 한국의 가을이 그 립다면 오늘 하루 보고르 나들이는 어떨까.

한 앵글에 정말 담을 수 없는 끄분라야 쌍둥이 나무 (사진=조은아)

아침 8시부터 약 20~30분 간 보 고르 방향 전 차량 하행부터 시작 한다. 그 이후 정오경까지는 전차 량 뿐짝 방향 상행이 이뤄진다. 정 오경부터 약 한 두 시간 다시 양방 향 통행을 한 후 토요일에는 오후 4 시 30분까지, 일요일에는 저녁 6, 7 시까지 전 차량 하행이다. 새벽에 달릴 자신이 없다면 오전 열 시쯤 찌아위 톨에 도착하여 아 침 내내 막혀 있던 차량들이 다 올 라간 그 뒷꽁무니를 따라 갔다가, 일요일 점심을 먹고 하행선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과 함께 내려오거나 밤 늦게 하산하는 방법이 가장 안 정적인 뿐짝 여행 방법이긴 하다. 직장인들의 급여일이 몰려있는 월말과 월초, 현지 학교의 진학 시

113 조은아


그레타 1인 시위 모습

열일곱 소녀의 도전 / 조은아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는 누구인가.

요일(#FridaysForFuture)’이라는 해 시태그로 자신의 '등교 거부 운동 을 전 세계에 알리며 같이 동참해

2003년 1월 3일 스웨덴에서 태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의 행동은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

어난 그녀는 11세에 자폐의 일종인

서구권 진보 청소년층을 주축으로

다고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는다.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녀의 지

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

그 주요 증상 중에 하나가 한 가지

지자들을 양산해 냈다. 소셜 미디

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

에 집중한다는 것인데 그레타에게

어를 통해 ‘#FridaysForFuture’이

는 환경 문제가 그 대상이 되었다.

라는 캠페인으로 발전하고 200여

이 가슴 뜨끔한 말은 2018년 12

MY DEAR INDONESIA 114

국 2만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전파

월,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

특히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주

베리가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목했던 그녀는 지구의 환경이 파괴

제24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되어 가는 것에 침묵하고 기후 변

이 물결은 소셜 미디어 밖으로

총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그

화 대응에 미온적인 어른들에게 반

넘쳐 2019년 3월 15일, 125여개국

녀의 나이는 15세였다.

항의 의미로, 2018년부터 매주 금

2천여 도시에서 100만명 이상이

요일마다 등교를 거부하고 국회의

운집한 적극적인 기후 변화 대응을

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다.

촉구하는 학생 주체 시위, ‘기후를

그리고 ‘지금은 #미래를 위한 금

위한 학교 파업 시위(School strike for

되었다.


climate)’로

이어진다. 2019년 9월

20일과 27일에는 150여개국 4500

영웅 인가, 꼭두각시 인가.

할아버지는 영화 감독, 아버지 는 배우, 엄마는 오페라 가수라는

물론 그녀가 유명해 지면서 각

뒷배경과 ‘여성, 청소년, 장애인’

종 반격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

이라는 관심 받기 좋은 삼박자의

실이다. 그녀가 비행기 대신 기차

테마로 그녀가 더 급격히 유명세를

그레타는 또 1년간 휴학 (Gap

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먹는 음식들

탈 수 있었다는 말은 완벽한 억측

Year)하고 영국에서 미국, 스웨덴에

이 일회용 포장지에 싸여져 있고,

도 아닐 것이다.

서 스페인까지 비행기가 아닌 보트

비건을 주장하는 그녀가 집에서 최

로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비행

고급 가죽 쇼파를 사용하고 있으며

기가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발

그녀가 탔던 무탄소 태양광 동력

생하는지 알렸다. 지난해 1월 스위

요트는 완벽한 무탄소가 아니었고

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 9월에는

선원들은 그녀의 퍼포먼스를 위해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 기후 행동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어야 한다는

정상회의, 12월에는 스페인 마드리

등 그녀가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

드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

해 혹은 정치적 노리개로 조정 당

사국 총회 연단에 서서 기후 변화

하며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에 대해 어른들이 적극적인 행동을

날 선 비판과 조롱들이 쏟아졌다.

여 도시에서 400만명 이상이 시위 에 참가하기도 했다.

해 줄 것을 호소했다. 대서양을 가로 지르며 4800km 올해 열렸던 다보스포럼에서는

를 항해한 그녀의 최고급 태양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의 설전 중

요트팀의 창설자이자 선장인 피에

‘트럼프 대통령과 기후 변화 이야

르 카시라기는 모나코 공가의 외손

기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 할 만

자로, 최상류층이자 셀러브리티에

큼 세계 정상들 앞에서도 자신의

속한다. 단지 배기가스를 뿜어내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않았을 뿐 엄청난 사치성 퍼포먼스 였다는 것이다. 일반 유람선을 이

지난해 뉴욕 타임지 선정 ‘올해

용하더라도 비행기로는 10시간이

의 인물’, 포브스지 선정 올해의 여

면 갈 거리를 배를 이용해 수 일에

성 100위, 과학 저널 네이처 올해

걸쳐 감으로써 식료품, 폐기물, 기

의 인물 10인으로 선정되는 등 열

타 생필품 등의 수요가 늘어나고,

일곱살 소녀의 활보는 누구보다 진

배 안에서 사용해야 하는 전기도

보적이고 전 세계 학생들에게 미치

또 다른 에너지를 태워 얻어내야

는 영향력이 컸다.

한다. 또한 1인당 편도 여행에 드는 유류의 양은 10시간과 10일 내내 엔진을 돌리는 것을 비교할 때 비 행기 쪽이 오히려 적다.

뉴욕 타임지에 실린 그레타

또한 그레타의 주장은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는다는 '위급 상황' 임을 강조하며 여러가지 즉각적 이고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화석 연료의 사용을 중단하고 탄소 배출 규제 를 급격히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

115 조은아


하면서 신흥공업국과 개발도상국

지난해 말 과학전문지 더 뉴

‘환경 운동’은 인간이 행동의 자

들로부터 “경제 성장을 포기하라

사이언티스트(The New Scientist)는

유를 앞세워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

는 소리”냐는 반발을 사는 등 그녀

2019년을 그레타와 시위대의 활동

로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두를 위

가 매우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

으로 인해 대중이 기후변화에 대해

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에 다시 한

는 것도 사실이다.

"마침내 눈을 뜨게 된 해"라고 평

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21세기 인류

가했다.

가 직면한 가장 큰 ‘도덕적 도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

이다. 꼭 해야만 하는 행동이 아니

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녀가

소셜미디어에서 최신 유행에 열

라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환경운동가

광하던 전세계의 수백만 명의 청소

는, 그래서 지속적으로 의미와 의

여서가 아니다.

년들이 그녀의 #FridaysForFuture

견을 형성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캠페인으로 인해 환경 문제의 심각 성을 인지하게 된 것은 대단히 큰

17세 소녀에게 기대한 그 이상의 것 처음 어린 소녀 그레타가 매주 금요일 학교 가기를 거부하고 스웨 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나 는 곧 그녀가 학교로 돌아가 열심 히 공부해서 미래의 환경 인재로 자라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 나 그녀는 내 교과서 같은 기대와 는 전혀 다른 행보로 나를, 전세계 를 놀라게 했다. 물론 그레타의 활동으로 인해 기후 변화 관련 정책을 직접적으로 바꾼 정부는 없다. 하지만 아직도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그녀가 ‘나 의 행동으로 세계가 바뀔 수 있다’ 는 신념으로 세계의 기후환경 문제 에 불을 지폈다는 사실 자체는 누 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MY DEAR INDONESIA 116

그레타는 이슈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성과다.

고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을 또 그녀로 인해 비행기 승객 한

늘리고 이들을 보고 따라하는 사람

명이 1㎞를 이동할 때 발생하는 이

들도 많아지게 하는 효과를 주고

산화탄소 배출량이 285g으로 기

있는 것이다.

차(14g)보다

20배 이상 많다는 사

실도 알게 되었고, 스웨덴에서는 비행기 탑승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문화 현상인 ‘플뤼그스캄 (Flygskam/플라이트 쉐임 Flight shame)’

이 생겼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기차 여행에 자부심을 느낀 다’는 뜻의 ‘탁쉬크리트(Tagskryt)’ 라는 말도 탄생했다. 현실적인 가장 큰 성과로는 장 클로드 융커 유럽 연합 집행위원장 으로부터 7년간 EU가 1조 유로를 기후 변화 대비에 투자하겠다는 약 속을 받아낸 것이다.

완벽한 방법은 없다. 누구에게든 신이 아닌 이상 완 벽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만약 누 군가 완벽한 환경운동가가 되겠다 고 한다면 일단 입고 있는 그 화학 섬유의 옷가지부터 벗어 던져야 할 것이다. 천연 소재라도 그 소재가 옷으로 가공되는 동안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이산화탄소와 각종 부자 재를 생각한다면 그 조차도 허용해 서는 안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회용 비닐 봉지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종이 용기 사용을 권 장하지만, 이 종이 용기조차도 일정한 형태를 만들고 내용물이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플라스틱이나 포일 등이 포함된 여러 개 의 소재 층으로 이루어진다. 이론적으로 각 층을 분리해 종이만 재활용할 수 있겠지만 누가 과연 그 얇은 종이팩의 층을 한꺼풀 씩 분리해 낼 것인가. 옥수수, 사탕무, 카사바 등의 작물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친환경 수지(PLA) 제품들은 ‘퇴비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쓰 이지만 그냥 던져두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 제품을 제대로 분해시키기 위해서는 높은 열과 수분 조절이 필요한 전문 퇴비 시설이 있어야 한다. 일회용 황색 종이 봉투는 그 제조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과 천연자원이 사용되면서 재사용 비닐 봉지에 비해 지 구온난화 잠재력이 80배나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관심을 갖는 것, 지 속적인 이슈에 반응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꼭 해야 할 도덕적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일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을 미루는 것은 우리 아이들 에게 더 망가진 지구를 물려주는 일이라는 것 을 잊지 않는 일이다.

117 조은아


제게 있어 인작은 ‘가만히 나를 되돌아보게 되 는 시간’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도시 빈민 아이들의 교육정책에 공헌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자카르타에 서 보낸 7개월 동안 저는 여러 일을 맡으며 숨 가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주변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제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다그침 때문이었습 니다. 하루하루 마냥 앞으로만 걸어가던 제게, 인작은 잠시 서서 심호흡하고 조용히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미덕을 선사해주었습니다. My Dear Indonesia, 친애하는 인도네시아. 제 교육 봉사 중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수업을 듣던 아이들의 모습, 인도네시아 언어를 습득 하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던 아 트마자야 대학교에서의 생활, 한인니문화연구 원의 행사를 도우며 세계 여러 나라의 외교관 에게 한인니 예술문화를 소개하던 때. 여러 추

MY DEAR INDONESIA 118

억들은 저마다 다른 색과 감성으로 아름다운 선율의 하모니를 내며 제 가슴에 울려 퍼졌 습니다. 그리고 그 생생한 감정을 몇 편의 글 로 표현했습니다. 가슴속 한 켠의 꿈과 자카르타 일상에서의 행복을 저는 인작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인 도네시아가 제 인생에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지, 제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는지도 저는 인작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인작 회원 들의 글을 읽으며 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들이 느끼는 인도네시아의 존재와 의미, 그 들이 표현하는 인도네시아를 향한 사랑과 다 른 색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 보고, 인도네시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느 낄 수 있는 기회를 준 인작의 웹진 발간을 진 심으로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회원 들이 인작을 통해 자신의 꿈과 인도네시아에 서의 일상을 되돌아보고 인도네시아를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 인 정 Cho In Jung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아시아 태평양 연구과 박사 1학년 (교육학 전공) - 인도네시아 아트마자야 카톨릭 대학교 다르마시스와 장학생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아시아 태평양 연구과 석사 (교육학 전공) -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엘리엇 국제관계대학 교환학생 - 일본 와세다 대학교 국제교양학부 학사 - 2020. 6 – 현재 유네스코 방콕사무소 통합교육부서 인턴 - 2019 – 현재 교육 팟캐스트 FreshEd 컨텐츠 및 소셜미디어 매니저 - 2019 국경없는의사회 일본사무소 구호활동가 인력관리 자원봉사자 - 2016 – 2018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및 마우메레 빈민촌 영어교육 봉사 - 2013 – 2014 조갑제닷컴 <조인정의 유학스토리> 칼럼니스트 - 인도네시아 진출기업 노무관리 안내서 (2020, 노사발전재단) - 탈북학생의 한국교육시스템으로의 성공적 통합을 위한 교육 정책 제안 (2019, University of Antwerp) - 소심한 인정이의 대담한 선택 (2014, 조갑제닷컴)

119 조인정


자카르타에서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보낸 7개월

/ 조인정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2019년 2월 논문 자료 수 집 차 자카르타에 한 달 간 체류 했다. 체류 기간 중 주말에는 로 컬 NGO의 러닝센터를 찾아 학생 및 학부모, NGO 교사들을 인터 뷰했고, 주중에는 아트마자야 대 학교(Atma Jaya Catholic University of Indonesia)의 국제처에서 외국인 학 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전략 개발과 홍보 책자 제작 등을 돕는 봉사활 동을 했다. 일본으로의 출국 이틀 을 앞두고, 대학 국제처 오피스에 서 마지막 업무를 하던 중, 함께 일 하던 현지인 친구가 아트마자야 대 학의 소셜미디어에 올려진 공고 하 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인정아, 일본으로 돌아가면 일 본 친구들에게 이 정보 좀 공유해 줄래? 접수일이 10일 정도 밖에

MY DEAR INDONESIA 120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친구가 건넨 것은 인도네시 아 교육문화부와 외무부가 협력 하여 주관하는 외국인 학생 대 상 장학프로그램 ‘다르마시스와 (Darmasiswa)’였다.

아세안 협력을 위해 1974년 도입된 정부초청 장 학프로그램인 다르마시스와는 초 기에는 아세안 국가 내 학생들만을 선발했지만 점진적으로 장학금 선 발 대상 국가를 넓혀갔다. 1980년 대 약 10개국이 참여했던 다르마시 스와는 2019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101개국이 참여하는 장학프로그램 으로 성장했다. 다르마시스와에 선 발된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총 72개 대학(2020년 기준) 중 한 곳 에서 인도네시아 언어, 예술, 문화 등에 대해 10개월 또는 12개월을 선택하여 학습하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서 친구가 보내준 공고를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 동안 인도네시아어 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라 장학프로그램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매년 방학에 인도네시아를 찾았고, 빈곤 아동들을 위한 교육봉사를 해 왔다. 교육봉사에서 간단한 인사말 수준의 인도네시아어 밖에 할 수 없었기에, 내 모든 수업은 현지인 친구의 동시통역 없이는 진행이 불 가능 했다. 바디랭귀지와 눈빛으로 인도네시아 학생들과 제약적인 소 통을 했던 그 때 자신과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아이들과의 원활한 대화와 소통을 위해 꼭 인도네시아 어를 배울 것이라고 말이다. 더욱 이 논문 집필을 위해 현지인들과 인터뷰를 하고, 인도네시아어로 쓰 인 교육 관련 통계 자료를 접하면 서 인도네시아어 학습에 대한 필요 성을 더욱 크게 느꼈다. 일본에 도 착한 나는 분주히 다르마시스와 원 서 작성을 시작했다. 4월 학기가 시작되어 나는 석사 논문을 쓰다가도 다르마시스와 합 격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간혹 인터넷에 아트마자야 대학을


비파 레벨 1 클래스 동기들과 학기말 여행 으로 방문한 데폭(Depok)에서 (사진=조인정)

검색하고 학교 교정을 사진으로 보 며 그 곳에 서있는 내 모습을 상상 하곤 했다. 드디어 5월에 발표가 났 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한국 장학 생 2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1지망으로 지원했던 자카르타 소 재 아트마자야 카톨릭 대학교에서 1년간 인도네시아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 루어진다'는 클리셰 같은 진리가 실현된 것이다.

자카르타에서의 소소한 일상 오전 9시 15분 나는 꼬스(kost, 게 스트하우스 및 원룸 하숙집 등의 인도네시 아의 보편적 숙소)를

나섰다. 10시 15 분에 인도네시아어 수업이 시작되 기 때문이다. 차도인지 보행로인지 구별이 안 되는 학교 통행 길을 건 너는 것은 매일 연속되는 나의 피 할 수 없는 미션이다. 줄지어 지나 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보행자 를 위해 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듯 하다. 현지인 친구들이라면 분명

한 손을 내밀어 차를 멈춰 세우고 거리를 당당하게 건넜겠지만, 이는 내게는 마법 같은 광경일 뿐이다. 결국 오늘도 한참을 기다리다가 모든 오토바이와 차가 멈춘 시점 에 재빨리 그 틈을 비집고 길을 건 넜다. 거리에는 푸르른 열대 나무 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로수라 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식 물들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던 것도 잠시, 찌는 건기의 뜨거운 태양아 래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 마다 땀이 한 줄 한 줄 더 흐르는 것 을 느낀다. 육교를 건너고, 울퉁불 퉁한 좁은 보행로를 30분 정도 걸 어 학교에 도착했다. 험한 길을 굽 이굽이 걸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한국에서 사온 신발은 눈에 띄 게 점점 해져갔다. 매일 왕복 한 시간씩 걸어 통학 하는 나를 보며 현지 친구들은 내 가 대단하다고 혹은 무모하다고 말했다. 차량·오토바이 호출 서비 스인 그랩(Grab)이나 고젝(Go-Jek) 을 불러 등하교를 하는 것을 추천

해 주며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인도 네시아어가 서툴러 간단한 자기소 개 밖에 할 수 없던 내게, 그랩과 고 젝을 호출하면 받아야하는 운전수 들의 확인전화 또는 메시지가 조금 두려웠기에 호출을 쉽게 할 수 없 었다. 하지만 내가 그랩이나 고젝 을 이용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악명 높은 자카르타의 교통 체증 때문이었다. 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이면 되는 거리를 차를 타면 훨씬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아트마자야 대학교에서 오전 2 시간(10:15~12:15) 동안, 인도네시 아 어학연수인 비파(BIPA, Bahasa Indonesia bagi Penutur Asing) 수업을 들 었다.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인 도네시아에 온 며칠 후 나는 인도 네시아 국립대학교(UI, Universitas Indonesia)에서 인도네시아어 레벨 테스트를 치렀다. 스피킹 섹션에서 시험관이 인도네시아어로 질문하 면 영어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라이팅 섹션에서는 인도네시아로 적힌 시험문제를 이해할 수 없어

121 조인정


시험지에 “저는 인도네시아로 쓸 줄 모릅니다”라고 적어냈다. 당연 히 초급과정인 BIPA 레벨 1 클래스 에 배정되었다. 아트마자야 대학의 BIPA레벨 1 클래스는 한국, 일본, 대만, 호주에서 온 학생들 10명으 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학(원)생 신분이었던 나와 대만 친구를 제외 하고는 우리 반 학생들은 인도네시 아의 기업에서 근무하거나 해외 주 재원으로 파견된 직장인, 직장인의 배우자분이었다. 우리 수업은 Ima 선생님의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한 마디 “Apa kabar semuanya?(모두 들 안녕하세요?)”로 시작되었고, 우 리는 작은 강의실에서 둥글게 둘러 앉아 롤플레이(role-play) 등 참여형 수업 방식을 통해 즐겁게 인도네시 아 기초 문법을 학습했다. “인정아 가자!” 두 시간의 수업 이 끝나면 항상 나와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두 분의 한국인 주재원 아저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학 교 옆에 위치한 작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네시아어를 최대한 활용해가 며 음식점 종업원에게 점심을 주문 했다. 내가 가끔 버벅이며 주문 할 때면 아저씨들께서 도와주었고 이 렇게 현지 생활에 적응해 갔다. 아 저씨들은 식사를 하면서 내게 자 신들의 이런저런 인생이야기, 인도 네시아에서의 근무 실상 등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러한 그 분들의 이 야기 하나하나는 내가 미래에 어떠 한 인생을 설계하며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

MY DEAR INDONESIA 122

이 던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 리가 나눈 대화는 어쩌면 그분들에 게 있어 단지 가벼운 대화였을 수 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소중한 인생 의 교훈이었던 셈이다. 오후 1시 30분, 진정한 인도네시 아에서 홀로서기는 이 때 부터 시

맥이 풀렸다. 하루를 어떻게 가장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나를 발전시 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도 잠시 곧 이전만큼 알찬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아트마자야 대학교는 고등교육 국제화에 발맞추어 활발

벨라루스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한국-인도네시아 문화를 소개하며 (사진=조인정)

작이었다. 장학프로그램 원서 접수 시에는 하루 4시간이라고 소개되 었던 수업 스케줄은 학교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인도네시아 도착 며칠 전에 2시간으로 변경되었다. 그리 고 이것이 인도네시아 홀로서기의 발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시간 의 오전 수업을 마치면 하루의 남 은 시간은 모두 자유였던 것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논문 집필 때 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나였다. 하 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갑자기 주어 진 자유 시간에 공허함을 느꼈고

한 외국인 유학생 유치 전략을 벌 이는 중이었고, 한국은 핵심적 국 가였다. 아트마자야 대학은 경기도 와 대구 소재의 대학들과 교환학 생 및 썸머스쿨 프로그램 등을 통 한 적극적인 대학 간 협약을 모색 중이었다. 아트마자야 대학의 부총 장과 국제처장은 한국인인 내가 한 국-인도네시아 대학 간 협약 과정 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부탁 했고, 나는 한국 대학 담당자들이 아트마자야 대학을 방문하여 회의 를 할 때 영어-한국어 번역을 하는


등의 일을 도왔다. 아트마자야 대 학을 돕는 일 외에도 런던대학에 계시는 교수님의 일을 돕기도 했 고,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네시아어 를 복습하고, 현지인 친구들과 맛 집이나 카페를 다니면서 자카르타 에서의 일상을 즐겼다. 더욱이 한 인니문화연구원의 사공경 원장선 생님 덕분에 꼬따뚜아(Kota Tua) 역 사 연구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역사가 있는 문학상 시상식에서의 진행, 해외 외교관들을 만나 인도 네시아와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 알 리기 등의 보람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 고 예전부터 두 국가의 화합을 위 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여 온 인 도네시아 한인교민들을 만나 교류 하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자 긍심을 갖게 되었다. 다르마시스 장학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 하는 것 외에도 여러 업무를 맡으 며 한국-인도네시아 교육 및 문화 예술 교류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 같아 너무도 감사했다.

아쉬운 작별 2020년 2월 말까지만 해도 코로 나19 확진자가 없던 인도네시아에 도 곧 코로나19는 점진적으로 확산 되었고 아트마자야 대학교도 3월 중순부터 캠퍼스 문을 닫았다. 대 학의 모든 수업은 대면수업에서 온 라인수업으로 변경되었다. 나 또한 8월 말 다르마시스와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던 본

래 일정을 바꿔 4월 초에 귀국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언어와 문화 를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선 택한 인도네시아 유학이었기 때문 에 한국으로 떠나는 길은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수카르노 하타 국제 공항을 떠나는 비행기 창밖을 통해 점점 작아지는 자카르타 도시를 가 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카르타의 따 뜻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 다. 사랑하는 도시와 조용히 작별 했다.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 던 BIPA 레벨2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다르마시스와 장학 프로그 램을 졸업했다. 8월 현재, 한국에 서의 생활도 어느새 5개월째에 접 어들었다. 인도네시아로 떠날 온갖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도 벌써 작년 이 시기이다.

길 까끼 리마(kaki lima)에서의 사떼 굽는 냄새와 나시고랭의 냄새. 내 인생의 소중한 일부가 된 7개월 남 짓의 자카르타에서의 생활은 20대 중반의 청춘을 다채로운 감성으로 물들였던 것이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서둘러 떠 나야 했던 그 곳. 인도네시아는 곧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연인 인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인도네시아에 대한 내 사랑은 더욱 더 커져가는 듯하다. 오늘도 나는 그 품 안에 안길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의 달라진 일상, 일 년 전과는 다른 모습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내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매일같이 인도네시아 음악을 듣는 일이다. 인도네시아 음악의 가사와 멜로디에 귀를 기 울이다 보면 어느새 자카르타에서 의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는 나 자 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리고 자 카르타에서의 소소한 일상의 기억 들을 되새겨 본다. 매일 보던 캠퍼 스의 풍경과 도로를 꽉 메운 오토 바이와 차들, 하루 다섯 번씩 들리 던 모스크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 잔(Azan)소리, 저녁 집을 돌아오는

123 조인정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자카르타 슬럼에서 만난 아이들, 나 그리고 우리들의 꿈. / 조인정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 미국의 시인이자 래퍼인 투팍 샤커(Tupac Shakur)

그대는 들었는가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장미에 대해 두 발 없이도 걷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 자연의 법칙 따위는 엉터리라는 걸 증명하였고 누구도 믿으려 들지 않겠지만 장미는 꿈을 포기하지 않기에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네 시선 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도 콘크리트를 뚫고 자란 장미는 오래오래 피어 있으리!

친구 벨라가 태워주는 오토바이 뒤에서 혹시나 떨어질 세라 두려운 마음에 그녀의 옷깃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 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 역으로 향한다. 그 역에서부터 느릿느릿 모든 정거장을 서 는 크레타(kereta, 전철)를 타고 삼십 분을 걸려 도착한 역에 서 하차한다. 빵빵거리며 눈 앞에 멈춰서는 앙콧(angkot, 미 니버스) 안으로 들어가 몇 뼘 남짓한 공간에 비집고 앉아 차 의 덜컹거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십분 여정도 달려간다. 길 가에 앉아있는 오젝(ojek, 영업용 오토바이) 아저씨들에게 가 격을 흥정하고 탄 오토바이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달린다. 인스턴트 커피와 크루푹(kerupuk, 튀긴 과자)이 주렁주렁 매 달려 있는 조그마한 한 와룽(warung, 노점상) 앞에서 내린다. 부패되어가는 쓰레기더미, 모래와 시멘트가 날리는 폐허, 악취가 진동하는 구정물이 흐르는 좁다란 골목을 걸어간 다. 조금 걷다 보면 저 먼발치에서 내 모습을 본 아이들이 “kak 인정”을 외치며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아이들은 자 그마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우리는 마음씨 좋은 학교 선생님 댁 앞에 다다른다. 그 집 문 앞 작은 공간, 전등이 없어 어둑어둑하지만 비는 피할 수 있는 그 곳. 내가 약 두 시간 발걸음을 해 찾은 이유다. 겨우 걸음걸이를 뗀 듯한 어린 아이들부터 늠름해 보이던 초등학생 고학년 아이들 까지 모두 모여 옹기종기 앉아있던 그 곳. 왁자지껄한 웃 음소리로 가득 메워진 그 곳. 그곳은 바로 내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소중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와세다 대학교 국제교양학부 재학 중, 알 수 없는 미래 와 목표를 향한 선택의 길목에서 고민하던 나는 인도네시 아 국립대학교(UI, Universitas Indonesia)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 벨라를 어느 수업시간에 우연히 만났다. 둘 다 여

MY DEAR INDONESIA 124


태까지 사회 빈민층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참여해 왔다는 것에 공감하 며 우정을 쌓았고, 벨라는 내게 인 도네시아 도시 슬럼가에서의 교육 봉사 활동을 권했다. 2016년 여름 방학, 처음 마주한 인도네시아에 서 나는 열악한 환경에도 환한 웃 음과 명랑함을 잃지 않던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 로 내 수업에 집중했고, 손을 번쩍 번쩍 들고 수업 중 내가 던지는 질 문들에 열정적으로 답했다. 아이들 의 이러한 모습은 내 마음 속 따뜻 이 스며들어 내가 교육학의 길을 선택하게 했고, 금후 인도네시아 빈민층 아이들의 교육발전에 공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 다. 그 후로 매 방학마다 나는 그 아 이들이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를 찾 아 꾸준히 교육봉사를 했고 아이들 에게 조금 더 나은 교육환경과 정 책을 구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꿈을 가슴에 안았으며 ‘도시 슬럼교육’ 에 대해 연구해보자고 결심했다.

는 적은 임금으로 주거비를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운하와 철도 근 처의 무허가 주택이나 다리 밑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이른바 ‘슬럼 인 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2019년 세계은행과 인도네시아 농 지공간기획부가 발표한 조사에 따 르면, 자카르타의 267개의 끌루라 한(kelurahan) 중 44%에 슬럼이 있 고, 그 곳의 거주민 중 전체의 절반 이 강 주변에 주거하고 있다.

도시 슬럼에 대한 자료와 통계 수치를 찾으면 찾을수록 나는 인도 네시아의 도시 슬럼이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도네시아의 도시화율은 이미 53.7%에 다다라 약 1억 3,740만을 이루고 있었으 며, 자카르타는 동남아지역 안 가 장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었던 것 이다. 또한 급격한 도시화로 도시 개발이 교외지역으로 무분별하게 팽창하는 도시스프롤 현상을 겪으 며 무질서한 교외화가 벌어지고 있 었고, 그 확산속도는 농촌에서 도 시로의 인구증가로 더욱 가속화되 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도시화 로 땅값과 임대료가 급등하여 문제

제로 내 열정을 200% 어김없이 쏟 아낼 수 있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 에 나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 었다. 그 후 며칠 뒤 연구에 대한 조 언을 듣기 위해 교수님의 오피스에 서 쿠로다 교수님과 일대일 면담을 가졌다. 교수님은 내 연구 계획서 를 다시 읽어보시며 말씀하셨다.

“인도네시아 슬럼교육 (Slum Education)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

겠습니다!” 2018년 와세다대학 대학원 아 시아태평양 연구과, 일본 내 교육 학으로 정평이 나 있는 쿠로다 카 즈오 교수님의 세미나 시간, 나는 이십 여명 남짓한 학생들 앞에서 내가 정한 연구주제와 연구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아이들과의 따스했 던 기억들을 토대로 한 이 연구주

“교육학에서 ‘슬럼교육’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도시빈 민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the urban poor)’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니? 그렇지 않다면 다른 연구를 생각하 는 것이 좋을 거 같구나.” 교수님의 조언은 현재까지의

2016년 여름, 슬럼가 아이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며 (사진=조인정)

교육정책학 동향에 부합하는 것 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각 정부는 도시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교육 정책으로, 그들을 거리의 아이들 (street children), 근로 어린이(working children), 고아(orphans) 등 여러 그룹 으로 분류하여 특정 그룹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상별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슬럼교 육’이라는 용어는 교육정책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 지만 이러한 교육정책 담론의 부재 는 내가 더욱 ‘슬럼교육’을 고집한 이유였다. 즉, 정부가 시행하는 분 산적 성격을 띄는 교육 프로그램과 정책은 그들이 정한 카테고리에서

125 조인정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아이들 (사진=조인정)

배제되는 슬럼 거주 아이들을 지원 해줄 수 없었고 이들을 자동적으로 정책영역 안에서 제외시켰기 때문 이다(예를 들어, 슬럼에 거주하는 취학 아 동 및 장애학생 등). 따라서 슬럼 아동 을 위한 포괄적 프로그램의 생성이 절실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펼치고 있 는 슬럼 관련 정책 안 교육 분야 의 부재 또한 문제로 대두되었 다. 유엔은 2016년부터 2030년 까지 국제사회가 달성해야 할 17 개의 목표를 ‘지속가능발전목표

and basic services and upgrade slums)”

정책상의 부재에 더불어, 슬럼 거주 아이들은 학교 안팎에서 가정 까지 그들이 접하는 모든 환경적 요인의 영향으로 심각한 수준의 학 업 및 사회정서 학습에 대한 어려 움을 겪고 있다. 이는 내가 그동안 슬럼가 교육봉사와 논문을 위한 인 터뷰를 하는 중에 많은 슬럼 거주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만나 그들이 전하는 잊지 못할 스토리를 접하며 알게 되었다.

을 일컫는다. 거주민의 안전과 위 생을 우선시한 건축 구성요소에 대 한 법정 최소 표준 충족을 강조하 는 이 목표 아래, 인도네시아 정부

아빠를 일찍 여의고 엄마를 도 와 12시부터 오후 6-7시까지 나시 우둑을 요리하고 파는 것이 하루의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

로 명시했는데, 목표(Goal) 11번 중 1번째 세부목표는 슬럼에 관한 목 표로 “2030년까지 안전하고 저렴 한 충분한 주거공간과, 기초 서비 스에 대한 전면적인 제공 및 빈민 촌의 재개발 추진(ensure access for all to adequate, safe and affordable housing

MY DEAR INDONESIA 126

는 국유 저소득 임대주택인 루수나 와(Rusunawa, Rumah Susun Sederhana Sewa)를 축조하여 슬럼 거주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현실화시켜 왔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 구하고 현 루수나와 정책은 그 곳 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의 교육 지 원책을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그 들의 사회・문화 참여도의 확대를 이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주요 일과인 10살 여자아이도 있었 고, 언제나 빵 바구니를 들고 다니 며 학교 안에서도 방과후에도 빵을 파는 10살 남자아이도 있었다. 아 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발작이 났어 도 금전적 형편이 되지 않아 병원 에 갈 수 없었던 것을 영원히 후회 하고 있는 엄마도 있었고, 어릴 적 발작이 빚은 학습지체로 같은 학년 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학우들에게 놀림 대상이 된 12살 남자 아이도 있었다.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은 조 산사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나 출 생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어 공립 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13살 남자 아이도 있었고, 가정불화의 영향으 로 인해 발병한 ADHD로 수업 시간 교실 여기저기를 산만하게 움직여 다니는 7살 여자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슬럼 아 이들의 교육환경을 가장 크게 저해 시키는 요소는 어쩌면 ‘슬럼을 향 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사회적 편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는 내게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쓰 린 현실이었다. 2019년 8월 말부


터 나는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에 서 주관하는 다르마시스와 장학생 으로 아트마자야 가톨릭 대학교에 서 BIPA를 공부했는데, 나는 현지 인 친구들과 함께 때때로 인도네시 아 사회 문제해 대해 논하고는 했다. 내가 동정 어린 마음으로 슬럼 아이 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랍게도 나 의 가장 친한 인도네시아 친구들조 차 내 의견에 공감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도시 중산층은 관습

친구들의 말에서는 슬럼을 바라 보는 비판적 시선이 느껴졌다. 우 리와는 다른 그들을 일컬으며 말이 다. 실제로, 슬럼은 단순히 공간적・ 물질적 개념으로써 수도, 위생시설, 생활공간, 주택내구성, 거주권 등의 유무에 입각하여 이해될 수도 있지 만(유엔해비타트(UN Habitat)의 정의),

법 (adat) 에 따라 고유마을 깜풍 (kampung)에서 살아가는 인도네시 아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모습으 로 천박하고 격식이 없으며 문화가 뒤떨어진다고 느꼈다. 이러한 식민 지 차별의식이 스며든 공간인 ‘깜 풍’이 오늘날 슬럼의 원천이었고, 현재까지도 사회 불평등의 상징으 로 ‘슬럼’ 혹은 ‘깜풍’으로 불려오 게 된 것이다. 그 후 역사의 연장선 에서, 깜풍의 규모는 더욱 확장되었 는데, 특히 1945년 독립 이후에는 자카르타에 대규모 도시 이주가 있 었고, 많은 이들이 정부의 눈을 피 해 깜풍에 불법주택을 지었다. 그리 고 현재는 근대화와 자본주의가 상 류계층이 우위자를, 슬럼 거주민들 이 하위자를 차지하는 사회적 불평 등 권력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며 문득 이런 의 문들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역사 가 만들어낸 도심 안 불평등 구조 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단념하 고 그 존재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 은 아닐까? 혹은, 평범하게 살아가 는 ‘우리’가 슬럼에 살고 있는 ‘그 들’이 형성하는 사회와 다르다고 믿으며 우리들의 사회 정체성의 우 월한 사회적 지휘를 스스로에게 납 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판적 사회공간론적 관점에서 또 한 중요시 해석된다. 후자는 즉, 상 대주의에 입각하여, 슬럼을 도시 중 심부에 거주하는 상류층에 대비되 는 경제적・인종적・문화적으로 나 약한 사회 소외계층’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슬럼이 인 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편견’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던 것일 까? 이는 19세기 네덜란드 식민주 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도 나는 잔잔한 인도네시아 노래를 듣다가 핸드폰 갤러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찾아본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 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왁자지 껄했던 순간순간이 새록새록 떠올 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 게 따스한 감성에 젖는다. 하지만 그 감성 뒤에는 항상 여러 고민들 이 따른다. 어떤 교육이 슬럼 아이

“정부는 국가세금으로 빈곤층, 슬럼 거주민들을 위한 많은 혜택을 주고 있어. 최근에는 사회복지 카 드도 제공하고 있고, 그 카드를 쓰 면 건강보험도 무상교육도 받을 수 있어.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만족하 지 못하고 더 많은 정부의 혜택을 원하고 있잖아. 내 생각에는 그들의 나태함과 의존성이 근본적인 문제 야. 정부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 아 니라 그들이 문제라는 말이야.”

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 을까? 어떻게 그 아이들에게 긍정 적 사회정서를 함양시킬 수 있을 까? 그 아이들에게 질 좋은 교육 이란 무엇일까? 자카르타 시민들 이 그 아이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언젠가 자카르 타인들이 서로가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돕는 날이 올까? 수많은 질문을 가슴 한편에 고이 담아 간직하고 오늘도 학업 에 임한다. 또 다른 저널 하나를 읽 고, 또 다른 리포트 하나를 쓰며. 언 젠가 아이들을 다시 볼 날을 기대 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교육정책을 만드는 자리에서 그 아이들의 어려 움을 표하고 다른 교육자들과 함께 슬럼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정책수 단과 프로그램을 모색하는 순간을 꿈꾸면서. 내가 만난 아이들, 그들이 가진 스토리는 매일같이 삶의 목적을 일 깨워준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밝 은 웃음과 각자가 마음 속 가지고 있는 꿈의 이야기를 되짚으며 나는 슬럼이 더 이상 도시의 그늘과 슬 픔만이 만연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곳에는 수많은 아이들 의 희망에 가득찬 모습이 항상 밝 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마치 도심 의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아름다운 향기를 피어내고 있는 장 미들처럼.

127 조인정


‘세월이 약’이라던데, 코로나 상황이 해결되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코로나로 발목잡힌 비정상적인 일상 속에서 존버 하는 2020년의 우리를 응원하며, 이 와중에 인작 웹진4호를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MY DEAR INDONESIA 128


조 현 영 Cho Hyun Young 틈틈이 사진기 <manzizak>거리고 ‘자카르타경제신문(pagi.co.id)‘에서 1하고 있으며 ‘지금-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2020년 한·인니 최초 5인 공동시선집 ‘라라종그랑’(도서출판 역락-오후시선 10)에 사진으로 참여했습니다

129 조현영


인도네시아에서 살아남기 - 나만의 인니 연관 검색어 / 조현영

인도네시아 생활은 단순했다. 해외에 서 사는 일은 꽤나 근사하고 버라이어티 할 줄 알았던 막연한 기대는 하루하루 적 응하고 사는 데 집중하느라 일찌감치 사 라졌다. 그곳이 어디였더라도 살아내야 할 기본에 낯선 환경이라는 옵션만 추가 됐을 뿐. 초창기에는 다른 문화와 환경을 경험 하는 것 만으로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국의 가족, 친구를 불러 들였다. 5년 차가 넘어가면서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버 거웠다. 버라이어티한 외국생활이 이런거 였나 싶었다. ‘가지가지 한다’는 말로 대 신했다. 혹여 누구라도 찾아올까봐 그때 는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10년이 훌쩍 지나고 나니 많은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서서히 인도네시아에 스며들었다.

****

처음 도착한 수카르노하타 공항의 냄 새와 공기, 이국적인 분위기의 아파트와 수영장, 어두운 밤 거리,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 없는 길(차량 중심적), 자띠 가구(내 취향은 아니나 감탄할 만한 솜씨), 지루한 초록 색 이파리와 노란 캄보쟈, 갑자기 쏟아지 던 우기의 스콜, 그 비에 오토바이 세우 고 길가에서 비 긋는 풍경(서두르지 않는), 아파트 하얀벽에 찌짝(마주칠 때마다 매번 깜 짝), 흰 개미 라얍(나무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던 이층 주택 창가), 이슬람 사원의 아잔(새벽 단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나와 눈을 맞추고 웃어 주던 그 소녀 (사진=조현영/manzizak)

잠 제대로 깨우는), 비에 잠긴 아파트 뒷동네 (차 지붕만 보였던).

어느새 인니 생활 20년차에 들어선다. 3년만 살고 돌아가자던 계획은 그저 계획이었을 뿐, 다들 그렇게 시작해서 20년을 훌쩍 넘 기게 된다는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인니에 한번 발을 들였던 사 람은 자바의 여신이 당겨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는 ‘썰’이 3년차를 넘기니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MY DEAR INDONESIA 130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신발 가격표보 다 적은 가사 도우미 월급(2001년도 도우미 월급이 35만 루피아였다), 심심치 않았던 기 사와 도우미 관련 해프닝(너무나도 많은 사 례가 쏟아져 나올 법한 이슈), 눈에 보이는 그


들의 거짓말, 수백만 가지의 핑계 와 변명 그리고 의심(자카르타에서 얻 은 고질병), 루피아 화폐단위(나 부자 인줄), 교통체증, 지켜지지 않는 약 속(납기 1달 지연은 기본). 전화선으로 연결한 인터넷(전 화오면 뚝 끊어지는,하..),

인터넷 한 페 이지 넘어갈 동안 바라보던 창 밖 의 지평선(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내 눈 으로 확인), 성모유치원(한국어 유치원 이라니 와락), 특례입시(12년을 버티게 하는), 오래 보관했던 신발 신고 나 간 날의 당혹감(걷다가 떨어져 나간 신 오자 마자 배운 골프 (구력만 늘고 있는), VHS비디오테잎 대여(보고 싶은 편이 없을 때의 실망감이 란..대장금), 이민국, 비자.

공기 하나에 밥숟가락 하나가득 MSG),

손 으로 먹는 식사(어쩜 흘리지도 않아). 간간이 들려오던 한인 사건사고 소식, 몇 단어로도 통했던 인니어 (주재하는 3년 동안 손가락과 ‘ini’ 하나로 잘 살았던 어떤 그녀),

얼마 안가서 배 우러 간 인니어 강좌(한 살이라도 젊 을 때 BIPA 할걸..약간 후회), tidak apaapa(두루두루 참 편리하게 쓰이는, 띠따빠 빠..자꾸 듣다보면 빡치는).

****

발 밑창. 어쩔),

작은데 거대한 오토바이(4식구가 탔는데 짐도 실려), 바틱(아름답지만 내겐 어울리지 않는), 한인니 복합어의 대 표적 사례 ‘pulang하지마’(레전드로 남아 있는 웃픈 에피소드), 화려한 쇼핑 몰과 초라한 서비스,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여인, 3in1시내 통과를 위 한 조끼(Joki, 대놓고 편법), 으슥한 밤 골목의 벤쫑(여장 남자), 짝퉁 명품 시장(그 와중에 특급은 dari korea), 버스 지붕 위에 올라탄 군중, 마을버스 kopaja(코파자,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큰 웃음 안겨주던), 동네잔치 대형 스 피커에서 울려대는 당둣(dangdut)가 락(나도 모르게 내적 댄스).

찰기 없는 쌀(고슬고슬 맛있는), 사 먹는 물, 르바란 금식, 자차로 돌아 보는 따만 사파리, 반둥가던 고갯 길 파인애플(개꿀맛), 뿐짝 꿀 고구 마, 삼발 뜨라시, 미고렝, 나시고렝, 고렝안(최애 인니 메뉴), 썩지 않는 빵 (이거 먹으면 안 늙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주 의),

까끼 리마(Kaki lima)의 진실(밥

애초에 인도네시아의 삶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을 우 선으로 결정했고 가족이 떨어져 지 내는 것을 피하고자 따라나선 길이 었다. 그렇게 정해진 나의 수동적 인 결정은 내가 인도네시아에 적 당한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언제 라도 떠날 수 있다는 속마음을 깔 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곁을 주 지 않았으니 좋다는 말이 쉽게 나 올 수 없었던 이유다. 시간이 지나 서야..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깨달 았음을 털어놓는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 다던 인니생활 선배들의 말씀은 살 면서 저절로 알아졌다. 되면 고맙 고 안되면 말고다. 오죽하면 고무 줄 시간(Jam karet)이라고 할까 싶게 안 지켜지는 약속들에 은연 중 나 는 동화되어 갔다. 자카르타에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공공연 한 핑계 뒤에 숨어서. 거짓말만 하 는 것 같았던 그들의 말 속에서 진 심을 찾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끝 도 없이 늘어놓는 핑계를 걸러낼 줄도 알게 되었다. 아주 천천히 경 계를 허물어 갔다. ‘인도네시아에 사는거 좋아 요? ’ 불쑥 받은 질문에는 대답을 못했다. 나름 잘 적응하며 산다고 믿었던 나 조차도 의외였다. 어쩌 다 오게 된 인도네시아였고 간간이 힘들었지만 누릴 수 있는게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개박수 치며 좋다고 하기엔 불편함이 많았 고 결핍도 많았다. 그렇다면 ‘좋았 다 싫었다 한다’가 대답일까.(어정

인니에 있었던 이 시간들을 한 국에서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 해 본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 경이 혹은 미련이 무쓸모한 일일지 라도,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이 어디 였든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 았을거란 결론을 내리고는 ‘나는 인도네시아가 좋아’라고 혼잣말을 내어본다. 인도네시아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게 될지 모르겠으나 남아있는 시간들 만큼 또 다른 연 관검색어는 늘어날테지. 이를테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나와 눈을 맞 추고 순수하게 웃어 주던 그 소녀, 회색벽 앞 그림 같았던 길가의 꽃 나무, 우기에 나타나는 연탄불 같 은 노을빛, 뾰루퉁한 심기를 누그 러뜨리는 은은한 자바 커피향, 부 드럽게 등을 쓸어주던 길 모퉁이 바람의 위로.. 같은 아름답거나 다 정하며 따듯한 단어들 말이다.

쩡한 내 성격때문인가)

131 조현영


사적(私的)인 편지

-인니에서 나고 자라서 떠나갈 나의 딸에게 / 조현영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 땅을 밟고 자란 나의 딸아, 엄마 품에서 인도네시아의 푸름 속에서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주어 고맙다. 나면서부터 두 개 언어를 말하고 들어온 딸아, 어떤 언어로 어떤 말을 하든 그 말에는 선한 뜻을 담거라. 아파트 로비에서 유모차 동기를 만나고 함께 걸음마를 떼던 딸아, 그렇게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거라. 오빠의 세발 자전거 뒤에 타고 신나게 동네를 누비던 딸아, 어느날 세발 자전거 운전석에 앉아 있더구나. 차근차근 하나씩 배우며 겸손을 알고 발전하는 모습을 응원한다. 유치원 소풍 때 카메라 앞에서 아주 그럴듯하게 모델 포즈를 취하던 딸아, TV에서 봤던 모델을 따라한거라고 별일 아니란 듯 말했지. 그때 엄마는 알았다. 네가 모델이 될 줄 .. 아니, 너의 남다른 눈썰미와 관찰력. 그 재능이 네 삶을 다 채롭게 하는데 쓰였으면 좋겠구나. 엄마에게 고운 꽃반지 만들어 주던 딸아, 이제는 빛나는 돌이 박힌 반지를 준비하거라. 하지만 꽃반지를 엮던 그 감성은 오래 간직하렴. 네가 살아가는 세상이 더 따뜻해질테니. 친구가 놀린다고 엄마에게 울며 일러바치던 딸아, 네가 어른이 되어도 너를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언제라도 엄마 에게 일러바치거라. 힘든 일일수록 나누어야 할 것이며 엄마는 나 이가 들어도 너의 든든한 빽임을 잊지 말아다오.

MY DEAR INDONESIA 132


딸이 엮어준 꽃반지 (사진=조현영 /manzizak)

새끼 밴 길냥이를 살뜰이 거두어 주던 딸아, 자신보다 약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엄마에게도 그 다정함을 조금만 나눠 주겠니. 엄마도 자식 앞에서는 약자란다. 인형뽑기 기계를 집에 들이고 전용 비행기를 사겠 다며 눈을 반짝이던 딸아, 그날 이후 엄마의 꿈도 바뀌었다. 너의 집에서 뽑은 인형을 들고 네 전용 비행기에 오르는 꿈으로. 엄마 얼굴보다 거울을 더 자주 보며 자기가 못생겼 다고 투덜대던 딸아, 자꾸 못생겼다고 말하면 진짜로 못나진다고 엄마 가 진부하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건 정말이란다. 못 믿 겠으면 어디한번 해보렴. 말하는대로 이루어지더라. 엄마가 옷 차려 입고 엄마 괜찮은지 물어보면 1초 만에 대답하던 딸아, 엄마도 1초 서운하단다. 엄마도 여자라는 걸 너는 아직 모를 때지. 사실은 엄마도 그랬었다. 반성한다. 속마음을 얘기하며 울먹이던 딸아,

엄마가 되라던 딸아, 너도 딸 키워보면 알게 될거다. 안 이쁠 수 있는 방법 이 없다는 걸. 인도네시아를 곧 떠나갈 딸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것은 너의 선택이 아니었으 나 앞으로 펼쳐질 선택과 결정은 온전히 너의 몫이 되 겠구나. 다양한 선택지를 찾고 어떤 결정이든 그 기준 은 너의 행복이어야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몸에 익힌 여유로움으로 나와 다른 이들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느낀 결핍 은 한국의 스마트함으로 채우며 너를 성장시키거라.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할 시간에 미래에 일 어날 너의 꿈을 위해 ‘지금-여기(Here&Now)’에 투 자하기를 바란다.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너’여야 하고 그 다 음으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이기를. 유쾌함을 잃지 말며 긍정 에너지로 곧 펼쳐질 너만 의 세상에서 또한 반짝이기를.

묻어뒀던 속마음을 얘기할 때는 엄마도 눈물이 난 다. 우리 가끔씩 속마음은 털어내며 살자. 딸이라고 무조건 이쁘다고만 하지 말고 객관적인

2020년 6월 끝자락에 두번째로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133 조현영


(사진=조현영 /manzizak) MY DEAR INDONESIA 134


잘 지내냐는 인사에 / 조현영

잘 지내냐는 인사에 나는 세번쯤 눈을 깜박이다 대답을 하지. 잘 지내. 잘 지낸다는 대답은 내가 살아내는 일상의 평균을 내는 일. 그러니까 잘 지낸다는 말은 이만큼은 외로웠고 이만큼은 행복했다는 말. 얼마간의 과거와 현재의 평균을 내는 대답. ‘잘’ 이라는 한 마디에 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숨어 있어도 3초만에 내놓는 잘 지낸다는 나의 대답은, 안부를 물어주는 그대가 있어 나 힘. 낼. 수 있다는 말. 그러니까 그대도 힘. 내. 라는 말. 잘 지내?

<시작 노트> 일상적인 위로가 필요한 코로나 시절에 짧은 인사로나마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우리가 함께 견디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닐런지.

135 조현영


거듭 되는 일들을 말없이 거듭 하는 사람들은 숭고하 다. 뻔하고 식상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일상의 클리셰를 유지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조차 기적이다. 역병이 도 는 세상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어떤 상황이 와 도 본연을 잃지 않고 일상을 견디는 힘이다. 그래서 일 찍이 ‘상처 입더라도 영혼의 깊이를 잃지 말라’고 니체 오라버니가 당부하시지 않았던가. <인작>이 흔들리지 않고 2020년의 웹진을 발간한 것이 그래서 더 대견하 고 기쁘다.

MY DEAR INDONESIA 136


채 인 숙 Chae In Sook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국디카시연구소 해외기획위원, 국경없는 디카시협회 인도네시아 대표, 인도네시아 한인사100년 수석편집위원,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한,인니 최초의 5인 공동시집 ‘라라종그랑’(도서출판 역락-오후시선 10)을 출간하였다.

137 채인숙


그린란드상어 / 채인숙

가끔 그 심해의 어둠을 생각한다

시력을 가질 일 없었던 너의 눈과 일 년에 일 센티씩 키를 늘리는 성장기와 느린 호흡으로 삼백 년을 헤엄치는 지느러미와 태어났다고도 죽었다고도 신고된 적 없는 생을

자와어를 쓰는 이웃집 할머니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긴 대화를 나눈 날

적도를 지나는 인도양에 서서 그린란드의 귓속에 대고 물었다 영원이란 원래 없는 것이라는데 너는 몇 번이나 울며 이 바다를 다녀갔을까

본 적 없는 생을 붙들고 함께 우는 것 만난 적 없는 당신의 안부를 묻는 것 사랑이 그런 것이라 믿은 적 있다

(문학의오늘 2020년 겨울호 수록작)

MY DEAR INDONESIA 138


아홉 개의 힌두사원으로 가는 숲 / 채인숙

1 숲은 산길로 이어진다 오늘도 신神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어느 길에나 당신이 서 있고 어느 길에도 당신은 없다 평생 몸의 자리를 바꾸지 않는 나무 사이로 산 아래 마을이 휘청거리며 멀어진다 돌멩이로 쌓은 층층의 기도문은 자바의 처녀가 억새풀 같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말을 몰아 전하려던 몇 통의 편지와도 같았지만 어떤 시절의 편지도 아직은 수신인 없음 2 아홉 개의 힌두사원이 있는 산길을 신神의 등허리를 타고 오른다 경전을 읊듯이 말에게 속삭인다 나를 놓치지 말아다오 사람들은 외롭지 않겠다고 사원을 지었던 거란다 두려운 것은 신이 아니라 외로움이거든 함부로 사랑하고 함부로 미워하였지만 한 번도 믿은 적은 없었던 이름이여 어떤 사랑도 다시는 나를 불러 세우지 말아다오

(포지션 2020년 봄호 수록작)

139 채인숙


바뉴왕이의 무인도 / 채인숙

17세기 미국소설에서 보았던 가랑이가 찢어진 바지를 입은 소년이 눈을 찡그리며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자잎으로 엉성하게 엮은 오두막 지붕에 햇볕이 총알처럼 들이쳤다 우리는 오두막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해변에 2인용 텐트를 치고 야생도마뱀을 찍으러 간 혼혈소녀와 감독을 기다렸다 길다란 카메라 스탠드와 조명기구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줄담배를 피우는 소녀의 늙은 엄마가 아메리카의 고단한 일상을 이야기했다 골동품상을 하던 시아버지가 백인 며느리들을 제치고 자신에게 가게를 물려준 것이 몹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육지에서 가져온 비스킷 한 봉지를 뜯어 점심으로 먹었다 아잔 소리가 없어도 시간을 맞춰 기도를 마친 소년이 힐끔거리며 앞을 지나쳤다 낮은 파도가 무심하게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소년이 바라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새우어장이라고 일러주었다 아무려나,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는 것은 그것의 중심을 지키는 일일 거라 여겼다 나는 밤이 오면 어느 하늘쯤에서 남십자자리를 볼 수 있는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이 세상에는 그대로 존재하여 좋은 것이 있다고 떠들썩하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다고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썼던 편지 한 대목을 떠올렸다 해가 질 때까지 우리는 끝내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식어가는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하고 싶은 말들이 가늠조차 되지 않을 때 그저 묵묵히 걷는 것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는 저만치 떨어져 앉아서 어둠이 바다를 지우며 거대한 비밀이 되는 순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나의 바뉴왕이 무인도에 찢어진 바지를 입은 소년이 아직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MY DEAR INDONESIA 140


밤의 항구 -순다2 / 채인숙

열일곱에 처음 배를 탔다는 사내가 헤진 런닝을 걸치고 뼈가 굳어가는 음악을 들으며 닭수프를 먹는다 젖은 옷을 별빛에 말리기 좋은 밤이다 술라웨시와 순다 열도를 오가며 돛을 올리고 바람의 방향을 잡는 사내는 커다란 원석이 박힌 반지로 점을 치고 대나무로 새장을 엮어 배 안에서 새를 키운다 항구에 도착하면 무슨 의식을 치루듯 더러운 빨래에 비눗칠을 하고 등을 돌리며 떠나간 당신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운다 이유를 모르는 이별을 견디는 것은 배를 타는 사내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바다에서 길을 잃는 것보다 육지에서 길을 잃는 일이 잦아진다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활화산과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항구를 가진 나라에서 사내들은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실패한다 왜 나는 이리 천천히 늙어가는 것일까 낡은 양은냄비에 담기는 어둠을 내려보다 구멍 난 빨래를 수신호처럼 털어 말리는 밤 어떻게 사랑을 해도 목이 마르고 한꺼번에 지워지는 기억 같은 것은 없다 (문학의 오늘 2020년 겨울호 수록작)

141 채인숙


다음 생의 운세 / 채인숙

다시 태어나면 사는 마을을 떠나지 않으리 살던 자리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지나리 뒷산에서 주워 온 나무 둥치로 의자를 만들어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아 북국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으리 내 몸을 써서 돈을 벌고 아이들을 낳아 늦가을 볕 같은 곁을 내어주리 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아이 옆에서 함께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리 누군가 떠났고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천변에서 들으리 혼자 기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아, 내 어린 날의 바닷가 마을에 다시 태어난다면 수심을 헤엄쳐 바위 틈에 낀 성게를 줍는 해녀가 되리 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마냥 웃는 날이 많으리 쉬는 날에는 문구점에 들러 색 볼펜을 고르고 책상에 앉아 밑줄을 그을 문장을 찾으리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 먼 당신에게 편지를 쓰리 어릴 적 사투리를 고치지 않으리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리 꿈에 속아 짐 가방을 싸는 일은 없으리 나무캥거루와 쿠스쿠스의 서식지를 멀리서 그리워만 하리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었으므로

MY DEAR INDONESIA 142


<시작노트> 푸른 20대에 백일 지난 아이를 안고 인도네시아로 왔는데, 이제 만 나이를 꼽아도 50대가 코 앞이다. 돌 이켜 보면 참 열심히 인도네시아를 사랑하면서 살았다. 덕분에 옛친구 못지않은 우정을 나누는 사람도 생겼고, 형제보다 편하게 내 사는 모양을 터놓을 지인도 있다. 그럼에도 나이를 먹을수록 ‘사는 곳이 고 향’이라는 옛말은 순 엉터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어릴 적 살던 바닷가 마을은 날마다 더 그립고, 사 투리로 웃고 떠들던 옛친구들이 사정없이 보고프고, 막 뭍으로 나온 해녀 아주머니들이 플라스틱 접시 에 올려주시던 해삼과 소라에서 풍기던 바다 냄새와 친구네 집 마당의 새큼한 앵두 맛은 날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다시 태어나면 그 바닷가 작은 도시를 절대 떠나지 않을 작정이 다.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었으므로.

(사진=조현영 /manzizak)

143 채인숙


코로나란 높은 장벽에 갇혀 지내는 중에도 이렇게 내 안의 침전물을 드러내 정리할 수 있음이 참으로 감사 한 일입니다. 살아가는그 어떤 순간에도 지금처럼만 할 수 있기를, 생각과 고뇌를 형상화 할 수 있기를……

MY DEAR INDONESIA 144


최 장 오 Choi Jang Oh 천연가죽 가공/ 파이톤 가죽 수출 취미 생활로 시와 산문을 쓰며 인도네시아 생활을 즐기고 있다.

145 최장오


마음이란 게

/ 최장오

웃자란 부켄벨리아가 손을 내민다 잘 가란 인사로 보이더니 반갑다는 몸짓으로 보이더니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갇힌 너는 그때도 웃고 있었다 한 몸에 자란 너의 인사가 제 각각이다 세월이란 게 가고 오는 거지, 오고 또 가는 거지 그렇게, 생각이란 점을 한 개 찍는 거지 하나의 줄로 세월을 나눈, 웃자란 손이 부끄러워 바쁘게 달리는 거지 붉은 선 한 줄 쫙 그려놓고 허수아비 양 팔 사이로 세월은 또 오고 가지 어제의 해넘이와 오늘의 해돋이를 또 기억하는 거지 부켄벨리아…… 마음이 자라 손이 맞 닿을 것만 같다

MY DEAR INDONESIA 146


<시작 노트> 점을 찍는다는 것이, 점과 점을 연결하여 선을 긋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점을 찍고 선을 그으며 적과 동지를 구분하던 인생의 짧지 않은 시간들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너무나 쉽게 하곤 했던 양분의 선 긋기가 얼마나 우매 했던가! 결국 이쪽과 저쪽이 같은 곳에서 생겨나고, 한 우리 안에 존재하거늘……

147 최장오


맹그로브 숲에 가면 발가벗은 너를 만날 수 있다

/ 최장오

맹그로브 숲에 가면 바다가 가져다 준 달고 짭조름한 맛을 볼 수가 있지 썰물이 가져다 준 질그릇 닮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길게 난 상처를 치료하듯 둥그렇게 색칠을 하지 맹그로브 숲에 가면 맑은 수채화를 그릴 수 있어

바다와 하늘이 만들어낸 크로키 같은 영화 서로가 기대고 엉켜 영화를 볼 수가 있지 서로의 둥지를 떠나 함께 동행하는 친구 뿌리와 뿌리 사이로 숨바꼭질하 듯 서로 몰래 만나지 맹그로브 숲에 가면 친구를 만나 가벼운 영화를 볼 수가 있어

밀물에 밀려온 이야기들 구름과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들 자잘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개펄 같은 이야기 맹그로브 숲에 가면 갯 냄새 묻어나는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짠물을 퍼 올려 너를 정화하듯 하얀 부정맥의 촉수들 천수천안관음보살이 현신인 양 자비로운 천 수를 흔들어 바닷물 머금은 새초롬한 향기를 전해주지

MY DEAR INDONESIA 148


(사진= Aditya Irawan)

머물 데 찾아 오대양을 휘 돌아 닿은 곳 생명을 품어내는 넉넉한 모성을 볼 수가 있지 물속에서 썩지 않는 강한 모성을 볼 수가 있어 맹그로브 숲에 가면 마른 품에 너를 안을 엄마의 포근함을 만나지

맹그로브 숲에 가면 발가벗은 너를 만나게 되지 성난 군중의 함성처럼 밀려오는 바람을 피해 맹그로브 잎사귀에 숨어있는 발가벗은 너를 만나지

<시작 노트> 오래 전 치기만만한 시절에 텐트 하나없이 찾았던 만리포 해수욕장,가끔씩 그때 생각에 공포 스런 전율을 느낀다. 잔잔하게 포말을 일으키던 바닷물이 갑자기 폭풍을 동반한 해일이 되어 몰아치던 밤, 도망치 듯 숨어든 소나무 숲은 무섭게 울부짖던 바다로부터 미약한 우리를 밤새도록 지켜 주었다. 방풍림의 고마움도 모른 채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해수욕장…… 날로 인간 세상이 빠르게 진화해 가는 것 같지만 자연 앞에서 늘 작아지는 우리는, 맹그로브 나무 뒤에서 발가벗은 채 떨고있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149 최장오


실크로드

/ 최장오

순다의 어부는 노에 가락을 싣는다 누렇게 바랜 싯구에 막걸리 같은 텁텁한 목소리로 노랠 부른다 가락은 순다 해협의 높은 파고에 이내 묻혀버리고, 뽕밭이 바다로 가던 날도 선명한 높낮이의 노랫가락은 있었다

타클라마칸, 파미르를 지나 너른 초원을 가로지른다 푸른 초원을 달리는 등고선 같은 낙타의 등위로 까만 해는 쉼없이 다가선다 왕서방의 비단이 페르시아만에 이르러 쪽빛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머리 결 곱던 비단이 검은 천으로 염색이 된다

오열하듯 쏟아내는 속내의 아픔은 페르시아만을 뜨겁게 달군다 검은 진주의 눈물은 오대양 높은 파도 따라 구름이 닿는 곳까지 번져가고, 비단으로 감쌌던 몸 뚱아리들이 까만 천에 덮힌채 밸리 댄스를 춘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가르는 자바 섬의 깊은 산골에도 검은 천들은 펄럭인다 자오선을 따라 별자리를 찾아 떠났던 이들은 순다의 깊은 골짜기에 묻히고, 서걱서걱 뽕잎을 갉아먹던 누에는 보이지 않고 오디의 단내만 풍기고 있다

MY DEAR INDONESIA 150


<시작 노트> 오래 전, ‘자바의 알프스’라 불리는 가룻의 빠빤다얀산 주변을 찾았다. 화산재로 덮인 골짜기에 검붉은 오디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뽕나무들…… 어릴 적, 누에 방 섶 위에 영근 누에와 경건한 기도를 올리던 어머니 모습 그리고 까마득한 옛날, 비단길을 걷던 상인들의 모습이 산을 오르는 내내 길동무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문명의 이기에 밀려 비단에서 폴리에스테르라는 합성 섬유를 지어 냈지만 시간은 흘러도 바뀌지 않는 내 안의 무엇이 자꾸 나를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 그 곳으로 향하게 한다.

(사진=조현영 /manzizak)

151 최장오


대나무 숲에서

/ 최장오

댓 잎이 연 초록 치마처럼 흔들릴 때 댓 숲으로 가라 댓 숲이 침묵하면 참새조차 숨을 죽인다 가만히 귀 기울여 봐 마디를 키우는 소리가 들릴 꺼야 공명을 채워 부러지지 않도록 휘어지는 연습을 하는 거지 댓 숲이 비를 맞으면 마디마다 슬픔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만히 발걸음 멈춰 봐 텅 빈 대나무 속에서 옅은 울음이 들릴 꺼야 슬픔을 삭혀 공명을 채우는 거지 댓 숲에 바람이 불면 댓잎은 옅은 치마처럼 펄럭인다 가만히 그를 만져 봐 잎새가 전하는 떨림을 느낄 꺼야 청년의 푸른 핏줄처럼 의연하게 단련하는 거지 정오의 해가 입 맞춤 할 때 댓 숲으로 가라 댓 숲에 가면 통통하고 익어가는 소리가 들릴 꺼야, 가만히 들어봐 대나무 크는 소리야

MY DEAR INDONESIA 152


(사진=Pixabay, Jason Goh)

어린 죽순이 쭉쭉 뻗어 일생에 최고 높은 곳까지 올라가지, 왜 인지 알아 지가 구부러질 수 있는 한계를 가늠하는 거지 죽순이 삐죽삐죽 겁도없이 커 가다가 작아지지, 왜 인지 알아 행간에 의미를 숨겨 넣듯, 마디마다 내실을 다지는 거지 댓 잎이 검푸른 파도처럼 흔들릴 때 댓 숲으로 가라 아침처럼 고요한 일몰처럼 묵직한 침묵이 있다 거기 꽉 찬 침묵이 있다 검푸른 빛으로 익은 마디마다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작노트> 대나무의 의연한 자태와 올곧음에 한동안 마음을 준 적이 있다. 대나무가 주는 ‘대쪽 같은 기개’라는 강한 이미지에만 눌려 있던 편견을 벗어버린 시간이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는 그의 숨소리를 듣다 보면, 세상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여 듣는 자세와 호흡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넉넉함도 느낄 수 있다. 사철 푸르고 곧은 기개를 갖기 위한 노력이 죽순부터 다져지듯,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하며 강직하게 자라고 한계를 가늠하여 오만해지지 않는 그런 삶은 내가 내내 배우고 싶은 모습이다.

153 최장오


무엇인가를 긁적이면서 갈등과 방황을 견뎠던 것 같다. 나의 긁적임은 하늘에다... 마음에다만 남겼다. 글이 되어 나오는 것이 나의 속내를 들키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무서웠다. 지금도 나는 부끄럽고 두렵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속 껍질을 하나씩 벗겨낼 수 있어서 행복하다. 전에 없던 펜더믹 시대에 이렇게나마 웹진을 발간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MY DEAR INDONESIA 154


홍 윤 경 Hong Yun Kyung Pleats Kora Indonesia 대표

155 홍윤경


무제

/ 홍윤경

이상하게 그런 날이 있다 하늘이 너무 쨍하게 푸른날 아무런 이유없이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 날 이런 날은 왠종일 미열이 있는 것 처럼 심장도 종일 미열로 꿈틀거린다 이런 날에는 뭘해도 초조하다 음악을 듣고 있어도 금방 음률을 놓치게 되고 책을 읽고 있어도 같은 줄에서 맴돌고 만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내게 뭔가 왔다 간 것일까? 햇볕은 찬란하고 나뭇잎들은 건강하게 푸른데 무정하리만치 쨍하게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며 조용히 기도하게 되는 날

MY DEAR INDONESIA 156


내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 불어온 바람에게 물어본다. 너는 아니? 내 심장이 왜 종일 잔기침을 하는지.......

(사진=홍윤경)

<시작노트> 팬더믹 코비드 19로 준봉쇄 조치가 내려지고 사업장의 문을 닫았다. 직원 중 한 명이 의심증 상을 보여 접촉자가 된 상황에서 나는 자가격리란 이름으로 14일 집안에만 갇혀 지냈다. 그 때 테라스에 자주 나가 앉아 있었다. 할 게 아무것도 없는 듯 여겨질 때마다 커피 한 잔을 들 고 햇볕을 쪼였다. 그리고 그 커피 잔에 비치는 하늘을 마셨다. 처음 코로나 상황이 발생했을 땐 나와 내 주변만 안전하기를 기도했고 6개월 이상 코로나 상 황이 길어지며 이제서야 기도의 지경도 넓어졌다.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그들 의 상황과 환경과 형편이 괜찮아지길 견뎌지길 기도한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왁작지껄 웃으며 일상을 나누고 싶다.

157 홍윤경


피아노 치는

남자

/ 홍윤경

인권운동가 베조 운뚱 씨 (사진=고찬유 기자)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팬데믹

와의 인터뷰를 주선하기 위함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현대사 가운데

코로나19라는 생소하고 낯선 상황으

1965~1966년은 9월 공산당의 쿠데타를 진압하며 권력을 쟁취한 수

로 조금 망설여지는 그런 날이었다. 그

하르토를 주축으로 하는 군부로부터 무고한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

를 만나기로 한 곳이 땅그랑 서르뽕 지

이 반공 대학살을 당한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이 참담한 역사를 미국

역의 빈민가였기에 감염 걱정이 영 없

중앙정보국은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처참한 집단학살”이라고 보고

지는 않은, 그래서인지 마음이 평온하

하기도 했다. 그 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남자 베조 운뚱.

지는 않는 불안한 길이었는데 그 남자 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약속 장소에

남자의 나이 겨우 17살, 그는 가장 어린 나이의 수감자가 되어 모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

진 고문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수배자가

가 안내하는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되어 도망 다녔던 짧은 기간과, 이 감옥 저 감옥 옮겨 다니며 치러 내

은 그의 삶만큼이나 구불구불하고 비

어야 했던 기아와 전기고문, 그리고 7년간의 처참하기만 했던 강제

위생적이었으며 좁고 어두웠다. 그는

노역이 남자의 성성한 눈 속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 했다. 남자의 시

YPKP65(1965대학살연구소)의 대표이자

련은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끝나지 않고 질기게 그의 삶을 따라다

인도네시아의 인권활동가이신 베조

녔다. 정치범이라는 낙인과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는 감시를 자유 아

운뚱 씨(Bapak Bedjo Untung).

닌 자유로 여기며 살아온 그 기막힌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더해진 그는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다.

오늘 그와의 만남은 그가 2020년

MY DEAR INDONESIA 158

40주년 518 광주 인권상 수상자로 선

수용소에서 풀려 난 후 그는 한 여인 엔당(Endang)을 만난다. 그 음

정되어 직접 축하도 하고, 한국일보

산했던 시절 7살 어린 소녀의 눈은 아버지의 잘린 목이 걸려있는 것


베조 운뚱 씨와 부인 엔당 씨 (사진=고찬유 기자)

을 보아야 했고, 아직도 그 때의 이

간의 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자의 삶보다 더한 나락의 길로 떨

야기를 본인의 목소리로 직접 누군

아무렇지 않게 너무도 담담히 그가

어져야 했다. 여러 감옥으로 옮겨

가에 말하지 못한다 했다. 그녀는

그려내는 지난날들은 오늘을 살아

지는 불안감과 모진 고문은 차라리

그저 인권활동을 하는 남자를 옆에

가는 평범한 나에겐 상상조차 되지

견딜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배고

서 말없이 그 세월에 대해 저항을

않는 그런 삶이었기에 차마 그 앞

픈 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는 17

하듯 남자를 지켜내는 것으로 조용

에서 눈물을 보일 수도, 공감한다

살의 소년…… 이 감옥, 저 감옥으

히 저항하는 듯 했다. 성성한 그의

는 끄덕임도 표현할 수도 없었다.

로 이송되어지다 지금의 땅그랑 서

흰 머리카락과 아직도 날카롭게 살

아직은 부모 옆에서 보호를 받고,

르뽕 지역에 위치한 감옥으로 이송

아있는 눈빛이 그 남자의 비범하지

친구들과 어울려야 할 그 파란 나

되면서 소년은 강제노역장으로 새

않은 인생을 말해주는 듯할 뿐, 남

이에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지지

벽부터 끌려 나가야만 했다. 그곳

자와 여자는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 그

에서도 고문보다 더 지독했다는 배

만나지는 따듯하고 착한 오늘을 살

역시도 지지했던 수카르노라는 한

고픔은 소년으로 하여금 쥐, 뱀, 도

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남자

사람 때문에 그의 인생은 채 피기

마뱀, 곤충 등을 잡아먹으면서 살

와 여자의 오늘은 켜켜이 쌓인 먼

도 전에 부러지고 말았다. 도망치

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목

지와, 낡고 허물어져가는 그래서

듯 떠나온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했다.

시급한 수리와 보수가 필요해 보이

의 단절만으로도 힘겨웠을 그에게

는 작고 좁은 집이 전부일거라 생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자카르

그렇게 흘러간 7년의 세월. 그

각했는데, 그 집 안에는 그 집 상황

타에서의 생활은 또 얼마나 아팠을

열악하고 암울한 그 시간에서도 소

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아주

까? 그의 나이 겨우 16살 고등학

년은 꿈을 꾸었다. 음악을 좋아하

낡고 오래된 그러나 정성스레 닦고

생이었는데……

고, 좋아하는 것을 넘어 천부적인

관리한 먼지 앉지 않은 피아노 한

재능을 타고난 그는 종이에 피아노

대가 남자와 여자의 지난한 삶을

독재정권의 수배자가 되어 도망

건반을 그리고 독학으로 피아노를

여전히 연주하는 듯 집 가장 좋은

다닌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익혔다 했다. 비록 종이 건반에 연

자리에 놓여 있었다.

신분을 숨기고 백화점 점원이 되어

주하는 선율이었지만 그의 귀에는

일을 하던 때, 함께 일하던 동료의

그 아름다운 선율이 생생히 들려오

밀고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수배

는 듯 했다고, 아련히 말하는 그의

그 남자의 인생 여정을 듣는 3시

159 홍윤경


표정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소

된 그는 고스란히 그 외로움을 일

다. 십시일반 돈이 조금 모이면 실

년의 모습이었다. 그를 그 지옥에

하면서 견디어 냈다. 죽어라 일한

종자와 희생자를 찾는 일을 하고,

서 견디게 한 것이 그를 살게 했다.

만큼의 보상이 주어졌을 때 그가

돈이 벌리지 않으면 이제는 그의

처음 한 일은 진짜 피아노를 사는

아내가 된 엔당의 교사월급으로 생

국제적십자 등 국제사회의 압력

거였다. 생의 첫 피아노를 사고 혼

활을 하고, 그는 희생자와 실종자를

으로 감옥으로부터 석방이 되었고,

자서 또 죽으라 독학으로 연습하고

찾아 인도네시아 전역을 돌아다녔

그 곳에서 독학으로 익힌 영어와

다음날이면 피아노 레슨으로 그는

다. 감시와 미행을 피해 도망 다니

피아노 덕분에 그는 새로운 삶으로

살아냈고, 지금의 집을 구입할 수

면서도 그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

나왔다 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있게 되었다 했다. 그 피아노가 긴

었다고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쉬지 않고 수용소 안에서도 그렇게

세월 그와 함께 세월을 살아내며

실종자와 희생자를 찾아다니고, 누

강제노역을 했는데 이렇게 밖에서

집안 가장 좋은 자리에서 반짝반짝

구도 들어주지 않은 “우리는 잘못

돈도 벌면서 일하는 것이 너무도

그와 함께 나이 들고 익어가고 그

한 것이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

좋아서 일을 찾아서 했다고 했다.

랬나 보다.

렇게 조금씩 더디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그와 그의 동료들의 활동으로

그리고 외로워서 더 열심히 일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고향의 가족들

그 집을 구입하고 그는 1999년

그들은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

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다. 정

함께 투옥했던 정치범 동료인 프라

게 되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국제

치범이라는 꼬리표가 그렇지 않아

무디야 아난타투르를 비롯한 7명

사회를 움직였고, 그들의 활동은 세

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가족들에

의 동료와 지금의 연구소를 그 집

계 각국의 인권단체에까지 알려지

게 짐이 될까 봐 소년에서 청년이

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다들 가난했

게 되었다. 그는 다른 것은 바라지

베조 운뚱씨가 7년 간 수용됐던 감옥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고찬유 기자)

MY DEAR INDONESIA 160


않는다 했다. 우리가 잘못 하지 않

길 바랐는데, 이곳에 우리가 왜 있

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 절

은 것을 알아주고, 우리에게 미안하

었는지 알려주는 기념비 하나 만이

망스럽기도 했다. 한국의 80년대

다고 말해주고, 다시는 이런 부당한

라도……초로의 그 남자는 그 성성

의 4·19혁명과 518 광주민중항쟁,

일들이 후대에는 일어나지 않는 거

한 눈빛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2016년의 세월호 침몰사고, 그 속

라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아직

들이 붐비는 쇼핑센터를 슬프게 바

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진행 중이다. 수감자 중 가장 어렸

라보았다. 나는 그를 할아버지하고

돌아보게 되는 길이었다. 헤어지면

는데 이제는 이렇게 늙어버렸다는

불렀다. 그리고 가지고 온 마스크 5

서 할아버지 다시 그 시대로 돌아

자조적인 그의 음성이 아프다. 반 세기 훌쩍 넘게 진상 규명이나 공 식적인 사과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그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듣고 싶은 것인데……살아있는 동 안 들을 수 있을까? 하시며 긴 인 터뷰를 끝내셨다.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이 나고, 그는 지금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가 7년간이나 강 제 노역한 장소로 함께 가주기를 원했다. 속으로는 다음 일정이 있 어서 조금 난감했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그의 인생과 세월을 느낄 수는 없지만,

베조 운뚱씨를 찾은 한인들과 (사진=홍윤경)

그의 살아온 인생에 대한 예의로 그와 함께 그 자리에 서있기는 해 야 할 것 같은 무거운 마음에 그를 따라 나섰다. 72세의 노인이라고 는 느낄 수 없게 상기된 그는 그때 여기는 어디였고, 이곳에서 어떻게 노역을 했는지에 대하여 너무도 생 생하게 알려주셨다. 이미 그곳은 현대화가 진행되어 많은 건물이 들 어서고, 각종 관공서가 즐비하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 생활하 는 쇼핑센터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는 그 쇼핑센터를 바라보며 너 무도 아파했다. 저기에…… 저 자 리에……기념비라도 하나 세워지

장을 나눔 하며 조만간 다시 만나

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할

기를 약속했다.

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 것 같아요? 라는 나의 물음에 그 남

할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 참으로 길었다. 할

자는 다시 돌아가도 나는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거다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열고 연주해 주 시던 선율이 귓가를 따라온다. 피 아노는 언제 조율했는지 그 소리가

그 한마디가 오래 귓가를 돌아 다닌다.

둔탁했다. 둔탁하고 삐걱이던 그 소리가 마치 세상은 아직도 정의롭 지 않은 듯 절망스럽기도 했고, 어 둠은 빛을 이긴다 했지만 그 어둠

161 홍윤경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