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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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

이었구나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 2호



우리 가

이었구나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 2호

우리가

꽃이었구나

발행일 l 2018년 12월 15일 펴낸곳 l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기획 l 채인숙, 조연숙, 조현영, 김순정 글 l 김순정, 김의용, 김현미, 김현숙, 노경래, 박정자, 박준영 배동선, 사공 경, 이강현(회장), 이동균, 이연주, 조연숙 조은아, 조현영, 채인숙, 최장오, Ubaidilah Muchtar 사진 l 조현영 외 표지 그림, 본문 디자인 l 김영민 ©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하며, 이 책의 전부 또는 일부 내용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가

이었구나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기억의 층계를 생생하게 뛰어오르는 시간에 대한 반역의 시간 깨진 유리병 속에서도 너 웃고 있다 나를 설레게 한다

너, 나의 불온문서

졸린 눈을 비비며 모반을 꿈꿀 때 너도

나처럼 행복한지 / 박정자-창 너머 길 4 >


'인작' 회원 프로필과 자축 메시지


김순정 한국에서 신문사, 잡지사, 광고회사 편집장 일을 하다가 2002년부터 순정아이북스 출판사를 경 영하며 지금까지 한국의 리더들과 함께 100여 권이 넘는 책을 기획 출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KBS <러브 인 아시아>, 한·일 월드컵 기념도서, 대한적십자사의 나눔 기부도서 <만원의 희망 밥 상>,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가 있다. 현재는 리더들의 ‘읽기, 말하기, 쓰기 ’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앞으로 인도네시아에 중심을 두고 해 외 거주 재외 동포들을 위한 콘텐츠 계발과 책 출간에 주력할 생각이다.

이번 호에서는 작년보다 더 풍성한 콘텐츠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잠자던 세포를 깨우고 영감 가득했던 '인작' 회원 분들의 좋은 글과 땀에 회원의 일원으로 다시 한번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의용 이탈리아 건축사, 군나다르마 대학 건축학과 교수, PT.MAP A&E INDONESIA 건축설계사무소 법인장

설레임 반, 기대 반으로 시작된 '인작' 모임 이었다. 살아갈수록 생각과 글 또는 생각과 행동이 겉돈다. '인작'을 통해서 생각의 교류와 정리가 한순간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글을 통해서 사고를 정리하고, 삶의 시간들을 숙고하고 정리한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 건축가가 아님에도 인도네시아 건축가 작품탐방에서 즐거워하 던 회원들이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김현미 너의 아름다움이 네가 머문 그곳에 뚝뚝 묻어나길. 인테리어 INPLAN 대표

언제쯤 맘 넉넉히 내려놓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 그런 시간은 따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군요. 맘 넉넉히라는 단서를 단 순간 그 자체가 가둬둔 시간이 돼버리고 마는군요. 게 으른 글쓰기에 누구에게 누가 될까 하는 맘도 이미 욕심인 것을요. 다른 이의 노고에 얹혀 한 권의 책이 됨에 감사한 마음만 가득하렵니다. 김현숙 제17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수상 PT. Pythonia Geulis Leather 대표 파이톤 가방을 만들며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이것이 언제 자라 열매를 맺지? 열매 맺는 날이 오기는 할까?’ 어릴 적 식목일 날 나무를 심으며 보이지 않는 미래에 초조한 마음이 들곤 했다. 시간이 내 마음의 성장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아직도 시간은 언제나 나를 앞지른다. 하지만 난 오늘 '인작'이라는 울타리 안에 나의 나무를 심겠다. 열매를 바랄 수 없는 나이일지라도, 깊은 뿌리와 튼튼한 줄기만 볼 수 있을지라도 행복하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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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래 자원개발법인 PT. Grand Energy Solution 대표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 저자

모자이크의 나라 인도네시아. 들여다볼수록 참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생각을 했었다. 모든 것을 말끔하게 규정하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인작'을 통해 우리 각자는 다른 곳을 보면서도 함께 해야 할 아름다운 세상을 지향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된 것 만도 행복하 였다.

박정자 1991년 시인 등단하여 <그는 물가에 있다> 등 6권의 시집을 출간. 사람과 사물의 내면에 귀 기울 이는 시 창작으로 경기문학상, 서울시인상 수상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을. 명예도 권력도 재물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도 자취는 남는다는 것을. 두 번째 맞이하는 '인작'의 계절, 이 계절의 이야기들은,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도 오늘을 기 억하는 자취가 될 것이다. 참 고맙다. 우리는 위로 받게 될 것이다. 치자꽃향기가 되어 방안 을 가득 채울 또 한 권의 '인작'. 박준영 UPH 대학 재학 416자카르타촛불행동 활동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나와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 시민

인도네시아는 참 불평거리가 많은 나라입니다. 불평거리에만 집중하며 살다 보면 어느새 불평거리를 쫓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행복을 찾는 일에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인작'을 만나고 '인작'에서 인도네시아 생활 중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인작'에서 함께 행복을 찾는 분들과 웹진 발간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배동선 2016년 재외동포문학상으로 갑자기 작가. 순수문학을 해야 할 판에 역사책을 써버린 소설가 엄한 일 하다 가끔은 제명도 당하는 남자 자카르타 23년 차 열혈 중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출장보고서를 쓰랬더니 왜 소설을 써왔냐며 혼나던 오래 전 신입사원 시절. 지금은 소설이라 시작한 글이 시장조사보고서로 끝나곤 하는데 그 옛날 끊어 넘치던 감성은 세상 살면서 어느 구석에 흘리고 온 걸까. 어렵게 다시 만난 신선한 인문학의 세계에서 새로 만나 사람들과 문학과 생소한 지식에 합법적으로 매혹되고 건전하게 중독되면서, 두 번째 '인작' 웹진 발간을 축하하고 내년에도 인문창작클럽의 큰 발전을 기원합니다.

회원 프로필과 자축 메시지 . 9


사공 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인도네시아 관련 칼럼리스트, 저서 자카르타 박물관 노트, 서부자바의 오래된 정원 전 JIKS 사회과 교사

아침 햇살 속, 사람의 마을에 꽃이 피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 문화예술과 젊음이 만나는 인문창작클럽에서 만나는 세상은 아름다웠 습니다. 때로는 흑백영상으로, 때로는 예술로 빛나기도 하면서. '인작'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 력을 지닌 역동적인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꽃을 피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강현(회장) 88년에 자카르타에 처음 와 본 후 그리움으로 93년에 삼성전자에 주재원으로 다시 나왔다. 중간 에 다른 나라 주재도 했지만 20년째 인도네시아의 삼성에 근무하고 있다. 여느 해외 주재원과는 다른 행보로 인니와 한인 사회에 많은 활동을 하는 이유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상사 주재원이 아닌 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전문가로서 이곳이 내가 살고 있고 살아갈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나라에 살면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많은 경험을 나누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다. 나와 는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에게 지식과 사고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작' 모임을 아 끼고 사랑한다. 그게 우리들만의 잔치일지라도. 이동균 충북 청주 출신 종합 문예지 <한국 문인>에서 수필 부분 신인상 수상(2013년), 수필가로 등단 한.인니 문화연구원에서 주최한 제 2회 인터넷 공모전 대상 수상 2016년 제 18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수상 현재 PT. DULSEOK INDONESIA 대표이사

삶이라는 것은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가끔은 '인작'을 통해서 새로운 마음을 찾 으려 노력했고 삶이라는 고통을 작게나마 위로를 받으려고 했었다. 물론 지나고 나면 이러한 것들이 별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할 거지만. 짧은 기간 동안, '인작' 모임 을 통해 다른 세상, 생각을 느꼈다는 데에 만족하면서 '인작' 모임이 더욱 발전하고 변 모하였으면 좋겠다.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인도네시아에 관한 기사와 칼럼을 쓴다. 인도네시아 거주 20년 차지만 아직도 인도네시아가 신 기하고 인도네시아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다. 인도네시아에 관한 낯설고 어려운 문제를 쉬운 글 로 풀어내고 싶은 야무진 꿈이 있다.

'인작' , 인도네시아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은 곳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흥미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인도네시아가 있는 곳 올해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부족해서 아쉬웠고, 함께 글을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곳 우리가 함께 한 두 번째 해가 기록될 웹진에 참여할 수 있어서 고마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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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어릴 적 글 꽤나 쓰는 문학소녀 흉내를 내었으나 IMF 폭탄을 맞고 나라가 휘청하던 그 해에 대학 을 졸업하고, 방송 작가로 신문 기자로 문학 대신 밥벌이로 글을 썼다. 결혼 후 날아온 보고르 어 느 산골에서 8년 동안 은둔하며 주부로만 살다가 제8회 한인니 인터넷 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 며 세상으로 끌어내어졌다. 본래 심한 방랑벽이 있어 작은 아이 만 4세가 되면서부터 방학마다 혼자 두 딸을 데리고 백팩을 메고 떠나는, 겁 없는 아줌마임.

'인'문이 무엇인지, '창작'은 '장작'의 다른 이름이거니, 기 승 결 '육아' 만 하여 살았는데, 작' 금의 나는 당신으로 인하여 먼지 쌓인 사전을 꺼내고 요리책 대신 역사책을 다시 읽는다. '인작' 당신은 얼음에 걸린 나를 '땡' 해주고 깨워 준 고맙고 감사한 존재입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고, 함께 하기보다 늘 배우는 입장이지만 문턱을 한 발로 꾸욱 밟고 서서 문 안쪽만 들여다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동안 수고하신 다른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인작' 웹진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조현영 상담심리학를 전공하고 인니 와서 사진기 <manzizak>거리다가 상담밴드 <마음공작소> 열어두 고는, 자카르타경제신문에서 편집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인작'의 두 번째 웹진이 나오다니, 아직 그 안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한 일 입니다. 뭐 하나 깊이 파지 못하는 탓에 두루두루 어수룩한 나는 출석률로 밀어부친 보람일지도 요. 인문창작클럽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길에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인작' 웹진 2호 발간을 축하합니다. 채인숙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데일리 인도네시아 에 ‘채인숙의 인도네시아 문화예술 기행’, 자카르타 경제신문에 ‘자바에서 시를 읽다’를 연재. 한 국의 문예지에 인도네시아 시를 번역하고 소개하며, 언제 어디서나 시 쓰는 몸을 만들기 위해 고 군분투 중.

아름다움은 언제나 윤리를 초월하지만, 아름다움을 만드는 행위는 어떤 행위보다 윤리적인 것 이라고 했다. 그것은 세상이 정한 윤리의 범위를 넘어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나가는 과 정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인작' 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언제나 품격있고 늘 다정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한 아름다움이다. 최장오 통신사업, 천연가죽/파이톤스킨 수출 취미생활로 시와 산문을 쓰며 힐링하고 있다.

사거리 맞은 편 고층건물에서 내려다 본 야경은 늘 단조롭다는 생각이 든다. 일률적으로 신호를 따라 흐르는 자동차 불빛들이...... 한 해 동안 인도네시아의 곳과 또 그 곳에서 만난 사람에 대한 글을 쓴다는 일이 정겨웠다. 이를 통해 '인작' 멤버들의 다양한 시선에 다시 한 번 놀라기도 하였다. 점점 익어가는 '인작', 나 또한 곰삭아지기를 바라며......

회원 프로필과 자축 메시지 . 11




'인작' 회원 프로필과 자축 메시지 . 8

인도네시아를 보다 데와다르의 섬, 까리문자와 / 노경래 . 18 장소의 혼 - KERATON RATU BOKO / 김의용 . 23 구눙아궁(Gunung Agung) / 이강현 . 27 차원의 문, 영웅들을 만나는 곳 / 배동선 . 30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는 섬, ‘아낙 끄라까따우’ 그리고 ‘라까따’ / 조은아 . 35 찔레곤 안야르 해변에서 / 이동균 . 40

적도에서 만나다 내가 만난 사람, 90세 청년 ‘Mochtar Riady’ / 이강현 . 46 한번 ROTC는 영원한 ROTC / 배동선 . 51 그와 사진 이야기 / 조현영 . 54 세룡이와 다시 만나는 것, 통일 / 박준영 . 57 댁의 가정부, 유모, 운전기사는 어떠신가요? / 김순정 . 60 산간 벽지 오지의 섬에 희망을 / 이강현 . 70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에서 터를 닦은 그들을 기억하며 / 조연숙 . 76

자카르타를 걷다 인도네시아의 그 곳 - 보물창고 루마자와 / 김현미 . 82 묘지의 벌판, 카사블랑카 / 배동선 . 86 내가 사는 집 / 이동균 . 90 ‘공간’이 주는 영향력, 자카르타에서 당신의 힐링 장소는 어디인가요? / 김순정 . 94 Sjahrial Djalil / 김현미 . 101 커피 그리고 카페 바타비아 / 조은아 . 105 믿음의 흔적 - 32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Gereja Sion / 사공 경 . 109 종교와 가난의 절묘한 조화, 루아르바땅(Luar Batang) / 노경래 . 112

시 가는대로 간다 / 박정자 . 120 우기의 독서 / 채인숙 . 121


화석을 찾아서 / 최장오 . 122 자카르타의 한 모퉁이에서 / 최장오 . 123 보물을 잉태한 항아리 / 김현숙 . 124 때마침 바다를 건너는 / 박정자 . 126 네덜란드 인 묘지 / 채인숙 . 128 디엥고원 / 채인숙 . 130 토바의 어부 / 김현숙 . 132 자화상 / 최장오 . 133 삼빠이 줌빠 자카르타 / 박정자 . 134

물따뚤리 특집 유럽의 아시아 지배를 종식시킨 신호탄 『막스 하벨라르』 / 사공 경 . 138 디포네고로 전쟁과 강제 경작 제도 / 배동선 . 142 읽어야한다. 배워야한다. 사이자-아딘다 도서관과 물따뚤리 동상 / 사공 경 . 146 Museum di Rangkasbitung / Ubaidilah Muchtar . 152

말하여지는 것들 재외동포들의 열약한 독서환경 이대로 좋은가? / 김순정 . 160 이슬람과 사원건축에 대한 오해와 편견 / 김의용 . 167 자카르타 쇼핑몰, 사람이 만나는 공간 / 조연숙 . 172 도서관이 살아있다 / 이연주 . 176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온라인 공간 / 박준영 . 179 거북이의 눈물 / 조은아 . 183 인도네시아 근현대 건축, 건축가 이야기 / 김의용 . 187

사진 에세이 사로잡히지 말 것 / 조현영 . 196 보로부두르 부조 / 채인숙 . 198 익숙한 듯 그렇게 / 조연숙 . 200 우붓(Ubud)에서 / 조현영 . 202 인도네시아의 얼굴 / 김순정 . 204

2018 '인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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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 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김경주-목련 중에서>


인도네시아를 보다 데와다르의 섬, 까리문자와 / 노경래 . 18 장소의 혼 - KERATON RATU BOKO / 김의용 . 23 구눙아궁(Gunung Agung) / 이강현 . 27 차원의 문, 영웅들을 만나는 곳 / 배동선 . 30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는 섬, ‘아낙 끄라까따우’ 그리고 ‘라까따’ / 조은아 . 35 찔레곤 안야르 해변에서 / 이동균 . 40


데와다르의 섬 , 까리문자와 / 노경래

저는 14세기에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아미르 하산(Amir Hasan)이구요. 워낙 오래되어 제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까리문자와 위치 저는 자바 북쪽의 까리문(Karimun)이라는 작은 섬의 서쪽 기슭에 누워있습니다. 이곳 사람 들은 ‘제가 이슬람을 최초로 이곳에 전파하였다’고 해서 저를 풍광이 좋은 이곳에 묻었습니 다. 제가 이곳에 묻혔을 때는 까리문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울창해진 잠부메라 (Jambu Merah) 나무와 데와다루(Dewadaru) 나무 틈새로 푸른 바다가 살짝 보일 뿐입니다. 저는

이른 새벽 통통배의 소리에 잠을 깨고, 하늘을 붉게 물든 노을이 사라질 때 잠을 청합니다.

Amir Hasan(Sunan Nyamplungan) 무덤 저는 자바해가 내려다보이는 중부 자바 꾸두스에 있는 무리아산(Gunung Muria) 기슭 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이슬람을 자바에 전파한 성인 중 한 명인 수난 무리아(Sunan Muria)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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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입니다.


저로서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으나, 사람들은 제가 어릴 적에 버르장머리가 없이 자 랐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엄격 한 저의 아버지는 그런 꼴을 보다 못해 저를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자바섬에 발을 들 여놓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든 집을 떠나 목적지도 없이 보트를 타고 무작정 북쪽 바다로 나갔습 니다. 정처 없는 유배를 떠난 셈이죠. 며칠 동안 거친 파도를 헤쳐나간 후에 조그만 섬 에 표착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겨 도착한 것이 지금의 까리문입니다. 지금이야 스마 랑에서 비행기로 30분이면 도착하고, 쯔빠라의 까르띠니(Kartini) 항구에서 고속 페리를 타면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요.

마자빠힛 설화에 따르면, 자바섬은 원래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낙엽 같아서 사람이 살 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바신의 명령이 따라 비슈누와 브라흐마신이 인도의 스 메루산(Semeru, 須彌山)의 일부를 떼어 자바로 옮긴 후 자바섬을 인도와 밧줄로 연결해 고 정시킴에 따라 사람이 살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비슈누와 브라흐마신이 떼어온 인도의 스메루산을 지금의 동부 자바에 옮겨 꽝 내려 놓은 바람에 파편이 튀어 까리문자와(Karimunjawa)가 되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후문에 따르면, 저를 쫓아낸 저의 아버지는 무리아산 정상에서 제가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을 지켜보셨다고 합니다. 제가 아버지의 시야에서 가물가물 점차 보이지 않 게 되자, 자바어로 ‘Kremun-kremun’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Kremun’은 자바어로 ‘희미하다’라는 뜻입니다. 자바에서 ‘보일 듯 말 듯 하다’해서 후세 사람들이 이 섬들을 ‘Karimunjawa’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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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의 아버지가 저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저를 교육하고자 했다는 것을 좀 철이 들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희 부모님은 ‘저 멀리 자바 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맞으니, 까리문아 간밤에 잘 잤느냐’ 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까리문 해안가에서 파도에 휩쓸려 온 나무 막대기를 주어 지팡이로 삼으면서 이 섬의 안쪽으로 향했습니다. 허기지고 지쳐서 잠시 쉬기 위해 이 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 으니 바로 아름다운 나무로 자랐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나무를 데와다루 또는 저 의 또 다른 이름을 따서 ‘냠뿔룽(Nyamplung) 나무’라고 부릅니다.

데와다루 나무 이 나무는 이 섬에서 많이 번식되었죠. 제가 죽자 사람들이 이 나무를 제 무덤가에 많 이 심기도 했고요. 이 나무는 정말 목질이 무겁고 단단하여 철목(鐵木, ironwood)라고도 불 렸습니다. 그러니 이 나무로 돈 좀 벌어보겠다고 하는 장사꾼들이 마구잡이로 벌목하 는 바람에 이제 이 섬에서 이 나무를 찾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이 섬의 읍내 광장(Alon Alon Karimunjawa)에서

매일 열리는 야시장에서 보따리 장수 아줌마들이 이 나무로 만든

목걸이나 묵주를 팔고 있으며, 군인들이 부하들 군기 잡는데 쓰는 지휘봉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왜 이 나무가 스리랑카의 나라목(國木)이 되었는지는 저도 모를 일입니다.

까리문 읍내 광장에서 열리는 야시장 이 섬에서 데와다루는 찾기 힘들게 되었지만, 망그로브 숲은 참 울창합니다. 까리문자와 섬들은 그야말로 수많은 망그로브 뿌리가 떠받치고 있는 섬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생태관광이라는 명목으로 망그로브 숲에 산책길을 조성하여 입장료를 받는 곳도 생겨났습니다. 망그로브를 잘라내고 망그로브 숲을 보호하겠다는 웃기는 일이 벌 어지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에게는 현지인이 내는 입장료의 10~20배를 받고 있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겠으나 이곳 사람들도 먹고살아야 하고, 앞으로 망그로브 숲을 잘 보전 하기 위해서라고 좋게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까리문자와는 구글 지도로 보아도 보일락 말락 하는 27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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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총면적은 제주도의 4% 정도 될 것입니다. 이 섬들 중 그나마 가장 큰 섬은 제가 누 워있는 까리문입니다. 남북 길이가 14km 정도 됩니다. 저를 시작으로 까리문자와에 점차 사람들이 몰려와 거주하게 됩니다. 현재 까리문자 와 에는 약 9천 명이 살고 있습니다. 자바족이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부기스족과 마두 라족 순으로 많습니다. 자바족은 주로 농업과 서비스업으로, 부기스족은 선원 등 어업 으로, 마두라족은 건어물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부족이 쓰는 공용어(lingua franca)는 인도네시아 표준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가 아닌 자바어입니다. 바하사를 공부 좀 했다는 외국인들도 전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 러나 걱정 없습니다. 당신이 까리문자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바디랭귀지로 라도 친절하게 설명해줄 것입니다. 옛날에 뱃사람들에게는 까리문자와가 발리보다 더 알려졌습니다. 발리는 오랫동안 해 적들의 기지 역할을 한 반면, 까리문자와는 무역로의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 두라의 소금을 칼리만탄으로 보낼 때, 말루쿠의 향신료를 자바를 거쳐 유럽으로 보낼 때, 말라카 해협을 거쳐 호주로 오갈 때,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티모르 지역의 백 단향을 유럽으로 보낼 때, 자바에서 중국으로 공물을 보낼 때 이 섬을 거쳐 갔습니다. 1293년 싱아사리(Singasari) 힌두 왕국을 침입한 쿠빌라이 칸의 군대와 정화 제독이 이끄는 대함대도 이 섬을 지나 자바섬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최근에 이곳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중국 명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대항해시대에 서양의 항해자들에게도 까리문자와는 이미 익숙한 섬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까리문자와는 ‘Chirimao, Carimon Jawa’ 등의 이름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오스만 터키 항해자,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항해자들의 기록에 까리문자와 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메르카토르의 친구이자 경쟁자였고, 플랑드르(벨기에 북부)의 지도 제작자이며 지리학자인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가 1570년에 만든 <동 아시아 지도>에서도 까리문자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선 이후 서양의 많은 생태학자가 까리문자와의 해양 생물다양성과 원 시림에 관심을 두고 방문하였습니다. 이들은 까리문자와의 산호초, 해조류, 망그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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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저지대 열대 강우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섬의 물은 염분이 많아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이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부분 에메랄 드빛 바다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백사장, 물고기 니모와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스 노클링을 하기 위해서 3박 4일 일정으로 이곳을 다녀갑니다.

글레앙섬(Pulau Geleang) 앞바다의 망그로브 네덜란드 사람들이 까리문자와를 ‘자바의 카리브(Caribbean van Java)’라고 했다는데, 저는 카리브를 가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평하는 것에 대해 살짝 기분이 나쁩니다. 카리 브를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까리문자와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까리문자와의 풍광은 그렇다고 치고 숙박비, 음식비, 관광 패키지 비용은 주머니가 가벼운 분들에게도 괜찮은 수준입니다. 머물 수 있는 숙소의 등급도 다양하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다만, 까리문섬은 작은 섬이어서 택시가 없기 때문에 숙박업체에서 알선하는 자동차 를 이용하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해야 합니다. 가격이 좀 비싸다고 생각되면, 스쿠터를 빌리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관광 안내를 하는 사람들의 고민 중 하나는 서양인들은 해변에서 햇볕에 그을리는 일정을 선호하는 반면, 동양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햇볕에 타지 않은 일정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이 부쩍 느는 추세이기 때문에 저도 점차 고민이 깊어갑니다. 물론 저는 많은 사람에게 이곳의 아름다운 바다와 백사장, 바다속 멋진 산호초와 물고기 떼를 자랑삼 아 보고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대부분은 앞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 들이 점차 늘면 이곳이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 주민들의 생계도 걱 정해야 하니 말이죠. 기왕에 이곳에 오시려면 바다가 아름다운 건기에 오시기 바랍니다. 까리문자와에 이토록 많은 것을 주신 신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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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소의 혼 (Genius Loci)’ - KERATON RATU BOKO / 김의용

시간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진 장소에는 독특한 정체성(Identity)이 만들어진다. 장 소의 정체성에 역사적 이야기가 가미되고, 삶의 흔적들이 남겨지게 되면 그 장소에는 바로 ‘장소의 혼’이 깃든다. 문화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다면 사실 일반인들이 건축의 유적/유적지 를 감상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유명 관광지에서 압 도적인 크기, 화려한 장식,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 때문에 감동받는데, 이 모든 감동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생경함 때문에 일어난다. 이러한 생경함 은 유적지에도 존재하지만, 과거의 파편들을 토대로 발휘해야 하는 상상력이 편안한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 불편함이 유적과 유적지에 대한 감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유적지는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그리고 건축적인 지식이 없으면 원형을 자유롭게 상상하기 어렵고, 감동받기도 쉽지 않다. 아니면 상상하고 추론하 는 것을 최대한 즐길 수 있어야지만 유적과 유적지의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결국 ‘아 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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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무릇 도서 국가답게, 외부에서 이입된 종교와 문화에 상당히 개방적 이며, 이 개방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자신들의 토착 종교와 문화에 결 합시키는 담대한 포용력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런 개방성/포용력들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도 정복한 왕조의 유산들을 파괴하거나 제거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결합시키는 양태를 보여주는 이유일 것이다.

라뚜 보꼬의 전경. 남겨진 기초의 흔적들로 건축물의 높이와 크기를 상상하고,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하며 장소를 체험하는 것은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유적지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풍부한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가 지고 있는 도시 족자(Jogja)에서 당연히 백미는 보로부두르(Borobudur)와 프람바난 (Prambanan)이다.

이 두 유적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는 이미 유네스코도

인정할 만한 독특함과 뛰어남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이 두 유적지는 이 도시를 지배 했던 불교와 힌두 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문화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 곳은 거의 폐허로 남아있는 라뚜 보꼬(Ratu Boko)이다. 종교 시설인 두 유적지와 달리 라뚜 보꼬는 일상적으로 사람이 거주했던 유적지여서, 그 느낌부터가 사뭇 다르다. 아마도 사람이 일상생활을 영위 하면서 살았던 공간, 그런 공간적 쓰임새가 지금 방문하는 현대인에게도 다른 두 유 적지와는 차별화된 감동과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놀라움, 생 경함, 독특함보다는 비애, 허무, 쓸쓸함 같은 차분한 내면의 감동이 더욱 크게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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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언덕에 세워진 수도원’을 의미하는 이 궁전은 8세기경 불교 왕조에 의해 족자의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200미터의 언덕 위에 지어지게 된다. 이후 이 궁 전은 힌두 국가인 마타람에 의해 점령당하여, 불교와 힌두 문화가 공존하는 건축 양 식이 오버랩 되어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두 개의 사원과 두 개의 궁전 건물로 이루어 진 이 궁전은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성향들이 그대로 유적들에 남겨 져 있는 듯 하다. 즉, 왕궁이면서도 건축물들의 소박한 크기와 구성들이 매우 인간적 인 스케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배자의 정서와 성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건축적 구 성인 것이다.

족자 시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왕국의 지형학적 위치를 말해 주는 사진이다. 무릇 동양의 철학은 밖에서 보는 외관의 중요성보다는 안에서 밖 을 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불교 철학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이 궁전의 건축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 배치로 이루어진 이 유적지는 수학적 질서가 만들어주는 단 아하고 정갈한 공간적 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복잡한 사고가 필요 없는 고대 시대의 단순한 삶의 방식과 철학적 사유방식이 이러한 성과를 만들어낸 것 같 다. 왜냐하면 궁전은 신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이었기 때문에 장엄함, 거대함보다는 삶의 공간이 더 중요한 가치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궁전이 위치한 산의 정상이라는 높이에서 이미 차별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평지의 기념비적 건축물이 확보해야 하는 높이의 딜레마가 해결된 점도 인간적 스케일의 건 축물이 축성될 수 있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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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뚜 보꼬는 거대한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보로부두르와는 다르며, 화려한 장식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프람바난과도 또 다르다. 이곳에는 굳이 따지자면 아마도 오랜 기간 중첩된 시간과 남루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공간이 만들어주는 잔잔한 감동 이 있는 것 같다. 유적지에서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시간의 냄새, 따스하지만 불쾌하 지 않은 바람에서도 느껴지는 옛 시간, 과거 건축물의 흔적들, 인도네시아의 안쓰러 운 문화유적 관리상태 등등,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더욱 더 애잔함을 느끼 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애잔함이 천박하거나 저급하지는 않다. 왜냐하 면 어떤 것이던 시간의 옷을 입으면 그만큼의 품위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기개 넘치고 당당한 보로부두르, 화려하면서도 겸손한 프람바난, 그리고 쓸쓸하지 만 슬프지 않으며 침묵하나 무겁지 않는 라뚜 보꼬. 미학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비 극에서 만들어진다 한다. 이 유적지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한 비애감은 유적들 만이 줄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과 감동일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눈에 보 이는 것보다 보이지는 않는 것들에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문이 마치 현실과 초현실 경계처럼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듯 하다. 거대하지 않지만 충분히 상징적이며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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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눙 아궁 (Gunung Agung) / 이강현

터질 것 같더니 안 터지고. 발리에 있는 아궁산이 벌써 3개월 넘게 Siaga(비상 사태)단계만 올렸다 내렸다 하며 터 지지 않고 있다. 아궁 산은 발리 섬에 있는 활화산으로 성층 화산이다. 그래서 구눙 아삐(불산)라고도 하며 높이는 3,142m이다. 1808년 이후에 수 차례에 걸쳐 분화를 했으며, 특히 1963년 의 대분화는 2,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또한 발리 사람들에게는 우주의 중심인 수 미산으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산이기도 하다. 한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은 최초의 힌두교인 들에 의해 가져온 수미산의 파편이라고 한다. 9월부터 화산 분화가 시작되어 5천명의 이주민이 230개 대피소로 무작정 거주지를 옮겨 생활 하기 시작했고, 며칠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전세기를 띄우고 난 리가 났던 그 산은 오늘은 잠잠하게 숨 고르기를 하고 있고 나는 그 산 언저리 한 대피소 를 방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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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라지만 이 곳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천 명의 이주민들이 군 소재 체육관 안과 밖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은 인근 학교에 다니고 있고 아낙네들은 힌 두 의식에 쓰이는 Canang Sari(작은 대나무 둥지)를 만들며 소일거리와 돈벌이를 하고 있 고 젊은 남자들은 낮에는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고 한다. 그들은 구눙 아궁이 빨리 터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하루빨리 돌아 가 이 지긋지긋한 대피소 생활을 청산하는 바람도 바람이거니와 화산 폭발 후 비옥해진 옥토에서의 찬란한 수확을 꿈꾸기도 하고 인근에 화산재를 건설 현장에 팔아 목돈을 챙 길 궁리를 하고 있다고들 한다. 1963년 화산 폭발 때는 지진이 난 것 같이 하루에 몇 번씩 땅이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 기 시작해서 결국은 2년 만에 터졌다고 하니 이번에도 하염없이 이런 생활에 익숙해 질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그들은 누구보다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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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만불을 들여 일단 이들을 조금이라도 돕기로 결심했다. 모든 대피소는 아니지만 3개 대피소에 천막을 치고 세탁기와 냉장고, 전자레인지, TV를 설치했다. 이주민들의 빨래를 돕고 음식물을 보관하고 데워먹게 하고 어린이 놀이방을 꾸미기 위해 TV를 설치하고 도화지와 색연필을 나누어 줬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대 피 생활이지만 삼성이 먼저 나서면 다른 기업들과 여러 단체들의 관심으로 좀 더 많은 지원의 손길이 닿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내가 만약 대한민국 어느 천재지변으로 생겨난 대피소에 와 있다면 여기 계신 분들이 느끼는 엄청난 불편함과 상실감에 대한 울분이 정부의 부족한 지원에 대한 강한 비난으 로 쏟아질 텐데. 여긴 너무 고요하고 평화롭다. 취재 기자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사 를 위한 선풍기식 질문도 없이. 이게 국민을 위한 정부인지 정부를 위한 국민인지 모를 그저 그들은 하늘의 뜻이거니 자연 섭리를 받아들이고 조금 더 불편함을 감수하고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기도로 보내고 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11살 소년에 눈빛엔 장난기와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이게 내 가 지금 사는 인도네시아이고 이래서 나는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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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의 문 , 영웅들을 만나는 곳 / 배동선

몽인시디 거리의 한식당 토박은 요즘도 많은 손님으로 넘쳐나지만 ‘한인사회 역 사’란 측면에서도 일정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한식당이 흥망성쇠를 거듭한 그 거리에서 20년 가까이, 그것도 한 차례 화재를 겪고서도 여전히 최고의 한 식당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토박은, 수십 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며 일종의 한인사 회 구심점이 되었던 인근 스노빠티의 무궁화수퍼 만큼이나 의미있다 할 것입니다. 그 후 앞다퉈 주변에 들어선 한인업소들에게 이분들이 특별히 투자했을 리 없지만 그 저 변과 환경을 다지는 큰 역할을 한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대부분 저녁 식사 약속이 그 동네에서 잡히는 현실은 퇴근길 북적 이는 뗀데안 도로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나에겐 재앙이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교통 신호등 있는 통칭 ‘위자야 사거리’는 그 상공을 지나 찔레둑까지 이어지는 버스웨이 전용 고가도로가 생기기 전에도, 그 후에도 지옥처럼 밀립니다. 난 거길 지나야만 젖 과 꿀이 흐르는 몽인시디 거리로 진입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 위자야 사거리 가 나를 만찬의 세계로 이끄는 포탈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선 700년 의 시간을 넘나드는 차원의 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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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 전 세계를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이던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적도 아래 까지 대규모 함대를 보내 동부 자바의 싱가사리 왕조를 침공하고 있었습니다. 꺼르 따느가라 왕은 항전의 결기를 다졌지만 모두 힘을 합쳐도 승리를 보장하기 어렵던 순 간 오히려 끄디리 왕국의 자야캇 왕이 일으킨 모반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자바의 왕 국들은 사상 처음 맞는 초유의 강적 몽골군 앞에서 적전분열하며 지리멸렬하고 있었 던 것입니다. 꺼르따느가라 왕의 양자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로 피신해 와신상담한 끝 에 스스로 몽골군의 앞잡이가 되어 그 선봉에서 끄디리 왕국을 멸망시키며 자야캇 왕

라덴 위자야(Raden Wijaya) 즉위식 그림

에게 처절한 복수를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연개소문의 아들로서 조국을 배신 하고 당나라의 편에 붙었던 연남생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 추지 않았습니다. 라덴 위자야는 호화로운 승전 연회에 몽골 장수들을 초대한 후 가 차없이 암살하더니 동시에 본진을 기습해 몽골군 전력의 상당부분을 순식간에 파괴 했습니다. 허겁지겁 퇴각한 몽골군은 심대한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 결국 남방 원정을 포기해야만 했죠. 이 사건으로 일약 자바의 영웅으로 등극한 라덴 위자야는 그 여세 를 몰아 1299년 자바 땅의 마지막 힌두 왕국인 마자빠힛 왕국을 세우고 그 시조가 됩 니다. 위자야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다르마왕사 스퀘어와 그랜드 위자야 센터로 이어 지는 잘란 위자야 거리는 그 라덴 위자야 왕자를 기념한 도로입니다. 그로부터 250년쯤 후에 자바 땅에 바구스 수루붓 또는 수따위자야라 불리는 사내 가 태어납니다. 그는 훗날 빠장 왕국을 무너뜨리고 1587년 마타람 왕국의 시조 ‘권능 인도네시아를 보다 . 31


왕 스노빠티’가 되는 인물입니 다. 그의 일생은 수많은 에피 소드와 신화들로 점철되어 있 습니다. 특히 그가 빠랑뜨리띠 스 해변에서 만난 자바섬 남쪽 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롤로끼 둘과 영적 결혼을 하고 건국에 도움을 받았다는 전설은 인도 네시아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이슬람의 아홉 선교사, 즉 왈리송오 중 한 명을 극진히 지원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세운 마타람 왕국도 명 실공히 술탄국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건국한 지 불과 15년 후인 1602년부터 네덜란 드 동인도회사가 자바 땅을 야금야금 침범하며 식민지로 삼더니 급기야 1755년 마타 람 왕국을 무너뜨리는 모습에서 낭만적인 고대사가 잔혹한 근대사로 넘어가는 변곡 점을 보게 됩니다. 위자야 사거리의 오른쪽 잘란 수리요 거리는 면의 전설과 일식당 오쿠조노가 있는 또 다른 사거리에서 권능왕의 이름을 딴 스노빠티 거리와 연결됩니 다. 결국 두 왕국의 시조가 위자야 사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것이죠.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독 립전쟁이 한창이던 1946년 경 술라웨시를 포함한 동쪽 해양지대인 동인도네시아 지역은 비교적 네덜란드에 게 호의적이었습니다. 특히 미나하사와 말루꾸 사람들 상당수는 네덜란드 동인도 군인 KNIL에 입대하는 것 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 고 그래서 수까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군에게 총을 겨누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 다. 하지만 술라웨시 남부 마카사르 지역은 유독 독립 열기가 뜨거워 네덜란드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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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가 막무가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할 정도였죠. 원래 일본어 교사였던 미나하사 출 신 로베르 월떠르 몽인시디는 동료들과 함께 술라웨시 시민저항군을 조직해 네덜란 드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카사르에서 한번 생포되어 고문과 고초를 겪었던 그는 우 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또 다시 게릴라가 되어 최전선에서 네덜란드군을 괴롭히다가 독립전쟁 막바지에 또다시 생포되는데 이번엔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보원 이 되면 살려주겠다던 네덜란드의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 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얻어내기 불과 3개월 전인 1949년 9월 5일 총살 당하고 만 것 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습니다. 토박 식당은 그 몽인시디의 희생을 기리 는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죽은 지 26년 후인 1965년 10월 1일 새벽, 대 통령 경호 부대 짜끄라비라와 병사 20여 명이 멘뗑 소 재 뜨구 우마르 거리의 나수티온 장군 자택에 난입하고 있었습니다. 공산 쿠데타로 알려진 9월 30일 쿠데타의 한 장면입니다.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장군을 비롯 한 장성 6명이 살해되거나 납치된 그 날 새벽 전군사령 관 나수티온 장군은 담을 넘어 옆집인 이라크 대사관저 로 피신했지만 그날 유탄에 척추가 부서져 버린 막내딸 이르마는 며칠 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사건 당 시 권총을 들고 뛰어나왔던 부관 삐에르 뗀데안 중위를 반군이 나수티온 장군으로 오 인한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는 서구적으로 훤칠하게 잘 생긴 젊은이었는 데 말입니다. 할림 비행장 인근 루방부아야의 반군 본부로 납치된 그는 이미 잡혀와 있던 다른 장성들과 함께 극심한 고통과 조롱을 당한 끝에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시신 은 루방부아야의 폐우물 속에 유기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은 수까르노에게 끝도 없 는 추락의 시작이었고 수하르토에게는 권력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었습니 다. 그리고 쿠데타를 진압하고 뒷수습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에는 헬게이트가 열 려 최소 50만, 최대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국민들과 화교들이 공산당으로 몰려 학 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죠. 뗀데안 중위는 대위로 추서되었고 몽인시디 거리로 넘어 가는 잘란 깝뗀 뗀데안은 그를 추모하는 거리입니다. 인도네시아를 보다 . 33


그래서 위자야 사거리를 지나기 위해 오랫동안 신호 대기로 막혀 있는 동안 난 라 덴 위자야 왕자와 권능왕 스노빠티, 게릴라 몽인시디, 그리고 뗀데안 대위를 떠올리 며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700년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각각의 시대가 위자야 사거 리에서 마주치며 그 거대한 시간적 간극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문을 열고 있는데 거기서 식당에 가려고 불과 10분, 20분 막히는 것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적이 사라진 깊은 밤, 달빛이 밝을 때면 그 차원의 문에서 걸어 나온 네 명의 영웅들이 위자야 사거리에서 만나 서로에게 눈짓하며 미소짓는 광경을 꿈꿉니 다. 그 미팅 전, 각각 좋은 참모들이 챙겨 준 상대방에 대한 자료를 미리 들여다봤다 면 그들은 그렇게 만나 무척이나 서로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굳이 행선지가 토박이 아닐지라도 붐비는 위자야 사거리에서 어느 날 꼼짝없이 막혀 있게 될 당신에게도 어 쩌면 그 차원의 문이 살짝 보일지도 모릅니다.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배동선 저 | 아모르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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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는 섬 , 아 ‘낙 끄라까따우 그 ’리고 라 ‘까따 ’ / 조은아

‘라까따’와 ‘아낙 끄라까따우(Anak

Krakatau)’의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으로부터

135년여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자바 섬과 수마트라 사이 순다 해협의 무인도 끄라까따우 섬에는 뻐르보에와 딴(Perboewatan), 다난(Danan), 라까따(Rakata) 등 세 개의 화산이 있었다. 1883년 8월 26일, 저 멀리 호주와 타이완에서도 들릴 만큼의 엄청난 굉음을 내며 끄라까따우의 화산들이 폭발을 시작한다. 폭발로 인한 지진과 쓰나미로 당시 인근 공해상의 물 벽이 15m 높이로 치솟았고 쓰나미가 자바섬을 덮칠 무렵에는 그 높이가 40m에 달했다. 근처를 향해 하던 배 6,500척이 수장되고 해협 양쪽 마을 165개가 폐허가 됐으며 3만 6,000여 명이 순식 간에 숨졌다. 폭발은 지구의 역사를 뒤흔들며 사흘 동안 이어졌다. 폭발 이후 3년 동안 전 지구적 저온 현상이 일어났고, 인근 바타비아(구 자카르타)의 인도네시아를 보다 . 35


경우 연 평균 기온은 8도나 떨어졌다. 하늘과 태양 빛도 달라졌다. 미세한 암석 파편이 대기 중에 쏟아 부어져 지구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스 아테네 공대와 아테네 학술원은 2014년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의 그림 ‘승마’(1885년 작)속 하늘이 유난히 붉은 이유도 지구 반대편의 끄라까따우 폭발의 영 향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달도 푸르게 물들였다. 대기 중의 먼지 농도가 짙어져 먼지 알갱이들의 노란빛은 흩어져 버리고 파란색을 통과시키면서 끄라까따우 폭발 이후 2년간 파란 달 즉 ‘Blue moon’이 관측됐다. 사실, 인류 1만 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산 폭발로 알려진 것은 숨바 지역의 탐보 라 화산 폭발(1815년 4월)이었다. 하지만 탐보라 폭발과 달리 그로부터 70년 뒤의 끄라까따우의 폭발이 ‘근대 최대 · 최악의 화산 재난’으로 꼽히는 이유는, 지질학적 증거로만 확인되는 ‘탐보라’와는 달리, 당시 통신과 전신의 기술이 앞섰던 지구의 대도시민들이 화산 폭발의 원인과 과정, 여파를 거의 실시간으로, 공포에 떨며 지켜본 최초의 재난이었다. 끄라까따우 섬은 그렇게 지구를 뒤흔들고 남쪽 라카타 부분만을 남긴 채 섬의 2/3 가 침몰, 250미터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화산이 분화한 지 44년이 지난 1927년 말, 바다 밑에서 잠을 자던 끄라까 따우는 마치 새 생명을 키우듯 바닷속에서 부글부글 작은 화산 활동을 시작한다. 그 리고 1929년, 작은 화산 아이 하나를 바다위로 밀어 올린다. 남겨둔 누군가를 애타게 찾듯 ‘아낙 끄라까따우’는 바닷속에 잠겼다, 떠올랐다를 반복하며 계속 용암을 뿜어낸다. 그리고 그런 작은 분화가 되풀이되면서 차츰차츰 자 라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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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끄라까따우가 바닷속에서 아이를 낳아 키운 것일까? 남겨진 라까따를 향한 그리움일까? ‘아낙 끄라까따우’는 몇 번의 폭발을 거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남겨진 라까따섬은 자바섬 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로, 아낙 끄라까따우를 마주보 는 서북쪽 바닷가는 높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분화 후 온통 화산재로 뒤덮이고 숯덩이밖에 없었을 죽음의 섬은 세월이 흐르며 놀랍게 변해 있었다. 바람을 따라 날아온 가벼운 섬유질 식물들, 대나무나 통나무 속에서 미처 탈출하 지 못하고 흘러온 개미, 흰개미 같은 곤충들, 새들이 물고 온 열매 그리고 그 씨앗들 이 그 메마른 땅을 푸른 숲으로 일궈놓았다. 인도네시아를 보다 . 37


라까따의 절벽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마주보고 있는 아낙 끄라까따우. 아낙 끄라까따우는 라까따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2012년 뿜어져 나왔다는 갈색의 마그마, 그리고 바로 지난해 흘러나온 검은색 마그마가 마치 눈물을 흘리듯 정상에서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풀 한 포기 숨 쉴 여백도 없이, 수십 년 세월 차곡차곡 흘린 마 그마 눈물은 누구 하나 발을 댈 수 없을 만큼 거칠고 거대한 형상을 하고 있다. 반대편으로 돌아 배가 닿을 수 있는 바닷가에는 높이가 30m나 되는 참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고 야생사탕수수도 제법 잘 자라고 있건만. 하지만 숲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시커멓고 거대한 아낙 끄라까따우도 뜨거운 심 장에서 뿜어내는 열기로 뜨거웠다. 걸음걸음 매마른 까만 먼지가 피어오른다. 누군 가의 흔적도 남을 수 없을 만큼 바싹 마른 화산재로 뒤덮여 그 가파름이 50도 이상은 되어 보였다. 비록 예전보다 자라는 속도가 현저히 늦어지긴 했지만, 813m의 라까따와 키가 비 슷해진 이후에도 계속 자라고 있으니 늦으면 늦을수록 이 가파른 언덕을 더 높이 올 라가야 하리라. 어느 바다 한 가운데, 모두를 잃고 홀로 서 있던 화산 하나. 그는 누군가가 곁에 있 길 간절히 바라며 매일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에 응답하듯 어느 날 그 앞에 새로운 화산가 떠오른다. 마치 라까따가 그 옛날 끄라까따우를 그리며 외로운 바다에서 매일 노래를 불렀고 그에 응답하듯 떠오른 것이 아낙 끄라까따우는 아닌지… 이제는 아이(Anak)가 아니 라 연인(Pencinta)이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어서인지 그곳의 밤은 정말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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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그곳을 다녀온 2018년 3월로부터 4개월 후, 아낙 끄라까따우는 시커먼 화산재 를 공중으로 쏘아 올리며 폭발을 시작, 9월에는 시뻘건 용암과 불꽃을 뿜어내며 순다 해 협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다행히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그때의 역사를 아는 자들 은 충분히 긴장했을 것이다. 당분간 섬의 방문은 어렵다고 했다. 캠핑은 더더욱. 딱 3일의 연휴, 그 많은 휴양지를 뒤로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하필 그 섬을 찾았던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 역사를 뒤흔들었던 그곳에서의 캠핑은 아이 들에게 큰 자랑거리이자 모험담으로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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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곤 안야르 해변에서 / 이동균

인간은 누구든지 가끔은 일상생활에서 일탈하여 멀리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종종 복잡한 생각 없이 그냥 일주일 동안만 이라도 푸른 바다가 가까이에 보이 고 정겨운 갈매기 미소와 함께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의 아우성을 들으며 찌든 자카 르타 도시의 피로를 마음껏 풀고 싶어 한다. 나를 가장 잘 이해 해주는 옆구리 사람이 없어도 오직 나 혼자만이라도 좋다. 그러던 중에 일전에 내 회사를 방문했던 분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점심 시 간이라서 길게 서로의 이야기를 못했지만 잠시 시간이 있으면 오늘 오후 4시까지 <Allisa Resot Hotel>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었다. 핑곗김 에 회사 일을 조금 일찍 끝내고 땅그랑 Cikupa에서 찔레곤으로 차를 몰았다. 평일 오후라서 고속도로는 한적했다. 하늘은 구름도 없는 그야말로 푸른 창공이었 다. 도로 옆에는 벼 모내기를 하느라고 군데군데 농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는 여러 산이 줄지어 보였다. 불현듯 자카르타의 풍경이 생각이 났다. 자카르타 Slipi의 내 아파트에서 거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보면 저 멀리 자바해의 지 나가는 큰 배가 보이고 연이어 비행기가 자카르타 공항에 내리려고 순차적으로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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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두고 속도를 늦추고 고도를 낮게 유지하며 가는 모습을 보곤 한다. 핸드폰에 깔린 내비게이션으로 연신 길을 확인하면서 찔레곤 띠무르 톨을 빠져 나 왔다. 그 후에 펼쳐진 찔레곤 신도시는 <모래의 도시>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처 음에는 차창 밖으로 얼핏 보이는 제주도에 있는 주상절리 같은 것이 보이길래 무엇인 가 하고 좀 더 자세히 봤더니 모래를 판 후에 남은 절벽 같은 모습이었다. 그 위에 아 직도 위태롭게 보이는 집들이 있었다. 아마도 오래 전에는 이곳이 바다였다가 지금은 융기되어 이러한 사암층을 만든 것 같았다. 마침내 안와르 해변에 위치한 <Allisa Resort Hotel>에 도착했다. 약 3헥타르의 부지에 매우 깨끗한 해변이 길게 드리워져 있고 잘 어우러진 정돈된 정원들 사이로 호텔 룸들이 들어서 있었다. 친절한 매니저분의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을 둘러 보면서 아름답고 조용하면서 럭셔리한 풍경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 리조트의 가장 인상적이고 핫한 풍경이 있는 곳은 늘 맛있는 커피가 준비된 2 층, 비치 카페였다. 그 카페 안 창문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소파에 앉아서 커피 맛 을 즐기면서 정면으로 바다를 보면 수마트라쪽의 바다가 보이고 좌측으로 눈을 돌려 보면 끄라까따우 화산섬을 넘어 인도양으로 향하는 바닷길이 보인다. 우측으로 눈을 돌리면 포스코를 지나서 자바해가 길게 늘어져 보이는 3면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요충 지임을 알 수 있다. 마침 해가 넘어가는 석양 시간이라서 그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그윽한 분위기를 마음껏 마신 후에 리조트에서 바닷가로 길게 앞으로 뻗은 요트를 정 박시키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서 갔다. 그곳의 바다속은 내 얼굴이 투명하게 보일 만 큼 깨끗하고 상큼했다. 금방이라도 내 마음이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과거에 한국에서 사업을 할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이 나면 귤 농장에서 며칠간을 보내면서 제주도 차귀도 쪽에서 자 주 바다낚시를 하였는데, 그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회사를 출근하지 않고 이곳에서 머물면서 바다낚시를 하면서 아버지와의 격렬하면서 따뜻했던 추억의 순간들을 느끼고 싶었다. 12년 전, 아버지 와 나는 마지막으로 바다낚시를 하면서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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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리조트 안에는 전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커다란 풀장이 있었다. 금방이라 도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시원한 야자수 사이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두 눈으로 파란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끝없는 선을 바라보며 바다 내음을 깊고 천천히 마시며 내 마음의 그루터기를 하나씩 하나씩 지워가고 싶은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내일이라는 것에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으니 다음 시간에 찾아 보 기로 약속하며 발이 떨어지지 않는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만약 내 마음의 힐링이 필요할 때는 이곳을 다시 찾아 수필 책, 시집을 하나씩 꺼 내 읽어가며 안야르 바다의 팔색조 같은 파노라마를 바라보고 생각과 시상이 떠오르 면 백사장에 글씨를 적어가며 값진 시간을 보낼 것이다. 어느 덧 오늘의 태양이 바다 와 하늘을 길고 깊게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안야르 해변이여 ~ 그대여 영원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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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상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지상을 태우고 남은 자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최후의 움푹한 것이다. 환한 양각이 아니라 검 은 음각이란 말이다. 나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신화 들을 읽은 후 비탄에 젖어 일생을 보내다가 죽은 후 다음 생에 최 고의 전기작가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 운명을 점지하 는 자도 바로 나다. / 심보선-아이의 신화 중에서>


적도에서 만나다 내가 만난 사람, 90세 청년 ‘Mochtar Riady’ / 이강현 . 46 한번 ROTC는 영원한 ROTC / 배동선 . 51 그와 사진 이야기 / 조현영 . 54 세룡이와 다시 만나는 것, 통일 / 박준영 . 57 댁의 가정부, 유모, 운전기사는 어떠신가요? / 김순정 . 60 산간 벽지 오지의 섬에 희망을 / 이강현 . 70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에서 터를 닦은 그들을 기억하며 / 조연숙 . 76


내가 만난 사람 , 세 청년 ‘Mochtar Riady’ 90 / 이강현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리포그룹 창업주인 목타르 리아디(Mochtar Riady)가

Meikarta project(브까시군 찌까랑 신도시 개발프로젝트)와 관련해 나를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다. 최근 자카르타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거대 개발 프로젝트에 내가 몸 담고 있는 삼성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는데 막상 리 포 측에서 그것도 창업주가 직접 나를 만나자고 하다니 기쁘면서도 의아한 생각이 들 었다. 목타르 리아디 회장은 1929년생으로 한국 나이로는 무려 아흔(만

88세)이다.

연세에 아직까지 왕성한 경제 활동을 하시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Meikarta project까지 직접 관여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오늘 나는 까라와치 실로암 병원 옆에 있는 목타르 리아디 연구소에서 직 접 그분을 만나 뵈었다. 몇 년 전 인니 전경련 모임에서 마지막으로 멀리서 뵈었었는 데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미팅룸으로 직접 나를 마중 나오셔서 식당으로 안내하셨다. 점심 메뉴는 ‘bebek goreng’이었다. 인근 음식점에서 주문한 듯한 소박한 자태의 오리구이 반 마리와 밥 한 공기가 다소곳이 접시에 담겨있었고, 그 분이 직접 개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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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는 팩 주스가 전부였다. 수수하면서도 정감이 느껴지는 메뉴로 드디어 설레는 오 찬이 시작되었다. 어르신께 당신의 아들, 손자들과의 그동안 친분에 대한 얘기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바틱 전시회에서 혼자서 바띡을 고르고 있던 이 나라 대기업 총수이자 외아들 "James riady"를 만났던 의아했던 만남의 기억. 얼마 전 비행기 에코노믹 클래스를 타고 한국에서 택시를 타고 다니던 손자 "Hendri riady"에 대해 동행했던 리포 그룹 디렉터에게 정말이냐고 물었을 때, 할아 버지 교육 방침이라고 들었던 얘기와 인니 미래를 위한 교육 의료 사업에 매진하고 계시는 회장님을 존경한다는 멘트로 말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그분의 첫 마디는 "알리바바가 앞으로 어찌될거 같냐"였고 나는 소스라 치게 놀라운 감정을 애써 감추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90세 어르신이 알리바바를 논하는데 놀랬고 내가 알고 있는 알리바바에 대한 지식 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알리바바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은 없고 지식도 부족하지만 인니에 이커머스 및 온라인 거래에 엄청난 증가 및 향후 전망을 소신껏 말씀드렸고 회장님께서는 3년 전 알리바바의 마윈을 중국에서 만나 1시간 미팅 약속이 마윈 자택으로 옮겨져 12시간 동안 두 분이 나누었던 얘기들을 들려 주셨다. 인류의 화폐 개혁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에 사용된 조개껍데기, 씨앗부터 시작해 물물교환 그리고 금, 은, 동 등의 금속으로 발전했고 중국 진시황제는 ‘하늘은 둥글 고 땅은 모나다’라는 우주관에 따라 겉은 둥글고 중앙은 네모난 구멍이 있는 원형 동 전으로 중국을 제패했으며, 이 후 영국 파운드 강세,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달러 강 세, 이제는 중국 마윈의 전자 상거래 및 차세대 가상 화폐까지 끊임없는 발전과 변화 를 이뤄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매일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었던 나는 90세 노 적도에서 만나다 . 47


인의 직관과 통찰력, 박식함 그리고 젊은 사람보다 더 빠른 정보력에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어, 당신께서 어떻게 Panin bank와 BCA 은행을 키우고 이들을 거대 은행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리고 최근 BCA 역사 유물관 오 픈식에서의 연설 내용도 들려주시며 리포에서 얼마 전 출격한 걸음마 단계의 Nobu Bank를 앞으로 어떻게 인니 최고의 은행으로 성장시킬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 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진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몸소 입증하며 그 누 구보다도 시대 흐름을 발 빠르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중국의 아마존이라 불리는 3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 징둥(JD닷컴), 쑤닝 등의 성공사례를 공부해야 하는데, 같 은 맥락에서 삼성전자의 나를 직접 만나 Meikarta project와 전자 비즈의 연관성을 논의하려 오늘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는 결론까지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설명하셨다. 또한 자신의 손자인 존 리아디가 만든 마타하리 Mall의 실패는 좋은 상품과 소비 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시장을 차려놓지 못한 채 소비자만 모을 욕심을 부렸고 돈 을 써서 클릭수만 높이려고 하는 등 기본도 준비되지 않은 채 사업에 뛰어들어 결국 실패했다고 냉정히 평가하며 "알리바바가 라자다를 인수했을 때 마타하리 Mall의 전 직원이 패배감에 사로잡혀선 절대 1인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도. 그리고 난 내가 그동안 리포 그룹에 대해 느껴온 바를 가감 없이 말씀드렸다. “리 포 그룹 CEO들은 너무 배가 불러 있어 절실함을 모릅니다. 죽기 살기의 헝그리 정신 이 없이 너무 똑똑하고 도도하기만 하고, 미팅을 해도 폼만 잡고 팔로우업도 없습니 다. 건설 비즈도 독창성과 창의성이 결여돼 있고, 기본적인 룰조차 잘 지키지 않습니 다. 전자 비즈도 하이퍼 마트의 다른 제품들처럼 그냥 전자제품만 많이 깔아두면 장 사가 되는 줄 알고 무리하게 점포수만 늘려갈 뿐입니다.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 해 보입니다. 회장님이 인니 미래를 위해 교육과 의료 사업에 매진하는 내용을 이해 하는 국민이 실제 얼마나 되겠습니까? SPH학교, 실로암 병원도 리포기업의 이익을 살찌우는 상술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최근 리포는 상생 협력이 없는 악덕기업이란 소문도 파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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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충신이 된 양 타자(他者)의 눈과 귀로 느낀 문제점들을 솔직히 전달해 드리 던 나는 리포 회장님의 엄청난 인생 강의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을 드리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전 제 얼굴이 바로 삼성이라고 믿습니 다. 오늘 당장 제 거래선과 소비자를 만족 시키지 못하면 내일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죽을 각오로 일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대 충하더라도, 그래서 잘못되더라도 그냥 삼 성을 떠나면 되지만 제 이름 석자는 인도네 시아에서 삼성 그 자체입니다. 제가 잘 못 하면 삼성이 잘못하는 거고 제가 꺾이면 삼 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 목소리 에 귀 기울이던 회장님은 “그럼 문제점만 지적하지 말고 리포의 발전을 위한 해결책 을 내놓아 달라” 하시더니 갑자기 “삼성에서 언제 그만 둘 거냐. 그만 두면 리포 그룹 에 내 특별 어드바이서로 꼭 와 달라. 난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두 손 모아 간 청한다” 아뿔사! 뜻밖의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 내 의도는 이게 아닌 데···’ 대화 도중 전등이 흔들리는 지진이 감지되었음에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 에 몰두했고 2시간 반이 흐른 뒤에야 비서가 조용히 들어와 다음 미팅 하실 분이 기 다리신다는 언질에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 집무실로 옮겨 자서전에 친필로 사인한 뒤 나에게 선물해 주셨다. 1930년생으로 회장님보다 한 살 어린 내 부친은 건강하신데 수전증이 있어 글씨를 이렇게 이쁘게 못 쓰신다는 말씀도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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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까지 직접 배웅하시며 다시 한번 리포그룹 어드바이서에 대해 고민해달라는 말씀과 내가 차를 탈 때까지 꼿꼿이 서 계시며 손을 흔드시던 그 모습은 평생 잊을수 없는 오늘의 배움이자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큰 방향에 울린 경종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쉽게 가시지 않는 놀라움과 흥분 속에 내 인생에 앞으로 4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요즘 나름대로 안주하려 했 던 나 자신에 대한 극도의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 오른다. 한국에 삼성 창업주인 이 병철 회장님을 내가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내 인생은 과연 또 어떻게 변했 을까? 교도소에 계신 이재용 부회장과의 만남과 추억이 교차하는 엄청난 감정의 소 용돌이에서 나는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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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는 영원한 ROTC ROTC / 배동선

교통사고가 난 것은 비자금 장부를 인계 받은 지 2주쯤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위 험한 사고가 일어날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운전사는 그날 출근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는데 짜꿍으로 들어가는 톨에서 바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뒷바퀴가요. 고속으로 달리던 중 앞바퀴가 터졌다면 내가 몰던 그랜드끼장은 뒤집히 거나 길섶 어딘가로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뒷바퀴 타이어는 거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스페어타이어를 갈았지만 더 이상 운행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난 출근을 포기했어요. 다음날 아침 출근했을 때 내 책상 서랍 열쇠가 고장 난 채 열 려 있었고 그 안에 두었던 비자금장부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어제 출근길 에 죽거나 크게 다쳤다면 아무 죄 없는 내 책상서랍이 막무가내로 뜯기는 일도 없었 을 지 모릅니다. 법인장은 무사히 출근한 내 모습에, 오히려 내가 위로해주고 싶을 정 도로 잔뜩 실망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퀴 모두 칼자국이 나 있었다구?” 그날 밤 날 술집으로 불러낸 자카르타 지사장이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 칼집을 낸 사람은 십중팔구 내 운전사겠지만 그 배후가 너무나 뻔했습니다. 적도에서 만나다 . 51


“법인장이 비자금으로 미리 빼 쓴 돈이 28만불이에요. 나도 월급장이인데 그걸 본 사 모르게 떠안으면서까지 공장 법인장이 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본사에 말하지 못 하도록 내 입을 막고 싶은 법인장의 깊은 앙심은 그 깊은 칼자국으로 충분히 알겠더 군요.” 그땐 지사장이 왜 내 편일 거라 생각했을까요? 8년의 터울이지만 같은 학군 생활 경험을 한 그 지사장 선배가 결국 입사 동기이자 6년 넘게 자카르타에서 함께 생활 한 법인장 편을 들 것이란 생각은 왜 하지도 않았을까요? 법인장이 날 죽이려 했는데 내 학군 선배마저 그 공범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라서요? 얼마 후 법인장이 나에 대한 ‘지사 근무 부적격 의견서’라는 것을 서울 본사에 보냈고 지사장도 거기에 동조하는 의견을 첨부해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술 마시며 그에게 털어놓았던 내 속마음이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내게 매우 불리하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난 나도 모 르게 자해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선배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뭘? 착각하지 마, 이 새끼야. 난 너 같은 후배 둔 적이 없어!” 그의 술값을 법인장이 몇 번 갚아주었다던 비자금장부 상의 기록이 그가 그토록 매몰차게 안면을 바꾼 이유였을까요? 그들은 이제 악의를 전혀 숨기려 들지 않았으 므로 그후 내 자카르타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아직 오지 축에 속하던 지난 세기의 일입니다. 못된 동료와 비열한 상사 밑에서 일해야 하는 것이 일부 직장인들의 숙명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과 일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내가 사표를 던지고 나 온 얼마 후 예의 살인교사 미수범은 본사에 복귀했다가 외환위기를 맞아 퇴직금의 다 섯 배를 받고 명예퇴직 했고 그 입사 동기는 우르무치 지사장으로 나가는 등 승승장 구했지만 결국 임원을 달지 못하고 퇴직합니다. 대기업이란 나같은 반골들도 용납하 지 않지만 구설수에 올랐던 직원에게 별을 달아 주지도 않는 법이죠. 그 학군 선배가 강남 어딘가의 오피스빌딩 지하 식당가에서 볶음밥 집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짐짓 날 알아보지 못한 척했고 나 역시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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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체 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드세요.” 내게 담아준 볶음밥은 다른 사람의 두 배쯤 되는 양이었는데 거기 그의 사과의 마 음이 담겼는지 그거 먹고 떨어지라는 뜻이었는지는 결국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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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사진이야기 / 조현영

지난 사진들을 뒤졌습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자주 헤매이는 내 몹쓸 버릇이기도 하지만, 사진 생활 중 함께 했던 그에 관한 것들을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여전 히 어설픈 사진을 찍고 다니는 나의 사진 생활 틈틈이 그가 끼여 들곤 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어느 날 사진 모임에 나타난 그는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섬세하고 자기 생각 과 감정을 조목조목 잘 이야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원들의 빵빵한 카메라들 틈에 끼여 똑딱이(콤팩트 카메라의 애칭) 들고 출사 쫓아다니 던 내가 인상 깊었단 말이라던가, 어설프게 찍어놓은 내 사진에 대해 남겨준 진심 어린 조언도 기분 좋게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때로 그는 내 사진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알아채기도 했습니다. 뜻밖의 동질감이었 습니다. 또 한 번은 혼자 유럽여행 중에 찍어 올린 내 사진을 보고 ‘서두르지 말라고, 천 천한 여행자의 걸음을 걷다가 마음에 들어올 때 사진기를 들라’ 던 댓글을 보며 아차, 고스란히 들켰구나 싶었습니다. 또 언제인가는, 조촐한 사진 출품회에서 내 사진과 얽 힌 어이없던 해프닝에 함께 열을 내고 심지어 대신 나서 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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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故박상훈님 flickr 페이지

치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는 세일러문, 아니 세일러Pak 같았습니다. 드디어 내가 똑딱이를 버리고 마지막 월급을 털어 첫 DSLR 카메라를 사던 날, 나의 삼식이 렌즈를 골라준 이도 그였습니다. 그의 자상함에 도움을 청했더니 기꺼이 시간 을 내어 의견을 보태주었습니다. 그 카메라 지금까지 잘 쓰고 있지요. 그는 사진만 봐도 누가 찍은 것인지 알 수 있는 자기만의 분명한 사진 스타일을 갖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사진 속에 속내를 드러내고 인생의 의미를 담 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 그는 요리 솜씨도 좋아 사진으로 뽐내기도 했었지요.. 그의 사진들도 좋았지만 거기에 담긴 그의 마음은 요즘 말로 고퀄입니다. 사진동호회의 모임이 자연스럽게 잦아들던 때에도 사진 전시할 기회가 있을 때면 적 극 참여하고 응원해 달라던 솔직한 그가 2012년 공동사진전을 하던 때에 말했습니다. ‘나에게 사진은 힘들었던 시절에 세상을 향해 잡을 수 있었던 끈이었고, 사진을 하면 서 여러 상황이 안정되어 갔고, 사진은 그 자체를 넘어 소중한 가치로 남아 있다’고. 오래오래 사진해서 10년 뒤에는 개인전을 하고 싶다고 꿈을 말하던 그가 너무 일찍 사진을 놓았습니다. 적도에서 만나다 . 55


벌써 1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의 부고를 듣던 날, 난 무엇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이 아파서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에 안심한 지 두 달만이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 떤 순간 그가 불쑥 떠오르곤 합니다. 함께 사진 활동을 했던 다른 이도 그렇다고 합니다. 카메라 살 때 도와줘서 고맙다고 내가 밥 산 건 잘 한 거 같아, 많이 아프다 했을 때 기어이 입원실로 찾아간 것도 잘 한 것 같아, 이사 간 사무실 좋다고 자랑할 때 화분 하나 들고 가 건승을 빌어줄 걸.. 오랜만에 반쪽이 된 모습을 봤을 때 더 힘차게 응원해 줄 걸.. 그의 멋진 사진들에 더 많이 박수 쳐 줄 걸… 인문창작클럽에 나를 추천해주어 고맙단 말을 그때 못한 것 같아.. 이런 무쓸모한 생각들이 카메라 만질 때면 스스륵 스쳐가곤 합니다. 그의 사진이 올려져 있는 사진 사이트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페이지가 아직 남아 있 습니다. 내 SNS 친구 목록에도 그의 이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는 떠났는데 그곳 에는 남아 있습니다. 그의 사진들을 넘겨 보다가 눈길이 머문 사진 몇 장, 주인 허락도 없이 가져와 그가 그려낸 빛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사진에 담긴 사람, 색, 분위기.. 당신의 사진인 줄 알아보겠노라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내 똑딱이에 찍힌 그의 뒷모습 (사진=조현영 /manziz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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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룡이와 다시 만나는 것 통 ,일 / 박준영

2018년 여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제 18회 아시안게임이 열렸습니 다. 아시아 최대 스포츠 대회를 개최한 인도네시아는 아시안게임에 큰 기대를 가졌 고, 대회 기간 중에는 온 나라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인도네시아에 거주 하는 한인들에게 이번 아시안게임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이 진전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남과 북은 이번 아시안게임 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개막식 에서 공동 입장했고, 3개 종목에 대해 단일팀을 만들어 출전했습니다. 저는 남북 단일팀이 출전한 종목이었던 여자농구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첫 경기 에는 단일팀을 응원하기 위해 많은 한인들이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상대는 개최국인 인도네시아였지만, 단일팀을 향한 응원의 열기가 뜨거워, 마치 우리나라에서 경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단일팀 경기에는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북측 동포들도 응원하 러 왔습니다. 약 40여 명 정도의 응원단이 여자농구 단일팀 전 경기 응원에 참석했습 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곳에 사는 북측 동포들이 인원을 나눠 단일팀 출전 경기와 북측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 응원에 나섰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남측 응원단과 북측 응원단은 쉽게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바로 옆에 앉 적도에서 만나다 . 57


아 응원했지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또 말을 걸어도 괜찮은 건지 몰랐기 때문입니 다. 서먹하던 분위기는 어린 아이들 간에 먼저 허물어졌습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말 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경계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서로의 장난감을 함께 갖고 놀고,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었습니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매개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북측 응원단에서는 한세룡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섯 살이고 이곳에 사는 북측 주민들 중 가장 어린 나이라고 했 습니다. 세룡이는 이곳에서 친구가 없어 늘 심심했는데, 경기장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 나니 늘 즐거워했습니다. 처음엔 세룡이 부모님은 세룡이가 남측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불안해했습니다. 함께 놀고 싶어하는 세룡이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여러 경기 응원에 함께 참여하며 더 이상 세룡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세룡이는 남측 응원단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경기 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세룡이와 나눈 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런 편견 없이 마 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며 따뜻한 분 위기를 만들어 준 세룡이가 귀엽고 기특했습니다. 세룡이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마음의 벽을 쌓고 서먹해 하던 어른 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이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필통 과 수첩을 주자, 그 수첩에 바로 남측 응원단 ‘이모’들 얼굴을 그려주었습니다. 다음 경기에서 세룡이 부모님은 세룡이가 며칠 만에 그 수첩을 다 썼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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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두 달 정도 지 났지만, 아직도 세룡이가 문득 생각납니 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세룡이에게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사주고 싶습니다. 세룡이와 여자농구 단일팀 마지막 경기 에서 다음에 또 보자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는 쉽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 았습니다. 하지만 축제였던 아시안게임 이 끝나며 우리 만남도 모두 끝났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살며 만나자는 약 속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같 은 민족인 세룡이와 북측 동포들입니다. 우리는 가장 닮아 있기에 지금까지 다퉜 던 걸까요? 그들을 직접 만나보니 우리 의 농담도 모두 이해하며 웃고, 먹는 간 식을 보니 입맛도 같았습니다. 70년 전, 딱 하나 달랐을 뿐인데 그 차이로 싸우고 난 후, 우리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만나고 싶은 사람 한 명씩만 있다면 통일은 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통일을 꿈꾸는 것이 그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이라면 지 금처럼 통일이 여러 문제 속에 매몰되어 있을까요? 제게 통일은 세룡이와 다시 만나 는 것입니다. 어서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되어 세룡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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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의 가정부 유 ,모 , 운전기사는 어떠신가요 ? - 인도네시아 사람 관리를 위한 합리적인 매뉴얼 필요하다 / 김순정

인도네시아로 이주하면서 나를 웃게도 만들고 힘들게도 만드는 새로운 사람들(?) 이 생겼다. 바로 가정부(Pembantu), 유모(Suster), 운전기사(Sopir) 그들이다. 한국과 달 리 인도네시아에 살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저렴한 인건비로 그들을 고용할 수 있 다는 것. 17,000개 섬에 다종족이 퍼져 사는 인도네시아는 다양한 종족과 만나며 삶 을 영위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가사노동을 해주는 가정부, 유모, 운전기사를 쓰기 위해서 중산층 정도면 그들을 고용하여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게임을 2번이나 치르고 올림픽까지도 넘보고 있지만 아직도 다른 동남아시아 나라처럼 중산층 이하 국민들의 소득과 삶의 질은 매우 떨어진다. 그런 탓에 저소득층 현지인들은 인도네시아 거주 외국인 집에 일자리 찾고 한국인은 본국에서는 쉽게 쓰지 못하는 그들을 고용하면서 살아간다. ‘가계 고정지출’이 발생하지만 그들을 고용하지 않으면 더운 나라에서 생산적인 일과 효율적인 비즈니스를 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날씨도 덥고 낙후된 도로와 대중 교통시설로 현지 도로 사정에 익숙한 운전기사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집안의 청결 유무가 아내의 몫이지만 여기서는 가정부가 대신한다. 그 덕분에 나는 아이 둘을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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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하면서도 매일 아침 컴퓨터를 켜고 한국과 일을 할 수 있고 가끔은 책도 읽고 쇼핑 몰이나 슈퍼마켓에서 장도 보고 수월하게 음식 준비도 한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발 령받은 주재원이나 사업하시는 분들의 아내들은 ‘올 때는 오기 싫어서 울지만 갈 때 는 가기 싫어서 운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인도네시아에서 행복한 생 활을 위해 없으면 불편한 그들. 호불호가 갈리는 그들은 정말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사람이 잘못 들어오면 없을 때보다 더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 도네시아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피할 수 없다면 합리적인 그들과의 공생공존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에 없었던 새로운 인간관계! 현지인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그래서 인도네시아로 이주하거나 정착하기에서 꼭 한번 겪어야 할 일이 있다면 현 지인 가정부 유모 운전기사와의 관계에 잘 적응하는 일이다. 나 역시 그들을 고용하 면서 그동안 한국에서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긴 셈이다. 나는 한국에서 는 경험해보지 못한 이 인간관계를 지혜롭게 잘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가족처럼 편 한 관계로 대할까? 아니면 ‘상하 관계처럼 대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출퇴근하는 운전기사를 제외하곤 가정부와 유모는 한 지붕 아래 같은 공기 마시며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보다 더 자주 보면서 얽혀서 지내니 아무 생각 없이 대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 다. 타국에서 행복한 삶을 배가시키려면 현지 사람들과 아름답게 공생 공존하려는 노 력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 기 위해서 관련 서적부터 열심히 찾아서 탐독하였다. 어떤 편견도 없이 그들과 소통 하며 객관적으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인간적인 관점과 문화적인 관점 그리고 신앙적인 관점, 비즈니스적인 관점 등 종합적인 프레임을 고려해서 그들을 바 라보려 노력했다.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 손님인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다가가기 내가 인도네시아에 처음 와서 놀란 것은 입주식 가정부 방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무리 남의 집에서 일한다지만 쉬고 잘 곳이 너무도 협소하고 열약했다. 식사할만한 작은 식탁조차 없고, 정수되지 않은 찬물로 목욕해야 하는 더욱이 이 더운 나라에서 적도에서 만나다 . 61


에어컨 설치는 꿈도 못 꾸는 그들의 강퍅한 삶.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인도네시아에 대 한 문화적인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성 인권 차원이든 말로만 듣던 동남아 여성들 의 열약하고 팍팍한 삶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였든 같은 동시대를 저렇게 산다는 것이 마음 아팠고 그들에 비해 풍족하게 사는 나는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마저 밀려왔다. 내가 만난 가정부와 유모들은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남 의집살이’를 강행한 어린 소녀부터 이혼 후 혼자되어 가장을 대신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학비를 벌기 위해 나온 그녀들까지 그 사연들도 정말 구구절절 다양했다. 지금 도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아침에 청소할 때마다 무엇이 그리도 신나는지 예쁘게 화장을 하고 당둣(Dangdut) 노래를 흥얼거리던 능글스럽지만 유쾌했던 오자. 한국의 포대기인 겐동(Gendong)을 능숙하게 착용하고 와르떡(Warteg) 음식의 진수를 선보였던 에띠. 피곤한 날은 만병 통치약 카유풋 오일(Cajuput

oil)을

바르고 동전으로 끄로깐(Kerokan)을 즐겼던 띠니.

귀신이 무서워서 매일 밤 불을 켜고 잠이 들었던 애미. 한식이 낯설어 동치미를 국으 로 알고 팔팔 끓이고 양념에 재워둔 생소고기를 스시처럼 접시에 담아왔던 이나까지. 실상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불행할 것이라는 나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그들은 항상 밝고 낙천적이었다(한국에서의 바쁘게 살다 온 나로서는 결국 인도네시 아식 친절과 그들의 미소에 반해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엄청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도 잘 견디는 참을성과 인내심은 세계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이 다. 아무리 더워도 어려서부터 착용해 온 히잡을 쓰며 가정을 책임지고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성이 많고 또 더운 나라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부지런하다. 평균 기상 시간이 새벽 5시이다. 더욱이 먼저 화내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으니 참 신기할 노릇이다. 또한 대부분 자신이 가진 이슬람 종교를 중시하여 하루에 몇 번씩 기도를 드리며 하루에 2번씩 목 욕으로 자신의 몸을 소중하고 청결하게 다룬다. 쁠란 쁠란(Pelan Pelan)~묵묵히 인내 할 줄 아는 사람들. 자유로운 영혼으로 현재를 즐길 줄 알아 큰 땅만큼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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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로는 목숨보다 소중한 돈 앞에서는 정말 약한 그들이다. 교육률이 낮아 서인가. 아니면 이슬람 종교로 인해 많이 소유한 사람의 물건을 함께 나눠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외국인을 대하는 사회 인식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범죄인지 기본적인 부분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 그래서 성질 급하고 이해관계를 분명히 따지는 한국인들은 그들과 지내면서 많 은 답답함과 속상함을 호소한다.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그들과 오랜 시간 일해 온 나 의 친한 지인이 한 말이 기억난다. 인도네시아 사람과 가까이서 함께 일을 해보니 그 들만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첫째, 너무 느리다. 뛰어오라고 해도 뛰지 않는다. 둘째, 피니쉬가 어렵다. 끝마무리가 잘 안 된다. 셋째, 한국 사람과 일하면 다 한국 사람이 돈을 투자하는 줄 안다. 넷째, 나쁜 말은 하지 않는다(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까 해서). 다섯째, 식민지 근성이 있어서 그런지 시키는 일만 잘한다. 결 국엔 창의력이 없고 일의 성장 발전 가능성이 적다는 소리로 받아들여진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와 가치관과 마인드와 경험이 달라도 너무 다 른 그들이다. 나는 반대로 궁금하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어떤 점들이 좋고 불편한지를 말이다. 내가 아는 그들은 한국 K-POP 정도는 이 해하고 대체로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인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 화’에 대해서는 좀 버거워하는 눈치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서 좀 더 생각해보고 어찌 보면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문제에 봉착하다: 어디까지 이해하고 케어(Care)할 것인가? 나도 그동안 가정부와 유모와 운전기사 때문에 몇 번의 피해를 겪었다. 물론 일을 하기로 결정이 나면 안정성 확보를 위해 KTP(인도네시아

주민등록증)

사본을 받아두지

만, 막상 피해가 생겼을 때는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호소할 길은 경찰을 부르 는 일인데 인도네시아는 경찰이 오히려 더 큰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는 것은 모두 알고 계실 것이다. 그래서 피해가 발생해도 ‘해외에 사는 기회비용이다’ 생각하고 스 스로 안위하고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한인 신문고’라도 개 설되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런다고 해결이 될 문제는 아니지만, 치안이 불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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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이 많은 이 나라에서 ‘한인 신문고’라도 생기면 ‘한국인들은 그런 공동체가 있 다!’고 입소문이라도 난다면 조금이라도 방지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잠깐 해 본다.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 현지인 적응 능력지수’를 높이려면 사람과 상황에 따라 두 가지 태도를 균형 있게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첫 번째는‘가족경영 스타 일’로 대하는 것이다. 기존 고정관념을 조금 벗고 그들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업무 효율성 위주의 고용주와 피고용인으로 지내는 것이다. 사회 생활 하듯 비즈니스 협력자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태도가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해 나의 동거인들과의 관계개선 유지를 위해 조금씩 적용해 보았다. 그들과 공생 공존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Action 1. ‘가족경영 스타일’ : 고정관념을 깨고 조력자로 대하기 나는 그들에게 월급을 주지만 기본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 비 용으로 그들을 쓴다는 것은 큰 행운이자 기회인지도 모른다(그들이 일반규범과 도덕 적으로 어긋나는 딴마음만 먹지 않고 좋은 사람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나는 어차피 그들에게 ‘뇨냐(Nyonya)’라고 불리는 타국에서 온 매달 월급을 주는 안주인에 불과하지만 서로 통하고 공감하고 서로 가지지 못한 것을 나눌 때 행복은 배가되고 서로가 성숙할 수 있는 배움의 길로 인도한다고 나는 믿는다. ‘프랜드 십’이든 ‘가족 같은 마음’이든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일지라도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관계로 남길 바란다. 나의 인도네시아 동거인들은 단순히 가사노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든든한 지킴이 이자 조력자로 일인다역을 충분히 해준다. 이방인인 나보다 인도네시아 사회에 대해 서 더 많이 이해하고 또 나이 상관없이 격의 없이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문화인 탓에 정보에도 능한 편이다. 또 아파트 매니지먼트에서 사람이 찾아왔을 때나 불청객이 찾 아왔을 때나 나를 대변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또 여행지 놀러 가서나 장을 보러 가 면 나를 대신해서 물건 값을 흥정해 주는 중계자 역할도 해준다. 이렇게 함께 매일 부 딪히면서 나의 일손을 도와주는 그들에게 공과 사를 딱 정해서 선을 지어 대하기 어 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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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현실이라도 기왕이면 그들을 존중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을 새로운 가족처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식구처럼 여기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불편함이 없었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잘하는 그들에게 나 역시 그들의 남편(아 내), 아이들, 남자(여자)친구까지 관심을 가지고 챙겨주었다. 가족이란 같이 식사를 하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는 공동체 아니던가(나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 들은 정이 많아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잘하는 편이라 생각한다).

가정부, 유모와 함께 만든 소또아얌과 른당

가정부 에까(Eka)와 유모 미니(Mini)는 정직하고 성실해서 내가 가장 신뢰했던 이 들이다. 그녀들은 정말 동생들처럼 대하는 친구들이다. 람뿡(Lampung) 시골 출신으 로 그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자카르타에서 일하면 백만 루피아 정도 더 받을 수 있기 에 먼 자카르타 행을 감수했다. 그녀들은 식사 때가 되면 대충 와르떡의 길거리 음식 이나 인도미 라면을 사다가 세끼를 해결하였다. 나는 인도네시아 식사를 준비할 때 면 함께 템뻬 고랭, 른당, 나시고랭, 미고랭, 소또아얌 등을 만들어 먹자고 제안했다. 그중 한 명은 음식 솜씨가 좋아 평소에도 인도네시아의 향신료와 음식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 인도네시아 음식을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요리법을 알려주었다. 그녀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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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함께 하는 나들이와 회식

서 인도네시아 음식이 다채롭고 강렬한 맛이 가득하다는 것을 더욱 느꼈다(사실 제대 로 된 요리라기보다는 붐부 뻔예답(Bumbu Penyedap) 즉, 조미료를 굉장히 많이 사용 해서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반대로 나 역시 그녀들에게 삼계탕, 불고기, 잡채 등을 할 때는 일부러 넉넉하게 장을 보다가 직접 음식을 해주었다. 한국 과자나 라면도 즐 겨 먹을 수 있게 하였다. 한국에 다녀올 때면 작은 선물이라도 사다 주었다. 처음에는 뇨냐가 해준 음식을 먹기를 불편해하고 미안해하더니 이내 익숙해졌는지 곧잘 먹게 되었다. 그녀들이 피곤해할 때면 남편과 나는 비타민이 든 영양제를 챙겨주었고 감기 에 걸리면 한국에서 사 온 감기약도 건넸다. 함께 살면서 그녀들의 건강까지 염려해 야 하니 이게 가족 아닌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따듯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더니 더 열심히 일해준 것은 물론이고 고 스란히 사랑과 감사로 되돌아왔다. 쭈띠(Cuti)로 고향에 다녀올 때면 빈손으로 올 수 없다며 끄르뿍(Kerupuk)이나 간단한 그들만의 별식을 선물로 건넸다. 또 자신의 가족 들이 자카르타에 오면 일부러 인사하러 찾아오곤 했다. 자신들의 상황이 더 빠듯할 텐데 나까지 배려하는 마음이 값어치를 떠나서 타국에 사는 기쁨과 소소한 행복감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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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경영 스타일 Tip> 1. 그들도 진심으로 대하면 진심으로 대한다.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말과 태도’로 전해지는 것이다. 2. 함께 먹는 데서 정이 생긴다. 함께 음식도 만들어 먹고 가끔 외식도 같이 해보자. 3. 일정 금액 내에서 가족이 아플 때나 결혼을 할 때 지원하기 4. 대화의 공통점을 찾아서 그들의 사생활을 조금씩 공유하기. 함께 인도네시아 TV 를 시청하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민심을 알 기회도 된다. 5. 나에게 불필요한 것은 아낌없이 기증하기. 크기가 맞지 않은 옷이나 방치된 주방 도구들, 아기용품 등을 기증한다. 6. 그들의 환경을 개선해 주자. 그들의 베개나 이불 등을 시원한 것으로 챙겨주는 등 배려심을 가져보자.

Action 2. 고용주와 피고용인으로 지내기: 권위적 관리자 모드로 대하기 위에서의 경우처럼 그들과 서로 좋은 영향을 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지 만, 대부분은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본 태도가 안 되어 있거나 도덕적 결함으로 실 망인 경우가 더 많다. 인도네시아식 친절에 때론 감동이지만 때론 사람 속을 알 수 없 게 만들거나 무책임하게 행동한 경우이다.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절하다가도 자신 의 상황이 바뀌면 의리가 정말 없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의리’라는 단어 는 인도네시아처럼 다민족이 사는 나라에서는 오히려 불편한 코드라는 생각이 들 정 도였다. 만약 당신이 성향이 좋지 못한 현지인과 동거해야 할 상황이라면 단호하게 그들과 고용주와 피고용인으로 대면하면서 지낼 필요가 있다. 한순간 그들이 절도범으로 돌 변하여 더 악화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잘 대해주 었는지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부는 그들이 가난하고 정식 교육을 덜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하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이 땅의 주인들이고 우리가 그들의 땅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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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돈 주고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모르면 잘 가르쳐주고 잘 대접해 주면서 원리 원칙하에 기준을 세우고 권리와 의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물론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대비하고 방지책을 세우는 것은 필요하 다. 한국인들은 이런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사전에 막아 보자 해서 <인니 tip> 밴드가 운영되고 있으나 갈수록 세상이 험해져서인지 인도네시아 거주 한국인들이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아무래도 금전적인 부분에서 손해가 발생 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피고용인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어서 일상이 가불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때가 되면 ‘누가 아프다, 아이의 학비를 내야 한다, 오토바이가 고장 나 서 바꿔야 한다’ 등의 이유로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한다. 그럴 때는 모르는 척할 수 도 없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또 무한정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말없이 결근하는 운전기사는 출근 못 하는 이유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변 명한다(변명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다 똑같은 모양이다). 고용 관계 내용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개인 사정만 요구한다. 출근한 지 며칠 안 된 운전기사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며칠 쉬게 해주고 백만 루피아의 조의금까지 주었더니 바로 그만 두거나 또 핸드폰을 분실했다고 해서 잠자고 있는 핸드폰을 빌려주었더니 그다음 날 부터 잠적까지 한 적이 있다. 무방비 상태의 한국인들은 언제나 작게는 집안의 수저부터 핸드폰, 귀중품, 자동 차 분실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불안하다. 특히 간이 큰 회사 직원들은 회사 의 공금까지 횡령하니 이 정도면 ‘외국인은 호구인가? 기본적인 양심은 있고 부끄러 운 줄은 알까? 죄책감이라는 것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때로는 그들이 감정표현을 안 해서 힘들 때가 있다. 좋게 보면 온순한 것이지만 그 들이 네, 네(ya ya) 해도 겉과 속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적정한 대응을 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자바 정신이 그들의 행동 양식이자 미덕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대화의 기술 이 서툴거나 자신의 상사에 대해서 진심 어린 대화를 꺼리는지도 모르겠다. 고용주가 피고용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월급을 받은 그다음 날, 야반도주를 감행한 가정부와 처음에는 순하고 참한 유모였는데 애인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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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돌변하기도 했다. 또 한국 가전제품 작동법이 너무 어려워서이었을까. 그들이 잘못 사용해서 고장 난 물건들에 대해서 정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인도네시아 땅과 인도네시아 사람을 사랑하지만 정말 상실감이 찾아온다. 이렇듯 사람을 잘못 고용하면 잠깐 몸은 편할지라도 그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대단하다. 한집안에서 감시할 대상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힘든 일인가. 그래서 ‘가정부 복, 유모 복, 운전기사 복’ 있는 사람이 인도네 시아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 중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실감 한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스타일 Tip> 1. 처음 왔을 때, 신입사원 워크숍처럼 한국인 집에서 일하는 데 지켜줘야 할 것들 을 매뉴얼을 만들어 설명하자. 또한 그들의 신상정보를 참고하여 특징을 이해하 려고 노력해야 관리를 위한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될 것이다. 2. 우리 가정에 맞는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 보자. 감정적인 대응이 아닌 객관적인 대 응을 하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일하는 시간을 정확히 지켜 달라. 비용 지출 시에 는 반드시 영수증 첨부를 해야 한다 등을 기재해 둔다. 3. 업무일지 작성하기: 유모에게는 아기 우유 먹이는 시간대와 변을 본 횟수 등을 기 록하게 한다. 운전기사에게도 출퇴근 및 특정 지출 사항을 노트를 기록하게 한다. 4. 그들과도 소통은 통한다. 가정에서든 회사에서든 직원과의 소통은 기본이다. 소 통은 업무 효율과 성장을 배가시키기 위한 기본이다. 5. 월급과 휴가를 정확하게 관리한다. 또한 매달 월급 및 보너스 지출 현황을 기록해 둔다. 입사일과 퇴사일은 물론이며 가불현황이나 휴가를 간 날은 물론이고 식대 등도 기록해둔다. 6. 그들의 장점을 찾아서 칭찬해주기. 그들도 잘하는 게 하나씩은 있다. 사람마다 장 기가 다 있으니 그것을 자주 칭찬해주면 그들 스스로 능력 발휘를 할 것이다. 7. KTP 사본 외에 <가족관계증명서> 작성하기. KTP 사본만으로는 사고가 났을 때 대처가 미흡하다. 입사할 때 미리 <가족관계증명서>를 만들어서 그들의 실 거주 주소지와 가족들의 연락처까지 확보해두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사실관계만 남음 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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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 벽지 오지의 섬에 희망을 / 이강현

이번엔 NTT(누사뚱가라 띠무르)에 간다. 인도네시아의 주 가운데 하나로, 서티모르를 포함한 소순다 열도 동쪽에 위 치하고 있고 주도는 서티모르에 있는 도시인 쿠팡이며 인구는 5백만 명, 면적은 47,876km²이다. 누사틍가라 티무르 주는 약 550여 개에 달하는 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플로레스 섬과 숨바 섬 그리고 티모르 섬의 서쪽 부분인 서티모르 3개의 큰 섬이 있다. 참고로 티모르 섬의 동쪽 부분은 독립 국가인 동티모르의 영토이다. 자카르타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발리에서 트렌싯을 하고 NTT에 주도인 쿠팡시 (Kupang)에

도착했다. 동티모르, 호주와 해역으로 국경이 맞서는 인니 최남단의 주이

다. 쿠팡엔 딜러 방문차 두 번을 방문 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공항에서 3시간 트렌 싯해서 플로레스 티무르(Flores Timur)군 소재지인 ‘라란뚜까(Larantuka)’로 간다. 말로만 듣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플로레스 지역 방문이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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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가올지 기대감에 3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 같다. ‘TransNusa’라는 로칼 비행기로 1시간 정도 걸려 ‘Larantuka’에 도착했다. 이곳은 어떤 곳일까? 구글링을 해보니 16세기 포르투갈 식민지로 카톨릭이 인도 네시아에 처음 들어왔던 곳이고 인도네시아에 바티칸이라 불려지는 곳이란다. 역시 인도네시아는 Bhineka Tunggal Ika(다양성 속의 통일)의 나라이다. 도착한 공항은 넓은 활주로나 그럴싸한 공항 건물과는 거리가 먼, 시골의 작은 운 동장에 덩그러니 지어진 우리 집보다도 작은 건물이 전부인, 내가 가본 인도네시아 공항 중에 제일 작은 아담한 곳이었다. 이젠 숙소를 확인할 차례다. 작년에 빠뿌아에 시골 숙소에서 침대가 너무나 지저 분해 꼬박 앉아서 밤을 지샜던 기억으로 약간의 공포감이 밀려온다. 이런! 나름대로 깔끔하고 방에 에어컨과 소형 TV, 온수가 나오는 바닷가 옆에 자리잡은 아담한 숙 소, 기대 그 이상이다. Bupati(군수)와 세레모니를 위해 간단한 샤워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군수 집무실 또한 아주 소박했 다. 동네 주민과 군청 직원들이 삼성 현수막으로 치장된 오픈식 행사장으로 모여 들었고 삼성전 자 CSR활동의 일환으로 전기가 들어 오지 않는 지역에 태양광 렌 턴 1,500개를 기증하러 왔다는 취지가 소개되고 군수에게 렌턴을 전달하는 사진을 찍은 후 ‘Nasi Kotak’으로 초대한 손님들과 저녁을 때웠다. 큰 섬이어서 해산물 가득한 저녁을 기대했던 난 너무나도 조촐한 식사에 약간의 실망을 했지만, 이런 소박한 저녁이 오히려 기부하러 온 나에겐 맞는 취지 같다는 생 각에 볶은 야채에 묻혀진 작은 멸치 맛으로 해산물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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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 앞엔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핸드폰 가게가 서너 개 자연스레 내 발길을 잡 는다. 삼성이 제일 잘 팔린 단다. 이 시골 도시에서도. 숙소에 돌아와 밀린 업무를 하고 낯선 침대에서 애써 잠을 청해 본다.

인도네시아 이슬람 최초 상륙지 ‘Pulau Solor’ 카톨릭과 크리스챤이 대부분인 NTT 지역의 작은 섬이 이슬람 최초 상륙지였다 니, 호기심을 안고 ‘Solor’ 섬을 향해 작은 배에 올랐다. 한 시간 남짓 걸린단다. 우리 가 도착하는 선착장 쪽에는 카톨릭 마을이고 섬에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부분이 이슬 람지역이지만, 서로간에 종교 갈등 없이 잘 융합해서 지낸다고 한다. 작은 선착장에 배를 정박하니 이 지역에 4대 종족의 족장이 모두 모여 우리 일행 을 맞을 특별한 세레모니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섬에 들어 오려면 일단 준비해 둔 날카로운 전통 무검으로 단 한번에 준비한 대 형 화분에 나무줄기를 베어 내고, 이 섬에서 만든 전통 밀주 한 컵을 들이 마시고, 전 통 담배를 한 개비 피워물고 전통 과자를 하나 먹어야 한단다. 어설펐지만 시키는 대 로 그들의 의식에 맞추어 틀리지 않고 잘 해내었다. 환영 표시인 전통 무사의 강렬한 비트의 춤으로 나를 호위해 준비된 조촐한 식장으로 향했고 건장한 체구에 면장과 태 양열 렌턴 전달식을 가졌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만나는 그 어느 장관들보다도 이 시 골 오지 섬에 면장의 환영사는 너무 아름답고 정성스러워 한국인으로 처음 방문했을 거 같은 이 섬에 한순간에 애정이 듬뿍 실리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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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Ibu kartini’를 만나다 인도네시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거나 제한 송전을 하는 곳이 아직 많이 있 다. 그 중에서도 작년에 빠뿌아에 이어 이 지역을 선택하게 된 건 인니 사회적 기업 ‘Do'anyam’을 통해서이다. Do'anyam은 인도네시아어로 anyam은 바구니나 천을 짜다라는 뜻이고 Do'a는 Ibu라는 지방 언어로 바구니를 만드는 여인이란 뜻이란다. 난 Do는 'Let's Do it' 에 줄임 말로 '자, 바구니를 만들자' 란 뜻으로 해석했건만. 인도네시아 3명의 젊은 여성이 이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고 그 중 한명이 이쪽 ‘플 로렌스’ 지역 출신이어서 이 지역에 여성들에 생활고를 지원하기 위해 지역 특산물 인 야자수 같은 ‘Pohon Lontar’의 넓은 잎으로 엮어 짜서 전통 바구니를 만드는 가 내 수공업 방식을 이 지역 여성들에게 교육시켜 제작, 국내외로 판매하고 그 이익금 을 돌려 주는 사회적 기업이다. 난 이 기업을 3년째 후원해 오고 있고 당연히 전기 공 급 사정이 안 좋아 생산성이 떨어지다 보니 우리에게 Flores 지역에 렌턴을 나누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래서 올해는 이쪽 지역에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렌턴 전달식을 마치고 3명의 대표 중 하나 인 Ibu Ayu 안내로 마을에 있는 ‘Do'ayam’ 작업실을 둘러 보았다. 동네 아줌마들이 각자 집에서도 작업을 하지만 염색 및 자재가 준비 되어있는 공동 작업실이 각 지역마다 있다고 한다. 지역 여성들은 일거리와 경제적인 지 원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며 밝은 미소로 우릴 맞아 주었고 이번에 로마까지 수출한 제품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Ayu는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비리그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한 수재다. 그런 그가 3 명의 창립자 중에 하나인 중학교 친구 ‘Hana’ 의 고향인 Flores 지역에 봉사를 하려 그 어렵 적도에서 만나다 . 73


다던 미국 체류 비자를 만들어 준 회사를 1년 만에 때려 치우고 고국으로 돌아왔단다. 할아버지는 오래전 지방 관료 출신이고 아버지는 Pertamina 주유소를 하고 있어 유복하게 엘리트의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할진데, 소외된 지역의 여성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생각하고 이 산간 지방에 섬들에 쪽잠을 청하며 오토바이로 돌아다닌다 는 이 친구는 얼마 전 하버드대 동문인 남자 친구와 신혼 살림을 시작했고 남편은 자 카르타에서 최고 직장인 메켄지 컨설팅에 다닌단다. 인니의 여성 지위 향상에 힘쓰며 민족운동가였던 인니 여성의 대모 ‘Ibu Kartini’ 가 한 그레이드 업그레이드 된 듯한 밀레니엄 Kartini ‘Ibu Ayu’에게서 오늘 또 크 나 큰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도착할 때 환영의 의미로 준 전통 술 담그는 곳에 찾아가 보았다. 말 그대로 끌라 빠 나무 같은 데서 열린 열매를 짜서 움막집에서 불을 때서 한 두 방울씩 담아내서 만 드는 전통주인데 알코올 도수를 체크해 본 적이 없다 해서 내 입맛으로 측정한 결과 소주보단 약간 강하고 고량주보단 약해 25% 정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 오래된 이슬람 사원이 섬 안에 있어 방문하고 싶었으나 두 시간 넘게 가야 한다고 해서 섬에 2대 있다는 소형 차량 중에 한 대로 해안에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 걸려 돌 아보았다. 달리는 모든 섬의 귀퉁이가 전부 관광지 개발이 되어도 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백 색 모래가 뒤덮인 해변도 눈에 들어왔다. 이 많은 관광 자원을 국가가 개발하긴 힘들 겠지만 이 나라에 큰 기업들이 서로 나서서 각 섬에 관광 자원을 개발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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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쪽 ‘Flores Timur’ 지역은 이슬람, 크리스찬, 카톨릭이 다툼 없이 잘 융합 해서 사는 아름다운 지역이고 원주민과 포르투갈인에서 섞인 혼혈 등이 많아 충분한 관광지로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물살이 거칠어지기 전에 서둘러 다시 배를 타고 'Laratuka'로 돌아와서 ‘Bukit Fatma’라는 성당이 있는 곳을 방문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 언덕길에 멋진 오픈형 성당이 지어져 있고 언 덕길을 돌아 12개의 성소가 예수의 고난을 체험하도록 지어져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네시아 카톨릭 신자들에 방문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멀지 않은 곳 해변가에 천연 온천 지 역을 방문해서 돌무덤 사이를 해치니 엄 청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 난다. 바닷가 해변가에 산에서 내려오는 온천수에 발 을 담그고 지는 해를 바라 보니 이 또한 또 하나의 천국이 아닌가 싶다. 이 지방 전통 음식인 아주아주 신 생선국으로 저녁을 때우고 Flores 커피로 마지 막 밤을 아쉬워하며 호텔에 돌아 왔다. 오늘 내가 출현하는 ‘CEO Forum’이라는 Metro TV 프로그램을 Flores Timur 작은 시골 숙소에서 시청하고 있는 내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잠을 청했지만 밖에서 들려 오는 파도 소리에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 오늘도 어느새 운명이 되어 버린 그 넓고도 다양한 인도네시아의 또 한 자락에서 만난 또 다른 새로운 내일을 개척하는 밀레니엄 Kartini ‘Ibu Ayu’가 Kartini처럼 짧은 생을 마감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의 미래를 위해 봉사할 수 있 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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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열대우림에서 터를 닦은 그들을 기억하며 ... / 조연숙

하늘과 비와 나무만 있는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은 그의 일터였습니다. 깔리만딴, 빠 뿌아, 수마트라… 숲이 있는 곳에는 그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국제선 항공기를 타고 홍콩을 거쳐 자카르타에 도착한 뒤 국내선 항공기를 갈아타고 반자르마신이나 빵 깔란분으로 갔습니다. 지방도시에서 출장소나 캠프로 갈 때는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항 공기를 타기도 하고 스피드보트를 타고 바다와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빠뿌아 주 머라 우께 시에서 아시끼 캠프로 가려면 나무의 바다 사이로 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중간 에 300개가 넘는 나무다리를 건너고 개미가 진흙으로 쌓은 2~3미터 높이의 개미집이 널려 있는 초원을 지나서 밭에 양배추가 가지런하게 자라는 이주민촌을 지났습니다. 멧돼지와 캥거루, 사슴 같은 산짐승들이 그가 탄 차를 빤히 쳐다보던 장면도 생생합니 다. 어떤 때는 자카르타에서 부임지까지 가는데 닷새가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깔리만딴 섬 남부에 위치한 반자르마신 시에 있는 출장소와 숲 속 캠프를 오 가며 일했습니다. 그는 빠뿌아 섬 중부에 위치한 아시끼 본부와 머라우께에 있는 출 장소와 숲 속 캠프를 오가며 근무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가족과 떨어져서 가족 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캠프에서 살았지만 더운 오지에서 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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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과 열악한 시설과 부족한 물자와 씨름하며 생활하는 아이들과 부인에게 미안한 마 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산 속에서는 근무일이 월화수목금금금이고, 휴무일은 비 오는 날입니다. 특히 우 기에는 비 오는 날이 많아서 날씨가 맑으면 설날과 크리스마스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 았습니다. 한국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신선한 채소와 고기를 구하기 쉽지 않아서 멧 돼지, 타조, 사슴 고기도 먹었습니다. 보신용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그 는 매년 회사가 지급하는 작업복 2~3벌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숲 속과 비 포장도로를 다니다 보니 옷도 신발도 흙투성이가 되기 일쑤이고, 빗물을 모아서 사용 하거나 강물을 퍼서 빨래를 하다 보니 말끔한 옷은 기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1979년. 그는 회의에 참석하거나 장비나 식품을 가져오기 위해서 캠프에서 스피 드보트를 타고 출장소에 갑니다. 며칠 전에는 반자르마신 출장소에서 열린 동료 결혼 식에 참석했습니다. 본부장님이 주례를 맡았고 출장소장님이 사회를 보셨고 부인들 이 잔치 음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에 취업이 돼, 애인을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왔다고 하네요. 신부는 한국에서 웨딩드 레스까지 챙겨왔더라구요. 1997년. 그는 아시끼 본부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 바로 도착한 직원 부인이 다 른 직원들을 초대해 한국에서 가져온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 소식도 전했습니다. 회식에 참석한 직원 중 한 명이 휴가 다녀오며 비디오 카 메라를 사왔다고, 가족들에게 하는 인사를 동영상으로 촬영해 그 부인이 돌아가실 때 전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한 사람씩 촬영을 하는데 찍히는 사람도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렇게 몇 명이 지나고 그의 순서가 되자 그 도 가족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며칠 뒤 부산에 있는 가족들이 동영상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고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가족들은 그에게 전화를 좀 자주하고 상냥하게 말하라고 하지만 국제전화를 하려 면 차나 스피드보트로 서너 시간을 나가서 출장소에 가거나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특 별한 업무 없이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시콜콜 이야기하기에는 전화비가 너무 비싸고, 간단히 하려고 하니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서 내용이 연결이 안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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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족들 목소리만 들어도 목이 메여서 이를 감추려다 보니 말소리가 퉁명스러워졌 습니다. 산 속에서는 한국 텔레비전 방송과 신문이 덜 신선해지고 더 중요해집니다. 그는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된 채 온 한국 드라마와 뉴스를 저녁마다 반복해서 봐서 대사를 외울 정도이고, 한 달에 한두 번 몰아서 오는 신문은 다음 신문이 올 때까지 지난 기사 를 읽고 또 읽습니다. 그는 한국 휴가 때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틈틈이 나 무토막을 깎아 조각을 합니다. 서툴지만 함부로 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1997년. 자카르타에서는 루피아 환율이 폭등했고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가 파산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뭔가 들썩이는 데 그에게는 먼 이야기 처럼 들립니다. 오히려 사상 최악의 가뭄과 산불이라는 보도가 더 와닿습니다. 싱가 포르와 깔리만딴에서는 연무로 호흡기 환자가 급증하고 항공기도 결항하기 일쑤라고 했습니다. 빠뿌아 지역에서도 산불 영향으로 하늘이 뿌옇고 메케한 연기가 공기 중에 섞여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직원들과 한국인 거주지역까지 산불이 번질 경우 탈출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한국에서 그에게 소식이 왔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갔고 딸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 했습니다. 아들은 취직했고 딸은 시집을 갈 예정이니 휴가 나올 준비를 하라고 했 습니다. 부모님께 월급을 관리해 달라고 보냈더니 동생이 사업한다고 다 써서 없다고 했습니다. 월급 모아서 집을 사고 관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아버지 명의로 했더니, 형제들이 아버지 명의 재산이라고 유산을 분배해 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있 는 부인이 투자를 잘못해서 재산을 모두 잃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부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오지에서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다가 병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퇴직해서 집에 가니 가족들이 낯설고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 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서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에 왔습니다. 가족들 생활비, 아이들 학비, 부모님 병원비, 부부의 노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그는 산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도 모르고 일했습니다. 1~2년에 한 번 한국에 휴가 가면 너무 빨리 변해서 어리둥절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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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연예인은 아무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떠나 왔을 때는 남북이 적대적인 관 계였는데, 이제는 남북 정상이 교류하고 아시안게임에 단일팀이 출전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해”라고 하던 말들이 남녀차별 이라고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관공서 업무도 은행 업무도 지하철 타 기도 모두 디지털화되어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2018년. 그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았 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이 살 기반을 마련했고,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기초를 만 들었고,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견인력이 됐습니다. 이제 그는 몸이 안 따라주고 그가 가진 기술과 지식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인도네시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 다. 그의 삶을 알고 그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이 글 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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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에선 어떤 구두도 발에 맞지 않았고 어떤 꿈도 몸에 맞지 않았다 우리는 늘 그리워했으므로 그리움이 뭔지 몰랐고 / 허연-그 거리에선 어떤 구두도 발에 맞지 않았다 중에서>


자카르타를 걷다 인도네시아의 그 곳 - 보물창고 루마자와 / 김현미 . 82 묘지의 벌판, 카사블랑카 / 배동선 . 86 내가 사는 집 / 이동균 . 90 ‘공간’이 주는 영향력, 자카르타에서 당신의 힐링 장소는 어디인가요? / 김순정 . 94 Sjahrial Djalil / 김현미 . 101 커피 그리고 카페 바타비아 / 조은아 . 105 믿음의 흔적 - 32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Gereja Sion / 사공 경 . 109 종교와 가난의 절묘한 조화, 루아르바땅(Luar Batang) / 노경래 . 112


인도네시아의 그 곳 보물창고 루마자와 / 김현미

육중하고도 정교한 조각의 대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인도네시아 자와 전통가옥인 루마자와는 조글로 joglo 양식으로 지어진 높은 천장을 가진 보물창고였 다. 오지연구가이자 여행가인 산또소 Santo 부부의 컬렉션 취향에 따라 수집품들이 색채에 입혀진 속도에 맞추어, 그 강약의 리듬감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시대를 달리 하는 선명한 칼라의 섬세한 패브릭 소품과 함께 세련되게 가공된 페리도트처럼 빛나 고 있었다. 천정에서 바닥까지 늘어진 선명한 빛깔들의 휘장들은 사냥 전 색색의 물감으로 온 몸을 치장하여 두려움을 떨쳐 내던 몸짓이었으며, 그 사이로 빛나는 조그마한 귀품들 은 그 긴장감 위에 아롱거리는 기름방울 같았다.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저런 빛깔이 존재했던가? 놀라운 빛깔들의 원석들은 진귀 한 빛깔을 내거나, 때로는 되바라진 촌스러움을 풍기며, 거친 고재 나뭇조각 사이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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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꼭질 놀이를 하듯 숨어 있었다. 이리얀자야 아스맛 원시조각은 그 거친 숨결 그대로 전쟁에 사용하는 방패에 새겨 져 있었으며, 그 모습 그대로 집의 울타리 와 장식의 역할도 해내었다. 죽음도 삶처 럼 일상으로 맞닥뜨려진, 먹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던 그 하루하 루의 거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듯 했 다. 42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루마자와는 비 밀통로를 지나가듯 한 면의 휘황찬란함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내 다른 쪽 문이 열리 면서 또 다른 매력의 공간으로 우리를 안 내했다. 좁은 계단을 지나 문을 열면 또 어 떤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하게 되는 거대한 보석상자 속에 풍덩 빠진 기분이었다. 루마자와의 각 방 천장은 각 수집품이 지닌 특유의 양식과 맞물리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바틱방에 이르러 나는 그 절정 의 아름다움에 놀라웠다. 벽을 가득히 채 운 바틱 작품은 가지런한 진열대를 빼곡히 채우고도 넘쳐나 천장에 이르렀고, 천장으 로 모인 빛은 바틱의 형형색색의 모양 그 대로 아름다운 꽃잎을 만들어 아래로 다시 흩뿌리고 있었다. 바틱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족히 1~2 년은 소요된다고 한다. 나는 점묘화를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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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듯 바틱의 점 하나 하나가 어떻게 선을 이루고 그 선이 어떻게 문양을 만들고 휘 돌아 나가며 하나의 면을 채우면서 작품을 완성시키는지 세밀히 살펴보았다. 문양을 찍고 촛농을 떨어뜨려 선별적 염색작업을 무한반복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 각각의 점들은 어느 예술가의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던 생활의 흔적이었으며, 어찌 할 도리 없는 노곤한 반복과 함께 찬란한 영감으로 뭉뚱그려진 시간을, 그 농축된 삶 의 깊이를 담백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기계적인 육체노동만이 아닌 그 한 점 한 점 혼신을 다했을 그 진심이 꽃잎이 되어 내 마음에 각화되었다. 이렇듯 일상의 바다에서 캐어 올린 생활예술품이 뒤섞여 있는 개인박물관은 그들 부부가 걸어 다녔을 오지의 험난한 길들과 이 귀한 것들에 응당한 대가를 치렀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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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로움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였다. 이 수집품들은 진열장 속 박제된 상태가 아니 라, 현재에도 입고 사용되는 여러 생활용품과 자연스레 섞이고 배치되어 삶이 곧 예 술과도 같은 응집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그날 루마자와 개인박물관에 몸을 푹 담그고 피로를 씻었다. 그 축제와도 같 은 알록달록한 색채를 보며, 무장해제된 자유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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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벌판 카 , 사블랑카 / 배동선

카사블랑카는 원래 북부 아프리카 모로코의 항구도시 이름입니다. 1942년작 영 화 <카사블랑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던 전쟁을 피해 필사적 으로 미국으로 가려던 사람들의 경유지였던 카사블랑카를 위험하면서도 우수에 가득 찬 낭만적인 곳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자 프랑스 식민지 였던 모로코도 나치의 괴뢰정권인 프랑스 비 시 정부의 영향력 아래 놓였으니 탈출자에게 호의적일 리 없었죠. 그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주인공 험프리 보카드와 잉그릿 버그만의 애절한 사랑이 전개됩니다.

영화 카사블랑카

자카르타에서 처음 카사블랑카 거리를 만났을 때 떠오른 것도 당연히 그 영화였습 니다. 거리와 건물들이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적잖이 보듬고 있던 인도네시아 였으니 어쩌면 네덜란드 총독부가 붙인 거리 이름이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거라 생각 한 건 자연스러운 사고의 메커니즘입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왜 프랑스 식민지였던 도시이름을 자카르타 한복판에 붙여 놓았을까 한참동안 궁리하다가 마침내 나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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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매듭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갖다 써 붙인 사람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냐고 말 입니다. 그런데 뿌리 카사블랑카 아파트 고층에서 내려다보면 대규모 묘지들이 그 지역 일 대를 뒤덮고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국가기념탑 모나스 인근 국립박물관 뒤편 네덜란드 묘지공원 따만 쁘라사스티(Taman Prasasti)만큼 호젓하진 않지만 정비 가 잘 된 멘뗑뿔로 네덜란드 묘역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네덜 란드 동인도군 총사령관이었던 시몬 헨드릭 스폴 장군을 비롯해 현지에서 전사한 네 덜란드군 장사병들이 묻혀 있습니다. 예의 영화에서처럼 미국에 가지 못한 사람들 상 당수가 카사블랑카에 주저 앉았던 것을 기억한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결국 고향에 묻 히지 못한 동포들을 위해 그런 거리 이름을 붙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동부나 북부 자카르타에서 시내중심가로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 중 하나입니다. 최근 코따 카사블랑카 몰이 세워지면서 출퇴근 시간이면 더욱

멘뗑뿔로 묘지와 시몬 헨드릭 스폴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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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인해를 이루는 차량들로 매일 몸살을 치르는 그곳은, 거기서 시작해 라수나 사이 드 거리와 수디르만 거리를 횡단하는 긴 고가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도 파크레인 호텔 앞 인도에 가판을 벌이고 있던 바소(Bakso)집이 고질적인 교통체증에 일조하고 있었 습니다. 주먹만한 대형 미트볼 한 개와 작은 바소 세 개를, 실타래같이 가는 국수 비 훈과 야채, 볶은 마늘과 함께 구수한 고기국물에 푸짐하게 담아 1만 루피아도 안되는 파격적인 가격에 팔던 그곳엔 늘 오토바이 수십 대가 인도 대부분과 차도 일부를 점 유하고서 퇴근길 정체를 부추겼으니까요. 나도 그곳 바깥 차선에 차를 반쯤 걸쳐 대 놓고 퇴근 길의 바소 한 망꼭(Mangkok)을 즐기던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플라스틱 을 씹는 듯한 맛도 났지만 그곳은 값싼 길거리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때우려는 사람들 로 매일 저녁 성황을 이루었죠. “공짜 손님들에게 수십 그릇씩 내줘야 하지만 그래도 장사가 잘되니 감사하게 생 각해요.” 인도 안쪽의 건물 경비원들은 물론 인근 파출소 경찰관들이 끼니때가 되면 당연하 다는 듯 돈도 안내고 양손 가득 바소를 싸 들고 가는 모습을 매번 보았는데 손수레 같 은 그로박(grobak)으로 좁은 인도에 좌판을 벌린 채 어차피 도로교통법을 위반하고 있 던 바소집 젊은 주인 부부는 어쩔 수 없다며 혀를 찼습니다. 하지만 단속이 강화되고 고가도로와 건물들이 더 많이 들어서면서 그 길거리 명소도 오래 전 문을 닫고 말았 습니다. 도시의 발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꼭 행복을 가져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비 오는 날이면 으스스해요.” 해가 져야 문을 열던 그 가게에서, 혹시 밤에 무섭지 않냐고 묻자 그런 대답이 돌 아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사블랑카 도로 좌우엔 끝이 보이지 않는 대형 묘지들 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게 꼭 네덜란드 묘역처럼 잘 정비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었으니 까요. 실제로 카사블랑카 지역과 현재 롯데쇼핑애비뉴가 서 있는 사트리오 거리(Jl. Dr. Satrio)까지

아우르는 까렛(Karet) 지역 전체가 옛날엔 거대한 공동묘지였다고 하

며,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 일대가 개발되면서 지금의 아파트와 건물들 대부분이 그 묘지들을 갈아엎고서 그 위에 세워진 것들입니다. 인근 목적지에 가려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묘역 사이 샛길을 지나는 것이 빠른 그곳엔 비가 추적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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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날이면 지금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니 꾼띨아낙이나 순델볼롱, 뽀쭁 같은 귀신 이야기가 넘쳐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실 제로 카사블랑카 거리와 사트리오 거리를 연결하는 길지 않은 지하도로는 요즘도 비 만 오면 쉽게 물에 잠기곤 하는데 빨간 옷을 입은 여자귀신이 출몰한다는 도시전설로 도 유명합니다. 이상하게도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이 지하도로를 밤늦게 지나는 운전 자들 사이에는, 그래서 진입 전 클락슨은 세 차례 눌러 그 안 어스름 속에 깃든 망령 들의 양해를 미리 구하라는 이야기도 돌고 있습니다.

뜬금없게도 카사블랑카의 이름이 ‘KAmpung melayu SAmpai BeLAkaNG

KAret’, 즉 ‘까렛 뒷동네까지 이어지는 깜뿡 멀라유 지역’이라는 말의 축약이라고 도 합니다. 뭐든 갖다 붙여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 입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기왕이면 술라웨시 떵가라의 주도 끈다리(Kendari)처럼 ‘Karena Anda Ada, Aku

Datang Kemari’(그대 있기에 나 여기 왔노라)라는 시적 문구를 줄인 것이라는 정도의 낭 만이 아쉬운 부분이죠. 그래서 난, 클락슨 세 번 울리고 들어선 지하도를 지나면 어스름 내린 황량한 묘지 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예의 그 젊은 부부가 바소 그로박을 끌고 나타나, 붕붕 떠다니 는, 잉그릿 버그만 닮은 예쁜 빨간 옷 꾼띨아낙들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네덜란드 군 망령들에게 커다란 미트볼 스프를 팔고 있는 카사블랑카의 벌판으로 들어서는 낭 만적인(?)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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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집 / 이동균

며칠 전, 우연히 한국에서 방송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S대학교에서 건축학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 퇴임하신 분이 하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분이 하는 말이 사 람들이 느끼는 세계 최고의 건축은 "자기가 사는 집"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100% 공감한다. 약 3년 전부터 나는 주말이면 바깥에서 운동을 하 거나 식사하는 것을 줄이고 아파트 안의 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며 생 활하고 있다. 즉, 특별히 어떤 일(주로 비즈니스)이 선약이 되어 있어서 만나야 하는 일 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Apartemen Slipi, Jakarta Barat)에서 대부분의 주말 시간을 보낸다. 그 이유는 슬리피 아파트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 휴식공간, 운동을 할 수 있는 장소들이 그런대로 비교적 잘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부 자카르타의 좀 더 화려하고 높고 큰 것들은 많지는 않지만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로컬 시장이 한걸음의 거리에 있고 또한 인도네시아의 맛있고 값싼 음식을 파는 맛집들이 곳곳에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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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에서 살기 시작한 지는 6년 전, 12월경이었다. 평소 아는 사람의 소개로 처음에 집을 임대하러 방문했을 때, 아파트의 첫인상은 건물 외관은 오래된 모습, 단 순하면서도 잘 정돈된 바깥의 정원들, 빈약한 시설의 헬스 센터, 현대를 사는 시대에 서 보면 조금 뒤떨어진 로비 인테리어, 거기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는 훌륭한 풀장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처음에 입주를 할 때는 아내가 일상적인 식료품을 구입하거나 은행 등의 업무를 보는 데도 어려움이 있고 특히 아파트가 큰길에 가까이 붙어있어서 차량 소음과 매연 이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의견 을 모아서 딱 1년만 임대를 해서 살아 보기로 하고 Slipi Tower 1, 중간층쯤에 들어 와서 살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막상 살다 보니 아파트에 대한 것들이 처음에 받았 던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점진적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던 중에 1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Slipi Tower 2, 높은 층을 구입했다. 그 이유는 거실에서 보면 앞에 고층빌딩이 없어서 전망이 탁 틔어 있어서 자카르타 서부, 북부 지역을 조망할 수 있고 자카르타의 아파트에서 좀처럼 잘 볼 수 없는 자바해를 볼 수 있다. 또한 안방에서 보면 자카르타 남부 스나얀 지역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전망 포인트는 해가 질 무렵이다. 아파트 거실에서 보면, 저 멀리서 자카르타 공항으로 비행기가 바다를 배경으로 서서히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 다. 또한 그 뒤, 더 멀리서는 노을 지는 바다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 끔 회사에서 일찍 퇴근하여 집에 들어와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거실의 창을 열 고 석양의 노을과 앞에 펼쳐진 파노라마를 마주하며 감상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나만의 힐링의 시간을 갖는다. 약간 이 글의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 건축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하면, 건축은 인간 서로 간의 약속된 계약에 의해 나무, 석재, 기타 여러 가지의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고자 하는 무엇을 창조하는 일이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하는 비즈니스가 건축 과 관련되어 있어서 내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건축물을 보고 연구하고 그에 따른 건축 자재를 생각하는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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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계적인 최고의 건축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 까? 물론 사람마다 각자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를 것이다. 어떤 분들은 프랑스 파리 의 베르사이유 궁전, 에펠탑, 이탈리아 로마의 원형 극장인 콜로세움, 한쪽으로 기울 어진 피사의 탑, 영국 런던의 국회 의사당 빅뱅,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인도네시아 족자의 보로부드르 사원 등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러 나, 단지 이러한 것들은 내가 소유 할 수 없는 즉, 내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이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멀리 여행을 떠나 화려하고 수려한 외관, 잘 조성된 시설을 갖춘 세계적에서 알아주는 최상급 리 조트에 투숙한다고 생각을 해 보았다. 그 호텔은 아름다운 해변이 있고 낭만적인 음 악이 흐르며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게 차려진 레스토랑이 있으 며 안락하며 럭셔리한 방에서 생활할지라도 3~4일 지나고 나면 본전 생각이 날것이 다. 왜냐하면 이러한 극치의 편안함이 결국에는 내 호주머니에서 지출해야 하는 거액 (?) 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부터는 편안한 생각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집은 이러한 거액의 지출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행복한 휴식을 만끽하고 새로운 생각을 가다듬고 하는 시간을 갖기에는 최상의 조건 을 갖춘 곳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내 취향대로 집안을 편안하게 꾸며 보려고 노력 한다. 열대 화초도 심어도 보고 벽에는 자연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도 붙여도 보고 오 디오 시스템도 새롭게 정비하여 마치 공연장 또는 연극무대처럼 꾸며도 본다. 그러다 가 마음이 바뀌면 커피가 있는 카페의 구석의 공간처럼 만들기도 한다. 어떨 때는 단 순한 사무실 공간으로 변신하여 만들어 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사람들 각자가 현재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 다른 것들에 비해 아주 작 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각자가 본인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다. 이러 한 삶을 누구든지 사랑할 것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어느 곳을 추천하라면 나는 당연히 내가 사는 공 간, "내 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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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쉬는 날이라서 하루 종일 집안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카르타의 변하는 풍 경을 느껴 보려고 한다. 피아노 선율이 CD를 타고 흐르고 벽에 붙어 있는 가족들과 같이 찍은 여러 가지 추억이 쌓인 사진들을 보며 과거에 내가 지나왔던 즐겁던 추억 들의 순간을 느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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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간 이 ’ 주는 영향력 , 자카르타에서 당신의 힐링 장소는 어디인가요 ? 글 쓰며 삶을 재출력하는 곳 – 안쫄(Taman Impian Jaya Ancol)

/ 김순정

공동으로 여럿이 모여 회의하며 주제를 정하고 단어를 고르며 모든 문장을 써 내 려가는 저술가는 없을 것이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고독한 작업으로, 자신만의 ‘몰 입 공간’에서 스스로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일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글을 쓰는 환 경’은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는 ‘물리적 공간’이 가장 중요하고 부수적으로 시간, 자세, 도구, 소리, 분위기 등이 영향을 끼친다. 이 모든 요소는 글 쓰는 이에게 영감을 주며 작품과 콘텐츠 탄생에 기여한다. 나에게 ‘일반 장소’로 그치지 않고 창작과 기획 그리고 구상의 희열을 느끼며 영 감을 주는 그 은밀한 공간인 자카르타 북부의 안쫄(Taman Dreamland Park).

Impian Jaya Ancol/Ancol

지금부터 안쫄에 얽힌 행복한 추억에 곁들여 ‘르 브릿지(Le Bridge)’

레스토랑 한쪽 벤치에 앉아 바닷냄새 속에 떠오르는 영감을 기록하던 ‘글쓰기 장소’ 로서의 매력을 융합하여 이끌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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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외로움과 어려움 극복을 위한 처방전! 자신을 위한 행복한 글쓰기를 권한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많은 분이 공감하시겠지만,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이 만족스 럽다가도 문득 이방인으로서 외롭다는 느낌이 들고 특히 현지인 가정부, 유모, 운전기 사, 공무원, 비즈니스 파트너로 인해 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 땅이 지긋지 긋하게 느껴지고 차갑게 느껴질 때가 이따금 찾아온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려움을 극 복하는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엉뚱한 방향을 걷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여기 타국 인도네시아에 삶의 온기를 불어넣은 도구로 ‘글쓰기’를 추천한다. 실제로 많은 대가가 자신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감정과 불안 등을 이겨내는 처방 법으로 글쓰 기를 활용했다. 하지만 바쁜 현실은 전업 작가가 아닌 이상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열악 한 시간적 공간적 현실이 부딪힌다. 여기서는 ‘공간적’ 중심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최근에는 소셜 미디어의 글쓰기와 연동된 시스템이나 CPND, 즉 C(콘텐츠), P(플 랫폼), N(네트워크), D(디바이스)로 연결된 디지털 유통의 매체에 자신의 글을 올리 며 꿈을 실현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나를 위한 글쓰기를 더욱 자극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네이버의 웹툰 작품을 통해서 아마추어 작가가 스타 작가가 되고 무명작가 가 문학 플랫폼을 통해 상당한 순이익을 내고 있어 출판사를 하는 입장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 등 삶을 재출력하는 공간 어디가 좋을까? 자기만의 공간이 있다는 행복 그렇다면 나 홀로 작업이 많은 글쓰기 작업에 적당한 공간은 어디일까? 미국의 소 설가 캐서린 앤 포터의 답을 빌리면, 그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사람에 따 라서 유독 글쓰기 좋은 공간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글 쓰는 공간이 담배 연기 와 커피 향기가 있어야 하는 곳이나 자기 방의 책상이나 침대, 차 안, 호텔 방 등 처한 환경이나 성격 등에 따라 다양한 공간들을 선택한다. 필자가 대략 글은 쓰는 목적에 따라 구분해 보면 팩트(fact) 위주의 글, 기사성 글, 칼럼, 광고 카피 같은 실용적인 글을 쓸 때는 학구적인 느낌이 가득한 서재나 도서관 자카르타를 걷다 . 95


이나 세미나실 또는 사무실 같은 이성적인 사고에 도움이 되는 공간을 추천한다. 또 한, 낭만적인 시나 에세이, 문학작품처럼 영감과 감성의 글쓰기를 하고 싶을 때는 북 카페나 노천카페나 레스토랑. 자연적인 공간을 추천한다. 하지만 현실은 버지니아 울프가 역설한 ‘자기만의 방’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글 쓰는 환경이 허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글을 쓰거나 사색하거나 구상 하거나 하는 등 삶을 재출력하는데 필요한 ‘나만의 공간’을 찾아내야 한다.

나만의 아지트, 나만의 장소로 들어가라 내가 찾은 자카르타의 힐링처 – 영감을 주는 안쫄 해변 ! 인도네시아에서 당신만의 삶을 재출력하 는 공간은 어디인가? 만약 아직 나만의 특 별한 공간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타국에 사는 이방 인들에겐 ‘내 집’만큼 편안한 아지트가 없겠 지만 가끔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힐링할 곳 이 있다는 것은 외국 생활 중 큰 기쁨이 아 닐 수 없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찾아낸 곳 은 자카르타 북부의 ‘따만 임삐안 자야 안 쫄(Taman

Impian Jaya Ancol. Ancol Dreamland

Park)’이다(참고로

1967년 들어선 대규모 위락단지인 안쫄은 총면적은 552ha의 대

규모 멀티플렉스단지이다. 골프장과 요트장 등 스포츠 시설과 나이트클럽, 디스코 텍, 마사지실까지 겸비해 밤낮의 모든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곳에서 대부분의 ‘락(樂)’ 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간적 공간적 비용적 장점이 있는 곳이다). 나만의 공간을 찾을 때 공간의 크기와 환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또한, 근사한 곳이나 유명한 곳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저 나의 영혼이 숨을 쉬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면 된다. 필자에게 영감을 주며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은 ‘물’이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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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 생명이며 영혼치유의 상징이다. 침수는 정결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기 독교 침례교는 세례의식 때 ‘침례’를 통해서 ‘인간은 상징적으로 죽고, 정화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 물이 있는 곳을 나는 사랑한다. 예를 들어 ‘바다’ 같은 곳이다. 내가 사람이 아닌 자연의 치유영역이 필요할 때 찾았던 곳도 산과 바다였다. 한국 에서 한국출판인회의 산악회에서 활동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전국의 명산을 찾아 정상에 오르며 자아 성찰의 기회로 삼았다. 또한, 책을 만드는 스트레스를 숲속 길 맑 은 공기로 치유하였다. 특히 ‘물’이 있는 도심 속 한강변을 자주 찾았다. 때로는 더 큰 물을 만나기 위해 드라이브를 할 겸 인천국제공항 가기 전 서해안의 ‘을왕리 앞바다’ 로 향했다(을왕리에 있는 왕산해수욕장과 선녀바위 해수욕장은 나만의 바다로 통했 던 아지트였다). 자카르타의 안쫄(Ancol)은 나에게 그런 비슷한 느낌과 정서를 불러일 으키는 곳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건너온 후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가면서 출 판 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녔다. 인도네시아 출판시장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내게 새로 넘어야 할 장벽으로 다가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의 을왕리의 작은 앞 바다를 생각하며 안쫄을 찾았다. 그래서 나는 안쫄(Ancol)을 ‘삶의 콘텐츠를 재생산하 고 재출력 하는 곳’이라고 명명하였다. 사색하며 글을 쓰며 읽으며 진정한 내면을 마 주하고 비즈니스를 구상하고 내 삶의 정체성을 찾는 곳으로 말이다.

쉽게 갈 수 있어 소박한 편안함을 주는 안쫄 바닷가 여행자로서의 느낌을 주는 공간 “왜 자카르타에 멋진 곳들을 놔두고 안쫄이냐!”라고 의아해하거나 반문하는 사람 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자카르타 시민들의 휴식처인 안쫄은 한국 사람들에겐 자카 르타의 심각한 공업용수로 인해 해변의 바닷물이 지저분하다며 손사래를 치는 곳으 로 우리나라 80년~90년대 놀이공원을 연상시키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인기 있는 방문지는 아니다. 오늘날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는 교통인데(현대생 활에서 교통은 생활의 편의를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다) 자카르타에서 관광명소의 멋 진 푸르른 비췻빛 바다를 보려면 번거로운 장거리 여정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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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은 집에서 막히지 않고 30분이면 바닷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안쫄은 가깝기 때문에 별다른 여행 계획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의 ‘안쫄’에 대한 평가가 좋 지 않고 선호하지 않더라도 자카르타 근교에서 아무 때나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안쫄이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물론 안쫄을 찾을 때 한 가지 철칙이 있 다면 사람이 붐비는 주말이나 공휴일은 피한다는 점이다). 안쫄은 내가 원하는 시간 에 늘 여행자로서의 삶을 선물하는 곳이다.

안쫄이 덤으로 주는 선물: 안쫄에 가면 그것이 있다 ! 바다 한가운데의 낭만, 르 브릿지(Le Bridge) 레스토랑 저편 천 개의 섬(뿔라우 쓰리부. Pulau Seribu)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가는 초입에 있는 안 쫄은 지상인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을 때 해변에서 출발해서 다시 해변으로 이어지 는 ‘3(삼자)’자 모양의 다리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리 이름은 ‘즘바딴 찐따(jembatan cinta. 사랑 다리)’라는

달콤한 이름이다. 평일 낮때나 석양이 드리워지는 저녁 무렵 안쫄

에 가면 자카르타 시민들의 활기와 일상의 여유로움,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안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역시나 작은 해변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가끔 데이트를 즐기는 곳. 이 작은 해변에서 자카르타 시민들이 한가로이 수영이나 일광욕 을 즐긴다. 앞바다와 연결된 다리 입구에서는 유람선 여행객을 모집하는 아저씨들을 만날 수 있다. 곳곳에서 한참 뜨거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비롯해 가족 단위로 와서 조용히 놀고 있는 모습, 단체 손님이나 인도네시아 학교 교복을 착용한 학생들이 종 종 눈에 띈다. 바닷가 물이 깨끗하지는 않지만, 물에서 물놀이와 수영을 즐기는 사람 을 볼 수 있다. 대도심에 있는 해변이지만 대부분 수영복 차림이 우리나라 동네 개울 가에서처럼 티셔츠나 반바지 같은 평상복 차림으로 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이슬람 교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들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을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해변의 정서가 작은 동네 마을의 물가 분위기이다. 또한, 해변 부근에 돗자리를 깔고 컵라면(pop mie)을 먹거나 근처 노점에서 간단하게 사서 먹는 모습이 정겹다. 바다 가운데로 연결된 다리를 입구에 들어서면 내가 안쫄에서 가장 좋아하는 흰색 천막으로 지어진 ‘르 브릿지(Le Bridge) 레스토랑’이 보인다. 이곳에서 바닷바람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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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냄새, 바다 사람과 동화되어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리다 보면 나의 일상은 축제가 되 고 여행자가 되며 출력하는 삶의 모드로 전환된다. 바닷냄새를 머금고 사방팔방에서 세게 불어 닥치는 바닷바람을 병풍 삼아 나만의 ‘힐링 공간’, ‘사색의 공간’, ‘글 쓰는 공간’으로 재 탈바꿈 된다.

또 안쫄 내부에 우뚝 서서 시선 끄는 고층의 안쫄 맨션(Ancol Mansion)이 시선을 사 로잡는데 바다 전망이 정말 멋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기 사는 사람들은 늘 여 행자처럼 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안쫄에는 특색이 있는 레스토랑과 음식점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안쫄 호텔은 물론이고 씨푸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반다르 자카르타(Bandar Djakarta)는 사람들 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이밖에도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 발리 요리를 좋아하는 사 람들을 위한 ‘짐바란(Jimbaran)’, 고급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을 위한 스가라(Segarra), 낭만적인 식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르 브릿지(Le Bridge)’ 레스토랑이 있다.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르 브릿지(Le Bridge) 레스토랑의 다리를 조금 더 지나면 해상 위의 콜럼버스 카페(Columbus Cafe)가 나온다. 그밖에도 안쫄은 큰 규모를 갖추고 있는 만 큼 전용 차량이나 오토바이, 버스를 위한 충분한 주차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글랑강 사무드라(Glanggang Samudra)라는 신나고 멋진 돌고래 쇼도 덤으로 즐길 수 있다. 기 타 안쫄이 덤으로 주는 선물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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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월드(SeaWorld): 씨월드는 인도네시아 바다의 수중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곳이다. 1995년 대기 업 ‘리뽀(LIPPO) 그룹’에서 많은 자본을 투자해서 만 들었다. 방문객은 거대한 수족관과 다양한 상어의 종류에 놀라게 된다. 바닷속 심해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물고기가 놀고 있는 수족관은 터널로 연결되어 있고, 전문 사육사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수중 먹이 쇼’도 볼만 하다.

빠사르 스니(Pasar Seni): 인도네시아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열정으로 가득 찬 곳. 소호 분위기와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작은 예술촌’을 형성하였다. 현대적으로 세련 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투박스럽게 예쁜 곳이다. 사진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 겨 찾는 공간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가게 ‘끼오스(kios)’에서 그림, 조각, 수 공예품, 직물, 가죽제품, 바틱, 민예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안쫄이 자랑할 만한 ‘예 술 마켓(Art Market)’이다.

두니아 판타지(Dunia Fantasi): 한국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와 같은 두니아 판타 지는 안쫄 내에 있는 놀이동산으로 일명 두판(Dufan)으로 부른다. 두판은 자카르타에 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 공원이다. 회전목마, 제트 열차, 통나무배 등 각종 놀이기구 를 즐길 수 있다.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알리안츠 에코 파크(Allianz Ecopark): 이전에는 빠당 골프 안쫄(Padang Golf Ancol) 에 사용된 알리안츠 에코 공원은 가족을 위한 에듀테인먼트와 모험을 경험할 수 있 다. 자카르타에서 드물게 산책이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곳으로 도시락을 싸와서 가 족단위의 피크닉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방문객이 과일과 채소를 살 수 있는 에코 마켓 (Eco-Market)도

있다.

아틀란티스 워터 어드벤처(Atlantis Water Adventure): 워터 테마파크인 이곳 은 1974년부터 안쫄에 있었던 7개의 다양한 수영장인 글랑강 르낭 안쫄(Gelanggang Renang Ancol)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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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화한 결과로 만들어진 곳이다. 8개의 테마파크로 구성되어 있다.


Sjahrial Djalil / 김현미

Kemang timur 66번지. 탄성을 자아내는 박물관을 구경하는 내내 궁금증이 일었던 그, 소박하기 그지 없는 침상에 누워 있던 그를 보 았던 첫 장면이 스틸컷 처럼 남아 있다. 그는 2013년 박물관 시상식에서 최고의 개 인박물관으로 선정된 Museum di Tengah Kebun의 설립자이며 소유주이다. 19세기는 작가의 시대, 20세기는 평론가의 시대, 21세기는 컬렉터의 시대라고 했던가. 컬 렉터는 도대체 어떤 힘으로 탄생 하는걸까? 작품은 작가에 의해서 한번 태어나고, 컬렉터에 의해 두번 태어난다고 한다. 눈의 호사스런 즐거움, 작품을 소장하는 물욕, 과시를 위한 취미로 치부 하기엔 그들의 열 정과 헌신은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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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Sjahrial Djalil는 Kemang의 4200평방미터의 집터를 구입하여, Temi 라는 젊은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1980년 17개의 부속실로 구성된 박물관을 준공하 였다. 2009년 박물관으로 등록된 이후 2012년 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 박물관은 그 건물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담긴 400년 된 동인도 회사의 벽돌 65000장과 기상청 건물의 고벽돌 15000장과 경첩을 가져와 건립하였으며, 문은 Meester Cornelis 건물의 유일한 여성교도소 부킷두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만들어 졌다. 박물관은 주제에 따라 가장 선호되거나 중요한 유물의 이름을 따서, 일본, 명나라, 가루다라이언 룸, 선사시대 등등으로 명명되어 있고, 욕실 내부조차 청나라시대의 라운지 의자와 19세기 프랑스 석유램프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 나라의 국빈들이 받 았던 귀품으로 채워져 있다. 이들 63개국 21개주를 대표 할 만한 2400여 개의 귀품들은 70~80% 이상이 크리 스티나 경매등 해외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이들 예술품은 단지 보기위한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사용되는 거울과 의자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실제 사용 목적에 맞추어 진열되거나, 의도된 불규칙함으로 지루하 지 않은 배열방식을 가지고 있다.

컬렉션은 새로운 창조이다.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 컬렉터들에겐 열정과 안목없이 닿을 수 없는 깊이 가 있다. 눈앞의 무언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이미지를 그려낸다는 작가 의 말처럼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들인 한 점 한 점이 쌓여가며 서로가 서로의 이야 기가 되어감에 더 알고 싶고, 그 이야기를 개연성 있게 풀어줄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며, 더 깊숙한 알지 못했던 이야기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것 이 아닌가? 그리하여 하나만으로 알 수 없었던 문화와 배경이 큰 그림이 되어, 대중 들에게 그 아름다움에 묘미를 더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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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생으로 어린 시절 역사와 정치에 관한 책을 좋아 했던 그는 20살이 되던 해 부터 광고일을 시작하여, 인도네시아 광고 기업인 Ad Force Inc를 설립하였으며, 이런 그의 성공에 바틱 공급자였던 아버지는 그가 인도네시아의 유물을 찾아 오는 것 으로서 인도네시아 국가의 존엄성을 알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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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um di Tengah Kebun은 지역사회에 최초로 환원되는 비영리사립 박물관 으로 컬렉터에게 미술품은 분신과도 같은 것으로, 그는 향후 15년간 박물관을 유지 보수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고 한다. 대개 컬렉션 기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은 가족들의 동의를 받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하니 독신의 삶 을 선택한 그의 결정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박물관에서 관리를 하던 50여명 의 직원 모두 남자였고, 같이 골동품을 수집하였던 그의 조카 역시 독신이다.) 나 역시 인테리어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주위에 일상적인 컬렉터들을 알고 있 고, 골동품을 접할 기회가 제법 있었다. 20년전 아트딜러인 지인과 중국 출장을 가 서 북경의 시골창고를 뒤져 찾은 대형자기가 있다. 난 그 많은 자기중 유약이 흘러 내 리는 모습과 색상이 자연스런 하나를 골랐다. 그 후 그 자기는 지금까지 거실 한켠을 채우고, 내 마음이 울렁일 때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잠잠히 식혀주는 그늘 같은 존재 가 되었다. 내 마음에 아름다움으로 와서,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마음에 평화를 주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사실 이때 추가구입품이 있었지만, 다른 것은 모두 흘러 가 버린 수업료가 되었고, 단지 이 항아리만이 내 안에 남게 되었다. 컬렉션을 할 때 각자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을 것이다. 박물관급들만 모을 거라든 지, 문화품에 속하는 생활용품을 한다든지 등의 품목과 시대에 집중된 컬럭션 등이 되겠다. 나 역시 제법 시행착오를 거쳤고,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 이제 어떤 물 건을 사고, 어떤 물건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각자의 걸어온 길과 가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아름다움을 맘에 들이는 일,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 깊이를 더해가다 보면 인간 본 연의 모습이 투명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이렇듯 컬렉터들은 내재화된 작품의 가치를 찾아 숨결을 넣어주고, 단절되었던 역사적 가치를 연결하여 그 시대를 읽어 낼 수 있 는 코드를 찾아, 다수 문화소비자의 마음에 울림을 주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울림과 감동이 밑거름이 되어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을까. 이제 그러한 컬렉션들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전시된 문화공간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문화소비자의 체험의 장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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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그리고 카페 바타비아 / 조은아

아침 6시, 어김없이 알람이 울어댄다. 시작이다. 아침 전쟁. 구겨진 몸을 펴며 이 불 밖으로 나와 욕실로 부엌으로, 화장대 앞으로 아이들 방으로, 다시 부엌으로 들락 날락 뛰고 또 뛴다. 간식 4개, 도시락 2개, 아이들과 남편의 아침 식사. 비비크림이라 도 찍어 바르고, 차로 30여분 떨어진 학교에 아이들 배달까지 하려면 나의 아침은 그 야 말로 전쟁이다. 안방 문에서 싱크대까지 60cm² 정사각 대리석 타일 딱 18개. 안방에서 화장실, 아이들 방까지의 동선은 고려하지 않아도 10미터가 넘는 거리. 아침마다 100미터 달 리기는 족히 하고 아이들이 먹다 남은 빵 조각과 과일 몇 조각을 입에 구겨 넣으며 차 에 오른다. 여기에 길까지 밀리면, 이 호젓한 산꼭대기에 대저택을 제공한 남편 회사 가 야속해 ‘차라리 저 아래 동네 원룸이 나을 것을...’하는 배부른 푸념도 해본다. 머리카락을 위에 묶어 달라, 옆에 묶어 달라, 두 개로 혹은 세 개로 따달라며 매일 달라지는 요구 사항에 百忍하며 학교에 도착하면, 드디어 나는 자유다. 적어도 하교 시간까지는. 절대로 날 찾지 말아라. 아프지 말아라. 아프면 학교에서 날 찾는다. 하 교시간이 되면 알아서 나타나 줄 것이니. 자카르타를 걷다 . 105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놓고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바로 커피 텀블러를 드는 일 이다. 내 비록 아침은 남겨진 빵조각으로 때웠을망정, 그 전쟁 속에서도 꼭 한 병 지 켜 나온 직접 내린 원두커피 한 잔은 내 인도네시아 생활의 활력소이자, 그 아침 전쟁 속에서도 홀로 의연한 남편보다 더 위안이 되는 존재다.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가장 행복한 것 중에 하나가 깊은 풍미를 자랑하는 각종 커피를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저 내 발길 근처 어느 곳의 그냥 ‘커 피’였다면, 지금은 수마트라 만델링, 아체 가요, 술라웨시 또라자, 자바 모카, 발리 킨따 마니 등등 인도네시아 자체 브랜드 커피를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골라 마시거나, 가끔은 신맛이 강한 커피와 바디감이 강한 커피를 내 마음대로 섞어 마실 정도가 되었다. 가끔 내가 찾는 보고르의 ‘커피 부티크’라는 커피 전문점은 그야말로 커피의 천국이 다. 인도네시아 전 지역의 신선한 커피를 종류별로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문점답 게 커피 한 잔에 미지근한 물 한 잔을 같이 제공한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물로 입을 헹 구도록 해 커피 본연의 향을 제대로 음미하게 하기 위함이다. 향 좋고 바디감 뛰어나기 로 유명한 인도네시아의 커피. 그러나 그 이면의 아픈 역사를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내가 마신 인도네시아 커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그 슬프고 아픈 향의 커피는 바로 ‘카페 바타비아’에서 경험했다.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았을 익숙한 그 곳,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우아하고 클래식한 분위기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만한 곳. 1800년대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점령자들이 누렸던 부귀영화와 낭만을 그대로 간 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카페 바타비아다. 하지만 이곳에서 밖을 내려다보면 반대로 점 령당한 자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이러니한 곳이기도 하다. 1696년,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인도로부터 아라비카 커피 묘목을 들여와 바타비아 에 이식을 시도했지만 바타비아의 홍수로 실패하고, 1699년에 들여온 두 번째 묘목을 이식에 성공한다. 1710년, 드디어 첫 번째 수출량이 유럽으로 보내지기 시작했다. 수 출량은 해마다 늘어났고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725년에서 1789년까지 커피 무 역을 독점했다. 유럽으로 보내지는 인도네시아 커피는 바타비아의 순다 끌라빠 항구 에서 선적되었고 커피 무역은 VOC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효자 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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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점령한 자들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던 효자였다면 반대로 식민정부의 강 요에 의해 커피를 경작하던 인도네시아 농부들에게는 과도한 노동과 피의 결과물이었 다. 부패와 탐욕에 물든 네덜란드 관리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을 억압하고 벼농사에 종 사하는 농부들까지 커피 노동자로 전환하게 하여 그들의 궁핍을 더욱 심화시켰다. 카페 바타비아에서 한 눈에 보이는 파타힐라 광장. 그 식민지 시절 고문과 공개 처 형이 행해졌던 곳이다. 또 당시 시청이었던 건너편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에는 아직도 허리도 펼 수도 없는 낮은 천장의 감옥 안에 죄수들의 발에 묶었던 쇠뭉치가 남아있 다. 비가 오면 물이 차는 이 감옥에서, 또 비가 오지 않아도 물을 채워 죽이던 우물 감 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요즘 즐겨 마시는 더치커피도 그리 우아한 역사의 결과물은 아닌 것 같다. 바타비 아에서 선적된 커피가 유럽까지 가면서 비바람과 파도 등에 의해 커피자루로 물이 스 미고 그 물이 자루 속 커피 알갱이 사이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선원들이 받아 마시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라 전해진다. (혹자는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산 커 피의 신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찬물에 오래 우려먹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나, 필 자는 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카페 바타비아는 본래 네덜란드 총독의 거주지로 건설되어 창고와 사무실, 예술 갤러리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었다고 한다. 그 안에서 네덜란드를 해상 무역의 강자로 떠오르게 했던 인도네시아산 커피를 마시며 공개처형을 바라보던 그 누군가 들이 분명 있었으리라. 자카르타를 걷다 . 107


지금의 카페 바타비아는 사실, 음식이나 음료 값이 인도네시아 물가에 비해 그 리 저렴한 곳이 아니다. 나시고랭 한 접시가 여느 식당의 서너 배 가격이니 인도네시 아 서민들은 그 문을 열기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카페 바타비아 안은 늘 외국인들 과 관광객, 사교모임을 나온 인도네시아 부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밖에는 단 5,000루피아, 10,000루피아의 싸구려 장난감을 하나라도 더 팔겠다고 서성이는 장 사치들과 서민들이 즐비하다. 수백 년 전에는 점령한 자와 점령당한 자들이,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누릴 수 있는 자들과 그럴 수 없는 자들이 안과 밖에 공존하는 곳. 그 곳이 바로 ‘카페 바타비아’다. 감사하게도 지금 나는 카페 안에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경험해 본 자이지만, 나라를 점령당했던, 아직도 깊은 사과를 받지 못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카페 바타비아의 커피는 조금은 쓰고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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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흔적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 323 Gereja Sion / 사공 경

가끔 생각해 본다. 종교란 무엇일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에도 종교는 여전히 인류의 정신사에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는 무수한 종교적인 상징물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 와 희망의 상징이다. 시온교회는 자카르타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323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네덜란 드 동인도회사(VOC)의 지도하에 2년(1693-95)동안 건립한 흑인 포르투갈 인을 위한 교회였다. 건립 당시에는 바타비아 시 밖에 있었다. 사람들은 이 교회를 De Nieuse Portugeesche Buitenkerk(the New Portuguese Outer Church)라고 불렀다. 시온교회는 ‘성 포르투갈 교회’를 뜻하는 Portugeesche Buitenkerk으로도 유 명하다. 1693년 포르투갈인 Pieter van Hoorn이 초석을 쌓고 1695년 10월 23일 (주일)에

Theodorus Zas 목사가 취임한다. 시온 교회의 축복식에 대한 이야기가 네

덜란드어로 기념 보드에 쓰여 있다. 그 후 일본 식민지 시절, Dai Nippon 군대는 이 교회를 죽은 군인의 재를 보관하는 곳으로 운영했다. 1957년부터 시온교회라 칭하 게 되는데 시온(히브리어)은 고대 이스라엘인에게 안전의 상징이다. 자카르타를 걷다 . 109


교회가 없었던 1675년에 작은 성당이 먼저 지어졌다. 그 성당은 바타비아에서 일 하는 노예들(포르투갈,

남아시아의 벵골, 호주의 말라바르, 뉴질랜드의 코로만델, 스리랑카 출신)들을

위해 포르투갈 정부가 지어준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노예들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 는 가톨릭신자였다. 두 개의 설교단 중 위에 것은 가톨릭교회 때 신부님이 강론을 할 때 사용하였다. 후일 포르투갈인들은 데뽁시로 이주하여 네덜란드인들이 이곳에서 신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목사님은 아래에 있는 설교단에서 설교했다. 지금 도 주일 오전 6시 30분과 10시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예배를 드리며, 오후 4시에는 중국인들이 예배를 드린다. 1920년과 1978년에 두 차례에 걸쳐 교회 건물을 보수한 적이 있다. 자카르타 시 장 법령에 의해 1972년에 유적지로 인정받는다. 로테르담의 E. Ewout Verhagen 의 설계에 따라 6개의 기둥으로 받쳐진 천장이 3개 있고, 총 넓이가 24x32미터이고 뒤쪽에는 6x18미터 크기의 추가 방이 있다. 마당을 포함한 총 넓이는 6,725평방미 터로 신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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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가 진흙이기 때문에 이 건물은 10,000 개의 dolken이란 원형의 나무판자 위 에 세워졌다. 바닥은 화강암을 깔았고, 벽돌벽에 튼튼한 에보나이트로 만든 대들보 가 지붕을 받치고 있다. 벽돌은 열에 강한 설탕과 모래를 섞어서 만들었다. 이 교회는 영광스럽고 튼튼한 건축물로 잘 보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 흑단으로 만들 어진 문양이 새겨진 의자, 가구 등은 317년 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18세기 의 파이프 오르간, 바로크식의 설교단, 갤러리, 구리 샹들리에까지 갖추고 내부를 아 름답게 꾸미고 있다. 닫집이 있는 바로크식의 설교단과 세 줄의 신도석은 H. Bruijn 에 의해 1695년 제작되었다. 네 개의 구리 샹들리에는 바타비아의 문장 즉, 사자상 과 무기, 향료, 방패가 새겨져 장식되어 있다. 설교단 윗부분은 차양으로 덮이고 2개 의 기둥과 4개의 청동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 4개의 얇은 기둥으로 받쳐진 2층 발코 니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높이가 2.5미터이고 1860년 만들어진 이 파이프 오르 간은 John Maurits Moon이란 목사의 딸이 기증한 것인데 2000년 10월 8일에 마 지막으로 연주되었다. 옛날에는 수동으로 바람을 넣었는데 지금은 전기로 기계를 작 동시켜 바람을 넣는다. 바람을 모으는 기구 위에는 10킬로그램의 쇠붙이가 네 개 놓 여 있는데, 이는 바람이 너무 들어가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집채만 한 기계 를 통해서 바람이 풍금으로 이동한다. 건물 밖의 종은 1675년 바타비아에서 만들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이 종을 울렸 는데 지금은 예배 시작을 알린다. 교회의 서쪽 입구에 8개의 묘비로 남아 있는 옛 묘 지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원래는 11개). 네덜란드식 큰 묘비는 바닥에 수평으로 설치 되고 인도의 코로만델 해안에서 가져 온 돌로 만들어졌다. 1718년에서 1725년까지 바타비아를 다스렸고 이 정원을 기증한 H.Zwaardecroon 총독, 1735년에 죽은 바 타비아 도시 전문가인 Frederik Ribalt와 1695년에 죽은 그의 아들인 Francois Ribalt, 해양 탐험가인 SH Frijkenius 등 네덜란드 중요한 사람들의 묘비이다. 나 머지 네 개의 묘비는 교회를 만든 사람이며 이들의 비문과 문장은 교회 내에 있다. 묘 비 앞에 서면 그 옛날 죽음을 알릴 때처럼 외롭고 높은 종소리가 울린다. 죽어서도 삶 은 항상 저 혼자인 것을. 저 옛날 이곳에서 신앙을 지켜온 그들에게 존경과 그리움을 종소리에 실어 보낸다. 마지막 울린 파이프 오르간의 시월의 선율과 함께. Gereja Sion Jl. Jembatan Batu No. 17, Kota Tua, Jakarta Ba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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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가난의 절묘한 조화 : 루아르 바땅 (Luar Batang) / 노경래

속이 메스껍다. 몇 번 이곳에 와 보았지만, 이번에도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시궁창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견디기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놀이터 삼아 밝게 웃고 있는 마을 아이들이나 평온한 표정으로 모스크 에 앉아 있는 주민들로 인해 자꾸 뒤돌아보게 되었다. 이렇게 루아르 바땅(Luar Batang)은 나에게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주는 동시에 잡아 끄는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루아르 바땅 마을(Kampung Luar Batang)은 자카르타의 대표적인 수상가옥이면서 슬럼가 이다. 면적은 131,500m²이며, 인구는 약 8,000명이고 이중 무슬림이 약 92%라고 한다. 자카르타 시내를 관통하는 강 중에서 가장 큰 강은 찔리웅(Ciliwung, 119km)이다. 이 강은 아주 오래전의 화산활동으로 생긴 서부 자바의 빵그랑고 산에서 발원하여 보고르를 거쳐 북부 자카르타의 루아르 바땅에서 바다와 만나 순다 끌라빠 항구로 흘러간다. 중부 자바에서 발원하여 동부 자바의 바다로 흐르는 솔로강이 많은 노래와 시에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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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강이라면, 찔리웅은 순다족과 버 따위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흐 르는 강이다. 찔리웅 강물이 루아르 바

자바해

땅에 가까워질수록 좀더 검은색의 강 물이 서서히 흘러 내려오면서 - 예전 보다 점차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 비

순다 끌라빠

릿한 냄새를 뿜어낸다. 루아르 바땅 마을은 VOC(네덜란드 동 인도회사, 1602–1800년)에

의해 매립되었

루아르 바땅

다. 당시 이 지역은 진흙더미를 파내 는 자바 출신 노무자들의 거처로 쓰였기 때문에 ‘Kampung Jawa’라고 불렸다. VOC에 고 용된 이들은 찔리웅 강어귀의 수심이 낮아져 배들의 운항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진흙더미를 파내고 수로를 청소하는 일을 했다. 이 지역을 변화시킨 퇴적과정의 사진 (Widyarko 작성)을 보면, 이 지역은 18세기가 되

어서야 VOC가 작성한 지도 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훗날에 ‘Kampung Jawa’는 ‘Kampung Luar Batang’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 마을 이 배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찔리웅 강어귀에 띄워 설치한 통나무(batang)의 바깥(luar) 지 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순다 끌라빠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은 오늘날 로 치면 엄격한 통관심사를 받아야 했다. 이 심사를 받는 동안 선원들은 진흙더미를 파내 는 노무자들의 거처에서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체류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임시 오두막 이 세워지고 점차 마을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도로, 상하수도, 주택 등의 물리적 환경이 정상적인 필요조건에 미달하는 지역을 칭하 는 Kampung은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1840년 이후 원주민들의 주거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여 왔으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다.

자카르타를 걷다 . 113


VOC 지배 동안에 루아르 바땅 마을에는 네덜란드 식민 시스템 구축에 동원된 중국인 과 아랍인들이 소수 정착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사실상의 하층계급인 원주민들이 주로 거 주하게 되었다. 루아르 바땅 마을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지역 주민들은 예멘 태생의 무슬림 선교사이 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문의 일원이라고 알려져 있는 하빕 후세인(Habib Husein)과 관련짓 는다. 그는 1736년 루아르 바땅에 도착하였다. VOC 총독이 순다 끌라빠 서쪽의 조그마한 땅을 하빕 후세인에게 주었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 그는 루아르 바땅 지역에 모스크(‘Masjid Luar Batang’)를 건립(1739년)하고 바따비아 북쪽 지역의 무슬림들을 이끌었다.

1756년 그가 죽자 신자들이 그를 당시 공동묘지가 있었던 따나 아방에 묻으려고 관 (Kurung Batang)을

열어 보니 그의 시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원래 장소로 돌아가

있었다고 한다. 3번이나 그를 다시 관에 넣어 따나 아방에 묻으려고 했는데, 그의 시신은 원래 장소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를 현재의 위치에 묻기로 하고 그 위치를 Luar Batang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Luar’는 ‘밖’을 ‘Batang’은 버따위어로 ‘시신’ 을 뜻하니 ‘Luar Batang’은 ‘(관) 밖으로 나온 시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의 무덤(사진)은 원래 모스크 밖에 있었으나, 모스크가 확장되면서 모스크 안에 안치되 어 있다. 자카르타 및 인근 지역 무슬림들이 다른 지역의 이슬람 성지보다 하빕 후세인 무 덤에 가장 먼저 순례한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수호자 이고 선지자 무함마드의 친인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아르 바땅 마을, 모스크, 그 안의 하빕 후세인 무덤을 보면, 누구나 삶과 종교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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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홍수막이 공사와 매립이 많이 진행되어 예전의 수상가옥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 다. 이곳의 전형적인 수상가옥은 일정한 건축 스타일이 없으며, 앞마당과 뒷마당도 없다. 합판, 모르타르, 함석, 벽돌 등에 이르기까지 집을 짓는 재료가 다양하다. 보통 1층은 가족 모임, 부엌, 욕실 또는 구멍가게로 사용되는 반면, 위층은 침실과 같은 개인 용도로 사용된 다고 한다. 루아르 바땅 마을의 주요 진입로는 현재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으나, 뒷골목 은 여전히 두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비좁다. 이곳 주민들은 의자를 골목길에 내 놓고 앉아 이웃 사람들과 담소하고, 구멍가게 주인들은 그들의 진열장이 비좁아 물건들을 골목길에 내놓고 팔고 있다. 이곳 주민들의 상당수는 순다 끌라빠 항구나 무라아 앙께에서의 노무자, 어부나 선원으 로 일하거나 일상 생활용품을 파는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이곳 모스크에 순례하는 사람들 에게 물건을 팔거나 순례 의식을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루아르 바땅 마을에는 공공장소가 없기 때문에 모스크 주변의 열린 공간이 시장, 주차 장, 사회활동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루아르 바땅의 모스크나 무덤을 순례하는 무슬림에게는 반드시 구걸하는 아이들이 뒤 따라 붙는다. 모스크나 무덤 순례자들이 구호금을 줄 때까지 끈덕지게 따라 붙는다. 순례 자들은 자신들이 모스크와 무덤에서 받은 축복의 보답으로 모스크 앞 열린 공간에서 모스 크 관리들로 하여금 자신이 준 자선금을 나누어 주도록 한다. 주민들은 모스크로 가는 순례자들에게 조화(造花), 자그만 우산, 향, 성수(聖水) 등을 판 다. 물론 이들은 이것이 모스크에서 기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물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모스크에 있는 순례자의 방까지 안내하는 의식을 행하 기도 한다. 이렇게 이곳 주민들의 매일매일 수입은 상당 부분 순례자들 또는 관광객들의 지갑에서 나온다. 목요일 저녁에 모스크 주변에는 부산한 야시장이 열린다. 이때는 공공장소가 사적인 상 업공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자카르타를 걷다 . 115


선지자 무함마드 탄신일이나 하빕 후세인의 기일 등 매년 이슬람력에 따라 개최되는 날 에는 연례 바자(bazaar)가 열린다고 한다. 연례 바자는 매주 목요일 야시장이 열리는 같은 공간에서 열리지만 훨씬 더 큰 규모로 열린다고 한다. 연이은 행사들이 있기 때문에 루아르 바땅 마을 주민들은 어렵지만 근근이 생계를 유지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있어 시장이 있고, 시장이 있기 때문에 종 교가 존립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종교와 시장의 공존인 셈이다. 이곳 주민들의 삶이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고 해야 하나, 신성 한 모스크와 이슬람 성인의 무덤이 있고 많은 무슬림들의 순례 장소라면 당연히 이곳은 기 본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곳을 불도저로 확 쓸어버리고 -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빠사르 이깐 지역처럼 - 자바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초고층 아파트와 럭셔리한 쇼핑몰을 지을 생각을 하는 비즈 니스맨과 공무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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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람들에게 평등이라 함은 집 높이와 크기가 그만그만하고,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인사하는 정치인들에게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일까. 혹은 알라의 사랑을 공 평하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알라 를 불평하지 않는 것일까. 이곳 사람들에게 자유라 함은 그런 집에서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밑으로는 더러 운 강물이 흐르는 수상가옥의 찌그러진 창 너머로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서 사는 꿈을 꿀 수도 있다. 아니면 순다 끌라빠 항구에서 배를 타고 고래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는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 다시 루아르 바땅 마을을 다시 들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바라건대, 찔리웅강 어귀를 흐르는 강물에 고기들이 뛰어 놀고, 갈매기들이 힘차게 날아드는 날이 있기를 기대 한다.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 - 야자와 샌들 그리고 루꾼 노경래 저 | 순정아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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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무는 어떨 땐 ‘플랜트?’하고 물으면 ‘플루토!’하고 대답한다 그건 내 나무들만의 비밀한 위트다 / 김소연-위로 중에서>


시 가는대로 간다 / 박정자 . 120 우기의 독서 / 채인숙 . 121 화석을 찾아서 / 최장오 . 122 자카르타의 한 모퉁이에서 / 최장오 . 123 보물을 잉태한 항아리 / 김현숙 . 124 때마침 바다를 건너는 / 박정자 . 126 네덜란드 인 묘지 / 채인숙 . 128 디엥고원 / 채인숙 . 130 토바의 어부 / 김현숙 . 132 자화상 / 최장오 . 133 삼빠이 줌빠 자카르타 / 박정자 . 134


가는대로 간다

/ 박정자

일을 접고 만남을 줄이고 한적한 들녘이 되어 먼 산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줄기는 결 따라 흐르고 백양나무 숲은 반짝이고 구름은 산비탈 오르내리며 제 그림자를 지운다

그동안 너무 빨리 걸어 온 탓에 휘어버린 발가락을 허공에 펼친다 일렬 로 늘어선 초침소리를 발가락 각도만큼 비틀어 비단잉어 등줄기에 걸 쳐 놓는다 어떻게 병 속의 새가 허공을 날 수 있는지 그 오랜 물음의 유 리벽이 깨진다

풍경에는 밖이라거나 안이라는 말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멀거나 가깝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맨드라미들 모여앉아 큰 입으로 수선떨어 도 신발 옆에 곤히 잠든 고양이까지 다 안다 풍경의 밖에서 풍경의 안 으로 이어지는 발소리를 풍경에도 안팎이 있다는 것을

풍경의 앞과 뒤를 겹쳐서 보여주는 먼 산도 사실은 물과 나무와 구름을 밖에서 안으로 감아 들이는 것이다 느리게 가는대로 가기로 한다 병 속 의 새 어떻게 유리벽을 깨뜨렸는지 묻지 않기로 한다 새로운 물음에 갇 히지 않기로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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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의 독서

/ 채인숙

모든 이야기에는 먼지가 덮이기 마련이라네 옛날 시인의 달밤이 책꽂이에서 환하게 빛날 때 불온한 이름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싶었지 벤자민 고무나무에 등이 켜질 때마다 먼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였고 당신이 일러 준 철자법을 잊을까 남은 이름들의 습기를 들이마셨네 읽어야 할 이야기가 남았으므로 여름은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않았네 우기의 검은 곰팡이가 늑골 사이로 번져가네 이토록 고요한 시절은 다시 없으리 너를 읽느라 평생이 지나가네 (현대시학 2018 5,6월호)

시 . 121


화석을 찾아서

/ 최장오

7만5천년의 세월을 거스르는 커다란 시조새의 눈을 보았다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 바리산맥 아래 큰 눈을 부릅뜨고 눈물 가득 담은 시조새의 눈을 보았다. 얼마만큼의 몸부림과 열기를 토해냈으면 아직도 식지 않 은 몸으로 대양의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는지, 몸과 깃을 다 태우고 눈 만 남은, 얼마만큼의 사랑으로 인내하다 분출했으면 핵 겨울을 불러와 사랑하는 것을 모두 얼려버렸을까 적도의 도도한 태양과 아직 남은 열기를 식히며 7만5천년전 그 뜨거움 을 잊지 못해 바람도 호숫가를 돌아 화석으로 단단하게 굳어진다 참회 하는 다나우 토바, 수마트라 단층에서 울렁이는 마그마를 누르고 시냐 붕 화산을 어우르며 더 커다란 시조새의 화석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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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의 한 모퉁이에서

/ 최장오

비가 내린다 바람과 마른 도시 냄새가 버무려져 내린다 멘뗑의 고가도로 아래서 여장남자를 만났다 사월의 함박눈처럼 어색하게 웃는 표정이 비 오는 하늘을 닮았다 달고 진한 믹스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인다 온 몸이 퉁퉁부어 오줌에서 거품과 단내가 나도록 쏴 쏴 달리는 자동차 소음에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비 오는 날 고가도로 아래서 여장남자를 만났다 삐에로 보다 더 짙은 남자의 웃음이 흐린 하늘을 닮았다 칙칙한 거리의 벽화들이 흐르는 빗물에 무채색으로 어두워진다 그의 눈가에 번진 마스카라가 깜빡이는 점멸등처럼 먹먹해진다 비 바람에 치대는 플래카드가 성난 군중의 함성이 된다 비 오는 날 고가도로 아래 여장 남자는 굽어진 어깨로 소리를 지른다 들어 주는 이 없어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길가의 미모사가 그를 닮았다 빗 물은 거리의 벽화 위로 번지 듯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시 . 123


보물을 잉태한 항아리

/ 김현숙

자카르타 국립박물관 보물 관에서 할머니의 고추장 단지를 보았다 바스러질 듯 윤기 잃은 갈색 항아리가 시간이 머물지 않는 유리관 속에 누워있다

섭씨 1,000도가 넘는 머라삐의 용암과 천년의 세월을 화산재 아래 버티며 금 세공품들을 품어낸 그 항아리

드라마틱한 이야기 하나 없이 농부의 곡괭이에 슈퍼보물을 잉태한 그는 훤히 보이는 관 안에서 아직도 산후조리 중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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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마에 두 번 구워진 몸은 고열에 터진 황금장식 속 진흙처럼 말라붙고 컴컴한 배 속은 열기 식은 분화구만큼이나 공허하다

그래도 몸에 금칠 한 번 한 적 없는 항아리가 보물 관의 한 가운데 누워있다 텅 빈 자궁을 훈장인 양 드러내고 에어컨 아래 빙하기를 견디고 있다

<시작 노트> 자카르타에 있는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 가면 고향을 만날 수 있다. 장독대의 항아리와 오래된 사기그릇들, 할머니 옷장 속의 한복과 닮은 직물들, 절에서 보 던 불상과 석상들…… 실로 많은 것들이 유년의 기억에서 튀어나온 듯 정답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잡아끄는 건, 머라삐 화산재 속에서 천 년을 버티다 발견된 보물 관의 항아리다. 이를 보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위해 무한한 희생을 바친 소박한 어머니 의 모습이 느껴진다. 가슴 뭉클한 잉태의 사연이 있는 그곳, 오늘도 그곳의 안부가 궁금하다.

시 . 125


때마침 바다를 건너는

/ 박정자

1 젖으며 마르며 흔들리며 통나무 하나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에 몸을 맡기고 들며 나며 가라앉으며 솟구치며 가고 있었다, 그런 것이 순리이려니

2 굼실거리며 흘러와 저 멀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통나무 하나 물결 닮은 푸른 지느러미 흔들며 떠오를 때마다 한 줌씩 빛을 쏟아놓고 있었다 언 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어질까 너의 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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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짧은 눈인사로 스치는 여행지의 사람 너 그리고 나, 때마침 바다를 건너다 곁을 지나며 손 높이 흔들어 반길 때조차 우리는 통나무보다 나은 것 없어서 들며 나며 가라앉으며 솟구치며 시작과 끝은 아예 없이 지워지며 순간을 영원처럼 영원을 순간처럼 가고 있었다

시 . 127


*

-EGHTGENOOT VAN MR PITER MIJER

네덜란드 인 묘지

GEBOREN DEN 6 JULIJ 1816

ONTSLAPEN IN DEN HEER DEN 8 APRIL 1870

/ 채인숙

이방인들이 그들의 묘지로 당신을 데려 갔다 서둘러 이름을 새기고 하얀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 당신이 죽고서야 떠나 왔다는 먼 나라의 당신 이름을 보았다

남은 생은 무덤에 이마를 대고 살아 가야지 낡은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묘지 위로 햇볕이 내려 앉았다

우리는 함께 잊자고 했다 잊을 수 있는 것들이 아직 있어서 좋았다

당신이 살았던 나라의 항구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이 핀다고 했던가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쳐버리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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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뀐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생각하였다

화란의 말을 잊었으므로 돌아갈 수 없다는 편지를 쓰지 못했다 눈 먼 자바의 물소처럼 소리를 죽여 혼자 울었다

무엇을 위해 떠나왔는지 누구를 위해 돌아가야 하는지 세월은 이유를 남기지 않고 흘렀다

당신만이 유일했으나 당신만이 죽었다 묘비 위로 푸른 이끼가 지붕처럼 덮여 갔다

나의 위로는 모든 당신이었으나 당신의 위로는 언제나 당신 눈물뿐이었다

*350년 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은 인도네시아에는 수도인 자카르타에만 5개 이상의 네덜란드 인 묘지(Makam Belanda)가 남아 있다. (현대시학 2018 5,6월호)

시 . 129


디엥고원

/ 채인숙

1 열대에도 찬 바람이 분다

가장 단순한 기도를 바치기 위해 맨발의 여자들이 회색의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른다

한 여자가 산꼭대기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태양이 한 개씩 태어난다

2 무릎이 없는 영혼들이 사라진 사원 옆에서 에델바이스로 핀다 몇 생을 거쳐 기척도 없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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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며 천 년을 끓어 오르는 화산 속으로 여자들이 꽃을 던진다

3 어둠의 고원을 거니는 것은 만삭의 바람

여자들의 맨발을 어루만지던 안개의 진흙이 제 몸을 돋우어 사원을 짓는다

4 똑같은 계절이 오고 또 간다

모두가 신은 없다는데 나는 오늘도 기도가 남았다

*디엥고원: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복합 분화구 지역. 자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유적지로 서기 950년 경 400여 개 이상의 힌두사원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8개만 남아있다. (시인광장 2018 6월호)

시 . 131


토바의 어부

/ 김현숙

흩날리는 안개 속 낡은 조각배 하나 첨벙 첨벙 아침을 깨우며 물가로 물가로 밤새 어둠에 떠밀린 삶의 올가미 걷어 올립니다 호수가 물멀미로 토해 낸 수초덩이 찌그러진 생수 병 찢어진 비닐봉지 목숨을 버린 피라미 몇 마리 등이 새까맣게 여읜 노인은 토사물을 양동이에 물고기 마냥 쏟아 붓고 목구멍에 걸린 가래에 숨 깊은 기침을 합니다 멀리 산 그림자 위로 달아난 물결은 일렁이고 아침은 가깝고 하루는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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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최장오

짧지만 긴 하루를 대면하는 시간이다 잠으로 반쯤 감긴 눈을 들어 쉐이빙 폼을 듬뿍 바른다 라벤더향이 코끝을 스치며 잘 발달된 더듬이처럼 턱 선을 더듬는다 웃고 찡그리고 째려보며 구석구석을 크로키 한다 아침마다 그린다 맑을 때나 흐린 날도 어김없이 자화상을 그린다 유일하게 너를 보는 시간 사내들이란게 그렇다 거울에 제 얼굴을 들이밀 일이 흔치 않다 숙련된 조각가의 손길로 방점을 찍으면 파르스름 피 한 방울,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된 일상이다 깊어지는 주름과 희고 거친 머리칼이 낯설다 습기 먹은 거울을 손바닥으로 훔치면 고집스런 얼굴이 나타난다 할아버지 제삿날 잿빛 두루마기 차려 입은 아버지가 거기에 있다 시 . 133


삼빠이 줌빠 자카르타

/ 박정자

어느 저녁 당신은 그곳에 당도한다 잡아끄는 낯선 언어와 짐꾼들의 손을 지난다 당신은 공항을 나서자 갑자기 밀려든 젖은 열기에 잠시 당황한다 열대의 몸냄새에 목젖이 간질 코끝이 간질거린다 별모양 밤풍경이 악수를 청하며 당신을 안심시킨다 슬라맛 다땅 Selamat Datang

새들의 활기에는 어둠을 밀어내는 힘이 있다 꽃으로 단장한 나무들이 당신을 바라본다 웃는다 당신은 바틱과 가믈란에 새겨진 남국의 무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잘 웃고 바쁠 것이 별로 없다는 그곳의 풍경 위에 당신 마음의 풍경을 겹쳐보다 웃는다 나무들이 당신을 본다 슬라맛 띵갈 Selamat Ting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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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서 불덩이가 이글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곳에 다녀간 사람은 반드시 다시 온다는 농담을 당신은 듣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정말 그럴 수 있을지 묻는다 키 큰 야자나무에서 흘러내린 붉은 저녁이 바나나이파리들을 잠재울 때쯤 당신은 그 도시를 떠난다 슬라맛 잘란 Selamat Jalan

다시 만나요 삼빠이 줌빠 라기 Sampai Jumpa Lagi

시 . 135


<인간의 운명에 우수를 느끼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 난세에 목숨 을 걸 수 있겠는가 때로 천재도 나타났지만 허무를 한결 정교 하고 치밀하게 했을 뿐이다 자명한 것도 백주의 소용돌이를 깊 게 했을 뿐이다 /다무라 류우이찌-가라앉은 절 중에서>


물따뚤리 특집 유럽의 아시아 지배를 종식시킨 신호탄 『막스 하벨라르』 / 사공 경 . 138 디포네고로 전쟁과 강제 경작 제도 / 배동선 . 142 읽어야한다. 배워야한다. 사이자-아딘다 도서관과 물따뚤리 동상 / 사공 경 . 146 Museum di Rangkasbitung / Ubaidilah Muchtar . 152


유럽의 아시아 지배를 종식시킨 신호탄 『막스 하벨라르』 / 사공 경

1999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욕 타임즈가 지난 1000년 동안에 있었던 사실 가운 데 100대 베스트를 뽑았다. 그 중에서 ‘최고의 이야기’로 선정된 것은 인도네시아 르 박 군수 보좌관으로 온 네덜란드인 에두아르트 데커르(Eduard 1887)가

Douwes Dekker: 1820-

쓴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라는 소설이었다. 데커르는 1860년 5월 15

일, 물따뚤리(Multatuli)라는 필명으로 암스테르담 De Ruyter 출판사에서 『막스 하벨 라르』를 출간한다. 1859년 9월 부인으로부터 이혼 독촉을 받을 때 벨기에 브루쉘에 있는 한 호텔 방에 틀어박혀서 쓴 소설이며 원제는 『Max Havelaar, of de Koffie veilingen der nederlandsche Handelsmaatschappij(막스 하벨라르 또는 네덜란드 커피 무역회사 경매)』이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물따뚤리(이하 물따)’는 라틴어로 “(나

는) 이미 많은 고통을 받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설 속에서 물따는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되고 있는 특히 서부 자바의 르박 지역의 식민통치의 폭정과 비열함, 그리고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귀족 계급의 적 나라한 모습을 파헤치고 네덜란드 권력과 봉건 지배자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신민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정책은 독특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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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 초판본(1860년)과 5쇄본(1881년) 표지

다. 봉건 제도는 식민지 지배자들에 의해 바뀌지 않았고, 심지어 원주민을 강탈하는 데 사용되었다. 보흐(Van den Bosch: 1830-1833) 총독이 권력을 잡을 때 봉건적 통치 체 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인간에 대한 ‘평등, 자유, 박애’ 라는 위대한 프랑스 시민 혁명 슬로건의 핵심에 바탕을 두는 유럽의 도덕성에 위배된다고 그는 고발하고 있다. 소설에서 네덜란드 정부의 강제 재배 정책으로 이 넓고 기름진 땅에서 굶어 죽는 인 도네시아 사람들이 수 없이 많았고 심지어 자식을 파는 어미까지 생겨나고 있다고 말 하고 있다. 강제 재배 정책은 주로 커피, 차, 향료, 설탕 등이었다. 이 책이 나오자 네덜란드 국민들은 물론 유럽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가혹한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는 ‘피식민지 지역의 고통의 산물’이라는 인식을 일깨워 주었다. 마침내 네덜란드 정부는 지금까지의 강압적인 정책에서 ‘윤리정책’을 펴게 된다. 네 덜란드 식민정부에 충성하는 엘리트를 포함한 인도네시아인 들에게 제한적이지만 교 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 진 빚을 갚는 시도를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그 외 몇 가지 중점을 둔 정책은 관개 치수, 의료지원 체계 그리고 인구의 평균적 분산화였다. 영국 서섹스 대학교(Sussex University)의 박스올(Peter Boxall) 교수는 『막스 하벨라르』 를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21번 순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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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의 저자인 에두아르트 데커르(Eduard Douwes Dekker)

며 『꿈의 해석』의 저자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1907년 이 소설을 최고 의 책으로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도 세계적인 작품으로 평가 했고 그가 감명 깊게 읽은 문학작품 목록에 기록하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교는 UNESCO에 이 소설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신청했다. 또한 2002년 네덜 란드문예진흥원으로부터 ‘네덜란드 문학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영예를 받았다. 마지막 장에서 물따는 이 책을 "내가 아는 소수의 언어로, 그리고 내가 배울 수 있는 많은 언어로" 번역 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 실제로 1868년에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 고, 이후 4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인도네시아어로는 1972년이 되어서야 번역되었다. 『막스 하벨라르』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물따는 자신이 직접 펜을 꺼내며, 식민지 정책에 대한 맹렬한 비난과 인도네시아인 들의 고통을 헤아려 달라고 네덜란드 국왕 에게 요청하는 탄원서에서 이 소설은 절정에 달한다. 물따는 정의 구현에 대한 목표의식이 뚜렷한 사람으로 핍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부정에 대항을 했고, 잘못된 행동, 방향, 절차로 인해 인도네시 아인 들이 노예처럼 전락한 것에 연민을 느꼈다. 또한 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사 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타 종교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존중, 즉 인간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가치가 이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막스 하벨라르』의 한 부분인 사이자와 아딘다(Saijah와 Adinda)에서 당시 인도네시 아 사람들의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물소가 빠랑 꾸장(Parang Kudjang) 지 역 책임자에게 잡혀 갈 때, 그는 오랫동안 깊게 슬퍼했다. 상처 입은 시간들은 다가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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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내기 철에 뿌릴 볍씨는 이미 바닥이 났고, 결국 곡간에 쌓을 벼 한 포기 남아 있 지를 못했다.”고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민중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 는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자바 문학이나 인도네시아 문학은 그 때까지는 그러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따는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다.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과거 네덜란드 문학 작품의 언어를 크게 향상 시킨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유연하고, 확실하고, 감동적인 언어 스 타일을 통해 죽어 있던 네덜란드의 문학을 깨어나게 했으며 잠자는 네덜란드 사람들 을 각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인도네시아 소설가인 쁘라무디야 아난따 뚜르(Pramoedya Ananta Toer)는

“물따는 문학적 언어로 쓰여 졌으며, 주인공의 아픔과 투쟁 정신을 잘

그리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기록 된 작품으로 네덜란드와 유럽 공동체에 알려진 식민 지의 비극적인 운명의 베일을 벗겨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다음 세대의 문학인들 에게 큰 문학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예로 ‘80 운동’을 들 수 있으며, 주역들은 반 디젤(Van Deyssel)과 클루스(Kloos)와 같은 물따의 문학 추종자들이었다. 『막스 하벨라르』는 인도네시아인 들에게도 조국이 있다는 사실을 각성 시킨 계기 가 되었으며 그들은 자유와 독립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느꼈다. 이로 인해 1945 년 이 후, 민중들이 죽창으로 단결하여 1949년에 인도네시아는 마침내 완벽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이 소설은 제2차 세계 대전 뒤에도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로 남아 있 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탈 식민지화를 촉구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역사에 있어 물따는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여성선구자 까르띠니 (R.A Kartini),

소설가 띠르또(Tirtoo Adhi Soerjo)나 쁘라무디야, 시인 랜드라(W.S. Rendra),

뿌장가(Pujangga Baru) 등을 통해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현 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 쳤다. 강제 재배를 강요하는 식민주의에 대한 분노나 투쟁 뿐만 아니라 전통과 권력, 그리고 봉건제도에 대항하는 힘찬 목소리가 되었다. 또한, 소설 제목은 1988년 ‘막스 하벨라르’ 표 커피로 다시 태어나 공정무역의 지평을 열었다. 세계가 같이 살아가고 한국 경제에 희망이 실리려면 모두 다 함께 가자고 외치는 물 따뚤리가 얼마나 더 많이 나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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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포네고로 전쟁과 강제 경작 제도 / 배동선

<막스 하벨라르>의 배경이 되는 1840년대에는 동인도 전역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반란이 거의 끝나가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책의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것과 같이 네덜 란드는 당시 람뿡에서 벌어진 농민군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중이었고 수마트 라 북부의 메단, 아쩨 지역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발리의 왕국들을 대상으로도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총독부는 물론 본국 재정마 저 파탄낼 정도의 거대한 전쟁이 10여년 전 그 막을 내린 상태였어요. 그것은 ‘자바 전 쟁’이라고도 불리는 ‘디포네고로 전쟁’이었죠. 이 전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파괴적이었는지는 여러 지표들이나 전사상자 수치를 들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반증하는 것은 네덜란드군이 디 포네고로군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동인도 전역의 모든 반란군들과 휴전을 맺었다는 것 입니다. 1825년 자바 전쟁이 발발하면서 네덜란드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전을 거 듭했고 디포네고로군의 세력이 자바섬 전체로 퍼지면서 총독부가 있는 바타비아를 위 협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맞설 네덜란드군은 병력의 절대 숫자가 충분치 않았을 뿐 아 니라 그나마 동인도 전역에 흩어져 각각 고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죠. 네덜란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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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섬의 전황을 뒤집기 위해 타 지역의 네덜란드군들을 모두 자바섬으로 소환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지방세력들의 군소반란에 매달릴 여유가 없을 만큼 네 덜란드는 디포네고로군에게 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네덜란드 본국으로부터 도 추가 파병을 받아야 했죠. 디포네고로 왕자가 좀 더 확실히 밀어붙였다면 네덜란드 의 동인도 식민지 강점은 이때 그 종말을 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소는 헨드리끄 머르쿠스 드콕 장군(General Kock)이

Hendrik Merkus de

도입한 벤뗑 스텔셀 전략(Strategy Benteng Stelsel)인데 이는 ‘요새 시스템 전략’

정도로 번역됩니다. 반군 지역을 점령하면 신속하게 간이 요새를 세워 해당 지역을 영 구적으로 확보하고, 촘촘히 구축된 요새망 사이에 통신로를 기민하게 운용하여 각 지 역 반군들을 격리시키고 궁극적으로 역외로 몰아내거나 섬멸하겠다는 것이었죠. 이 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디포네고로군은 마침내 수세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런 데 그 성공의 이면에는 네덜란드의 경제적 딜레마가 있습니다. 대규모 군대를,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식민지에서 유지한다는 것, 더욱이 거기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 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일이었죠. 그런데 네덜란드군은 이에 더해, 전쟁 후반기에 요새 시스템 전략의 일환으로 자바섬 일대에 300개가 넘는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결 국 그 과정에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총독부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본국의 국고마저 완 전히 거덜내 버렸던 것입니다. 1830년 드콕 장군이 휴전협상을 빌미로 디포네고로 왕자를 불러내 마글랑에서 나포하면서 5년간의 자바전쟁은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게 되지만 이제 네덜란드로 서는 그간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신속히 메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 래서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쥐어짜기 위해 등장한 것이 ‘강제 경작 제도’(Cultivation System=Cultuurstelsel)라는

정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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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비아 신임총독 요하네스 반덴보쉬(Johannes Van Den Bosch)가 도입한 이 제도로 인해 농부는 자기 농지의 5분의 1을 할애해 설탕, 커피, 인디고 같은 환금작물 재배해 야 했고 농지가 없는 주민들은 1년의 5분의 1을 정부 토지에서 노역해야만 했습니다. 좀 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벼를 경작하는 정도의 비용만을 지불했고 그나마 판매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나누어 주지 않으면서 비용이나 흉작 에 대한 책임은 모두 농부에게 지웠습니다. 심지어 세금을 낸 농부들이 강제노역에 동 원되거나 비용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례도 빈번했습니다. 자기 농지를 관리할 틈 도 없이 환금작물 재배에 강제동원되어야 했던 자바인들은 강제 경작 제도가 시행되 던 40년 동안 몇 번씩이나 가혹한 기근을 맞아야 했고 동인도 전역에서 아사자들이 속 출했습니다. 3모작이 가능한 천혜의 땅 자바에서 말이죠. 디포네고로 전쟁에 대한 네 덜란드의 처절한 보복이었을까요?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막스 하벨라르>는 1840년대 서부 자바의 반뜬과 르박, 수 마트라의 나딸과 빠당 등을 그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강제 경작 제도 가 한창 시행되고 있던 무렵입니다. 동인도의 주민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부가해 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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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서의 죄악을 정화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성직자들의 정신나간 소리에 네덜란드 본국의 기독교인들은 열성적으로 아멘을 외치고, 책의 화자 중 한 명은 르박의 토양이 커피재배에 적합치 않은 이유가 토양개선을 위해 나태한 주민들의 노동력을 쥐어 짜 라는 신의 계시라고 말하는 모습이 본문에 등장하죠. 저자 물타뚤리는 주인공 막스 하 벨라르의 입을 빌어 이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근대소설 <막스 하벨 라르>가 결과적으로 강제경작시대의 종말을 가져오고 훗날 세계공정무역의 아이콘이 된 것은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변에는 반담 장군(또는 환 담머 장군: General van Damme)에 대한 작 가의 앙심도 깔려 있습니다. 반담 장군의 실존 모델인 안드레아스 빅토르 미힐스 대령 은 드콕 장군 밑에서 디포네고로 전쟁에 참전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훗날 바타비아 총 독대행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데 소설 속에서처럼 저자 물타뚤리와 실제로 나딸에서 회계문제로 충돌합니다. 당시 수마트라 서부해안지역 주지사이기도 했던 미힐스 대령 을 감독관이라는 미관말직의 물타뚤리가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고 매우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공직에서 떨려나면서 이를 갈았음도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책 속에선 반담 장군/미힐스 대령에 대한 비난과 자신을 위한 변호가 많은 지면을 차지합니다. 물타뚤 리가 이 책을 개인적 복수의 도구로 사용한 측면도 부인할 수는 없는 대목입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것은 1860년으로, 미힐스 대령은 그보다 11년 전인 1849년 발리 정복전쟁 중에 전사했고 네덜란드의 국고를 파탄시킨 드콕 장군과 디포네고로 왕자는 각각 1845년과 1855년에, 10년의 터울을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물타뚤리는 그들이 모두 죽은 후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으니 이 책은 어쩌면 ‘끝까지 살아남은 자의 주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타당한 인간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그 기저에 담고 있 기 때문이죠. 물타뚤리, 즉 에두아르트 다우베스 데커르도 1887에 유명을 달리합니다. <막스 하 벨라르>가 처음 출판되고 10년 후인 1870년, 그동안 동인도를 피폐하게 만든 강제경 작제도가 마침내 폐기되는 것을 목도한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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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한다 배 . 워야한다 . 사이자 아 -딘다 도서관과 물따뚤리 동상 / 사공 경

1. 사이자―아딘다 도서관(Perpustakaan Saidjah Adinda) 유럽의 아시아 지배를 마감하게 한 소설 『막스 하벨라르』속의 어린 연인들의 이름 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도서관이 반뜬주 르박군 랑까스비뚱에 있다. 르박군 랑까스 비 뚱은 『막스 하벨라르』가 태어난 곳이고 작가 물따뚤리가 부지사로 일한 마지막 장소 이며, ‘사이자-아딘다’라는 특별한 이야기의 중심 배경이기 때문이리라. 검은 배경에 낭만적인 글씨체의 하얀색으로 ‘사이자 아딘다 도서관’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다. 부서 지고 부서졌던 처참한 사랑이지만 그들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이 지금도 하얀 색 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르박 군 지방정부는 사이자-아딘다 문서보관국 및 도서관의 건물 준공식(2017년 12 월 27일)을

기념하여 책 분류는 물론이고, 유치원, 유아원생들을 대상으로 도서관을 주

제로 한 사생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기념하는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현재 도서관에 는 약 1천여 권의 장서가 비치되어 있는데, 아이부터 성인까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 는 시민 도서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도서관 건물 위쪽에는 <행운, 자연, 건강 >을 상징하는 초록색으로 ‘사이자 아딘다’라고 적혀 있고, 1층 벽면에는 순다어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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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다(Wilujeng Sumping).’라고 청색으로 쓰여 있다. 청색은 인도네시아에서는 < 자유, 상상력, 신뢰, 지혜, 자신감>등을 상징한다. 도서관은 3층 건물로 지붕은 어두운 붉은색이고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현대적 건 축자재로 지어진 건물이다. 일부 벽은 굵은 대나무로 장식하였다. 대나무는 인도네시 아 서민들, 특히 눈물의 역사를 써 온 랑끼스비뚱 주민들의 상징이다. 또 다른 건물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벽 기둥이 아래로 좁아지는 건축양식인데, 이는 르박군에 있는 바두이(Baduy) 종족의 논밭에 있는 곡물 창고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지역의 주 민들이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진정한 농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자와 아딘다가 처음 만날 때 어린아이여서일까. 어린이들이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어린이관이 제일 잘 꾸며져 있었다.

도서관 외벽에는 문명에 물들지 않고 산간 오지에 숨어 사는 바두이 족 흰색 전통 복장을 한 소년, 소녀가 책 읽는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바랑처럼 생긴 흰색 천 으로 된 가방을 메고 『인도네시아 문화』라고 적힌 빨간색 책을, 어떤 아이는 청색표지 의 책을, 다른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어깨 너머로 책을 보고 있다. 배경으로 바두이 전통 가옥이 보이고, 개울물이 바위 사이사이로 흐르고 있다. 벽화를 통해, 문명과는 등을 돌린 채 그들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바두이 족들 도 교육을 통해, 문자 해독을 통해, 현대화 물결에 동참해야 한다는 르박 지방정부의 물따 뚤리 특집 . 147


강렬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과거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대 때 가난하고 못 배워 서 갖은 고난을 당했던 사이자-아딘다로 대표되는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더 이상 없 어야 한다고 벽화는 사무치게 말하고 있다. 도서관 복도에 네덜란드에 있는 에드워드 도우웨스 데커르(Eduard Douwes Dekker) 동상 사진이 걸려 있고,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다. -출생: 1820.3.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사망: 1887.2.19 독일 Ingelheim am Rhein -국적: 네덜란드 -에드워드는 르박 부지사로 임명되었다(1856.1.21~1856.4.4). 1859년 9월, 그는 『막스 하벨라르』를 브뤼셀의 한 호텔방에서 썼다. 소설 『막스 하벨라르』를 출판했 을 때 물따뚤리(Multatuli)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는 라틴어로 ‘나는 이미 많은 고 통을 겪었다.’라는 뜻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시대에 그는 피를 토하며 인도네시아 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그 결과 유럽인들에게 이방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단아하고 신념에 차 보였다.

2. 물따뚤리 동상과 사이자-아딘다 동상 도서관 옆에 있는 물따뚤리 박물관 정원에는 물따뚤리, 사이자, 아딘다 청동 동상 이 있다. 물따뚤리 동상은 크기 2.5M이며 무게는 400Kg로 의자에 앉아 엄숙한 표정 으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책의 크기가 사람보다 더 크다. 이는 책은 학문의 보고 로서 정신적 양식으로 육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철학적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리 라. 물따뚤리 동상은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고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던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라, 문맹을 퇴치하여 많은 지식과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식민 지배를 당하 지 말자는 그의 외침을 큰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상징한 것이다. 동상 뒤에는 책장 도 있다. 마치 물따뚤리가 책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 목적이 있는 삶을 위해, 삶의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성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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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라. 행동, 아픔, 감정이 없는 침묵은 죽음이다.’라 고. 그는 큰 책을 읽는 모습으로 절규하고 있다. 왜곡된 봉건제도에서 비롯된 식민지 통치자에 대한 비판과 원주민들의 비참한 삶을 스스로 깨닫게 만들기 위해 그는 배워 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사이자, 아딘다 동상은 각 높이 1.8M, 무게 150Kg이다. ‘물따뚤리 박물관에 잘 오 셨습니다.’라고 팔을 내뻗어 방문객을 영접하는 모습이다. 소설 속처럼 물소 등에 올 라 탄 모습이나 배고픈 땅을 떠도는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굳건한 모습이다. 아딘다는 존경의 눈빛으로 물따뚤리를 바라보고 앉아 그에게 바칠 꽃을 손에 쥐고 있다. 책장을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식민의 아픔을 담고 있고 앉아 있는 의자 옆에 빈자리가 있 어서일까? 우리의 ‘소녀상’이 떠올랐다. 그 빈자리에 하늘을 감싸 안은 초록이 내려와 평화를 말하고 있었다. 그 여백은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기 위해 아픈 역사를 기 억하고 다음 세대에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우리의 ‘평화의 소 녀상’처럼. 이처럼 사이자-아딘다 모습은 소설 속의 아프고 남루한 소년소녀 모습이 아니라. 창의적인 예술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사람다운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미래 지향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역사의 진보인 것이다. 아딘다가 쥐고 있는 꽃 물따 뚤리 특집 . 149


은 소녀상의 어깨 위의 있는 새처럼 <자유, 해방, 평화>를 외치며 식민지 박해에서 능 멸 당했던 이들의 명예와 존엄이 회복되기를 절규하고 있다.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 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3. 프람-물따뚤리를 외치다 ‘인도네시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 프라무디야(1925-2006)는 40여 년 간(1948-1999년) 가택연금· 투옥· 유배를 당한다. 그는 “물따뚤리를 모르는 정치인 은 분명 악랄한 정치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도네시아 역사와 인간애를 모 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프라무디아(프람)는 생전에 물따뚤리의 동상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인 을 인간애로 감싸 안은 물따뚤리를 존경하고, 인도네시아공산당(PKI) 예술인동맹인 렉 끄라(LEKRA)를 통해 물따뚤리를 계속 소개하였다. 1959년 그는 물따뚤리 탄생 140주 년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자고 제안했으나 당시 수카르노 대통령은 거절하였다. 허나 렉끄라는 계속 물따뚤리를 추모하였으며 1964년 물따뚤리 문학 아카데미를 결성한 다. 물따뚤리는 지식인의 의식을 각성 시킨 원동력이고, 인도네시아인들에게도 조국이 있다는 사실을 각성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프람은 강조하고 있다. 프람은 물 따뚤리를 인도네시아 역사의 중요한 인물로 꼽았다. 프람은 생시에 물따뚤리의 동상 건립을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몇 번이나 제안했으 나 이미 기득권이 된 수카르노는 그가 네덜란드인이라는 이유로 매번 거절하였다. 인 도네시아에 뿌리 박혀 있는 부패가 식민 시절부터 군수나 왕족으로부터 이어지는 악 독한 엘리트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구체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엘리 트였음으로. 2006년 4월, 타계할 때까지 프람은 언젠가 물따뚤리 동상이 건립될 것이라는 확신 을 갖고 있었다. 동상 제막식이 2018년 2월 12일 물따뚤리 박물관 개관과 함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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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 그의 확신은 그가 죽고 난 후 12년 뒤에 현실화 되었다. 이처럼 어느 나라든 불 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동상의 그림자는 동상이 세워지기까지의 아프고 고달팠던 긴 시간을 말하는 것 같았다. ‘평화의 소녀상’의 그림자의 의미처럼. 사이자와 아딘다의 동상 앞에 서서, 두 슬픈 연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이자. 너를 한 번도 놓은 적이 없어. 실을 짤 때나 천을 만들 때나 벼를 찧을 때 도.’ ‘내 사랑 아딘다, 네가 오는 소리가 들려. 멀라띠 흰 꽃을 잔뜩 머리에 이고 풀숲을 헤치고 오는 너의 치맛자락 소리가...’ 물따뚤리가 소리친다. “인간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아. 부셔지고 부셔졌던 사람들아.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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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um di Rangkasbitung oleh Ubaidilah Muchtar

Pada minggu terakhir bulan Desember 2016 kamu dipindahkan dari

Ciseel Sobang ke Rangkasbitung, Lebak atau Jalan Alun-Alun Timur No.

8, Rangkasbitung. Rangkasbitung berasal dari dua kata Rangkas dan Bitung. Rangkas berarti berguguran atau meranggas, sementara bitung diambil dari nama

salah satu jenis bambu. Rangkasbitung berarti bambu yang daunnya meranggas atau berguguran. Rangkasbitung adalah satu dari 28 kecamatan yang terdapat

di Kabupaten Lebak. Menurut keterangan salah seorang warga, melalui bambu inilah warga di Kabupaten Lebak dapat memenuhi kebutuhan hidupnya dengan

berjualan bambu bitung. Bambu menjadi penolong menuju masa depan yang cerah. Meski tidak semua daerah di Lebak memiliki kebun bambu.

Gedung di Jalan Alun-Alun Timur No. 8, Rangkasbitung menjadi tempat

baru. Letaknya tepat di sudut jalan antara Jalan Abdi Negara dan Jalan R. Muryani Nataatmaja. Berhadap-hadapan dengan Masjid Agung Al Araf di sebelah barat Alun-Alun Rangkasbitung. Bangunan bergaya arsitektur kolon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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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i dahulu merupakan gedung markas wilayah pertahanan sipil. Bahkan jauh sebelum itu merupakan gedung wedana Rangkasbitung.

Gedung itu terdiri dari tiga bangunan, berbentuk segi empat. Bangunan

pertama dan kedua berhubungan langsung sehingga membentuk serupa kepala

dan badan. Badan merupakan bangunan utama. Bangunan terakhir merupakan gedung penunjang berbentuk persegi panjang yang terdiri atas kamar-kamar

yang bersisian satu sama lainnya. Di salah satu ujung bangunan terdapat pintu

gerbang untuk keluar masuk mobil dan tempat penjagaan, di mana terdapat gerbang untuk keluar-masuk orang. Di sisi yang lain terdapat pintu yang dibuka sesekali ketika acara tertentu berlangsung.

Bagian depan bangunan utama yang menyerupai kepala merupakan pendopo.

Bayangkan empat atau enam tiang kayu yang ditancapkan di tanah, masing-

masing ujung atasnya saling dihubungkan dengan kayu-kayu lain dengan cara dipaku atau diikat, lalu di atasnya diletakkan penutup dari genteng. Bangunan

pendopo tanpa dinding, sangat sederhana dan berfungsi sebagai pesanggra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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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au tempat berkumpul. Di tengah-tengah pendopo menggelantung lampu

besar. Lantai pendopo terbuat dari keramik bercorak gaya baru sementara tegel

aslinya terkubur di bawahnya. Tegel asli dapat dilihat dari kaca tempered di ujung pendopo dekat pintu masuk ke gedung utama. Tegel aslinya berbentuk segi empat berukuran dua puluh kali dua puluh sentimeter dengan corak dan warna merah yang mencolok.

Di samping pendopo terdapat taman dengan rumput dan pohon-pohon kecil

dan besar. Pohon besar di samping pagar menghasilkan bunga merah muda, kami menyebutnya pohon ki ambon. Setiap hari daun-daun kecilnya memenuhi taman dan halaman samping pendopo. Di dekat taman berdiri patung Eduard Douwes

Dekker alias Multatuli dari bahan perunggu seberat lima ratus kilogram se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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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duk memegang buku setinggi dua setengah meter. Buku dipangkuannya tampak lebih besar dari tubuh yang memangkunya. Seperti filosofi yang ingin

disampaikan bahwa isi kepala berupa pengetahuan sebagai landasan harus lebih

besar agar mampu melaksanakan perubahan. Terdapat pula patung Saidjah

dan Adinda serta rak buku. Patung Saidjah sedang berdiri mempersilakan pengunjung untuk masuk setinggi dua meter dan Adinda setinggi satu sengetah

meter sedang duduk di bangku memandang Multatuli. Luas keseluruhan area patung dua belas kali dua belas meter.

Bangunan utama terdiri dari tujuh ruangan. Lantainya dilapisi vinyl water

lock 4 milimeter. Dindingnya ditreatment bahan multiplek dan melamintho. Di ruang pertama terdapat maket bangunan, mozaik wajah Multatuli dari pecahan

kaca 8 milimeter berjumlah 314 keping, patung dada, quotes dari idee-idee No. 1 karya Multatuli berbahan akrilik warna merah bertuliskan, “Tugas Manusia

ialah Menjadi Manusia,” dan sebuah proyektor yang menyemburkan kata-kata

dari novel Max Havelaar yang masyhur. Di ruang kedua terdapat reflika kapal VOC, pala, lada, cengkeh, dan kayu manis, serta sebuah layar besar menampilkan film masuknya kolonialisme ke Nusantara. Di ruang ketiga terdapat kopi dan

peta serta koin masa tanam paksa. Ruang empat menampilkan foto dari tokoh penting yang terinspirasi Multatuli, juga surat dan buku-buku, serta novel Max

Havelaar(1876) edisi pertama berbahasa Prancis. Ruang lima menampilkan sejarah perlawanan masyarakat Banten melawan penjajahan. Di ruang enam terdapat berbagai informasi seputar Lebak, pakaian Adipati Lebak, tenun Baduy, dan

sebuah reflika Situs Cidanghyang. Di ruang terakhir, ruang tujuh terdapat foto dan informasi orang-orang yang pernah tingga atau terinspirasi oleh Lebak dan Rangkasbitung, motif batik, buku-buku Max Havelaar berbagai edisi, dan suara

penyair WS Renda membacakan puisi Demi Orang-Orang Rangkasbitung yang sajaknya tertulis di dinding.

Barang yang paling unik di bangunan utama terdapat di ruang empat adalah

tegel bekas Rumah Multatuli. Tegel ini, yang berwarna abu-abu berbentuk segi 물따 뚤리 특집 . 155


enam didapatkan dari Perkumpulan Multatuli, Museum Multatuli di

Amsterdam bulan April 2016. Di sekitar tahun 1980an datang

ke Rangkasbitung sekelompok wartawan dari Belanda. Mereka

membuat liputan tentang Multatuli. Bersamaan dengan kedatangan

mereka, bekas rumah Multatuli sedang direnovasi. Tegel-tegel

rumahnya berserakan. Maka inisiatif para pewarta tersebut meminta

izin kepada pengelola bangunan untuk membawa tegel bekas. Salah seorang dari mereka kemudian menyerahkan tegel tersebut kepada Museum Multatuli.

Antara bangunan utama dan bangunan penunjang terdapat ruang kosong yang

cukup luas sehingga dapat digunakan untuk duduk-duduk dan merupakan teras

belakang dan taman kecil dengan bunga-bunga dan lantai keramik bercorak. Di langit-langit teras belakang menggelantung lampu besar. Di bangunan penunjang terdapat ruang kontrol dan ruang pegawai serta toilet. Di ujung gedung penunjang terdapat gudang tempat menyimpan peralatan. Di bagian

belakang ruang penunjang terdapat tanah kosong yang ditanami beragam bunga dan apotek hidup seperti kencur, kunyit, dan cabe. Terdapat pula pohon jambu bool yang tepat bersisian dengan tangki air.

Telefon genggam kamu berbunyi keras ketika kamu hendak membuka

pintu rumah di akhir bulan Desember tahun 2016. Suara di seberang telefon

meminta kamu untuk mengelola museum yang baru saja selesai direnov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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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ara itu awalnya asing bagi kamu. Tapi kemudian kamu tahu bahwa Kepala Dinas Pendidikan dan Kebudayaan Lebak yang menghubungimu itu. Kamu menyanggupinya. Setelah itu, usaha-usaha mempersiapkan serta mengisi

bangunan kosong Bekas Wedana Rangkasbitung itu kamu kerjakan. Satu

tahun dua bulan sebelas hari kamu bekerja mempersiapkannya. Tepat tanggal 11 Februari 2018 bangunan itu dibuka untuk umum. Bangunan itu kemudian dikenal dengan nama Museum Multatuli.

Jauh sebelum itu kamu membangun rumah kecil di atas bukit di suatu

kampung terpencil. Berjarak 50 kilometer dari Rangkasbitung. Rumah kecil di

Kampung Ciseel, Desa Sobang, Kecamatan Sobang, Kabupaten Lebak, Banten yang tidak teraliri listrik saat itu kamu namakan Taman Baca Multatuli. Anak-

anak di kampung terpencil tanpa listrik dan sinyal telefon itu kamu ajak untuk membaca secara pelan dalam format reading group sebuah novel masyhur

karya pengarang terkenal kelahiran Amsterdam, 2 Maret 1820. Novel itu Max Havelaar. Itulah awal mula kamu mengaji setia Selasa sore sejak 23 Maret 2010

secara pelan dan sungguh-sungguh. Bentuk membaca pelan itu kamu dapat dari

Zurich di mana novel Ulysses karya James Joyce dibaca pelan di sana. Melalui reading group Max Havelaar kamu mengajak mereka mengenal sejarah kota dan

tempat kelahiran mereka melalui karya sastra. Di saat kamu mengajak mengaji anak-anak di kampung terpencil itu kamu juga menginisasi sebuah museum bersama tiga kawan lain. Dari Taman Baca Multatuli ke Museum Multatuli.

Ubaidilah Muchtar Kepala Seksi Cagar Budaya dan Permuseuman Dinas Pendidikan dan Kebudayaan Kabupaten Lebak

물따 뚤리 특집 . 157


<우리는 말을 했다. 평생토록 뒷마당을 서성이며 허블망원경만 들여다본 과학자에 관해 육 년 간이나 계속되었다는 화산겨울의 암흑과 칠천사백 년 전 해안선을 따라 이주해온 순다열도의 원 주민에 관해 곰과 새와 순록의 소리를 내며 추는 춤과 자정이 돼서야 어두워지는 여름 툰드라, 벼락의 빛으로 나아가는 한밤 의 항해에 관해 우리는 말을 했다 /리 산-오드아이 중에서>


말하여지는 것들 재외동포들의 열약한 독서환경 이대로 좋은가? / 김순정 . 160 이슬람과 사원건축에 대한 오해와 편견 / 김의용 . 167 자카르타 쇼핑몰, 사람이 만나는 공간 / 조연숙 . 172 도서관이 살아있다 / 이연주 . 176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온라인 공간 / 박준영 . 179 거북이의 눈물 / 조은아 . 183 인도네시아 근현대 건축, 건축가 이야기 / 김의용 . 187


재외동포들의 열약한 독서환경 이대로 좋은가 ? 740만 재외동포들의 ‘독서 불감증’에 빨간불 재외동포의 문화 욕구, 국가 관심 커졌는데 독서환경은 열약

/ 김순정

해외 거주 중인 재외동포들은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큰 인프라이자 재원이다. 해 외에 살면서 지속적인 글로벌 마인드와 자기계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여 기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조건이 바로 ‘독서’이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 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정체성이 빠진 글로벌 인재는 국가의 대들보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인도네시아에는 한국인을 위한 단독서점은 없지만, 한국슈퍼에서 일부 특정 책을 판매하고 있고 각종 밴드에서 책을 사고파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오래된 중고 서 적들이 대부분이라 아쉬움이 크다. 지금은 740만 재외동포들을 위한 다양한 도서공 급의 시스템을 마련하는 방책이 시급하다. 한국의 차세대는 물론이고 재외동포들의 경제적 문화적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더 깊이 ‘독서 불감증’에 빠지기 전에 많은 사람의 관심과 계발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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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독서환경 인도네시아에서 책을 사고 보기 어려워 새해를 시작할 때 한국인의 첫 다짐은 ‘독서’였다. 정보분석기업 닐슨코리아는 새 해 다짐과 관련된 국내 온라인 및 소셜미디어 버즈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독서와 관련된 버즈량이 가장 많았다’고 밝힌 바가 있다. 한국인들은 온라인 및 소셜미디어 상에서 새해 다짐과 관련해 독서를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거주 한국인들도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내년에 ‘꼭 한번 읽어보고 싶 은 도서’의 독서목록카드나 계획표를 작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의 베스트셀러 도 좋겠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책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 서 이야기를 꺼내면 푸념부터 늘어놓는 분들이 많이 있다. 왜일까? 인도네시아의 독 서환경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그 이유를 당장 알게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애로점 중 하나를 꼽으라면 사고 싶은 책을 바로바로 마음대로 사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에는 해외배송을 하는 대형서점 이 생겼지만, 한국 도서를 눈으로 보고 종이 냄새를 맡으면서 고르던 재미와 향수는 일찌감치 반납해야 한다. 반대로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한국에서 일 할 때보다 책을 읽을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이 땅, 인도네시아처럼 책 읽기 좋은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의 나라 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처럼 하루 일정이 빡빡하지 않고 특히 운전기사와 가사 도우미,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서 개인 여가가 확보되고 자카르타의 지 옥 같은 차량 정체를 겪어야 하는 직장인이나 사업자들, 등하교하는 학생들, 주부들 은 차 안에 머무는 시간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책을 읽기에 이만한 환경이 없어 보인 다. 개인 여가 확보로 독서 여건으로는 최상인데 가장 큰 단점은 해외에 거주하는 모 든 재외동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읽고 싶은 책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여건이다. 그래 서인지 인도네시아 거주 한국인들의 여가생활을 들여다보면, 독서보다는 골프나 여 행, 맛집 탐방, 한인 단체 모임 참석, 미용 관리, 신앙생활 등이 주를 이룬다. 최근 인도네시아에도 젊은 층 동포들이 증가하면서 문화에 대한 욕구는 더 높아 지고 국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깊어지면서 모국에 대한 관심도 늘어 그만큼 독서를 말하여지는 것들 . 161


취미로 삼고 싶어 하는 잠재독서 인구층이 확대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다른 동남 아시아 국가의 한인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해외 거주 동포들의 각양각색 한국 책 찾기 전쟁 ! 물론 인도네시아에도 애독가들이 쉽게 갈 수 있는 현지 서점들이 있다. 한국 동포 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자카르타의 경우는 도심 곳곳의 대형 쇼핑몰에 그라메 디아(Gramedia)라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출판사가 운영하는 오프라인 서점과 키노꾸 니아(Kinokuniya), 북 앤 비욘드(book&beyond), 페이퍼클립(PAPER CLIP)같은 대형서점 들이 입점해 있다. 하지만 서점 코너를 둘러보면 영어 원서로 된 책들과 인도네시아 어책이 주를 이루고 일부 일본어로 된 책과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일부 한글 교재가 비치된 것이 전부이다. 영어와 인도네시아어가 능통한 한국인들이 자녀의 언어교육 을 위해 찾고 있으나 한국인들의 ‘지적 만족감’과 ‘문화생활’을 충족시켜주기엔 역부 족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한국의 신간은 보기만 해도 반가운 귀한 존재이다.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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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서 선물은 한국처럼 흔한 풍경이 아니다. 지금 해외 거주 한국인들은 ‘도서 갈 증’을 해갈하기 위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책을 사서 읽고 있을까? 모두 한 번쯤 경험 이 있어서 아마 공감하실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대형서점 한두 곳에서 해외배송을 해주고 전자책을 이용하는 사 람들도 차츰 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읽고 싶은 책을 한꺼번에 사서 비행기의 오버 차지 요금을 감수하면서 무거운 책을 끙끙 들고 들어 온다. 당장 한국에 갈 상황이 아니면 지인들에게 어렵사리 부탁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서 일부 한국 도서를 만날 수 있는 곳도 있다, 한국슈퍼와 동포들의 커뮤니티이자 온라인 마켓으로 자리 잡은 ‘자카르타 중고나라’, ‘인니맘스’ 와 같은 대표적 밴드에서 중고 책을 구입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온라인 서점 YES24를 이용할 수도 있다. 본인이 책을 직접 구매하는 형태가 아니라 면 한인회관과 한국문화원, 한인교회와 같은 종교단체나 한국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서 읽는 형태이다. 하지만 교통이 불편한 인도네시아 특성상 쉽사리 찾아가기 어렵고 단체에 회원으로 소속이 안 된 사람이 편하게 찾아가 책을 읽고 대여하기란 편하지 않다. 특히 책은 사서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여하는 책 이 선뜻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가끔씩 인도네시아의 문인협회, 인문창작클럽 등과 정부 관련 산하 기관 그리고 교민단체와 종교기관 등에서 발행되는 무가지의 책 들은 동포들이 접할 수 있는 책들이다. 하지만 무료 책의 배포 영역이 한정적이어서 더 많은 동포의 손에 닿기까지의 현실이 녹록지가 않다.

한국 책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퇴화하였나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하면서 필자가 항상 생각하고 관심이 있는 분야가 있다면 단 연 재외 동포들의 독서와 독서환경이다. 인도네시아 살면서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재 외 동포들의 독서환경과 저작 활동이 국내보다 너무 열악하다는 점이었다. 인도네시 아에 오기 전에도 어느 정도 짐작을 했었지만 직접 와서 현실을 목격했을 때 마음은 착잡하고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재외동포 2세들의 한국어 능력이 약하고 특히 쓰기 부분은 가장 취약하다고 한다. 읽기, 말하기, 듣기도 한국에서 성장하는 아이들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것도 말하여지는 것들 . 163


이러한 열약한 독서환경이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에 산다고 영어나 인도네시아 어로 된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다양한 책들이 넘쳐나도 읽지 않은 것과 책이 없어서 읽지 못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후자 쪽이 재외 동포인 인도네 시아 거주 우리 한국인들의 현실이다. 이러한 열약한 환경을 반영하듯 폐단으로 저작권을 위반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책을 불법으로 복사해서 공부하고 복사된 책을 선물까지 한다. 이는 저작권과 전송권 이 강화되고 있는 한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정말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었 다. 또한, 우리나라 대표 출판사들이 주빈국으로 참가했던 ‘인도네시아 국제도서전’ 에 참여할 기회가 2번이 있었는데 국제도서전 현장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적은 참여 도와 무관심을 지켜보면서 매우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재외 동포들의 열약한 독서환경, 개선책은? 이러한 독서환경이 비단 인도네시아뿐일까? 그렇다면 한국의 우리 정부와 기관 단체에서는 ‘740만 해외 거주 재외동포의 독서환경’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독서환경 개선 문제를 개인적인 사항으로 바라보기에는 많은 동포의 독서율은 이미 적신호이다. 국내에서도 예전부터 재외동포들의 낮은 독서율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 바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급한 독서 현실을 개선하려면 어떤 점 들을 점검해야 할까? 첫째, 재외동포들의 독서율이 낮은 이유는 책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마트폰과 PC 등 인터넷 환경으로 다양한 읽기가 가능해졌지만, 전자매체의 특성상 사고력 향 상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한국에 필요한 인재육성을 위해서라도 재외동포 자녀들에 게 더 많이 읽을 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성인은 물론이고 아동 중심의 책이 더욱 필요하다. 해외 거주 가정에서 자녀들에게만큼은 아이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모국어로 된 좋은 책을 읽게 해주고 싶은 것은 모두의 공통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일 부 한국의 단체에서 종종 재외동포들에게 책을 기증하고 있는데 이 정도의 책 기증이 과연 재외 동포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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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국가나 단체로부터 증정 받거나 한인사회의 도서관에 비치된 책들이 동 포들에게 정말 필요한 책들인지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독서 생활과 독서교육에 있어 서 읽는 이의 눈높이에 맞춘 책을 선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필요한 책을 갖추려 면 책을 선별하는 데 큰 노력과 전문성이 필요하다. 한국의 담당자들은 현지의 여건 과 생활상 그리고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정말 우리 동포들에게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가 않다. 따라서 주체의 편의에 의한 책이나 무작위로 기부를 한 책은 지양되어야 한다. 셋째는 책 수급을 위해 가장 어려운 문제는 ‘책 배송’이다. 해외에서의 요청으로 한국의 출판사가 직접 배송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구입하는 책값보다 배송비가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책의 공급을 확보하려면 책 배송의 현실적인 문 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책을 수입할 때 물류비와 관세가 비싸고 심지어 어 떤 나라는 받는 사람이 세금을 내야 해서 책을 받기를 꺼리기까지 한다. 아울러 책을 보내는 문제 못지않게 책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 도서관을 운영 중이라면 관리하는 기관에서 신간을 지속해서 공급하는 등 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 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넷째, 해외인 특성을 고려해서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네트워크 창출이 중요하다. 국가기관, 종교단체, 기타 공동체와의 네트워크를 유지해 협력의 지속성과 공고성을 강화해야 한다. 재외동포를 담당하고 있는 국가기관의 정부산하기관은 물론이고 재 외동포 관련 기관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또한, 한국문화원, 세종학당, 한국교육원, 한국학교 등의 협조를 통해 체계적으로 접근해 나아가야 한다. 기업의 차원에서도 더 욱 독서환경 개선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관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독서 프로그램 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다섯째, 민간 차원의 노력으로 한인 단체가 자발적으로 독서토론모임, CEO 독서 경영모임, 주니어독서교실, 글쓰기 학교 등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시설 이 생겨 문화 격차가 줄어들고 있지만, 공공기관이 하든 사설로 운영하든 도서관의 숫자를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 특히 독서 생활의 중요성을 각 학교에서 적극적으 로 알려 학생과 교사, 학부모 간 끈끈한 유대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서는 매월 ‘추천 도서’를 정해서 한국인 동료들끼리 책을 권하고 독서토론을 하는 일을 적

말하여지는 것들 . 165


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독서환경의 중요성을 각 언론사에서 적 극적으로 홍보해 주어야 한다. 끝으로 여섯째는 모든 여건과 제반 사항이 열약하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올바른 독서 생활을 위한 노력이다. 누군가가 해결해 주길 기다리기 전에 나 만의 ‘셀프 독서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열약한 독서환경 속에서 자신이 시간을 쪼 개어 나만의 독서환경을 재세팅하는 일이다. 각 한국인 가정에서는 우리 가족만의 ‘미니 도서관’을 만들어 본다든지 가족들끼리 정기적으로 책을 읽고 독서일지를 작성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책에 대한 투자는 언제나 정직한 법이다. 특히 한인사회라는 공동체를 넘어서 글 로벌 시대에 경쟁력을 키우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은 우리들의 사고를 유연하게 해주어 정체되는 것을 막아주고 순환시켜주는 순기능의 역할을 한다. 해외 생활을 하 면서 인적네트워크가 적은 상황에서 자신의 가장 안전한 멘토는 책이다. 향후 한국 동포 모두가 ‘독서목록 리스트’를 작성하고 책을 좀 더 가까이하게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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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사원건축에 대한 오해와 편견 / 김의용

삶이 어렵고 힘들 때, 가치관이 혼재되어 기준이 흔들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용기이다. 흔히 삶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것이 건축이고, 그 중 에서 종교건축은 신의 존재를 체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신에게로 향하는 신앙심이 발현될 수 있는 공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한다. 성스러운 공간과 속세의 공 간을 구분지어 속세에 찌든 인간들의 삶을 정갈하게 해주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과 고단한 세상사를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하게 하여 다시금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가지게 함이 종교가 가지는 현실적인 순작용 일 것이다.

왼쪽부터 라뚜레뜨 수도원(프랑스), 롱샹성당(프랑스), 바람의 교회(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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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구원의 종교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한 공동체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 공동체적 삶의 근본은 청빈과 공유이며, 이의 건축적인 실현이 종교건축이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신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고, 안식을 영 위할 수 있는 종교건축의 엄숙성은 화려한 장식과 값비싼 치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본질인 공간 연출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히 새로운 원형을 창조하고자 했던 근대건축은 새로운 재료의 정직한 사용으로 청빈하고 검소하나 신성한 공간을 실험했다. 라 뚜레뜨 수도원에서 보이는 검소한 빛과 롱샹 성당의 풍성한 빛, 그리고 안도 다다오의 투명한 빛은 종교건축에서 빛으로 빚어진 공간의 시(詩)로 읽혀진다.

II 인도네시아는 흔히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신,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인종들이 서로 뒤섞여 공존하는 조금은 명쾌하지 않은 경계를 가진 땅이다. 어쩌면 이러한 불분명 한 경계가 외래종교의 토착화를 통해(때때로 외래종교끼리의 교배도 가능했다) 인도 네시아만의 독특한 종교적 정체성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외래종교 중에서 가 장 늦게 유입되었으나, 가장 강력하고 많은 신자를 거느린 이슬람은 인도네시아 최 대의 종교이다. 전국적으로 2,000여 개의 사원이 있는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대표적 인 사원인 이스티크랄(Masjid Istiqlal)은 최대 수용인원 12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단일 사원이다. (수용인원 수에는 외부 중정의 기도 공간까지 포함한다.) 이 사원은 인도 네시아의 독립을 기념하는 모나스(Monas) 광장과 면해 있는데, 독립이후 초대 대통령 인 수카르토 대통령은 근대건축을 국가적 통합과 강력함을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하고 강력한 상징적 도구로 생각했고, 이를 장려했다. (특히 그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반둥 공과대학 토목과를 졸업하여, 건축에 대한 일정 정도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사원의 명칭인 ‘이스티크랄(Istiqlal)’이란 단어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450년 식민지배 를 이겨내고 탄생한 공화국을 상징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독립’을 의미한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인 메르데카 광장 인 근으로 사원의 위치를 선정하고 1961년에 착공하여 1978년 2월 22일, 17년만에 완 공하게 된다. 이 사원은 건축 공모전을 통하여 프레드리히 실라반(Frederich Silaban)이 라는 인도네시아 건축가의 신앙(ketuhanan)이라는 작품이 선정되어 건립되었다. (건 축가 실라반은 개신교 신자였으며, 식민모국인 네덜란드에서 건축을 공부한 유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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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거대한 중정으로 이루어진 사원

였다.) 매우 모던한 건축 언어를 사용한 이 사원은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 대통령의 근대건축에 대한 의지와 애정이 있었기에 당선되어 완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의 기독교, 가톨릭과는 매우 상반되는 개방적 태도를 보여준다. 한국의 교회나 성당 은 신자가 아니면 공모전에 참여 조차할 수 없는 매우 밀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종교를 믿어야만, 신자여야지만 꼭 종교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은 아닐진대, 한국의 종교는 여전히 밀폐적이고 자폐적이다.) 대부분의 종교건축이 그러하듯 이스 티크랄 사원도 다소 직설적이긴 하지만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 사원의 7개의 출입문 은 이슬람의 7개 천국을, 5층 건축물은 하루 5번의 기도와 이슬람 신자의 5대 의무 그리고 빤짜실라 5대 원칙을 의미한다. 내부의 지름 45m 돔은 독립년도인 1945년 을 의미하며, 사원 내부의 12개 기둥은 1년 12달과 선지자 무하마드의 탄생일인 12 일, 미나렛의 높이 66.66m는 코란의 6,666개 구절을 의미한다. 종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측면에서도 이 사원 건축은 독특한 공간 구성 과 이슬람 종교의 특성을 매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슬람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인간 에 대한 평등함을 표현한 균등한 공간 구성, 내외부 공간의 불분명한 경계, 개방적 공 간 구성 등 기하학적 질서 체계를 사용하면서도 건축 공간의 다양함을 매우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여지는 것들 . 169


거대한 공간은 이용자를 압도한다. 내부 공간의 거대함이 엄숙함과 경건 함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적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티크랄 사원 건축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인 중정과 회랑이다.

III 비이슬람인의 입장에서 이슬람 사원은 약간의 두려움과 생소함이 섞인 느낌을 가 진 공간이나, 실상 사원은 이슬람인들에게는 일종의 마을 회관이자 쉼터로써의 역할 을 수행한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이며, 이방인과 여행자에게는 여행자 안내소 역할 도 한다. 또한 신자들에게는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저금리로 융자해주는 지역의 서민 대부금융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슬람 신자들에게 사원은 종교적 행사를 치르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를 위한 공공주민센터의 역할도 수행하는 개방된 공공 공 간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실지로 필자가 방문했던 많은 사원건축들은 외 국인에게 어떤 적대적 행위나 느낌을 표현하지도 않았으며 개방적이고 호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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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신에 대한 믿음을 표출하는 장소인 종교건축은 세속과는 다른 공간적인 감 동과 희망이 있어야 한다. 신과 인간의 만남을 위한 장소의 제공이라는 종교건축의 목적은 최소한 도덕적이어야하며, 다른 건축보다 더욱 윤리적인 당위성과 철학적 고 뇌가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원 건축이 시도했던 근대건축의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자고 했던 이슬람 사원건축의 공간 구성들은 종교건축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며, 인도네시아 근대건축에서도 의미있는 작품으로 남 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스티크랄 사원은 기도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든지, 외국인이든, 다른 종교 인이든 입장과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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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쇼핑몰 , 사람이 만나는 공간 / 조연숙

일요일 오후 한껏 멋을 낸 젊은이들,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그의 가족들, 외국인들 이 한가하게 자카르타 쇼핑몰 로비를 거닌다. 로비를 지나는 꼬마기차 안에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앉아있다. 올림머리를 하고 화려한 색상의 블 라우스를 입은 중년부인들은 로비 가장자리에 있는 카페에서 예쁘게 장식된 케익과 음료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젊은 부부가 스파이더맨 옷을 입은 아이를 태 운 쇼핑카트를 밀며 주차장 쪽으로 간다. 쇼핑몰 로비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 면 젊은이들이 다양한 편집숍 사이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닌다. 남부자카르타 간다리아 쇼핑몰에는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주는 출장소가 있고, 꾸 닝안지역의 암바사도르몰에는 교회가 있으며, 수디르만 지역에 있는 퍼시픽플레이 스몰에는 미국문화원과 야마하뮤직스쿨이 있다. 뽄독인다몰에는 영어학원이 있고, 다르마왕사스퀘어몰에는 그림을 거래하는 갤러리가 있다. 2017년에 발간된 책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소비문화』에서, 서울대 아시아 연구소의 정법모 연구원은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자카르타 쇼핑몰을 전통적인 종교 시설이나 광장을 대체하는 공공장소이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사회관계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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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고 정의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모여서 가벼 운 대화를 하며 유대를 강화하는 농끄롱(nongkrong, 수다떨기)을 좋아하는데, 최근에 쇼 핑몰이 농끄롱 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현대적인 시설에 쾌적한 환경과 경비원이 있는 안전한 쇼핑몰은 예쁘게 꾸미고 나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몰(mall)을 사전에서 검색하면 ‘쇼핑센터’ 외에도 ‘나무그늘이 진 산책길’이라고 나온다. 몰이라는 말자체에 산책하며 쇼핑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자카르타 사람들은 쇼핑몰에서 쇼핑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놀 고 관공서 업무도 보고 종교활동도 한다. 이제 쇼핑몰이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사 람이 만나는 곳이 됐다.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자카르타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 자들은 쇼핑몰에 가는 목적으로 식당(41%), 쇼핑(27%), 영화와 공연 관람(26%), 비 즈니스미팅(4%), 오락(1%), 마사지·미용(1%). 피트니스(1%) 등을 꼽았다. 쇼핑몰 방문 빈도는 일주일에 2~3회(35%), 1회(26%) 수준이었고, 몰에 체류하는 시간은 2~4시간(55%), 4~6시간(20%)에 달했다. 자카르타 소비자들이 여가를 보내는 장소 는 주로 몰(46%)과 집(39%)이었고, 스포츠 시설(7%)이나 공원(8%)을 이용하는 사 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에 따라 자카르타 쇼핑몰의 구성도 변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상품이 진열 된 백화점 형태의 매장이 감소하고, 입구부터 식당과 카페 등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매장이 증가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개장한 남부자카르타에 있는 몰 꼬따 카사블랑 카나 남부땅그랑 BSD 지역에 있는 이온몰은 식당, 카페, 푸드코트의 비중이 기존 쇼 핑몰보다 크게 증가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이 지난해 하반기에는 인도네시아의 주요 백화점인 라마야나, 마따하리, 드밴함스와 로터스 등이 순차적으로 사업을 축 소하거나 종료했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 증가에 따라 특히 수도권 소비자들이 온라인몰로 이동하 는 동시에 쇼핑몰의 기능이 여가공간으로 변모하는 현상이 가속화하는 결과로 해석 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띠 재무장관은 일부 백화점이 문을 닫는 이유가 구매력 약화는 아니라며, 오프라인 매장이 온라인 매장으로 전환하는 단 말하여지는 것들 . 173


계로 보았다. 그는 실제로 소매업 부문에서 세수입이 증가하고 있다며, 디지털 시대 도래에 따른 변화를 계속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개신교 교회들은 교회 설립 인허가를 취득하기 쉽고 접근성이 뛰어난 쇼핑몰 이나 호텔에서 예배를 보는 추세다. 서부자카르타의 센트럴파크 쇼핑몰에 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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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예배를 본다는 아르놀디 아르완(28) 씨는 “쇼핑몰에 있는 교회는 전통적인 교회 보다 전문적이고 세련된 예배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찌뿌뜨라 쇼핑몰에 있는 교회 에 다니는 노펠리따 인딴 씨는 “예배를 마치고 쇼핑할 수 있고 무슬림 친구들과 약속 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라고 말했다. 한류팬들은 남부자카르타 잘란 사뜨리오에 위치한 롯데쇼핑애비뉴를 즐겨 찾는 다. 2013년에 개장한 롯데 쇼핑몰은 다양한 한국 음식과 한국에서 수입한 패션과 뷰 티 제품을 판매하며, 한국 관련 행사도 자주 열린다. 땅그랑 BSD시티에 있는 이온몰 (AEON Mall)은

다양한 일본 음식과 포켓몬과 헬로키티 인형 등 대중문화 상품들로 채

워져 있어서 일본 대중문화 애호가들이 많이 찾는다. 사진과 그림 전시회, 팝스타 공 연, 각국의 문화행사들도 쇼핑몰에서 열린다. 이제 무엇인가 사야 하는 사람, 무엇인가 먹어야 하는 사람, 영화나 공연을 관람하 고 싶은 사람, 놀이기구를 즐기고 싶은 사람, 예배를 드리고 싶은 사람 등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쇼핑몰로 모인다. 사람을 만나서 함께 활동하려면 쇼핑몰로 가야 한 다. 종교단체에 이어 경찰이나 세무당국도 쇼핑몰에 출장소를 두기 시작했다. 사적 인 활동 공간이던 쇼핑몰에 공적인 기능이 더해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쇼핑몰 로 비 무대에서 정치인들의 선거유세가 열리는 날도 오지 않을까? 쇼핑몰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말하여지는 것들 . 175


도서관이 살아있다 / 이연주

2000년대 초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방송 중 하나가 ‘느낌표!’라는 것을 많 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그 열풍으로 각 가정의 거실은 서재화 되었고, 그 방송에 채택 된 목록은 스테디셀러가 되어 작가의 여생을 책임지는 노릇을 톡톡히 했다. 특 히 그 방송에 나왔던 동화책들은 아이들의 필독서가 되고 교과서에도 실리게 됐다.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의 독서량이 느는 듯 했지만 방송이 끝난 후 잔상은 베스트셀러 에만 머물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거실을 서재화’라는 슬로건은 세대와 계층간의 큰 격차를 보여줬다. 2000년대 중반을 들어서며 독서는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 다. 그 변화의 시작은 책 읽고 토론하는 사회단체들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학교 또 는 도서관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책 읽어주기 활동을 시작하며 함 께 읽기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 이는 2007년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 으로 성인들까지 확산되었으며, 현재 여러 대형서점에서도 낭독 프로그램을 진행하 고 있다. (물론 다수가 신간 홍보 행사라는 것은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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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시작된 또 다른 운동이 ‘기적의 도서관’ 운동이다. 조용히 책을 읽고 공 부를 하는 독서실 개념의 공간이 아닌 찾아가고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변화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초기 기적의 도서관은 공간적으로 도서관의 기능을 하기에 적합하지 못해 어려움이 있었다. 서가의 기능이라든지, 이용객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 그냥 예쁜 공간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또한 도서관의 기능을 단순히 바라본 것 이 잘못이었다. 도서관은 이제 책을 읽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문제집을 풀고 시험 을 준비하기 위한 독서실은 더욱 아니다.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고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도서관은 변화를 가졌다. 도서관 건물 안에서 그룹활동이 가 능해졌고 정보를 공평하게 공유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되었다. 인포메이션 커먼스 (Information Commons)라고

통칭되는 이 서비스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조용하고 정

적인 기존 이미지와 다른 새로운 도서관서비스로 운영되는 방식이다.

특히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교육학술 활동을 지원하는 물리적 공간과 다양한 정보 자원이다. 게다가 공간을 찾아오는 열람객만을 기다리는 서비스가 아닌 열린 공간으 로 찾아가는, 밀폐된 공간을 깨트리는 서비스 방식은 도서관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진 화시키고 있다. 작은 콘테이너를 이용하여 소량의 서가를 배치하고 간단한 음료와 함 께 독서와 토론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이동하는 북 카페’, 도서관 웹사이트를 통해서 대출을 신청하면 정기적으로 아파트 단지를 돌며 대출반납 서비스를 지원해 주는 ‘북 트럭’ 또는 ‘북 버스’가 그 예이다. 그리고 현재 많은 지역에서 도서관은 움 직이고 있다.

말하여지는 것들 . 177


그렇다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도서관 모습은 어떤가? 해 외 한인들의 독서에 대한 어려움은 지난 12월 21일에 본지에 기재 된 김순정 대표의 칼럼에서 언급되었다. 결국 한인들의 독서량은 도서를 공급받을 수 있는 개인의 능력 에만 맡겨져야 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도서를 구하는 방법이 이미 폐기되어야 할, 출 판일자가 10년이 넘는 책이라도 중고로 돌려가며 읽혀야 하는 고민에 대해 깊은 공 감을 가진 칼럼이었다. (일반적인 도서관 서가관리에서 아동도서는 사회.과학 분야 의 경우 초판 일이 10년이 넘으면 정보의 정확성이 떨어져 폐기된다.) 고민의 해결을 도서관에서 찾아보기를 제안하고 싶다. 여기 한인들이 현지 도서관 을 이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도서를 찾기가 서점에서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그 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공간을 좀 더 살려야 한다. 자카르타에 소재하는 한국국제 학교(JIKS), 교회, 성당, 여러 한인단체, 그리고 한인회 사무실에서 도서관을 운영하 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용시간이나 방법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아쉬웠다. 게 다가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 또한 수동적, 정적이었다. 도서관을 유지하는 방법에서 인력과 비용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수동 적, 정적인 기능만 생각한다면 이 모든 투자에 대한 공감이 안될 것이다. 현대에서 도서관은 그 사회 구성원의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모태가 되고 있다. 이젠 먹고 사는 경제적 문제 해결이 시급한 시대는 지나갔다. 인문학의 발전이 그 사 회 발전 방향의 척도가 되었다. 인문학의 향유는 결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서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고, 그룹활동 을 통해 공평하게 나누는 토론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도서관이 제공만 해 준다면 한인사회의 도서관도 변할 것이다. 새로운 서가의 수혈도 필요하지만, 결국 공간은 사람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다. 도서관을 관리하는 주체에서 일정한 주제를 제안하고 토론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 은 어떨까? 열람시간의 확대와 도서관 이용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도 필요할 것이라 본다. 아니, 한인사회에 있는 다양한 그룹이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열어놓기만 해도 사람들은 고민을 공유하고 해결해 낼 것이다. 그렇게 도서관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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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 온라인 공간 / 박준영

공간의 여러 사전적 의미 중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인터넷 공간’, ‘온라인 공간’ 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물리적 으로 어떤 물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서 온라인에 ‘공간’이라는 수식어를 쓰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흔히 ‘인터넷 강국’이라고 부릅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휴대전화 온 라인 어플리케이션으로 버스나 지하철 도착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거나, 지하철에서 도 초고속 인터넷이 연결되는 것을 보며 놀라워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인 터넷 강국’의 재외동포로서 인도네시아 인터넷 기술의 발달을 보는 감회는 남다릅니 다. 마치 우리의 몇 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이들만의 방식으로 발전하 는 것을 보며 색다름을 느끼기도 합니다. Internet World Stats에 따르면, 2018년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 대비 인터넷 사 용자는 53.8%으로, 총 1억 4천만명이 넘습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중국, 인도, 미국, 브라질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로 많은 인터넷 사용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약 4천 말하여지는 것들 . 179


8백만명의 인터넷 사용자가 있으며 전체 인구 대비 사용자 비율은 약 81.5%입니다. 사용자 비율은 우리가 훨씬 높지만, 전체 사용자 수는 무려 1억명 차이로 인도네시아 가 많습니다. 2011년 18%에 불과하던 사용자 비율이 7년 사이 53.8%로 증가했고,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이라 예측합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 인터넷 사용자의 급증은 인도네시아 사회를 다양하게 변 화시키고 있을 것이라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사용자의 증가는 여러 휴대 폰 제조회사의 중저가 스마트폰의 출시와 함께 더 빠른 속도로 인도네시아를 변화시 키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인 중 선불 요금제 사용자 중 전화나 문자 요금은 없어도 인터넷 요금은 꼬박꼬박 챙겨 넣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의 인터넷 기술 발달을 체감한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려 합니다. 자카르타 시내 도로에서는 인터넷 쇼핑몰 옥외 광고물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Lazada, Tokopedia, Bukalapak이 대표적인 온라인 쇼핑몰입니다. 이 뿐만이 아 닙니다.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을 통한 상행위가 성행합니다. 저도 특별한 물건을 구입해야 할 때는 아예 인스타그램이나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합니다. 몇 년 전만 하 더라도 배송사고나 상품을 속여 파는 사례가 자주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부작용들이 많이 보완된 것 같습니다. 오프라인 상점을 운영하던 이들도 온라인 상점을 동시에 운영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온라인 상점은 인도네시아 유통 환경 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인도네시아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또 다른 사례는 대중교통에서도 드러납니다. Go-jek, grab, uber등 온라인 예약 대중교통 서비스가 인도네시아 대 중교통 체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3~4년 전, ojek 정거장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 던 오젝 기사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제가 사는 동네의 몇몇 ojek 정거장은 이 미 없어졌습니다. 거리에는 온통 각 회사를 상징하는 초록색, 주황색 오토바이 헬멧 천지입니다. 한동안 Go-jek, grab, uber등 온라인 대중교통 서비스를 반대하는 택시기사, 앙 꼿 기사들의 시위가 자주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발리 등 여행지에서는 택시 운전기사 노동 조합에서 grab, uber등의 온라인 주문 서비스를 반대하기도 합니다. 제가 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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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를 여행할 때, uber를 이용하려 했더니 운전기사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탑승하 길 원했고, 휴대폰을 들고 기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운전기사에 따르면, grab이 나 uber 등으로 영업을 하다 들통나면, 기존 대중교통 종사자들이 타이어에 펑크를 내는 등 자동차에 손해를 입힌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터넷 기술의 발달이 인도네시아에 꼭 긍정적인 영향만 미치는 것은 아닙 니다. 이미 우리나라와 같이 인터넷 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데이터 주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데이터 주권’이란 말 그대로 내 정보를 보호할 권리를 갖는 것 입니다. 1949년 소설가 조지오웰은 자신의 소설 <1984>를 통해 개인의 ‘데이터 주 권’을 침해하는 ‘빅브라더스’에 대한 경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지오웰의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된 것 같습니다. 일례로 주민등록번호 유출 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가 커지자, 우리나라에서는 작년 5월,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얼마 전에는 페이스북 개인정보 유출 파문이 있어 많은 페이스북 이용자가 탈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종교와 결혼 여부, 직업 등 우리나라 주민등록증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KTP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에게 식별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통치권력의 편리함을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식별번호에 따른 개인 정보를 철저히 보호했어야 하는데, 그런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숫자, 문자 등으로 개인에게 식별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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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부여하여 개인정보를 범주화 하는 것은 이 정보를 수집하여 악용하거나 이윤을 추 구하는 이들에게도 편리함을 줄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이런 우려로부터 자유로울까요?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기관에 등록 할 일이 있을 때, 개인 정보 보호, 관리에 대해 세심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 니다. 개인정보를 요구하거나 주는 쪽 모두 너무 쉽게 개인 정보를 주고 받습니다. 학 교 등 기관에 등록할 때, 종종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입력해도 별다른 확인절차를 거 치지 않습니다. 그 정보를 타인이 쉽게 열람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기관의 개인 정보에 대한 허술한 관리를 경험할 때면 항상 ‘이래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으로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최근 EU는오랜 논의 끝에 일반개인정보호규정(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을 제정했습니다. 데이터 수집 거부권, 개인 데이터 삭제 권리 등에 대한 규정을 명문 화했습니다. ‘데이터 주권’에 대한 가장 선도적인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도 인터넷 기술 발전과 확산을 위한 노력과 함께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한 방안도 함께 논의돼야 합니다. 당국이 이미 제시된 보호 조치를 참고하여 편리하면서도 안전한 온 라인 공간을 만들기 위한 조치를 취하길 바랍니다. 이로 인해 인터넷 기술 발달이 모 든 인도네시아 시민들을 이롭게 하는 발전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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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의 눈물 / 조은아 신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후,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갔을 때였다. 평소 같으면 이 층 계단 난간을 타고 주루룩 내려와 내게 폭 안기던 작은 아이가 그 날은 왠일인지 고 개를 푹 숙이고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계단 밑에 닿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참고 참았던 눈물이 팍 터져 내 품에서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아이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거북이가... 거북이가... 으 앙~” 하고는 계속 큰소리로 울기만 했다. 뒤 따라 나온 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윤진이 거북이 때문에 그래.” “거북이가 왜? 학교에 거북이가 있어?” “아니, 오늘 학교에서 어떤 영상을 봤는데, 바다거북이 코에 긴 빨대가 들어갔는데 그걸 꺼내려고 하니까 거북이가 엄청 아파하면서 피가 막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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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아이들한테 뭘 보여 준거야?’ 우는 아이를 간신히 달래 차에 태워 돌아오 는 데, 도대체 그게 뭔지 궁금도 하고 아이를 울린 것에 대해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그날 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나는 유투브를 뒤져 코에 빨대를 꽂은 거북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아이가 보았다던 코에 빨대가 박힌 바다거북 이 영상은 나도 차마 끝까지 보기가 힘들 만큼 처참했다.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아무 리 힘을 주어도 쉽게 뽑히지 않고 괴로운 거북이가 내는 울음과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수의사가 꿈인 작은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이해가 되었다. 바다에는 빨대 공격을 당한 거북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쓰레기가 담긴 시커먼 비닐봉지를 그대로 삼긴 거북이, 버려진 낡은 그물에 몸이 감긴 채로 살고 있는 바다물개, 플라스 틱 쌓이고 쌓여 위가 파열돼 죽은 채로 발견된 고래도 있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바다 동물들의 수난사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존재하 고 있었다. 가슴 한켠이 먹먹해 지는 영상들은 밤새 보아도 끝이 없었다. ‘신의 섬’이 라 부르고 있는 발리의 바닷속도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다. 저 바다에서 수영복을 입 고 놀았다니. 피부병에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구나 싶었다. 이대로라면 2050년에는 바다 속 생물의 무게보다 바다 속에 떠도는 쓰레기의 무 게가 더 무거워질 전망이란다. 이제 겨우 32년 남았다. 이것은 바로 어제 오늘 시작 된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플라스틱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영국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 도로 지구를 점령해 나갔다. 저렴한 가격에 뛰어난 유연선과 탄력성, 강도와 내구성 을 조절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활용 가능성을 가진 이 놀라운 만능 소재는 유리, 나 무, 철, 종이, 섬유 등을 대신하여 케첩통부터 자동차까지 자유자재로 변신하였다. 심지어 우리의 화장대, 욕실, 부엌까지 점령했다. 피부 각질 제거용 세안제나 치약, 샴푸, 세제, 약품 등에 들어있는 마이크로비드(Microbead)는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 렌,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폴리메틸 메타크릴레이트, 나일론 등으로 재탄생된 다. 1mm보다 작은 이 플라스틱 조각들은 정수 과정에서도 걸러지지 않고 하수구를 통해 강으로, 바다로 흘러간다. 이 작고 반짝이는 마이크로비드를 물고기 알로 착각 한 바닷새들은 이미 주식처럼 먹으며 살고 있다. 일본에서 잡은 멸치의 80%는 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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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 플라스틱을 먹은 굴은 내분비교란물질을 배출하 고, 바닷물로 만든 소금 평균 1kg당 550~681개의 미세플라스틱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아지고 쪼개져도 플라스틱은 결코 썩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고 오히 려 자석처럼 외부 오염물질을 끌어당겨 그 생존력과 위해력을 키워나간다. 플라스틱 이라는 신소재 개발의 기적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지구의 재앙이 되어버렸다. 한동안 우리는 ‘웰빙’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많은 주부들이 ‘오가닉’, ‘친환경’ 소재와 재료에 대해 예민하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건강해졌는가? 친환경 소재로 만든 집에서 오가닉 음식과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고 꼬박꼬박 운동 을 한다면 우리는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정말 믿고 있는가? 향 좋은 샴푸 와 세제를 사용하고, 화장품을 쓰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성분이 함유된 그릇과 포크로 플라스틱이 위장에 가득한 태평양산 물고기를 먹고 있다. 공기와 물과 토양은 또 어떠한가? 과연 내가 아침마다 한 움큼씩 영양제를 먹는 의미는 무엇인지 내 자신에게 되물어보았다. 말하여지는 것들 . 185


세계 쓰레기 해양 투기 2위국 인도네시아. 최근 인도네시아도 연간 10억 달러의 예산을 들여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양을 70%이상 감축하겠다고 공언 하고, 재활용 플라스틱을 발리 내 도로 건설에 활용하는 등 환경문제에도 관심을 쏟 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길거리에서 파는 조각 과일, 음료 할 것 없이 비닐봉지에 넣어 먹고, 음식 찌꺼기, 캔, 종이 할 것 없이 한 플라스틱 봉투에 꾸겨 넣어버리고, 담배꽁초는 길거리에, 집 앞 개천은 쓰레기와 빨래와 아이들이 공존하는 생활 모습도 곧 달라지 지 않을까? 그래서 그 많은 오물과 쓰레기들이 비만 오면 강물을 따라 강 하류 마을 로 범람해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도 달라질 거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피 눈물을 흘리던 거북이를 만난 이후 우리 가족도 학교도 ‘Green Education life'를 실천 중이다. 스트레스 없이 가정에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음식물과 쓰레기를 구분하고 재활용품으로 모으고, 학교 준비물 을 담은 지퍼백에는 각자의 이름을 써서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했다. 어렵지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일명 ‘냉파’(냉장고

파먹기)를

하면서 자연적으로 부엌도

집안 정리도 하게 되었다. 하루에 한 사람이 한 장의 플라스틱 봉투만 줄여도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먼저 나서 어른들을 설득하고 있다. 이 작은 변화가 큰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 32년 후에도 내가 계속 맛있는 생선 구이 를 먹을 수 있길, 이건 정말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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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현대 건축 , 건축가 이야기 / 김의용

20세기 초, 전 세계를 하나의 건축언어로 통일하려고 시도했던 국제주의 건축의 시대가 저물면서, 모더니즘의 적자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새로운 건축적 시도들이 1970년대 말부터 일어나게 된다. 역사를 희화한 포스트 모더니즘, 근대건축을 극단 까지 끌고 가서 해체하려는 해체주의 건축,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모더니즘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비판적 지역주의 운동들이 대표적인 새로운 건축 경향들이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은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시작되었다.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 지배는 기존의 전통적인 역사와 문화와 완전히 이질적인 서구 문화를 근대화라 는 미명아래 일방적으로 이식하면서,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 문맥을 파괴하였 다. 일본의 식민지배도 자국의 전통건축을 이식하기 보다는, 어설프게 모방한 서양 의 고전주의 건축을 식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또는 지역성) 과 근대건축의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결합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가 제3세계의 건축 가들의 오래된 고민이자 숙제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20세기에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여러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한 국을 포함하여), 인도네시아도 해방 이후에, 근대건축에 대한 호감과 더불어 민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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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시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과정을 거친다. 정치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건축적 성향들이 극과 극을 오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인도 네시아의 경우에는 더욱 거칠고 모질다는 특성이 있다. 근대건축이 해방된 국가의 상 징처럼 수용되는 경우도 있고(상황은 다르지만 이탈리아 근대건축의 전개와 비슷하 다),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근대와 전통의 어설픈 형태적 절충, 완전한 전통건축으로 의 복귀, 민주주의적 사회질서의 새로운 건축까지, 인도네시아 근현대 건축은 대단 히 격정적인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상황을 보여준다.

스닌시장(Pasar senin), Jakarta, 15, Aug., 1962 :자카르타 주지사와 중앙정부의 관료가 전시회에서 근대화 시장 프로젝트의 모형을 감상하고 있다. 당시 국가주도의 대형프로젝 트는 완전한 모더니즘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마치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 또는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을 보는 것 같다.

근대적 의미의 인도네시아 건축가들은 모질고 긴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를 지나고, 독립이 쟁취된 이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식민통치의 편리함을 위해 고등교육된 쁘 리야이(priyayi) 지식인 계급이 그 바탕이 되었다. 식민모국인 네델란드 대학 커리큘 럼을 이식시킨 국립반둥공대 토목학과를 졸업하여 건축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었 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신생 독립국가의 상징으로 근대건축을 국가적 상징으로 이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학습한 인도네시아의 근대 건축가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초기 인도네시아 건축계는 네델란드 유학파 건축가들이 주도했는데, 그들은 전통 건축의 직설적 모방을 지양하고 근대건축의 언어를 적용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바로 이들이 인도네시아 현대 건축계의 1세대이자 대 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도네시아 최초의 건축 그룹인 아탑(ATAP)이다. 총 4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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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로 구성된 건축그룹 Atap은 네델란드와 독일에서 유럽식 건축교육을 받은 이 들은, 당시에 유럽에 만연한 근대건축을 직접 자국 인도네시아에 실험적으로 작업하 는 선도적인 건축가들이었다.

왼쪽부터 비안포엔(Bianpoden), 한 아왈(Han Awal), 파문축(Pamuntjuk), 수원도 (Suwondo) 건축가로 구성된 건축그룹 아탑(Atap). 2006년 PDA 간담회에서

실지로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수카르노 대통령 집권기 동안 서구 근대건 축은 이들을 통해서 수준 있는 건축적 결과로 표현되었고, 실행되었다. 현재 구도심 이라고 칭할 수 있는 모나스(Monas) 인근의 대형 건축물들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 도 불구하고 더 질서 있고 균형 잡힌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근대건축의 언어들이 가 지고 있는 단순성의 미학을 충실하게 문법에 맞게 구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Atap의 일원인 한 아왈(Han Awal)이 설계한 코타 인티(kota Inti)의 계획안을 보면 전 성기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건축언어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청계천의 세운상가를 보는 듯한 이 계획안은 전체적으로 근대건축의 언어를 적용한 계획안이다. 전통적 형태에 기대기 보다는, 근대건축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을 구현한 것으 로 읽혀진다. Kota Inti 건축모형, 1963, 건축가 한 아왈(Han Aw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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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책의 실패로 몰락한 수카르노의 뒤를 이어 집권하게 된 수하르토 대통령은 강력하게 하나된 인도네시아를 이룩하기 위하여(Pancasila), 민족적 정통성과 하나된 국가를 국정 목표로 삼았다. 수하르토 정부의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운영체계 는 군부 독재 체재로 변질되어, 향후 30여년간 장기집권으로 이어진다. 민주적 절차 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은 늘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여 대중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묶어버려는 속성이 있다. 수하르토 정권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가 로 통합”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건축은 문화적 전통(특히 국수주의적인 문화) 에 기반해 있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을 고수했다. 문화적 전통을 구현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과거의 전통적인 건축형태를 복제하여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에 적용하 는 것이다. 마치 한국 군부 독재 시기의 조악한 전통 형태의 조합 또는 부분적으로 전 통형태를 뒤섞어 국적불명의 건축물을 양산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양태를 보여준다.

현재(2018년) 자카르타 관공서 건축물들의 형태는 모던한 몸통에 전통형태의 지붕을 흉내낸 형태적 절충주의 건축물들이 대부분이다. 수하르토 30년 군부 독재 시대의 국수주의적 건축 문화가 그대로 잔존하고 있는 증거들이다.

전통 형태의 복제가 지역성과 역사성을 담보해준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지금도 여 전히 인도네시아 건축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지식인 건축가들의 토로는 이곳의 건축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건축에서 지역성은 매 우 중요한 개념이며, 반드시 건축설계 시 고려되어야할 하나의 요임에는 분명하나, 전통 형태 차용만이 지역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한국인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양복을 입고 갓을 쓴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의식 수준인 것이다. 장기간의 수하르토 집권기에 인도네시아 건축계는 토론과 탐구보다는 침묵과 추종의 시간이었다. 결국 지식인 건축가들의 비판적 사고까지도 통제되고 억압되면서 건축가들의 비판적 창작력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화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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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대표적으로 근대적이고 전위적인 건축가 모임으로 출발한 ‘아뜰리에 6(Atelier 6)’ 의 경우도 지역성과 전통성에 집착하는 수하르토의 건축에 적합한 절충주의 건축을 시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생각보다 매우 길었고 깊었고,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다.

UI 대학 본관동(GPAUI), 아틀리에 6, 1984

보다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민주화 시기를 맞이하여, 1980년대 후반 일단의 건축학과 학생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진 ‘아미(Arsitek

Muda Indonesia)’는

우민화된 전통 회귀에 반대하면서, 건축의 본질적 가치를 지향해야하는 입장을 가졌 다. 해방 이후 결성된 근대 건축가 모임인 ‘Atap’과 ‘아뜰리에 6’의 뒤를 잇는 인도 네시아 건축운동의 계보라고 생각할 수 있다. AMI 모임의 결성 이후 이들은 전시회, open house 행사, 세미나 등을 통하여 새로운 건축적 실험들을 발표하고 있다. 이 후 이들의 뒤를 있는 진정한(?)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인 ‘AMI NEXT’, ‘AMI LAST’ 등의 모임이 계보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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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 AMI 건축가들의 오픈 하우스 행사 초대장, 2) 살리하리 센터(Komunitas Salihari) 일종의 문화센터로 4개동(전시장, 공연장, 까페, 사무실) 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동을 AMI의 건축 가들이 각각 한 동씩 설계했다, 3)AMI 건축가인 안드라 마틴(Andra Martin)의 주택작품, 4)AMI 건축가 이리얀토 푸르노모 하디(Irianto Purnomo Hadi)의 까페 작품

실질적으로 현재 AMI 건축가들은 왕성한 건축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 공모전 의 심사위원, 국가 건축 자문위원, 대학교수, 스타 건축가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 인도네시아 건축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으나 친목모임 이상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 공동의 건축적 목표가 없다는 점등이 이 모임의 한계로 보인다. 결 국 AMI 건축가들이 뛰어난 작품과 활동량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지향점 을 가진 ‘운동(movement)’으로서의 역할은 한계가 있는 듯 보이며, 사뭇 밀폐적인 사 교모임의 일환으로 보인다는 것도 폭발력을 가진 선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AMI의 기본적인 건축활동을 이해하고 있는 젊은 건축가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면서 세대 간의 간극도 메워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많 은 건축가들은 철학적이지도, 사회적인 관심도, 창의적이지도, 심지어는 진지하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문제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나 발생하 는 보편적인 상황이다. 결국, 아방가르드(avant-garde)적 자세로 치열하고 열정적으 로 작업하는 소수의 지식인 건축가들이 미래의 인도네시아 건축계를 주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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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면 뱉고 쓰면 삼킨다 가죽처럼 늘어나버린 청춘의 무모한 혓바닥이여 /이상희- 잘 가라 내 청춘>


사진 에세이 사로잡히지 말 것 / 조현영 . 196 보로부두르 부조 / 채인숙 . 198 익숙한 듯 그렇게 / 조연숙 . 200 우붓(Ubud)에서 / 조현영 . 202 인도네시아의 얼굴 / 김순정 . 204


사로잡히지 말 것

/ 조현영

그때 내가 그것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선 아니 된다는 타당한 이유 때문이 아니 었다 ‘두려움’은 언제나 의지보다 더 커서 본능처럼 존재했다 하루도 같은 하늘은 없었고 하루도 같은 나는 없었다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던데 하늘은 마음먹고 아 름다운가 그렇다 해도 나는 내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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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서쪽 하늘 25일간의 기록)

사진 에세이 . 197


보로부두르 부조

/ 채인숙

내가 쌓은 마음에 내가 무너져 울어도 계절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네

자바의 검은 돌계단 속에서 그대는 나를 잃고 아름다워만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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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세이 . 199


익숙한 듯 그렇게

/ 조연숙

종로거리, 신촌거리, 대학로거리 나는 그와 서있다 각자 하루를 마치고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잠시 있다가 서로의 집으로 돌아가겠지

스나얀거리, 탐린거리, 빤쪼란거리 나는 그와 서있다 함께 집에 가기 위해 차를 기다리며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이야기하겠지

에피소드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특별함이 없는 매일을 함께 하며 익숙한 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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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세이 . 201


우붓 (Ubud) 에서

/ 조현영

나즈막한 동네에 키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길 따라 어깨가 드러난 바띡 원피스를 입고 여행자의 걸음을 걸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라이브 기타 연주에 급할 것 없는 걸음 멈추어 가만히 마음 흔들리던 그 곳

길가의 갤러리는 무명화가의 그림을 팔고 우리는 그림에 한 눈을 팔고 비슷한 듯 아닌 듯한 그림들 속엔 그림의 수 보다 더 많은 사람사는 이야기가 두런거렸다

우리가 함께 나즈막한 거리를 걷는 일 함께 마실 발리 와인을 고르는 일 바띡 드레스를 골라주고 그림 흥정을 지켜봐 주는 일 부시시한 얼굴로 마주 앉아 떨던 모닝수다 그 모든 것이 일상처럼 벌어진 일탈이었다 우붓 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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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세이 . 203


인도네시아의 얼굴

/ 김순정

이 속에 사랑과 눈물 그리고 진심과 거짓이 있고 꿈과 희망이 있다. 이 안에 인도네시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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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세이 . 205



2018 '인작' 활동


2018인'작 활 '동 <2018년 1월 13일 (토) / Agneya Restaurant (10명)> *2기운영진 구성: 회장 – 이강현. 부회장 – 배동선, 김의용. 사무국장 – 조현영. 편집부 – 채인숙(편집장), 조연숙, 조현영, 김순정.

*자경/데일리인도네시아 기고문 주제 결정: 인도네시아의 어느 곳, 자카르타의 어느 곳,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사람.

<2018년 2월 10일 (토) / 한인니문화연구원 (12명)> * 주제 발표: 1. '당신은 페미니스트' 입니까? - 박준영 2. 일무끄발 - 금강불괴 신체술 – 배동선

<2018년 3월 10일 (토) / 한인니문화연구원 (8명)> * 주제 발표: 1. 체질의학 – 이동균

* '인작' 웹진 편집 방향 확정

<2018년 4월 21일 (토) / 한인니문화연구원 (7명)> * 주제 발표: 1. 뚜구 꾼스트링 플레이스의 물타뚤리룸에 엮인 네덜란드 고전 소설 막스하벨라르- 사공 경 2. 인도네시아 3대 미인 출신 지역과 그 실체 –이강현

<2018년 5월 17일 (목) / Okuzono Restaurant (10명)> * 주제 발표: 1. 재외국민/재외동포의 문제 – 조연숙

* Buka Puasa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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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14일 (토) / 한인문화회관 도서관 (7명)> * 주제 발표: 1. 인도네시아 건축의 발견 – 김의용 2. 에카 꾸르니아완의 '호랑이 남자' – 조현영

<2018년 8월 11일 (토) / 한인니문화연구원 (7명)> * 주제 발표: 1. 북학의로의 초대 - 노경래 2. "우리는 게으르기 위해서 영리하게 일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일 취 월 장(일을 잘하기 위한 8가지 원리) - 김현미

<2018년 9월 8일 (토)> * 건축가 안드라 마틴 Bintaro 저택 탐방 - 탐방 리더: 김의용

<2018년 10월 6일 (토) / 한인니문화연구원 (6명)> * 주제 발표: 1. 우리가 모르는 가방의 세계 – 김현숙 2.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 연애시 낭독회 – 채인숙

<2018년 11월 10일 (토) / DIALOGUE Restaurant (9명)> * 주제 발표: 1.김순정: 리더들의 글쓰기 – 재외동포들의 쓰기

* 인작 웹진을 위한 프로필 사진 촬영 외 * 2019년 인작 3기 구성 및 임원진 선출(연임) 회장 - 이강현. 부회장 - 배동선, 김의용. 사무국장 - 조현영. 편집부 - 채인숙, 조연숙, 조현영, 김순정.

<2018년 12월 15일 (토) / PT. MAP INDONESIA 건축설계사무소> *웹진 인작 2호 “우리가 꽃이었구나” – 출간기념 낭독회 *‘수카르노를 통해 본 인도네시아 현대사’ (배동선 저) -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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