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나누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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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창간준비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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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누고 쓰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창간준비호1

발행일 l 2017년 12월 9일 펴낸곳 l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기획 l 조연숙 조현영 채인숙 김순정 글 l 김순정 김현미 김현숙 노경래 박정자(회장) 배동선 사공경 이강현 이연주 조연숙 조현영 채인숙 최우호 최장오 (가나다 순) 사진 l 조현영(@manzizak) 외 표지그림•본문디자인 l 김영민

©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하며, 이 책의 전부 또는 일부의 내용을 사용하려면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창간준비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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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집을 지으며

집, 우리들의 작은 배 / 박정자

기둥이고 지붕인 것은, 모두 다 집이다 생명을 길러낸 내 어머니의 아기집에 어두운 창가에서 떠올리는 그대 말씀집에 내가 읽는 몇 권의 시집에, 나를 일으키는 따뜻한 기둥과 지붕 있으니, 세상의 모든 집은 작은 배, 꿈꾸며, 정지한 듯 하지만 출렁이며 흘러간다 상처 난 몸 누이면 새 살을 올려주고 기진한 몸 기대면 생기를 채워주고 휴식하는 몸에 꿈의 빛깔을 입힌다 모든 날, 너는 나에게 기둥이고 지붕이다 집이다 마주앉은 목소리가 물결 같을 때 싱싱하게 빛나는 고래처럼 맘이 놓일 때 함께 젖는 바다엔 바람이 잦아든다 집, 우리들의 작은 배 어두워진 그대의 이마에 불을 켜주는 곳




첫 번째 집을 지으며 • 집, 우리들의 작은 배 / 박정자 _4

1.

인도네시아

• 아내를 구하는 영웅 이야기(라마야나) / 이연주 _12 • 강요된 사랑, 뻴렛주술 / 배동선 _15 • 순다인의 노래 / 노경래 _20 • 처녀귀신의 도시 이야기(뽄띠아낙) / 배동선 _26 • 바틱 인도네시아 / 사공경 _32 • 인도네시아 꽃과 나무는 말한다 / 노경래 _38

2.

• 목선 / 김현숙 _44 • 스콜 / 조연숙 _46 • 인디언 오션 / 채인숙 _48 • 일생 / 최장오 _49 • 머리냄새가 맡고 싶어, 엄마 / 최장오 _50 • 유년의 겨울 / 김현숙 _52 • 허기진 / 최장오 _54

3.

포토 에세이

• Gili Trawangan 섬에서 / 조현영 _58 • 오젝 빠융 / 조연숙 _60 • 살락 망상 / 조현영 _62

4.

독서

• 춤추는 사내,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 박정자 _66 • 왜 읽는가, 그것이 혁명이기 때문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채인숙 _72 • 로쿠베 우리가 도와줄게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 이연주 _76 •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건축 <집에 들어온 인문학> / 김현미 _78 • 평화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에요 <평화는 어디에서 오나요> / 이연주 _84


5.

기행

• 그 거리의 오래된 이야기- 멘뗑 / 채인숙 _90 • 플로레스해의 붉은 고래 / 김현미_93 • 울렌 센따루 박물관 / 사공경_97 • 파푸아 이야기 / 이강현 _106 • 전설과 함께 한 치악산 등반 / 최우호 _116 • 디지털 도시 속으로 / 조연숙 _120

6.

자기계발

• 특별한 날, 대표하는 축제와 이벤트를 뒤돌아 보기 / 김순정 _126 •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리더인가? / 김순정 _132

7.

번역소설

• 스칼렛 아이비스(The Scarlet Ibis) / 김현숙 _140

인작

• 회원 프로필 & 자축 메시지 _154 • 인작의 발자취 _162 • 고(故) 박상훈 님의 명복을 빕니다 _164


- 다른 것 같다 하고 같은 것 다르다 하니, 같고 다름이 다르고 같은 것 다르다 하고 다른 것 같다 하니, 다르고 같음이 같구나


1 인도네시아

아내를 구하는 영웅 이야기(라마야나) • 이연주 강요된 사랑, 뻴렛주술 • 배동선 순다인의 노래 • 노경래 처녀귀신의 도시 이야기(뽄띠아낙) • 배동선 바틱 인도네시아 • 사공경 인도네시아 꽃과 나무는 말한다 • 노경래


아내를 구하는 영웅 이야기(라마야나) 힌두신화 ‘라마야나’와 한국 구전설화 ‘땅속 나라 도둑 괴물’을 함께 보다 / 이연주

두교에 유명한 서사시 ‘라마야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상상을 불 러 일으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구현되고 있

다. ‘라마야나’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라마는 인도 아요디아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 현 인의 보호를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시바의 활을 휘는 시합에서 우승을 하여 아름다운 시타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 후 왕권의 음모에 휘말려 시타와 함께 숲으로 쫓겨나게 되고, 시타의 미모에 반한 마왕 라바나는 시타를 납치한다. 라마는 시타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수많은 모험 끝에 라바나를 죽이고 시타를 구한다. 그 과정에서 원숭이 장군 하누 만의 조력이 크다. 그러나 귀환한 라마는 시타의 정절을 의심한다.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불길에 뛰어들거나, 숲으로 쫓겨나 두 아들을 낳아 잘 키운 후 대지로 돌아 간다. 이렇게 결말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박물관 유물을 통해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머리에 떠오른 것이 우리나라 옛이야 기 ‘땅 속 나라 도둑괴물’이다. 사실 힌두인의 자존심 ‘라마야나’ 이야기와 우리의 베갯머 리 이야기를 비교하기엔 서사의 크기나 이야기가 지향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너무 커서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라마야나’ 이야기는 비쉬누의 현신이라 여기는 라마를 영웅으로 만 들기 위해 쓴 서사시다. 물론 시타도 비쉬누의 배우자 락슈미의 현신이라 여긴다. 종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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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인지 아니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남성중심사상 때문인지 이야 기는 철저히 남성영웅주의로 흐른다. 어려움을 겪고 겨우 구하게 되는 시타의 정절에 대 한 라마의 의심과, 그 의심을 인정하고 라마의 곁을 떠나 숲에서 홀로 아이를 낳는 시타의 행위 속에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아니,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상 황이다.

우리 옛이야기 ‘땅 속 나라 도둑괴물’의 플롯도 이와 비슷하다. ‘라마야나’ 이야기에 비 해 단순하지만, 괴물로부터 아내를 구하기 위해 남자는 여행을 떠나고 조력자를 만나 자 신을 단련한다는 플롯진행은 비슷하다. 옛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여정을 떠나는 것은 이를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청중 또는 독자도 성장을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장의 보상으로 원하는 가정을 갖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 대부분의 결말 이다. 그런데 ‘라마야나’ 이야기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시타는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밝 혀야 했고, 그 방법도 극단적이었다. 물론 신화적 요소를 넣기 위해 시타가 불길에 뛰어들 때 대지의 신이 나타나 그녀의 결백을 증명한다는 장면은 상당히 극적이고 흥미롭다. 어 찌 보면 이것도 편견인지 모르겠다. 시타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강한 확신이 있었기에 불 길 속에 뛰어 들 수 있었나? 숲으로 간다는 결말도 마찬가지다. 쌍둥이 아이들을 혼자 힘 으로 나아 잘 키운 덕분에 의심을 풀고 라마와 같이 살 수 있는 상황에도 시타의 선택은 대 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마왕 라바나의 유혹도 잘 견디고 라마의 의심을 해 결하는 방법도 적극적이다. 그래서 나에겐 시타가 더 영웅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남성으 로 봤던 내 시각도 치우쳐져 있었기에 처음엔 시타가 안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자카르타 국립박물관 신관 4층 보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워노보 요 출토 유물. 금으로 만들어진 의식용 그릇 겉에 ‘라마야나’ 이야기가 조각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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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옛이야기 ‘땅 속 나라 도둑괴물’ 에서도 아내의 역할은 적극적이다. 갖은 보 물과 호화로운 생활로 유혹하는 괴물에게 넘어가지 않고 신랑이 자신을 구해주러 올 것이 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여정을 견디고 드디어 도착한 신랑을 수련시키고 결전에서 괴물 의 불사신 능력을 제거하는 역할도 아내의 지혜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이야기는 지방 에 따라 다양한 결말을 갖고 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밝힌 각편 이 백 편이 넘을 정도로 플롯의 다양한 변화를 가지고 있다. 이는 종교적으로 신성한 서사 시보다 구전으로 서술되는 옛이야기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우리 이야기 속에서도 괴물을 해치고 구한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는 결말도 있다. 또 괴물을 선택하고 자신을 구하러 온 신랑을 위기에 빠뜨리는 맹랑한 아내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런 경우 신랑은 아내의 종으 로 따라 간 여인의 도움을 받고 아내는 응징을 당한다. 아마도 정절이 중요시되던 시기에 회자됐던 이야기일 것이라 추측해 본다. 이는 몇 안 되는 것으로 대부분의 각편에서 아내 는 신랑의 조력자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내가 이 옛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시타나 괴물에게 잡혀간 아내처럼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당당하게 해결해내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좋다. 물론 그녀들이 주인공으로 플롯 전 체를 이끌어 가는 이야기도 멋지다. 하지만 주인공의 조력자로 지혜를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할 때 통쾌함마저 느낀다. 옛이야기를 듣는 청자는 이야기 속 인물 중 하나에 감정을 이입한다고 한다. 그 인물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갖고 있거나 자신과 닮은 인물일 것이 다.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자신의 문제가 이야기 속에서 해결됐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 끼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도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시타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둑괴물에 게서 빠져 나온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둘러싼 편견과 나를 누르고 있는 힘을 지혜 롭게 마주하고 싶다. 그 편견은 주부 또는 여성이라는 허울일 것이고, 그 힘은 내 허울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각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페미니스트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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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사랑, 뻴렛주술 / 배동선

랑이란 시공을 막론하고 인류가 가장 주목해 온 화두들 중 하나입니다. 그게 마 음먹은 대로 잘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조바심 나게 만들면서도 그 결실

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거든요. 하지만 사랑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 은 이유는 회사나 군대처럼 특정 목적을 가진 집단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 개인적 방향이 절대 같을 리 없는 두 개인이 아무런 사전합의도 없이 무작정 감정적, 정서적 접점 을 찾아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만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란 것이죠. 그래서 동물들도 화려한 외관이나 멋진 목소리, 또는 냄새와 페로몬으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때로 는 힘으로 제압하기도 합니다. 사람이라고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알맹이가 별로 시원찮 으면 외모나 학력, 가문, 의상, 명품 액세서리는 물론 타고 다니는 차량과 살고 있는 아파 트까지 동원해 상대방에게 어필하려 하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안 되면 사랑을 포기해야 할까요? 물론 이 대목에 이르면 납치나 감금 같은 명백한 범죄행위들을 빼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남은 선택지란 이제 산에 들어가 빡세게 금식기도 하는 정도가 고작입니다. 신의 능력, 미지의 힘을 빌리려 한다는 측면에서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뻴렛주술과 일부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금식기도 와 달리 뻴렛주술이란 그 의도가 부도덕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긴 하지만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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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범죄라고 인정되기 어려운, 그렇지만 걸리면 종교적,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쉬운 것입니다. 뭐, 주술이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사랑이 그런 것처럼 말이죠. 인도네시아가 이슬람화 되어가던 과정에서 토착무속은 외래 종교의 수면 밑으로 서서히 가라앉아 빤짜실라와 이슬람의 기치가 맹렬히 휘날리는 주류 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누구나 갖고 있는 은밀한 욕망을 기반으로 거대한 주술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뻴렛주술은 토착무속 중 서부자바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진 강력한 흑마 술입니다. 인도네시아 민간에 잘 알려진 흑마술로는 상대방이 병에 걸리거나 나쁜 운이 깃 들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도록 저주하는 산뗏(Santet)주술, 영적 존재들에게 산 제물을 바쳐 당대에 즉각적 금전적 번영을 추구하는 재물주술(Pesugihan), 주술을 통해 총칼도 해치지 못 하는 금강불괴의 신체를 만드는 일무끄발(Ilmu

Kebal)

같은 것들이 있는데 사랑을 강제하는

뻴렛주술 역시 메이저 주술들 중 하나로서 은밀하게 각광받고 있습니다.

뻴렛주술은 기본적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심지어 미워하고 혐오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불 같은 사랑을 일으켜 그 강제된 사랑을 매개로 상대방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그 지위, 재산, 가족, 심지어 기존 배우자까지 헌신짝처럼 버리거나 바치도록 만드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와 생명을 요구하는 다른 주술들과 달리 뻴렛주술은 일련의 엄격한 금식을 하며 일정 주문을 외우는 게 고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과 적으로 음습하고 파괴적인 파국을 가져온다 해도 그 시전방법은 비교적 깔끔해 처음 시도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거부감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더욱이 조직 내 상사나 고객들 의 총애나 호의를 얻기 위해 주술을 건 액세서리나 화장품을 사용해 호감 넘치는 외모로 레 벨업하는 정도라면 정말 애교로 보아 줄 수도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목적으로 주술을 담은 보석을 몸 속에 심어 획기적인 미모의 향상을 도모하는, 그래서 과거엔 성형수술처럼 성행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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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수숙(Susuk)시술 역시 뻴렛주술의 범주에 속합니다. 저주술 산뗏두꾼들보다 뻴렛 주술 사들의 인터넷 사이트가 더욱 성업하는 것은 죽이고 싶은 원수보다 환심을 사야 할 상대방 이 더 많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사회를 투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상대방의 무의식에 초자연적인 영향을 가해 그 마음에 사랑의 감정을 강제로 심는 뻴 렛주술의 종류는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백여 가지가 넘지만 가장 유명한 것들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아지안 자란고양(Ajian Jaran Goyang-날뛰는 준마의 주술)이란 옛날 짝사랑에 빠진 총각들이 상대 처녀의 마음을 굴종시키던 흑마술입니다. 7일간 정해진 금식을 철저히 행하고 매일 41차례 특정 주문을 외우면 마지막 날 밤 상대방 처녀는 당신에 대한 깊은 사랑이 흘러 넘 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기 시작합니다. 이 주술에 걸린 처녀는 당신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그리움에 늘 가슴이 타 들어가는데 당신이 그녀를 차갑게 대하면 급기야 미 쳐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인도네시아 남성들이 자신을 버린 상대방에게 복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주술을 더욱 찾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족이지만 서부자바의 인드라마유와 찌레본이 뻴렛주술의 원조격 성지가 된 것은 이 자 란고양 주문을 만든 “끼 부윳 망운 따빠”라는 도인의 묘지가 인드라마유에 있고 그의 비밀 주술서를 손에 넣은 찌레본 인근 쩌르마이산(Gn.Cermai)의 마녀 니니뻴렛(Nini Pelet)이 고대 자 바의 왕들을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을 정복해 그들의 생명을 제물로 수백 년 동안 젊음과 미 모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뻴렛’이란 명칭 역시 이 마녀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에 못지 않게 유명한 스마르 므셈 주술(Ilmu Pelet Semar Mesem)은 가장 오래된 고대의 주술로 상대방을 미소 하나로 사로잡을 뿐 아니라 시전자가 아우라를 발하며 더욱 현명하 고 믿음직스러워 보이도록 해 누구든 그 주변에서 마음의 안정과 행복함을 느끼게 만듭니 다. 그러니 관료들이나 연예인들, 다단계 사업자들처럼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려야 하는 사람들이 이 주술에 주목합니다. 이 주술이 스마르의 미소(스마르 므셈)라 불리는 이유는 전 통 그림자극에도 등장하는 고대 자바의 반신반인 스마르(Semar)가 이러한 아우라를 풍겼다 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바람난 배우자를 돌려세우는 뿌떠르 길링 주술(Ilmu

Pelet Puter Giling),

사랑의

끈을 더욱 바짝 조여 가정의 화목을 증대시키는 깐띨 주술(Ilmu Pelet Kantil), 왕가의 공주들 이 왕자들을 유혹하는 데에 쓰였다는 아스마라가마 주술(Ilmu

Pelet Asmaragama)

등도 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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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관심을 끕니다. 자기 딸이 가족도 아닌 외간남자만 감싸고 돌며 부모를 거슬러 집안의 돈과 재산을 빼 돌려 그 남자에게만 퍼날라 주려 한다면 뻴렛주술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 인 도네시아인들의 일반적 반응입니다. 따라서 뻴렛주술에 빠졌는지 판단하는 분별법이 여 러 매체에 소개되어 있는데 대개 생활리듬이 깨진 채 제정신이 아닌 듯 말귀도 못 알아듣 고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실제로 매체나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뻴렛주술의 사례에서 무서울 정도의 짝사랑과 그로 인한 강박관념으로 추하 게 망가져 가는 피해자들이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보다 분명한 주술의 영향 아래 두려면 그 방식은 좀 더 음습해집니다. 기본적 으로 뻴렛주술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아 결국 아는 사람의 등 뒤에서 은 밀하게 시전되는데 주술이 담긴 재료를 음식이나 음료에 섞어 먹이거나, 저주술의 경우처 럼 상대방의 침이나 분비물 등 체액, 머리칼, 손톱, 체모 또는 속옷을 주술의식을 통해 태 우거나 주술적 힘이 담긴 함에 봉인하는 방식으로 주술의 위력을 극대화시킵니다. 이 과 정에서 뻴렛주술은 범죄의 경계를 살짝 넘어가기도 합니다. 뻴렛주술 피해자들의 인격과 의지가 파괴되고 생활이 망가져가는 모습은 주술을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마약에 취해 횡설수설하며 터무니없는 기행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여 최면술이나 독, 약물을 통한 정신지배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실제 피해자들 은 혹독한 정신적 고통과 심각한 후유증을 겪습니다. 뻴렛주술이 정말 무서운 점은 그 효 과와 후유증이 거의 영구적이라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뻴렛주술을 건다는 건 매우 위험한 공격행위인 것이죠. 스스로에게 뻴렛주술을 심는 수숙의 경우에도 후유증이 남습 니다. 어떤 여인은 병들고 늙어버렸지만 그 부작용으로 90살이 넘어도 평안히 죽을 수 없 어 결국 그때의 두꾼을 불러 수숙을 제거하자 다음날 비로소 죽을 수 있었다는 얘기도 전 해집니다. 물론 불경한 주술을 몸에 담고서는 무슬림의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교훈을 말 하고자 만들어진 얘기라고 생각됩니다. 뻴렛주술의 남용과 파괴적인 부작용에 비해 인도네시아인들이 말하는 예방책은 매우 소극적입니다. 다른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니 말입니다. 즉 누군가 의 사랑고백을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거나 모욕감을 주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렇 다고 정말 주술로부터의 안전이 담보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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뻴렛은 다른 주술들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강제로 얻어내 려는’ 목적을 가집니다. 그래서 뻴렛주술이 성행한다는 것은 사랑과 호의를 얻는 것이 그 토록 중요함을 웅변하는 동시에 그것들이 그토록 얻기 힘든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 니다. 그래서 뻴렛주술에 의존하는 사람들 마음은 상당부분 이해하면서도 필연적 부작용 인 상대방의 정신적 피폐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파렴치함도 살짝 엿보게 됩니다. 주술 의 효과가 있고 없음을 차치하고 뻴렛주술이 정신건강에 이롭지 못함은 자명해 보입니다. 뻴렛주술처럼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현지 무속과 주술은 사실 우리 주변에 바짝 다가와 있습니다. 처우에 불만을 품고 나가버린 뻠반뚜가 자기 방 달력 뒤에 그려놓은 이상한 그림들과 도형들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요? 노사분규를 겪고 있는 사업장의 엄격한 사장과 완고한 관리자들은 앙심을 품은 직원들로부터 이미 몇 번씩이나 산뗏저주를 맞은 건 아닐까요? 오더 캔슬 당한 저 업체 사장은 밤새 찌레본이나 수카부미의 용한 두꾼에 게 달려가 내 헝겁인형에 바늘이라도 꼽으려 들진 않을까요? 탕비실에서 내오는 저 커피에 직원들이 주술 걸린 설탕을 넣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마케팅부 여직원과 동거 하기 시작한 한국인 매니저가 회사 시스템이 망가질 정도로 자기 애인만을 싸고 돌며 다른 직원들의 원성을 사는 건 사실 뻴렛주술에 걸린 꼭두각시가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 쁘게 차려 입은 사무실 여직원은 오늘도 상냥한 미소로 인사하지만 사실은 내 호감을 얻기 위해 뻴렛주술이 걸린 브로치로 질밥을 고정하고 그런 립스틱으로 입술을 발랐을지 모릅니 다.이슬람을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현지 무속을 공부하는 것 역시 인도네시아 사회와 문화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는 만큼 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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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다인의 노래 / 노경래

음에는 낯설지만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는 시간이 흐르면 자신도 모르게 낯선 것 에 익숙하게 된다. 자카르타에 살고 있는 우리 디아스포라들도 우리가 옛 순다

(Sunda)의

하늘 밑에서 순다인과 부대끼고 사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여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일상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무디어짐과의 결별을 위해 순다와 순다인을 다시 바라본다. 순다인(족)은 자바섬의 서쪽 부분에 살고 있는 토박이를 말한다. 현재 순다인은 약 4천 만명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바인(족) 다음으로 많다. Sunda라는 이름은 ‘선(善)’ 또는 ‘좋 은 기질을 가진’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접두사 ‘su-’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su-는 ‘금(gold)’을 나타낸다. ‘좋은 빛깔’을 뜻하는 suvarna에서의 su-도 같은 의미이다. 산스크리트어의 sundra(남성)와 sundari(여성)는 ‘아름다움’ 또는 ‘탁월함’을 뜻하므로 결 국 Sunda는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생태지리학적 측면에서 순다는 훨씬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순다랜드 (Sundaland)는

왈라스 라인(Wallace

Line)의

서쪽에 위치한 말레이반도와 말레이 군도를 아

우르는 동남아시아를 의미한다. 한편, 순다열도(Sunda Islands)와

Islands)는

대순다열도(Greater

Sunda

소순다열도(Lesser Sunda Islands)에 속하는 섬들을 의미한다. 대순다열도는 크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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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다왕국(669–1579)

서는 서쪽으로는 말라카해협 건너편 수마트라, 순다해협을 건너 자바, 자바해를 건너 칼 리만탄을 아우르는 지역이며, 소순다열도는 발리, 누사뜽가라 및 말루꾸 남쪽 섬들의 일 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순다인은 약 BC 1000-1500년 중국 남부에서 필리핀을 거쳐 자바에 이주한 오스트로 네시안(Austronesian, 南島語族)의 후예라고 보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물론, 순 다인은 빙하가 녹아 현재는 바다가 된 말라카와 순다해협을 거처 오늘날 순다지역으로 이 주한 오스트로네시안의 후예들이라는 가설도 있다. 순다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정치조직체는 4세기부터 7세기까지 번성한 따루마나가라 (Tarumanagara)

힌두왕국으로 알려져 있다. 669년에 따루마나가라 왕국은 순다(Sunda)왕국

으로 개명되었는데, 순다왕국은 현재의 반뜬, 자카르타, 서부자바 및 동부자바의 서쪽 부 분을 지배하였으며, 실리왕이(Siliwangi) 재임 시절(1482-1521년)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15-16세기경에 이슬람교가 인도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순다인에게 전파되기 시작했 으며, 서부자바의 해안 지역인 반뜬과 찌레본에서 이슬람 술탄왕국이 들어선 이후 1579 년 순다힌두왕국은 몰락하고 순다지역의 이슬람화는 가속화되었다. 16세기에 네덜란드 와 영국이 서부자바에 무역선을 정박하기 시작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네덜란드의 본격적 인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된 1950년에 서부자바주가 인도네시아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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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양골렉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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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으로 획정되었으며, 2000년 지방자치제 실시 때 반뜬주가 서부자바주에서 분리 되었다. 현재 자바섬에 살고 있는 주요 종족은 순다족, 자바족, 마두라족이다.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사떼 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마두라족을 제 외하고는 순다인과 자바인은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른 기질을 보이고 있다. 자바인 과 순다인이 하나의 종족인데도 서로 분리된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 순다왕국에 속한 갈루(Galuh)왕국이 현재 서부자바주에 있는 찌아미스(Ciamis)에 자리잡 았다. 갈루의 왕은 한 신하가 왕이 되어 싶어하자 그 신하를 변신시켜 왕이 되게 하고, 자 신은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신하가 왕으로 행세하고 있는 동안 원래 왕의 첫 번째, 두 번째 왕비는 각각 사내아이를 낳았다. 두 번째 왕비에게 태어날 아이(찌웅 와나라, Ciung Wanara)가 막돼먹은 놈이라는 꿈을 꾼 왕은 첫 번째 왕비와 짜고 신하를 시켜 와나라의 어머니, 즉 두 번째 왕비를 죽이라 명 하였는데, 신하는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와나라 어머니가 살도록 하고, 아이는 바구니에 싸서 강물에 띄워 보냈다. 그런데 한 어부가 그물을 건져… (중략) 아이가 성장하였다. 성장한 와나라는 갈루로 가서 왕이 닭싸움에서 이기면 왕국의 절반을 주기로 한 내기 에서 이겨 갈루왕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자 다른 왕비의 아들(하리앙 방아, Hariang Banga) 이 반란을 일으키자 산속으로 명상하러 갔던 왕과 와나라의 어머니가 동시에 나타나 말하 였다. “싸움을 멈춰라. 형제들끼리 싸우는 것은 금기(Pamali)다. 너희 둘 다 나의 아들이다. 그 러니 큰 아들 하리앙 방아는 브레베스(Brebes)강 동쪽을, 작은 아들 와나라는 갈루를 통치 하거라. 브레베스강을 경계로 삼고, 형제 간에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강 이름도 ‘빠말리(Pamali,

금기)의

강’으로 바꾸어라.” 하리앙 방아는 동쪽으로 가서 자바왕국을 세웠

고, 찌웅 와나라는 갈루왕국을 잘 다스렸다는 전설이다. 같은 날에 태어난 쌍둥이도 기질이 다르지 않던가. 더구나 순다인과 자바인은 배다른 형제 아닌가. 순다지역은 전통적으로 용수를 자연에만 의존하는 천수답(天水畓) 위주인 반 면, 자바지역은 상대적으로 세심한 관리와 노동력이 요구되는 수리답(水利畓)이 많다. 순다 지역은 자바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악지형이 많은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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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순다인은 자바인에 비해 단순한 삶을 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순다인은 낙천적 이고, 독립적이며, 사회적 위계질서에 덜 민감하며 더 평등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 이후 이슬람 영향으로 그러한 특성이 더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순다인은 이러한 기질로 인해 집단이나 회사에 속해 일하기 보다는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을 더 선호한다. 정부기 관 등 경직된 조직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와룽이나 생필품을 파는 행 상 또는 이발소 등과 같이 소규모의 사업을 주로 운영한다. 순다인은 또한 자연을 경외하고 외부인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기질이 있다. 순다인은 그들의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자르거나 숲 속의 생물들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 를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 경외와 외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기질의 극단적인 예 는 바두이(Baduy)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순다인과 자바인의 기질은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바의 예 술은 숨막히는 절제미가 있는 반면에, 순다인의 예술은 자바인의 예술보다는 자유분방함 이 묻어 나온다. 자바의 전통 가믈란과 순다의 가믈란인 드궁(Degung)을 보면 그 차이가 확 연하고, 자바 왕실에서 공연되는 종교 의식화된 춤인 브다야(Bedaya)와 에로티시즘을 표 현하기도 하는 서부자바의 자이뽕안(Jaipongan)은 양 극단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자바의 와양 꿀릿(Wayang

Kulit)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나 『마하바라타』나

이들의 자바버전을 주된 소재로 하지만, 순다의 와양 골렉(Wayang Golek)은 이보다는 이슬 람 관련 이야기를 더 많이 사용한다. 순다인의 전통도 시간의 흐름과 외부의 영향에 따라 많이 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 다. 19세기에 네덜란드가 커피, 차 등의 경작을 위해 순다지역의 깊숙한 내륙까지 개발함 에 따라 순다인들도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순다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면서 순다인을 개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순다 개신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수적으 로 소수이며 그것도 대부분 중국계 개신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이슬람교는 순다인, 특히 도회지역에 거주하는 순다인의 사회에 점진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순다인의 전통 관습과 삶의 방식을 고수하 고자 하는 소수의 순다 공동체의 움직임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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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웃고 있는 순다인들

일생의 대부분을 서부자바에서 보낸 네덜란드 심리학자이며 작가인 MAW Brouwer(1923-1991)는 “신이 미소 짓자 빠순단(Pasundan,

서부 자바)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바쁜 일상에서 늘 잊고 살지만, 우리 디아스포라들는 이 순간에도 아름다운 순다와 순다 인들 함께 노래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언제나 같은 목소리로 들렸던 순다인의 노래가 새롭게 들린다. 그들과 자바인과의 애증, 그들의 전통과 종교, 역사를 통해서 그들 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호흡이 새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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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의 도시 이야기(뽄띠아낙) / 배동선

부 깔리만탄의 주도 뽄띠아낙이란 도시이름은 ‘꾼띨아낙’과 같이, ‘처녀귀신’이 란 뜻입니다. 애당초 그런 이름이 붙은 데엔 다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만 그로부

터 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의 뽄띠아낙은 처녀귀신이 좀처럼 발붙이기 쉽지 않을 듯한 발전상을 보입니다. 말레이시아 영토인 사라왁(Sarawak)이 지척인 이곳엔 인도네시아 전 력공사 PLN의 세이라야(Sei

Raya)

디젤발전소도 들어와 있는데 발전기마다 이런 좌표가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발전기의 위도는 0도 4분 23초. 즉 적도에 거의 붙어 있다는 뜻이죠. 적도는 지구 의 허리를 빙 둘러 가며 선을 긋고 있지만 대부분 바다이다 보니 적도가 걸친 태평양 상 의 섬들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고 그래서 뽄띠아낙의 적도 선상엔 적도기념비(Tugu Khatulistiwa)가

세워져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유일한 민속박물관인 듯한 서부 깔리만탄 박물관(Museum Barat)도

Kalimantan

현지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겐 가볼 만한 곳으로 선사시대로부터 왕조시대,

네덜란드 강점기의 유물들과 화교 영향을 크게 받은 현지문화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 카르타에 있는 박물관이라면 꼭 있어야 할 뭔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독립전쟁의 역사가 송두리째 빠져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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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입니다. 도시 이름이 처녀귀신이 된 것처럼 박물관에서 독립전쟁을 소개하지 않는 것 역시 나 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뽄띠아낙 술탄왕국이 견지하고 있던 입장 때문이었으리라 추론하게 됩니다.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48년 1월 최신무기와 월등한 화력으로 전장을 압도하던 네덜 란드군과 열악한 무장의 신생 인도네시아군은 두 번째 휴전협정인 렌빌 조약을 맺고 각 각의 점령지역 경계를 따라 ‘반묵라인’이라는 선을 긋습니다. 그런데 병력을 증강하고 군 세를 정비해도 시원치 않을 인도네시아 측에선 그 사이 병력감축 논의가 시작되고 내부 갈등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9월엔 중부자바의 마디운(Madiun)에서 공산당 반란이 터져 스

(위)뽄띠아낙 시내 야경 (아래)뽄띠아낙 중심을 가르고 있는 적도선을 기념하기 위한 적도기념상 내,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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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의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맙니다.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네덜란드군은 그 해 12월 휴전협정을 일방적으로 깨고 인도네시아 임시수도인 족자를 침공해 들어갔습니다. 까마귀작전이라 불리는 네덜란드군의 총공세였습니다. 족자 인근 마구워(Maguwo) 비행 장을 탈취한 공수부대를 필두로, 파죽지세로 족자 시내로 진출한 네덜란드군은 술탄의 끄라톤에 피신해 있던 수까르노 대통령, 하타 부통령, 전군 사령관 등을 비롯한 인도네시 아 정부를 통째로 나포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적장을 잡았으니 보통의 경우라면 여기서 전쟁은 막을 내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여기서부터 사뭇 다른 양 상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누가 뭐래도 이 시기에 가장 부각된 인물은 수디르만 장군입니다. 전력을 최대한 보존 하며 족자를 탈출한 그는 폐결핵이 그의 목숨을 급속히 갉아먹고 있었지만 게릴라들과 함께 험한 산속을 행군하며 네덜란드군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쳤고 인도네시아 전역에 산 재한 정부군 게릴라 부대들을 지휘해 몇 차례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기획하면서 인도네시 아가 아직도 항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립니다. 한편 이 시기에 수마트라의 부 낏띵기(Bukit (PDRI)가

Tinggi)에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Sjarifudin

Prawiranegara)가

이끄는 긴급정부

세워져 인도네시아 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죠. 수디르만 장군과 부낏띵기의

긴급정부가 없었다면 인도네시아는 어쩌면 오늘날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남아 있었 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역사의 격랑이 휘몰아치던 시기에 두 명의 술탄이 그 무대의 한쪽 모퉁이에 등 장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족자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입니다. 현직 족자 주지사인 하 멩꾸부워노 10세의 아버지죠. 네덜란드 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의 술탄들과 왕 족, 귀족들이 네덜란드로부터 특권을 누리면서 현지 이권들은 물론 신민들의 노동력과 생명까지 네덜란드에 바쳤던 것에 반해 하멩꾸부워노 9세는 독립전쟁 초창기부터 수까 르노의 편에 서서 함께 투쟁하다가 결국 까마귀 작전으로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히는 신 세가 됩니다. 나포된 수까르노와 정부요인들은 수마트라 방카섬의 문똑(Muntok)이라는 오지에 유배되지만 족자 신민들로부터 숭배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술탄을 차마 유배시킬 수 없었던 네덜란드군은 그를 끄라톤에 유폐하고 끊임없이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수까 르노가 무대에서 사라진 상태에서 족자의 술탄이 네덜란드 편으로 전향한다면 그것은 인 도네시아로부터 정식 항복을 받는 것 못지 않은 승리의 증거가 될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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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한 명은 뽄띠아낙의 술탄 하미드 2세입니다. 그는 네덜 란드군을 도와 하멩꾸부워노 9세를 회유하려고 족자에 왔던 것입니다. 그는 선대 술탄의 장남으로 태어나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로 성장했는데 당시 자바나 수마트라 와 달리 깔리만탄을 포함한 타 지역들은 대체로 네덜란드에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전쟁을 맞아 침공해 온 일본군은 깔리만탄의 술탄들 대부분을 살해했고 뽄띠아낙 에서도 하미드 왕자의 아버지, 형제들 대부분이 몰살당했습니다. 당시 바타비아(자카르타) 에 나와있던 하미드 왕자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가혹한 옥 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연합군의 진주와 함께 풀려나 곧바로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대령 으로 임용되고, 살해당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뽄띠아낙의 술탄으로 즉위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당국에 의해 인도네시아 합주국(United States of Indonesia)의 서부 깔리만탄 주국(洲 國)

수장으로 등극한 그가 뚜렷한 친네덜란드 성향을 띈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

니다. 족자의 끄라톤에서 마주한 두 명의 술탄은, 그러나 호의적인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습 니다. 하멩꾸부워노 9세는 네덜란드군에게 겹겹이 둘러쌓여 일견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 던 족자 한복판에서 달콤하기 그지 없는 하미드 2세의 회유를 단칼에 거절하는 강단을

(좌)젊은 시절의 족자 술탄 하멩꾸부워도 9세와 (우)뽄띠아낙 술탄 하미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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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였던 것입니다. 불과 1년 후 세상이 어떻게 바뀔 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하미드 2세 는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을 바라보듯 하멩꾸부워노 9세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멸망하지 않았고 끈질긴 게릴라전과 외교적 노력, 그리고 국제 사회의 압력을 통해 이듬해 인도네시아 독립의 세부사항을 협의하는 헤이그 원탁회의가 열리고 급기야 1949년 12월 27일 네덜란드는 서부 파푸아를 제외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의 주권을 인도네시아에 이양하게 됩니다. 수까르노 정부는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돌아왔고 고난의 시간을 견뎌낸 하멩꾸부워노 9세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지만, 헤이그 원 탁회의 당시 네덜란드 여왕의 보좌단장까지 오르며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하미드 2세는, 이제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운명의 변덕에 분명 당황하고 있었겠죠. 두 사람의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생 정부가 자바인들 중심으로 구성되 고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인도네시아는 내전의 시대 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특수전부대 퇴역장교 베스털링이 조직한 군사단체 APRA가 1950년 1월 반둥에서 일으킨 반란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베스털링은 하미드 2 세를 수장으로 옹립하여 쿠데타를 공모했고 1월 23일 2개 연대규모의 병력으로 기동해 실리왕이 부대원을 100명 가까이 사살하며 반둥 일부를 점령했다가 1월 26일에는 자카 르타 기습을 시도합니다. 중앙정부를 공격해 요인을 암살하려 했던 것인데 그 주요목표 중 한 명이 당시 국방장관이 되어 있던 하멩꾸부워노 9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쿠데타 가 실패로 끝나면서 베스털링은 재빨리 싱가폴로 탈출해 네덜란드에서 영웅대접을 받았 고 하미드 2세는 쿠데타의 수괴가 되어 자카르타의 법정에 서야만 했습니다. 그때 하멩 꾸부워노 9세는 그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았을까요? 뽄띠아낙의 박물관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과 1900년대 후반부의 현대사 대부분이 통 째로 빠져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아니, 뽄띠아낙의 술탄이 줄곧 인도네시아 독립과 통합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구태여 고백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물론 그 박물관은 왜 도시의 이름이 ‘처녀귀신’이라 붙었는지도 설명하고 있지 않습 니다. 자료를 뒤져보면 뽄띠아낙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71년부터라고 합니 다. 개척자들이 처음 들어가 나무를 베며 길을 낼 때 숲 속의 귀신들과 마물들이 출몰해 개척자들을 무척이나 괴롭혔고 특히 처녀귀신의 폐해가 컸다고 하죠. 하지만 그들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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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하미드 2세

의 정적을 깨는 귀신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화포를 쏘아대면서 개척지를 확대해 나가자 결국 귀신도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처녀귀신’의 본거지가 있던 곳에 사원 과 궁전을 짓고 그 사건을 잊지 말자며 그 도시의 이름을 뽄띠아낙, 즉 처녀귀신이라 명 명했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뽄띠아낙 이슬람 왕국의 초대 술탄 샤리프 압둘라흐만 알카 드리는 8대 술탄인 하미드 2세, 즉 압둘 하미드 알카드리의 직계 선조가 됩니다. 그로부 터 180년 후, 하미드 2세의 대에서 술탄의 왕조가 끊기고 만 것은 어쩌면 자기가 살던 터 를 빼앗기고 이를 갈던 그때 그 처녀귀신의 저주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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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틱 인도네시아 / 사공 경

바틱의 현대화 (20 ~ 21세기)

도네시아 바틱은 1800년대 말부터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 바인 외에 유럽인, 중국인, 인디셔(인도네시화 된 유럽인), 아랍인이 바틱 수요자로 참여

하면서 문양의 디자인이 다양해졌다. 또한 1920년에 화학 염료의 등장으로 염색기법과 색상이 다양해지고 작업시간이 단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계 후예(2세

이후)인

뻐라낙깐(peranakan)

들이 바틱의 주요 고객이 되면서 바틱의 산업화는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로써 1890-1920년 대까지 바틱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다. 그 뒤 세계경제공황, 세계대전을 겪으면 서 바틱 산업은 침체 되었다가 독립 후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뻐라낙깐: 중국어나 중국문 화를 잘 알지 못하는 인도네시아화 된 화교 집단으로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바틱 사랑, 초대대통령 수카르노 Sukarno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카르노 대통령은 바틱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는 독 립의 상징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의 정체성이 담긴 바틱을 부각시켰다. 전쟁과 파괴, 민족주의의 대두, 식민지배 체제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자바의 바틱은 많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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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띵(canting)을 이용해 직접 손으로 그리는 방식인 바틱 뚤리스(batik tulis)

은 신생독립 국가의 예술과 공예처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많 은 사람들이 바틱을 일상복으로 착용하기 시작한 것도 독립 이후의 일이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1827년부터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전통복장 착용을 의무화했다. 귀족 남자는 서양식 복장도 허락되었으며, 그들이 서양식 정장을 착용하였을 때는 바닥에 앉지 않고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수카르노 대통령은 전통복장을 입으면 서양인들에게 굽실거리 는 것이 연상되었다. 그는 남자들은 현대식 정장을 입어야 과거에 그들을 지배했던 서양인들과 동등해진다고 믿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바틱을 사랑했지만 바틱을 착용한 적이 없다고 한 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정치권력과 먼 거리에 있는 여성들에게는 전통바틱을 남성들과 다르게 적용하였다. 15C부터 착용하기 시작한 끄바야(Kebaya, 블라우스)는 1827년 이후 바틱치마와 함 께 급격하게 대중화 된다. 인도네시아 여성들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 럽, 중국 여성들도 그 그룹에 어울리는 끄바야와 바틱치마를 입었다. 그래서 수카르노 대통령 도 독립 후, 우아한 끄바야와 까인빤장(Kain Panjang, 바틱 긴 치마), 그리고 슬렌당(Selendang, 숄)을 여성 정장으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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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 정부는 GKBI(Gabungan Koperasi Batik Indonesia)라는 바틱 협동조합 설립을 주도해 바틱 제조 산업을 육성시켰다. 1955년 이래, GKBI는 바틱 천을 다루는 공식 유통 업체로 자바 바틱 상인을 보호하게 되었다.

하르조나고노(K.R.H.T. Hardjonagono)와 “바틱 인도네시아, Batik Indonesia” 하르조나고노(이하

하르조노, Hardjono)의

본명은 고띡 스완(Go

Tik Swan,1931.5~2008.11)

이다.

그는 뻐라낙깐(peranakan)으로 솔로에서 약 1,000명의 장인예술가를 거느린 바틱 기업가인 외 할아버지 집에서 자라면서 그들에게서 다양한 전통 자바이야기, 인형극, 전통 노래, 자바 춤을 배우게 된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국립인도네시아대학(UI, Universitas Indonesia) 학생이었던 그가 개교기념일 때 대통령궁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수카르노는 1955년 그 에게 지역적인 특성을 초월한 범국가적인 ‘바틱 인도네시아’를 개발하도록 독려한다. 그는 솔 로로 돌아와 바틱의 역사와 철학을 포함하여 바틱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했다. 솔로의 왕족과 친한 하르조노는 술탄 빠꾸부오노 12세(Susuhunan Pakubuwono XII)의 어머니에게서 대대로 내려 오는 바틱 문양과 예술적 기법을 전수 받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한 문양이나 전통적인 양식의 본질적인 특성이나 의미를 잃지 않고 더 깊게 연구하고 개발하였다. 통일성, 민족주의, 낭만주의가 반영된 ‘‘바틱 인도네시아“는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침체된 바틱 시장을 활성화시 키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바틱은 1960년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다. 그가 개발한 문양은 솔로-족자 바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청색 및 황백색만이 아니라 밝은 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중부자바 전통문양과 해안 바틱의 색상과 발리에서 영감을 얻은 싸우는 공작 혹은 불사조 형상으로 "바틱 인도네시아"라 불리는 새로운 문양이 창조되었 다. 독립 이전에는 바틱을 ‘’자바의 영혼“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자바적인 색채가 짙었으나 “바 틱 인도네시아”는 자유롭고 통일된 인도네시아의 상징이 되었으며 미학적으로도 잘 조화를 이 루었다. 이는 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국가의 신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마침내 바틱 은 자바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들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르조노의 영감과 수카르노 대통령 의 의지가 없었다면 “바틱 인도네시아”는 현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틱의 제도화, 제 2대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하르토 대통령은 영부인과 함께 300여 종족이 600여 지역 언어 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바틱을 인도네시아인들의 삶의 일부로 만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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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남성 정장을 서양식 정장이 아닌 바틱 셔츠로 바꾸 겠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서양식의 답답한 디너 재킷이 아닌 편한 바틱 셔츠를 입게 되었다. 또 한 바틱의 상업화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1971년 바틱을 공무원 복장으로 규정하여 제도화 함으로써 바틱을 통해서 인도네시아인들의 일체감을 인식시켰다. 영부인 띠엔(Tien) 여사는 바틱 디자인에 새로운 패션을 시도하였고, 정계 부인들의 중요 모 임에 단체복을 만들어 입도록 제안하였다. 솔로의 끄라톤 망꾸느가라(Mangkunegara)에서 자란 띠엔 여사는 귀족들을 위해 만들어진 갈색 바틱을 선호했다.

바틱의 개척자, 이완 띠르따(Iwan Tirta) 이완 띠르따(Iwan Tirta, 1935. 4~ 2010. 7)는 세계적인 바틱 패션 디자이너이다. 그는 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국립인도네시아대학(UI), 미국 예일대학(1964년)에서 법을 전공했고 유엔본 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1962년부터 바틱 컬렉터인 어머니와 함께 바틱 작업을 시작한다. 록펠러재단의 연구자금을 받고 1960년 대 후반 솔로에서 전통무용을 연구하던 중 자바 문화에 매료되어 1970년 뉴욕에서 완전히 돌아와서 자카르타에 바틱 작업장을 세우고 바틱 디자이너 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1966년, 뉴욕에서 실크에 바틱 기법을 적용하는 것을 연구한 그는 자카 르타에 오자마자 실크바틱을 시도함으로써 고품질의 바틱을 생산하게 된다. 이는 다양한 디자 인과 고도의 염색술이 발달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아울러 그는 바틱의 디자인과 문양, 제조 과 정을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1960년대 후반 국제노동기구(ILO)의 후원을 받아 현대적 디 자인으로 다각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띠르따는 바틱에 관한 저명한 몇 권의 저서도 저 술하였다. 그는 1970년대~1980년대에 새로운 분야의 바틱 디자인을 개척한 사람으로 기록되 고 있다. 1930년부터 바틱을 생산한 바틱 끄리스(Batik Keris)는 바틱 디자인 대회를 개최하여 현대적인 바틱 디자인의 개발에 기여하였다. 이완 띠르따는 1972년에 바틱 끄리스에서 주최한 디자인 대회에서 수상을 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바틱계에서 또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과 낸시 레이건(Nancy Reagan) 영부인이 인도 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가 디자인한 바틱을 입었다. 또한 1994년 보고르에서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세계 지도자들이 그의 바틱 셔츠을 착용하면서 세계 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도 바틱을 입고 손을 흔들던 모습을 모두들 기억하 고 있을 것이다. 넬슨 만델라도 그의 고객이 되었다. 또한 그는 풍부한 디자인, 고도의 염색기 인도네시아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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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기술적인 완성도로 인도네시아 바틱을 세계의 정상에 올렸다. 그는 잡지 및 패션쇼를 포 함하여 국제 패션업계에서도 바틱 디자인을 홍보하여 널리 인정받았다.

알리 사디킨(Ali Sadikin) 주지사와 긴소매 바틱 1972년, 전 자카르타 주지사(1966년~1977년) 알리 사디킨이 긴소매의 바틱을 공식적인 행사 에서 남성정장으로 인정하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를 전역에서 받아들이면서 바틱 산업은 더욱 활성화 되었다. 처음에는 긴소매 바틱 셔츠가 까인빤장, 즉 긴치마 천으로 만들어졌으나 지금 은 처음부터 남성셔츠 용으로 문양이 재단되어서 생산되고 있다. 즉 등, 팔 부분 등이 구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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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마 띠르따 사리(Brahma Tirta Sari) 스튜디오 바틱은 1970년 대 이후 아구스 이스모요(Agus Ismoyo)와 미국인 니아 플리암(Nia Fliam) 부부 가 족자에 설립한 브라마 띠르따 사리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순수예술로도 크게 발전한다. 이전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철학적인 상징성을 더 심오하게 바틱에 그려 넣었으며, 바틱을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입체적인 작품으로는 주로 어머니의 자궁이나 품속을 상 징하는 작품이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1976년부터 프린트 바틱이 생산됨으로, 바틱산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80년부터 구세 대 패션이라는 인식으로 주춤하다가 2000년대부터는 말레이시아와 바틱 오리지널 소유권 문 제로 분쟁을 하게 된다. 이 분쟁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바틱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바틱의 가치를 알고 높이 평가하게 된다. 드디어 2009년 10월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도요노 대통령이 2010년 10월 2일을 “바틱의 날”로 정하고, 금요일에 바틱을 착용하기를 권유한 이래 금요일에 는 바틱을 입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후 2016년 조꼬위(Jokowi) 대통령은 매주 금요일 을 전 국민이 바틱을 입는 날로 제정한다. 이처럼 인w도네시아 바틱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전 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전통문화인 것이다. 이제 바틱은 “자바의 영혼”에서 “인도네시인들 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현재 바틱은 실용성과 예술성으로 인해 패션상품으로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전 세계로 수출 되고 있으며 순수 예술로도 크게 발전하면서 최근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제학박사학위논문, 인도네시아 바틱: 지역문화에서 국민문화로 확대 (이지혁, 2014) The Globalization of a Craft Community, by Michael Hitchcock&Wiendu Nuryanti Batik, Fabled Cloth of Java, by Inger McCabe ElliotBatik: A Play of Light and Shades (1996) & Sebuah Lakon by Iwan Tirta (2009) by Iwan Ti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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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꽃과 나무는 말한다 / 노경래

뭐야! 왜 꽃을 따는거야?

일 전부터 새로 이사 왔다고 하는 아주머니가 매 일 아침에 Kamboja와 Bauhinia 등 여러 꽃나

무에서 꽃잎을 따서 까만 봉지에 담는 것이었다. 그 아주 머니는 키가 아주 작아서 나무들의 아래 쪽에 있는 꽃만 따냈다. 그 아주머니는 차림새로 봐서는 아파트 한 주민 의 도우미로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거실에 놓인 절구 속에 있는 물 위에 이 꽃들을 살짝 띄우기 위해서인 지 모르겠다. 개인 주택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아파트에서 매일 꽃을 따서 간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 살짝 화가 났지만 내 체면에 뭐라고 할 수 도 없고.…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인도네시아는 연중 꽃을 피우고, 아무 리 따내도 또 피어나는 꽃나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아주머니가 매일 꽃을 따 내 는 것에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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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도네시아인들은 꽃과 나무의 이름을 잘 모를까?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나무나 꽃의 이름을 물어보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그들은 대체적 으로 빨간 나무라면 ‘pohon merah’라고 하고, 노란 꽃이라면 ‘bunga kuning’이라고 답 한다. 참 명쾌해서 좋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거의 연중 꽃이 피고 지천에 꽃들이 널려 있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에 대해 한국인보다는 덜 민감해서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인도네시아에서는 花無十日紅과 같은 표현이나, 꽃을 소재로 하는 시나 관 련 신화와 전설이 한국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의례의식에 사용되는 꽃과 나무들 - 결혼식 가정집에서 결혼식을 할 경우, 집의 정문 앞 또는 골목에 길다랗게 장대가 세우는데 이 장대를 Janur kuning이라고 한다. Janur kuning은 ‘노란색의 어린 코코넛 이파리’라는 뜻으로 주로 결혼식 행사를 알리는데 사용한다. 대나무와 코코넛 이파리 등으로 만들어 결혼식이 열리는 집 앞에 Tarub를 임시로 설치, Pisang Ambon 및 kelapa gading 등으로 장식한다. 한편, ‘언제 국수 먹여 줄 거냐’고 할 때, “Kapan janur kuningnya?”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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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 자바인 아방안(abangan)이 죽으면 Modin(이슬람

사원의 행사 주관자)이

수와 함께 도착 후 시신을 7개의 바나 나 나무 줄기 위에 눕히고,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욕을 시킨다. Modin은 목욕을 마치면 시신을 수 건으로 건조시키고, 분을 바르고, 바 나나 잎으로 성기를 가림. 시신에 있는 여러 구멍 부위를 솜으로 막고, 얼굴을 화장한 후 솜으로 만든 백색의 壽衣을 입히고, 발목, 허리, 목, 머리를 면 띠 로 둘러 묶는다. 안방에 대나무 돗자리를 깔고 시신 의 머리를 북쪽으로 안치한 후 Modin 주도로 예배를 진행한다. 여자들은 장지로 갈 때 사용할 관 을 덮을 천(棺保) 및 향기가 나는 꽃과 Pandan 잎을 묶어 만든 꽃장식을 준 비하고, 남자들은 묘지를 구입하고 묘 지석을 주문한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 면 발인한다. 옛날 자바인들은 Pandan 잎에 연 서와 시를 적었으며, 현재는 주로 요리 에 사용한다. Bag 제작에 사용하는 나 무는 Pandanus utilis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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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Pandanus amaryllifolius (아래)Pandanus utilis


- 신과 조상 숭배에 사용되는 祭物 • 스사젠(Sesajen)

특정한 날에 정령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집의 기둥 밑, 교차로, 다리 밑, 큰 나 무 밑, 강가 또는 신성시 되는 장소에 바치는 제물 및 그 행위이다. • 짜낭사리(Canang sari)

발리 여성들이 가족 사원에 해가 뜸과 동시에 발리 힌두교의 최고신인 상향위디와사 (Sanghyang Widi Wasa)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바치는 공양물로 발리어로 sari는 ‘꽃, canang

는 ‘야자수 잎으로 만든 조그만 바구니’를 말한다. 짜낭사리는 격식을 갖춰 만든다. • 즈자이딴(Jejaitan)

어린 야자수 줄기인 busung으로 장식한 발리의 제물이다. • 쁜졸(Penjor)

발리인들이 신과 조상들을 지상으로 모시는 축제인 Galunggan에 사용하는 神竿. 발리 의 아궁산을 상징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조상들을 돕기 위해 대나무와 야자잎으로 만들 어 집 앞에 세운다.

스사젠(1), 짜낭사리(2), 즈자이딴(3), 쁜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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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일랑 붉은 화로 위의 한 점 눈송이로다


2 시 목선 • 김현숙 스콜 • 조연숙 인디언 오션 • 채인숙 일생 • 최장오 머리냄새가 맡고 싶어, 엄마 • 최장오 유년의 겨울 • 김현숙 허기진 • 최장오


목선 / 김현숙

우리는 사열하듯 긴 목을 빼고 부둣가에 늠름히 줄지어 섰다

모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무리들 혹은 연인들 순다 끌라빠 항구에 고여있는 시간을 찾으러 온다

화려한 색 치장 오색 스카프 날리며 오랜 세월 섬과 육지를 오가던 나의 육신

몇해전 바다에서 그 중 먼 곳, 부두 입구에 닻은 내려지고 그때 동아줄은 아직도 팽팽하다

트럭이 몰아오는 시멘트가루 해풍에 되묻어오는 모래먼지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태양빛에 희끄무레해진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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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머리 꼭대기 녹슨 닻은 공룡뼈처럼 앙상히 걸려 있다

포토그래퍼의 날 선 앵글 동력장치 도려 낸 심장에 더 깊은 도랑을 파내도 키는 수치스런 몸을 돌리지 못한다

짠 바닷물 속 발은 쓰레기와 뒤엉키고 바람은 소금으로 내 몸을 저며낸다

인도양을 누비던 시간을 살다 늙수그레한 경비원의 그늘이 되어 주는 해질녘 두어 시간…… 그 만큼의 삶만 과거에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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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 / 조연숙

바람이 분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해가 기운을 잃고 하늘이 어두워진다 비 냄새가 난다 마른 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짱짱하다

창 너머로 보이던 검은 아스팔트 도로와 형형색색의 자동차 비를 피해 달리던 사람들 푸른 색의 골프장과 붉은 기와의 주택들 멀리 보이던 산까지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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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잦아들고 하늘이 밝아지더니 다시 도로와 가로수 그리고 멀리 지평선이 나타났다 자동차가 달리고 바지를 걷어 올린 사람들이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다 샤워를 끝낸 하늘이 촉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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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오션 / 채인숙

열 아홉의 너는 부기스*의 마지막 해적이 되어 마카사르* 항구를 떠났다 오래 된 보물 을 싣고 심해를 건너는 범선에는 일곱 개의 돛이 달려 있다고 했다 몇 줌의 육두구를 쥐고 별과 달이 그려내는 항해도를 따라 바다 위에서 갈림길을 찾았다 뱃머리에 앉아 삼백 개 의 화살 촉을 다듬다가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용감한 해적이 되기 위해 고독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에 닿기 위해 닻 을 내려야 하는지 몰랐으므로 비틀을 나눠 씹던 여자에게 편지를 적을 수 없었다 그때마 다 바다는 커다란 우표처럼 출렁거렸다 천 번의 별이 뜨고 다시 졌다 화살 촉을 문질러 여 자에게 줄 목걸이를 만들어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심해에 이르러자, 비틀을 씹던 붉 은 이를 드러내며 여자가 환히 웃었다. 여자의 드러낸 젖가슴 위로 삼백 개의 목걸이를 걸 어주고 너는 잠이 들었다 십만 개의 별이 뜨고 다시 졌다 사람들은 그 바다를 인디언 오션 이라 불렀다 (시와 경계 2017겨울호 신인 특집 발표작) *부기스 : 15~17세기 인도네시아의 대항해 시대를 이끌었던 종족으로 모험심과 해양술이 뛰어났다. *마카사르 : 인도네시아 슬라웨시의 항구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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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 최장오

똑, 똑, 똑…… 뽕잎은 엄마 앞치마 속으로, 오디는 나의 입 속으로 오디보다 작은 입은 놀란 듯 자주 빛으로 물들어가고 무명 앞치마 동여맨 엄마 배는 불러간다 사랑채 꼭 닫힌 문 속으로 뽕잎은 끝도 없이 들어간다 쳐다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던 꽉 닫힌 방 엄마는 채반에 꼬물대는 생명을 수도 없이 낳고 있다 신비의 공간에서 사각사각, 꼬물꼬물 세상을 먹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커지던 소리 조금씩 사그라지고 더 이상 뽕잎도 들어가지 않는다 문틈으로 보이던 엄마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 가는 숨으로 몸을 칭칭 동여매고 있다 하얗게 작게 둥둥 가쁜 숨 속에 비상을 기다리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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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냄새가 맡고 싶어, 엄마 / 최장오

그 냄새가 동백기름 같기도 하고 시큼한 땀냄새 같기도 하고 물큰 비 냄새 같기도 한데 기억 속엔 미끌미끌하니 영 잡히지가 않는다. 찬밥 한 덩어리에 노곤해져 툇마루에 곤하게 자던 아이 하얗게 눈 까뒤집으며 버둥거린다, 경끼. 엄마는 아일 들쳐 업고 서낭당 너머 침쟁이 있는 반주막까지 십여 리 길을 내달렸다. 희미한 정신줄 속에서도 목덜미로 타고 흐르던 아득한 머리냄새, 검정고무신 뒤꿈치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다. 반주막(半酒幕) 불빛을 뒤로 타박타박 걷던 언덕배기에서도 선연 하고 깊은 머리 냄새가났다. 오래 전, 서낭당 돌무더기 깔고 앉은 간이정류소 산그림자만 머물고 엄마의 머릿수건은 서둘러 바람에 날려가고 기 억은 자꾸 미끄러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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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겨울 / 김현숙

코끝을 때리는 찡한 공기

첫눈은 맘을 설레게도 했다지만

몇 시나 됐는지

눈치 없는 눈은 밤에도 쉬지 않는다

창호지는 벌써 새하얗고

귀신들린 문고리 손에 쩍 달라붙고

격자무늬 속 단풍잎

살금살금 토방위로 올라 앉아있는 눈

눈 속에 핀 꽃송이 같다

끝없이 쏟아지던 꿈속의 별들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마을을 덮친 건지

등을 구부려 온기를 모아본다

고립된 사람들이 길 찾기에 바쁜 아침

‘아……

방패연마냥 나무에 걸린 해는

며칠 남지 않은 개학

눈 녹일 생각에

마지막 쓴 일기는 언제였는지……’

숙제를 미뤄 논 나만큼이나 걱정이다

마음도 시끄러운데

쪼그라든 빨간 홍시

기다리던 할아버지 두런대신다

겁 먹은 참새 한 마리가

“남들은 큰길까지 빤하게 치웠는디……”

나무 끝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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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어릴 적, 고향에서의 눈은 설렘이었다가, 장난감이었다가, 졸린 눈을 비비고 쓸어버려야 하 는 골칫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적도에서의 눈은, 전설처럼 때론 동화처럼 속삭이기 도 합니다. 며칠 전 고향의 첫눈 소식을 들었습니다. 추억할 것들이 많아진 나이임에도 묘한 설렘 속에 보낸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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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 최장오

오늘, 아픈 말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파파야 그늘 아래 근심을 덩어리째 심었다 해가 정수리에 박혀 있나 보다 빙빙 돌아도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부르튼 허기가 입 언저리를 핥고 근심이 눈 밑으로 늘어지는 오후 십자가도 피곤하여 길게 누운 어느 성자의 묘비 위 하얀 염소가 경배하듯 주억거리며 더위를 삼키고있다

날 선 햇살이 버무린 더위는 성근 파파야 이파리도 축 늘어지게 말려버리고 아픈 말들도 쭈글쭈글 말려버렸다

벌거벗은 아이 하나가 지친 해를 끌고 새카맣게, 허기를 어둠 속으로 밀어내고 있다

발걸음은 허기처럼 빨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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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 비


3 포토 에세이

Gili Trawangan 섬에서 • 조현영 오젝 빠융 • 조연숙 살락 망상 • 조현영


머리에 똬리를 얹은 아낙들이 휴양지 섬에 내렸다 자기 몸보다 큰 자재가 똬리 위에 얹혀지면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딛는다 태양은 뜨겁고 바다는 푸르렀으나 그녀들의 바다는 삶이다 비현실의 바다가 현실이 되는 순간 내 머리에 얹혀있던 선그라스를 내려 놓았다

- Gili Trawangan 섬에서

/ 조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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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젝 빠융 / 조연숙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 냄새를 품은 바람이 불어오면 그 속에서 비 오는 곳을 향해 뛰는 아이들 비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 속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빗속으로 달린다 아이들 자신은 그 비를 다 맞으며 우산을 빌려주고 사례를 받는다 그들에게는 오젝빠융이 놀이로 보인다 사례비로 하는 군것질은 덤 그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비를 피할 것만 아니라 직접 부딪혀서 즐기는 방법도 있겠구나, 해가 나면 젖은 옷은 말리면 되고 몸은 씻으면 되니까 옷이 젖을까, 핸드폰이 젖을까, 지갑이 젖을까, 산성비 맞으면 대머리될까 비가 두려운 사람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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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락 망상 / 조현영

Yogyakarta 버스를 타고 살락을 까먹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우작우작 씹다가 뱉어낸 씨를 손에 쥐고서 또 우작우작 씹다가 살락을 건네주던 앞 좌석의 일행들은 뉘신가 하다가 바깥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오래 사랑했지만 뜨겁지 않은 남자와 싱겁지만 따뜻한 남자와 손끝에도 떨리는 남자와 길을 떠나고 싶다 둘이 함께 우작우작 살락을 씹다가 맛있어. 무심히 말을 건네어도 정말. 정성스레 답하는 살가운 남자와 떠나고 싶다 둘이 함께 우작우작 살락을 씹다가 덜컹덜컹 버스 뒤에서 불시에 살락보다 달콤한 입을 맞추고 아무 일 없던 듯 우작우작 소리를 입안으로 느끼며 함께 덜컹거리며 애쓰지 않아도 죽이 맞아 우작우작거리는 남자와 버스 뒷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덜컹이며 어깨를 부딪히고 싶다 버스 뒤에 앉아 우적우적 살락을 씹다가 손에 쥐었던 씨를 빈 옆자리에 슬며시 놓으며 혼자 하는 살락 망상 포토 에세이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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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 내리네 옛 사람의 밤도 나와 같았으려니


4 독서 춤추는 사내,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 박정자

왜 읽는가, 그것이 혁명이기 때문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채인숙 로쿠베 우리가 도와줄게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 이연주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건축 <집에 들어온 인문학> • 김현미 평화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에요 <평화는 어디에서 오나요> • 김현미


춤추는 사내,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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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은 족히 넘었지 아마, 그 사내 내 안에 품은 거. 인터 넷서점을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만났지뭐야. 말하자면

내가 그를 찍은 거지. 그리곤, 상자에 담겨 온 그를 펼쳐 읽으며 단박에 반하고 말았어. 뭐랄까... 헤프게 웃음이 나오고 가슴이 두 근거렸어. 쉽게 끝내지 못하고 아껴서 읽었어. 영화도 좋았어. 영 화음악을 내려받아 휴대폰벨소리로 저장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아 쉽게도 영화는 한참 후에 볼 수 있었지. 조르바, 답답해서 숨 막히는 기분이 들 때면 벌떡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사내, 춤으로 묻고 춤으로 대답하는 사내였지. 만일 춤추는 그런 사내가 아니었 다면 조르바에 대한 내 마음이 좀 달랐을까. 재밌는 사람이네... 그 정도였겠지. 춤추는 사 내라서 좋았어. 앞으로도 그래. 언제든지 손이 닿는 자리에 놓아두고서, 바람이 덜컹거리 는 저녁이나 잠 안 오는 밤엔 그 잘나고 걸쭉한 무용담을 노래 삼아 들을 거야. 맨발로 함 께 춤출 거야. 좀 웃기는 건, 책을 빌려주는 일에 참 인색한 내가, 내가 말이지,『그리스인 조르바』, 이 책은 자청해서 누구에게나 빌려주었다는 거지. 내가 조르바를 좋아하는 건 춤추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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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그 춤이 건성으로 추는 춤이 아니었다는 게 중요해. 조 르바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악기 산투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춤에 대해서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산투리는 짐승이오. 짐승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해요.> 글 쎄, 그렇게 말하더라니까. 그럴진대 사람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야 물어서 뭐하 겠어? 일초도 쉬지 않고 튀어나온 대답은, <자유라는 거지!> 그거였어. 그런 그를 어떻게 나 혼자만 품고 있을 수 있었겠어. 그렇게 한다면 조르바는 성난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나 를 떠나가고 말거야 아마. 나눌수록 더 큰 소유가 있다는 것도 이 사내를 돌려보면서 더욱 잘 알게 됐어. 그래. 책 얘기를 좀 할게. 조르바는 책 속의 화자이며 이제 곧 자신의 젊은두목이 될 ‘나’를 항구에서 만나게 되지. 그 젊은두목은 크레타 섬으로 갈탄광산을 운영하러 가는 길 이었어. 조르바는 둘의 만남을 무척 자랑스러워했지.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산투리를 젊 은두목에게 유품으로 남겼을 정도니까. 젊은두목도 마찬가지였어. 자신의『영혼의 자서 전』에 기념비처럼 새겨두었지.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 쳤다’, 그랬지. 운명적인 만남이었지. 알다시피 이 이야기를 쓰는 사람 ‘나’는 조르바의 젊은두목이잖아. 그가 이 책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본인이라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이고 말야. 조르바의 언변만큼이나 변 화무쌍한 그의 문장은 읽는 내내 신드바드의 모험을 보는 듯 했어. 때때로 크레타 섬에 깔 리는 고즈넉한 풍경을 영화처럼 펼쳐놓는가 하면 종횡무진 조르바의 편력을 아무렇지 않 은 듯 유쾌하게 풀어놓기도 했지. 그러니 어떻게 이 책을 쉽게 읽고 말 수 있었겠어. 밑줄 긋고 풍경에 잠기고 귀 기울이고 대꾸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지. 문득문득 다시 읽고 싶어 지는 이유인 거지.

-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 해보게. -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음... 이런 대화를 읽으면 글자 대신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게 돼. 누구나 그렇지 않나? 책을 읽다가 가끔 멍해지는 거... 그러니 책장이 쉽게 넘어갈 리가 없지. 독서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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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도 조르바가 한 말이야. 번역이 눈에 좀 거슬리기는 해. 이런 어투로는 조르바의 목 소리를 느낄 수가 없거든. 그건 그렇고, 나는, 구르는 돌멩이를 보면서 춤추는 몸을 생각 했을 조르바를 떠올려. 그 자신이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춤을 추면서 다시 생명의 힘으 로 충만해졌던 어느 밤 별빛기억이 있었겠지. 그 순간, 그 기억의 심장과 돌의 심장이 오 랜 동지처럼 힘차게 반갑게 끌어안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그러고 보니, 조르바의 여성비하 발언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눈살 찌푸리는 독자들이 꽤 있더군. 나도 그랬어. 처음 읽을 땐 이거 좀 거친데? 하여튼 남자들이라니... 뭐 그런 생 각이 들어서 골이 좀 날 때도 있었어. 춤추는 사내, 나를 뜨겁게 한 화끈한 사내가 말야, 그 런 소갈딱지라니 더 속이 상했던 거지. 그런데 그의 진심을 조금씩 알게 됐어. 두 번 세 번 다시 만나다보니 그렇게 되더라구. 젊은 두목과 하던 사업은 실패로 끝났어. 두 사람은 각자 길을 가게 됐지. 간간히 소식을 전하는 정도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 조르바가 보낸 편지를 보며 나는 확실 히 알았지. 조르바가 그토록 여자를 비하하면서 여자들은 모두 남자들이 구원해주기를 바라 는 물건인 것처럼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을. 조르바의 삶은 대체로 외로웠고 추웠고 배가 고팠던 거야. 안식처가 필요했던 거야. 따뜻한 사람의 온도. 그걸 다른 말로 하 면 구원이라는 거 아니겠어? 알고 보면 조르바는 구원을 얻고 싶었던 거지. 여자에게서.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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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살아있습니다. 오라지게 추워 할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뒤집어보면 사진이 있 어서 두목도 볼 수 있을 겁니다(착하고 여자다운 물건입니다. 허리가 조금 뚱뚱한 건 지금 날 위해서 꼬마 조르바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 편지야. 조르바를 이해하고 보니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말투의 허세를 이해할 수 있겠더라구.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그런 너스레도 더 이상 밉상으로 거슬리지 않더라구. 도리어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을 할 뻔했지 뭐야. 사진 속 꼬마 조르바 는 지금 불가리아에 살고 있다는데 딸이라고 하지. 그것 봐, 떠돌이 약장수 같던 조르바가 이 세상에 남긴 한 점 혈육도 결국 여자잖아. 사실 조르바의 젊은두목도 멋졌어. 그 무렵 ‘붓다의 노래’를 베끼고 있던 그는 조르바의 방종과 무례까지도 눈감아주는 신사야. 책벌레라는데 결벽증이 느껴지지 않아서 마음에 들어. 조르바가 찐하게 마음을 퍼부은 이유도 아마 그래서겠지.

-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 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파산의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는 젊은두목은 마침내 알게 된 거지. 붓다에게서 벗어나 려는 각성이야말로 참자유의 과정이라는 것을. 그런, 젊은두목의 깨달음을 보며 그 역시 타고난 자유인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러니까 걸어온 길은 많이 달랐지만 그들이 한 곳에 서 그렇게 인생의 한 철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거야. 고뇌하는 자유와 행동하는 자유의 운명적인 만남이었지. 파산, 춤과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영화의 이 장면은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 야. 두 사내가 맨발로 춤추는 해변에 마구마구 산투리가 울고, 밤바다도 그들이 마지막 축 제를 벌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조르바를 읽으며 사람들이 자유를 이야기할 때 나는 자꾸 그의 춤을 들여다보게 돼. 정 작 나는 춤을 잘 모르는데, 조르바의 젊은 두목처럼 춤추는 게 무진장 어색한데 말야. 그 런데도 내 안 어디에 춤을 향한 동경과 열망이 고여 있었던 걸까. 그것이 조르바 덕분에 밖으로 나오고 싶어진 걸까. 그런 거 같기도 해. 내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 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어. 그래, 춤추는 사내를 한 10년 품었으니, 이젠 나도 춤 좀 추어야겠지. 날개처럼 가볍게, 조르바처럼 춤추고 싶어. 독서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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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사람 / 박정자

예전에 나의 시선은 언제나 물길에 머물렀었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솟구침과 은신을 반복하는 물의 길을 살피며 물의 순환도를 그리며 손가락 더 단단해져라 단단해져서 물처럼 멀리 가고 싶은 거였지

지금 나의 시선은 불가를 맴돌고 맴돌고 있지 그토록 깜깜해도 허리를 꺾지 않는 그토록 가볍게 제 육신을 연소시킬 줄 아는 불의 심장을 달구며 불의 살을 태우며 목마름과 타오름으로 발바닥 더 높이 올라라 뛰어 올라서 불의 한 자락이 되고만 싶은 거지

이다음에

물과 불이 색을 벗고 깊게 잠들 곳과 그것들이 새 날의 빛을 입고 깨어날 곳은 한 작은 웅덩이, 거기서 나는 무릎 세우며 일어나는 다른 발가락일 테지

물의 체 흔들어 불꽃 피우는 한 사내 품었으니 내 앞의 모든 이름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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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나는 물처럼 살고 싶었어. 물처럼 겸손하게, 물의 순리로 살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은 불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불처럼 가벼워지고 싶어. 불처럼! 내게 남은 모든 것을 태워서, 한 줌으로도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훗날, 먼지로 돌아갔을 때, 물과 불로 이루어진 또 다른 생명의 풍차를 나는 만나겠지. 그 화 학반응으로 새로운 이름을 나는 갖게 되겠지. 그 순환의 고리가 춤으로 승화되는 삶, 내 앞 의 길들을 춤으로 바꿔놓고 싶어. 조르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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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읽는가, 그것이 혁명이기 때문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 채인숙

지만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독서) 자체가 즐거

워서 그것(독서)을 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없는 것일까요? 목적 자 체인 즐거움이란 건 없는 걸까요?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 닐까요? 적어도 나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들이 그들의 보답 - 보석으 로 꾸민 판,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이름 등 - 을 받 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자,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 들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텍스트로 올린 문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다. 최후 심판의 날, 신이 포상을 내린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인간들이 몰려든다. 정치가와 법률가와 상인들과 종교지도자도 왔을 것이다. 그때 책을 옆구리에 끼고 한 무리의 독서가들이 신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신은 그들에게는 자신의 포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고 말한다.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 상의 즐거움을 독서를 통해 이미 다 누려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은 선망의 눈길로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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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들을 바라본다. 독서의 즐거움을 아는 것은 신조차 부러워할 만한 일인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일본의 젊은 철학자다. 그는 독서가 어떻게 인간 사회를 구원해 왔는 지, 어쩌면 몹시 식상할 만한 주제를 놓고 독특하고 열정적인 책을 썼다. 밥 사주는 사람 보다 책 사주는 사람이 더 좋은 나는, 왜 읽어야 하는지를 이토록 묘하고 매력적인 문장으 로 설명하는 젊은 철학자에게 당연히 반하고 말았다. 세 번쯤 이 책을 완독했다. 그는 독 서가 어떻게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혁명적인 일들을 해 왔는지 수많은 예시를 통해 서술 했다. 주목해 읽을 만한 부분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 관한 이야기다.

알다시피 무함마드는 동굴 속에서 지브릴(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를 받는다. 그전까지 그 는 마흔이 되도록 무슨 일을 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평범한 상인이었다. <코란>에서 가 장 아름다운 문장은 ‘나는 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먹고 사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는 모함마드의 고백이다. 게다가 그는 심지어 문맹이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처음 그 는 두려움에 떨며 천사의 계시와 기적을 거부했고 도망쳤다. 하지만 결국 동굴로 다시 돌 아가 천사와 조우했으며, 그에게 신의 계시가 내려졌다. 신이 그에게 내린 첫 계시는 바로 그것이었다.

“Iqira – 읽어라”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 읽어라. 독서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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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운 분이라. /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 사람에 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읽는다는 것은 곧 신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슬람 뿐이겠는가. 종 교혁명을 일으킨 루터가 맨 처음 한 일도 성서를 다시 ‘읽는’ 일이었다. 읽었 으므로 그는 새롭게 ‘쓸’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오늘날 전 세계를 지 배하는 모든 가치관들은 텍스트를 읽고 다시 쓰는 것으로 시작되고 완성되 어 온 것이다. 그들이 읽은 모든 것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었다. 2만 여 년을 지나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중에서 고작해야 5천년 밖에 되지 않 은 문학의 역사가 이토록 엄청난 변혁을 주도하며 세계를 변화시키고 인간 을 이끌었다. 이쯤 되면 사사키 아타루가 열에 들떠 흥분된 어조로 ‘문학’이 야 말로 ‘혁명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지 않겠 는가. 나는 느리고 게으르지만, 어쨌든 평생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했다. 젊어서 는 방송국에서 글을 쓰며 밥벌이를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간신히 이루었다. 그러나 만약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않 았더라도 나는 충실한 독서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한번도 놓친 적은 없다. 내게 독서는 인간이 꾸려가는 서로 다른 삶의 밀도에 더 가까이 뺨을 대는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다시 깨지고 무너지기를 멈추지 않으며, 내 삶을 스스로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지극히 사적인 혁명을 이뤄가 는 과정이었다. 사사키 아타루는 내게 말한다. 왜 읽는가, 그것이 혁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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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베 우리가 도와줄게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하이타니 겐지로 글/초 신타 그림 / 이연주

겁게 읽던 그림책이 어느 날 명치에 박힐 때가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를 할 때 감정조절이 힘들

정도로 유난히 아픈 그림책이 있어요. 로쿠베가 그렇습니다. 얼마 전 자카르타 모임 행사에서 이 그림책을 슬라이드를 이용해서 낭 독할 때도 결국 직접 읽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이에게 넘겼어요. 로쿠베는 귀여운 강아지예요. 어쩌다가 그리 됐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친구 로쿠베가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지만 아직 힘이 부족하여 로쿠베를 도울 방법이 없어요. 구덩이 속을 바라보며 동동거리는 아이 들 모습에서 로쿠베가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지 알 수 있답니다. 아이들이 생각해 낸 것은 어른의 도움이에요. 좋은 생각 같죠. 하지만 어른을 불러와도 영 신통치 않아요. 글쎄 어떤 아저씨는 사람이 아니고 강아지라서 다행이라고 하지 뭐예요. 안 그러면 구덩이에서 견디 기 힘들 것이라나.......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의 대답이 책을 읽어주던 필자를 찔렀어요. “어른들은 비겁해.” 아이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로쿠베를 위해 노래도 불러주고 말도 시키면서 로쿠베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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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버텨낼 힘을 줍니다. 그리고 로쿠베의 여자친구를 데리 고 와서 무사히 꺼낼 수 있게 되는 아이디어도 아이들이 스스 로 찾아내요.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하이타니 신타 그림/양철북)는

겐지로 저 / 초

아이들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 그리

고 힘들어하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일인지 보여줍니다. 이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저 위에 대사에서 나도 모르게 멈칫 하게 돼요. 마치 가리고 있던 커다란 비밀을 들킨 기분이 랄까. 아니나다를까, 그걸 콕 집어내는 친구가 있어요. 왜 어른 이 비겁한 거냐고 다그쳐 물어요. 왜 그림책 속 아이들은 그런 말을 해서....... 아니, 작가는 왜 아이들 책에 그런 말을 써서 필 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건지. 로쿠베를 꺼내기 쉽지 않기도 하지 만, 강아지라서 더욱 꺼낼 의지가 없는 어른들의 마음을 눈치 챈 아이들은 어른들을 비난합니다. 어른들은 비겁하다고....... 그림책을 보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이유를 찾습니다. 강아지 를 꺼내주지 않아서, 강아지이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둬서, 아 이들이 생각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해서, 나름대로 어른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고맙기까지 해요. 아이들의 질문에 한참 고민하던 필자는 대답합니다. 그래. 어른들도 때론 비겁할 수 있어. 그 비겁함 때문에 소중히 간직 해야 할 어떤 것을 잃을 때도 있단다. 어른들의 비겁함은 그렇 게 벌을 받아. 다행히도 어른이 잃어버린 것을 너희들은 가지 고 있단다. 그리고 너희들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이 얼마나 소중 한지 눈치 채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야.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들이 내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그런데, 요즘 어른들이 더 비겁해지고 있는 거 같아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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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건축 <집에 들어온 인문학> / 서윤영 / 김현미

생 모은 컬렉션으로 가득 찬, 진귀한 보물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고택을 보면 그 예술적 가치에 감탄도 하고,

모던한 세련됨과 우아한 분위기로 단장한 주택을 보면 소유욕 이 불타오르기도 하며, 그러다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는 이의 집을 들여다보면 또 금새 역시 트렁크 하나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단순함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서로에게 기대어 위 로해주고 싶은 고단한 삶이 널브러진, 어느 날엔 내 살결 같은 오랜 존재들과 뒹굴거릴 수 있는 그 공간이 마냥 좋다.

그 삶의 그릇 같은 존재, 집 이 모든 살아감의 그릇들이 각각의 순간에는 찬란하게 빛남으로, 똑같지는 않지만, 같 은 리듬 안에서 한 화음으로 번져 나오는 삶이 그 안에 녹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과 건물이란 것이 우리의 생활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주는 삶의 껍질 같은 존재로만 여겨진다면, 우리의 삶 역시 기계적인 반복행동의 연속이라 할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그 삶을 좀 더 이해 할 수 있다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온 인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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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책을 통해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듯 이러한 집과 건축물에 관한 담론을 기술해 두었다.

고대 대표 건축물은 왕의 무덤 고대에 지어진 건축물의 특징은 거대한 돌덩이를 쌓아 올린 구조물이 많다. 거대 고인 돌, 피라미드 등이 대표적인데, 이는 왕의 무덤으로 왕이 곧 신이었던 그 시대, 왕의 권력 을 신격화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라 불리는 지구라트(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전)는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레자르 2세가 고향인 메

디아를 그리워하는 왕비 아마티스를 위해 수도 바빌론에 건설했던 정원으로, 이는 단순히 사시사철 피는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된 정원이 아니라 사막기후와 같았던 기 후조건을 극복 하기 위한 수로건설 기술, 배수와 물을 고층으로 옮기기 위한 기술능력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중세 대표 건축물 성당과 사찰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성당이다. 따라서 서양건축사는 종교건축사라는 말이 있다. 조명이 따로 없었던 시절 건축물은 빛이라는 자연적인 요소를 미학적으로 이용했 다. 더욱이 종교 건축물에서는 빛을 드라마틱하게 디자인함으로 신의 존재가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전형적인 성당의 모습은 동서로 길게 뻗은 내부구조로서 서쪽방향 을 입구로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성당입구의 화려한 요철무늬는 저녁 무렵 드리워 질 길고도 짙은 그림자와 함께 유리에 형형색색의 안료로 물들인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그 화려한 빛으로 신의 위엄이 느껴지도록 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새벽예불을 중요시하는 사찰의 불상은 동쪽으로 배치하여 아침햇살을 불상 정면으로 받도록 되어 있다. 아침명상과 깨달음의 순간 햇빛을 받아 더욱 찬란히 빛나는 불상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신비롭게 느껴 질 것이다. 마치 사원자체가 그 깨달 음의 순간을 형상화 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을 이용해 속세에 서 성역으로 들어서는 여과장치를 만드는 것, 종교의 본질을 살리기 위한 건축적 노력은 결국 종교가 '신과 종교적 진리를 섬기고 구도를 위한 삶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귀 결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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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윌리스(시어즈)타워 (높이 442m / 108층 / 1974년 완공) 2_ 부르즈칼리파 (높이828m/ 163층 / 2010년 완공) 3_ 바빌론의 공중정원 4_ 러시아의 예르미타시 박물관 5_ 인도의 타지마할 6_ 윤덕영 주택 7_ 신여성을 비판하는 1930년 조선일보 만평 8_ 페트로나스트원타워 (높이 452m / 88층 / 1998년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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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대표 건축물 궁전 근세시대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신권으로부터 인간중심의 관점으로 바뀌면서 자연스 럽게 신의 영역을 관할 했던 지도자보다 왕권이 강해지게 되었다. 러시아 예르미타시, 프 랑스의 루브르 궁전과 베르사유 궁전 등은 막강한 당시의 왕권을 바탕으로 탄생됐다. 인 도 타지마할 역시 무굴제국의 샤자한 황제가 뭄타즈 마할 왕비를 추모하며 그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때로는 신을 위하 여, 때로는 왕비를 위하여 지어졌다고 전해지나, 이들 건축물을 보노라면 인간의 예술적 혼을 느낌과 동시에 그 건축물에 희생되었을 생명과 긴 시간의 노고가 가슴 절절히 전해 진다. 이러한 왕들 중 일부는 시대에 남을 만한 건축물을 남기고, 그 이상의 아름다운 건 축물이 다시 건축되지 않도록 완공 후 건축 시 동원했던 기술인력들의 손을 자르거나 처 형했다고 전해지지 않는가. 그토록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이가 많은 사람의 희생과 목숨을 바꿀 만큼 그 건축물이 간절해진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었을까. 현재의 관점에서 되짚어 보면 결국은 통치수단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그 의도를 숨기기 위한 어떠 한 명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현대 노동자를 위한 카페와 아파트 현대 산업사회형태의 기초가 된 프랑스 시민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이 주거문화에 미친 영향을 보면 영국은 식민지 확장정책에 따라 아프리카와 인도 등지에서 가져온 값싼 원자 재로 물건을 만들기 위한 공장과 일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에 외곽지역에 거주하던 빈 농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으며, 이러한 신흥 공업지역의 탄생은 최악의 주거난을 발생 시켜, 시간제 방, 주방과 화장실이 없는 지하방 등 아무런 기반시설 없이 급조된 주거환경 으로 노동자들을 내몰게 되었다. 카페의 출발점은 이러한 열악한 주거환경과도 연결된다. 카페는 식민지개척으로 얻어 진 각종 차의 소비를 위한 시장으로도 필요했지만, 갑자기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 가족에 게 주어졌던 열악한 주거환경은 한 가정의 가장인 성인남성이 단칸방의 많은 식구에서 해 방되어 노동의 피로를 달래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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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식 아파트의 개념이 탄생했다. 피폐해진 환경을 최단 기간 내에 복구하고자, 과거의 예술적이고 정교한 건축물이 아닌 컨베어 시스템에 의한 자동차 생산 처럼 빠르고 튼튼한 건축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공공용지 를 늘리기 위해서 더 높은 용적률의 건축물, 녹지 위의 고층주거,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 라는 새로운 주거개념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현대 아파트의 기초 개념이 되었다.

한국인의 집 집은 생활에 필수적인 재화 중 가장 비싼 축에 속한다. 대도시에는 높은 거주비용으로 인해 열악한 거주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고시원은 이미 고시준비 하는 곳이 아니라 독신자가 혼자 생활하는 용도로 대표적인 저렴주거의 대명사가 되었고, 반지 하나 옥탑방의 경우도 높은 주거비로 인해 편법적인 형태로 나타난 주거시설이다. 주거비 용이 버거워 월세를 내며 살아가는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주거비용을 마련하기 힘들다 고 판단되면 주거비용에 투자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다른 부분에 소비하며 삶의 즐거움이 나 가치를 찾는 대체소비가 일어나게 된다. 맛있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외제자동 차나 해외명품을 구매하고 해외여행에 열중하는 현상, 골목 안까지 카페가 늘어난 것,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주거비용에 비해 사람들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맺는 말 현대는 아마도 거대자본의 경쟁처럼 지어졌던 초고층 빌딩의 사옥이 후대에 남을 건축 물이 될 것이다. 이렇듯 역사에 길이 남는 건축물은 당시의 권력관계, 지배관계를 철저히 담고 있다 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읽었던 데이비드 소로우의 윌든 책에서 느꼈던 공감이 살아난다. 도시에 서 명문대학을 나온 그가 세속적 성공에 깊은 회의를 가져, 전문적인 직업의 길보다 정직 한 육체노동의 길을 택해, 윌든호수에서 살았던 이야기. 청소하지 않아도 언제나 깨끗한 자연을 집으로 삼아 통찰로 써내려 갔던 글들이 다시금 역사의 건축들을 돌아보며, 인간 에 대한 그 삶을 담아내는 방식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독서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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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에요 <평화는 어디에서 오나요> / 구드룬 파우제방 / 이연주

마 전 한강 작가의 뉴욕타임즈 신문에 낸 기고문이 이슈 가 됐습니다. 제목은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라고 하죠. 기고문 전반에 관통하는 그녀의 주장은 ‘오직 평화’가 해법이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이야기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국뿐 아니라 많은 우방국들의 노력이 모이고 있다 고 합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들은 물어봅니다. “평화 가 어떻게 지켜지나요?” 한강 작가의 기고문을 읽다가 문득 생각난 책이 있습니다. 작가 구드룬 파우제방의 ≪ 평화는 어디에서 오나요≫(Gudrun

Pausewang. (2006). (김종철, 옮김). 웅진주니어. (원서출판 1992))

라는 책이에요. 평소 작가의 글 속에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작가의 고향 이 체코이기에 어려서부터 영감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평화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거창한 운동이나 계몽을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작가의 작품 속에 그려지는 평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그 평화를 깨뜨리는 시작도 주변의 작은 일에서부터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작가의 생각을 8편의 짧은 단편 속에 잘 담아 아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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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파우제방의 매력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해야 하고 거룩한 마음가짐과 같은 대단한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가 막힌 생각> 이야기를 보면 평화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쉽고 간단하며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일인 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온하게 지낸다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평화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를 지키려고 제일 많이 애쓴 아이는 안디였습니다. 안디도 다른 아이들처럼 평화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안디는 아이들이 말다툼이라도 하려고 하면 곧바로 끼어들었 습니다. 한번은 프랑크와 볼프강이 서로 싸우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주먹질을 하지 않았 고 물어뜯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말싸움만 했습니다. 그런데 착한 안디는 그걸 보고 화가 났습니다. 안디는 그 아이들 뺨을 때리고는 윽박질렀습니다.

“이 바보 같은 자식들아, 도대체 평화를 지키려고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안디, 안디!” 그 때 슈포르너 선생님이 나섰습니다. “너 평화를 폭력으로 강요하려는 거냐?” (두 번째 이야기 ‘기가 막힌 생각’ 중에서 발췌)

독서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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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군요. 평화는 ‘폭력’이나 ‘압박’ 따위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군요. <자샤와 엘리자 베트> 이야기에서 자샤는 다른 사람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할머니 덕분에 타인과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지 요. 사실 이것은 할머니에게도 잘된 일입니다. 어쩌면 할머니에게 자샤가 더 필요했는지 도 모릅니다. 자신이 베푼 평화의 손길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 습니다. 나머지 작품들ㅉ 속에서는 세계적인 기아와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독자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이 직접 겪 고 있는 일이 아니어도 깨진 평화는 언젠간 자신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힘의 원리로 굴복된 평화는 완전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깨져버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한강도 강조했었지요. “한국인들이 뚜렷하게 아는 게 한 가지 있다. 우리는 평 화가 아닌 어떤 해결책도 의미가 없고, 승리는 공허하고 터무니 없으며 불가능한 구호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힘에 원리로 굴복을 통해서 깨진 부분이 가려진 평화가 아닌, 우리 스스로 실천하고 깨진 부분을 메우는 완전한 모습을 가진 평화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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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l 87


- 산에게 무엇 하나 묻지도 않는다 고요한 산을 향해 있다가 홀연 자신에게 돌아서는 일


5 기행

그 거리의 오래된 이야기 - 멘뗑 • 채인숙 플로레스해의 붉은 고래 • 김현미 울렌 센따루 박물관 • 사공경 파푸아 이야기 • 이강현 전설과 함께 한 치악산 등반 • 최우호 디지털 도시 속으로 • 조연숙


그 거리의 오래된 이야기- 멘뗑 / 채인숙

리에서 사람들은 모이고, 걷고, 떠들고, 인사를 나누고, 어깨를 스친다. 몇 백 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몇 천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은 채 그 자리

에 있었다. 어떤 거리에 서면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그 거리가 품고 있는 시간과 오 래된 풍경과 무너진 사랑과 이별의 역사가 고스란히 읽혀지고 나도 모르게 전율이 일 때 가 있다. 멘뗑(Menteng)은 내게 그런 거리이다. 1885년 이후 자카르타에는 24만 명에 달하는 유럽인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남의 땅 을 지배하러 온 자들이었다. 멘뗑은 그들만의 집단거주지를 만들기 위해 선택된 거리였 다. 향수를 달래고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누리기 위해 그들은 마치 네덜란드의 어느 한적 한 도시 외곽에 와 있는 듯한 거리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네덜란드의 건축가였던 P.A.J Moojen이 그 임무를 맡았다. 화려한 유럽식 주택들과 줄을 지어 선 가로수, 깨끗하고 넓 은 인도와 한적한 공원이 설계되었다. 그래서 멘뗑에는 아직도 1900년대 초 아르데코 풍 의 우아한 유럽식 외관을 가진 오래되고 아름다운 주택들이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 다. 그 곳에는 자카르타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레스토랑인 ‘라라종그랑’과 ‘뚜구 군스트 링 갤러리’가 있고, 버락 오바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학교와 작은 마당이 있는 집, 아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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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종그랑(Lara djonggrang) 레스토랑

세안 최고 조각가들의 작품을 모아 만들었다는 수로빠띠 공원의 나무그림자와 햇살, 라 덴 살레가 유럽에서 돌아 와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슬퍼하며 그림을 그렸을 찌끼니의 병원 과 마르주끼 공원 뒤의 자카르타 예술대학, 네덜란드 시절의 향수를 고스란히 품은 수많 은 갤러리들, 그리고 온갖 오래된 삶의 찌꺼기들이 골동품으로 모여 있는 수라바야 거리 가 가까이 있다. 클래식하고 독특한 분위기의 작은 호텔들은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곳곳에 숨어있다. 물론 그 모든 거리의 주인들은 바뀌었고 건물들은 세월을 고스란히 품으며 낡아 간다. 그러나 나는 나날이 고층으로 치솟는 자카르타의 빌딩 숲과 세련된 외관을 자랑하는 쇼핑 몰, 유명 브랜드 광고판이 밤거리를 밝히기 시작한 수디르만 거리를 지날 때마다, 제발 지 척의 멘뗑까지는 그 자본의 손길이 뻗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화려하고 깨끗하고 잘 정돈 된 소비 공간은 세계 어느 대도시를 가도 똑같이 볼 수 있다. 잠깐의 감탄이 지나고 나면 아무런 감흥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멘뗑은 다르다. 그곳은 거리 모퉁이마다 당신에게 나 누어 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아름답거나 분노하거나 애잔하거나 혹은 치욕적이거나 슬프다.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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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놀랍게도 ‘나의 시간에는 스콜과 같은 슬픔이 있다’고 노래했던 한국의 모더니 스트 시인 박인환이 생을 통틀어 가장 치열하고 정치적이며 선동적인 시를 썼던 순간을, 우리는 멘뗑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1947년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에서 인도네시아가 구라파의 반이나 되는 넓은 땅을 빼앗기는 사이 가믈란은 미칠 듯이 울었고 한 사람도 남십자성을 쳐다보지 못한다고 울부짖었다. 인도네시아의 인민들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스콜처럼 부서져 싸우라고 소리쳤다. 피 흘린 자바의 섬에서 다시 붉 은 칸나 꽃이 필 거라고 노래했던 박인환이 어쩌면 이 거리를 다녀갔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문득 든다. 그가 5만환을 빌려 명동에 차렸던 서점 ‘마리서사’의 마리는 자스민을 뜻 하는 한자어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그가 자스민 향기 풍기는 멘뗑의 어느 거리에 서서 피할 수 없는 식민지 백성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저 시를 썼을지도 모른다 고, 잠시 망상에 젖어 보는 것이다. 멘뗑에서는 그런 상상의 순간들이 스콜처럼 왔다간다. 수없이 흩뿌리면서 채곡히 쌓 여 온 시간들이 거기에 있다. 행여 놓쳐버린 이야기들을 새로 발견할 수 있을까 조바심을 내며 혼자 그곳을 찾아간 날도 있었다. 여럿이 갔다가도 대열을 이탈해 늘 홀로 걷고 싶었 다. 그래서 멘뗑에 들어서면 호흡이 조금 빨라진다. 언제쯤에는 그곳에서 아무에게도 들 키지 않은 나만의 이야기를 한 편의 시로 남길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 하는 것이다. 골동품 상점들이 즐비한 잘란 수라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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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레스해의 붉은 고래 / 김현미

“자

.

이틀 후에 떠날 거야. 비행기, 배 예약 알아서 하고, 엄마는 이틀 동

안 일 정리할게.”

일.일. 그리고 일로 이어진 일상으로 내 몸에 고단한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저지르지 않고는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는 생각이 났고, 바로 딸에게 전화했다. 야~~호를 외치며 딸은 알아서 하겠노라고 세 시간 후 BCA 통장번호를 보내왔다. 가끔 모든 것의 시작은 입금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들의 엉 킨 실타래가, 그 애매한 망설임이 입금으로 가위로 뚝 잘린 듯 명확해졌다. 스케줄 확정이 되었으니 이틀간 달려보자. 빠샤! 발리를 경유해서 Labuhan Bajo 공항에 이르렀을 때, 이미 나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플 로레스 섬들의 신비로움에 아침에 머물던 세계와는 다른 세상에 서 있었다. 그 날의 바다엔 플로레스 섬의 연두빛과 하얀 구름 묻힌 바람과 눈부신 투명 햇살을 머 리에 쓴 세 사람이 있었다. 배는 Padar Island 에 먼저 도착해 우리는 트래킹에 올랐다.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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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사진을 제대로 담아보겠다고 벼르며 벅찬 숨을 고르며 올라갔다.

난 사진 찍는 건 관심 없다. 이 순간의 가슴 벅찬 공기만 응축해서 내 기억에 넣고 싶다 붉은 산호조각이 부서져 흰 모래와 섞여 핑크 빛을 낸다는 핑크비치는 인터넷의 절묘한 찰나의 순간보다는 심드렁했으나, 난 내가 좋아하는 불가 사리를 맘껏 구경했다, 세사람은 나를 위해 온갖 종류의 불가사리를 잡아서 해안가에 놓아주었다. 남편은 20대의 뻥 가득한 약속을 이 날 지켰다. 그 렇게 바다의 별을 따다 주었다.

배에서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 번져오던 붉은 빛이 바다로 번 지더니 끝내는 내가 보는 세상을 다 삼키고, 나는 플로레스 해의 고래에 삼켜져 그 거대한 붉은 내 장속을 들여다 보았다. 붉은 위액이 한쪽에서 퍼 져나와 우리를 녹일 것만 같은 두려움이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런 석양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곧 그 붉은 고래의 뱃속에서 고요히 앉 아 깊은 호흡으로 내 앞에 있는 우주와 마주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품으면 그렇지 않던가? 아 무것도 걸치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고, 깊은 호흡 으로 서로가 되는, 깊은 신뢰가 주는 그 먹먹하고 도 진한 평화로움을 오래, 오래도록 느꼈다. 붉은 기운이 지난 자리. 박쥐섬의 박쥐들은 맹 그로브 숲에서 일제히 날아오르고, 그 섬뜩한 소 음조차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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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소금처럼 흩뿌려진 밤하늘과 함께 별 이 되고 밤이 되었다. 그 곳엔 그것 뿐. 이.었.다.

새벽이 왔다. 파란 목덜미을 한 공작이 붉 은 꼬리깃털을 날리며 날아 올랐다

모도 섬에서 본 코모도는 가이드에 의해 억지로 걸어 나온 관광용으로 길들여진

듯 무심했으며(실제로 있다고 전해들었다),

야생의 코모도의 서식지는 따로

오히려 잎에 매달린 저 달팽이

는 내 기억의 노랑조각으로 박혀있다. 15인용 배에 여행객 3명 스탭 4명 , 비용에 대 한 효율을 따지자면 아주 비효율적인 여행지라 할 수 있겠다. 배 안에서의 식사는 맛있었으나, 그 맛 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음식 조리장은 안보는 것 이 나은 방법이었고, 샤워는 선반 하나 안 달린 화 장실에서 수압 약한 화장실용 젯워셔로 해야했다. 급한 예약, 날짜 조정 불가능한 일정으로 배의 컨 디션까지 모두 챙길 수 없었던 상황은 진심 어린 유쾌함을 가진 가이드 대니로 녹아 내렸다. 무엇 보다 선상에서의 밤은 이 모든 비효율을 무의미하 게 하였다. 날것이 주는 이 펄떡이는 생명력은 늘 가공하고 각을 맞추어 공간을 익히는 일을 하는 나에겐 아주 특별한 재료가 될 것이다. 짐을 꾸리면서 잠깐 이불 시트를 챙겨갈까 고 민하는 사이 딸이 옆에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자야지. 그래야 여행이지. 엄마 그런 거 챙기지 말 자. 역시 세뇌시킨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정작 나는 내 신념에 녹아 들지 못했다. 벌레에 놀라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다짐을 해도 안 된다.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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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형체를 알 수 없는 짐들이 산더미 같은 덩치를 하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올 때, 나는 섬에 가고 싶다. 아무도 없어서 좋은, 오롯이 내 안에 집중함으로 불안함을 흘려 보 낼 수 있었던 그 곳. 여행자로서의 삶을 계획하고 있지만, 오롯이 우리만 존재했던 핑크비 치는 아름답기 그지 없었지만, 그 플로레스 해의 따스하며 서늘한 물빛이 그립기도 하지 만, 여기서 한 해를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난 다시 사람들 속 SAWANGAN A-15호에 서 살고 싶을 것이다. 언제가 되면 또 입금을 시작으로 섬을 갈 것이고, 입금을 시작으로 일을 더 벌릴 것이 고, 입금을 시작으로 강의를 들을 것이다. 가끔 수정되지 않는 신념은 똥고집으로 변질될 수 있으니, 사진 찍는 건 관심 없다는 내 신념(?)에 꼬리를 달아야겠다. 사진 찍는 내 수고가 번거로운 것이고, 남이 찍은 사진은 환장하게 좋아한다. 그러니까 얌.체. 인 것이다. 딸의 수고로 그 고스라한 시간을 다시금 되새김질하며 행복하다. 천둥 같았던 기억의 한 조각을 6개월이 지난 지금 꺼내 보다니 다시 번쩍이며 쿵쾅거린 다.

멋.찌.다.

<footnote> 유년시절 할아버지가 철제 캐비넷에서 가끔 꺼내 주시던 비릿한 철 내음 가득한 눈깔 사탕 처럼 불편함을 감수하고 기꺼이 한입 깨물고 싶은 위로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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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렌 센따루 박물관(Museum Ullen Sentalu) / 사공경

연 그대로 길을 따라 곡선으로 만들어진 박물관은 직선의 강박, 직선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를 두려움과 설렘으로 안내한다. 지하에 위치하며 동굴모양으로

산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어졌다. 동굴을 뜻하는 구워(Guwo), 바위를 뜻하는 셀로(Selo), 산 을 뜻하는 기리(Giri)라는 단어로 합쳐져‘구워 셀로 기리’라고도 한다. 울렌 센따루(Ullen

Sentalu)라는

이름은 자바어로 “ULating bLENcong SEjatiNe

TAtaraning LUmaku”이다. “사람들은 오일램프를 켜고 구불구불한 인생을 걸어간다.” 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박물관은 자바의 깊은 철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 며, 흑백사진이나 흑백사진 같은 그림들로 전시되어있다. 흑백사진(그림)은 소리가 없어서 더 큰 울림으로 우리를 역사 속으로, 성찰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1997년에 3월 1일, 자바 문화를 지키고 싶은 하르요노(Haryono) 선생님은 개인 별장을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당시의 족자 부지사 빠꾸알람 8세(Pakualam

VIII)가

준공식을 올렸

다. 박물관을 건립할 때 4개의 끄라톤(Keraton)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즉 족자의 끄라톤 족자(Kasultanan

Jogja, Hamengkubuwono 왕가)과

빠꾸알람(Pakualam), 솔로의 끄라톤 솔

로(Kasunanan Surakarta)과 망꾸느가라(Mangkunegara) 이다.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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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가믈란 방(Ruang Tari & Gamelan) 웰컴(Selamat Datang) 방을 지나 춤과 가믈란 방에 들어가면 전통 악기인 가믈란(Gamelan) 과 가믈란 연주와 함께 하는 춤 그림이 있다. 그림 속에 그들은 몸으로 하는 언어, 춤으 로 정직하게 아름답게 시대의 격정을 소리치고 있다. 첫 번째 그림에는 구스띠 누룰(Gusti Nurul)

망꾸느가라의 공주가 스림삐 사리 뚱갈(Serimpi Sari Tunggal) 춤을 추고 있다.

하나를 뜻하는 뚱갈 춤의 명칭처럼 무용수가 공주 한 사람이다. 그녀는 네덜란드 베르 낫(Bernard) 왕자와 줄리아나(Juliana) 공주를 위해 춤을 추었다. 네덜란드에서 춤을 추었지만 그림 속에는 솔로의 끄라톤 망꾸느가라의 가믈란 연주가 그려져 있다. 박물관에 누를 공 주를 기념하는 방도 있다. 가면이란 뜻의 또뼁(Topeng) 춤 그림도 걸려 있다. 자바 사람들은 가면을 착용하여 변장하면 액운을 막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주와 자바 공주 의 그림이 따로 걸려 있다. 두 그림은 ‘골렉 메낙(Golek Menak)’춤의 스토리와 관계가 있다. 즉 술탄의 사랑을 쟁취하 기 위해 두 공주가 춤으로 대결하였다. 마침내 자바 공주가 이겼다. 중국 공주 그림을 보 면 공주 뒤에 ‘골렉 메낙’춤을 만든 술탄(Sultan) 하믕꾸부워노(Hamengkubuwono) 9세가 앉아 있다. 그 시절의 끄라톤 마따람은 술탄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최소 한 가지 춤을 만들 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즉 술탄이 예술적으로도 완성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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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박물관(Gua Sela Giri) 터널(굴)처럼 보이는 박물관 벽에 끄라톤 마따람의 가계도가 걸려 있다. 가계도에 의하 면 1755년 기얀띠(Giyanti) 조약을 맺었을 때 끄라톤 마따람은 두 개의 끄라톤, 족자와 솔로 로 나누어졌다. 1813년, 끄라톤 족자는 까술따난(Kasultanan)과 빠꾸알람(Pakualam)으로, 1757년 끄라톤 솔로는 까수나난(Kasunanan)과 망꾸느가라(Mangkunegara), 즉 끄라톤 마따람(Mataram)은 네 개의 끄라톤으로 나누어진 셈이다. 17세기부터 시작된 끄라톤 족자에서 가장 큰 인물은 술탄 하믕꾸부워노 9세 (Hamengkubuwono IX)이다.

그는 1940년에 족자의 술탄으로 취임했으며, 군과 종교지도자,

재무부장관, 안전부장관과 같은 정치지도자도 겸임하였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인도 네시아 부통령직도 수행하였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그의 얼굴은 항상 심각한 보인다.`“말을 많이 하지마세요. 중요한 것만 말하세요. 삶의 언어로 말하세요.”라고 사진 속의 그는 소리치고 있다. 끄라톤 족자 에서 임무를 행하는 사령관은 망갈라 유다(Manggala Yudha)라고 불리며 왕자가 사령관이 될 수 있다. 그는 왕족이라기보다 근엄한 군인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 그림이 족자의 술탄비(妃)인 라뚜 끈쪼노(Ratu Kencono)의 그림이다. 족자 최고의 부자 슬탄 하믕꾸부워노 7세(Hamengkubuwono VII)의 세 번째 부인이기 때문 에 아들이 왕이 될 수가 없어서 눈이 슬퍼 보이는 것일까. 3D 그림이라 라뚜 끈쪼노의 눈 과 신발 끝이 방문객을 계속 따라간다. 그만큼 외로운 것일까. 허나 외롭다는 것은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더 구체적이고 사람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 다음 그림은 왕족의 묘지인 이모기리(Imogiri) 묘지를 보여준다. 이 묘지를 방문하려면 바띡 천으로 된 끔븐(kemben)을 입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규칙이 있다. 공주는 특별한 옷을 입고 참배한다. 솔로, 족자의 끄라톤에서 무희들이나 신부가 착용했다는 끔번. 중간에 다 이아몬드를 연상시키는 마름모 모양이 있는 끔번을 착용한다는 것은 이 왕족묘지는 신성 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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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하믕꾸부워노 9세 (Hamengkubuwono IX)

다른 쪽에는 술탄 하믕꾸부워노 7세 의 손녀인 수하르띠(Suharti) 공주의 그림 이 걸려 있다. 그녀는 미모가 특출하고 영리하여 남편은 자랑스럽게 그녀를 해 외 국가 행사에 많이 데려 갔다고 한다. 그녀의 표정은 자부심으로 당당하다. 족자 끄라톤 빠꾸알람과 관련되는 전시실의 한 그림에는 인기가 많았던 술탄 빠꾸알람 8세(Pakualam VIII)의 모습이 보인다. 술탄 빠꾸알람 8세가 의자에 앉아있고 술탄비와 딸, 후 궁 등 술탄에 사는 모든 여자들은 술탄의 바로 뒤쪽, 바닥에 앉아 있다. 남자들은 술탄 앞 에 앉아 있다. 이 그림은 남자가 자기의 가족, 특히 여자를 잘 지켜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잘 보여 준다. 그 시대에는 여자가 약자였음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일종인가 보다. 솔로에 위치한 끄라톤은 까수나난이라고 하며, 술탄은 빠꾸부워노 직함을 받았다. 그 중에 1945년 술탄 빠꾸부워노 12세(Pakubuwono XII)는 취임할 당시 약관 20세였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할 때 친구들이 그의 이름 Raden Mas Suryo Guritno을 부르지 않고 애칭으로 ‘보비(Bobby)’라고 불렀다. 그는 많은 사람들, 특히 어머니의 든든한 지원이 있어 서 59살까지 술탄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한다. 부인이 6명 있었는데 술탄비(妃)가 된 부인은 없었다. 술탐비의 역할을 그의 어머니가 하였다. 그의 어머니 아긍(Ageng) 여왕은 피아노를 잘 치고, 바이올린을 잘 켜기도 했다. 네 덜란드어와 스페인어도 능통한 현대 여성이었다. 아긍 여왕은 권력을 상징하는 곳간 열쇠 를 들고 다니었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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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끄라톤 망꾸느가라(Mangkunegara) 최고의 술탄 망꾸느가라 7세는 띠눅(Tinuk)이란 부인과 구스띠 누룰(Gusti Nurul) 공주 하나만 두고 있었다. 누룰 공주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 럼 춤도 잘 추었지만 말 타기를 좋아해서 말 타는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속의 그녀는 말 을 타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거침없이 가고 싶다고 흔들리는 가슴으로 외치고 있다.

물 위의 마을(Kampung Kambang) 자바의 중심 네 끄라톤의 유산 보관실을 지나면 ‘물 위에 있는 마을’을 뜻하는 깜뿡 깜 방(Kampung Kambang) 방이 나온다. 시골이란 뜻의 깜뿡과 ‘물에 뜨다’란 뜻의 깜방에서 유 래되었다. 실제로는 방 주위에 물길이 있을 뿐이다. 깜뿡 깜방에는 다음과 같은 전시실이 있다. - 띠느끄 공주의 시의 방(Ruang Syair untuk Tineke) 보비의 여동생 ‘띠느끄(Tinneke)’공주를 기념하는 방도 있다. 그곳에는 친구와 친척들이 띠느끄를 위해서 쓴 시들이 보관 되어 있다. 시 원본은 네덜란드로 적혀 있었지만 인니어 로 번역해 넣는 것이다. 시 옆에는 누가 쓴 시인지 누가 보냈는지 사진이 함께 있다. 제일 유명한 시는 말을 타 던 미모의 누룰 공주가 쓴 시이다. 그 시는 “여자가 국가의 기둥이다. 여자가 훌륭하면 국 가도 번영하고, 여자가 나쁘면 국가도 쇠퇴한다.”라고 쓰여 있다. 또 자신을 황금 새장에 갇혀있는 새로 표현하며 자유를 원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허위와 위선에 찬 궁중생활보다 그녀는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리라. 흑백사진 으로 된 그 방 은 자체가 시이고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눈물이었다. - 라뚜 마스 기념 방(Royal Room Ratu Mas) 다음 방이 라뚜 마스(Ratu Mas)를 기념하는 방이다. 라뚜 마스는 족자 술탄 하믕꾸부워노 7세의 손녀인데, 1915년에 솔로 최고의 부자 술탄 빠꾸부워노 10세와 결혼해서 솔로로 간다. 그녀는 17살의 어린 신부였으며 술탄은 49살이었다. 술탄은 아이가 없어서 두 번째 결혼을 한 것이다.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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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뚜 마스(Ratu Mas)

젊었을 때 술탄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과 같이 현대적으로 장식했었다. 잘 생기 고 마른 체형이었는데 자기가 받은 휘장 과 훈장을 모두 붙일 수 있도록 살을 찌 웠다고 한다. 외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은 왕이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그녀의 유산은 피부에 좋은 웰 빙 음료수인 Wedang Ratu Mas(생강차 종류)를 만드는 법이다. 라뚜 마스는 모자 수집하 는 것을 좋아했다. 대부분 프랑스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일면식도 없이 정략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생각난다. 내면의 불행을 사치로 벗어나려고 했던 그녀들. 모자를 좋아하는 그녀는 앙뚜아네트처 럼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그 모자는 나는 퍽 외로웠다고. 사랑에 목말라있다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모자들은 정물화처럼 놓여있다. 그녀들의 삶처럼. 왕족 의 사진뿐만 아니라 전통 결혼예복도 보관되어 있다. 그 외에 순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팔찌, 머리핀, 팔에 묶는 뱀과 같은 장식품도 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중지에 반지를 낀 사람은 없다. 신을 상 징하는 중지가 완벽해서 장식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지에 낀 반지는 살 림 잘하는 여자의 상징이며 남자는 살림살이에 대한 책임을 상징한다. 결혼반지를 끼는 약지(jari manis), 엄지는 완벽함을 상징한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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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띠 누룰의 방(Ruang Putri Dambaan(Gusti Nurul)) 구스띠 누룰의 사진을 보관하는 곳은 ‘매력적인 공주’를 뜻하는 구스띠 누룰 ‘putri dambaan’방이다. 2002년 그녀가 81살 때 박물관에 그녀를 기념하는 전시관을 만들었 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 사진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1937년, 네덜란드에서 당시 16살인 누룰이 줄리아 나 비에게 결혼 선물로 춤을 추는 사진이다. 뛰어난 미모에 다재다능한 그녀는 승마와 테 니스, 수영도 즐기는 현대 여성이었다. 누룰 공주는 다이애나 비만큼 얼굴이 예뻤다. 그러나 파파라치에게 쫓겨 다녔던 다이 애나 비와 달리 매일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남학생과 왕자들이 뒤쫓아 다녔다. 수카르노 대통령도 청혼을 했다고 한다. 눈이 높아서 30살이 된 1951년에 솔로 망꾸느 가라 왕자 야르소(Yarso)와 결혼했다. 군인인 남편을 따라 반둥에서 살았다. 미인박명이라 지만 그녀는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2015년, 94세(1921년 생) 때 돌아가셨다. 한 생애가 다 가도록 한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 주는 박물관에서 이 소녀는 참 행복해 보인다. ‘아름답고 깊은 솔로 강의 새들은 어디로 날 아가나’를 걱정하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열망을 지켜나가는 완벽한 아름다움은 박물관에 머문다. 이 작은 공간에서 그녀의 몸짓은 뜨겁게 역사 속을 흘러가리라. - 긴 복도에서 전시되어 있는 유물(Koridor Retja Landa) Ruang Sasana Sekar Bawana로 가는 긴 복도에 힌두 상들이 전시되어 있고 복도 창 너머 안뜰 서쪽에 석가모니의 여행을 묘사하는 보로부두르 사원과 같은 큰 부조가 보인 다. 그 큰 부조는 기울어져 있다. 왜냐하면 보로부두르가 세계 7 대 불가사의가 아니라고 의도적으로 왜곡한데 대한 저항의 외침이다. - 아름다운 술탄 테라스 방(Ruang Sasana Sekar Bawana) 자바의 특별한 행사에 관한 사진 같은 그림을 전시해 둔 전시관이다. 1989년에 다이애 나 비와 찰스 왕자가 끄라톤 족자를 방문하여 술탄 하믕꾸부워노 10세(Hamengkubuwono X) 와 술탄비 헤마스(Hemas)가 그들을 맞이하는 그림이다. 현재 술탄 하믕꾸부워노 10세는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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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의 주지사 직도 맡고 있다. 다이애나 비는 축복을 상징하는 끌라빠 잎으로 만든 자누르(Janur)를 목에 두르고 있다. 그림 속의 다이애나 비는 충분히 축복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데, 고독해질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한 채 그는 파파라치에 쫓겨 1997년 저 세상으로 간다. 그림 속의 그녀는 행복해 보이는데 참으로 아프고도 아픈 그림이다. 그 외에 솔로의 신성한 춤인 부도요 끄따왕(Budoyo Ketawang) 그림도 있다. 이 그림은 솔 로 술탄 아궁 한야끄라꾸수마(Agung Hanyakrakusuma) 즉위식 때 춤을 추는 장면이다. 9명 처 녀가 2시간 내내 춤을 춘다. 춤추고 있는 동안 남쪽의 여왕 끼둘(Nyi Roro Kidul)여신이 와서 같이 춤을 춘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희가 10명이 된다. 1년에 한 번 이 신성한 춤을 춘다 고 한다. 자바인들의 끼둘 여신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는 장면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끼둘 여신은 초록색 옷을 입고 인도양에 가면 그녀가 데리고 간다는 전설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 춤은 끄라톤 마따람을 세운 술탄 세노파띠(Senopati)와 여신의 영혼결혼식 때부터 유 래한다. 기쁨과 성스러운 향연이자 비밀문서처럼 아름답고 웅장하다. 지금도 족자와 솔로 의 술탄들은 끼둘 여신에게 왕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지혜를 구한다고 한다. 시공을 가 로 질러서 온 무변한 신의 사랑일까. 그대 있는 곳까지 가다가 파도소리에 밀려 되돌아 온 환(幻)일까. 박물관은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은 듯한 회색 톤의 사 진(그림)에는 역사에 대한 구도(求道)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다. 사진 앞에 서면 우리는 되 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 변함없음과 지나 간 시간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고해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과속 성장이 만들어낸 직선의 사고에서 탈피해 인생을 느리게 성찰 하고 싶거든 이 곡선의 박물관에 가라고 말하고 싶다. 굽이 많은 강물이 더 소리치며 흘러 가듯이 곡선으로 된 박물관의 외침을 들으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풍요로운 노스탤지어를 꿈꾸게 하는 사진 속에 내재되어 있는 힘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또 다른 에너지로 세상을 견디어 내게 만든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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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왕궁은 이스타나(Istana)와 구별되게 이슬람 왕국에서 사용하는 끄라톤(Keraton)으로 왕은 힌두왕국 에서 사용하는 라자(Raja)와 구별되게 술탄(Sultan), 왕비를 술탄비라고 지칭했음.

TIP 울렌센따루 박물관 웹사이트 주의사항: 사진 촬영 금지 입장료: 성인 Rp 30,000 / 5-16세 Rp 15,000 외국인: 성인 Rp 50,000 / 5-16 세 Rp 30,000 월 휴관 / 화-금 8:30~16:00 / 토-일 8:30~17:00 Jl. Boyong KM 25, Kaliurang Barat, Sleman, Yogyakarta 0274-895161 Website: ullensental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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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이야기 / 이강현

참으로 아름다운 전경이다

행기에서 내려다 본 ‘자야뿌라’는 웅장한 자태의 산세와 함께 드넓고 푸른 바다 와 호수가 어우러져 산수화가로 유명한 안견(安堅) 선생의 몽유도원도 한 폭을 떠

올리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나의 ‘자야뿌라’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자카르타에서 자 야뿌라로 곧장 연결하는 직항을 타려면 수까르노 하따 국제공항에서 밤 비행기를 타야 하 는데 비행시간은 대략 5시간이다. 내가 탄 비행기는 ‘자야뿌라’에서 30분을 트랜짓해 인 도네시아 최동단에 위치한 ‘므라우께’로 향했다. 보통 인도네시아를 이야기할 때 “Dari Sabang ke Merauke(사방에서

므라우께까지)”라고

하는데, 서쪽 끝인 사방에서 동쪽 끝인

므라우께를 아우르는 인도네시아 전국을 표현한다. 자야뿌라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서둘러 발길을 돌려 도착 장 옆에 있는 출발 장으로 곧장 들어섰다. 이 곳에서 또 경비행기를 이용해 ‘와메나(Wamena)’라는 곳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야뿌라에서 남단으로 40분 가량 비행해야 하는 데 기상상태가 열악해 비행기 이륙이 지연되고 있었다. 공항에 초조하게 앉아있는 나를 향해 갑자기 이민국 직원과 신분증을 착용한 사복차림 의 비밀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한 무리가 나에게 우르르 다가왔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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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과 파푸아 방문 허가증을 보여주시오.” 나는 “뻔하지, 외국인이 나타났으니 용돈 이라도 벌어보자는 심산이겠지.”라고 생각했으나 단순한 용돈벌이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마치 내가 이곳에 올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마음은 급한데 자꾸 이것저것 캐물으며 시간이 지체되자 나는 슬금슬금 짜증이 났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며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안한 뒤, 이민국 유니폼을 입은 무리와 사진을 한 컷 남겼다. 그리고 “당신들의 공무는 이해하지만, 더 이상 날 귀찮게 하 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핸드폰에 저장된 인도네시아 이민청장 전화 번호를 찾아 방금 찍은 단체사진을 보내는 시늉을 했다. 자기들이 소속된 이민청장 전화 번호를 세 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내가 과연 누굴까 그들은 당황스러워 하며 멈칫 하더니 이제는 나와 동행한 현지인 직원에게 방향을 틀어 계속 이것저것 캐묻고 있고 있었고 난 이쯤 했으면 되었겠지 하며 눈을 감고 그들을 무시해 버렸다. 들려오는 대화를 듣자 하니 며칠 전 파푸아에 미리 도착한 한국에서 온 카메라맨들에 대해 묻는 듯 했다. 그들에게 외 국인의 파푸아 방문은 생소한 사건이었으며 그것도 카메라와 드론 등 나름 첨단장비로 완 전 무장한 외국인들이 수상쩍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튼 그들은 한참을 이것저것 묻다가 별 소득이 없다고 느꼈는지 이내 자리를 떴다.

자야 뿌라에서 이민청 직원들과

난 다시 기약 없이 비행기를 기다렸다 사실 3일 전에 파푸아에 도착한 한국인 카메라맨들은 이민국 직원들과의 실랑이 끝에 결국 와메나 지방경찰서에 끌려가는 곤경에 처했단다. 당시 동행한 우리 직원이 내 지인 인 장성급 인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해당 경찰서에서 여행 허가증을 만들어줘 풀려났다고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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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직원이 나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지방이민청 직원들에게는 이 사건이 ‘큰 먹잇감’으로 보였으리라. 그리고 그 먹이의 ‘몸통’인 나를 만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케줄 상 이 박 만에 돌아와야 하는데 기상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이러다 자칫 하룻밤 더 파푸아에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지 하는 걱정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던 사이에 어느새 두 시간이 흘러갔고 드디어 와메나행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나는 ‘신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알함둘릴라(Alhamdulillah)!”를 마음속으로 외치고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처음 타보는 ‘트리가나 항공’ 비행기였지만 첫 인상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여 기저기서 고약한 땀 냄새가 진동해 파푸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했다. 비행기는 40분을 날아 와메나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곳에서 다시 비포장도로를 5 시간 정도 달려 ‘띠옴’으로 또 이동해야 한다. 공항에 마중을 나온 누군가가 일정이 변경 됐다며 9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비행시간은 약 20분. 띠옴 군수(bupati)가 특별히 나를 위해 2천만 루피아를 내고 비행기를 빌렸단다. 솔직히 프로펠러 비행기를 탄다니 겁부터 났다. 험악한 파푸아 산간 지형과 악천후로 추락사고가 잦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금을 들여 빌려준 비행기를 안 탈수도 없고 탈 수도 없고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파푸아 일정을 앞두고 미리 말라리아 예방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병원을 찾았을 때 도 한국과 같은 예방주사가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매일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방문 일주일 전부터 방문 후 일주일 분까지 총 알약 17개를 받아 잠들기 전 먹어왔는 데 이제는 그렇게 자주 떨어진다는 프로펠러 비행기까지 타라고 하다니 정말 황당했다. 그 문제의 프로펠러 비행기가 지금 오고 있으니 기다리라는데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난 마음속으로 “와메나에서도 악천후로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이제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제발 기상 상태가 좋아지기를” 하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시작했다.

파푸아의 진짜 갑(甲)은 돼지?•••사람 목숨은 돼지 두 마리 프로펠러 비행기를 기다리며 나는 와메나에 살고 있다는 마이클이라는 이름의 안내원 과 파푸아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제일 흥미로웠던 건 파푸아에서는 돼지 값 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이었다. 돼지 한 마리에 4천~6천만 루피아를 호가한다는데 아니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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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돼지 값이 그렇게 비싸냐고 물었더니, 파푸아 사람들은 결혼할 때 혼수로 돼지를 사 간다고 한다. 시집을 간 신부는 그 돼지 값을 치르느라 평생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단 다. 나는 “설마 돼지 값이 그렇게 비쌀까? 이 양반 허풍이 너무 지나치네” 싶었는데 나중 에 띠옴 원주민촌에 다녀오니 실제로 돼지가 파푸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약 세 시간을 기다렸더니 프로펠러 비행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차량으로 이동할 걸 하며 후회가 막심했던 나에게 안내원은 차로 가면 비포장도로라 멀미가 심할 것이라며 위안했다. 그러나 나는 떨어져 죽는 것보단 멀미가 낫지 싶었다. 나는 이 두려운 와중에도 주유를 하는 비행기 앞에 서서 멋지게 사진도 한 장 남겼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 안에 들어가 보니 딱 봐도 너무 노후한 데다 심지어 안전벨트도 없었 다. 극도의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초조한 나는 손으로 밥을 먹고 있던 기장과 부기장을 바라봤는데, 개인적으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나지만, 기장이 서양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 한 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와메나에서 띠옴쪽으로 가는 프로펠러 경비행기

프로펠러 비행기에 시동이 걸리고 드디어 기체가 짧은 활주로를 달려 창공으로 단번 에 들어섰다. 걱정은 됐지만 나는 기장 바로 뒤에 앉아 기장이 운항하는 모습과 비행기 레 이더 등 항법장치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연거푸 셔터를 눌렀다. 으레 들려오는 휴대폰을 끄라는 안내 방송도 없었고 기장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신나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 자 내 두려움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곧 1만 2천 피트 상공까지 오른 비행기는 슬슬 하강을 시작했다. 레이더에는 목적지 좌표가 빨간색 직각으로 표시돼 있었고 비행기가 그 직선 에 맞춰 날아가는 모습을 나는 무척이나 신기해 줄곧 바라봤다. 20분 비행 후 착륙을 준비 하는데, 제대로 된 비행기 활주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짧은 아스팔트 도로가 보이고 그 길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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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비행기가 접근하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었다. 설마 나 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안전하게 착륙을 하고 나니, 원주민들이 전통 춤을 추며 나를 맞 이했다. 와메나 군수와 부군수, 경찰, 군인들과 수 많은 파푸아 원주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외국인인 내가 파푸아에 랜턴을 선물하러 방문한 것이 너무나 고마워 큰 환영 행사를 준비해 3시간이나 기다렸단다. 이번 파푸아 여행 목적은 파푸아 전력 공급 소외지역에 랜턴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세 계 지구의 날을 맞이해 51개국의 삼성전자 사무실에서 한 시간 동안 지구촌 전등 끄기 행 사를 펼쳤고 그 전기를 모아 랜턴 1,500개를 구매해 전 세계에서 한 나라를 선정하여 전 력 공급이 안 되는 오지마을에 기부하는 프로그램인데 우간다, 나이지리아, 방글라데시 그리고 인도네시아가 후보국에 올랐고 내가 직접 본사를 설득해 결국 인도네시아가 선정 됐다. 나는 특히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파푸아를 선택했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오랜 시간 기다려 준 군수와 파푸아 주민들에게 머리 숙여 고마 움을 표시하고 원주민이 만들어 준 추장 모자와 현지 주민들이 수공예로 제작한 전통 공 예품도 목에 걸고 이동 차량에 올랐다. 와메나 군수는 일단 자택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목 적지로 출발하자고 제안했다. 생각보다 깔끔했던 군수 자택에 들러 우리 일행은 고구마와 쌀밥, 생선과 야채 반찬으로 이미 와메나에 도착해 촬영 중이었던 한국인 카메라맨 세 명 과 함께 멋진 한 끼를 대접받았다. 파푸아 원주민들은 고구마를 주식으로 먹는다고 한다. 간이 그리 맞진 않았지만 나를 위해 정성 들여 준비한 소중한 만찬에 고마운 마음이 들어 최대한 맛있게 그리고 많이 먹으려 애썼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랜턴 전달식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무장 경찰 8명이 경 찰 호송 트럭을 타고 선두에 섰고 무장 군인 8명이 탑승한 군인 차량이 그 뒤를 이었다. 세 번째에는 원주민들이 창을 들고 떼를 지어 탄 두 대의 차량이 뒤를 따랐고, 그 다음이 군 수 차 그리고 내가 탄 차량 순이었다. 원주민들이 왜 같이 다니냐 했더니 그래야 부족들이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총 10대 차량이 모터케이드 형식으로 줄을 지어 목적지로 이동했다. 정말 첩첩산중이 이런 곳이구나 싶었다. 도로는 비포장 도로였고 잘 못해 옆길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는 2천 500미터 고지대로 들어섰 다. 간간히 마주치는 원주민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총을 메고 운전 중인 경찰 특수부대 상사에게 “왜 이렇게 완전 무장을 하고 가야 하나?”라며 물었다. 들려 오는 대답은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파푸아에서는 매일 사람이 죽어나간다고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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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원주민 부족들 간의 전쟁, 빨치산처럼 산에 숨어 수시로 군인과 경찰을 향해 게릴 라 전쟁을 벌이는 파푸아 독립군들과의 총격전 등으로 매일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지만 그 런 소식은 자카르타 수도권 뉴스에는 보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사람 한 명 죽으 면 돼지 두 마리로 값을 치르고, 부족 가운데 20명이 몰살하면 돼지 40마리를 갚으면 된 단다.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 파푸아에서는 모든 돈의 가치가 돼지로 계산된다는 것이었다. 그럼 돼지를 사기 위한 큰 돈은 어디서 마련하느냐고 묻자 전기선 하나, 수도관 하나가 그들 집 앞으로 지나가면 원주민이 정부에 보상금으로 요구하는 돈이 10억, 20억 루피아란다. 토지수용이 난항을 겪고 있어 정부에서 추진 중인 지역 발전의 주요 장애물 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통신사 안테나도 세우기 힘들어 휴대폰도 일정 지역 에서만 통화가 되고, 핸드폰 데이터 수신도 심지어 파푸아 내 도시에서도 극히 제한적으 로 서비스되고 있다고 한다.

원주민 마을

금광이든 광산이든 뭐든 아무튼 거래가 성사되려면 지방 정부에서 허가를 내주는 것도 1차적인 문제지만, 정작 거래가 이뤄진 이후에 해가 바뀌면 또 다른 원주민 족장이 나타 나 원래 자기 부족 땅이라고 주장하며 다시 엄청난 거금을 요구한다. 파푸아 사람들에게 10억 루피아는 돈이 아니란다. 한 마디로 경제적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 막대한 돈을 받 은 뒤에는 결국 돼지 몇 십 마리를 사서 부족들끼리 나누어 먹는 행사로 그 돈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돈을 저축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미래를 설계할 필 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차치하고 돈의 가치도 굳이 따지지 않는 것이 이들의 실정이다. 이런 파푸아에서는 100만이 넘는 인구가 산간 곳곳에 살고 있으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수많은 군인과 경찰이 투입되고 있다. 왜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들이 파푸아에서의 근무 경력 을 최고로 높이 쳐주는 지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공권력이 없으면 도저히 제대로 돌아가지 않 을 사회, 아니 공권력의 부재, 그들만의 리그가 오히려 행복하다고 여길지도 모를 파푸아였다.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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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다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한 시간 반 가량을 폭포도 지나고, 얕은 강도 지나 목 적지에 다다랐다. 그러나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원주민들이 마련한 행사는 취소되고 산간 마을 어귀에 걸쳐있는 학교 건물로 비를 피해 이동했다. 우 리는 그곳에서 약식으로 ‘랜턴 전달식’을 열었다. 이런 오지에 랜턴을 기부해주어 너무 감 사하다는 군수의 인사말에 이어 나는 기부하는 이 랜턴이 이 곳을 밝혀주어 학생들은 밤 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부모들도 좀 더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 게 해 주길 바라며 다른 기업들도 동참해 주기를 호소한다는 답사를 했다. 나는 이번 파푸아 방문이 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 같다며 어릴 적 할아버지 계 시는 시골에 놀러 갔던 경험담을 들려주며 “한국도 이런 기적을 이룬 나라다. 곧 여러분들 도 멋진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란 희망찬 이야기도 전했지만, 정작 그 자리 에 모인 100여명의 학생과 주민 가운데 내 말을 이해한 사람은 절반도 안 되는 듯 보였다.

원주민들에게 렌턴 사용 시범

이어서 나는 랜턴 사용법을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설명해줬다. 랜턴을 하나하나 직접 나누어줬는데 신기한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학생들로부터 나는 희망에 찬 미소를 엿볼 수 있었다. 학생들이 전달받은 랜턴을 동시에 켰을 때 시골마을 교실이 환하게 밝혀 지며 파푸아에 희망의 등이 켜진 듯 했다. 맨발로 선 코흘리개 아이들이 신기하게 불빛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문득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면서 문득 어려움 없이 지 내는 내 자식들을 데리고 다시 한 번 꼭 파푸아 땅을 밟아 이러한 삶과 소박한 행복도 있다 는 것을 보여주고, 진짜 행복의 의미를 되짚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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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미원 직원들이 이 지역에 50루피아짜리 미원을 헬기에서 뿌리며 시장을 개 척했다는 그 파푸아는 아직도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간략한 행사가 끝이 나고 원주민이 안내해 준 움막집에 들어가보니 너무나 어두웠다. 살림살이는 아무것도 없었고 옷가지 몇 개에 호롱불도 아닌 불쏘시개를 태워 집안에 불 을 밝힌다고 했다. 주민들은 나무를 태워 불을 피우다가 매운 연기로 건강이 악화되자 밤 에는 그 작은 불조차도 켜지 않고 칠흑 같은 밤을 매일 견뎌내고 있었다. 밤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애들만 만들게 되니 부족마다 밤에는 남녀가 서로 떨어진 움막집에 들어가 잠을 자게 하고 날을 정해 남녀 합방을 시킨다고 했다. 이 랜턴이 움막집을 밝혀 그들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이 불빛의 소중함과 이 행사의 의미를 다시금 짚어보게 되었다. 이 랜턴은 태양열로 충전이 가능해 해가 뜬 낮에 밖에 내다 놓으 면 자동으로 충전이 되어 밤에는 칠흑 같은 마을을 따스하게 밝혀줄 것이다.

와메나의 진정한 빅보스 행사를 마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차에 올랐다. 돌아갈 때는 9인승 경비 행기가 없어 와메나 공항까지 5시간을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했다. 마침 와메나에 가족들 이 살고 있다는 부군수가 나를 데려다 주겠다며 같이 차에 올라타자 경찰과 군인 차량이 우리 차량을 호위했다. 알고 보니 부군수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그 지역에서 어릴 때부터 살았다는 그는 다 부진 체격에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는 내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모든 행사를 조율하 는 듯 해 보였고 나를 안내한 운전기사 역시 그가 타기 전부터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 다. 운전기사는 부군수가 파푸아의 많은 지방 정부에 할당된 막대한 예산을 관리하는데 다른 지역 관리들처럼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지 않고 모든 지역 주민들에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분이라고 했다. 내 눈으로도 직접 십만 루피아짜리 돈 뭉치를 오늘 행 사에 참여한 여러 집단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목격해서 그런지 왠지 통이 큰 ‘빅 보스’ 같다 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차였다. 우리가 탄 차는 산 넘고 바다 건너 꼬불꼬불 거친 비포장도로를 내달렸다. 부군수는 중 간 중간에 잠복해있는 경찰들에게 무전기 너머로 독려하며 지역 상황을 살폈다. 그의 세 심한 모습에서 투철한 직업 정신이 느껴졌다. 그는 이동 중 도로 훼손이 심할 경우에도 직 접 하차해 군인들과 함께 주변 돌을 가져다 도로를 보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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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보스 띠옴 부군수

다가 갑자기 무전을 치던 부군수의 긴장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 부족들 간 전투로 2명이 사망한 지역이 나오니 다들 경계하라는 내용이었는데 부군수는 미리 준 비해 온 쌀 포대가 담긴 차량을 앞으로 빼라고 지시했다. 곧 어둠 속에서 창을 든 부족들 이 눈앞에 서너 명씩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차량은 전부 멈추어 섰고, 부군수가 차에서 직접 내려 현지어로 무언가를 전달하고 이어 가져온 쌀 포대를 그들에게 건넨 뒤에야 다 시 출발할 수 있었다. 부군수는 나에게 이 같은 행동은 일단 어제 희생당한 부족들을 위로 하고 또 다른 전쟁을 막기 위한 제스처라며 친절히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그는 역시 이 지역의 멋진 영웅이다’라고 감탄했다. 그렇게 험한 비포장도로를 5시간 넘게 달려 드디어 와메나 숙소에 도착했다. 오는 길 내내 비가 내려 천장이 없는 트럭에서 비를 쫄딱 맞은 채 견딘 군인과 경찰들이 너무 처량 해 보였는데 부군수는 숙소에 도착하자 군경부터 먼저 챙기며 가서 빨리 군복을 벗은 뒤, 몸을 좀 말리고 식당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속옷 차림에 기관총을 든 그들이 식당 에 나타났을 때 생각보다 너무나 앳된 모습에 난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와메나에 들어선 만큼 신변의 걱정은 조금 덜게 됐다. 부군수는 경찰들만 남고 같 이 온 군인들은 여기서 일박을 하지 않고 바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는 그들 상관에게 직 접 전화해 하룻밤을 여기서 재우고 보내겠다고 설명했지만 어린 군인들은 결국 식사만 간 단히 마치고 다시 5시간 이상 걸리는 그 험한 길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이 곳 파푸아는 ‘전시(戰時)’라는 말이 맞구나 싶었다.

행복의 상대성 호텔에서 준비한 저녁식사엔 흥미롭고 재미난 음식이 있었다. 바로 파푸아에서 그리 유명하다는 ‘우당 슬링꾸(Udang Selingkuh)’다. 인도네시아 말로 ‘우당’은 ‘새우’고 ‘슬링꾸’는 ‘불륜, 바람’을 뜻하는 단어인데 큰 새우의 다리 끝에 바닷게의 집게가 붙어있으니 새우가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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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게와 불륜을 저질러 탄생한 것이 바로 ‘바람 피운 새우’ 즉, 우당 슬링꾸라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온몸이 녹초가 되어 들어간 호텔방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방’이었다. 전날 밤 비행기에서부터 잠을 못 이뤄 너무 피곤하고 쓰러질 것 같은 몸 상태였고, 계속된 긴장이 풀리며 뒷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너무 낯선 이 호텔방 에서는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0여 년 전 아쩨 쓰나미 사건 이후 곧바로 성금을 기부하고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아체 를 방문했을 당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호텔에서 공포에 질려 잠을 못 이뤘던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에어컨도 없는 방이었지만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 것 같았 고 방안은 서늘한 냉기마저 감돌았다. 샤워기에서도 냉수만 나와 제대로 씻을 수도 없었 다. 화장실과 객실 내부 모두 너무 지저분하고 덩그러니 놓인 침대 2개는 시트 색마저 바 래 편안히 눕기조차 힘들었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다. 움막집에 사는 파푸아 원주민들을 본 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이런 방에서 잠을 못 이룬단 말 인가.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파푸아에 그래도 제법 큰 도시 "와메나" 풍경

이 곳 파푸아에서 나는 잠 못 이룬 길고 긴 이틀 밤을 보냈다. 내 인생 경험 중 또 다른 한 페이지를 장식한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깨달았 다. ‘비네까 뚱갈 이까(Bhineka Tunggal Ika)’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인도네시아 건국 이 념이다. 내가 모르고 있는 인도네시아란 도대체 어디까지인 걸까? 정말 그 다양성 속의 통일은 이뤄질 수 있을까? 내일 또 펼쳐질 파푸아의 속살이 궁금해 잠 못 이루는 오늘 밤 다시 한 번 내 또 하나의 조국, 인도네시아를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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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함께 한 치악산 등반 / 최우호

금 고국 땅은 단풍이 절정을 이룬 말 그대로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자카르타에서 생활하며 Tangkuban perahu에 익숙해진 나에겐 3년 만에 맛보는 반가운 가을

의 정취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치악산.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하고 상쾌한 산바람 이 온 몸을 휘감자 흐뭇한 내 입술에선 휘파람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붉게 물든 치악산 초 입부터 구룡사까지 1킬로미터 남짓 금소나무 길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쉴 새 없 이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금소나무길 곳곳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사 진 속에 새기려는 연인들과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저마다 사진 찍기 좋은 명당을 선점하느 라 분주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발걸음을 늦추다보니 안 그래도 짧아 진 해가 어느새 서쪽으로 더 기울어진 듯 하다. 1984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치악산은 원래 동악명산, 적악산으로 불렸으나, 상원사의 꿩(또는 까치)의 보은전설에 유래해 꿩치(雉)자를 써서 치악 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치악산에는 유명한 절이 두 곳 있는데 바로 상원사와 구룡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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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의 전설은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법한 은혜를 갚은 까치의 이야기 다. 경남 의성 출신의 한 사내가 서울에 가기 위해 원주시 신림면 부근을 지나던 중 커다 란 구렁이가 꿩을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고 활로 구렁이를 쏴서 꿩을 구해주고 다시 서울 을 향해 가던 중 해가 저물어 한 집에 들르게 된다. 하얀 소복을 입고 그를 맞이하는 어여 쁜 여인의 친절에 하룻밤 머물게 되었는데 잠을 자던 선비가 답답함을 느껴 일어났더니 커다란 구렁이가 그를 칭칭 감고 낮에 당신의 활에 목숨을 잃은 구렁이의 부인이라 밝히 며 남편의 복수를 하겠다고 한다. 선비가 기지를 발휘해 꿩의 목숨도 귀하다며 반박하자, 그렇다면 동이 트기 전에 이 산에 있는 절에서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한 다. 동이 트기 전에 종이 울릴 수 없다고 판단한 나그네가 낙담하며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종이 세 번 울리고 구렁이는 사라졌다. 나그네가 신기하여 종이 울린 절에 가보니 종 밑에 꿩 세 마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고 한다. 나그네는 꿩의 보은 에 깊이 감명 받고 그 절을 크게 고쳐 짓고 상원사라 명명하고 꿩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적악산을 치악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오직 1,300미터에 달하는 정상을 목표로 치악산을 오를 땐 지명의 유래도 알려 고 하지 않았었다. 오늘만큼은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는 영화 의 대사를 떠올리며, 또 어렸을 때 자주 듣던 구전동화도 떠올리며 치악산의 정상 비로봉 이 아닌 9마리용의 전설이 있는 구룡사로 향했다.

상원사 전경(좌) 일주문에 걸려있는 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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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계곡

치악산은 가장 유명한 비로봉(1,282미터)을 비 롯해 1,000미터를 넘는 고봉들이 장장 14킬 로미터에 달하는 산맥과 유사한 형태로 이어 져 치악산맥으로 불릴 정도이며, 산 곳곳에 산 사와 산성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치악산에 왔 다가 치를 떨고 간다’고 할 정도로 산세가 웅장 하고 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나도 겨울에 눈 덮 인 명산들을 많이 올라봤지만 아이젠이 없어서 정상 등반을 포기한 산은 치악산이 유일하다. 한라산을 제외하고 설악산, 태백산, 오대산, 함백산 등 겨울 산행에서 아이젠을 착용해본 적이 없으나 치악산 등반 때 산중턱에서 아 쉬움을 달래고 발길을 돌린 적이 있다. 그때도 이번과 같이 구룡사 탐방로를 통해서 올랐 었는데 그때의 아쉬움을 멋들어진 단풍으로라도 달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 다. 구룡사에 도착하니 산사 입구에 200년 된 단풍나무가 웅장하게 관광객들을 반겨준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의 웅장함이 사진에 담기지 않아 멀리서도 찍어보고 가까이서도 찍어보다가 결국 현대 기술은 아직 한참 모자란다고 푸념을 하며 구룡사 안으로 이동했 다. 구룡사라고 한자로 쓰인 현판을 본 여자 친구가 아홉 마리 용이 살던 곳이라고 설명하 더니 왜 아홉구(九)를 쓰지 않고 거북구(龜)를 쓰냐며 난감한 질문을 해 온다. 원주에 머무 르며 본인을 데려온 엉성한 가이드를 철썩 같이 믿는 눈치다. 대답을 회피하고 조금 더 걷 자 구룡사의 전설이 쓰인 비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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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의 전설은 이러하다. 1,300년 전 구룡사의 자리는 연못이었다. 신라시대 때 의 상대사가 연못에 사는 9마리의 용들과 도술대결에 승리하여 용들을 몰아내고 연못을 메 워 대웅전을 짓고 구룡사를 건설했다. 구룡사의 현판은 아홉구(九)자 대신 거북구(龜)를 사 용하는데 그 이유는 조선시대 때 옛 명성을 잃고 점점 쇠퇴하면서 거북이의 기운이 절을 살릴 것이라 하여 거북구로 바꾸었다고 한다. 전설에 대해 확실히 알기 전에 여자 친구에게 9마리의 용들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어 서 구룡사가 아닐까라고 추측을 얘기했던 터라 서로를 바라보며 두 눈만 깜빡이다가 결국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구룡사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이름처럼 전설 속의 9마리의 용들 이 꽤 중심적인 역할을 할 줄 알았는데 도술시합에서 져서 쫓겨났을 줄이야. 전설의 내용이 어찌 되었건 아름다운 풍경과 재미있는 전설이 함께 한 치악산 단풍놀 이는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구룡사 마당에서 바라보는 치악산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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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도시 속으로 / 조연숙

스마트폰과 스타벅스 그리고 무인자동화기기

타벅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해 읽는다. 공항에서 자동탑승권발권 기기(셀프 체크인 키오스크)에서 탑승권을 발급하고 자동출입국심사대를 통과한다.

푸드코트에서 무인주문시스템으로 음식을 주문한다. 주차장, 영화관, 지하철역에서는 무 인티켓발권기를 이용하고, 은행에서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한다. 온라인숍에서 물건을 주문하고 인터넷뱅킹이나 핀테크로 결제하면 택배회사를 통해 집으로 배달된다. 스마트홈 앱을 깔았더니 세탁기 작동이 끝나면 스마트폰을 통해 알림이 온다. 8비트 컴퓨 터가 전설이 되는 시간을 여행해 디지털도시 속으로 빨려든다. 스마트폰 보급은 뉴스와 정보를 취득하는 수단도 바꾸었다. 일방적으로 뉴스를 공급하는 오프라인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 대신 페이스북, 카카오톡,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개인의 취향에 맞는 뉴스를 골라본다. 정보와 지식도 도서관에서 책을 찾기 보다 구글과 네이버 검색을 이용한다. 여러 사이트를 검색해 정보를 교차검증하기도 한다. 더 이상 언론사가 일방적으로 공급하는 뉴스와 인쇄된 책조차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검색해서 오류를 확인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다. 최근 1~2년 사이에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주요 신문과 방송국 뉴스에 대한 반발은 좁게는 언론의 공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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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촉구하는 움직임이지만 넓게는 기존 언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개인이 보고 싶은 정보와 뉴스만 찾아서 보기 때문에 편향성이 더 심화될 위험이 있다. 무인자동화기기들이 빠르게 많은 분야에 보급되고 있다. ATM이 1979년 조흥은행 명동 지점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지금처럼 무인자동화기기와 함께 하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0년대 영화에 나오던 경쾌한 타자기 소리를 내던 타이피스트는 프린터 에 밀려났고, 주판을 들고 숫자를 다루던 계산원도 전자계산기에 밀려났다. 사환이 하던 일 은 커피머신과 전기주전자, 진공청소기, 1회용 티슈가 대신한다. ATM, 폰뱅킹, 인터넷뱅 킹, 핀테크 등이 은행원을 대신하고 있다. 인천공항 출입국심사대 내국인 줄에는 심사관 없 이 안내자만 있다. 이제 웬만한 일은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다. 최근 경기침체와 인건비 상승보 다 자동화가 일자리가 줄이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럼에도 무인자 동화기기는 계속 확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편의점을 무인운영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드론과 자율주행차량을 이용한 무인배달시스템도 계속 시도되고 있다.

작아지는 내 공간, 넓어지는 우리 공간 오피스 공유 서비스 업체들도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 1인 기업이 증가하고 자동화기기 기행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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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에 따라 고용인원이 감소하면서 오피스 규모가 작아지거나 아예 오피스 공유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자카르타 교통정체와 도시화에 따라 1인 가구 또는 부모와 자식 만 사는 핵가족이 증가하고 아파트 공급과 수요도 늘고 있다. 아파트 로비에서 보면 예전처 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카르타에서는 온라인 자동차 호출 앱인 고젝, 우버, 그랩 그리고 온라인 숙박시설 예약 앱인 에어비앤비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내 주변에는 인도네시아인과 한국인 모두 우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카르타에 정기적으로 출장을 오는 지인이 지난 10월 방문 때는 택시 수가 줄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는 그 동안 호텔을 쓰다가 이번에 에어비엔비를 이용 했는데 확실히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나 자취방, 작은 사무실 등 개인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줄어들면서 느슨하게 함께 하는 공간이 늘고 있다. 스타벅스나 커피빈 뿐만 아니라 동네 작은 카페에도 공부하거나 일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퇴근 후 운동하기 위해 피트니스센터를 찾는 사람도 많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 살아남는 방법은 균형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난 나는 여전히 디지털 기기가 어렵다. 컴퓨터 화면보다 종이에 인 쇄해서 자료를 읽는 것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그럼에도 웹사이트에서 뉴스와 정보를 검색 하고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해 이메일이나 소셜미디어로 보내고, 밴드로 물건을 주문하고 항 공사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항공권을 예매를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컴퓨터 화면만 봐도 울렁거린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밴드 등 소셜네트워크에는 정보와 뉴스가 넘쳐난다. 정 확한 정보도 있고 가짜뉴스도 있다. 공정한 뉴스도 있고 편향된 뉴스도 있다. 소셜네트워크 홍보를 보고 구입한 물건에 만족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문해 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 무렵 빈 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걷는다. 종이책 읽는 시간을 늘리 려고 스마트폰을 놓고 책만 들고 카페에 가기도 한다. 사람들과 만나서 토론하는 프로그램 에도 참여하고 있다. 디지털시대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음식을 만들어 먹고 청소와 빨래를 하려면 내 몸을 움직여야 한다. 디지털도시에서 점점 작아지는 아날로그 인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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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6 자기계발 특별한 날, 대표하는 축제와 이벤트를 뒤돌아 보기 • 김순정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리더인가? • 김순정


특별한 날, 대표하는 축제와 이벤트를 뒤돌아 보기 각종 행사의 의미와 그 이정표를 생각하다 / 김순정

예산만 낭비하는 형식적인 행사와 공연 ‘이제는 노우(NO)’

“사

람을 행복하게 웃게 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특별한 날이나 기념일 을 맞아 열리는 행사나 공연 등은 바로 그런 일 중 하나이다.”

우리는 매년 새해 달력을 받아들면, 빨간색으로 표시된 공휴일이나 기념일 먼저 체크하 거나 개인이나 가족의 생일 등 중대사부터 살펴보게 된다. 사람의 일생 가운데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종교적으로 연중행사, 월중 행사, 각종 이벤트를 해야 할 날들이 가득하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기업의 각종 마케팅 전쟁과 각 기 관 단체의 홍보로 인해 행사가 많이 열리고 그만큼 접대할 일도 많게 마련이다. 특히 인간관 계와 사회생활이 왕성할수록 각종 행사와 특별 공연들로 넘쳐나 분주해진다. 작게는 개인의 기념일에서부터 크게는 전 세계 축제까지 평생 크고 작은 이벤트나 행사를 경험하게 된다. 행사나 명절과 같은 기념일 등은 단순히 노는 날이나 쉬는 날이 아니다. 인간사 행적의 기념 이며 인류의 성장과 발전, 평화를 기원하는 많은 문학적, 인문학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소중 하고 의미 있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인도네시아에서도 연중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 그리고 축제가 열린다. 모든 행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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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취지가 다 있겠지만 타국 생활에서 한인들의 행사는 거의 한인들의 잔치이자 서로 소통하고 화합하는 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다양한 축제와 행사는 단순히 즐기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많은 축제를 통해 그 역 사와 정체성이 지역적 특성과 관련을 맺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왔기에 이제 우 리는 진정한 행사의 의미를 알고 즐기기를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첫 번째. 큰 행사나 잔치일수록 잘해야 본전! 많은 사람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우리는 특별한 축제 기간에 크고 작은 행사를 준비하는 주최 측이 되기도 하고 즐기는 참 가자가 되기도 한다. 행사는 모든 사람을 긴장시키기 마련인데 특히 준비하는 스텝이라면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서 이만저만 고민과 고생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성숙한 주체 자나 참석자로서 행사의 화려한 면만 봐서는 안 된다. 행사에 잘 참여하고 담당자들이 준비 해 놓은 것을 즐기는 것은 인생의 ‘큰 행운이자 즐거움’이며 많은 인생 공부이며 아이들에게 는 산 공부가 되는 좋은 기회의 장이다. 한국에서 15년 이상 출판사를 경영해 온 필자는 책을 출간할 때마다 각종 출간이벤트와 저자사인회 그리고 출판기념회, 북 콘서트, 저자와 만남, 국제도서전 등에서 벗어날 수 없었 다. 또한, 또한 다양한 신문과 잡지 등 언론매체에서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를 받 았는데 그 수많은 행사 중에서 기억에 남는 행사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행사도 있었다. 그 뒷 이야기만 해도 밤을 새울 정도이고 각종 희로애락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 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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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행사나 잔치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을 담당해본 사람들에게 행사와 기 념일은 그 어느 때보다 보람과 자부심도 느끼지만, 담당자들은 한결같이 ‘일종의 고통과 부 담’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준비한 만큼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반응이 나쁠까 봐 괜스 레 스트레스를 받고 행사 전부터 걱정하기 일쑤이다. 그만큼 손님을 부르고 행사장에 관객 을 초대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이다. 또 그것을 잘 치러내야 그와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다른 업무까지도 문제없이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다. 행사 준비 주최 측이나 담당자들이 바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그 행사에 참석하여 충분히 호응하고 만끽하고 좋은 메시지를 느끼고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행사에는 초청인들에 대한 예우가 매우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더욱 세 심한 관심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중요한 행사에 소홀한 대접을 받으면 평생 잊지 못하는 법이기에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기 마련이다. 행사나 이벤트를 잘하고 나면 남에게 그만큼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으므로 단순히 간단히 대충대충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준비 하는 사람에게는 사명감과 헌신과 봉사 정신이 필요하다.

두 번째. 축제와 행사, 공연은 역사와 인생을 반영하고 통합한다 사람들은 특별한 날의 기념행사들을 펼쳐오면서 일반적 기준과 관행 등을 적용하고 익히 며 발전시켜 왔다. 대표적인 개인 행사는 혼례나 돌잔치, 환갑잔치 등이 있고 국가적인 일에 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경우인데 국가의 자존심과 국익이 달려있다. 지역 축제는 다양한 풍습과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문화의 보물창고 역할을 해왔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열리는 축 제현장에 가보면 지리적 특성과 특산물,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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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기업은 신년인사회, 연회, 만찬, 파티와 리셉션, 신입사원 하계 수련회와 각종 세미 나와 워크숍, 프로모션과 마케팅 행사 등을 벌이고 있다. 단체와 기관에서는 각종 기념일 행 사, 가수들의 디너쇼, 콘서트, 각종 강연회,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 연출에도 참여하고 있다. 또한,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과 같은 종교적 절기에 따른 행사도 다양하다. 특히 요즘처럼 온라인 마케팅이 대세인 시대에는 각 기업체와 기관 단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행사와 이벤트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이를 준비하는 주최 측이나 참여하는 손님이나 관람객 등 이 제대로 알고 제대로 즐겨야 행사는 더욱 의미 있고 행사의 보람과 결실이 있을 것이다.

세 번째. 호응을 얻는 좋은 행사와 공연 준비하기 그렇다면 좋은 행사, 공연이란 무엇일까? 행사를 맡은 책임자라면 호응을 얻는 행사를 위 해 사람들이 좋아했던 공연이나 성공했든 혹은 실패했든 그 경험들은 분명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도 어떠한 원칙과 큰 흐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 게는 다양한 일들이 산재해 있다. 초대나 참석하는 사람들의 주요 층은 누구인지 타깃을 파 악하고 구성해야 한다. 하나의 행사와 공연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애초 기 획 단계에서 콘셉트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관객 대상은 어떻게 설정하고, 음향과 영상, 악기, 특수효과, 무대 디자인 등은 어떻게 활용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이다. 또 유료공연이라면 티켓 가격은 어떻게 산정하고 얼마를 매겨야 적절한지, 포스터는 어디에 붙여야 가장 효과가 있는지, 실제 공연에 사용되는 큐시트는 어떻게 작성하는지 등 공연 기획과 제작, 연출에 관한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섭렵해야 한다. 특히 한국처럼 허례허식이 아직도 존재하고 어른 공경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 회에서는 주요 인사에 대한 예우기준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해야 한다. 사람을 위한 자리이므 로 합리주의보다는 관례가 중요하며 융통성, 치밀성이 필요하다. 또한, 아무리 멋진 행사라 해도 안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행사 전보다 더 큰 화가 부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사의 콘셉트에 맞도록 행사의 구상과 기획을 잘 정하고 행사 준비와 진행절차에 빈 틈없이 안전성까지 잘 점검해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기업체나 기관 단 체는 행사에 능숙해야 기업의 성공적인 경영과 운영에 큰 힘을 보탤 수가 있을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위의 모든 상황에서 깊이는 없으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메시지만을 담 으려 하고 표현하려 한다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 화려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식의 실 패할 확률이 높다. 실패한 행사나 공연들의 원인 분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너무 많은 것을 보여 주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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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의미와 가치를 마음과 몸으로 기억하기 행사란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편하게 연결하는 기준과 절차이며 사회통합 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부터 축제의 행사를 통한 권력 장치는 일상화되고 구조화되어 권력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 사용됐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거듭되는 축제의 행사들은 그러한 예이다. 카니발을 통해 본 브라질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보면, 히우 카니발 축제는 ‘일종의 혁명을 거쳐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히우의 중하층 국민이 구성한 삼바 학교, 그 밖의 다른 집단들이 자신들만의 판타지를 춤과 노래로 보여주는 진정 한 행위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재 삼바는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 낸 ‘브라질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와 연관된 축제인 세시풍속 행사의 경우는 우리의 뿌리를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축제의 지역 활성화와 정체성 확립 사례들은 축제를 통해 지 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어떻게 관련을 맺으면서 성장해 왔는지 보여준다. 전라북도 남원의 ‘춘향제’의 경우 문화적 기억을 통한 지역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했는지 알 수 있다. 전통문화 로 오래오래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축제를 통해 보존되고, 기억되고 있다. 요즘 시대의 축제 행사와 공연은 그 자체로서 힘을 가지고 있다. 모든 행사는 이제 더는 단 순한 여가활동의 소재이거나 여흥 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단체, 창조사회, 창조도 시, 지역발전의 주요 기제로 그리고 기업이나 단체의 홍보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새롭게 만 들어지고 있다. 이렇듯 행사와 각종 이벤트 콘텐츠는 계속 삶과 시간 속에서 진보하고 있다.

다섯 번째. 행사가 넘어야 할 산! 예산만 낭비하는 축제와 행사, 공연은 재편되어야 한다 문화가 곧 힘이고, 경제이고, 삶이자 놀이이며, 문화산업을 중심으로 국가 경제구조가 개 편되고 있는 지금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같은 종류의 축제나 예산만 낭비하는 비효율적 인 행사가 난무하고 있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주장이 어 디에서나 있으나 그 안으로 들여다보면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거 나, 구색 맞추기에 한정되거나, 껴맞추기 식이거나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해 집안 잔치로 끝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행사와 공연의 특성은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했던 사례를 적당히 모방하거나 돈벌이 찾 기에만 급급한 모습도 많이 발견된다. 정체성을 잃은 채 많은 행사가 억지로 꿰어 맞춰진 상 품화로 준비된다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긴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정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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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나 경제적 이해관계로 반복하다가 사라져 버리기 쉽다. 최근 들어 축제와 행사의 콘텐츠 개발이나 연구에 상당한 재원이 투여되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그에 걸맞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 혼자 잘하겠다’는 독점주의 방 식과 ‘콘텐츠의 의미와 가치 분석’은 무시된 채 최종적 열매만 거두겠다는 성급한 욕심 때문 이다. 행사가 지향하는 가치는 원대하지만, 그것이 표현되는 현장은 지극히 한정적이고 제 도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축제에 맞는 행사와 이벤트 콘텐츠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현대사회 에서의 축제의 행사는 특정 집단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주체들이 직접 참여하고 창조하며 누릴 수 있는 본보기의 장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전문 인력의 활용과 유 기적인 연계 관계 등을 개선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창조적인 상품화를 완성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예산도 제대로 쓰이고 창조인 사회와 단체, 기업 발전의 주요 기제로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이고 많은 사람의 참여를 새롭게 끌어낼 것이다. 축제와 이벤트를 준비하는 주체자가 되었든 초대자가 되었든 즐겨보기에 앞서서 제대로 된 축제, 기념일의 행사와 공연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도록 하자. 당신과 우리 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성장할 것이며 인생에 있어서 기쁨의 한 자락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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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리더인가? 독불장군형 리더는 싫어요! 한계를 뛰어넘는 소통의 힘, ‘소통’으로 인생과 사업을 재부팅 하기 / 김순정

인간사의 끝이 없는 화두, 소통! 당신은 지금 통(通)하고 있는가?

‘나

는 그런 뜻이 아닌데, 사람들이 오해하네?’ ‘열심히 일하는데 왜 성과도 없고 성공도 못 하는 걸까?’

‘나의 의견을 우리 조직과 팀에서 전혀 반영을 안 해줘서 답답하네?’ 대통령과 국민, 상사와 부하,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식 사이…… 왜 그렇게 우리는 서로 통하지 못하는 걸까? 직장 내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어 괴로 운 직원과 CEO, 가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몰라줘서 괴로운 부부와 자녀들이 늘어만 간다. 나 혼자 있는 시간보다 누군가와 함께해야 할 일이 더욱 많은 게 세상 사는 이치인지 라 부부, 친구, 지인, 직장동료, 상사 등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는 인간관계 안에서 통해야 만 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는 뜻이기라도 한 걸까? 시 대가 점점 어려워지고 사람들 간의 관계가 복잡 다양해지면서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세상에는 말 잘하는 이도 많고 글 잘 쓰는 사람도 많지만, 말솜씨보다는 나와 타인, 즉 서로의 진심을 알아듣는 능력인 ‘소통’이 더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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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처한 상황과 현실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각자 다른 사람들끼리 소통 이라는 것은 쉽지 않다. 직접 대면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뿐 아니라 인터넷과 SNS, 스마트 폰 등 온라인 소통 도구들이 발달해도 소통으로 인한 행복지수가 늘어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격려해 주고, 희망을 이야기하며 소 통의 불을 지펴주어야 하지 않을까? 소통은 우리가 모두 함께 행복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 이다. 불통이 얼마나 많은 사람과 타인들의 이익에도 불이익을 주는지 우리는 최근 박근혜 정권의 불통 정치를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다. 누구나 소통형 인간을 꿈꿀 것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과 진심 어린 소통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좌절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상사가 부하 직 원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부하 직원이 모르고 있다든가, 부모는 자식에게 똑같은 말을 수 십 번 했는데도 행동에 변화가 없다. 이것은 모두 ‘불소통’의 문제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특히 인도네시아어에 익숙하지 않고 이 나라 문화와 환경에 대해서 낯설기 때문에 인도네 시아인과 소통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당신은 어떤 유형의 리더인가? 조직이나 모임에서 사람에게 말 한마디로 호령하고, 날 고 기는 사람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던 어떤 조직의 한 리더는 소위 카리스마 있는 뛰어 난 리더라고 주위에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리더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늘 양날의 칼로 작용하였다. 잘 쓰면 카리스마였지만 못 쓰면 독단으로 기울기 십상이었다. 존경이 아닌 자기계발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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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부르는 그의 카리스마는 자신을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유아독존인 독불장 군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만을 고집하고 주변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두지 않 았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집과 이기주의 그리고 개인주의 가 강했던 그 리더는 항상 ‘나는 옳고 당신들은 옳지 않아.’, ‘내 방법이 최고야.’라며 자신 이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팽배했다. 대화도 일방적인 주입 식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위에는 그 누구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사람들 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의 리더십이 아닌 교만이라는 부정적인 시작으로 바라보기 시 작한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리더는 어느 기업이나 조직이나 단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당신은 소통형 리더인가? 비소통형 리더인가? 당신의 소통지수는? 소통의 도구는 다양해졌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조직의 리더와 구성원 간의 진정한 의 미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겉으로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나 사실 개인 들은 조직 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와 의사를 거의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 사이다. 또한, 사생활 존중과 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조직보다는 개인주의가 더 욱 팽배해져 있는 상황이다. 또한, 사람의 욕구는 대개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 서 그 모습이 쉽게 드러나지 않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구를 드 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인도네시아 사람이 ‘예스(yes)’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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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no)’도 아닌 루꾼 정신이 팽배해져 있다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비슷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시스템이 더욱 개방되고 노출되면서 사람들의 욕구 표출이 이전보 다 양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리더라면 구성원 개개인의 표출되는 욕 구를 조직의 리더는 이를 받아들여 돕고자 노력을 해야 한다. 가정과 조직, 기업이 소통을 잘해서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상호 발전하는 것이 모 두 행복한 것 아니겠는가? 이제는 서로 소통하며 함께 가야 생존할 수 있고 경쟁력을 강 화할 수 있다. 소통하지 않은 조직과 회사는 현재와 미래의 성장을 꿈꿀 수 없다. 잘되든 못되든 소통해야 성장의 물꼬를 틀 수가 있다고 장담한다. 한 사회와 조직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으로 내부의 구성원들이 가지 고 있는 욕구와 의견에 대한 파악이 이뤄져야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 기나 점수 따기 위한 소통하는 척하는 리액션은 필요하지 않고 더 통하지도 않는다. 소통 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것이고 소통은 낮은 자리에 권위와 나를 내 려놓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넉넉함이다. 자기라는 존재를 내려놓고 모든 것과 눈높이를 맞 추는 작업이다. 자존심을 ‘자존감’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과거와 미래와 타 인과 사회와 막혔던 담이 뚫리게 된다. 이기적이고 다양화된 조직사회에서 존경받는 리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지금 이 시 대는 소통형 리더를 원한다. 탁월한 스펙과 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이다. 스펙이 뛰어나다고 우쭐대다간 언젠가는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결국엔 상황을 수용하는 태도 와 이를 설득하는 방식에서 소통형 리더와 비소통형 리더로 나누어진다. 비소통형 리더는 감정부터 드러내고 소통형 리더는 해결책부터 찾는다. 불행한 나라, 실패하는 기업, 자신을 찾지 못하는 개인에게 전하는 근본적인 소통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당신이 어떤 조직의 리더라면 조직의 발전과 성장 그리고 행복을 위해 진정한 리더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점검해봐야 한다. 수많은 소통전문가의 공통적인 소통법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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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부르는 소통법칙 6가지 1. 프로는 감정싸움을 하지 않는다 소통하려면 감정 컨트롤부터 하라 소통형 리더는 감정싸움 없이 매 순간순간 일어나는 변수에 휘둘리지 않도록 유연한 태도를 지녀 야 한다.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도 논리보다 감정이 먼저 앞서지 않게 조심하라. 감정이 먼저 앞 서다 보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 역시 상처를 받게 된다. 소통은커 녕 감정만 리스크를 입는다. 이처럼 원치 않는 상황이 왔을 때 섣불리 감정적 대응과 가치 판단을 하기보다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논리적 설득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 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바는 간단명료하게 전달하고, 중요한 사안일수록 두세 번 되풀이해 확인해야 하며 일의 진행이 확정된 다음에는 부지런하고 뚝심 있게 행동하라. 무조건 예스를 남발하지 말고, 실수 를 저질렀을 때는 솔직한 인정과 담백한 사과로 대응하라. 이를 지키지 못해 갈등이 빚어지고 일이 엎어지면 인간관계가 틀어지곤 한다.

2. 소통하지 않은 조직과 회사는 성장을 꿈꿀 수 없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답이다 소통은 쌍방향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성원들은 욕구 불만을 느끼게 되고 결국 사회와 조직 에서 몸이 떠나거나 마음이 떠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일관된 목표와 비전은 한 방향의 소통이 아닌 쌍방향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인과 조직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소통 부재로 인해 사람의 마음이 떠나게 될 때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그 사회와 조직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조직의 리더는 각 구성원이 추구하는 욕구가 충족될 수 있도 록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듣고 이해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변화의 시대에 살아남고 성장 할 수 있다. 기업이나 조직 내에 뉴스레터를 발간하거나 대화의 장을 자주 만들어 솔직 담백한 이야 기가 오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화의 장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의견만 강요하는 식의 대화는 절대 금물이다. 우선 대화의 장에서는 경청의 자세를 가지고 여러 사람이 발언할 기회를 공평하게 주어야 한다.

3. 소통의 시작은 나에게서 출발! 자신에게 먼저 소통의 기회를 주어라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나’이다. 소통의 기본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함이라는 전제 가 꼭 필요하다. 상대방과의 소통 이전에 ‘나에게 소통의 기회를 주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 마 음부터 열어야 진짜 관계와 성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나’를 내세우면 불통이 되기에 십상이다. 그 누군가와 소통이 안 되고 불통이라면 ‘그가 문제가 있다.’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도 문 제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소통은 타인과 좋은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 나도 곧 그에게는 타인임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나를 덜 생각하면 소통은 쉬워진다. 물론,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 진정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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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으로 변화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지를 바꾼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 됨됨이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장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4.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소통하라’ 긍정도 고래를 춤추게 한다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보다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소통만 잘해도 그런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소통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선물을 주듯 해야 한다. 상대의 기를 살려 주는 것이다. 기를 살려 주 는 사람과 소통 안 할 수가 있겠는가? 마음의 문을 안 열 수가 있겠는가? 상대의 기를 살려 주면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요즘같이 어려울 때 상대에게 필요한 긍정의 말로 그의 기를 살려 주 면, 소통이 원활해지고 행복과 성공은 자동으로 찾아올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서로의 기를 살려 주 길 바란다. 물론 진정성을 가지고 대해야 함은 기본이다.

5. 열등감의 때를 벗겨라 콤플렉스가 많으면 소통하기 힘들다 자신의 내면과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자기애의 시작이며, 이는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고 건강하게 세상과 소통할 힘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부족하고, 연약하며 많은 열등감과 지나친 영광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타인을 이해하는 폭과 길게 보는 시선이 생긴다. 열등감도 영광도 떼어낸 자리에서 진정한 자 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타인 역시 그들의 직함이나 성취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떼어 낸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면 소통의 통로는 자연히 열리게 된다. 이때 비로소 나와 타인의 진 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자신과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으로 행복한 사람이 진정한 소통형 리더이 다.

6. 소통은 양과 기술이 아닌 상대적인 ‘만족’! 소통을 즐기라 소통의 방법에 대해서 너무 큰 기대치를 가져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공감 능력을 향상하는 과정에 있다.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가 그 사람을 느끼고 내 안에서 타 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을 상담해온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하지현 교수는 인간은 누구 나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대상을 찾는 욕망이 있으며 소통이란 자신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 드는 방법이며 완벽한 일체감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버리고 그 과정 자체를 적극적으로 즐길 것을 제안한다. 결국, 진정한 소통은 화려한 화법과 설득의 기술로 타인을 조종하는 자기중심적 관계 맺기가 아니 라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교류를 통해 성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 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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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놓은 꽃신 끝이 드러날 줄 몰랐네


7 번역소설

스칼렛 아이비스(The Scarlet Ibis) • 김현숙


스칼렛 아이비스(The Scarlet Ibis) 원작_James Hurst / 번역_김현숙

름이 죽고 가을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비스(Ibis, 따오기 류의 새, 북미산 황새의 일종) 가 붉은 수액이 흐르는 나무에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꽃이 핀 정원은 썩은 갈색 매

그놀리아 꽃잎으로 얼룩졌고 국화 잎은 보랏빛 풀로 뒤덮였다. 굴뚝 옆 나팔꽃은 아직 시간 을 말해준다. 하지만 느릅나무 위의 꾀꼬리둥지는 비어있고 빈 요람처럼 앞뒤로 흔들렸다. 묘지의 마지막 꽃들은 활짝 피고, 그 향기는 목화밭을 가로질러 우리 집의 모든 방을 지나면 서, 우리 죽은 이의 이름을 부드럽게 말하며 떠다녔다. 그 여름이 오래 전에 지났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아직 명확하게 낯설다. 맷돌은 바로 부엌문 바깥, 붉은 수액이 흐르는 나무 곁에 서 있다. 지금 꾀꼬리가 요람 속에서 노래하면 그 노래는 은빛 먼지처럼 나뭇잎 속으로 사라질 듯하다.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있고 집은 하얗 게 빛나고 마당을 지나는 창백한 울타리는 곧고 말끔하게 서 있다. 하지만 가끔씩 나는 지금 처럼 그린빛 주름이 잡힌 거실의 서늘함 속에 앉는다. 맷돌은 돌기 시작하고 모든 것들을 바 꾼 시간은 맷돌에 갈려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나는 두들(Doodle)을 기억한다. 두들은 여태껏 가져본 적이 없는 가장 미친 남동생이었다. 물론 그는 윌슨 대통령을 사모 하여 날마다 그에게 편지를 쓰는 올드 미스 리디(Leedie)와는 다른 종류의 미친 것이었다. 그 것은 마치 당신의 꿈속에서 만난 누구처럼 긍정적인 의미였다. 애초부터 절망을 안고 그는 내 나이 여섯 살에 태어났다. 아주 작은 몸에 거대한 머리를 가지고, 몸은 빨갛고 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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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떨었다. 그를 받아낸 나이시(Nicey) 아줌마를 뺀 모든 사람들은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만이 그가 예수의 나이트가운으로 만든 양막에 싸여 태어났기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목수 히쓰(Heath)씨에게 그를 위한 작은 마호가니 관을 짤 것 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생후 3개월이 되었을 때, 늙은 엄마와 아버지는 그에 게 좋은 이름을 지어 주기로 결정했다. ‘윌리엄 암스트롱(William Amstrong)’ 이라고 지었다. 마 치 작은 연에 큰 꼬리를 단 것 같기도 하고 묘비에서나 어울릴 법한 이름이었다. 내 생각에 나는 많은 부분에서 뛰어났다. 숨을 참거나, 달리거나, 점프하거나 또는 올드 우먼 스웜프(Old Woman Swamp) 안의 나무를 오르거나 하는 일에. 그리고 나는 홀스헤드 랜딩 (Horsehead Landing)까지 달리는 누구보다도 더, 어떤 것일지라도, 권투를 하거나, 들판과 바다

가 보이는 늪지를 건너 나오고, 헛간 뒤 큰 소나무의 가지 끝에 올라앉는 누구보다도 더, 어 떤것이라도 남들보다 뛰어나길 원했다. 나는 남동생을 원했다. 하지만 만일 윌리엄 암스트 롱이 죽지 않고 살아도 결코 이런 것들을 나와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엄마는 울면서 말했 다. 그의 머리가 정상이라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흐느꼈다. 그가 사는 동안 종려나무 잎처럼 바삭거리고 오후 바다 미풍에 굽이치는 하얀 마키셋 커튼이 달린 침실의 침대 고무 시트 위에서 누워 지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장애인 동생을 갖는 건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동생을 둔 다는 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베개로 그를 질식시켜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머리가 침대 발 쪽의 쇠기둥 사이에 끼었다.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나는 방을 뛰쳐나가 복도 를 내려가며 소리쳤다. “엄마 그가 웃었어요. 정상이예요! 정상!” 그가 두 살 때, 그를 엎드려 놓으면 힘을 주며 혼자서 움직이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약한 심장에 힘을 주는 행위는 그를 죽이는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 았다. 그가 힘을 주면 처음엔 빨갛게, 그 다음엔 옅은 보라로 변하고, 마지막엔 오래되어 낡 은 인형처럼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나는 아직도 손으로 입을 꽉 누르고 눈은 크게 뜨고 깜박이 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는 엄마를 잘 기억한다. 그는 기는 걸 배웠다(그의 세 번째 겨울이었다) 우 리는 그를 침실 밖으로 데려가 벽난로 앞의 러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처음으로우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가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우리는 그를 윌리엄 암스트롱이라 불렀다. 비 록 그것이 형식적이고 우리 조상들 중 한 사람을 언급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하지만 그가 사슴가죽 러그 위를 천천히 기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이름에 대해 무언가 해야 만 했다. 그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다시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길 때, 마치 그가 거꾸로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기어를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뒤쪽으로 기었다. 만일 당신이 그를 부 번역소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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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면 그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듯이 돌아본다. 그리고는 곧바로 당신이 그를 안아 올 리기 좋게 뒤로 기어 온다. 뒤로 기는 것은 그를 두들벅(Doodle bug, 개미귀신)으로 보이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두들(Doodle)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와 아버지도 그것 이 윌리엄 암스트롱보다 더 나은 이름이라고 하였다. 나이시 아줌마만 이에 동의하지 않았 다. 그녀는 양막에 싸인 채 태어난 아기는 신성한 성인으로 자라기 때문에 특별한 존경심으 로 다뤄야 한다고 했다. 동생의 이름을 다시 지어준 것은 아마도 내가 그를 위해 한 가장 친절한 것이었다. 왜냐하 면 아무도 두들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들은 기는 것은 배웠지만 걸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게으르지 않았다. 우 리가 더 이상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그는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의 유모차를 만들었던 즈음이었고 나는 그를 유모차에 태우고 이리저리 끌고 다녀야 했다. 처음 에 나는 그를 끌고 베란다만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그리고 그를 잔디밭에 내려놓으면 울기 시 작해서 어디든 내가 갔던 곳에 데리고 가야지 끝이 났다. 만일 내가 모자를 집어 들면 나랑 같 이 가고 싶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 엄마는 어디에 있든 나를 불렀다. “두들을 데리고 가.” 그는 여러 가지로 나의 짐이었다. 의사는 그가 너무 흥분하거나, 너무 덥거나, 너무 피곤 하거나 하면 안 된다고 하며 항상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하였다. 그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오면 나는 그것들을 무시했 다. 그가 나를 따라오는 걸 단념하게 하기 위해 유모차 두 개의 바퀴 모서리부분에 그를 앉히 고 목화밭 줄 끝을 가로질러 달리기도 했다. 가끔 나는 뜻하지 않게 그를 뒤집었으나 그는 결 코 엄마에게 이르지 않았다. 그의 피부는 너무 예민했다. 그래서 외출할 때는 큰 밀짚모자를 써야만 했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 그는 유모차 옆을 꽉 잡았다. 밀짚모자는 항상 귀에 걸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우스꽝스러웠다. 결국, 나는 내가 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들은 내 동생이고 내가 무얼 하든지 그는 영원히 나에게 매달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끌고 벌겋게 타는 목화밭을 가로질러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을 나누기 위해 올드 우먼 스웜프에 갔다. 유모차를 끌고 톱니바퀴 모양의 고사리를 지나 시냇물이 속삭이는 팔 메토 야자나무 잎의 녹색 어스름으로 내려갔다. 나는 유모차에서 그를 들어올려 큰 소나무 옆의 부드러운 고무잔디 위에 내려 놓았다. 그는 경이로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응 시했다. 그리고 그의 작은 손은 고무잔디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울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야?” 나는 성가셔하며 물었다. “너무 아름다워” 그가 말했다. “너무 아름다워, 아름다워, 아름다워.” 그날 이후 두들과 나는 자주 올드 우먼 스웜프에 내려갔다. 나는 야생반지꽃, 인동덩굴,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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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자스민, 수련 등을 모으고 야생잔디로 엮어 목걸이나 왕관을 만들었다. 우리는 이것으 로 우리를 화려하게 꾸미고 현 세상의 범주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에 취했다. 그리고 소나무 꼭대기에서 오렌지로 타고 있는 태양광선이 기울어질 때, 우리의 장식들을 냇물에 놓아주고 바다 쪽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내 안에는 사랑의 흐름에 의해 생긴 잔인함의 매듭이 있다(슬프게도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 게서도 보았다). 그것은 가끔씩 우리들의 피만큼 파멸의 씨앗을 맺는다. 종종 나는 두들에게 짓

궂게 굴었다. 어느 날 나는 그를 헛간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에게 우리 모두 얼마나 그 가 죽을 것이라고 믿었는지 말하면서 그의 관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쥐를 잡으려고 가져다 놓 은 약으로 덮여 있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올빼미들이 그 안에 둥지를 틀었다. 두들은 오랫동안 마호가니박스를 관찰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내 것이 아니야.” “맞아.” 내가 말했다. “네가 다락에서 내려오고 싶으면 그걸 만져야 할 거야.” “난 안 만질래.” 그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러면 난 널 여기 내버려 둘 거야.” 나는 그를 위협했다. 그리고는 나 혼자 내려가는 척 을 했다. 두들은 혼자 남겨지는 것을 무서워했다. 번역소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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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두지마, 형.” 그가 울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몸을 관에 기댔다. 떨리는 손을 뻗쳐 관을 만지며 소리를 질렀다. 올빼미가 관 밖 우리의 얼굴 쪽으로 퍼덕거려 우리를 무섭게 하 고 쥐약으로 우리를 덮어버렸다. 두들은 마비가 되었다. 나는 그를 내 어깨에 메고 사다리를 내려왔다. 우리가 밝은 햇빛 속으로 나왔음에도 그는 나에게 매달리며 울었다. “날 내버려 두지마, 내버려 두지마.” 두들이 다섯 살 때였다. 나는 그 나이에 걸을 수 없는 동생을 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를 가르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올드 우먼 스웜프에 내려갔다. 봄이었다. 월계수의 진한 단내가 애도의 노래처럼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나는 너에게 걷는 걸 가르칠 거야. 두들.” 내가 말했다. 그는 소나무에 기대어 부드러운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왜?” 그가 물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난 너를 지금처럼 데리고 다니지 않을 거야.” “난 걸을 수 없어. 형.” 그가 말했다. “누가 그래?” 나는 물었다. “엄마, 의사, 그리고 모두가.” “넌 걸을 수 있어.” 내가 말했다. 나는 그의 겨드랑이를 잡고 그를 일으켰다. 그는 반쯤 비 어있는 밀가루 부대처럼 잔디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작은 다리에 뼈가 없는 것처럼. “아프게 하지마. 형.” 그가 경고했다. “닥쳐, 난 널 아프게 하려는 게 아냐. 걷는 걸 가르치려는 거야.” 나는 그의 몸을 다시 일으 키고 일으켰다. 그는 계속 주저앉았다. 이번엔 그는 고무잔디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않 았다. “난 할 수 없어. 인동덩굴 화환이나 만들자.” “넌 할 수 있어. 두들.” 나는 말했다. “네가 필요한 건 노력이야. 자 어서.” 나는 그를 한 번 더 일으켜 세웠다. 그것은 처음부터 희망이 없어 보였다. 내가 포기하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 두는 자랑스러운 무언가와 자랑스러운 누군가를 가져야만 한다. 두들은 내게 그런 존재였 다. 자부심이 아름다운 것인지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삶과 죽음의 두 가지 줄기를 자라게 하 는 씨앗인 줄 나는 몰랐다. 여름 내내 우리는 올드 우먼 스웜프의 개울 옆 소나무로 갔다. 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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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다 적어도 100번 이상 그를 그의 다리로 서게 했다. 이따금 그가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좌절하기도 했다. 나는 말했다. “두들, 넌 걷는 걸 배우는 게 싫어?” 그러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넌 결코 배우지 못 해.”라고 말하고 나서 나는 우리들 의 늙은 모습을 그려 주었다. 그의 하얀 머리칼, 길고 하얀 수염 그리고 아직도 그를 유모차 에 태우고 다니는 내 모습을. 이것은 그를 다시 도전하게 만들었다. 결국 어느 날, 연습한지 여러 주 후에 그는 몇 초 동안 혼자 섰다. 그가 주저앉았을 때, 나는 팔로 그를 붙잡고 안아줬 다. 우리들의 큰 웃음은 늪을 지나 종소리처럼 울렸다. 그제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았다. 희망은 더 이상 팔매토 야자나무 덩굴에 숨지 않았고 연약한 투스브러쉬나무 속의 멋 진 홍관조처럼 눈에 띄었다. “그래, 그거야.” 나는 울었다. 그도 역시 울었다. 우리들이 깔고 앉은 잔디는 부드러웠고 늪지의 향기는 달콤했다. 성공은 매우 임박했다. 우리는 그가 실제 걸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비 가 오지 않는 모든 날에 올드 우먼 스웜프에 기어 들었다. 목화를 딸 즈음, 두들은 그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그는 아직 멀리까지 걸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비밀을 지킨다는 건 숨을 참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 리는 이 비밀을 그의 여섯 번째 생일인 10월 8일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몇 주 후 우리는 모두 에게 극적인 놀라움을 약속하면서 집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나이시 아줌마는 우리가 부활보 다 덜 놀랄만한 일을 꾸민다면 실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전의 날 아침, 아버지, 엄마, 나이시 아줌마는 식당에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두들을 유 모차에 싣고 문 쪽으로 데려갔다. 그들을 뒤쪽으로 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그 장면을 엿보게 되면 가슴에 십자가를 긋고, 죽을 만큼 놀라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는 두들이 일어서도록 도왔다. 그가 혼자 섰을 때 그들이 그 장면을 보게 했다. 두들이 천천히 걸어서 방을 가로질 러 테이블의 그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엄마가 울기 시 작했다. 그에게로 달려가서 그를 안고 키스를 했다. 아버지도 그를 안아줬다. 나는 복도에서 감사의 기도를 하는 나이시 아줌마에게 가 그녀 주변에서 왈츠를 췄다. 그녀의 구두가 내 엄 지발톱을 밟을 때까지 우리는 신나게 춤을 췄다. 그것은 내가 삶에 대한 장애를 가졌다고 생 각했을 때만큼 너무 아픈 것이었다. “왜 울어?” 아버지가 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게 나 자신을 위해 한 일 이란 걸 그들은 몰랐다. 그 자존심, 나는 그 자존심의 노예였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보 다 더 중요했다. 단지 장애인 동생을 두었다는 나의 수치스러움 때문에 두들이 걷게 되었다 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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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두 서너 달 안, 두들의 걷는 연습은 아주 좋았다. 그의 유모차는 헛간 다락방 위 작은 마호가니 관 옆에 놓였다(아직도 그 곳에 있다). 그때부터 같이 돌아다닐 때 우리는 자주 쉬 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빨리 가 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였다. 처음에 두들은 매우 서투른 거짓말장이었지만 습관적으로 내게 거짓말을 하였다. 누구든 우리말을 들으려 멈춘다면 아마도 우리를 정신병원인 딕스 힐(Dix Hill)에 보냈을 것이다. 나의 거짓말은 무서웠고 보통 끝이 없었다. 하지만 두들의 거짓말은 그보다 두 배 이상 미 친 것이었다. 그의 스토리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날개가 있고 그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날 아갔다. 그가 좋아하는 거짓말은 피터(Peter)라는 소년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공작 한 마리 를 길렀고 10 피트나 되는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피터는 밝게 반짝이는 골드빛 예복을 입었고 그가 해바라기 밭을 지날 때 해바라기들은 해를 외면하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 다. 피터가 잠 잘 준비를 마치면 공작은 그를 조심스럽게 감싸면서 아름다운 꼬리를 펴고 영 광스러운 무지개 빛깔로 그를 덮으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고 했다. 두들이 거짓말로 나를 능가한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두들과 나는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우리가 자라면 올드 우 먼 스웜프에 살며, 생계를 위해 개혓바닥풀(약초)을 뽑기로 하였다. 잎들이 속삭이고 늪지의 새들이 우리들의 닭이 되는 집을 개울 옆에 짓자고 하였다. 하루 종일(우리가 개혓바닥풀을 뽑지 않을 때) 나무의 줄기를 이용하여 사이프러스나무에서 그네를 타고 만약 비가 오면 나무를 우

산 삼아 그 밑에서 몸을 움츠리고 개구리와 노는 계획을 세웠다. 엄마와 아버지는 그들이 원 할 경우 우리와 같이 살기로 하고, 그는 엄마와 결혼하고 나는 아버지와 결혼할 수 있다는 계 획도 세웠다. 물론 나는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아는 충분한 나이였다. 그러 나 그가 그린 그림이 너무 아름답고 고요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좋아, 좋아.”하며 속삭이 는 것뿐이었다. 일단 내가 두들에게 걷기 가르치는 걸 성공하고 나는 나의 특별한 성과를 믿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대단한 발전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에게 달리기, 수 영, 나무 오르기, 싸움을 가르치고 싶었다. 동생 역시 지금은 나를 많이 신뢰했다. 우리는 이 계획의 성취를 위해 일 년 이내의 기간을 정했다. 그것이 결정되면 두들은 학교에 갈 수 있었 다. 그 해 겨울에는 많은 진행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학교에 가야 했고 두들은 추위 때문에 이 침대 저 침대 옮겨 다니며 고생을 했다. 하지만 풍요롭고 따뜻한 봄이 왔다. 우리의 시야는 다시 넓어졌다. 성공은 무지개 끝에 달린 골드 항아리같이 여름의 끝에 놓였다. 우리의 프로 그램은 순조로운 출발을 하였다. 더운 날에는 홀스헤드 랜딩(Horsehead Landing)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에게 수영 레슨을 하거나 보트 노 젓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가끔씩 우리는 올드 우먼 스웜프의 시원한 녹색 속에 빠졌다. 나무줄기에 오르거나 그가 걷기를 배웠던 소나무 아래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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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복싱을 하였다. 희망은 나뭇잎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우리가 바라보는 어디든 고사리 가 차례로 펼쳐지고 새들은 갑자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여름, 1918년도의 여름은 상처를 입었다. 5월과 6월에 비가 오지 않아 곡식들은 시들고 몸을 움츠리다 목마른 태양 아래 죽어갔다. 7월의 어느 아침, 허리케인이 동쪽에서 몰려왔다. 들판의 참나무가 넘어지고 느릅나무의 가지가 쪼개졌다. 그날 오후, 서쪽에서 굉음이 되돌아 오고 넘어진 참나무 주변에 폭풍이 불었다. 폭풍은 닭 창자 앞의 매처럼 참나무뿌리를 땅에서 캐어냈다. 목화 꼬투리는 줄기로부터 비틀리고 밭고랑 사이에 초록 호도처럼 쌓였다. 옥수수 밭이 균일하게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옥수수수염은 땅에 닿았다. 두들과 나는 아버지를 따라 그가 서 있는 목화밭에 갔다. 그의 굽은 어깨는 피해를 가늠해 줬다. 그의 턱이 가슴으로 떨어 질 때 두들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들은 그의 손을 내 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아 버지가 지구를 흔드는 요란한 목소리로 천국과 지옥, 날씨, 공화당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집 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임을 알고 서로를 찌르며 키득거렸다. 그 여름 동안, 이상한 이름들이 집 근처로 들려왔다. 샤또 씨에리(Chateau Thierry, 세계 1차 대 전 중의 전투이름, 이하 동일),

아미엔스(Amiens), 소이쏜스(Soissons) 그리고 엄마의 축복이 저녁 식

탁에 이어졌다. 한 번은 엄마가 말했다. “피어슨(Piarson)가족을 위해 기도해. 그의 아들 조(Joe) 를 벨로 우드(Belleau Wood)에서 잃었단다.”여름이 죽고 가을이 채 태어나지 않은 시간이 왔다. 학교는 겨우 두세 주 남았고 두들의 스케줄은 뒤로 밀려 있었다. 그가 나무줄기를 타고 오를 때 그의 발은 여전히 땅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수영은 확실히 불가능했다. 우리는 목표에 도 달하기 위해 두 배의 노력을 하기로 했다. 나는 그가 파랗게 질릴 때까지 수영을 시키고 노를 들어 올릴 수 없을 때까지 노젓기를 시켰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의도적으로 빨리 걸 었다. 그의 얼굴이 빨개지고 눈이 흐릿해질 때까지 계속 걸었다. 그는 더 이상 걸을수 없으면 잔디에 주저 앉아 울기 시작했다. “다시 해 봐, 두들.” 나는 요구했다. “넌 할 수 있어. 네가 학교 갈 때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를 원하니?” “나를 달라지게 한다고?” “틀림없이.” 나는 말했다. “자, 어서.” 그리고 나는 그가 일어나도록 도왔다. 우리가 부진한 시기(삼복더위)에 들어 갔을 때, 두들은 열이 있는 듯 보였다. 엄마는 그의 이 마를 짚어보며 아프냐고 물었다. 밤에 그는 잘 자지 못했다. 가끔씩 그는 악몽을 꾸었다. 그 는 내가 “일어나, 두들 일어나.”하고 흔들 때까지 울었다. 일요일 정오였다. 학교가 시작하기 겨우 며칠 전이었다. 나는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하지 번역소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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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나의 자존심은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의 프로그램에 대한 흥미는 몇 주 만에 사라져 버렸 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피곤한 집요함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기대치로 너무 멀리 돌아갔고 뒤에 아무런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 상황을 되돌리기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아버지, 엄마, 두들 그리고 나는 점심을 먹으려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통하게 모든 창문과 문을 열어 놓은 무척 더운 날이었다. 나이시 아줌마는 부엌에서 부드러운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긴 침묵 끝에 아버지가 말했다. “너무 조용한데, 오늘 오후 태풍이 오더라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난 개구리 우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요.” 그런 징후를 믿는 엄마가 테이블에 빵을 가져오 면서 말했다. “난 들었어요.” 두들이 단언했다. “늪지 아래서.” “넌 듣지 못했어.” 나는 반대로 말했다. “그렇지? 들었지?” 나의 부정을 무시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네, 틀림없이요.” 아이스 티 컵 너머로 나를 꾸짖으며 두들이 되풀이했다. 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갑자기 마당에서 낯설게 깍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들은 빵 한 조각이 그의 입으로 들어가는 찰나에 눈이 두 개의 파란 버튼처럼 튀어 나오며 식사를 멈췄다. “저게 뭐지?” 하 고 속삭였다. 나는 의자를 넘어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엄마가 “의자를 세우고 다시 앉아. 그 리고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야지.”하며 소리쳤는데도 나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두들은 양해를 구하고 마당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붉은 수액이 흐르는 나무를 올 려다 보며 “너무 너무 큰 빨간 새야.” 하고 불렀다. 그 새는 다시 크게 깍깍댔다. 엄마와 아버지도 마당으로 나왔다. 우리는 안개 같은 태양의 번쩍임 때문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나뭇잎 사이로 올려다 보았다. 가 장 높은 가지 위에 주홍빛 깃털과 긴 다리를 가진 닭 크기만한 새 한 마리가 불안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날개는 힘없이 아래로 쳐져 있었다. 깃털 하나가 떨어지고 초록 잎을 가로질러 천천히 아래로 떠 다녔다. “놀랄 일도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피곤해 보이네.” 아버지도 덧붙였다. “아님 아프든가.”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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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은 두 손으로 그의 목구멍을 꽉 쥐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저게 뭐지?” 그는 물었다. 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새가 펄럭거리기 시작한 순간, 날개는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고 날개를 치는 중에 깃털들 이 품어 나왔다. 새는 붉게 타는 나뭇가지를 가로질러 부딪치며 우리의 발 쪽으로 털썩 떨어 졌다. 기품있는 목이 S자로 두 번 움직이더니 바로 펴졌다. 새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얀 베 일이 그의 눈을 덮고 길고 흰 부리가 흐트러졌다. 그의 다리는 X자로 겹치고 발톱 같은 발은 우아하고 편하게 구부려졌다. 죽음조차도 그의 우아함을 훼손하지 못했다. 그것은 빨간 꽃 이 꽂힌 깨진 꽃병처럼 땅에 누워 있었다. 그 이국풍의 아름다움에 외경심을 가지고 우리는 그 주위에 서 있었다. “죽었네.” 엄마가 말했다. “이게 뭐지?” 두들이 되풀이했다. “가서 새에 관한 책 좀 가져와 봐.”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집 안으로 달려가 책을 가져왔다. 아버지는 페이지를 넘기고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칼렛 아이비스(scarlet Ibis)네.”“그건 열 대 남부 아메리카에서 플로리다에 걸쳐 살아. 태풍이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틀림없어.” 우리는 슬픔에 젖어 새를 되돌아 봤다. 선홍색 아이비스, 그는 우리 집 마당의 붉은 수액 이 흐르는 나무 아래서 죽으려고 얼마나 먼 거리를 날아 왔을까?” “가서 점심 먹자.” 엄마가 우리를 식당 쪽으로 이끌었다. “배 고프지 않아요.” 두들이 말했다. 그는 아이비스 옆에 무릎을 꿇었다. “우린 디저트로 복숭아파이를 먹을 건데.” 엄마가 문간에서 유혹했다. 두들은 무릎을 꿇고 여전히 남아 있었다. “새를 묻어 줄 거야.” “함부로 만지지마.” 엄마가 경고했다. “새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도 알 수 없잖아.” “알았어요. 안 만질게요.” 두들이 말했다. 엄마, 아버지와 나는 식당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열린 문으로 두들을 보았다. 그는 포켓 에서 실을 꺼내 새를 만지지 않고 한쪽 고리로 목 주변에 걸었다. 천천히 부드럽게 ‘Shall we gather at the river’ 란 노래를 부르며 새를 앞마당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피튜니아(petunia, 번역소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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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자줏빛)밭 옆 정원 안에 구멍을 팠다. 우리는 정면 창을 통해 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는 눈치채지 못했다. 삽으로 구덩이 팔 때의 그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삽자루의 두 배 이상 우리를 웃겼다. 그가 들리지 않도록 우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두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진지하게 디저트를 먹는 걸 보았다. 그는 창백했고 망을 친 문 안에서 서성였다. “스칼렛 아이비스를 묻어줬니?”아버지가 물었다. 두들은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서 손 씻고 와. 복숭아파이 먹게.” 엄마가 말했다. “배 고프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죽은 새를 보면 운이 없다던데.”나이시 아줌마가 부엌문에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특히 빨간색의 죽은 새들은” 내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두들과 나는 홀스헤드 랜딩으로 급하게 갔다. 시간은 짧았고 두 들이 학교에 갈 때 다른 아이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아직 먼 길을 가야만 했다. 가을이 만든 금박을 입힌 태양은 아직 치열하게 불탔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는 곳들의 짙은 초록 숲 은 그늘지고 시원했다. 우리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두들은 수영이 너무 지친다고 말했다. 그 래서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조수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갔다. 늪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새는 날카롭게 울고 해변의 메뚜기들은 미르틀나무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두들은 아무말 없 이 고개를 계속 외면하고한 손을 힘없이 물에 넣고 있었다. 한참을 떠다닌 후에 노를 제자리에 놓고 물의 흐름을 거슬러 뒤쪽으로 올라갔다. 검은 구 름이 남서쪽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노를 조금 빠르게 당기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홀스헤드 랜딩에 다다랐을 때, 번개는 하늘의 반을 가로질러 치고 천둥은 바닷소리 조차 숨기며 으르렁댔다. 해는 사라지고 밤처럼 어둠이 내렸다. 한 떼의 늪 까마귀가 날아가 고 내륙에 있는 두 마리 해오라기가 꽥꽥거리며 그들의 보금자리를 향해 낮은 곳의 굴 바위 로부터 날아올랐다. 그리고 비스듬히 날아갔다. 두들은 피곤하고 두려워 보였다. 작은 보트에서 내릴 때, 늪 잔디에서 바스락거리며 나오 는 농 게 함대가 지나가는 진흙 위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가 일어나도록 도왔다. 그는 바지에 서 진흙을 털어내며 부끄러운 듯이 미소 지었다. 그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리란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폭풍을 뚫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하지만 그가 관용을 기대하며 나를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번개가 가까이 왔다. 겁에 질린 그는 내 뒤에 바짝 붙어 내 뒤꿈치 를 밟으며 가까이 걸었다. 내가 속도를 내며 걸을수록 그도 빨리 걸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비는 소나무를 가로 질러 포효하고불꽃놀이 화약처럼 터지며 내렸다. 우리 앞의 고무나무는 번개의 볼트처럼 흩어졌다.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비가 내리기 바로 전에 잦아들었다. 읽고 나누고 쓰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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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에서 넘어져 울부짖는 두들의 소리를 들었다. “형, 형, 같이 가! 같이 가!” 두들과의 계획이 백지가 될 것이라는 인지는 매우 씁쓸했다. 내 안에 있는 잔인함이 나를 자극했다. 우리를 가르는 비의 벽 뒤에 그를 남겨 놓고 최대한 빨리 달렸다. 빗물은 쐐기풀처 럼 내 얼굴을 쏘았고 바람은 젖어반짝이며 경계선이 되는 나무들의 잎새를 나팔꽃 모양으로 벌어지게 했다. 머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지쳐서 더 이상 멀리 달릴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악몽은 차츰 사라져 갔다. 나는 멈춰 서서 두들을 기다렸다. 여기저기에서 비 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죽었고 비는 하늘 에서 내려 온 로프마냥 수직으로 내렸다. 폭우를 가로질러 응시하며 나는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갔고 길 옆 빨간 넝쿨 가지 아래 웅크리고 있 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팔에 묻고 땅 위에 앉아있었다. “두들, 가자.” 내 가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젖혔다. 그는 힘없이 뒤 땅으 로 넘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피가 목과 셔츠 앞자락을 선연한 빨강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두들, 두들!” 그를 흔들며 울었다. 장대 같은 비 외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 를 뒤로 젖히고 매우 불편한 자세로 누웠다. 이것은 그의 주홍색 목을 이상하게 길고 가늘어 보이게 했다. 그의 작은 다리는 무릎에서 날카롭게 꺾여 전에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약하 고 여위어 보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본 아주 익숙한 붉은 시야가 눈물로 흐릿해졌다. 그 가 누워있는 땅 위로 나의 몸을 포개고 내리치는 폭풍위로 “두들!”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오 랫동안 아니 영원히 그 어처구니 없었던 비로 죽은 나의 주홍 아이비스가 쉬고 있는 그 곳에 서 누워 울고 있었다.

James Hurst(1922~2013) 192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생 대학에서 케미컬 엔지니어링 전공 2차대전 후 뉴욕과 이태리의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공부, 3년간 오페라 가수로 활동 뉴욕에서 은행원으로 34년 재직 틈틈이 단편소설과 연극대본 집필 1988년 Scarlet Ibis 발표 번역소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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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작 • 회원 프로필 & 자축 메시지 • 인작의 발자취 • 고(故) 박상훈 님의 명복을 빕니다


- 내 전 생애가 나팔꽃만 같아라 오늘 아침은


회원 프로필 & 자축메시지 김순정

15년간 순정아이북스 출판사 대표로 100 여권의 책을 기획, 출간하며 한양대학교 경제학과 특강 및 책 관련 강연/ 대표작은 KBS <러브 인 아시아> 및 대한적십자사의 <만원의 희망 밥상>. 현재는 ‘인도 네시아 전문출판사’를 표방하며 책을 출간 중이다.

국에서 100여 권이 넘는 책을 기획 출간하면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기도

했고 실패한 책을 만들기도 했지만 똑같은 책은 한 권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다 각기 다 른 컬러와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글을 쓰 는 작업은 잠자고 있는 나와 타인을 깨우 는 작업이다. <인작>에서의 글쓰기가 인도네시아 사회 를 바꾸고 인도네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살 리는 글쓰기였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김현미 내 안의 나를 찾아 나만의 지도를 만들고 있다. 현재 인테리어 INPLAN 대표/ 한인니문화연구원 수석팀장

음을 가질 수 있는 시간, 타인의 길 자취를 나누며 그 방향의 의미를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때로 내 안의 무언가가 사정없이 한방향으로 휘둘릴 때 그 때 .이 시간의 물음과 대답 들이 그 태풍을 잠재울 수도 있을 듯 합니 다. 인작 회원분들과 나눈 행복한 시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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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제17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수상 PT.PYTHONIA(파이토니아) 대표 파이톤가방을 만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는 좋은 사 람들과 교류

를 채워도 허기진 이유를 몰랐습니 다.

이 곳 저 곳 기웃거려 봤지만 원하는 즐거 움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제 좀 쉬어 가야지” 하면서 발을 디 딘 곳, 나태해진 영혼을 흔들어 기쁨으로 노래하게 하는 그 곳…… 인작(Injak) 입니다.

노경래 포스코인도네시아 자원개발법인 법인장 근무 현재 자원개발법인인 PT.Grand Energy Sdlution 법인장

도네시아에 첫 발을 딛었을 때의 설 렘, 그후 인도네시아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정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인들과 동화되어 갔 다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 록 징글징글한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 인작을 통해 처음의 설렘과 열정이 되살 아나 인도네시아가 사랑스러운 나라로 다 시 보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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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프로필 & 자축메시지 박정자 1991년 시인 등단하여 <그는 물가에 있다> 등 6권 의 시집을 출간 사람과 사물의 내면에 귀기울이는 시창작으로 경 기문학상, 서울시인상 수상

성한 나뭇잎과 나무머리에 핀 붉고 노란 꽃잎 위로 자카르타의 태양이

반짝이는데, 그 한가운데서 어린나무 한 그루 키를 키우고 있다는 신선한 기쁨! 각기 다른 빛을 볼록렌즈처럼 모아서 둥 글게 빚어서, 이 세상 비추는 마법의 유 리구슬로 만들어볼까, 지금은 어린 <인작 >, 열대의 나무처럼 풍성하기를! 열대의 태양처럼 뜨거웁기를!

배동선 인도네시아 22년차 문학의 꿈을 품었지만 잠에서 아직 깨지 못한 채 다방면에서 맨땅에 해딩을 주특기로 하며 본의 아 니게 따라붙은 인생의 키워드 고립무원 고군분투 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달관의 삶을 지향함

양한 주제에 대해 나와는 전혀 다 른 시각을 매월 들을 수 있었던 것

은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다음 번 모 임을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벅찼던 인작 이 그 첫 결실을 웹진으로 맺게 됨을 회원 한 분 한 분과 함께 마음을 다해 축하합니 다. 다가올 2기는 더욱 풍성하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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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경 시인이며 인니문화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인니문화연구원장/예총회장 인도네시아 관련 칼럼니스트

로 다른 생을 사유하면서 인도네시아 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낯선 다른 풍

경들이 모여서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만들 어 냅니다. 비네까 뚱갈 이까 Bhinneka Tunggal Ika, 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어느 나라의 국가철학처럼.서로 다른 사람들이 긴 여정 을 함께 하다 보면,더러는 삶과 죽음, 문명 과 자연, 인생과 문학의 틈새를 만납니다. 그 틈새를 세심하게 땜질하면서 생의 이정표가 될 처절하게 아름다운 책으로 태어나기 바랍니다. 이강현 93년 인니 삼성전자 주재원으로 나와 현재 삼성전 자 현지법인 부사장, 인니핸드폰협회, 인니전자협 회,인 니한인상공회의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 중

지 점프하러 올라가서.. 아랠 쳐다 보면 두려워 발이 떨어지질 않고,

그냥 다시 내려가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올라온 노력과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난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올라 가질 않는다. 서로 각자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과 마음의 양식을 나눌 수 있는 인작, 만남의 시간.. 아무리 바빠도 자신이 없어도 대롱 대롱 매달려서라도 따라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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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프로필 & 자축메시지 이연주 2016 한인니 인터넷문학상 최우수상 수상 (사)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15년간 활동하며 어린 이가 살아갈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일에 힘쓰고 있 다. 현재 자카르타 국립박물관도슨트 활동

말랐던 토론모임이었습니다. 토론하는 시간을 즐기는 제겐 1기 합

류가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매월 토요일 오전 정기모임, 하루에 3명씩 발제와 30분 토론...... 아,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짧은 시간에 소화 가능하도록 정리된 발제 글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았고, 토론으로 오 가는 대화도 흥미로웠습니다. 자카르타에서 시간이 더 풍요로워 졌습니다. 조연숙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관심이 많음.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지만 의미 있는 모임이길. 삶에 대한 넓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가길. 오가는 이야기들이 흘러가지 않고 다듬 어져서 글이 되길. 이런 지향이 모인 지점 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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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영 Here & Now에 살고 있는 좋은 사람 마음공작소 <manzizak> 운영자

자카르타경제신문 편집실장

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것을 나 누며 다름을 기꺼이 즐기는 모임이

라기에 모자란 나임에도 불구하고 염치 없이 인작에 발을 들임. 인도네시아 인문 창작 모임에 축배를!!

채인숙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를 씁니다. 인도네시아의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 을 연재합니다. TV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합니다.

영혼의 화수분, 니체는 "춤추는 별 을 낳기 위해서 너는 네 안에 혼돈

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우 리 모두가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 과 자연과 예술에 대하여 기꺼운 사유를 멈추지 않으며, 품격있고 명랑한 인문창 작클럽을 만들어 나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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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프로필 & 자축메시지 최우호 2015 한인니 인터넷문학상 입상 현재 자카르타 소재 런던스쿨에 재학 중

음 인작회원으로 제안을 받았을 때 좋 은 분들과 계속 교류하며 글을 쓸 수

있다는 기쁨과 설렘이 아직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회원들 모두가 각자 다양한 분야 에서 서로의 삶의 모습이 다르고 바쁘지만 문학을 사랑하고 인도네시아를 사랑하는 한마음으로 모여 이렇게 뜻있는 자리를 가 질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앞으 로도 인작이 인도네시아의 한국 교민들에 게 작게나마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는 아름 다운 모임으로 번창하길 기대합니다.

최장오 통신사업 / 천연가죽, 파이톤스킨 취미생활로 시와 산문을 쓰며 힐링하고 있다.

을 가다 보면 한 가지 수종으로 잘 정리된 가로수를 자주 만나게 된

다, 포플러 은행나무 야자수 등…… 간혹 한 가지가 아닌 여러가지가 함께한 가로수 길도 만난다, 빈따로 마호가니 미 모사나무가 섞인…… 인작,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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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작의 발자취

1차 모임(창립모임) 2017. 1. 11. 수. 16:00. 한인니문화연구원 - 모임의 성격 규정 창립회원 : 김순정 김현미 김현숙 노경래 박상훈 박정자 배동선 사공경 이강현 이연주 조연숙 조현영 채인숙 최우호 최장오 명칭 및 목적 : 본 모임의 명칭은 인문창작클럽으로 정하고 인작으로 약칭한다. 회원들은 다양 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개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재인도네시 아한인사회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자 한다 1기 운영진 : 회장 박정자, 수석부회장 박상훈, 부회장 조현영, 감사 채인숙, 편집위원장 조연숙

2차 모임(2월) 2017. 2. 25.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 운영규정 확정 박상훈 > 공유경제의 명과 암 채인숙 > 왜 써야하는가, 왜 읽어야하는가-그것이 혁명이기 때문이다

3차 모임(3월) 2017. 3. 11.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조연숙 > 인도네시아에서 공존을 위한 견제와 설득 조현영 > 조해리의 창 박정자 > 이 한 권의 책 - 춤추는 사내, 조르바

4차 모임(4월) 2017. 4. 8.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 편집 논의 시작 배동선 > 뻴렛주술 이연주 > 100만 번 산 고양이 최우호 > 신조어

5차 모임(5월) 2017. 5. 13.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 1기를 1년으로 변경 이강현 > 4차산업 최장오 > 김훈 소설, 남한산성 노경래 > 북부말루꾸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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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모임(6월) 2017. 6. 3.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 모임 전반 정리 - 노경래 회원의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 출판 기념 김현숙 > The Scarlet Ibis - James Hurst 단편 번역 김순정 > 책 다큐멘터리 - 이슈의 현장 속에 있는 책!

7차 모임(8월) 2017. 8. 12.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 자카르타경제신문과 데일리인도네시아에 회원 칼럼 연재 결정 김현미 > 집으로 들어온 인문학, 서윤영, 들녘

8차 모임(임시모임) 2017. 8. 29. 화. 17:00. 한인니문화연구원 – 창간호 명칭 공모 목적 > 창간호 원고 교정을 위한 모임

9차 모임(9월) 2017. 9. 9.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 잡지 프로필 사진 촬영 탐방 > 국립인도네시아박물관(도슨트 이연주 회원)

10차 모임(10월) 2017. 10. 14. 토. 10:00. 한인니문화연구원 – 창간호를 창간준비호로 수정, 명칭 - 읽고 쓰고 나누다 대화 - 나를 움직인 한 문장

11차 모임(11월) 2017. 11. 18. 토. 10:00. 노경래 회원 댁 - 함께 영화보기 영화 > 웨이킹 라이프(Waking Life), 리처드 링클레이터, 2001. - 전미비평가협회상 실험영화상

12차 모임(12월) 2017. 12. 9. 토. 11:00. 출판기념과 송년행사

인작의 발자취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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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상훈 님의 명복을 빕니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의 창립 멤버였던 ‘고 박상훈’ 님의 명복을 빌며, 저희와 함께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셨던 뜻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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