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나는 나의 페이지다

Page 1

PAGE 나 는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 3호

나 의

페 이 지 다


36 노경래

04

·별 볼 일 없으신가요? ·코코넛 나무를 다시 바라보며

인작, KBS 월드라디오 방송과 인터뷰 하다

08 김성석 ·길고 복잡했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의 성립 ·인도네시아의 경제적인 독립

16 김순정 ·재외동포들의글쓰기와책쓰기운동 ·조코위(Jokowi) 책을 통해 살펴본 ‘인도네시아 대선 출판 마케팅’

22 김의용 ·자카르타 스케치 ·인도네시아 건축설계사무소 풍경 ·Urban palimpsest : 문지르고 다시 겹쳐 쓴 도시, 자카르타

44 배동선 ·떠다니는 얼굴, 굴러다니는 머리통

30 김현숙 ·전철 안 도토리 ·유년의 봄 ·유년의 여름 ·아데니움, 그 사랑이야기 ·추석 채비

·연관검색 알고리즘 ·우리들의 시간

52 사공경 ·세월을 넘어선 아름다움, Pantjoran Tea House 그리고 글로독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나무, 브링인(Beringin)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 3호

PAGE -나는 나의 페이지다 발행일 l 2019년 12월 15일 펴낸곳 l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기획 l 채인숙, 조연숙, 조현영, 김순정 글 l 김성석, 김순정, 김의용, 김현숙, 노경래, 배동선, 사공 경, 이강현(회장), 이동균, 이혜자, 조연숙, 조은아, 조현영, 채인숙, 최장오 사진 l 조현영 외 표지 그림 · 편집디자인 l 김영민 ©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하며, 이 책의 전부 또는 일부 내용을 사용하려면 반드 시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02


82 조연숙 ·인연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아침산책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참는 사람

62 이강현

88 조은아 ·내 삶의 풍경 ·위기의 인간

·라마단 ·Sabar

104 채인숙 ·무슬림 여성으로서 글쓰기 ·디카시(Dica詩) 쓰고 놀자!

112 최장오

·아버지

·고향집 ·나무 별

70 이동균 ·비워주는 마음 ·내일 ·캄보자 꽃

76 이혜자

·마호가니의 꿈 ·브로모 ·주홍글씨

96 조현영 ·뒷담화

118 2019 '인작' 활동

·숨바꼭질 ·인생은 타이밍 ·답답한 속내

·미세먼지에 대처하는 생활 속 건강관리 및 예방법 ·글로벌 매너 ·"이 세상에 좋아할 것이 이렇게 많다는게 너무 근사하지 않나요"

03


인작, KBS 월드라디오 방송과 인터뷰 하다

○ 프로그램 : KBS 월드라디오 <한민족네트워크> ○ 인터뷰 일시 : 2019년 1월 14일(월) 오전 10시(한국 시각) ○ 방송일 : 2019년 1월 15일 ○ 인터뷰 : 이강현 / 인작 회장

▶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을

▶웹진을 저도 온라인으로 다운받아서 잠시 살펴봤

소개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

는데... 분량이 무려 200쪽 넘어...웹진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목도 인상적인데 “우리가 꽃이었

해외에서 여러 단체가 있지만 그

구나” 어떤 의미인가요?

것도 문학 단체인 이런 인문학 클 럽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최근

저희 회원들이 인도네시아 현지 한인 신문사 두 곳에 돌

아주 두꺼운 웹진까지 발간하시

아가며 글을 연재합니다. 일년 동안 연재했던 글들과 개

어 깜짝 놀랐고 또한 출간을 축하

인적으로 작업한 글들을 모으다 보니 분량이 꽤 많이 묶

드립니다. 1호가 나오고 얼마만인

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웹진은 전적으로 편집부에서 맡아

가요, 2호가 나온 게?

제작합니다. 누구도 편집부의 제작 방향과 편집 의도에 간섭하지 않고 완전히 자율권을 줍니다. “우리가 꽃이었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04

2017년 12월에 웹진 1호-읽고 나누고

구나”라는 2호 제목은 2기 편집장인 채인숙 시인이 지었

쓰다를 발간했고, 다시 일년만에 웹진

습니다. 채인숙 시인이 웹진의 원고들을 교정하다가, 문

2호 ‘우리가 꽃이었구나’를 발간했습

득 인작이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서 자기만의 색깔이 가

니다. 앞으로도 일년에 한권씩 발간한

장 뚜렷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는 계획입니다.

고 합니다. 그리고 회원들 모두가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꽃으로 다양하게 피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번개처럼 제목이

▶함께 하는 회원들은 어떤 분들

떠올랐다고 하더군요.

입니까?

▶평범한 글쓰기 모임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인

인작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기존의 문

작’은 어떤 모임입니까?

학단체들이 창작활동보다는 관변 단 체처럼 변하는데 아쉬움을 품었던 몇

인도네시아에는 한국에서 가까운 동남아 국가 중 베트남, 필리핀처

몇 사람들이 모여서, 소란스럽지 않게

럼 한국분들이 많이 계시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사업에 기반을 탄탄

공부하고 자기 글을 쓰는 모임을 만들

히 일구시고 인니를 너무나 사랑하는 3만여 명의 교민이 계시고 한

자는데 뜻을 모아 시작되었습니다.

인회를 포함 여러 문화 단체가 있습니다. 저희 인작은 대외적인 활

지금은 19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

동을 하는 단체로서가 아닌 구성원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기꺼이

는데, 저처럼 직장인도 있고, 사업가도

즐겁게 배우면서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거창한 목적이나 방향을 가

계시고,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학생들

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자칫 한쪽으로 지우

을 가르치면서 건축 설계를 하시는 교

치기 쉬운 사고의 영역들을 넓히고, 진짜 자기 글을 쓰면서 스스로

수님,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원장님, 언

사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자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해외에서는

론사 편집장이 두 분이나 계시고, 출판

이런 모임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모임이 꾸준히 유지되기도 쉽지

사 대표, 시인, 학생, 푸드 스타일리스

않은데, 다행히 저희 회원들은 뜻과 마음이 잘 맞았고 서로 배려하

트 등등 굉장히 다양한 직업군이 모여

면서 행복하게 모임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인작은 인도네시아

있습니다. 이미 자기 책을 출간하신 분

인문창작클럽의 줄임말이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약자이면서

도 4명이나 됩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동시에 인니어로 발자취를 남긴다라는 단어인 hinjak이라는 단어에

다들 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자기 글을

h자 묵음을 뺀 injak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꾸준히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05 인터뷰


김현숙

김순정

김성석

김의용

이강현 노경래 배동선

사공 경

▶해마다 웹진 발간하는 성과를

과 인도네시아 3대 미인 출신 지역과 실체에 대해서 발표를 했습니

내려면 회원들도 부지런히 공부

다. 정말 각자 너무 다르지만, 우리는 그 다름을 인정하고 늘 즐겁게

하고 사색을 해야겠네요? 예를

배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이 우리 인작의 회칙 1번입니

들면, 한달에 한번 모여서 토론회

다. 우리는 서로가 다름을 즐겁게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를 한다거나 그러나요? ▶직접 책으로 출간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웹진 형태를 고수 말씀드렸다시피 인작 회원들은 너무

하는 이유는?

나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06

각자가 전문 분야가 있고 관심 분야도

원래 처음에 책으로 출간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기엔 아직 우리

다릅니다. 매월 돌아가면서 주제 발표

의 실력이나 책의 내용이 원하는 만큼의 퀄리티에 도달하지 못했다

를 하는데, 정말 다양한 내용이 등장

고 스스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용을 줄이면서 전파력이 좋

합니다.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발

은 웹진으로 만들었고, 1호때는 회원들 수만큼 딱 한권씩만 인쇄를

표하는 경우도 있고, 인도네시아 주술

해서 기념으로 나눠 가졌습니다. 그런데 웹진의 반응이 너무 좋아

에 대해서 발표하는 회원, 페미니즘에

서 놀랐고, 올해는 인터넷 사용이 여의치 않은 분들도 볼 수 있도록

대해서 발표하는 회원, 명품 가방의

100권만 인쇄해서 주변에 나눠 드렸습니다. 아마 해외 동포사회에

역사에 대해서 발표하는 회원, 인도네

서 만드는 웹진은 처음인 듯 합니다. 해외에서 만든 책들이 한인 사

시아 건축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

회 내부에서만 지엽적으로 읽히고 마는 경우가 많은데, 웹진은 세

는 회원, 의사였던 회원은 체질의학에

계 어느 곳에서나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전파력이 확실히 뛰어납

대해서 발표하기도 하고, 박제가에 대

니다. 이런 덕분에 라디오 출연도 하게 됐구요. 그리고 인작 회원 중

해서 연구해서 발표하신 분도 계시고,

에는 한국에서 오랫 동안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분도 있어서, 앞

시인인 분은 연애시 낭독회를 열기도

으로 더 엄격하게 글의 내용과 수준을 올린 후에 책을 출간하자는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4차 산업혁명

의견도 나누는 중입니다.


이동균

조은아 조연숙

최장오 채인숙

이혜자 조현영

▶이강현 회장님은 인작활동 하면서 어떤 걸 많이 느끼세요?

▶‘인작’ 곧 3기 체제가 시작된다 고요? 올해는 어떤 계획, 목표를

전 대기업 생활만 28년째(인니만 20년) 하고 있어 한정된 울타리

갖고 있습니까?

에서만 생활하고 있는 거죠. 다양한 직업과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 을 만나 배우고 듣고 토론하는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고 또한 우

올해는 3명의 신입회원이 들어 왔습

리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더 연구하고 사랑하며 한국과

니다. 신입회원은 내부 추천을 통해서

제2에 조국인 인도네시아 두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

선발합니다. 될 수 있는대로 조용히

엇이 있는가를 고민해 보게 됩니다.

모임을 이끌어 나가려 하고 딱히 홍보 활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회원의 수보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인도네시아에 화산분화, 지진, 지진

다는 모임의 질을 높이는데 더 중점을

해일 등 대형 자연재난이 잇따라서 안타까운데요 어떠세요?

두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 럼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고 배우며

네 작년에는 정말 인도네시아에 수많은 재해가 발생해서 우리 모두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너무나 가슴 먹먹하고 슬픈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정부 발표에 의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

하면 2018년 작년 한 해에 인니에 발생한 재해는 2천 5백건이며 공

니다.

식 집계된 사망자만 4천231명 입니다. 빨루 지진 때 한 마을이 그대 로 쓰나미에 잠겨 3천명에 마을 주민이 파묻혀져 실종 신고도 못한 사망자들은 빠진 집계이구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 한 인 동포도 많은 지원 활동을 하고 있고 올해 한해는 이런 재해가 다 시 찾아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07 인터뷰



김성석

Kim Sung Suk 첫 문장을 어떻게 써 내려가면 좋을까? 에세이를 주로 써야 했던 대학 시절 내내 나를괴롭히던문제였다. 사실을나열하는데도조직화하고 형식을부여하려니당황스럽다. 하물며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랴. 경험을 쭉 늘어놓을 수 있으면 좋은데 자신이 없어 자꾸 뒤로 미루게 된다. 그러다 선택한 사실만을 재구성한 몇 줄의 글, 이 또한 여전히 낯설다. 말과 글의 차이일까? 가끔은 덜 엄격한 말이 쉬워 보인다. 그렇다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를 표현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을 만큼 어렵고 당황스럽다. 그래도 말은 침묵을 택할 선택지가 있다. 물론 오해당하기도 하고 또 무능력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하지만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글자를 배우는 아이의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적어보지만 지우고 또 다시 지우게 되는 것은 왜일까? 원고지가 아닌 컴퓨터로 칠 수 있는 것 참 감사한 일이다 나 같은 초보에게는 더욱더.

김성석 / Kim Sung Suk 까라와찌에 위치한 UPH(Universitas Pelita Harapan)에서 투자관련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다.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의 삶과 가치관에 관심이 많다. 인도네시아 기업집단의 소유지배 구조와 기업가치의 관계, 인도네시아 기업집 단과 비기업집단 기업들의 현금보유와 가치 등 여러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기업의 소유지배 구조와 행동재무 등의 주제에 관심이 많다.


신 / 영복

떨리는 지남철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고 복잡했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의 성립 / 김성석

1949년 12월 27일 인도네시아 연방 공화국(Republik Indonesia Serikt, RIS)이 시작되었을 때, 이 연방 공화국에서는 루피아라

는 이름을 동일하게 사용하지만 발행국이 다른 여러 가지 루 피아가 거래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중앙은행인 BNI(Bank Negara Indonesia)가 발행한 루피아(Oeang Republik Indonesia,ORI),

NICA(Nedelandsche Indische Civil Administrative)의 중앙은행인 자바 은행(De Javashe Bank)이 1942년 이전에 발행한 화폐와 독립 전쟁 기간(1945-1949)에 발행한 새로운 화폐(루피아/굴덴), 그리고 일본 의 인도네시아 지배(1942-1945) 기간에 중앙은행이었던 Nanpo Kaihatsu Ginko가 발행한 화폐(일본 루피아) 등이 그것이다. 더 나 아가 인도네시아는 1953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중앙은행인 Bank Indonesia를 구성한다. 왜 인도네시아 연방 공화국은 여러가지 화폐를 인정하면서 시 작해야 했을까? 또 3년이 넘는 기간을 중앙은행을 만들기 위해 서 기다려야 했을까? 중앙은행을 만들면서 그들이 가장 고민했 던 것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네덜란드와 일본 지배 시기의 중앙은행 (1922-1945) 인도네시아의 현대적 의미의 중앙은행은 1818년 자바은행(De Javasche Bank)의 설립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과의 경

쟁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자바 은행은 국립 은행이 아니었지만, 네덜란드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고 민간기업 De Nederlandshe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0


Handel Maatschappy이 합작한 형태

아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NICA 정부

격으로 수입한 물건들을 낮은 가격에

였다. 발권 은행에 더하여 상업 은행

를 구성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에 두

팔아야 하는 불합리함으로 인해 싱가

의 역할을 하던 자바 은행은 1922년

개의 정부가 있게 된 것이다. NICA

폴과의 밀무역이 발생하기도 한다. 통

에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한 발권 은행

정부는 1945년 10월 10일 자바은행

제 가격 정책은 초기에 의복에 관련해

의 권한을 부여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으로 하여금 다시 중앙은행의 역할을

시행되었지만 확대되어 쌀에도 적용

사기업으로 출발한 자바 은행은 이

하게 한다. NICA 정부는 네덜란드에

하였다. 결국 강제적인 가격 통제 정

사, 은행장 등의 임명 영업 활동 등에

서 굴덴의 평가 절하를 따라 인도네

책으로 자바은행은 통화 가치를 성공

있어서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된다. 인

시아에서 통용되던 굴덴을 1949년 9

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힌디아 블

월에 29.1% 평가 절하한다. 그리고

란다 정부는 통화 정책을 통해 인도 네시아 지역의 통화와 네덜란드 통화 간의 1:1 환율을 유지하였다. 당시 인도네시아에 있던 대부분의 네덜란드 기업가들은 수익을 네덜란 드로 송금하거나 네덜란드에서 거래 하였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내의 자본 시장의 발달은 미미했다. 유동성이 필요한 경우도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 고는 자바은행이 아닌 네덜란드에서 전자상거래로 거래되고 있는 ORI 100루피아 지폐

자금을 조달하기를 선호했다. 이로 인해 자바은행의 환율 체계는 1930 년대의 대공항과 2차 세계 대전 시기 를 제외하고는 안정적일 수 있었다. 자바은행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최 종 대출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일종의 일반 은행으로서 자바은행은 다른 상업 은행보다 두각을 나타내지 는 못했다. 그러나 낮은 이자율을 적용 하는 차별로 유럽과 중국 기업들이 선 호하였다. 상업적 이익에 관심을 둔 거 래들로 인해서 자바은행은 중앙은행 의 자세를 가진 관계자들을 양성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이 은행에서 근무했 던 네덜란드 사람 중 중앙은행에서 근 무한 경력을 가진 자는 전무했다.

두 개의 나라, 두 개의 중앙은행 (1945-1949) 일본의 일방적인 항복 이후 인도 네시아는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 러나 연합국의 일부로서 인도네시아 로 돌아온 네델란드인들은 인도네시

자바은행은 일본 점령기 중앙은행 역

반면 인도네시아 정부는 독립준

할을 하던 Nanpo Kaihatsu Ginko을

비위원회가 기초한 임시 헌법에 따

인수하여 NICA가 점령한 지역을 중

라 1945년 10월 19일 인도네시아 은

심으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행 법인을 설립하고, 인도네시아 은

네덜란드의 1차 공세가 끝난 후에 는 1947년 7월 21일 빨렘방, 찌레본, 말랑과 빠당에 지점을 열게 되고, 네 덜란드의 2차 공세에 성공한 이후에 는1948년 12월 19일 족자와 솔로, 꺼 디리 지역까지 지점을 넓혀 가게 된 다. 그러나 족자 지점은 외교적인 협 상의 결과 1949년 6월 29일에 문을 닫게 된다.

행(Bank Indonesia)이라는 이름의 중앙 은행을 설립하는 준비를 시작한다. 얼마 후 Bank Negara Indonesia(BNI) 가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려는 목적으 로 만들어지게 된다. 인도네시아 정 부는 1946년 10월 30일에 ORI(Oeang Republik Indonesia)라 불리는 인도네시

아 화폐 ‘루피아’를 금본위제로 발행 하게 된다. ORI 루피아는 일본 화폐 인 루피아와 교환될 수 있도록 자바

발권 은행으로서 역할을 맡은 자

와 자바 외 지역에서 다른 비율로 책

바은행은 1948년에 이르러 일본 지배

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이전에 통용되던 힌디아 블란다의 굴

통치 지역에서 NICA 통화와 일본 화

덴/루피아와 새로 발행된 굴덴/루피

폐 사용을 금지하게 된다. 당시 인도

아에 합법적인 통화의 지위를 부여한

네시아 실효 지배 지역에서 ORI 루피

다. 통화량 공급을 책임졌던 자바은행

아에 기초한 최고 가격제 등이 실행

은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가격을 강력

되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1948년

하게 통제하였다. 이로 인해 높은 가

에는 생필품의 가격이 250-260%에

11 김성석


이르는 높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더 나아가 전쟁 상황은 ORI 루피아 의 지속적인 상용화를 방해하는 요소 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각 지방 정부에 ORIDA라 불리는 지방 화폐를 발행할 수 있게 하고 ORI와 교환을 해 주었다. 그러나 앞의 법령에는 BNI를 명확히 중앙은행으로 명시되지 않았 고, 몇가지 중앙은행으로서의 의무가 부과된 BNI는 이에 따라 업무를 수행 하는 한계점을 노출하게 된다.

자바은행은 발권 은행이지만 네덜

룰 수 있게 되면 효과적이라는 논점

란드 소유의 사기업이었기에 여러가

이다. 그 타협의 결과로 정부와 중앙

지 면에서 인도네시아의 중앙은행으

정부의 정책 불일치를 다룰 수 있는

로서 역할을 행하기에는 부적합한 면

재무부 장관을 의장으로 하고 중앙은

이 많았다. 1950년 주권이 인도네시

행장이 위원이 되는 5인의 금융통화

아에 이양된 후에도 자바은행은 네덜

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란드에 의존하는 통화 정책을 고수했 다. 자바은행장은 여전히 인도네시아 에 많이 있는 네덜란드 은행의 자유로 운 신용을 보장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의 통화 시스템을 주장하게 된다. 이 로 인해 새롭게 성립된 초기 인도네시 아 정부 통화 정책은 정부의 무간섭을

1949년에 이르러 양국 간의 원

근간으로 하여 자바은행, 곧 네덜란드

탁 회의에서 인도네시아 (Republik

의 사적인 한 은행에 의해 좌우되는

Indonesia, RI)가 독립을 얻게 되는데,

결과에 이르게 된다. 또한 자바은행이

이 때 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 연방

추구하는 네덜란드에 종속되는 통화

공화국(Republik Indonesia Serikat, RIS)

정책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입장에서

의 일부로서 주권을 인정받았다. 경

점점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제 문제를 다룬 19조에 따르면 인도 네시아 연방 공화국은 네덜란드 정부 에 43억 굴덴의 빚을 지게 되는데, 이 채무를 변제하기까지 화폐와 발권 은 행의 변화에 대해 협의하도록 규정하 고 있다. 다시 말하면 NICA의 중앙은 행 역할을 했던 자바은행이 인도네시 아 연합 공화국의 발권 은행의 역할 을 하는 공식적인 중앙은행으로 규정 된 것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의 발 권 은행이었던 BNI는 이후 중앙은행 이 아닌 일반 상업 은행의 길을 걷게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1951년 6월 19일에 자바은행 의 국유화를 결정하게 되고, 소유권 의 99.4%를 네덜란드의 주식 시장에 서 시가의 120%로 구입함으로써 자 바은행은 국유화된다. 이후 인도네시 아 중앙은행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고 2년 여 간의 준비를 통해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을 역할을 감당 하는 인도네시아 은행(Bank Indonesia) 이 만들어지게 된다.

행으로서 일반 은행과 같은 대출 업 무를 관장할 것이냐의 여부였다. 그 들의 고민은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은 일반적인 은행의 은행으로서의 업무 만을 취급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발달된 금융 시장의 상황과 대부분 의 인도네시아의 금융 기관이 해외로 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로 인해 BRI(Bank Rakyat Indonesia), BNI(Bank Negara Indonesia),

BIN(Bank Industri Indonesia) 등 상업 은 행이 있었지만 이들을 통해 경제 성 장에 필요한 대출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초기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1953년 7월1일에 성립되지만, 알리 와르다나(1964)는 그 역할에 있어서 여전히 자바은행과 많이 다르지 않았 다고 평가한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법 7조에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는 자 바은행이 가진 권한보다 확장된 중 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없었다. 중앙은행법 7조에는 새롭게 추가된

된다. 그러나 1950년 8월 15일에 인

새로운 중앙은행을 만들고자 한

중앙은행의 기능 곧 통화 가치의 안

도네시아 연방 공화국은 해체하고 현

이들이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어떤

정, 국내외의 입출금 시스템의 구축,

재 인도네시아 전지역을 포괄하는 인

것이었을까? 샤프루딘 쁘라위라느

금융 산업에 대한 감독 등이 있다.

도네시아 공화국을 설립하게 된 이후

가라(1951)에 따르면 핵심 논점은 정

에도, 자바은행(DJB)은 여전히 발권

부와 중앙은행의 관계였다. 정부의

은행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게 된다.

통제 아래 둘 것인지 독립성을 부여

발권 은행을 바꾸고 중앙은행을 만들

할 것이지의 여부가 핵심 논점이었

기 위해서는 헌법에 따른 법률이 먼

다. 독립성을 부여할 때 중앙은행으

저 만들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로서 정치적인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많은 이

인도네시아 중앙은행(Bank Indonesia)이 만들어지기까지 (1950-1953)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2

또 다른 하나의 논점은 은행의 은

들을 고민하게 했던 것은 당시 인도 네시아가 저개발 국가였기에 정부에 서 경제 성장을 위해 모든 정책을 다

살펴본 것처럼 인도네시아는 네덜 란드의 오랜 지배, 1942년부터 시작 된 일본의 지배, 연이은 4년 간의 네 덜란드와의 독립 전쟁은 짧은 시간의 지배 세력 교체를 통한 독립을 이루 게 된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일어났 던 급격한 정치적인 변화를 따라가기 엔 일반 국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 관된 화폐의 변화, 경제 시스템의 변


화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참고도서

이다. 이런 변화를 체제로 만들어 내

Ali Wardana, (2007), The Indonesian Banking System: The Central Bank in The Economy of Indonesia ed. by Bruce Glassbuner, Equinox Publishing Pte Ltd.

는 진통이 필요하였기에, 여러가지의 통화를 교환 수단으로써 인정하고, 인도네시아의 상황에 적합한 중앙은 행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오랜 시간의 숙고와 토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제적인 독립 / 김성석

Sjafruddin Prawiranegara, (2005) Nasionalisasi De Javasche Bank, in Pemikiran dan Permasalahan Ekonomi di Indonesia dalam Setengah Abad Terakhir 1 (1945-1959), ed, by Hadi Soesastro et al., Penerbit Kanisius

Sumitro Djojohadikusumo, (2005) Kedudukan Bank Negara, in Pemikiran dan Permasalahan Ekonomi di Indonesia dalam Setengah Abad Terakhir 1 (1945-1959), ed, by Hadi Soesastro et al., Penerbit Kanisius. History of Bank Indonesia from https:// www.bi.go.id/id/tentang-bi/museum/ sejarah-bi/pra-bi/Pages/prasejarahbi_1. aspx to https://www.bi.go.id/id/tentangbi/museum/sejarah-bi/pra-bi/Pages/ prasejarahbi_8.aspx

1949년 12월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는 16개로 구성된 연방 인도네시 아 공화국의 일원으로써 인도네시아공화국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게 됩니 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적 독립은 어떤 의미에서 경제적 독립의 완성이 아닌 시작이었습니다. 긴 네덜란드의 식민 통지가 인도네시아 경 제에 남겨 것들은 그만큼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독립을 이룬 인도네시아인들은 오랜 시간에 그런 과거 식민지 경제 체제를 벗어나 그들이 원하였던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 나가게 됩니 다. 이 글에서는 독립 후 1957년까지 ‘의회 민주주의’ 시기의 인도네시아 정부의 정책들과 ‘교도 민주주의’ 초기에 이루어진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외국 민간 자본에 대한 몰수 과정까지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인도네시아 경제의 주체로서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I. 독립 초기의 경제적 상황 1942년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 이전 농업 부문을 제외한 산업은 19% 만이 인도네시아인 소유였고 52%는 네덜란드인의 소유였습니다. 실질적 인 인도네시아공화국의 통치가 시작된 2년 후인 1952년에도 여전히 50% 의 소비재 수입이 5개의 네덜란드 민간 회사에 의해 주도되었고, 60%의 수출이 8개의 외국 회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중 4개는 네덜란드 회사 였습니다.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은행들은 네덜란드 기업의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7개의 외국계 은행이 민간은행을 주도하였는데 그 중 3개는 네덜란드인의 소유였습니다(Glassburner, 2007). 1953년에 이르면 수마트라와 자바의 농업과 관련된 토지에 대한 70%까지 외국인 소유가 다시 증가하게 됩니다(Robison, 2008). 어떻게 정치적인 독립을 하였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는 인도네시아의 독립 과정에서 이루어진 네덜란드 정 부와의 협상에서 그 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49년 가을 독립 전쟁 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의 독립에 대한 원탁회의를 하고, 연방 인도네시아 정부의 하나인 인도네시 아 공화국으로서 독립하는 것에 합의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하 지만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여전히 인도네시아 연방이 자신들의 이익을 반 영하는 곳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한 네덜란드인들의 모습은

13 김성석


원탁회의 결과인 합의문에 잘 드러납

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

은행은 정부 정책을 실행할 뿐이었습

니다.

신과 일치하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체

니다. 그래서 정부의 경제 정책을 종

제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속된 통화 정책을 통해 실행하는 기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몇 가지

이러한 이상은 네덜란드에서 교육

법적으로 주어진 모든 권리와 허가에

받은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건전

대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정하는

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시도되어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권리

집니다. 당시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

‘인도네시아화’를 위해 1950년대

와 허가에 대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주의란 외국 자본의 ‘인도네시아화’

에 판매가 쉬운 상품에 대한 수입허

공공의 이익에 반할 때에만 권리와

와 협동 노동을 강조하는 ‘전체주의’

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만 주어지

허가를 가진 자와의 우호적인 협상

적 경제구조를 의미했습니다(Mackie,

는 ‘장벽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을 통해서 해결하도록 명시되었습니

2007). 첫 4번의 내각에서 경제학자

이 정책은 한국 주식 시장의 ‘검은 머

다. 만일 상호 합의에 결과를 도출할

로서 훈련받은 인물은 무하마드 하따

리 한국인’처럼 중국인들이 인도네

수 없을 때에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와 수미트로 조요하디꾸수모 둘이었

시아인들을 바지 사장(Ali-Baba)으로

단지 공공의 이익에 반할 때만 국유

지만 경제적인 이념은 샤프루딘 쁘

내세우는 등으로 인해 문제점을 노출

화, 청산 등을 행할 수 있도록 명시하

라위라느가라, 주안다 까르따위자야

하였습니다(Feith, 1962). 그러나 인도

고 있습니다(Kahin, 1980). 이런 독립

, 유숩 위비소노 등 몇몇에 의해 주도

네시아인 기업인들에 큰 희망이 되었

과정에서의 약속은 이후에 인도네시

됩니다. 그중 사프루딘은 누구보다도

습니다. 또한 정부는 은행을 통해 수

아가 독립한 이후에도 식민지 시기에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필요한 협상

출입과 관련하여 인도네시아 기업인

이루어진 극단적인 외국 자본에 의해

을 이끌어 내려 했던 반면, 수미트로

들에게 대출을 더 유리하게 할 수 있

지배되는 형태의 지속성을 보장해 준

는 그런 의도가 가장 적었던 자로 가

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1956년에 강

것입니다.

장 큰 변화를 원하는 자로 볼 수 있습

력하게 추진된 이 정책은 개인 기업

니다. 기본적으로 경제 정책을 이끌

이 아닌 공기업이 더 많은 혜택을 누

었던 그들은 명목상 사회주의자였지

리게 되는 등 별 성과를 이루어 내지

만 실용주의자였고 체제를 만드는 일

는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II. 경제적 체제의 변화를 위한 여러가지 시도들 (1950-1997)

립은 이후 경제 정책의 변화에 영향 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을 이끌어 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중소

이런 상황은 당시 중도적인 정치

어떤 내각도 경제의 구조를 바꿀 수

기업 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지도자라 하더라도 경제적인 면에서

있는 프로그램을 실행하지는 않았습

사용하였지만 이런 정책은 전체 경제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아직 이루어지

니다. 4차 내각이었던 윌로포 내각 이

구조에 있어서 그들이 원하던 근본적

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였습니다. 당연

후에는 어떤 내각에서도 경제 체제를

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였습니다.

하게 그들은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동의와 점

그들은 네덜란드와 중국인에 의해 주

성공적인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자들

진적인 시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도되는 체제에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

은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

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

못하였고 수입 의존도를 낮추는 정도

격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닙니다. 1957년의 교도 민주주의로

에 그치게 됩니다.

사회주의 성격이 강했던 많은 정치 지

의 정치적인 변혁이 이루어지기까지

도자들에게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외

7번의 내각이 바뀌면서 수많은 시도

자 주도와 민간 주도는 인도네시아 경

가 이루어졌습니다.

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 해소되어야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4

관으로서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의 성

를 보자면 네덜란드 정부 하에서 합

7번에 걸친 내각의 변화에도 지 속적으로 내각에 참여했던 마슈미, PNI(국민당), PSI(사회당)은 강한 반네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1953년 네

덜란드와 반자본주의라는 국민 정서

운동 시기에 족자카르타와 게릴라 전

덜란드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던 민간

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

쟁을 치르면서 형성된 이상주의가 네

은행을 인수하여 인도네시아 중앙은

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식민 지배

덜란드와 협의되어 이루어진 자카르

행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통

체제의 이익을 여전히 누리고 있던

타 정부에서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

화 정책을 결정하는 자는 인도네시아

네덜란드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없애

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가 만들어 놓

중앙은행 총장이 아닌 재무부 장관

기 위한 지속적이고 명백한 정책이

은 식민 경제 시스템에서 이들에게 이

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도네시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사회주


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해에 대한 단절을 의미합니다(Makie, 2007). 동시에 이는 인도네시아 경제 정책 의 사회주의적 접근, 정부 간섭의 심 화를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외국 민간 자본에 대한 철저한 단절이 아니라, 착취적인 외국 자본의 성격을 좀 더 유순한 자본으로 성격을 바꾼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소유권의 이전으로만 평가하여 본다면 독립 초기 인도네시아 경제 바타비아의 자바은행, 현재 중앙은행 박물관(구글이미지)

는 오랜 식민지 경제체제인 외국 민 간 자본 중심이었습니다. 실패를 거

의적인 방향으로의 급진적인 전환 또

전 계획 없이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

듭하고 경제 주도층의 근본적인 변화

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속에서 수까르노가 제시한 국가자본

를 일으키지는 못하였지만 ‘의회 민

왜 민족주의자이면서 사회주의자들

주의와 경제적 민족주의의 이념 아

주주의’ 시기의 정책들은 인도네시

인 이 시기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변

래 네덜란드 민간 자산에 대한 몰수

아인들의 경제적 입지를 세워주는 역

화를 이끌어내지 못하였을까? 부분

가 갑자기 시행되었습니다(Robinson,

할을 일정 정도 감당하였습니다. 그

적으로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네

2008). 1년 후에 국회에 의해 이러한

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였던 인도네

덜란드 소유 회사를 국유화할 자본이

네덜란드 민간 자본에 대한 몰수는

시아 정부는 몰수라는 급진적인 방식

부족하였고 운영할 만한 인력이 없었

추인 되었습니다.

을 통해 소유권을 가져옵니다. 인도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실제 적으로 취한 정책들은 네덜란드라는 외국 자본과 함께 인도네시아 산업과 상업을 이끌 수 있는 인도네시아인들 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 다(Glassburner, 2007).

III. 급격한 민간 외국 자본에 대 한 몰수 (1957-1958)

외국 민간 자본에 대한 몰수의 결 과로 플랜테이션 생산의 90%, 무역 의 60%, 246개의 공장, 수많은 광 산, 은행, 해운과 다양한 서비스 산업 의 소유권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이 전되었습니다(Robinson, 2008). 몰수 된 해외 민간 자본들은 주로 국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네시아인들이 소유권을 갖게 된 것을 형식적인 경제적 독립이라고 본다면 이때에 이르러서야 경제적 독립이 이 루어진 것입니다. 외국 민간 자본에 대한 일방적인 몰수와 국유화는 비록 외국 자본과의 단절이 아니었지만 이 는 이후 인도네시아 경제 체제와 발 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50년대 동안 인도네시아 민간 기

경제 정책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

업인들은 국가 산업 경제의 기초를

참고도서

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도네

세우는데 충분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

시아 국내의 여러 정치적 상황 변화는

했고 또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정당들의 정치적인 기반을 점점 약화

군부가 민간에 분할하기보다는 공기

Feith, H. (1975). The decline of constitutional democracy in Indonesia. Cornell University Press.

시키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수까르노

업 형태로 두기를 더 선호했기 때문

의 정치적 부상과 하따와의 대립, 수

입니다.

마트라에서의 반란, 동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의 반란 등이 원인이 되어 계 엄을 선포하고, 1957년 3월에 교도 민 주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1957년 12월에 이르러 특별한 사

이러한 몰수는 외국 민간 자본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인도네시아 경 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 다. 해외 민간 투자 자본에 대한 국유 화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외 국 민간 투자가 인도네시아 경제 발전

Glassbuner, B., (2007) Economic policy making in Indonesia, 1950-1957, Eds by Glassbuner, B., in The Economy of Indonesia: Selected Readings, Equinox Publishing. 70-98. Kahin, G. M. (1995). Nasionalisme dan revolusi di Indonesia. UNS Press. Mackie, J.A.C., (2007) The Indonesian economy, 1950-1963, Eds by Glassbuner, B., in The Economy of Indonesia: Selected Readings, Equinox Publishing. 16-69.

15 김성석



김순정

Kim Soon Jung 인작을 통해서 또 다른 세상 공부를 합니다. 이 세상 공부는 유수한 대학의 학위가 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세상 공부는 그런 것입니다. ‘글 쓰는 것만이 살아있다는 것’. ‘글 쓰는 것만이 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삶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작은 그중 일부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김순정 / Kim Soon Jung 순정아이북스 출판사 대표. 한국에서 기자 생활 및 각종 잡지사 편집장을 역임했고 17년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한국의 각 분야의 리더들과 함께 자기계발서를 만들어왔다. 대표적인 기획 출판 도서로는 월드컵 기념 도서와 다문화 가정을 위한 KBS <러브 인 아 시아> 책을 비롯해 대한적십자사와 공동 출간한 <만 원의 희망밥상> 그 외에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 등이 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며 재외 동포를 위한 출판기획을 새롭게 준비 중이다. email: bestedu11@hanmail.net


박 / 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을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재외동포들의 글쓰기와 책 쓰기 운동 “한인 글로벌 콘텐츠 키우고 네트워크 만드는 글쓰기가 절실하다” / 김순정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40대에 접어든 리더와 직장인들 1,600여 명에게 물었다. “현재 하는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대학 시절 가장 도움이 된 수업은 무엇인 가?”라는 질문에 90% 이상이 “글쓰기”라고 대답하였다. 지금의 성공한 자신을 키운 건 ‘글쓰기 멘토링’ 이었다는 것 이다. 우리는‘하버드와 MIT 졸업생들의 고백’에 주목해야 한다. 글쓰기를 강조하는 것은 깊이 있게 사고하고 그런 인 재가 많을수록 사회가 발전하고 국가 경쟁력도 강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즘 필자가 해외에 거주하면서 항상 깊이 있게 생각하고 관심이 있는 분야가 있다면 단연 ‘재외동포의 해외에서의 독 서와 집필 여건’이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면서 놀란 점 하 나는 재외동포의 독서환경과 저작 활동이 너무 열악하다는 점이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 짐작 된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하 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네트워크망으로 연결되고 인터넷으 로 실시간 소통하며 개인과 국가, 기업이 국경을 넘어 경쟁하 는 글로벌 4,0시대이다. 지금 해외 거주 중인 재외동포가 글 로벌 시대에 한국의 큰 인프라이자 재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더는 외부 조건이 한계로 작용될 수 없다. 재외동 포 글쓰기와 저서 출간은 진정한 전 세계 글로벌 한인 커뮤 니티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든다. 특히 해외에서 경쟁력을 갖추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8


기 위해 좋은 글과 책은 시공간을 초

뀌어야 할 때이다. 그래서 나는 ‘재외

이제부터라도 단·장기적으로 ‘전

월해 강력한 경쟁력의 수단이다. 이

동포의 글쓰기와 책 쓰기 운동’은 ‘인

세계 재외동포의 글쓰기와 책 쓰기

제는 재외동포가 열악한 환경에 더욱

도네시아 한인사회’라는 작은 공동체

운동’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간과돼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를 넘어서 글로벌 시대에 경쟁력을 키

선택과 집중을 위해서도 우리는 다양한 나라의 재외동포 선배들의 경 험을 공유하고 스터디 해야 한다. 해 외 거주 한국인들은 잠재적 ‘코리안 리더스’들이며 국가의 소중한 자산 이다. 재외동포가 글쓰기와 책 쓰기 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기 위한 장려책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글쓰기는 우 리들(재외동포)의 사고를 유연하게 해 주어 정체되는 것을 막아주고, 순환 시켜주는 순기능의 역할을 함과 동시 에 해외 생활을 하면서 ‘한인 인적 네 트워크’가 적은 상황에서 자신의 가 장 안전한 멘토 역할을 수행해 준다고

또한 과거의 재외동포와 달리 지금

믿는다. 나는 한국인이 세계인들과 진

의 환경에서 문화적 욕구와 관심이 더

정한 소통의 길로 나아가려면 재외동

커졌기 때문에 지금의 독서환경과 글

포의 글쓰기와 책 출간이 소통 채널의

쓰기 그리고 책 출간 환경도 모두 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는다.

끝으로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글 을 쓰는 재외동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애국자이고 문서 외교관이다. 자신의 행적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 가치 있는 글쓰기, 목적이 있는 글쓰기 를 많이 하시길 바란다. 글쓰기와 책 쓰기의 결과를 배가시키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쓴 글과 책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성장시키 며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고 사람을 살린다. 아울러 개인과 국가의 예산 낭 비를 절감시킨다.”라고 말이다.

조코위(Jokowi) 책을 통해 살펴본 ‘인도네시아 대선 출판 마케팅’ 2019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슈의 현장 속에 있던 책들! / 김순정

보통 대선 때가 되면 서점가는 후

이미지 개선 등 자신의 이야기를 전

통령으로서 파격적인 정책을 펴왔기

보들의 책들로 북적댄다. 동남아시아

기적인 삶의 이야기로 옮긴다. 그리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아시아게임에

에서도 가장 낮은 독서율을 가지고 있

고 라이벌 간의 책 경쟁력은 더욱 치

서는 인도네시아 서민들의 발이 되

는 인도네시아도 서점가 분위기는 예

열하다.

어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해 많

외가 아니었다. 자카르타 주요 서점 의 에세이와 인물 코너에는 대선 후보 들의 책들이 진열되어 관심을 끌었다.

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

조코위 대통령의 출간 책을 보 고, 재선 성공을 예측하다

다. 그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500달러 정도인데 서민층의 복지 혜택을 늘렸고 특히 인도네시아의 문

특히 재선에 성공한 조코 위도도(Joko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조코

맹률을 떨어트리기 위해 재임 기간

위(Jokowi)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

에 매달 ‘책을 무료로 보내는 날’을

는 기염을 토했다. 조코위 대통령에 정치인 책을 출판할 때는 분명히

규정한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은 비

대해서 호감을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

독자적인 목적이 숨겨져 있다. 선거

용 때문에 제약을 받는 도서의 배송

은데 나 역시 그중에 1인이다. 그 이

를 대비해 후보들의 생각, 아이디어,

을 쉽게 하기 위한 배려 책이었다. 또

유는 그가 인도네시아의 첫 문민 대

Widodo, 일명 조코위)의 책은 베스트셀

러 코너에 진열되어 있었다.

19 김순정


한 혁신적인 국가 인프라 구축을 했

이번에도 유명 전기 작가를 통해 책

출판기념회 참석한 조코위 대통령

고 인도네시아 사상 최초의 지하철인

출간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코위

도 “인도네시아가 번영하기 위해서

MRT가 개통되었다. 그로인해 점차

측의 그녀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는

는 개발과정에서 괴로움은 있지만,

자카르타 시내에도 사람이 걸어 다닐

증거이자 평전 스타일의 책으로 주관

목표 달성을 위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수 있는 인도도 생겨났다. 이런 혁신

적인 입장이 아닌 제삼자를 통해서

나아가야 한다. 현 정부는 개발의 견

적인 행보로 그는 아시아 유력 잡지

객관적 평가와 신뢰를 확보하기 위

고성을 위해 1기의 중점 육성 분야가

의 표지 모델을 장식하는 등 매년 주

함이라고 분석된다. 이는 간접적으로

인프라 구축이었다면, 2기의 중점 육

요 아시아 언론사에서 선정하는 주목

조코위가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을 고

성 분야는 사람을 중심이며 그 일환

받은 아시아의 리더로 꼽힌다.

무시키길 원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으로 국가 건강보험의 가입자 확대와

HETA NEWS/iNews.ID News/detiknews 국 민과의 소통 전달을 강조했던 조코위 대통령 이 선거기간에 출간한 책. 대중을 향한 부드 러운 미소를 담은 표지가 인상적이다.

인도네시아 대선 기간 조코위 대통령에 대 한 2번째 책을 집필하여 출간한 저자 알베 르띠엔 엔다(Alberthiene Endah)는 인도네시 아에서 가장 유명한 전기 작가 중 한 명. 그 녀가 조코위에 관해 쓴 첫 번째 책 <Jokowi: Memimpin Kota Menyentuh Jakarta>.

<Jokowi Menuju Cahaya>의 주요 내

지방 의료 서비스 개선 그리고 급여

용은 조코위가 4년간 국가를 이끌기

시스템의 체계화를 통한 근로자 복지

위한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임기

개선, 근로자의 업무 역량 강화, 노동

4년 동안 조코위 대통령과 유수프 칼

자 인권 보호”를 강조했다. 출판기념

라(Jusuf Kalla)부통령의 성과와 개발 프

회 참석을 통해서 자신의 정책과 프

로그램에 대한 내용을 골자로 한다. 저

로그램을 발표함으로써 선거공약을

자는 이 책 속에서 조코위의 어린 시

강하게 어필한 셈이다.

2019년 인도네시아 대선 기간 출 판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대선주 자로 재선에 도전하는 조코위 대통 령과 그의 라이벌이자 경쟁 상대였던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는 예상대로 대선 대비용으로 책들을 쏟아냈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서점을 갔 을 때 눈에 띄었던 책이 조코위 대통 령 측에서 출간한 <Jokowi Menuju Cahaya: 조코위, 빛을 향하여: 국가를 이끌어가는 4년간의 투쟁>이다. 선거 기간 이 책은 인도네시아 주요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 있었다. 책을 집필한 알베르띠엔 엔다 (Alberthiene Endah)는 인도네시아에서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이다. 2018년 12월에 <Jokowi Menuju Cahaya>가 출간되면서 물리 아 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조코위 대통령은 물론이고 유수프 칼 라(Jusuf Kalla) 부통령과 많은 각료 장 관들과 참석한 것을 보면 이 ‘출판 기념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짐작게 한다. 출판 기념회는 조코위 의 사진전도 함께 진행되었다. 참고 로 이 책에 앞서서 알베르띠엔 엔다 가 조코위에 관련하여 쓴 첫 번째 책 은 2012년 11월에 출간된 <Jokowi: Memimpin Kota Menyentuh Jakarta> 이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20

절의 경험도 이야기 한다. 책에서 그녀 는 조코위가 국가 원수로서 얼마나 어 렵게 정부 정책을 이끌어 왔는지 그리

조코위 대통령의 대선용 책의 특

고 강한 인도네시아를 건설하기 위해

징은 본인이 직접 저술하기 보다는

서는 정의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조코위 대통령의 라이벌이자 경 쟁 상대였던 대통령 후보 2번이었던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는 인도네시아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


자 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 총재이

프라보워는 이번 대선 때에도 인

느낌을 담아 소통형 책을 충분히 표현

다(참고로 그의 전 부인은 수하르토 전 대

도네시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두

했다. 반면 프라보워 후보의 책은 군

통령의 딸이었다). 그는 선거 때마다 많

권의 책을 출간했다. 첫 번째 책은

출신의 느낌이 반영된 듯 공약 중심의

은 저서를 출간해온 이력을 가지고 있

<Paradoks Indonesia: 인도네시아의

권위적이고 혁명적인 느낌을 많이 강

다. 프라보워는 이미 인도네시아에서

역설>은 프라보워의 사고의 본질을 담

했다. 실제 프라보워의 책 제목이나 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그와 관련된 서

고 있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부의 누출

지 디자인의 느낌도 다소 딱딱하다.

적도 조코위보다 훨씬 많은 20권이나

에 대한 견해와 국가 예산 누출의 크

‘프라보워의 권위는 그가 자리를 잡지

된다. 그가 굉장한 집필력을 가졌음을

기에 대한 해결책을 담았다. 가난한 국

못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미

보여준다. 선거운동 중인 2019년 3월

민들의 상황과 국가 부의 모순을 사실

르 산토소(Amir Santoso) 정치평론가의

적으로 묘사하며 이 책에서 인도네시

말이 새삼 떠오르게 만든 셈이다.

아의 인프라, 식량, 환경 그리고 에너 지에 대한 진단과 문제 제기를 다룬다. 프라보워는 <Paradoks Indonesia>

내용이었지만 거부반응이 느껴지지 않은 책 프로모션과 더불어 인도네시

도네시아의 승리>라는 저서도 출간

아 국민의 시대적 요구에 맞는 민심이

했다. <Paradoks indonesia>가 인도

담긴 반영이 아니었을까 예측해 본다.

<Indonesia Menang>은 그의 정책 수 립에 대한 체계적인 방안을 기술한 다. 그는 <Indonesia Menang>에서 인 도네시아의 현안문제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개발 전략과 철학적 솔루션을 데이터와 통계로 입증한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부의 누수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도 책임이 있으며 모든 공동체가 이 문제에 대해 알기를 원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2019년 인도네시아 대선 후보였 던 두 후보의 책을 분석해보면. 어쨌 든 선거의 결과는 조코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이번 대선 때 프라보 자카르타에서 열린 한 행사장의 연설

워의 책은 조코위 대통령 책보다 서

에서 프라보워는 “나는 순식간에 책

점가에서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

을 썼다. 내 책의 내용을 부정하는 경

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책의 판매량

제학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발언을

과 기획 그리고 편집 면에서 조코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늘 자신감

측의 책보다 프로페셔널 하지 못했다

에 넘치는 것이 문제였을까. 프라보

(어쨌든 조코위의 책은 선거기간 동안 베스

워 측은 선거기간 그의 저서들이 서점

트셀러 코너에 진입해 있었으니까 말이다).

에서 매진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특 별히 지지자 중심의 지역 사회에서 더 널리 배포되었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조코위 대통령의 책에 비해서 많은 관 심을 받지 못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책의 내용도

이후, 다시 <Indonesia Menang: 인

네시아의 문제에 대한 진단이라면

조코위 대통령의 경쟁자였던 프라보워의 책 <Paradoks Indonesia>와 <Indonesia Menang>. 인도네시아 현실에 대한 강한 메 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표지가 눈 에 띈다. 선거 기간 자신의 저서에 직접 사인 을 하는 프라보워 후보의 모습.

조코위 대통령의 책이 주요 서점의

많은 정치인이 지금도 정치적 목적 으로 책을 출간한다. ‘출판 마케팅’에 성공하려면 출간 종수와 횟수보다는 진정으로 국민과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이 더 중요하다 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책을 출간하기보다는 국민과 소통하기 위한 책 기획과 출간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성공적인 ‘출판 마케팅’이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선 거용 책을 낸 것이 후보자에게 마이너 스라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빈번히 봐왔기 때문이다. 끝으로 조코위 대통령의 책 <Jokowi Menuju Cahaya>에서 개인적 으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책의 내용 중 외교정책 관련 파트에서 인도네시 아에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 중국. 일 본 등 강대국 위주의 각 나라 대통령 과의 사진이 수록된 반면, 한국 대통령 과의 기념사진은 누락되었다는 점이 다. 양국의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여 서

조코위의 책도 프라보워처럼 정치

로를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합

적 선거 목적으로 출간되었지만, 대중

의하고 ‘신남방정책’을 튼 양국의 외

적으로 성공한 전기 작가를 기용해 책

교적 상황에서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기획에서 문민 대통령이라는 편안한

책의 구성과 편집이 아니었나 싶다.

21 김순정



김의용 Kim Eui Yong

그리움, 아쉬움, 그리고 기다림. 또 1년이라는 시간의 기억. 그리고 여전히 인도네시아……

김의용 /Kim Eui Yong - 이탈리아 건축사 - 군나다르마대학 건축학과 교수 - PT.MAP A&E INDONESIA 건축설계사무소 법인장


리 /산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그 박물관에 걸쳐진 코카사스 산맥 가슴팍에는 백야가 출렁이고 골짜기마 다엔 흑야가 깊었지 보랏빛 유리알 샹들리에 불빛으로 앵두주와 체리주가 익어가던 시절 쿠바 축음기 안의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아직 사랑을 하고 검은 모래 해안가 로큰롤 가수는 은빛의 징을 번쩍이며 노래를 불렀지, 까 만 턱수염의 사서가 조는 밤이면 스파트필름 이파리 속 풍경은 더욱 느리 게 돌아갔어 잠 깨어난 마법 등잔 속 지니가 어깨를 흔들며 긴 숨을 쉬면 지 니의 숨결 속에는 작고 검은 꼬리요정이 살아 밤새 책 위를 술잔 위를 날아 다니며 길고 진한 그림자를 새겼지, 산초나무 여린 이파리 폴리셔스 그늘 속으로 하롱하롱 지는 달과 쇠의 공항 2046 게이트를 지나면 델피의 부서 진 바람이 불고 교토의 산산한 봄이 피었다 지는 박물관이 있지

자카르타 스케치 / 김의용

열대지방의 독특한 냄새와 강렬한 빗줄기, 그리고 지독한 소음이 자카르타에 대한 개인적인 첫 느낌이었다. 그리고 공 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면서 처음에는 지독한 교통체증에, 두 번째는 막연하게 상상했던 동남아의 모습과는 다른 고층화 된 도심 풍경때문에 놀랬다. 도심 빌딩들은 각기 독자적인 미 학적 개념이나 정리된 형태 질서들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 정제된 도시계획이나 철학적 개념은 결여된듯 보였다. 물론 빈약한 사회기반시설 또한 겉보기에만 번듯한 도심의 허상 을 만드는데 충분히 한 몫을 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한국의 7,80년대 개발독주 시대의 도시환경을 돌이켜보면 그리 이 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나,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이곳의 도시 는 생경함 그 자체였다. “다양성의 인도네시아”라는 말처럼, 자카르타의 건축환경 은 다양하고 혼합적이어서, 건축가의 시각으로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아마도 계속해서 타종교와 타문화 가 유입되고 다시 토착문화와 융화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 인 특성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형식은 절충주의 건축이다. 전통 건축과 현대건축의 언 어를 뒤섞어놓은 건축물 형태를 지칭하는 것인데, 일반적으 로 건축물의 몸통은 모던한 형태를 취하고, 지붕은 전통적인 건축형태를 취하는 건물을 말한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24


왼쪽 위_절충주의, 왼쪽 아래_근대, 오른쪽_꼬타광장

건축 역사에서 이런 형태들은 주 로 정통성이 취약한 정권이 민족성 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다. 마찬가지로 인도네시 아 전역에 퍼져 있는 절충주의 양식 의 건축물들은 수하르또의 신질서 시 대(Orde baru)에 판자실라(Pancasila)를 강조하기 위하여 국수주의적이고 민 족주의적인 건축양식으로 채택되어 국가적으로 장려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태도 는 “따만 미니(Taman mini)”라는 건축

만들어진 이유이다. 자카르타가 가능한한 아름답고, 스펙터클하고, 활기있는 중심도시가 되길 원했던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대 통령은 현재의 자카르타 형성에 큰 책임을 가진다. 1960년대 중반, 경제 규모에 비해 불필요한 건축유형인 고 층건물들이 근대화되고 발전하는 국 가의 상징처럼 집권자의 욕망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되었다. 장기적인 도시 발전전략이나 계획도 없이 도심의 고

히 잔존하는 파타힐라(Fatahilah) 광장 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교훈이자 상 징이다. 자카르타에서 가장 풍부한 역사성이 남아있는 장소임에도 불구 하고, 예산부족과 관심부족으로 인하 여 모두에게 방치되고 버려진 장소처 럼 존재한다. 풍부한 역사적 흔적들 이 남아있는 이곳은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압축되어있 는 자카르타의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 다.

층화가 진행되어 현재까지도 영향을

늦은 오후 뜨거운 햇살을 피해 노

끼치는 많은 도시 문제를 야기했다.

천까페에서 무심하게 광장을 바라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된 도심의 개발정

고 있을 때, 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자

반면 반둥 공과대학 토목과를 졸

책은 도시를 단순한 욕망의 집적체로

전거 타는 환한 미소의 소녀가 만들

업한 수카르노 대통령은 근대건축을

만들어버렸다. 도심의 무수한 고층빌

어준 그 광경에서 묘한 슬픔과 애잔

국가적 통합과 강력함을 표현할 수

딩과 대형 몰은 사람들을 거대한 냉

함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이처럼 장

있는 중요하고 강력한 상징으로 생각

장고에서 생활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소와 공간은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했고 이를 장려했다. 자카르타 중심

는 건축의 지역성도 역사성도 존재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것이 도시의

적 키치(Kitsch)의 종합선물세트를 만 들어냈다.

부에 있는 모나스 광장(Monas Plaza)

지 않으며, 자본주의적 욕망만이 존

품격을 만들어주는 원동력이고 근원

과 이스티크랄 사원(Masjid Istiqlal)이

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네덜란드

인 것이다.

전형적인 서구 근대건축의 영향으로

식민기와 독립 이후의 역사가 고스란

25 김의용


인도네시아 건축설계사무소 풍경 / 김의용

위_인도네시아 대형 건축사무소 중 하나인 PT.AIRMAS ASRI사무실 전경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사무실 중의 하나이다. 가운데_건축가 이리얀또(Irianto Purnomo Hadi)는 매우 역사적인 인물로, 인도네시아 건축계가 민주화하 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현재 개 인 아뜰리에를 운영하면서 독특한 자신만의 건축작품 을 실현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아래_건축가 안드라 마틴(Andra Martin)은 아마도 인도네시아 최고의 건축가 중 한명일 것이다. 미니멀리 즘 건축을 추구하면서도 인도네시아의 지역성을 현대 적으로 해석하여 구현하는 건축가이다.

마치 격언처럼 건축가들 사이에

허가, 착공에서 완공까지, 너무도 다

학과 인문학이 결합된 독특한 학문 분

회자되는 말이 있다. 바로 "좋은 건

양한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건축

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건

축의 반은 건축주(Client)가 만든다."

주의 요구에 적합한 방법을 물색해내

축학은 별도의 학문으로 분류되어 독

는 말이다. 어떤 건축가이던 건축주

고 현장에 맞게 변용하는 것 또한 건

립된 건축대학에서 교육하고 있으며,

는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며,

축가의 일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건

건축가의 인정도 국가가 보증하는 자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다. 일반적으로

축가는 분화되어있는 건설과정의 수

격증 제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의견을 반영하여,

많은 직능들을 통합하여 조정하는 기

건축주가 필요로 하는 공간과 기능을

획자이자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구현 가능한 물리적 이미지와 공간으

고 할 수 있다.

로 만들어내는 업무를 담당한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26

국제적으로도 건축가는 정부가 규 정한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거나 자격 을 갖추어야만 업무를 볼 수 있다. 특

물론 이 과정에서 건축가는 건축의

히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정규 국립

이러한 상상과 요구사항들이 현실

사회적 역할과 역사적 의미 등과 같은

건축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사람에게

로 구체화되어가는 과정에 수많은 변

것을 가미하는 예술적 기질을 발휘하

는 건축사 시험에 응시할 기회조차도

수들이 존재한다. 설계부터 관공서

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건축은 공

주지 않는 엄격한 자격증 제도를 가


지고 있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신자 유주의 시대에도 건축가가 되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녹녹하지 않다. 인도네시아 설계사무소와 건축가 의 업무도 다른 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과 크게 다른 것은 인허가 업무를 건축가가 직접 수행하지 않 고, 인허가 업체에서 별도로 수행한 다는 것이다. 건축가 입장에서는 행 바타비아 계획안과 건축물

복한 업무분장이다. 아마도 네덜란드 에 의해 지배된 기나긴 식민 과정에 서 이식된 유럽식 모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현지에 거주하는 한 국인들이 자주 하는 오해가 인도네시 아에서 건축설계는 불필요한 과정중 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계와 허가가 분리된 것이지, 인도네 시아에서도 건축설계는 중요한 전문 분야 중의 하나이며, 국가에 의해서 자 격증이 발급되고 관리되는 업종이다. 인도네시아에 입국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이곳 건축계 상황이 궁금 해 우연히 알게된 건축시공회사의 관 계자에게 건축설계업무에 대한 문의 를 하였지만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 다. 현지에서는 건축설계가 필요없다 는 대답이었다. 더 걸작인 것은 덧붙 이는 해설이었다.

대형 설계사무소와 개인 아뜰리에식

으로 하여 건축의 질적 측면을 향상시

의 소형사무실로 이분할 수 있다. 비

키는데 부단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인도네시아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한 예술가 적 건축가들도 있다. 전세계 어디에 나 있는 건축계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다.

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정말로 어이 가 없는 상황설명이었다. 만약 이것 이 사실이라면 인도네시아의 건축가 는 허가대행 이외에는 할일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허가를 대행하는 업 체의 업무를 건축가의 업무로 오해하 고 있었던 것 같다.

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다. 물론 건축가는 시공의 기술적 상 황까지 감안하여 설계에 임해야 하지 만, 건축가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사무실을 운영하는 건축가와 아뜰리

연출한 공간 구축에 시공기술력이 따

에 형식의 개인 건축가로 크게 구분

라와주지 못하면서 간극이 발생하곤

할 수 있다. 특히 직원 100명이상되

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어떤 경우에

는 대형 사무실들도 여럿이 있어서

는 원래 의도보다 예기치않게 더 좋

비록 매출규모 기준이기는 하더라도

은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BCA은행에서 매년 Indonesia TOP 10을 발표할 정도다. 허나, 매출이 크 다고 꼭 좋은 건축을 한다는 것은 아

현지에서는 그냥 도면 몇장 그려 고, 건축법도 크게 없으니 대강 지으

고 있는 문제점은 시공 수준이 설계

인도네시아 건축가들은 대형 설계

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서 약간의 수고비를 주면 허가가 나

한가지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

몇몇 건축가들과 이야기를 나누 다보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은 항상 시공기술의 불완전성에 집중된 다.바로 이 지점이 한국 건설기업에

현지 대형 사무실은 선진국에서 설

게는 인도네시아 시장의 블루 오션이

계한 인도네시아 프로젝트의 현지 파

될 수도 있다. 대형 국책사업이야 자

트너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본력과 기술력을 모두 겸비해야 가능

이들 중 몇몇은 이미 독자적으로 해

한 것이지만, 일반 건설시장에서 특

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로컬의 한

히, 건축가가 설계한 작품형 건설시

계를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반면 소

장에서 시공기술력은 현지 건축가들

규모 아뜰리에 사무실의 경우 지역적

이 애타게 찾고있는 상황이다. 이 틈

특성을 가미한 특징적인 작품을 하거

새를 섬세하고 정교한 기술력으로 무

나 작품의 질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

장하여 접근하면 충분히 건축과 시공

올리려 노력하는 건축가들에 의해 운

의 행복한 결합을 만들어낼 수 있을

인도네시아의 건축설계업종도 규

영된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여기에 인도

모와 종류로만 보자면 한국과 크게

(identity) 미학적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

네시아 건설시장의 미래 잠재력 또는

다른 것이 없다. 직원 100명이상의

하고, 자신만의 철학적인 사고를 기반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7 김의용


Urban palimpsest : 문지르고 다시 겹쳐 쓴 도시, 자카르타 / 김의용

왼쪽_모나스 광장과 자카르타의 근대도시 풍경 오른쪽_대규모 위락시설인 따만미니와 민족주의의 과장된 건축양식

1. 새로운 성벽과 밀려난 원주민 파란 눈의 서양인들은 낯선 동남 아시아의 섬에 자신이 살았던 유럽식 도시, 그것도 결점이 없는 유럽식 이 상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그들은 멋 드러진 운하를 만들기 위해 원래의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28

년 동안 지배하고 군림하였다. 자카

(MONAS)이 만들어졌지만, 지나치게

르타의 탄생 속에는 몰락한 서양 귀

거대한 스케일은 무더운 이 나라에 사

족의 탐욕과 원주민들의 한숨과 탄식

람이 모일 수 없는 텅 빈 광장을 만들

이 남루하게 덧칠되어 남아있다.

었다. 광장은 있으나 사람이 없는 전 시용 광장을 만들었을 뿐이다. 광장이

2. 아비정전의 도시

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다양한 행 위들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지형에 성토를 하고, 칼로 도려내듯

기나긴 식민지 시대를 마감하고 맞

운하를 만들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도

모이기 위해서는 비워져 있는 공간이

이하게 된 독립은 마치 한밤의 도적

시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를 원했

광장이라 할지라도, 적절한 이벤트가

처럼 찾아왔다. 느닷없이 다가온 독립

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국의 귀족적

일어날 수 있는 공간적 크기와 형태들

은 준비되지 않은 복권당첨자의 삶처

인 특성과 문화도 고스란히 이식하길

이 필요한데, 이 국가적인 거대한 광

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격랑의 시간

희망하여, 현지인들은 출입하지 못하

장은 그 넓이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

이었다. 열망했던 독립된 조국이었지

는 분위기 있는 서양식 까페도 만들

고 지배한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는 알 수

었다. 이 까페는 지금도 일반서민은

없는, 그 사랑의 완성이 불편하고 어

없었던 아비처럼 자카르타는 “독립

이용하기 힘든 금액의 관광지 까페가

색한 아비의 사랑방식처럼 말이다.

된 새로운 조국”이라는 구호 아래 출

되어, 여전히 외국인들로 들어차 있

처없는 기념비적인 서구식 건축물과

근대화된 공간들은 속속 자카르타

다. 식민도시 바타비아(BATAVIA)는

유물화된 과거의 형식들이 혼재되는

를 근대도시로 만들어갔으며, 보행자

이렇게 만들어졌으며, 자바 섬의 낯

상황을 맞이한다. 독립된 자랑스러운

위주의 도시를 차량 위주로 탈바꿈시

선 이방인은 이 섬들의 원주민을 400

국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거대한 광장

켰다. 거대함과 빠름이 도시를 지배하


고, 큰 도로와 화교들이 지배하는 상권 들이 만들어지면서 텅 빈 도시를 자본 으로 채워 나갔다. 20세기 초 15만 명 에 불과했던 인구가 1961년에는 290 만 명으로 거의 20배에 가까운 인구가 증가하였음에도 광장은 외면을 받았 고, 2019년 현재 인구 1000만의 도시 에서도 광장은 외롭다. 새로운 광장의 단절된 고독은 현재 구도심의 파타힐 라 광장의 활기참과 대조된다. 사랑스 런공간 하나 새롭게 가질 수 없는, 사랑

에 이르렀다. 하긴, 독특하기는 하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고 하 지 않던가. 30여 년 간 계속된 광기 의 독재는 벤데타의 가면 속 영웅처 럼 몇몇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한걸음 전진하게 된다. 이 죽음은 자아에 대 한 근본적인 성찰이 이루어지는 계기 를 만들어주었으며, 근대적 합리성과 민주적 절차가 도입되면서 현상에 대 한 비판적 자세와 다양성을 가질 수

개발의 풍경일까? 일년 소득 대략 만 불 정도의 이 도시는 주변으로 일 년 소득 5천불에도 못 미치는 5~6개 의 위성도시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은 지금 인터넷을 즐기고, 핸드폰을 일인당 하나씩 보유하고 있으며, 실 시간 방송과 유튜브를 즐기고 있다. 도시의 발전속도와 수준에 비해서 너 무 빠른 문명의 이기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 도시의 일상이다.

있게 해주었다. 인도네시아 건축에서

자카르타에는 다양한 켜(Layer)들

도 이 시기에 젊은 건축가 또는 학생

이 공존한다. 다양하게 중첩된 역사적

들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현대건축

켜, 고급과 저급, 현대와 전통, 도시와

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시작된다. 이

시골 등등 대립된 켜들이 함께 공존하

어떤 독재이든 독재는 광기를 동

제 서서히 식민지와 혼란스러운 독립

면서 매트릭스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

반한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쏠리니

기, 광기의 독재를 품은 도시가 다양

어낸다. 30여 년의 독재정치가 만들

가 그랬듯이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

성, 자유, 비판 등의 열린 개념들을 품

어낸 왜곡된 종교관 또한 문화에 녹아

은 광기로 시작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을 수 있는 도시로, 개인의 삶이 살아

들면서, 종교와 현세가 뒤엉켜져 이방

대중의 열망으로 소멸된다. 32년 간

있는 도시로 변하게 되었다.

인들에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

그 쓸쓸함의 도시이다.

3. 벤데타의 가면

의 혼돈과 몽롱함을 선사한다. 근대사

의 철권통치는 따스한 이곳에 겨울보 다 더 서늘한 통제와 규율을 만들어 지배했다. 종교는 더욱 신비주의화 되었고, 과포장된 민족주의는 대중 을 열광하게 했으며, 대도시의 시민 들에게는 대규모의 위락시설을 선물 처럼 제공했다. 그럴듯한 포장문구와 함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추 구하는 하나된 인도네시아’. 대체 이 게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힘들다. 다양성과 통일성이

4. 도시의 매트릭스

회의 합리성(도구적 합리성과 합목적적 합리성, 이 두 개 마저도 동시에 공존한다),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의 매트릭

전통적 지역주의, 개인의 욕망이 소비

스는 자카르타에서 쉽게 느낄 수 있

가능한 이슬람의 도시, 이미 국제화된

다. 중심사무지구(SCBD)의 강력한

메트로폴리탄 등등…..

자본주의의 성과물과 그 뒤로 이어지 는 단층의 조악한 건축물들, 넓은 폭

다양한 색채의 알약이 수 놓아진

의 도로와 화려한 빌딩들이 정비된

이 도시, 자카르타에서는 그래서 종

도시의 앞면과 거미줄처럼 얽힌 가로

종 길을 잃기 쉽다.

망을 가진 도시의 후면. 단순히 도시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이란 말인가? 중심상업지구의 양면성

숨막힐 듯한 전체주의는 전통문화 를 민족주의란 이름으로 희화화하면 서 전국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슬람 사원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건 축은 관공서, 병원, 학교 등의 공공기 관에 장려되면서, 오역된 민족주의가 마치 진정한 지역주의 건축처럼 무분 별하게 건립되었다. 양이 질을 지배 한다고 했던가? 30여 년 간 지속적 으로 건립된 변질된 민족주의 양식의 건축물들은 이제는 인도네시아를 대 표하는 지역주의 건축으로 소개되기

29 김의용



김현숙

Kim Hyun Suk ‘인작’은 자라고 ‘나’는 늙어간다. 세 살 박이 인작의 기(氣)를 탐하며, 자라고 싶은 욕망으로 여기 또 나를 토해낸다. ‘해를 거듭할 수록 더 자라야지, 쑥쑥 커야지.’ 인작이 내게 주는 큰 선물이다.

김현숙 / Kim Hyun Suk - 제17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수상 - PT. Pythonia Geulis Leather 대표 - 파이톤 가방 만드는 일에 묻혀 세월을 잊고 사는 중년 아줌마.


이 / 재무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전철 안 도토리 / 김현숙

교외로 달리는 한적한 전철 안

열차는 신나게 뒤뚱거리고

도토리 하나가 구르기 시작했다

도토리는 사선을 그어대고

이쪽 저쪽으로 사람들의 눈동자가 일

엇갈리는 선과 파장들이 머릿속을 헤

제히 움직였다

집는다

전철이 출발하면 뒤로, 멈추면 앞으로 붉은 산은 차창 너머로 획 지나가고 아낙의 큼직한 배낭에서

파란하늘은 붉은 산을 쫓아 내달리고

주위를 살필 새도 없이 구르기 시작한

뭉게구름은 산과 하늘의 경계선을 따

도토리

라 비행한다

또로로…… 무료함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흔들리는 손잡이에

순간 터진 웃음에 자리를 고쳐 앉는다

휘청대는 몸의 중심을 잡고 동선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토리를 굴린 저 아낙 민망함을 곁눈질로 감추며

열차는 주엽역을 떠났다

도망치듯 다음 역을 빠져나간다

내 안에 불시착한 도토리, 제멋대로 한참 사선을 그어댔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32


유년의 봄 / 김현숙

봄은 마당 끝 저편 밭과 마당을 가르는 비탈진 둔덕에 나를 가두었다 이웃 계집애들이 호미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너른 들판을 깔깔대며 달릴 즈음, 나는 조그만 바가지 하나 달랑 들고 그 둔덕에서 봄을 맞이했다 이름조차 소박한 작은 들풀들이 앙증맞기까지 한 꽃망울을 터트리면 둔덕에 엎드려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 보았다 달콤한 흙 내음 코 끝을 간질이는 알싸한 향내 코를 벌름거리며 초록위로 머리를 처박고는

유년의 여름 / 김현숙

두어 시경 소나기 한차례 퍼붓더니 매미소리 더 쩌렁해지고 밭 가운데 뒹굴 거리던 수박 하릴없이 갈라졌다 모기 무서워 서두른 저녁 그새 출출해진 배는 염치도 모르는데 여름 밤은 저만치서 꾸물대고 있다 짙푸른 하늘로 꼬물꼬물 올라가는 매캐하고 하얀 보리짚단 연기 억세어진 쑥대 설 탄내에 콜록대며 애꿎은 장딴지만 내리치고 할머니 휘두르는 부채에 잔칫집 손님처럼 동네 모기 죄 모여 들었다

먹이를 찾은 굶주린 들짐승 마냥 나의 봄을 만끽했다 벌렁 누운 등뒤로 뒹굴던 바가지는 봄 향연을 즐기는 철없는 계집애의 나물을 캔다는 좋은 구실이었다 햇살에 부신 눈 대지위로 피어나는 아지랑이 눈 맞추다 오글오글 나른해진 동공은 흐드러지던 오후의 꿈속에서 길을 잃었다 둔덕 위 아름드리 살구나무 꽃망울을 터트리다 터트리다 바람에 나부껴 꽃 비라도 오는 날이면 바가지 한 가득 살구꽃은 넘쳐났다

낮 소나기에 흠뻑 젖고도 남은 열기 멍석 위에 드러눕고 여덟 식구 좁은 자리 비켜줄 줄 모른다 별똥별 쫓다 골아 떨어진 오줌싸개 동생 오줌 뉘어 재워야 했다고 혀를 차는 엄마 말에 뾰로통한 입으로 수박 씨만 내뱉는 나 저보다 큰 키 쓰고 소금 받으러 가는 동생 한 손으로 키 받치고 어기적거리는 내 발걸음 그 밤엔 바람도 이방인처럼 슬며시 지나가고 하늘로 하늘로 오르던 모깃불 연기에 별들만 몽롱이 땅 위로 떨어졌다

33 김현숙


아데니움, 그 사랑이야기 / 김현숙

십오 년을 나만 바라본 이 있었네

가슴이 쿵 내려앉았네

첫 눈에 반한 건 나였다네

잊었던 첫사랑의 자태

그의 붉은 얼굴에 나도 따라 붉어지고

십삼 년을 꽃이라곤 피워본 적 없는 이

도도한 자태에

그저 나무로만 묵묵히 살아온 이

정신을 놓았지

꽃피울 최소한의 햇빛도 허락하지 않은 내 잔인한 무심함에 짓밟힌 이

사랑했기에 곁에 두고 싶었네 정성을 다해 비위를 맞추었지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네

얼굴빛은 괜찮은지

반했던 순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지만

불편함은 없는지

자랑스레 반짝이는 그의 눈을 들여다

아련한 눈빛을 아침 저녁으로 보내곤 했지

볼 수 없었어

머잖아 내 심장은 평정을 찾았고

사 일째 되는 날,

그는 잡초처럼 화단에 버려졌지

그는 처절하게 지고 말았네

난 또 새로운 사랑의 설렘을 찾고 있었

선명한 자줏빛 목을 뚝뚝 자르고

던 거야

털썩 내려놓은 뒤꿈치 옆에 쓰러져 있었어

이사를 했다네

십오 년을 나만 바라보는 이 있었네

집을 나서는 나를 붙잡던 애절한 눈빛

내가 첫눈에 반했던 이라네

외면할 수 없었네

식어버린 내 심장에 뿌리를 박고

마지막 이삿짐이 된 그가 우리를 따라

십삼 년을 나무로 살다

나섰지

사 일간 꽃이 되어 내게 왔던 그런 이 였다네

베란다에 던져 놓았네 바로 옆의 나팔꽃이 보라 빛으로 터지면 호들갑스럽게 사진을 찍곤 했지 무심한 내 눈은 그에게 머문 적이 없었네 어느 새벽 낯선 이가 집에 들었네 진 붉은 얼굴 넷이 거실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삐쩍 마른 몸에 까치발을 들고 서서 목까지 차오른 그리움이 검붉게 충혈 된꽃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34


추석 채비 / 김현숙

열두 개 방문이

열두 개의 방문은 햇살조차 노곤히 지

일년에 한 번 꽃 단장을 하였다

칠 때까지 코흘리개 동생의 조막손도 마다치 않고

안마당, 바깥마당 할 것 없이

방문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머리를 받치고 죽 드러누워

잠자리를 쫓던 누렁이만

물 세례를 견디고

하루 종일 지청구를 먹는다

야무진 칼 끝에 퉁퉁 불은 누더기를 때 처럼 벗으며

얼음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시커먼 격자무늬 속살을 드러냈다

팽팽한 연실이 바람을 가르는 것 같기 도 한 소리가 연신 터지고

따가운 가을볕이

잔뜩 긴장한 창호지가 백지장이 되면

네모진 창살 구석구석을 훑자

방문은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간다

몽당 빗자루 끝, 동동구리모 같은 풀을 바른 창호지가

익어가는 풀 냄새

이불 홑청 마냥 사뿐히 격자무늬 위로

활짝 물오른 코스모스는 창호지 사이

내려앉는다

로 꿈틀대는데 방문은 보름달이라도 품은 듯

신작로 분홍 코스모스 꽃잎이

밤새 하얀 빛을 냈다

문고리 옆에 다시 꽃을 피우니 손수건만 한 창호지가 어느새 그 위를 덮고

추석은 이제 시작이었다

흰 수건위로 꽃 자수가 선명하게 묻어난다

그 후로도 한참을 어른들은 추석채비에 바빴고

평생 먼지만 쓸어대던 수수빗자루

하릴없는 동생과 누렁이는 엉덩이를

갓 바른 창호지 위를 민망한 듯 지나가면

실룩이며

마침내 방 문 한 개가 끝이 난다

고소한 냄새를 따라 다녔다

35 김현숙



노경래

Noh Kyong Rae

난 잘하고 있는가? 인도네시아에 10년째 살면서도 아잔 소리는 여전히 어색하고, 변변한 인도네시아 친구 하나 없고, 인도네시아말은 10년전 배웠던 수준이나 마찬가지… 갈수록 참 살아가기 어려운 나라라고 느끼게 된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대해 알고자 했던 열망은 다 어디로 갔는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 나와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도 달라 그래서 더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배우며 사랑하자.

노경래 / Noh Kyong Rae - 한 철강회사에서 27년 근무하다 그만 둠 - 인도네시아에서 10년째 거주 중 - <한국인이 꼭 알아야할 인도네시아>(2017)출간 - 수박 한철 장사하듯 광물 트레이딩으로 먹고 삼


정 / 희성

태백산행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이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별볼일 없으신가요? - 남십자성 이야기 / 노경래

어렸을 적 새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세던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말 별 볼 일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마음에 서 순수가 사라지면 별도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인도네시아, 특히 자카르타에서는 별을 보려 해도 잘 보이지도 않지 만, 가끔 바람이 서늘한 밤에 뜰 앞에 나서 보면 머리 위에는 유명한 길라 잡이 별들과 은하수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설마 북극 성이나 북두칠성이 어디 있을까 찾지는 않으시겠지요? 인도네시아 적 도 지방에서는 북극성은 보이지 않고, 북두칠성도 중간에 사라집니다. 대 신 남십자성(南十字星)은 인도네시아에서 거의 연중 볼 수 있습니다. 남십자성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1개가 아닌 4개의 대표적인 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남십자성이라기 보다는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38


남십자자리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

그럼, 옛 항해자들이 남극을 어떻

지만 일반적으로 혼용되고 있습니다.

게 찾았을까요? 정확히 천구의 남극

라틴어로는 Crux, 영어로는 Southern

에 존재하는 별자리는 없습니다. 천

Cross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구의 남극에 가장 가까운 별자리는

남십자성을 Bintang Pari(‘가오리별’)

천구의 남극에서 1° 가량 떨어져 있

또는 Gubuk Penceng(‘갈퀴 보관소’)이

는 시그마성(Sigma Octantis)인데, 이

라고 합니다.

별은 겉보기 등급이 5.45등급으로 어 둡고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옛 항해자들에게 남십자성은 대표 적인 길라잡이 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천구의 남극에는 좀 떨어

나침반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져 있지만 밝고 모양이 십자인 남십

남극을 찾을 때 주로 이용된 내비게

자자리를 찾는 것이 훨씬 용이하였을

이션 별이었을 것입니다. 북반구의 북

것입니다.

극성(Polaris)에 해당하는 별자리인 셈이

천구의 남극을 찾기 위해 남십자

죠. 남십자성은 북극성과는 달리 천구

자리의 세로축에 해당하는 감마별과

(天球; 별들이 거기 같은 거리에 콕콕 박혀

알파별을 연결하여 4.5배 연장한 지

있다고 가정한 상상 속의 둥그런 하늘 천장)

점을 찾거나, 감마별과 알파별의 연

의 남극(celestial south pole)과 정확히

장선과 Southern Pointers의 알파 및

일치하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럼에

베타 켄타우루스 사이를 직각으로 연

도 불구하고 옛 항해자들이 남십자성

장하는 선이 만나는 교차점을 찾았다

을 찾는 이유는 천구의 남극 중심에

고 합니다.

밝은 별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십자성은 원래 켄타우루스자리

자들은 오리온의 검(Orion’s Sword)의

의 일부였으나, 1679년 프랑스의 천

방향을 기준으로 남쪽을 찾았다고 합

문학자 Augustin Royer에 의해 독립

니다. 이후 남십자성을 찾았겠죠.

된 별자리로 표시됩니다.

남십자성은 남위 35°(호주 캔버라 인근) 이남에서는 연중 관찰이 가능

합니다. 남위 35° 이상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관찰 가능 시간이 줄어들며,

남십자자리는 알파별(Acrux), 베

북위 25°(오키나와 인근)에서는 한 두

오늘날 국제천문연맹이 공인한 별

타별, 감마별, 델타별 등으로 구성되

달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평선에 아

자리(Constellation; 하늘의 별들을 찾아

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밝은 별인 알

래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내기 쉽게 몇 개씩 이어서 그 형태에 동물,

파별은 우리의 눈으로 보면 88개 별

는 당연히 남십자성을 볼 수가 없습

물건, 신화 속의 인물 등의 이름을 붙여 놓

자리 중 12번째로 밝으며(겉보기 등급

니다. 인도네시아(남위 10° ~ 북위 5°)

은 것)가 88개가 있고, 이중에 남반구

0.86), 지구에서 510 광년 떨어진 곳

에서는 10월을 제외하고는 특정 시

에 속하는 별자리는 48개인데, 남십

에 있습니다.

간 대에 연중 관찰이 가능합니다. 물

자성은 작지만 모양이 매우 뚜렷하고 밝아 오래 전부터 남반구의 길잡이별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알 파별의 빛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 을 주장하고, 포르투갈인들이 말라카

론 자카르타는 맑은 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육안으로 남십자성을 볼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습니다.

북반구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남

해협을 탐험하기 시작한 무렵에 알파

아쉽게도 서구에서는 남십자자리

십자성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옛 항해

별을 출발하여 초속 약 30만Km를 달

에 대한 유명한 신화나 전설이 거의

자들은 남반구로 가기 위해 우선 오

려 이제 우리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없는데, 이는 원래 남십자자리가 켄

리온자리를 먼저 찾았을 것입니다. 오리온자리는 천구의 적도(celestial equator)에 걸쳐 있는 눈에 띄는 큰 별

자리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꾼 인 오리온에서 기원합니다. 옛 항해

남십자성이 밝기 때문에 옛날에는 항해자들을 선발하기 위해 시력검사 를 할 때 남십자성을 찾는 것으로 하 였다고 합니다.

타우루스자리의 일부였고, 남반구의 별자리 이름의 대부분은 대항해시대 가 시작된 이후인 16세기부터 생겨 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고, 또한 십자 가라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어 다른

39 노경래


전설을 추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

굴/ 눈에 익은 너의 모습 꿈 속에 보

십자성(南十字星)이 비춰 주도 않았

정해 봅니다.

면/ 꽃이 피고 새도 우는 바닷가 저편

다’고 하였습니다.

반면, 남반구의 많은 국가나 단체 에서 남십자성을 문양이나 로고에 사 용하고 있으며, 애국가, 가요, 시 등에 서도 남십자성을 많이 언급하고 있습 니다. 그리고 남반구 원주민의 신화 나 전설에는 십자가가 아니라 새나 가오리 또는 농기구의 생김새를 가진

가는 길이/ 절로 보이네/ 보르네오 깊 은 밤에 우는 저 새는/ 이역 땅에 홀 로 남은 외로운 몸을/ 알아주어 우는 거냐 몰라서 우느냐/ 기다리는 가슴 속엔 기다리는 가슴 속엔/ 고동이 운 다’입니다.

별자리로 인식하였다는 점이 흥미롭

이 노래는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습니다. 아마도 농업 국가가 많고, 바

젊은이들이 일제에 의해 자바, 보르

다로 둘러싸인 나라가 많기 때문일

네오, 수마트라 등에 끌려가서 남십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성을 바라보며 고향에 계신 어머

물론 중국의 대부분 지역과 한국에 서는 남십자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신화나 전설을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가요나 문학 작품에서 남십자성이 종종 언급 되고 있으며, 남십자성은 주로 ‘희망’ 의 상징으로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현인의 <고향만리>(1948)의 가 사는 ‘남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40

에/ 고향 산천 가는 길이 고향 산천

님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야 했는데, 일제가 패망하자 고국으로 돌아가 는 배를 기다리며 기쁨에 들떠 있는 - 실제로 그들은 바로 고국으로 돌아 가지 못하고 전범재판에 회부되는 등 고초를 겪지만 - 이들의 모습을 그려 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육사는 <노정기(路程 記)>(1937)에서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중략) 그곳은 남

이육사는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에 서 쫓기듯 살아온 지난날의 여정에서 남십자성을 희망의 좌표로 여겼던 것 입니다. 요즘은 바빠서 별 볼일 없다는 분 들을 위해서나, 날씨가 좋지 않아 남 십자성을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다고 하는 게으른 분들을 위해 별자리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앱 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라도 별 자리를 찾아 나서서 어렸을 때 새까 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세던 기 억을 회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 니다.


달리는 차 창 밖으로 코코넛 나무가 흐르고 있다. 등골이 오싹 인다. 인 도네시아에 처음 둥지를 틀 즈음에 너, 코코넛 나무를 볼 때는 내가 이국 땅 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언제부터 인가 네가 눈에 들어 오지 않았거든. 너는 그 동안 그 자리에 있어 왔는데… 세상에서 무심한 것 은 시간이 아니라 바로 나였구나.

코코넛 나무를 다시 바라보며 / 노경래

나의 무관심에도 한결 같이 내 곁에 있어 준 말 못 하는 너를 대신해 너 의 이야기를 전한다면 그 미안함이 조금은 줄어들려나... 코코넛이라는 너의 이름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도 나오 고,<천일야화>의 ‘신밧드의 모험’에서도 등장한다. 1280년경 마르코 폴로 는 <동방견문록>에서 당시 아랍인들이 jawz hindī(Indian nut)라고 불리던 네 가 수마트라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오늘날의 coconut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서양에서 처음 등장한다. 대항 해시대 서양의 항해자들은 너에게 굉장히 흉측한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너의 열매의 표면에 있는 세개의 검은 반점이 고블린(goblin)을 닮았다고 생 각했다. 고블린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어로 ‘coco’인데, 그들은 여기에 nut 을 더해 coconut이라 불렀다. 인도네시아어로 kelapa라 함은 일반적으로 코코넛 열매(buah kelapa)를 말하고, 코코넛 나무는 pohon kelapa라고 한다. 너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생물지리학적 지역으로 동남아와 호주를 포함하는 말레이가 그 원산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너는 아 프리카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북위 25도와 남위 25도 사이의 열대에서 주로 자란 다. 이들 지역은 모래사장이 많고, 지하수가 잘 공급되며, 배수가 잘 되고, 높은 온도와 습한 공기가 있어 네가 잘 자랄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41 노경래


말레이 지역이 원산지인데 이렇게

너의 한 그루는 사람과 비슷하게

추출하는데 쓰인다. 너의 열매가 나

광범위하게 분포하게 된 것은 사람들

한 80년 살면서 원 없이 다 주고 간다.

이가 더 들어 땅에 뚝 떨어진 후 일정

이 옮겼거나 아니면 조류의 영향일

너의 한 그루로 아버지, 아들, 손자 삼

시간이 지나면 발아하는데, 안쪽 껍

것이다. 너의 열매는 휴대하기 쉽고,

대를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삼대 나

질에 흰색의 스펀지 같은 것이 남아

잘 썩지 않기 때문에 탐험선이나 카

무(three-generation tree)’라고 불린다.

있는 과육과 코코넛 워터를 흡수하면

누 등에 싣고 옮겨 다닐 수 있었다. 연

보통 심은 후 약 12살부터 열매를 맺

서 싹을 띄운다.

녹색 겉껍질 안쪽에는 목질의 섬유질

기 시작하고, 다 자란 나무의 몸통은

층 있는데 이는 과육이 퇴화하여 생

직경이 약 46cm, 키는 30m 정도이며,

긴 것이다. 가볍고 성기게 형성되어

잎은 약 4m로 20여 개 정도된다.

있는 섬유질 사이에는 공기가 있기 때문에 부력을 생성하여 물에 잘 뜰 수 있게 한다. 즉, 바닷물에 잘 견디고 가라앉지 않고 물에 뜨기 때문에 조 류를 타고 먼 곳까지 갈 수 있으며, 바 다에서 3개월 이상을 떠다닌 후에도 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13.8백만 톤(2위), 인도 11.1

2차 대전 중에 어린 코코넛 워터는

백만 톤(3위), 브라질 2.6백만톤(4

링거 주사액으로 쓰여 열대의 태평양

위)을 기록하였다.

주둔군 병사들을 구했다고 한다. 열 매가 더 자라면 얇고 하얀 과육이 안 쪽을 채우는데, 이 부분은 우리가 스 코넛 워터와 하얀 과육을 사 먹으려

표류한 주인공이 너의 열매 속에 있

면 아주 크지 않은 녹색의 열매(kelapa

는 물을 마시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

muda)를 고르는 것이 좋다.

너는 그를 살린 것이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42

안에는 약 1ℓ의 코코넛 워터가 있다.

웨이(Cast Away)>를 보면, 무인도에

그는 아마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열매 생산량은 총 59백만 톤으로 이 중 인도네시아가 17.7백만 톤(1위),

푼으로 파 먹는 부분이다. 그러니 코

온다. 그곳 무인도에 네가 없었다면

계 90여 개 국가에서 자라며, 2016년

어느 정도 자란 어린 녹색의 열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

를 하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나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세

“코코넛 나무를 심은 사람은 자신 과 후손들을 위해 음식과 음료, 배와 옷을 마련하고 집을 짓는 사람”이라 는 동남아의 격언이 있다. “코코넛 나 무의 쓰임새는 1년 365일과 같이 많 다”라고 인도네시아인들은 말한다. 네가 열대지역 사람들에게 의식주 문

이 보다 더 자라면 과육은 두껍고

제를 해결해주니 ‘생명의 나무(tree

단단해지며, 코코넛 워터는 밋밋한

of life)’로 불린다. 너는 VIP 중의 VIP,

맛이 된다. 두꺼운 과육을 파서 말린

즉 MVP(Most Valuable Plant)인 셈이다.

코프라(copra)는 주로 코코넛 오일을

너의 쓰임새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그


경제적 가치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

Wasa) 등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짜낭

자스민의 섬/ 아주 오랜 전부터/ 야자

을 것이다. 그 쓰임새 몇 가지만 예로

사리(canang sari)를 바친다.발리어로

수는 해변에서 손짓하고/ 바람은 속

들면 그림과 같다.

sari는 ‘꽃’, canang는 ‘코코넛 나무 잎

삭인다/ 아름답고 우아한 섬은 찬양

으로 만든 조그만 바구니’를 말한다.

한다/ 나의 조국 인도네시아를”이라

인도네시아의 아침은 집 안팎을

고 노래한다.

청소하는 빗자루 소리로 시작된다.

발리에서 건물들의 높이는 법적으

네가 인도네시아 아침을 연다. 그 빗

로 인근에 있는 너의 키보다 높아서

우리가 늘상 보고도 지나치는 너

자루는 너의 주맥(midrib)으로 만든

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의 친구들 – 합쳐 ‘야자수(椰子樹)’라

다. 너의 주맥은 강하고 내구성이 좋

발리에는 그런 법적인 규제가 없다고

고 부름 - 중에는 크고 늘씬해서 가로

기 때문에 빗자루로 만들기 제격이

한다. 다만, 건물 자체의 높이는 15m

수로 많이 심은 빨럼 라야(palem raya),

다. 한국의 싸리 빗자루보다 섬세하

를 넘지 않아야 하며, 기술적인 문제

기름을 짜 돈벌이로 쓰이는 끌라빠 사

고 가볍기 때문에 한 손으로 들고도

등으로 15m를 넘겨야 할 경우에는

윗(kelapa sawit), 옛 인도네시아 사람들

능숙하게 청소를 할 수 있다.

허가를 받아 지으면 된다고 한다. 발

이 종이 대신 쓴 론따르(lontar), 빈랑

리 사람들이 건물이 풍광을 해치지

자(樓榔子)라 불리는 열매를 맺는 삐

않도록 하기 위해 가급적 너의 키를

낭(pinang), 붉의 색의 시누대 같은 빨

넘지 않게 건물을 지으려는 배려로

럼 메라(palem merah) 등이 있다. 같은

이해된다.

것 같으면서 조금씩 다르다.

인도네시아 전설에서 너는 대체적 으로 다산이나 풍요와 관련되어 있 다. 자바와 발리에서 데위 스리(Dewi Sri) 여신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데, 데위 스리는 순다 지역에서는 냐

인도네시아인들이 그들의 정서

네가 다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뽀하찌(Nyai Pohaci)로 불린다. 그

를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면, 나는 다시 인도네시아를 떠나리

녀가 죽자 그녀의 머리에서 네가 자

나무 중 하나가 바로 너이다. 인도

라. 내 곁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일

랐고, 배꼽에서는 벼가 자라기 시작

네시아의 작곡가인 이스마일 마르

상의 무감각에서 벗어나 풀 한포기

했다고 한다.

주끼(Ismail Marzuki)가 작사 작곡한

나무 한그루에 애정을 보내는 나를

Rayuan Pulau Kelapa(야자섬의 매력)

다시 만날 때까지…

발리 여성들은 해가 뜨면서부터 가 족사원에 있는 발리 힌두교의 최고 신인 상향 위디 와사(Sanghyang Widi

은 “평화롭고 윤택한 나라/ 정말 기 름진 야자수의 섬/ 민족이 경배하는

43 노경래



배동선

Bae Dong Sun 인작 3년차. 갈망하던 직장에 간신히 취직한 주제에 불평불만에 휩싸여 사직서를 품고 다니게 될 정도의 시기. 그런 질적 변화의 근원이 나라는 개체 자신일까? 아니면 등 떠미는 사회와 환경일까 생각합니다. 사직서 대신 선의를 품에 품고 나와 이웃을 더욱 격려하며 진화해 가는 인작 4년차를 기대합니다. 여기 수록 글에 몇 가지 각각 다른 표정들을 담아봅니다.

배동선 / Bae Dong Sun - 정체: 작가, 소설가, 번역가, 통신원, 선동가 - 특징: 놀라운 맷집 - 쓴 책: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막스 하벨라르> (공동번역)


권 / 기호

제비꽃

산중턱 조그만 메밀밭 골에 보라빛 서러움이 홀로 피었네 가느다란 줄기 그리움에 흔들리고 여린 꽃망울에 가득히 눈물 고였네 아! 저토록 제 속 못이겨 조그만 제 가슴 메어지도록 눈물로만 채우러나 세월은 흘러 너의 모습 사라져도 봄날의 향기처럼 피어오를 너 영혼, 보랏빛 서러움

<단편소설>

떠다니는 얼굴, 굴러다니는 머리통 / 배동선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46

뿌르발링가 가발공장에서 경비원

는 동안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을

으로 일하는 조코는 저녁 퇴근길, 스

때 길 옆 야자나무 위에서 둥근 물체

라유 강가에서 도시 외곽 산자락으

하나가 풀썩 떨어져 와룽과 그로박들

로 이어지는 갈래길 소또아얌(자바식

사이 비포장도로 위로 데구루루 굴러

닭국) 파는 와룽(작은 가게) 앞에서 갈

나왔습니다. 당연히 야자열매라 생각

등합니다. 일몰을 알리는 마그립 아

했던 그 물체는 반대편 풀숲으로 굴

잔이 들려온 지도 오래 전, 어둠이 깊

러들어갈 듯하다가 브레이크라도 걸

이 내리는 만큼 배도 더 고파오는데

린 듯 우뚝 멈춰 섰습니다. 그 순간 싸

향긋하고도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

~한 느낌이 조코 등줄기를 훑고 지나

지럽혔습니다. 거기서 50미터쯤 앞

갔습니다. 얼굴이 뜨거워지며 귀까지

에 사떼깜빙(염소고기 꼬치)과 나시고

울기 시작하면서 조코는 그제서야 저

렝(볶음밥) 파는 그로박(이동식 간이 판

물체가 뭔지 알아차렸습니다. 군둘

매대)이 몇 개 더 있으니 거기까지 가

쁘링이스(Gundul Pringis)가 주변에 나

타나면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서부 자바 반둥과 찌레본 사이 마 잘렝카 지역 출신 조코는 자바 땅에 서도 저걸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초 등학교 시절 해질 무렵 마을 변두리 빈 밭을 가로질러 자그마한 대나무 숲으로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커다란 실뭉치 같은 것을 이전에도 그는 조 무래기 친구들과 함께 여러 번 보았 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귀뚜라미 잡으러 나온 아이들이 풀섶 에 나뒹구는 실뭉치 따위에 왜 관심 을 갖겠어요? 그날 실타래처럼 보였


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드러

이 새빨갛게 타올랐고 길게 찢어진

난 섬뜩한 얼굴이 아이들을 쓱 돌아

입에서 터져나오는 깔깔거리는 소리

보기 전까진 말이죠.그 입술이 살짝

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습니다. 와룽

뒤틀리며 삐죽이 튀어나와 기괴한 미

과 그로박 근처에 모여 앉아 요기를

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하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접시를

눈이 마주쳐 얼어붙어 버린 아이들은

집어던지며 달아났는데 그 머리통은

놀라 입만 떡 벌린 채 비명을 지르는

풀섶으로 사라지는 대신 길을 따라

것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코 쪽으로 맹렬하게 굴러오기 시작

“주릭 굴루뚝 승이르다!”

“정말 수치스럽다!” 그 사건을 전해들은 조코의 아버 지는 이번에도 기염을 토했습니다. “맞아요! 아버지!” 조코도 이젠 거기 맞장구를 칠 만 큼 아버지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했습니다. 잠시 움찔 했지만, 코앞까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 로 내달리자 그 머리통은 다시 쪼르 륵 굴러 실뭉치 같은 머리칼로 둘둘 휘감긴 채 대나무숲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는데 조코만 밭 한 가운데에 남 아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습니 다. 순다어로 주릭은 귀신, 굴루뚝은 ‘굴러다닌다’, 승이르는 ‘비웃음’이 란 의미이니 ‘굴러다니며 비웃고 다 니는 귀신’이란 뜻인데 정말 이름값 을 하는 놈이었어요. 네덜란드 강점 기 당시 경찰에 붙잡힌 독립투사들이 인근 대나무 숲에서 참수당하곤 했는 데 그 잘린 머리들이 수습되지 않아 굴러다니는 머리통 귀신 굴루뚝 승이 르가 되어 출몰한다 합니다. 조코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들은 수마트라 빠당 출신 아버지는 ‘수치 스럽다’고 크게 분개하더니 곧바로 자바 지역 뿌르발링가로 이사를 결정 했습니다. 눈앞에 출몰한 귀신을 겁 내지 않고 끝까지 관찰한 자신이 절 대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 게 아니라 믿었던 어린 조코는 그 일로 마음을 다쳤지만 나이 먹은 후 뿌르발링가 논두렁 풀섶 앞에 멈춰서 조코를 향 해 서서히 시선을 돌리는 군둘 쁘링 이스를 보는 순간 그때 부모님이 왜 그런 말씀을 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 다가와 펄쩍 뛰어오르는 머리통과

“장단 맞추지만 말고 좀 제대로 못

눈이 마추친 순간 조코는 군화발로

날아? 다 큰 놈이 아직도 창자가 바

냅다 걷어차 버렸습니다. 깔깔거리

닥에 끌리잖아! 잠비 사는 너희 외삼

던 웃음소리는 ‘억’하는 외마디 비명

촌도 그러다가 치질 걸리신 거야!”

이름이 민머리라는 의미를 담은

으로 바뀌었고 머리통은 그로박 너머

만큼 실타래가 아니라 일견 야자열매

수풀 속으로 멀찍이 날아가버리고 말

처럼 보이는 군둘 쁘링이스는 두 눈

았습니다.

하지만 조코의 어머니는 다 큰 아 들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세

47 배동선


사람은 지금 스라유 강변 상공에서

태아를 뽑아 먹거나 갓난아기 무덤을

가리켰습니다. 아까 소또아얌 와룽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날고 있었습

파헤쳐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가문

앞에서 후각을 자극했던 맛있는 냄

니다.

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같은 부류와

새가 그쪽에서 풍겨왔습니다. 와룽에

혼맥을 맺는데 조코의 어머니도 잠비

앉아있다가 군둘 쁘링이스의 출현으

빨라식 집안 여인입니다.

로 혼비백산해 달아났던 젊은 여자.

“굴러다니다니! 굴러다니다니! 그 것도 킬킬거리면서!” 맨 앞에 날아가던 아버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역시 깔리만탄이나 발리로 다시 이사해야 할 모양이에요.이 동네는 굴러다니는 놈들 천지라 조코 신부감

“우리 집안 체면이 있지! 주변에 그런 천박한 놈들을 두고 살다니!”

구하긴 틀렸어요.”

그 갈래길 와룽 앞에서 사냥감을 찾 곤 하던 조코가 그날 그녀의 특별한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그래, 바로 이 피냄새야.”

깔리만탄의 꾸양, 발리의 레약도

아버지는 어느새 마을 외곽의 한

조코의 집안은 대대로 빨라식 흑

수마트라 미낭까바우의 빨라식과 똑

집을 향해 쏜살같이 날았고 그 뒤를

마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주술을 완전

같은 습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조코

따르는 조코와 어머니의 입에선 채찍

히 체득하면 성인이 되는 보름날 밤,

는 내심 외국 신부도 염두에 두고 있

같은 혀가 길게 뻗어 나와 무섭게 요

머리통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목 밑

었어요. 말레이시아의 뻐낭갈, 캄보

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으로 허파와 위, 간, 창자 같은 내장들

디아의 압, 태국의 크라슈에도 모두

을 주렁주렁 매달고 밤하늘을 날아다

먼 친척뻘 되니까요.

니면서 사람이나 가축을 공격해 피를 빨아먹게 되죠. 일부 몰지각한 빨라 식들은 막무가내로 임산부를 공격해

연관검색 알고리즘 / 배동선

“이쪽이에요.” 조코가 십이지장을 뻗어 방향을

PS. 공중을 떠다니는 빨라식, 레 약, 꾸양 같은 머리통 귀신들과 길바 닥을 굴러다니는 머리통 굴루뚝 승 이르나 군둘 쁘링이스 사이의 혼담은 그래서 들어본 적 없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 먹고 나면 어떤 단어나 상황이 닥치는 순간 머리 속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생긴다. 관념이나 특정 장면일 수도 있는 그것은 인 터넷 포털의 연관 검색어처럼 사뭇 자동적이지만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자동차’라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의 드림카 를, 또 어떤 이는 가장 치명적이었던 교통사고 경험을 떠올리는 것처럼. 인생의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난 상무대 시절 소대전투 훈련을 떠올리 곤 했다. 무등산 산자락을 깎아 만든 넓은 개활지는 점점 좁아지면서 높 은 고지를 향했고 적 진지 턱 밑, 거의 수직으로 난 비탈에서 우린 M16 소 총에 착검하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 올라갔다. 그때 그 가파른 비탈에 수 없이 미끄러지면서 전투라는 게 영화와 달리 전혀 낭만적이지도, 영웅적 이지도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포탄과 수류탄이 작렬하여 파편을 흩뿌리고 총탄이 빗발쳐 살을 찢고 뼈를 쪼개는 진짜 전장이었다면 우린 대부분 그 비탈 밑 수북한 시체더미 속에 눕게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절 대 불가능할 것만 같은 고지점령. 한국전쟁 막바지에 중부전선 철의 삼각 지대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그때마다 양측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인명피해를 낸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생의 전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48


투 속에서 매번 비탈에 마주친 나는

든 그렇지 않든 자기들끼리 몰래 합

심장 근처를 꿰뚫려 본 경험에 비추

마침내 고지를 점령해내는 승리자일

을 맞춘 뒤 어떤 귀띔도 듣지 못한 당

어 그 정도 아담 사이즈의 과일 깎는

까? 아니면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자 등에 불시에 함께 비수를 꽂는

칼로는 몇 번을 찔려도 죽을 것 같지

수많은 전사자들 중 한 명이 될 것인

것이 매우 고전적인 수법이었기 때

않았다. 그러면서도 무슨 생사여탈권

가? 죽음이 창궐하는 비탈 밑에 웅

문이었을까? 억장이 무너질 법한 그

이라도 쥔 듯 겁박하는 모습에 난 한

크려 장미빛 미래를 꿈꿀 수는 없다.

상황에서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이건

마디 응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하지만 천운을 얻어 거기서 살아나면

표절이라고 외치고 싶은 유사한 장면

가 교민사회 특정 모임에 가입하는

전투력이 놀랍도록 상승한다. 무엇보

이 불현듯 떠올랐다.

건 누군가의 용병이 되어 다른 누군

다도 맷집 부분에서.

태초처럼 오래 전으로 느껴지던

가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닌데, 양다 리요?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겁니

몇 해 전 실로 오랜만에, 온통 나를

지난 세기 막판에 공장장과 창고장은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선 일

물론 시내 지사장까지 아침 일찍 회

이 있다. 그 익숙한 감각은 새삼스러

의실에 자리를 잡고 내가 공장에 도

그들이 정작 문제삼은 것이 양다

움을 넘어 반갑기까지 했다. 씩씩거

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맹공격을 퍼부

리 문제가 아니라 등단 장사를 비난

리며 한인회 도서관에 들어선 자그마

었다. 사건이 시작된 것은 공장장을

한 내 블로그 글임을 알게 된 것은 얼

한 체구의 회장이 곧바로 나를 참소

통해 비자금 명목으로 횡령한 회사돈

마 후의 일이다. 돈을 받고 작가와 시

하기 시작하자 거기 모인 어르신들은

을 후임 공장장으로 잠정 내정되어

인으로 등단시키는 문단의 반칙 행

돌연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싸늘한

부임한 내가 함께 은폐해 주려 하지

위를 지적한 그 글에 왜 발이 저렸을

시선을 던졌다. 이미 사전 교감을 했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난 그

까? 하필 그 시기에 단체 차원에서

을 테니 이렇게 전개될 줄 뻔히 알고

럴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그래서 그

또 다른 이와 물밑에서 은밀하게, 그

있었으면서도 방금 전까지 짐짓 아무

들은 더욱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예

러나 성공적으로 진행하던 등단 장

렇지 않게 나와 담소하던 그들이 사

전 본사 시절 가깝게 지냈으면서도

사가 그 글로 방해를 받았다 한들 그

실은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했을까 미

결정적 이해관계가 뒤틀리자 우린 그

걸 내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

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렇게도 간단히 서로를 파괴해야 하는

글을 블로그에서 내리고 사과문 게재

사이가 되었고 그들은 나보다 우월한

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들은 당초

지위에서 그간 미행을 붙이고 뒷조사

계획한 대로 날 공식 제명했지만 밥

한 결과들을 그날 아침 테이블 위에

줄을 끊지는 못했다. 맷집이 좋아진

펼쳐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침을 튀

탓일까? 과도가 무뎠던 탓일까?

‘적대적인 단체와 양다리를 걸쳐 우리 모임에 위해를 가하는 저 인간 을 제명해야 합니다’ 교민사회 문인들을 대변할 것만

기며 위협을 가했다. ‘내 말 안 들으

같았던 문예모임의 회장은 그렇게 기

면 너희 가족 절대 무사히 한국 돌아

염을 토했고 ‘맞아요, 어젠 저 인간

가지 못해!’ 그런 말을 정말 듣게 될

이 나한테 욕까지 했어요’ 사무국장

줄 꿈에도 몰랐다.

은 눈물마저 찔끔 흘리며 장단을 맞 췄다. 정말 수상한 점은 한인회 부회 장이 상공회의소 이사를 동시에 맡으 면 ‘적극적이며 다양한 교민사회 활 동’을 한다고 칭송하지만 두 개의 문 예단체에 함께 이름을 올리면 ‘박쥐 같이 양다리 걸치는 인물’이 된다는

까?”

세상의 모든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연상시켜야 할 문학과 문단 이 등단 장사 같은 파렴치한 개념을 연상시키는 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

그로부터 한 달쯤 후 칼집이 난 내

다. ‘등단’이란 단어가 등장할 때마

끼장 자동차 바퀴가 출근 길 고속도

다 난 이젠 한인회 도서관의 그 장면

로에서 터져버렸고 이듬해 난 결국

을 떠올린다. 다음과 네이버 같은 인

한화그룹에서 떨려나왔다. 그들은 마

터넷 포털의 연관검색어 알고리즘은

침내 성공적으로 내 밥줄을 끊어 당

알 길 없지만 우리 머리 속에서 벌어

초의 악의를 관철한 것이다.

지는 ‘연관 장면’ 연상의 알고리즘은

부분이었다. 문인들의 넘쳐흐르는 감

그 사건이 아직도 생생했으니 그

수성과 창의력이 어쩌면 그런 식으로

날 한인회 도서관에서 전개되던 상황

발현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치에 맞

에 실소가 터진 건 당연했다. 장창에

아마도 빈도보다는 ‘어처구니 없음’ 에 방점이 찍힌 모양이다.

49 배동선


천지창조 이후 몇 세대에 걸쳐 아

알츠하이머가 찾아왔을 때에도 그

담 후손들이 대략 천 살 가까이 살았

는 여전히 지성적이고 친근했습니

다는 성서의 증언은 인류 역사가 처

다. 하지만 이내 대화가 곧잘 엉켜 갈

시간

음부터 초고령 사회로 시작했다는 의

피를 잡지 못했고 말을 제대로 마무

미일 수 있습니다. 그게 심각한 문제

리 짓지 못하는 모습이 지인들에게

/ 배동선

들을 야기했는지 하나님은 노아의 방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주 사건 이후 인간의 수명을 서서히

도 그가 이상해졌다는 걸 느꼈는데

줄여 결국 100년 쯤으로 세팅해 놓게

그후 6개월쯤부터 더 이상 히다얏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씨를 공식 석상에서 볼 수 없었습니

면서 왜 빨리 죽게 만든 걸까요? 물

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퇴진이었어

론 그 100년 조차도 우주와 역사를

요. 빛나는 지성조차 알츠하이머 앞

통찰하는 존재에게 한낱 찰나에 불과

에서는 하릴없이 녹슬어 무너져버릴

하겠지만 인간 개인이 맨몸으로 감당

뿐이었습니다.

우리들의

하기엔 여전히 너무 긴 시간입니다.

어머니의 치매는 강단을 떠나자마

예전 살롱프로 잡지의 사주 히다

자 곧바로 찾아왔습니다. 피아니스트

얏씨가 처음 변하기 시작하던 순간을

로서 한국교회음악에 나름대로 발자

기억합니다. 그는 오래전 수하르토

취를 남겼고 핸드벨 연주를 한국에

의 철권통치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처음 도입해 대중화에 앞장섰던 어머

높이다가 폐간당한 템포(Tempo)지의

니는 70세가 넘어 비로서 긴 경제생

해직 기자 출신입니다. 수하르토가

활을 마쳤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몇

32년간 지켰던 권좌에서 마침내 밀

년 간 지속적인 기억력 감퇴를 겪었

려나고 인도네시아에 민주화 바람이

고 그래서 가끔 어처구니없는 실수

분 후에도 그는 정치기자로 돌아가

를 저지르곤 했지만 아직 아무도 대

지 않고 그 대신 당시 불모지였던 인

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도네시아 미용잡지 시장에 뛰어들어

가 어느날 어머니는 혼자 집을 찾아

살론프로(Salon Pro)지를 창간했습니

올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다. 지금도 현지 미용시장에서 가장

가 좀 더 활달해 친구들과 수다 떨길

유력한 매체입니다. 뛰어난 통찰력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누가 조금만

놀라운 친화력을 지닌 그와의 대화

더 신경을 쓰고 관리해 주었다면, 치

는 늘 지성의 한계를 시험하는 참신

매가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 않았을지

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릅니다. 자식들이 보다 자주 찾아 뵈며 귀찮도록 말도 걸고 여기저기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50


모시고 다녔더라도 조금은 도움이 되

선을 다해 맞장구를 쳐 주려 노력했

던걸까요? 갑작스러운 안도감에 가

었겠죠. 하지만 어머니는 대체로 방

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배려는 치매

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경찰이 끝까

치되고 있었습니다. 친할머니도 외할

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지 노력해 준 결과였습니다. 그날 눈

머니도 오랫동안 치매를 겪은 후 세 상을 떠나셨죠. 너무나 후회스럽습니 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몇 번이나 길 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아버 지를 탓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물이 왈칵 쏟아진 건 우리 사회가 아 직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 을까요? 아니면 그게 결코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

딸도 없는 집안에서 무심한 아들들

그때마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나는 어

이 제각기 가장이 되어 자기 자식들

찌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 했습

챙기기 바쁜 사이 치매노인이 된 어머

니다. 다행히 경찰과 이웃들의 도움

니를 돌보는 것은 고령에 접어들면서

으로 매번 기적적으로 찾아 다시 모

그때마다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하

눈에 띄게 체구가 작아져 보이던

셔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나님이 그 옛날 천 살 가까이 살던 인

아주 심각해진 적도 있습니다. 2년 전

간들 수명을 더 늘려주진

아버지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엔 아버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어 머니는 혼자 마포역에서 전철을 탔습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오래전 세상

니다. 형님 가족들이 마포와 공덕동

을 떠난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

합정동 사이를 하루 종일 다니며 탐

습니다. 어머니를 찾아

문했고 경철서에도 몇 번씩이나 들렀 지만 어머니가 어디로 가셨는지, 얼

뵐 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마나 멀리 가셨을지, 알 길이 없었습

“난 여길 지키고 있어야 해요. 어머니

니다. 난 한국 들어가는 비행기표를

가 곧 돌아오실 텐데

백방으로 구했지만 당일 표는 하늘의

지금 나가면 길이 엇갈려요.” 어머

별따기였어요. 물론 내가 한국에 간

니는 늘 외할머니가 외출에서 돌아

다 한들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건 잘 알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억 속

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

의 당신은 날이 갈 수록 점점 더 어려

지는데 자카르타에 가만이 앉아있을

지더니 급기야 결혼 전으로 돌아갔고

수 없었습니다.

이젠 우리 형제들 누구도 더 이상 기

저녁 8시쯤 거의 자포자기할 무

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릴 낳았다는

렵 한 통의 카톡이 들어왔습니다. 어

걸 잊고 만 것이죠. 하지만 남의 입장

머니를 방화역에서 찾았다는 연락

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은 몸에 배어

이었어요. 혼자 그리 멀리 가신 겁니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내 말에 최

다. 어머니는 누굴 찾아 어딜 가려 했

후에도 몇 번 더 어머니를 잃어버리 고 찾아 헤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못할 망정 오히려 10분의 1로 줄 여버린 이유를 새삼 이해하기 시작했 습니다. 늙고 병들어 약해지고 초라해진 인간들 모습이 하나님조차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51 배동선



사공경

Sagong kyung 나는 너에게 직선의 사고에서 탈피해 인생을 느리게 성찰하고 싶거든 인도네시아인들 속으로 걸어가라고 자주 말했다. 그러나 정작 30년을 이곳에 산 나는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경계에 사는 주변인이다. 디아스포라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우리와 다른 인도네시아 문화의 경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자 한다.

사공 경 / Sagong Kyung 한인니문화연구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인니 문화탐방 300회, 열린강좌 60회를 진행했다. 문학상인 ‘인도네시아 이야기’도 10회를 개최 했다.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JIKS)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자카르타 박물관노트>와 <서부자바의 오래된 정원>을 출간한 바 있으 며, 바틱을 사랑해서 “느린 영혼의 여행, 바틱” 이라는 제목으로 수차례 바틱 전시회와 강의 를 했다.


도 / 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또어떤길은정말발디디고싶지않았지만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 이라면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 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 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헤쳐온길가득나를혼자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세월을 넘어선 아름다움, Pantjoran Tea House 그리고 글로독 / 사공 경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침 일찍

시계를 돌려 세기 전의 시간 속으

일상을 시작하기 전에 끄레떽 담배의

로 걸어 들어간다. 글로독(Glodok) 시

향기와 어울리는 차의 맛을 즐긴다.

장 입구에 있는 Pantjoran Tea House

차는 특히 시골 여성들이 즐겨 마시

앞, 정확히 말하면 바티비아와 글로

는 전통 음료이다. 인도네시아 차의

독으로 나누어지는 모퉁이에 8개의

대표 명사 사리왕이(Sariwangi)의 “차

차 주전자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는 인도네시아에서 200 년 동안 매일

그 옛날(1663-1666년) 중국인과 현

밥상에 올랐다.”로

지인 노동자를 관리하는 VOC(네덜

시작하는 광고를 보면 인도네시아 에서 차는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과 같다. 또한 티타임이 가족생활과 함 께 함을 알 수 있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54

란드 동인도 회사)의 중간관리자인 중

국인 간지(Gan Djie)와 현지인 부인은 이 지역의 고단한 노동자나 행상인, 이주민들을 위해 잘 우려낸 8개의 차 주전자를 사무소 앞에 준비해 두었

다. 마음 넓은 부부가 누구라도 항상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한 거였다. 지금의 Pantjoran Tea House와 그 리 멀지 않는 곳이었다. 이 차를 마시 기 위해 사람들은 차이나타운의 간지 사무소를 찾았다. 이 지역은 나중에 Patekoan으로 알려졌는데, 중국어로 Pa는 8이고 Te-Koan은 주전자라는 뜻이다. Pantjoran Tea House는 간지 부부의 따뜻한 마음을 기리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찻집 앞에 매일 8개의 차 주전자를 준비하고 있다.


비아의 깔리브사르 운하, 티지그라흐

청화약국

트(Tijgergracht, 현 Jl. Pos Kota) 주변에

글로독 차이나타운의 랜드 마크

심었다.

인 이 건물은 1635년에 지어져 사무 실 건물로 사용되다가 1928년에 청

차와 관련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약국(Apothek Chung Hwa)으로 문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 1629년 마타람

연다. 이는 자카르타에서 두 번째로

왕국은 두 번째 바타바아를 공격했

오래된 약국이다. 옛 자료에는 독일

다. 마타람 세력은 네덜란드가 바타

바이엘 제약사의 아스피린(Bayer &

비아를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찔리웅

Aspirin) 광고판 간판이 보인다. 서양

(Ciliwung)강을 오염시켰다. 허나 아직

식 현대 약품과 중국의 전통 약(한약)

은 심각한 정도는 아니어서 물을 끓

을 함께 판매하는 약국이었던 셈이

이지 않고 바로 마실 수 있었다. 1668

다.

년에 살락 화산의 대폭발로진흙과 광 물질과 화산재로 찔리웅 강은 많이

청화약국은 바타비아 시절에 중요

오염되었다. 바타비아의 많은 주민들

한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행

이 이질과 콜레라로 사망했다. 하지

정 기간 동안 이 지역은 남쪽에서 바

만 중국인 희생자는 적었다. 끓인 물

타비아시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청 화약국이 그 관문이었다. 이 약국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글로독이고, 왼

로 차를 우려내는 중국의 전통이 목 위_청화약국 당시 모습 (구글이미지) 아래_현재 Pantjoran Tea House 모습

쪽은 바티비아로 가는 길이 된다. 청

에서 박테리아가 죽는다는 사실을 몰 랐다. 단지 중국 사람들이 차를 마시

화약국은 자카르타의 꼬따 뚜아(Old

기 때문에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Town)와 차이나타운 지역의 관문 역

할을 하는 역사적인 건물이다.

숨을 구한 셈이었다. 당시에는 100도

생각한 사람들은 찻잎을 씹고 다녔다 2015년 이전의 청화약국 건물은 제

고 한다. 그 당시 차이나타운에서 중

1930년 사진을 보면 청화약국 주

대로 사용되지 않았었다. 건물 주변

국인들이 차를 마시는 문화는 이미

변은 무역활동과 운송수단들로 매우

에 노점상이 많아 아주 혼잡했기 때

일상이었다.

혼잡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일본

문이다. 2015년 12월, 드디어 청화

의 점령기 시절에는 청화약국 바로

약국 건물을 수리해 Pantjoran Tea

앞, 글로독 차이나타운 입구에 일본

House 가 문을 연다. 이는 유네스코

이 만든 글로독 문이 있었다. 약국 앞

세계 문화유산에 자카르타의 구 도

에는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독립 후

시, 즉 꼬따 뚜아를 등재하기 위한 정

인 1948년 식민잔재인 글로독 입구

부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서이다.

유래가 있다. 글로독 지역의 물이 깨

에 있는 문을 없애버렸다. 인도네시

건축가 아마드 주하라(Ahmad Djuhara)

끗해 중국인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

아 사람과 중국 사람을 둘로 나누지

가 수리를 지휘했다고 한다.

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글로독에서 2

속 재산 운송 수단인 전철을 수카르

이 지역의 이름인 빤쪼란, 글로독 (Pancoran=Pantjoran, Glodok)엔 나름의

킬로 떨어진 바타비아까지 파이프로

말자는 의미도 있었으리라. 1957년 청화약국 앞을 지나던 네덜란드의 상

빤쪼란 글로독

차와 꼬따뚜아 그리고 전염병

물을 끌어 가져갔다고 한다. 글로독 은 옛 시청(현 자카르타 역사박물관) 광

글로독 지역과 자카르타 꼬따 뚜

장 한가운데에 있는, 1743년경에 지

아 개발의 역사는 차와 분리될 수 없

어진 작은 팔각형 분수대에서 나오

다. 차는 무역 상품일 뿐만 아니라 전

는 물의 소리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통이 되었다. VOC(동인도회사)에서

쏟아지는 물, 흘러내리는 물이 인도

1997년 글로독 차이나타운의 전

일한 식물학자이자 일본을 연구하는

네시아어로 빤쭈란이어서 이 지역을

통 시장을 대체하는 대형 쇼핑센터

학자인 독일인 안드레아스 클리예르

빤쪼란(빤쭈란에서 유래) 글로독이라

가 세워지고, 청화약국 주변의 도로

(Andreas Cleyer)가 1684년에 일본에

고 부른다. 이로 미루어 당시엔 깨끗

를 넓히는 등 급속한 변화가 있었다.

서 처음으로 차 종자를 가져와 바타

한 물이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알 수

노(Soekarno) 대통령이 폐지했다. 너 무 오래 되었고, 무엇보다 전철은 식 민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55 사공 경


있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분수대에서

금지했을 때 록그룹 Koes Brothers

나오는 물을 사용했다.

는 비틀즈 노래를 연주했다는 이유로

1740년은 중국인들의 피가 흘러 넘치는 피의 해가 되었다. 그해 10월 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중국인들 을 바타비아시 주변의 사회 문제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설탕 가격의 폭

사적인 교도소는 이제 사라져 Harco 쇼핑센터 전자상가가 되었다.

바타비아

이 역사적인 거리에 문 을 연 Pantjoran Tea House로 들어가 보자. 문을 열면 계산대 뒷벽 모두가 빨간 색으로 된, 차를 보관하는 장식장이 있다. 옛 중국 사람들의 차 사랑이 어 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바

락으로 사탕수수 공장에서 해고된 중

VOC가 바타비아를 건설한 1619

티비아, 글로독, 차에 관한 고서적이

국인들은 일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년 당시에는 바타비아를 ‘동양의 진

비치되어 있다. 차를 사랑한 까르띠

도시범죄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주’라고 불렀다. 아름답고 도시계획

니 책도 전시되어있다. Tea House 주

VOC 병사들은 중국인들을 죽였고,

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인, Lin Che Wei 씨가 얼마나 역사와

나중에 북부 자바에서는 반란군이 발

이 지역엔 허허로운 공터가 많았고,

차 문화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알

생했다. 그 당시 VOC 총독인 Adriaan

빠자자란(Padjadjaran) 힌두왕국이 통

수 있다.

Valckenier(1737-1741)가 대학살

치하고 있었다. VOC는 1622년에 운

지시를 내렸다.

하와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청

Baron van Imhoff(1743-1750)가 총독이 된 후, 중국인들은 도시의 요 새(현 꼬따뚜아) 바깥 한 곳에 모여서 살게 되었다. 그 곳이 현재의 글로독 이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 튼튼한 건 물을 세웠다. 이 지역은 큰 시장을 가 지고 있고, 항구와도 가까워 상업적 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글로 독 지역과 주변은 마침내 바타비아의

화약국 주변은 농장 지역이었는데, 주변에 여러 주거지가 건설되기 시작 했다. 당시의 깔리브사르(Kalibesar)는 구불구불한 상태였다. 1627년엔 글 로독 가까운 곳에 있는 깔리브사르 운하와 동쪽 성벽이 건설되었다. 도 시 벽 내의 일부 지역은 점점 발전했 고, 현재 꼬따 뚜아라 불리는 바타비 아 지역과 연결되었다.

차이나타운이 되어 200년 동안 무역

바타비아의 옛 중심지 꼬따 뚜아

센터 역할을 했다. 1950~1960년대

는 Tea House 에서 걸어서 15분 거

에는 대부분의 자본이 글로독 지역에

리이다. 바타비아(구 자카르타)는 점

서 유통되었다.

점 커진다. 1632년에 운하와 깔리브

글로독 무역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글로독(Glodok)이라는 이름의 식민지 감옥이 있었다. 1743년에 지 어진 이 감옥은 처음에는 중국인만 구금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독립 운동가들과 독립선언 서 작성자인 하따(Mohammad Hatta) 또한 그곳에 구금되었다. 3.1운동 자 금을 조달해 주다가 쫓겨서 중국을 거쳐 자바 땅을 최초로 밟은 장윤원 선생님도 잠시 구금당했던 곳이고, 일본 패망 후 전범으로 몰린 조선인 포로감시원 4명이 사형을 당했던 곳 이기도 하다. 록 음악을 수카르노가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56

글로독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이 역

Pantjoran Tea House

사르의 건설이 계속되고, 이 지역은 운하에 의해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진다. 오래되어 낡은 건물은 벽돌과 시멘트를 사용해 다시 짓기 시작하 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1635 년엔 도로와 운하의 건설은 도시의 서쪽 가장자리에서도 계속 진행되었 다. 청화약국 건물이 이때 세워진다. 1650년에 이르자 군사적 위협이 없 을지라도 성벽(City Wall) 내부의 건물

인도네시아의 차 문화를 포함해서 차에 대한 정보가 적힌 액자가 15개 정도 있고, 중국풍의 창문과 다례로 사용하는 찻잔과 도구들이 몇 테이블 에 예술품처럼 전시되어 있다. 관우 를 그린 유화도 전시되어 있다. 자리 를 잡고 앉으면 중국의 우아한 찻집 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메뉴를 달라고 하면 신문을 가지 고 온다. 신문 이름은 Pantjoran Tea House다. 1면에 100년의 아름다움 을 간직한 1900년대의 Tea House 전 경이 있다. 바타비아와 글로독, 차, Tea House의 역사가 적혀 있다. 3, 4, 5, 6면은 메뉴인데, 그림으로만 봐 도 건강식임을 알 수가 있다. 한약재 료, 닭, 인삼이 들어간 스프와 비트 나 시고렝은 이 찻집의 자랑거리. 7면은 Pantjoran Tea House에서 바타비아 금융 지역(Kawasan Finansial Batavia)까 지 걷는 코스가 그림으로 잘 그려져 있다. 8면은 Tea House 에서 차이나 타운(Kawasan Pecinan Batavia)을 걷는 코스가 잘 그려져 있는 지도가 있다.

구조는 유지되었다. 이 시대에 도시

중국에서 시작(탄생)된 차의 역사

벽 뒤에 있는 지역은 1.5km에 이른

를 요약해 놓은 액자도 있다. 읽어

다. 1667년에 바타비아가 도시로 형

보면 차의 역사는 놀랍게도 기원전

태를 갖추게 된다.

27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뜨거 운 물 컵에 찻잎을 넣고 불어서 마시


는 차를 발견한 중국의 두 번째 황제

차는 오늘날처럼 대중화 된 문화

인 쉔눙(Shen Nung)에 대한 이야기다.

로 자리 잡기까지 그 잎맥보다도 더 복잡다단한 길을 역사와 함께 걸어

1101-1125년에 Hui Tsung 황제

온 우여곡절의 산물이었다. 어쨌거

는 차에 사로잡혀 차 잘 만드는 방법

나 겸손하고 평온한 마음, 타인을 배

에 대한 책을 썼다. 그는 심지어 왕궁

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차는 그

에서 차 맛보기 토너먼트 경기를 개

대로가 아름다움이다. Pantjoran Tea

최하였다. 그는 차에 대한 열정으로

House 는 그 전부가 고스란히 아름다

정신이 팔려 몽골이 그 왕국을 점령

움이다.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 해진다.

간지 부부의 인정과 온기는 오늘 도 Pantjoran Tea House 앞에서 8

중국에서 일본으로 차가 들어가게

개의 찻주전자로 만날 수 있다. Tea

된 건 불교의 전파와 관계가 있다. 고

House 대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대의 중국과 일본, 한국은 불교국이

설명하는 주인, Lin Che Wei 씨의 경

라는 공통점과 함께 차 문화도 공유

건하기까지 한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

했다. 스님들은 차를 마시며 명상에

고 찻집을 나선다. 국적이나 종족에

들었다. 차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초

관계없이 화합된 사회 공동체를 위

의선사도 그런 스님들 중의 한 분이

해서 차를 준비한 간지 부부처럼 ‘사

었다. 스님들은 다도가 깨달음에 도

람을 위한 차’, ‘화합을 위한 차’라는

움이 된다고 믿었던 것일까.

철학을 지키고 싶다는 주인의 소신에 응원의 박수를 보탠다.

이처럼 소수의 특별한 마니아들이 애지중지했던 차는 한 발 앞서 산업

앞만 보며 달려 온 바쁜 일상으

화에 성공한 유럽 열강에 의해 찻잔

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숨 고를

속에 피식민 노동자들의 땀과 피눈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멈춘

이 차와 함께 담겼다. 1830년네덜란

Pantjoran Tea House 가 있어서 글로

드 식민정부가 강제경작제도를 시작

독은 한층 더 깊어 보인다. 차 한 잔의

한다. 차 재배가 호황을 누리자 네덜

여유와 더불어 오랜 사연들을 덧칠한

란드 식민정부는 약 30 년 동안 자체

들여왔다. 1870년 농업법은 민간기

농장을 운영했다. 그 기간 동안에 현

지난 세월 앞에서 까닭 모르게 겸손

업으로 하여금 75년의 기한의 임차

지인들은 2등급의 차를 마시기 시작

해진다.

지에 차 재배를 할 수 있도록 함에 따

했고 식민정부는 많은 수익을 얻었

라 세계 2차 대전까지 차 산업이 황

‘오래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

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중국의 한

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노여

연구센터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차는

움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

열대성 기후로 인해 일본이나 중국에

며 우리함께 차를 마셔요’- 이해인

다. 거의 1세기 후인 1824년에 Buitenzorg(보고르) 식물원(1817년 설 립)에 차나무를 심음으로써 비로소

식물원은 완성된 느낌이 들었다.

서 재배되는 품종보다 많은 항산화 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현재 세계 7위 차 생산국이자 수출국

인도네시아 일반 주민들은 1826

이다.

참고문헌 pantjoranteahouse.com latitudes.nu

년에 보고르와 1827년 Garut에 심은 차 나무를 보고 그 식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1877-1878 년에 인도와 스리랑카(실론)로부터 신맛이 나는 차 종자를 인도네시아에

강제작물제도, 아편전쟁,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인한 혁명, 그 중독성은 어떻게 차가 지닌 영성과 보편적으로 관련될 수 있을까?

57 사공 경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나무, 브링인(Beringin) / 사공 경

족자카르타의 브링인 나무 (사진=사공 경)

만물이 그러하겠으나 인간도 몸

탄을 하면서 눈여겨봤는데 한국에서

피 생물은 종(species) -속(genus) -

과 마음이 자연에 깃들어 살았다. 본

내가 키우던 벤자민 고무나무와 같은

과(family) -목(order) -강(class) -문

래는 자연이었기 때문일까. 자연에서

종인 줄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pylum,division) -계(kingdom)로 나누

먹을거리를 찾고 태양과 달과 나무에

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공기정화용

어진다. 속(Genus)은 보통 우리가 알

게서 생동하는 힘을 느끼고 생의 의

으로 좋다고 하여 주로 실내에서 키

고 있는 생물의 이름을 말한다. 종

미를 발견했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우고 겨울이 되면 비싸고 귀한 나무

(Species)은 주로 같은 속의 생물을 특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래서일까. 큰

가 죽을까봐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정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붙이는 학

나무 앞에 서면 나무의 기운이 느껴

주며 반짝반짝 윤택이 나던 잎을 닦

명이다. 그래서 발견한 사람의 이름

진다.

아주며 정성을 쏟았던 관엽식물이기

을 딴다. 종과 속은 이태리 체로 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마을 한 가운 데나 도로 옆에 둥글게 잘 다듬어진 큰 나무를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어 로는 브링인(Beringin) 나무이며 무성 한 잎으로 큰 그늘을 만들며, 거대한 뿌리와 줄기와 함께 수많은 공기뿌 리가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어 장관을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58

때문이다. 자바의 소도시는 보통 약 100m²의 광장(alun-alun)이 있는데, 그 중앙에 심는다. 인도네시아 사람 들은 신성한 나무라 여겨 그 지역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브링인(Beringin) 나무는?

벤자민 고무나무는 한국에서는 최 대 높이 4~5m 정도 자라지만, 인도 네시아에서는 20m 이상까지 자라며 원산지 인도에서는 30m(98피트)까지 자란다. 나무갓이 넓게 퍼져 그늘을 만들고, 가지는 주 가지에서 많이 갈 라지고 가늘고 길며 늘어진다. 줄기

이룬다. 야생에서 자란 브링인은 공

인니어로 Waringin이라고도 하

와 가지에는 털이 없으며. 나무줄기

기뿌리가 굵어서 타잔이 타고 다녔던

며, 학명은 Ficus benjamina로 장미

에서 공기뿌리(氣根)가 자라 늘어졌

밧줄같이 보이기도 한다. ‘참 멋지구

목 뽕나무과(Moraceae, Pohon Ara) 무

다가 땅에 닿으면 땅속으로 뻗으면서

나. 이국적이구나. 신령스럽구나’ 감

화과나무속 (Ficus)이다. 아시다시

번식하는 경우도 있다. 공기뿌리도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 물의 흡 수, 양분의 저장에 효율적이다. 또 공 기뿌리는 옆에 있는 나무를 타고 올 라가 감싸서 죽이기도 한다. 물이 충분하며 토양의 유출량이 매우 많은 열대 기후의 경우 이 나무 는 쉽게 자란다. 녹색 잎은 광택이 있 고 부드러우며 회백색 수피와의 대 조가 산뜻하다. 타원형이며 길이는 5~12㎝로 잎의 가장자리가 중앙 맥 에 대해 평행을 이루면서 물결을 이 루고 있다. 두껍고 광택이 나며 고무 질이라 자르면 끈적끈적한 흰 수액이 아나온다. 열매는 지름 8㎝ 정도이며 익으면 붉은 적색을 띤다. 작은 과일 은 몇몇 새가 좋아하기도 한다. 무화 과나무의 아주 아주 오랜 역사는 돌 아보면 우리가 이 나무들을 잘 보호 하면 우리의 미래는 더 풍요롭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도네시아 국장 속의 브링인 나무 1945년 6월 1일 수카르노의 연설 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핵심가치이자 이념으로 자리잡은 빤짜실라는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국가체제의 근본이 되었다. 수카르노는 모든 민족·지역· 종교·문화를 포용할 수 있는 빤짜실 라를 공표하고 이 이념 아래 인도네 시아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 둥글게 다듬어진 브링인 나무는 인도네시아 국장 중에도 올라와 있었 다. 국장 가운데 방패모양으로 묘사 된 인도네시아 5대 철학 빤짜짜실라 중 하나인 브링인은 그 상징이 다양 성의 통일이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빤짜실라를 만든 것처럼 브링인 나무 아래에서 그들의 전통가치관과 생활 양식이 이어져 내려왔다. 다양성 속 의 통일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생활양 식을 지배하는 규범이자 철학이다. 거대한 나무는 국가 권력을 상징

59 사공 경


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로 공기뿌리

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거대한 뿌

바람도 흐르고 하늘도 흐른다. 흐르

도 보인다. 공기뿌리로 인해 나무는

리와 줄기를 보면 마을의 수호신 역

는 세월, 마음, 사람들. 이해인 시인의

더 굵어지고 튼튼해진다. 이처럼 인

할을 했음직하다. 특히 발리에서는

‘흐르는 삶만이 나를 길들인다.’ 라

도네시아는 뿌리의 역할을 다하는 국

브링인 나무를 성스럽게 여겨 제물을

는 시가 생각난다. 거대하게 흐르는

민들의 지속적인 희생과 노력으로 지

바치기도 한다. 우리나라 성황당 앞

자연의 이치를 알 것 같다.

탱되는 것을 의미한다. 넓게 퍼져 있

의 당산나무처럼 브링인 나무 자체가

는 뿌리는 인도네시아에 넓게 퍼져

고사의 대상인 것이다.

있는 많은 섬을 상징하기도 한다.

족자 왕궁 부근에 있는 광장에 우

브링인은 문화와 예배의 원천이

직해 보이는 두 그루의 브링인이 서

브링인과 혼돈하기 쉬운 반얀 나

된다. 종교를 초월해 그들은 그 나무

있다. 광장 입구에서 눈을 가리고 브

무에 대해서도 잠깐 알아보자. 반얀

아래서 먹고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고

링인 나무까지 걸어가는 게임을 한

나무도 보리수도 브링인과 같은 뽕나

토론하는 공동체의 구심체 역할을 하

기억이 난다. 아무도 똑바로 목적지

무과 무화과 속이다. (인도) 보리수

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까지 걸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인생

(Ficus religiosa)는 부처가 이 나무 밑에

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계획은 인

서 고행 후 득도하여 보디(Bodhi, 菩提,

간이 하나 인도는 신이 한다는 것을,

깨달음)라는 이름을 얻었다.

종족 별로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 서도 통일 국가를 유지하고 있고 국 민의 동질성을 유지해온 것은 바로 건국이념인 “빤짜실라 정신” 그 중에 서도 브링인으로 대변되는 다양성의 속의 통일이다. 이처럼 브링인은 인 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나무이나 공식 나무는 아니다. 허나 인도네시아 국 민들은 브링인을 통해서 인도네시아 를 관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광장 속 브링인이 일깨워 주었다. 브링인이

반얀 나무는 학명이 Ficus indica

있는 곳은 어디나 성역이라는 생각이

또는 Ficus benghalensis 이며 영명

들지만 왕궁과 가까운 곳이라 더욱

은 Banyan tree(반얀나무)인데, 벵골

그랬다.곳곳에서 브링인 가로수를 만

고무나무, 벵골 보리수, banian라 부

나지만 따만미니 민속촌에 줄지어 서 있는 브링인은 정갈하고 우아한 모습 으로 우리를 반긴다. 다양한 종족의

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니그로다 (Nigrodha, Nigodha)나무, 니구율수(尼 拘律樹)이다.

가옥과 문화를 아우르는 민속촌은 다

반얀 트리는 인도가 원산지이면서

모든 사회계층과 민족을 통합하는

민족, 다종교, 다문화 국가인 인도네

인도의 국목(國木)으로 브링인처럼

것이 당시의 우선적 과제였음을 국장

시아를 통합해주는 역할을 상징하는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에서 수많은

속의 브링인을 통해 알 수 있다.

브링인 나무 민속촌에 펼쳐지는 다양

공기뿌리가 자라나 땅 속에 박혀 다

성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이해하기 위

시 뿌리가 되어 자라는 속성이 있다.

해서는 꼭 알아야 할 가치이다.

브링인보다 더 번식력이 강해 수많은

참고로 제 2대 수하르토(Soeharto) 대통령은 정당 골카르(Golongan Karya, Golkar)의 로고로 브링인을 사용하여

2019년 5월에 개장한 서울 식물원

공기뿌리가 이어져 한 나무가 숲처럼

그 나무가 지니는 뿌리 깊은 신념인

에서 벤자민 고무나무를 만나니 반가

보이기도 한다. 캘커타 식물원에는

신성함을 이용하였다.

웠다. 변종으로 잎에 황백색의 무늬

한그루의 반얀 나무가 공기뿌리의 수

가 있는 흔히 ‘Starlight ’라고 부르는

가 4000개이며 19,918m²를 차지하

‘Ficus benjamina L. ‘Variegata’ 이

며 높이가 486m 라고 한다.

그 외... 브링인(Ficus benjamina(Morac.) 나

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보통 기념식 수로 많이 사용한다.

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보고르식물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60

벵골 보리수(Ficus benghalensis): 반얀 트리(Banyan Tree)

특히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1년에 수차례씩 이 나무 밑에서 금식기도를

원 4산책로에서 만난 신성한 나무

멘뗑 지역에 있는 라라종그랑 레

올린다. 줄기에서 흘러내린 공기뿌리

를 들 수 있다. 수카르노 전 대통령이

스토랑 앞에 있는 덜 다듬어진 브링

는 어린이들의 그네로 이용하거나, 원

1957년에 심은 거대한 뿌리와 줄기

인을 보면 자연조건에서 방치한 브링

숭이들이 타고 다니기도한다. 건물 틈

에 염원을 담은 천을 걸어두어도 좋

인은 나무 하나가 반얀 트리처럼 하

새에서도 자라나 건물 전체를 옭아매

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둥지 나무’

나의 숲을 이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

기도 하지만 인도인들은 반얀 트리에

가 너무 많이 기생해 얼핏 보면 브링

이 든다. 올려다보면 구름도 흐르고

신령이 있어 진실한 인간은 도와준다 고 믿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


발리 Buleleng, Munduk에 있는 700년 넘은 자이언트 반얀 트리

보고르 식물원 벤자민 고무나무의 공기뿌리 (사진=사공 경)

발리에는 중앙에 코어가 있는 원

이 시작됐다. 힌두교에서는 반얀 트

서 우리는 물질과 현실이 있음을 이

주의 나무 형태로 된 반얀도 있다. 그

리의 무성한 잎이 주는 나무 그늘은

해할 수 있다.고 힌두 경전 <베다>에

구멍은 동물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되

크리슈나 신의 휴식처라고 한다.

서 말하고 있다. 지상에서 하늘을 이

기도 한다. 잎은 브링인처럼 코끼리 의 사료 또는 접시 대용으로 쓰기도 한다. 반얀 나무는 불교와도 연관이 깊 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일주일을 보 낸 후 반얀 나무에 이르러 7일 간 쭉 가부좌를 한 채 해탈한 기쁨을 향유 하고 2주간 무차린다수와 라자야따

브링인 나무는 인도네시아의 문화다. 브링인 나무는 마을의 구심점으로 지역공동체와 연관성을 갖게 한다. 우리식으로 하면 그 지역의 정자나무 가 되기도 하고 신목이 되어 지역 공 동체의 문화를 향유하는 문화의 중심 지이다.

어 주는 그들의 브링인은 경건하고, 거룩하게 우거져 있다. 브링인 나무에는 역사가 흐른다. 공기뿌리는 긴 끈으로 이어진 그들의 역사이다. 되돌아오지 않는 역사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출렁이는 노래로 잘려나가기도 한다. 잘 잘라지는 가 지처럼. 인도네시아를 밟고 지나갔던 벗겨지지 않는 어둠이지만 공기뿌리

나수에서 성인의 자질을 키우고 깨달

브링인 나무는 하늘을 받들고 땅

로, 새로 피어나는 열매로. 그래서 꽃

음의 기쁨을 누리고 다시 반얀 나무

으로는 공기뿌리가 이어줌으로 우주

이 피지 않는 무화과 나무로 바로 열

아래에서 설법을 했다고 한다. 반얀

의 기운을 담고 신을 지상에서 맞아

매를 맺는 것일까. 피지 않고 스스로

트리는 세계 유명 휴양지의 고급 리

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이

열매 맺는 브링인이여. 인도네시아인

조트나 클럽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

곳에는 조상들의 잔영(殘影)과 얼이

들이여.

다. 발리, 빈탄, 푸껫, 몰디브, 등이다.

스며있고 브링인 그늘 아래에서 제물

서울 남산에도 반얀트리 호텔이 있

을 바치고 제사를 치르고 축제가 펼

다. 이 나무의 독창성과 화려함, 신성

쳐진다.

성과 넓게 퍼지는 상징성과도 잘 어 울린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이야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2009. 11. 12.

기가, 신화가 출렁이게 마련이다. 그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구자라트 어에서 ‘반얀’은 ‘상인’

늘은 나무의 그림자이다. 그림자에는

노경래: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

이라는 뜻이다. 이 나무 그늘에서 물

현실이나 충실함이 없지만 그림자에

보림 지연: 『불교의 꽃 이야기』

건을 팔던 관습에서 반얀이라는 이름

61 사공 경



이강현

Lee Kang Hyun 인도네시아 인작 식구들의 소중한 사연이 담긴 웹진용 책이 올해도 출판되어 뿌듯하며 설레인다. 회원들 인생에 한 페이지를 의미롭게 장식하길 고대해 본다.

이강현 / Lee Kang Hyun - 93년- 06년 인니 삼성 전자 주재 - 06년- 12년 한국, 인디아 근무 - 12년 - 현재 인니 삼성 근무 중 - 재인니 한인 상공 회의소 수석 부회장 - 인작 회장.


허 /연

자세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

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

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생이

일 뿐이다.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 며 시간을 잊는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백야의 시간은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

자세들로 채워진다.

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 히 받아들인다.

나는 이슬람 신자이다. 크리스천, 불교, 무교 등이 주를 이루는

라마단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슬람이란 강경 무장 세력의 자살 테러가 먼

/ 이강현

저 떠오르는 종교이다보니 ‘아니 왜 이 한국사람이 이슬람 신자 야?’ 하며 의아해한다. 또한 내가 외국인으로 이슬람 신자이다 보 니 더욱더. 역사적으로 1965년 9.30쿠데타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 가 자국민에게 주민등록상에 종교를 반드시 기재하도록해서, 대 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이 부모를 따라 종교는 이슬람이라 등록하고 실제로는 하루 다섯 번의 기도나 금식 등을 지키지 않는 무늬만 이슬람 신자이고, 이들을 이슬람-KTP(주민등록상에 이슬람)라고 부르는데, 나도 그런 이슬람 신자일 거로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 만 주변의 그런 예상과는 달리, 나는 100% 독실한 이슬람 신자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코란 공부를 하고 하루에 약식으로 세 번 정도 에 모아서 다섯 번의 기도를 하며 라마단(이슬람 금식월) 기간에 금 식을 지키는 신앙생활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라마단이 찾아왔고, 나는 한 달 동안 금식하며 내 정신력과 인내를 테스트했다.매년 2주 정도 앞당겨 찾아오는 라마단에 한달 동안 금식하는 것은 이슬람 신자의 5대 의무 중 하 나다. 주변에선 생산성도 떨어지고 합리적이지도 못한 금식을 도 대체 왜 하느냐란 얘길 한다. 도대체 무슨 의미로 금식을 하는 걸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64


까 따져 보자면, 한 달동안 해가 뜬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금식을 시작

오다 보니 이 금식기간에 제한된 활

후부터 해가 질때까지 주위에 어려

하고 일주일 만에 골병이 들어 결국

동을 할수가 없어 평상시 때처럼 똑

운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

병원을 찾게 되고 약을 먹게 되어 자

같이 활동하며 먹고 마시지 못하니

해 음식과 물을 섭취하지 않으며, 그

연스럽게 금식을 지켜내지 못하는

정말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이겨 내

한 달 기간만이라도 온전히 정상적

일이 매년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하

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다. 당장 종교

인 세상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가

면 참으로 부끄러운 기억이다. 내가

가 생활화되어 있는 이 나라 사람들

르침에 정진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

이슬람 신자임을 아는 현지인 직장

처럼 금식 기간에 일찍 자고 일찍 일

이 하고 대부분 시간을 기도하며 보

동료들에게 부끄러워 책상 위에 약

어나 새벽 식사를 하고 하루 중 말

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슬람에서

봉지를 올려놓고 내가 아파서 약을

을 아끼며 화도 참고 수행하는 생활

는 선악과의 개념으로, 하지 말라는

먹으니 금식을 깰 수밖에 없다는 무

을 해야 하지만, 나는 평소와 똑같이

것을 하지 말고 꼭 지켜야 한다는 것

언의 신호를 보내던 시간이었다.

새벽 1시쯤 잠이 들어 새벽 4시경에

을 잘 지켜서 우리가 알수 없는 사후 세계에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 는 믿음으로, 라마단 금식을 지켜낸 다. 라마단의 의미를 온전히 깨우친 참 신앙인도 아니고 태어나면서부 터 금식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은 외 국인이지만, 나도 어렴풋이 이런 가 르침을 이해하고 단식을 이슬람 신 자로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일종의 신념으로 여기게 됐다.

그렇게 일년 이년이 지나고 매년 그런 행동을 하는 내가 부끄러웠고 결혼을 한 후에 아내와 가족과 같이 금식을 지켜야 하다 보니 부끄러운 남편, 아빠가 되기 싫어 점점 금식 기간엔 술도 멀리하게 되고 온전히 한달 기간을 잘 지켜내야 한다는 의

일어나 기도를 하고 사후르(아침식 사)도 하지 않고 온종일 버티며 평소

와 똑같은 일상생활을 하다 보니 일 단 라마단 기간에 잠이 너무 부족하 고 힘들고 배고픈 건 참겠는데 물을 못 마셔 오후 4시쯤 되면 모든 신경 이 곤두서기 일쑤다.

무감과 책임감이 서서히 들면서, 최

하지만 나도 이제는 이 힘든 시간

근 10여년 동안은 라마단 금식 기간

고통을 참아내는 데에 익숙해져 그리

에 한번도 금식을 깨지 않고 한 달을

힘들지도 않다. 또한 라마단 금식 기

인도네시아 사람이 아닌 나 자신

온전히 지켜내려 노력한 것 같다. 이

간에 거의 매일 저녁에 행해지는 부

도 처음 금식을 하던 94년부터 3~4

슬람이 태동한 아랍권 나라에서는

까 뿌아사(하루 금식을 깨는 행사)를 하

년 간은 제대로 금식을 지킬수 없었

라마단 기간에 일상생활이 모두 라

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느라 더욱더 분

다. 태어나면서부터 일상화 되어있

마단에 맞춰 있어 사후르(새벽 식사)

주하다. 하루를 힘들게 금식을 지켜

지 않은 생활인데다가, 외국인으로

후에 모두 아침잠을 청했다가 오후

냈으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 및

서 생활 습관이 달라 온전히 한달동

에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고 마그립

지인들과 라마단을 기념하고 남은 금

안 금식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

에 맞추어 식사하고 그 이후에 일상

식기간도 서로 잘 지켜 내자는 일종에

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면 라마

생활을 하도록 출퇴근과 근무 시간

품앗이 같은 모임이 매일 저녁 열리고

단 기간에 종일 금식을 하고 오후 6

등도 제도화되어서 아침과 저녁이

직장과 인니 현지인 사회에 많은 활동

시경에 마그립(하루 다섯 번의 기도 중

반대되는 개념으로 철저히 금식기

을 하는 나는 이런 행사에 분주히 참

네 번째 기도 시간) 아잔 소리에 맞춰

간에 맞춰 생활한다. 하지만 이슬람

석하며 지인들과 공동체 의식과 서로

물 한모금을 마시며 오늘 하루도 금

국가가 아닌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

를 이해하는 마음을 나눈다.

식을 지키게 해주어서 하늘에 감사

에서는 일상 생활을 그대로 지켜 내

하다는 마음으로 부드럽고 단 음식

며 종일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 하는

으로 뱃속을 놀라지 않게 천천히 달

라마단 단식은 참으로 지키기 쉽지

래가며 식사를 해야 하지만, 딱 그

않다. 이 기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

시간이 한국 직장에서 출장자와 저

지도 않고 생활하다 보니 과도한 육

녁식사를 하거나 회사 동료 간에 회

체 활동이나 실제 일상생활이 불가

식이 시작되는 시간이라 직장 초년

능한 건 당연한 것이지만 이걸 그저

생으로 선배들이 주는 소주나 알코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것뿐이다.

올을 빈 속에 받아 마시는 일이 하루 가 멀다고 있으니 내 위장이 온전할

나는 이슬람 신자이긴 하지만 태 어나면서부터 다른 환경에서 살아

한달 간의 라마단 기간이 끝나면 그간 고통을 함께 나눈 가족 친지들 과 잔치를 벌이는 축제 ‘르바란’이 이어진다. 한 달 동안 금식을 고생하 며 지켜온 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 으로 온 가족과 친지를 방문하고 서 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대축제로 우리나라 추석 같은 이 나라에서 제 일 큰 명절로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 의 긴 휴가를 보낸다.

65 이강현


양국의 추석과 르바란 두 명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인도네시

절이다 보니 앞으로도 이슬람 신자들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추석은 풍요

아의 르바란은 종교적 행위의 결집력

에게는 르바란이 영원한 최고의 명절

로운 추수가 끝나고 그걸 기념하며

인 명절로 한달동안 금식의 어려움을

이 될 것이다.

감사의 뜻으로 가족들이 고향을 찾고

서로 이겨 내고 종교적으로 최고조로

일년에 한번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

승화된 마음으로 가족 친지들을 서로

내고 성묘도 하며 송편도 빚어 먹는

방문하며 서로의 어려움과 그리움을

오래전 전통은 점점 사라져 간다. 요

나누며, 수입의 2.5%를 자캇(Jakat)

즘은 고향 방문도 어려워 해외여행을

이라는 십일조 개념의 자선헌금을 이

가거나 추석 준비로 음식 장만 과정

슬람 사원에 바치며, 일년 중 가장 행

에서 고부간 부부간 갈등으로 이혼을

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명

야만 하는 무슬림으로 나는 어떤 신 념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까? 아직 도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지만 일단 은 이렇게 부딪혀 보고 느끼고 배우 며 점점 성숙해지길 바랄 뿐이다.

Sabar

일요일 아침 갑작스레 처이모가

리 가자. 왜 이렇게 뜸을 들여...양말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장모님

은 신지 말고 그냥 차에 타서 신으면

/ 이강현

막냇동생이 갑작스레 사망하신 것

되지”라고 소리를 벌떡 질렀는데도

이다. 아내는 경황이 없어 기사도 없

막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말을 신었

이 직접 차를 몰고 짜왕쪽 이모집으

다.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아파트 로

로 먼저 출발했고, 나는 기사가 출근

비로 내려갔는데 이번에는 기사가 없

하기를 기다리며 애들을 깨우고 아

다. 전화해 보니 기다리다가 우리가

침을 먹이며 떠날 준비를 했다. 인도

바로 내려오지 않으니 핸드폰 선불요

네시아에서 이슬람 장례는 특별한

금 충전하러 근처 가게로 갔다며 10

일이 없는 한 12시간 안에 치른다.

여분 더 걸려야 돌아온다고 했다. 착

내세를 믿는 데다가 더운 나라이다

잡해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순간 화

보니 빨리 장례를 치르는게 일반화

가 치밀어 올랐다. 막내에게 “왜 너는

되어 있어 외국에 가족들이 나가 있

늦어서 결국 기사도 어디 가고 이리

으면 자칫 시간을 못 맞추어 고인의

늦게 출발하게 만드느냐” 다시 한번

시신도 가족들이 못 보고 장지에 묻

소리를 지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

히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우리 가

시 집으로 올라왔다.

족이 3년 간 한국에 가서 생활할 때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급하게 자 카르타로 왔지만 이미 장례가 끝난 뒤였다. 지금도 아내는 그때 생각만 하면 눈가에 눈물이 고이곤 한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66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종교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막내 얼굴 에다 대고 왜 빨리 준비 안 하고 꾸 물거렸냐고 다시 한번 면박을 주었 다. 그런 나를 막내는 똑바로 바라 보며 “아빠 be patience… 아빠는

장지로 시간을 맞추어 떠나려다

너무 성격이 급해. 인도네시아말로

보니 좀 서둘러 아이들에게 준비하게

sabar야. 기다리라고… 왜 소리를

했는데… 막내는 아침 샤워도 천천

지르지”라며 얘기한다. 순간 정신이

히 하고 양치질 및 외출복도 너무 천

아찔했다. 가끔 어릴 적 밖에 나갈

천히 갈아입는다… 둘째와 떠날 준

준비를 할 때 아버지가 한참을 기다

비를 마치고 출입문에서 한참을 기다

리다 한마디 소리를 질러 대면 무슨

리다가 좀 너무하다 싶어 “보현아 빨

큰 잘못한 것처럼 허둥대며 따라나


섰고… 한국은 어느 가정에서나 흔

상 마음을 쓰고 있지만 이렇게 당돌

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 것이니 너

히 볼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이들을

하게 얘기할 줄은 몰랐다. 아들은 다

도 이해하고 앞으로는 사회생활에

키우며 첫째나 둘째에게 그런 경우

시 반복해서 나에게 말한다. “아빠

시간개념을 갖고 너를 거기에 맞추

가 생기면 ‘아빠 잘못했어요’ 아니면

나도 알아요. 저도 노력해요. 근데

어 살아야 하는 거야 알겠지?” 아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하며 고개를

아빠는 너무 급해요. Sabar 좀 하세

도 눈물을 닦으며 “ 아빠 노력할게

숙이면 대충 그러려니 하고 끝이 났

요. Be patience 하세요.” 아직 참

요. 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었다. 그런데 오늘 막내는 똑바로 나

을성이란 한국단어를 모르는 막내

를 쳐다보며 참으라는 것이다.

는 다시 계속해서 아빠를 쳐다보며

순간적으로 황당하기도 하고 소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얘기한다.

다시 아파트 로비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는데 아들이 아빠 기분을 눈 치챘는지 아니면 저도 미안했는지

리만 질러 댄다고 능사가 아닐 듯싶

그동안 얼마나 참을성 없는 아빠

장지로 향하는 차안에서 평소보다

었다.” 보현아 네가 사회생활을 한

때문에 아이들이 멍들고 마음이 상했

더 말을 많이 건다. “아빠 이건 이렇

다고 생각해 봐라. 시간표에 움직이

을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소름이 돋

고 저건 저렇고... 재잘재잘 평소보

는 기차나 버스가 왔는데 sabar를

는다. 그동안 나는 정형화된 직장 생

다 더 말을 많이 한다...내가 가장 정

외치고 기다리라 하면 기다리겠냐?

활에 맞춰 살다 보니 시간 개념이 철

겹게 보았던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

학교에서 친구들이 너 때문에 다른

저하고 또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는

는 큰애가 오면 막내와 주고받는 아

일을 시간에 맞추어 시작하지 못할

데 약간 부족함이 있는 막내가 그것

름다운 대화처럼... 나도 성심성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너는 다 좋은데

도 인도네시아에서 자란 12살 아이

껏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답

시간 개념이 없는 거 같다. 숙제하거

가 ‘아빠 참으세요’란 말을 반복해서

을 한다.

나 시험시간에도 정해진 시간에 문

하는데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 내가

제를 풀어야 통과할 텐데 sabar하

참아야 하는구나.’ 인도네시아 전문

고 기다리기만 하면 어떻게 사회생

가라고 이 나라 문화와 풍습을 잘 이

활을 할 수 있겠느냐? 가정은 사회

해하고 따른다는 내가 내 방식대로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잘못된 점을

내 아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보기

고쳐주는 곳이어서 아빠가 너에게

좋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았다.

혼을 내고 가르쳐 주는거야.”

일단은 이 일을 수습해야 했기

물론 약간의 발달 장애를 가진 막

에... “보현아 괜한 일로 아빠가 소리

내에게 시간관념을 갖게 하려고 항

질러 미안하고 엄마가 혼자 기다리

아들아 미안 하다. 앞으로 아빠도 sabar 하며 살께. 너무 내가 옳다 내 방식대로 살겠 다 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며 Sabar 하며 살도록 노력하마. 사랑한다 아들아...

67 이강현


아버지 / 이강현

어젯밤엔 편히 주무셨어요? 요

저도 건강을 지키려 매일 짬을

국에서 오시는데 정작 아버지 잔치

즘 음식은 입에 맞으시고요? 집사

내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데도

에 한국에서 축하해 주러 오실 수

람 말로는 이삼 일에 한번 뽄독인다

요즘은 과음하면 다음날 힘들고 예

있는 아버지 형제분과 친구분이 계

몰에 있는 덕킹에서 딤섬과 닭발을

전엔 장거리 비행을 해도 끄떡없었

실까 싶어서요... 작년에 한국 갔을

즐겨 드신다는데… 입맛이 변하신

는데 이젠 피곤의 여파가 며칠씩 가

때 제 고교동창의 아버님이며 아버

건지 어떻든 집에서 드시는 음식 말

는걸 보면 아버지께서는 건강을 지

지 후배이신 유교수님 돌아가셨을

고 자카르타에서 입맛에 맞으시는

키기 위해 얼마나 절제하시고 노력

때도 충격 받으실까봐 조심스레 말

음식을 찾으셨다니 참으로 다행이

하셨는지 알거 같아요.

씀드렸더니 빈소에 같이 가보자고

에요. 조금씩이라도 자주 맛있게 드 셔야 기력을 유지하시지요.

은 못 드리지만 정말 중요한 자리가

말씀하셔서 다녀오는 길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거든요.

건강에 소중함에 대해서는 누구

아니면 절제하고, 음식도 채식 위주

장남이신데 동생분들도 다 작고하

나 알고 있고 생활습관으로 지키려

로 소식하고 복잡하고 스트레스 받

시고 친구분들도 안 계시지만 그래도

마음을 먹지만 사실 바쁜 일상에서

는 일은 되도록 떨쳐 버리고 일의

혹시 생각나시는 분 있으면 꼭 제가

간과하기 쉬운데 아버지께서 엊그

절반은 젊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

초대할게요. 아버지. 걱정하지 마시

제 조목조목 짚어 주시며 이젠 너도

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물론 그분

오십대 중반이니 나이에 맞게 건강 관리 잘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버지 구순이 코앞이라 여느때와는 달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더라고요.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68

저도 이제 음주를 끊겠다고 약속

사실 어제 저녁 식사 후에 드린 말씀은 몇 번을 생각해 봤는데, 구 순 잔치에 누나와 형님 가족들은 한

이 건강이 허락하셔서 해외여행이 가 능하실지는 모르지만요... 만약 아무 도 못 오시면 한국에 돌아가셔서 못 오신 분들에게 크게 한턱 내세요.


아버지 구순 잔치 준비는 너무 잘 되어가고 있는데요, 아버지 너무 좋 으셔서 흥분하셨다가 잔치 끝나시 고 허전해지시거나 마음을 너무 쓰 셔서 혹시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기 실까 봐 제가 아주 조심스러워요. 다 행히 여기 주변 지인분들이 행복하 고 부러운 마음으로 골프 대회와 저 녁 식사에 참석해 주시겠다고 다들 연락하셔서 성대하게 잘 치러질 거 같아요. 세상에 ‘구순기념 골프대회’ 라니 그분들에겐 상상이나 가는 일

랑스럽고 부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우세요. 또한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가 몇백

어머니 돌아가시고 44년을 혼자 계시면서 저희 삼 남매 키우시며 아

배나 몇천 배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지 말로는 표현을 다 못 하겠어요.

래로는 동생들 돌보시느라 그런 희

구순 잔치까지 2주 남았는데 컨

생을 하셨는데 아버지 사신대로 정

디션 조절 잘하셔서 호쾌한 티샷 날

직하게 사시느라 말년에 모아두신

리시는 모습으로 참석하신 모든 손

재산이 없어 자식들에게 큰소리 한

님과 가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번 못 치시는 아버지, 그게 제일 마

행복을 선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이 아파요. 제발 쩌렁쩌렁하게 저 한번 혼내 주세요.

이겠어요. 자카르타 교민사회 어르

엊그제 제 지인들 앞에서 하신

신들에게 아버지 ‘구순 잔치 골프대

말씀처럼 자식들이 잘되면 어르신

회’가 요즘 최고의 화제래요. 과연

소리 듣고 자식들이 잘못되면 꼰대

당신들은 그 연세까지 살아 계실 건

소리 듣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리 따

지. 더군다나 골프가 그 연세에 가

지면 자식들이 잘 됐으니 아버지는

능하실 건지 다들 장담 못 하시겠다

최고의 어르신이시지요. 자식들 이

고 부러워들 하시며 덕담을 주시네

렇게 건강하고 반듯하게 잘 키우셨

아버지 사랑합니다. Stay with us forever.

요... 아버지 저를 삶에 있어 가장 자

69 이강현



이동균

Lee Dong Kyun 처음 족자카르타 보로부두르에 왔던 추억을 생각하며..... 시간이 정말로 빠르게 흘러간다. 그전에는 기쁨, 슬픔, 우울, 환희의 빛깔들이 나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보낸 세월이 너무 안타깝다. 지금부터라도 과거를 깊게 성찰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구상하며 살아야겠다. 삶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 짧은 파장과 같이 스치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새삼 알았다. 나의 두 눈이 잘 보이는 순간만이라도 무엇인가를 정리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동균 / Lee Dong Kyun -충북 청주 출신 -2011년 한인니 문화연구원에서 주최한 제2회 인터넷 공모전 수필 <꿈은 살아있다>로 대상 수상 -2013년 종합문예지 한국문인 <신인 문학상> “나의 각오 외 1편”으로 수필가로 등단 -2016년 제 18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수상 -주식회사 PT. Dulseok Indonesia 대표이사


정 / 호승

수련

물은 꽃의 눈물인가 꽃은 물의 눈물인가 물은 꽃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은 인간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비워주는 마음 / 이동균

현대는 여러 첨단 의학기기 발달

다. 즉, 남은 여정은 가족과 나 자신을

소년과 같이 마음껏 골프도 하고 가

과 의사들의 끈질긴 노력, 신약 발명

영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까운 산에 등산도 하고 가끔씩은 동

으로 인간 수명은 점점 지속적으로

만 했던 일, 늘 고단하고 바쁜 사회생

네 가장자리 호수에서 낚시도 하며

늘어나고 있다. 전에는 치료하기가

활에서 얽매였던 일상적인 삶에서 벗

짜릿한 손맛도 즐기고 좋아하는 책도

어려웠던 병들이 의학 발달로 인하

어나 남은 인생을 정리하고 자기자신

많이 읽어 보고 그리고 싶던 그림도

여 완치되거나 최소 수 년 동안이라

을 위해서 살아가는 “제2 인생의 시

그려보고 전에 문득문득 생각했던 내

도 생명을 연장해 주기도 한다. 요즈

작”이라고 생각한다.

용의 글도 써 보고 흥겨운 유행가 노

음은 악성 종양 즉, 암과 같은 질병을 CT, MRI, PET등 정밀 기기를 이용 하여 쉽게 병을 진단하여 암을 조기

락하게 보내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

래도 반주 없이 마음껏 불러 보고.. 이 런 것들을 상상하고 그리워했다.

은 공기 좋고 물 깨끗한 곳에서 전원

그러던 어느 날, 조금 일찍 은퇴한

생활 하는 것을 원한다. 그것은 사람

분이 살고 있는 아담한 산줄기 속 집

이 오래 살려면 상식적으로 사람 몸

에 며칠간 머물면서 여러 가지를 느

그래서 수십 년 전에는 60세 정도

은 70% 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어

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빨간 사

가 되면 노인으로 취급해 특별한 예

서 사람이 호흡할 때나 물을 마실 때

각 아스팔 슁글 지붕의 아담한 이층

우를 하여 주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맑고 깨끗한 공기와 물을 섭취해야만

집 앞에는 맑고 큰 저수지가 시원스

80세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노인이

한다. 이러한 전원적인 환경을 누구

레 펼쳐져 있었고 집 뒤에는 병풍과

라고 인정해준다. 대개는 직장 생활

나 한 두 번쯤은 꿈꾸어 본 적이 있을

같이 산들이 둘러쳐 있으며 오른쪽

이든 자기 사업을 했던 사람이든 대

것이다. 나도 좀 이른 나이에 이런 생

옆에는 논과 밭이 있어 가슴이 탁 트

략 60~ 70세 정도에 현직 생활을 마

각을 여러 번 해 보았다. 좀 더 구체적

이면서도 아늑해 보였다. 특히, 이른

감하고 은퇴를 한다고 해도 아직도

으로 말하면,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

아침이 밝아 오면 저수지 위 물안개

인생의 1/3 정도라는 여정이 남아있

유가 생겼으니 푸른 필드에서 양치기

가 집을 휘감아 돌아서 마치 한 폭의

에 발견하고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람 들의 수명을 연장해 주고 있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72

그래서 남은 시간을 건강하고 안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자

름하여 냉이, 민들레, 씀바귀, 쑥, 익모

쉽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

아냈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과 해맑

초 등, 그 외에 여러 가지의 먹거리들

운 일이 아니다. 비워주는 마음에는

은 공기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화

이 있었다. 그런데도 잡초들은 어느

기본적으로 자기 희생이라는 것을 가

단에 있는 나무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정도 일정한 룰이 있었다. 어느 정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요즘같

여러 다양한 모양, 색깔의 꽃들이 피

자라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일부는

이 험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살다 보

어 있었다.

스스로 자리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본인의 이익 만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꽉 차있게

또 그 집안에는 적당한 크기의 텃

잡초는 인간의 생활에 큰 도움이

밭이 있어서 여러 종류의 채소들이

되지 못하는 풀로 병균과 벌레의 서식

파란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 중에도

처가 되고 작물의 성장에 지장을 주는

채소밭의 골치거리가 있었는데 그것

식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좀 더 자

은 바로 잡초였다. 그 잡초를 제초제

세히 보면 그들만의 공간만을 확보해

를 사용하면 간단하게 제거할 수는

서 서로 간에 뒤엉키지 않게 협조하

있었지만 그는 그것은 사용하지 않았

며 살아간다. 사람과 달리 결코 자기

다. 제초제를 사용하면 토양이 황량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하고 헐벗은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에

사람의 욕심은 바닷물로도 채울 수 없

즉, 자연은 언제나 한결같이 똑같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고 욕심은 클수록 채우기 힘들고 부족

은 일을 하면서 묵묵히 자기 희생을

잡초를 손으로 일일이 제거하는 방법

함만 더 커지게 된다. 즉, 잡초는 어느

실천하는데 있어서 변함이 없는데 사

을 택했다. 아무리 뽑고 뽑아도 잡초

시기가 되면 열매를 맺고 스스로 생을

람만은 머리를 굴리며 자기 이익만

는 끊임없이 올라오고 또 올라왔다.

마감하여 후대의 풀에게 자리를 양보

을 추구하고 있다. 어쩌면 사람이 살

하는 비워주는 마음을 실천한다.

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가끔 잡초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들도 자라고 있었는데 이

비워주는 마음이라는 것이 말은

되어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하고 더 좋은 환경을 추구 하려는 욕심 때문에 조금한 자기 희 생조차도 매우 꺼려하고 아까워한다. 하나를 남에게 주면 나는 남에게 서 너 개를 얻어야만 만족하는 마음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목표로 사는 것은 당연한 생각일 것

73 이동균


이다. 그러나 사람이 갖고 싶은 그러한 값진 이익 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정해진 인생 세월 안에서 한정된 삶인 것이다. 죽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 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내일

제일 먼저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생전에

/ 이동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보다 없고 그것을 꼭 필요로 했던 사람에게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갈등 속에 피어나는 거다

과거를 회상하는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먹구름 이 드리우며 폭포같이 비가 내린다. 땅에 있는 모

치열한 논쟁 속에 새싹이 돋아나는 거다

든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비가 내리

싸움 속에 성장하고

면 비는 자기가 생명을 다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실패 속에 겸손을 배우는 거다.

탄생 시킨다. 나도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의 여정 에서 얼마나 마음을 비우고 살았었나를 생각해 보

검푸른 큰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았다.

거침없이 앞을 향해 가는 돛단배처럼,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피어나는 들꽃처럼

어떨 때 많은 욕심 때문에 답답한 마음으로 캄 캄한 밤을 하얗게 보낸 적도 있고 냉철한 가슴으

굳건한 심장을 믿고 부딪히면서

로 나 자신을 혹독하게 반성해 본 적도 있었다. 그

앞으로 가는 거다.

래도 가끔은 주어진 사명에 따라 나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조그마한 봉사하는 시간을 갖

찬란한 적도의 태양이

기로 했다. 앞으로의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인도

붉은 피를 먹으며 살듯이

네시아에 사업을 하면서 더 많은 경험과 미래에

나도 뜨거운 갈등을 마시며

대한 지식을 배우는 시간에 매진하고 주어진 삶이

내일을 향해 가는 거다.

남아있는 동안 나 자신을 먼저 비우는 마음으로 미래의 세대를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경험을 전해주고 싶다.

캄보자 꽃 / 이동균

약 5년 전에 서부 자카르타에서 땅그랑 찌꾸빠로 회사 사무실을 옮 겼을 때 제일 먼저 사무실 앞의 정원에 심은 것이 캄보자 꽃나무다. 먼저, 대략 학문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낙엽관목, 상록교목, 관목 으로 열대 아메리카 원산이며 종류가 많으나 그 중에서 몇 종이 관상 용으로 재배된다. 인도에서는 묘지와 사찰 경내에 흔히 심고 하와이 에서는 화환을 만드는 데 쓴다. 상처에서 나오는 유액에 독이 있다. 대 표종인 붉은꽃 플루메리아(P. rubra)는 높이 4∼9m이고 잎은 어긋나 며 긴 타원형이고 길이 30cm 내외이다. 꽃은 깔때기 모양이고 5개로 갈라지며 지름 5cm 정도이며 연중 꽃이 달린다. 꽃 빛깔은 연한 분홍 색에서 붉은색까지 있으며 건조기에 잎이 떨어지지만 온실에서 재배 하는 것은 연중 꽃이 핀다. 멕시코 베네수엘라 서인도 제도가 원산이 다. 노란색 꽃이 피는 플루메리아 오브투사(P. obtusa)는 멕시코 원산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74


이고 흰색 꽃이 피는 흰꽃 플루메리

것처럼 잎사귀 속에서 우뚝하게 빛나

가끔 나는 빨간 꽃 캄보자를 보면

아(P. alba)는 서인도제도 원산이다.”

고 앙증스러우며 조금은 수줍은 듯

서 젊은 시절의 목표를 향해 열정적

(구글에서 일부 발췌함)

한 빨간 볼에 연지를 바른 새색시 같

으로 갈구했던 꿈을 생각해 보았다.

은 꽃의 느낌이다. 대부분 인도네시

그리고 세월이 흘러 모진 풍상을 경

아 사람들은 캄보자 꽃을 죽은 사람

험하고 중년이 되어 노련한 노란색으

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꽃이라고 하

로 변하고 나중에 인생의 종착역에서

여 무덤가에는 노란 꽃과 흰 꽃의 캄

는 모든 것을 섭렵하고 삶을 어느 정

보자 나무를 많이 심는다.

도 이해하는 빛 바랜 흰색으로 장식

2016년도 나의 글 중의 하나인 “캄보자 꽃과 같은 인생”에서 등장하 는 꽃이다. 내가 이 꽃을 좋아하는 이 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간단히 말 해 수수함 속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흡사 한국에서 여기저기 야생에서 많 이 피는 찔레꽃(Wild Rose)과 같은 느 낌이 있어 더욱 친밀감이 있다. 찔레 꽃은 장미(Rose)의 먼 친척 뻘 되는 꽃으로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꾸준히 피며, 작은 망울들을 터트리는 꽃으 로 진한 향기와 화려함을 가진 아름 다운 장미꽃과 비교하곤 한다. 일견, 장미꽃을 우리의 인생에 대비하면 화 려하고 빛나게 짧은 시간동안 활화산 의 폭발처럼 사는 삶에 비유할 수 있 다. 반면에 찔레꽃은 장미꽃에 비하 여 좀 더 수수하고 작으며 조금 더 오 랫동안 잔잔한 향기를 가진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한국에서 내가 좋아했던 찔레꽃과 같 은 모습과 성질이 비슷한 캄보자 꽃 을 좋아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

캄보자 꽃이 활짝 핀 모습

이다. 캄보자 꽃은 언제나 넓은 잎을 배경으로 꽃이 피는데 꽃의 향기는 너무 진하지 않고 은은하여 코로 향

나의 회사에서 자카르타로 나올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

기를 들이 마시면 야릇한 천연 향수

때 큰길이 많이 막히면 우회도로를

의 인생길 또한 어느새 빨간 꽃에서

냄새가 내 머리를 하얗게 마비시키곤

이용하기 위해 동네 시장 길로 나가

노란 꽃으로 변하였고 서서히 색이

했었다. 또한 꽃 색깔도 다양하여 분

는 경우가 있는데 이 길에는 두 군데

바랜 흰 꽃으로 가는 길일 것이리라...

홍, 빨간, 노란, 흰색 등으로 되어 있

작은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거기에

그래서 나는 먼 고향의 찔레꽃과 같

다. 다시 말하면, 그 꽃잎은 난처럼 도

는 대부분 노란 꽃과 흰 꽃의 캄보자

은 인도네시아 캄보자 꽃을 좋아하는

톰하여 좀 오랫동안 간직해도 그 향

가 정성스레 장식되어 있다. 어쩌면

것이다.

기의 잔잔한 여운을 길게 느낄 수 있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길 하나 사

다.

이를 두고 있는데 산 자들의 길에는

그 중에서 특히 나는 빨간색 꽃잎 의 캄보자 꽃을 좋아한다. 빨간 캄보 자 꽃을 중심으로 푸른 큰 잎사귀들

분홍, 빨간 꽃이 환하게 웃고 있고 사 자들의 길에는 흰, 노란색 꽃들이 말 없이 엄숙하게 피어 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 늘 나를 정원 에서 맞이하는 빨간 꽃 캄보자를 보 며 오늘도 평범하면서도 수수한 꾸 준하며 오랫동안 잘 버티는 찔레꽃과 같은 삶을 위한 시간을 시작한다.

이 마치 호위무사들이 보초를 서는

75 이동균



이혜자 Lee Hye Ja

고국을 떠나와 인도네시아의 삶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던 사랑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인작은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다.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지만 별을 사랑하고 책을 함께 읽고 아름다운 마음을 나눌수 있는 친구처럼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다.

이혜자 / Lee Hye Ja Art in the Life 건강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 우리의 건강 한 삶을 책임지듯, 식문화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푸드코디네이터는 식문화를 리드하고 보다 나은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창의적이고 멋진 일이다. -티마스터 -푸드코디네이터 전문가과정수료 -푸드코디네이터 사범마스터 - 제6회 서울국제푸드엔테이블박람회 테이블 셋팅 부문 대상 및 전체 부문행정안전부장관상수상 -2019대한민국 국제요리&제과 테이블 셋팅 경연대회 테이블 셋팅 대상, 전체부문 대한민국 국회 교육위원장상 수상


윤 / 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미세먼지에 대처하는 생활 속 건강관리 및 예방법 / 이혜자

완연한 건기로 접어든 자카르타

염 등의 호흡기 질환은 물론 심혈관

야 한다. 미세먼지 농도의 정보를 확

는 한 달 이상 비도 내리지 않고 밤낮

질환, 피부질환, 안구질환 등 각종 질

인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가급적

으로 미세먼지 농도가 100 ㎛ 이상을

병에 노출될 수 있다.

외부활동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넘고 있다. 미세먼지에 대한 걱정이 날로 커지고 건강이 이슈로 떠오르면 서 아침마다 미세농도를 확인하는 것 이 일상화 되었다. 미세농도를 확인 하고도 외부활동을 피할 수는 없고 이제 미세먼지를 조금도 접하지 않은 날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미세먼지 를 제1군 발암 물질로 지정했다. 장기 간 미세먼지에 노출될 경우 면역력이 급격히 저하되며 감기, 천식, 기관지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78

초미세먼지는 미세먼지 4분의 1

외부활동을 해야 한다면 꼭 마스

크기 밖에 되지 않아 사람의 눈에는

크를 착용해야 한다. 마스크는 식약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5㎛ 이

청으로부터 차단기능을 인정받는 등

하의 미세먼지는 밖으로 배출되지만

급의 보건용 마스크를 착용하여 최대

2.5㎛ 이하의 초미세먼지는 혈관 또

한 미세먼지 노출을 줄여준다. 외출

는 림프샘에 직접적으로 침투해서 배

후 집에 들어와서는 옷에 묻은 먼지

출되지 않는 중금속과 화학물질이 포

를 충분히 털어내고 세안, 양치와 샤

함되어 있어 결국 암세포를 만든다.

워 등을 철저히 해야 한다.

이처럼 미세먼지는 우리 건강과

또 하루 8잔 이상의 충분한 수분

직결되어있어, 정부나 개인 자신도

을 섭취하고 제철 과일이나 채소 등

건강 관리와 예방을 철저히 실천해

을 먹어서 비타민과 식이섬유를 충분


히 섭취할 수 있도록 한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에는 집 에서는 되도록 창문을 닫아 미세먼지 유입을 차단하고, 먼지가 쌓일수록 있는 카펫 사용을 줄이고, 진공청소 기보다 물걸레 청소를 하고 공기청정 기를 함께 쓰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미세먼지 배출에 도움 이 되고, 중금속 배출을 돕는, 비타민 A.C.E.셀레늄 등의 성분을 함유한 성 분의 식자재와 음식을 먹는다.

이미지=대한민국 환경부

미세먼지에 좋은 음식 1. 물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평소보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좋다. 폐나 기관지 호흡기가 건조하면 오염물질이 달라붙어 자극을 주므로, 물을 충분히 마시 면 체내 노폐물 배출에 도움이 된다.

2 생강이나 마늘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하여 혈액순환을 돕고 소화와 몸의 독소를 배출하는 데 뛰어난 효능이 있다. 마늘은 호흡기 면역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3. 해조류 해조류들은 알긴산이라는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몸 속 중금속 물질을 밖으로 배출해주는 역할을 하고, 혈액을 맑게 만든다. 미역, 다시마, 파래, 김 등.

4. 브로콜리 브로콜리에 들어 있는 베타카로틴 성분은 저항력을 강화해 세균 감염 방지 에 효과적이고 폐의 유해물질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5. 녹차 녹차에 들어 있는 타닌 성분은 면역력을 강화하고 기관지 내 미세먼지를 씻 어 배출하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카테킨 성분이 중금속의 유입과 축적을 막 아준다.

위에 소개한 생활 속의 실천과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영양 공급으로 면역력을 높여 미세먼지로부터 소중한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내자.

79 이혜자


글로벌 매너 / 이혜자

우리는 지금 글로벌 시대를 살고

견없는 섞임’의 과정이라고 말할수

통 예절과 문화를 소중하게 간직하면

있다. 우리가 글로벌 매너를 지녀야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

서도 글로벌 매너를 이해하고 익히려

할 시대적 당위성을 이해하고 글로벌

자 하는 세계화, 국제화는 어느 지역,

는 현명한 선택도 필요하다.

매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어느 국민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현

글로벌 매너는 다른 문화를 이해

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매너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글로벌 매너

인간은 본인의 경험에서 타인을

는 문화의 상대주의를 인정하고 그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을 없

1. 인도네시아인들은 머리에 손

나라의 문화나 관습, 생각하는 방식

애는 것이 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필

을 대는 것은 영혼의 안식처를

을 서로가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

요하다. 독특한 문화가 만나서 공통

침범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

이다. 다른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익히

된 사물을 창조하고 그들 문화의 각

래서 상대방의 머리를 만지거나

고자 하는 노력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각의 특성을 서로 존중해주며 함께

쓰다듬는 행동을 매우 불쾌하게

이해하려는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

살아가는 세상. 이것이 21세기를 살

생각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귀

아가는 바람직한 세계시민의 모습이

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

아닐까 생각한다.

다.

한 국가에서는 그 사회의 질서유지 를 위하여, 그 나라 국민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법이 있듯이 우리의 사회생 활이나 사교생활에서도 각자가 따라 야할 행동기준이 존재한다. 이러한 행 동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다음은 글로벌시티즌의 자격 요건 이다. 1. 심리적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존중되어온 매

2.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능력

너와 에티켓이다. 이것은 나라와 문화

3. 뜻있는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

마다 다르고 또 그 시대에 기준에 맞

2. 무슬림은 왼손을 부정한 손으 로 여기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 킬 때나, 물건을 건네줄 때 왼손 을 사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3.코란(koran)에서 돼지는 불결 한 동물로 금기의 대상이다. 인

매너는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

도네시아인과 함께 식사할 때는

줄 뿐 아니라, 사회를 밝고 경쾌하게

권하지도 말고 먹지도 않음으로

만들며 나아가 세계 속의 우리 위치

써 그들 문화에 대한 배려의 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란

를 격상시키며 세계인으로 품위를

도를 보이는 것이 좋다.

세계주의자, 국제인, 세계인으로 ‘편

갖추는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의 전

게 새로 생겨나고, 소멸되고를 반복하 면서 계속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강경화 외교장관과 인도네시아 렛노 마르수디 (Retno Marsudi) 외교장관이 ‘밀레니얼 토크쇼 (Millennials Talk with Madam Secretaries)’에서 밀레 니엄 세대들에게 긍정의 메시지를 전했다.(사진 =자카르타포스트 캡쳐)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80


"이 세상에 좋아할 것이 이렇게 많다는게 너무 근사하지 않나요" / 이혜자

올 여름 서울에서 열렸던 빨강머리 앤 전시회를 다녀 와서 앤과 다이애나를 위한 테이블을 차려보고 싶었다. 앤이 살던 마을의 연분홍 산사나무와 초록지붕에서 영감 을 받아 테이블을 셋팅했다. 빨강머리앤을 읽던 어렸을적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면 내마음은 따뜻해지고 왠지 모를 행복감에 빠져든다. 앤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 중에 가장 오래된 책이다. 내 가 앤을 처음으로 만난건 열살무렵, 그러니까 앤과 비슷 한 나이였다. 앤과 같은 소녀였던 나는 책을 읽으면서 꿈 을 키웠고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앤을 내 마음 속 깊이 친구로 생각했다. 내가 빨강머리앤을 통해서 배운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밝은 마음과 긍정적인 사고였다. 그것은 내 삶을 행복으 로 이끌어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아마 마릴라 아주머니 나이 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서 앤은 언제 까지나 영원한 소녀로 남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빨강머리앤을 좋아한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앤처럼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다이애나처럼 아름다운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81 이혜자



조연숙

Cho Yeon Sook 인작 회원인 듯 아닌 듯 세 번째 해가 지났다. 열광적인 호응도 냉소적인 비판도 없는 담담하고 심심하고 느슨한 연대 안에서 서너달에 한 번씩 인작 칼럼을 썼고, 일 년에 한 번씩 세 번째 웹진을 만들었다. 그렇게 인작이라는 시간이 쌓인다.

조연숙 / Cho Yeon Sook -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편찬위원 - 2040서울플랜 시민계획단 - 인도네시아에 관한 뉴스를 만들고, 지나온 시간을 기록하고, 다가올 시간을 탐구한다


함 / 순례

나중엔 속까지 다

우리 동네 표준연구소 담장 헐고 작은 체육공원 꾸몄는데 한동안 바람과 햇살만 드나들었다

한 계절 지나고서야 의자에 앉아 해를 그리거나 팔을 저으며 운동하는 사람들 생겼다

제 옆구리에 낯선 이 들이는 거 사람도 쉬운 일 아니다 나중엔 속까지 다 내어주더라도

인연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인연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과 일과 장소도 만나 서 함께 하고 헤어진다. 얼마 전까지도 사람과 헤어지거나 물건을 버리면 큰일 나는 것인 줄 알았다. 하던 일을 못 하게 되면 실패라고 생각했다. 이사를 하거 나 해외로 가는 것도 살던 집과 나라를 버리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 는 친구와 헤어졌고, 학교를 졸업했고, 직장을 옮겼고, 인도네시아로 이주했 다. 과학자를 꿈꾸던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관한 뉴스를 만드 는 일을 한다.

/ 조연숙

‘인연의 유효기간’이라는 말을 처음 떠올린 계기는 마르코(마가) 복음에 나 오는 ‘들것에 실린 중풍 병자’ 이야기를 읽고 나서다.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들 것에 실려서 예수님께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 어나 네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는 이야기다. 그가 아플 때는 움직이기 위해 들것이 필요했지만 건강해진 후에는 들고 가야 할 짐 이 됐다. 그의 상황이 바뀌면서 필요한 물건이 달라진 것, 즉 그와 들것의 유효 기간이 다 된 것이다. 그즈음 나는 이사를 위해 짐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물건을 살 때 마음과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84


그 물건에 담긴 기억들 때문에 꺼냈다가 넣기를 반복하고 있던 중에 성당 모임 을 마치고 창고로 쓰는 방을 다시 둘러보았다. 안 쓰는 그릇과 탁자, 운동한다 고 사서 서너 번 쓰다가 놓아둔 테니스 라켓, 잘못 산 물건, 누군가의 선물이어 서 차마 못 버리는 물건 등 나와 인연이 끝난 물건들이었다. 사람과의 인연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면 학교 친구들과 물 리적으로 만날 기회가 줄어든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던 동료들도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직장을 옮기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 가족 모임을 수시로 하던 이웃도 이사하면 만남이 드물어지고, 모임을 그만두면 함께 하던 이들과 관심사가 달라진다. 결혼하고 자카르타로 이주하면서 서울이라는 공간과 멀어졌다. 시간이 흘 러 어느 순간 서울을 자주 오가게 됐고 머무는 기간도 길어졌다. 이제는 자카 르타와 인연이 느슨해지고 있다. 나이에 따라 학생, 직장인, 가정주부, 기자 등 과거의 일과 헤어지고 새로운 일과 만났다. 내가 성장하고 하는 일과 생각이 달라지면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많은 것들과 인연을 만들고 인연을 끝냈다. 사람이든 일이든 장소이든 헤어짐 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 쥐고 싶어도 놓아야 하 는 순간도 있고 거부하고 싶어도 새로운 인연을 잡아야 하는 순간도 온다. 지금 인연이 소중한 것은 그 인연에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침산책 / 조연숙

사박사박. 아침햇살이 쏟아지는 나무 사이로 걸어간다. 짙은 녹색 나뭇잎과 고동색 가지 사이로 햇살이 넘쳐난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방울이 바람에 통통 거리고 탁구공 만한 빨간 야자열매가 초록색 풀밭에서 구르기를 한다. 핑크색 바나나꽃이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수줍게 보인다. 슬라맛 빠기~, 굿모닝~, 안 녕하세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아침인사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몸에 딱 붙는 운동복을 입고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달리는 사람들, 유모차 를 끌고 나온 부부, 골든리트리버를 앞세우고 힘겹게 걷는 아주머니, 하늘을

85 조연숙


향해 얼굴을 들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쓰르르 쓰르르 야자나무 빗자루가 아 스팔트 도로를 스치는 소리와 함께 길옆으로 모이는 낙엽들, 쏴아아~~~ 시원한 물소 리와 함께 자동차를 덮은 하얀 거품이 씻겨내려간다. 스쳐가듯 달리는 자전거에는 교 복을 입은 학생이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산책로에 사람 수만큼 멍멍이도 있는 것 같다. 최근 수년 사이에 종교나 종족에 상 관없이 애완견을 키우는 집이 부쩍 늘었다. 길에 개똥도 생겼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왔 을 때, 길에 쓰레기는 많아도 개똥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슬람에서 개를 금기로 여 겨서 전체적으로 개를 기르는 집이 별로 없어서란다. 다만 힌두교가 우세한 발리 지역 이나 외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개를 볼 수 있었다. 개를 끌고 나오는 사람은 주 인보다는 가사도우미인 경우가 많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애완견이지만 한국처럼 개와 주인이 친밀하게 교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점점 마당이 줄어든다. 길옆 공터에 새 집이 하나씩 세워지는데, 넓은 정원은 좁아 지거나 없어지고, 주차장은 땅위에서 땅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땅 값은 저렴한 반면 건설장비와 자재비가 비싸서 건물을 위로 높이는 비용보다 땅을 사 서 옆으로 넓히는 비용이 저렴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아닌 것 같다. 대지에 꽉 차게 건 물을 짓는다. 해가 바뀌면서 집 모양도 바뀐다. 갈증을 날려주는 담백한 야자수. 아침산책의 마지막 순서다. 2.5킬로미터가량 걸어서 도달하는 아침시장(Pasar Pagi)에는 한 푼도 안 깎아 주는 과일장수, 험상궂게 생긴 고기장 수, 파리 쫓기의 달인 생선장수, 주변의 분주함과 동떨어져 보이는 잡화상 등 작지만 뭔 가 있을 건 다 있다. 손님은 아침 장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과 우리처럼 산책 나온 길에 들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오늘 먹을 만큼,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에서 비스듬하게 쏟아지던 햇살이 없어졌고, 뜨거운 열기 가 공중에 가득하다. 지지베베 시끄럽던 새들의 지저귐이 잦아들고, 딱.딱.딱. 딱다구리 가 나무 쪼는 소리가 들린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길에 차도 줄었다. 보라색 나팔꽃 과 주황색과 노란색이 섞인 헬리코니아(Heliconia), 노란색 난꽃(Anggrek), 빨간색 히비스 커스(인도네시아 이름; Kembang sepatu)들이 생기를 뿜어낸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됐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86


세상에는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참는 사람이 있다. 말을 참지 못하는 사람 들에겐 말이 많고 가볍다고 하고, 말을 참는 사람들에겐 진중하거나 음흉하다 고 말한다. 정말로 그럴까? 심리 관련 글들을 정리해보면, 말을 하는 사람은 △생각난 말은 반드시 해 야 하거나 △주목을 받고 싶거나 △정의의 사도가 되고 싶거나 △그 상황을 지 배하고 싶거나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주로 말을 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거나 트러블메이커가 된다. 말을 참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것을 수줍어하거나 △책임 지는 것을 싫어하거나 △말로 인해 다른 사람과 불편해지는 것을 피하고 싶은 사람 들이다. △가끔 내용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경우에도 침묵한다. 물론 말 을 하지 않는다고 할말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이는 글로 어떤 이는 그림으로 말을 대신한다. 이 글에서 말이 없는 사람이나 과묵한 사람이라는 표현 대신

말을 참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할 말이 있지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참는 사람 / 조연숙

만 참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이다. 우리 사회에서 발언권은 개인의 성향만이 아니라 권력에도 영향을 받는다. 한 회사의 사장과 직원이 회식을 한다면 사장이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고,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도 사장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될 것이다. 같은 직급의 직원 들이 밥을 먹는다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말을 할 것이다. 친구들 끼리 모였다면 말을 많이 한 사람이 밥값을 낼 가능성이 높다. 말은 내 의견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언젠가 여럿이 식사를 하러 갔 는데 ‘아무거나’라며 무엇을 먹고 싶은지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본인은 안 좋아하는 음식만 시켰다고 속상해하는 말을 들었다. 단체 활동에 대해 회의를 하는데 침묵만 하다가 말을 한 사람이 원하는 활동이 결정되니 맘에 안 든다며 빠지는 사람도 보았다. 친구1과 친구2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데 친구1은 본인 입장을 말했고 친구2는 말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친구1의 입장을 지지하게 되 자 갑자기 친구2가 억울해하는 상황도 있었다. 책임회피나 무관심 때문에 침 묵하는 사람은 덜 하겠지만, 용기가 없어서 적당한 때에 필요한 말을 하지 못 하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거나 억울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말하기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침묵을 하는 사람에게도 늘 어렵다. 진솔하 게 재미있게 용감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겁다. “고기는 중간정도 익히 고, 버섯소스를 함께 주세요. 와인은 단맛이 적은 걸로 추천해 주세요”라고 자 기 취향을 알고 여기에 맞춰 정확하게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적 절한 때 자기 말을 멈추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추임새를 넣고 잠시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행운이다. 어쩌다가 말없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편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마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모두 가 바라는 경지가 아닐까? 오늘도 당신은 말을 할까말까 고민하는 순간을 여러 차례 마주칠 것이다.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그럴 것이고. 갑자기 ‘그냥 그런 걸 가지고 뭘?’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짜장면과 짬뽕 중 하나를 고르는 것처럼 너무 자주 있는 일이 어서일까?

87 조연숙



조은아

Jo Eun A 나는 참 이기적입니다.

나는 ‘인작’에서 함께 나누지 않고 늘 선배들의 훌륭한 글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도강생입니다. 배울 것도 많고 부족한데도 잘한다 잘한다 다독여주시는 ‘인작’ 모든 분들의 너그러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올해도 다른 분들의 노고와 품격에 숟가락 하나만 얹고 갑니다. 축하와 발전을 기원 드립니다.

조은아 / Jo Eun A - 청주 출신 - 법학과에서 총망받던 장학생이었으나, 학과장님이 내 사주엔 ‘官’이 없다셔서 그 핑계로 고시원을 탈출함 - 청주 MBC, 청주방송 작가, ㈜충북일보, ㈜스포츠 투데이 기자 등을 지냈지만 호기심이 많아 틈나는 대로 [‘인체의 신비’-어린이대공원] [‘Ghost Fantasy’-COEX] 등 전시큐레이터로 외도도 함 - 나름 오드리 햅번처럼 살길 바라지만 그녀같은 우아함과 아름다움 대신 투박함으로 무장한 산골 아줌마.


안 / 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내 삶의 풍경 / 조은아

고요했다. 좌우로 몸을 뒤척이길

직도 새벽은 멀었다. 8차선 대로변에

겨 희미해진다. 그제서야 스르르 내

수십 번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살다 이 산골짝으로 옮겨왔지만, 도

안의 내가 잠이 든다.

았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시의 소음 속에서도 산속 적막 속에

더 이상한 것은 나였다. 내가 발휘 할 수 있는 최대 에너지를 끌어올려

었다.

혼자서 가만히 틀어박혀 며칠씩 지내보는 게 소원이었던 적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일거

그 고요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것

엉망이 된 머리를 한 번 툭툭 털고

리로 골머리를 앓을 때 도시로부터

도 들리지 않아야 정적인데 나는 그

는 이번에는 내 몸을 촉각에 맡겨본

단 몇 시간만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정적에서 깨알 만한 소리라도 찾으려

다. 낮에 햇볕에 바짝 말려 뽀송뽀송

때가 많았다. 세상이 외로울 틈을 주

고 애쓰고 있었다.

한 이불에 몸을 맡겨 본다.

지 않고 나를 부려먹을 때 전화도 인

잠이 안 오면 일어나 다른 일을 하 면 될 것을, 지금 잠들지 않으면 내일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이불 끝을 붙 들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럴수 록 잠은 더 더 멀리 달아나고 머릿속 은 망령된 사념으로 엉망이 된다. 더듬더듬 핸드폰을 쥐어 본다. 아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90

서도 나는 여전히 잠과 씨름하고 있

얼마나 지났을까. 닭이 운다. 아잔이 울린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오토바이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깜풍(kampung 시골) 닭은 아잔(azan 아침기도)을 부추기고, 아 잔은 사람들을 깨워 길거리로 나서게 한다. 훤했던 정원등이 새벽 빛에 감

터넷도 없는 곳에 피신해 외로움이라 는 사치를 누리고 싶었다. ‘뒷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앞 은 탁 트인 곳이면 좋겠다. 볕 쬘 만한 툇마루와 나 먹을 만큼의 상추 깻잎 심을 만한 작은 텃밭 하나면 좋겠다, 혼자 밤새 별빛을 친구삼아 책을 읽


자, 새소리에 눈을 떠 상추 뜯어 고추

처음 몇 달, 나는 밤의 정적뿐 아니

하는 데만 한 시간, 계산대까지의 줄

장에 쓱쓱 밥을 비벼 먹고 맨발로 사

라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시끄럽

도 어마어마 했다. 한국이나 인도네

부작 사부작 정원을 걷고 툇마루에서

게 울리던 전화벨의 환청이 들렸다.

시아에서는 7~800달러나 한다는 유

낮잠도 자야지. 오롯이 나 자신에게

낙엽의 바스락거림과 첫 눈의 설렘이

명 브랜드 가방이 단 백 몇 불짜리 가

집중해야지.’ 그것이 나의 소박한 꿈

기억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도 겨

격 탭을 달고 있었다. 그 가방을 들었

이었다.

우 갈까 말까 했던 엄마 집이 그립고,

다가 놨다 하며 몇 시간을 고민하고

엄마가 고봉으로 퍼주던 잡곡밥이 그

나는 결국 엄마 선물용 하나만 사서

립고, 엄마의 잔소리가 몸서리 처지

돌아왔다.

하느님은 내 소원을 듬성듬성 들 어주셨다. 소원을 빌 때 내가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나 보다. 해발 600m, 커다란 산들이 병풍 처럼 둘러있고 앞이 탁 트여 10여 킬 로 떨어진 마을까지 훤히 보이는 산 골에 왔다. 볕 쬘 만한 툇마루 대신 넓 은 베란다가 있고, 잔디밭을 갈아엎 으면 상추 깻잎 키워 장사도 할 수 있 을 만큼 넓은 정원도 있다. 아침 새소 리도 들을 수 있고 물론 달빛과 별빛 도 넉넉히 비춰주는 공기 좋은 곳은 틀림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집 전화를 놓을 필요도 없고 인터넷 사 정도 여의치 않아서 스마트폰도 필요 치 않았다. 나를 부려먹던 전화벨과

게 그리웠다.

다음날, 나는 달러샵에서 300불을

외로움이라는 사치를 누려보겠다

결제했다. 전부 아이들 생일 파티 용

던 나는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 투쟁

품과 자잘한 소품들이었다. 불어버리

적으로 육아에 전념하게 되었다. 정

면 끝인 알록달록한 풍선들과 부활절

신없이 이유식과 아이 반찬을 번갈아

달걀 찾기에 쓸 플라스틱 달걀 수십

만들고 나면, 내 목구멍으로는 라면

개, 색색의 종이들... 심지어 내년 할로

이 세상 제일 꿀맛이었다. 멸치 볶음

윈에 쓰겠다며 할로윈 가면 재고까지.

은 왜 자꾸 까맣게 타버리는지... 시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었고 친구는 어

치는 왜 그리 쉽게 무르는지... 경험도

이없다며 혀를 찼다. 캐리어 하나를

없고 관심도 없던 분야에서 나는 소

가득 채웠던 300불어치 잡동사니의

소한 재미를 찾아가려 애썼다. 나의

흔적은 아직도 창고에 남아있다. 그

시간은 아이들에서 아이들까지로 흘

렇게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내 몸

렀다. 나의 영혼과 육체는 오롯이 아

과 정신은 온통 두 딸들 뿐이었다.

이들에게 집중하는데 쓰였다.

우리집 거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일거리로부터 완벽히 해방된 듯했다.

어느 겨울 아이들을 데리고 플로

산에서 지는 해의 그림자가 길게 드

대신 나는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을 하

리다의 친구네 집에 놀러간 적이 있

리워지면 언덕길에서 염소를 몰고 내

며 주 6일 근무를 하던 남편을 대신

었다. 근처에 아주 유명한 아울렛 매

려오는 소년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해 독박 육아를 떠맡게 되었다. 힘들

장이 있었는데, 마침 연말과 연초를

분명 두 마리였는데 어느 날은 팔짝

다고 하소연해도 달려와 줄 그 누구

겸해 대단한 할인 행사가 열리고 있

팔짝 뛰는 작은 녀석이 늘더니, 또 어

도 없는 곳.

었다. 너무 큰 할인 행사다 보니 입장

느 날에는 네 마리가 되었다가 다시

91 조은아


“뭐가 그렇게 재밌니?”라고 물으면, “엄마는 얘기해도 몰라.”라고 어 쩌면 그렇게 나 어릴 적과 똑같은 대 답을 하는지. 우리 엄마가 그랬지 “딱 너 같은 딸 낳아봐라”. 아이들이 커가고 있었다. 어느 이른 새벽, 캠프를 떠나는 아 이들을 남편과 함께 배웅하고 돌아 오는 길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시끌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들이 “안녕 엄마 아빠”하고 사라지고 나서

물 흐르듯 흘러 몇 달, 또 몇 해를 홀 딱홀딱 잘도 넘었다. 어느새 우리 집에도 아기 울음 소

“우리 애들이 언제 저렇게 다 컸지...” “그러게” 또 침묵. 짧고 무심한 대화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아이들의 간식을 싸고 남은

다 뛰고 소리 지르고 까르르 뒤로 넘

딸기 몇 알을 먹으며 남편이 혼잣말로

어가는 10대를 바라보는 여자아이

“인도네시아에 딸기도 있었구나” 했

둘이 이제는 방문을 닫고 둘이서만

었다. 그때 잠시 미안했던 이후로, 이

속닥이기 시작했다.

날 또 나는 남편에게 많이 미안했다.

이를 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92

침묵

리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다다다

하루 종일 엄마에게 붙어있기 놀

하며 견뎌야 하겠구나. “우리 오랜만에 우리끼리 외식할 까?” “좋지” 아직은 익숙지 않아 아이들의 빈 자리가 무척 크게 느껴지지만 이런 쓸쓸함과 적막감은 언젠가 자연스러 워지지 않을까.

지금 여기서 고마움을 표하며 살아라.

“응 그렇네”

그렇게 시간은 내가 무엇을 하든

서로 마주보며 서로를 따뜻하게 위로

번에 입을 봉해 버리기라도 한 냥 말

“나뭇잎이 막 떨어지는 게 가을 같다.”

가는 다른 꼬마로 바뀌어 버렸다.

간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은 우리가

누군가 말했지. 사랑하기 위해선

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년도 부쩍 키가 자라더니 어느 날엔

아이들이 떠난 쓸쓸함과 나이가 들어

는 차 안은 조용했다. 둘 다 누가 한꺼 이 없다. 나는 문득 내 인생이 ‘남편

두 마리가 되곤 했다. 염소를 몰던 소

똘 뭉쳐 얼마나 그를 외롭게 했을까.

그동안 ‘바쁘고 피곤한 아빠를 괴 롭히지 말자’는 핑계로 여자 셋이 똘

“고맙지?” 나는 또 삐딱하게 마 음을 표현한다. “뭐가?” “그냥 다.” “한 십 년은 된 것 같다. 우리 둘만 외식이라는 걸 해본 게” 우리의 시간에도 ‘제철’이 있는 것 같다. 소년기, 중년기, 노년기에 꼭 해야 하고 겪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것처럼. 어느 시간에든 모두가 사랑 하며 살면 좋겠다. 우리 삶의 풍경은 늘 아름다웠으 면 좋겠다.


위기의 인간 / 조은아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꽂힌 거북이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죽어가는 물고기가

그나마도 규제와 단속으로 공기의 질과 급속한 기후 변 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넘쳐나 고 있는 쓰레기와 싸워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물을, 먹거

플라스틱 조각을 가득 주어 먹은 기러기가

리를, 삶터를 점령하고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그 중

쓰레기 더미를 헤집던 원숭이가

에서도 가장 고약한 쓰레기는 바로 ‘플라스틱’.

우리에게 말한다.

플라스틱은 빨대, 페트병 등 온전한 형태에서부터 5mm 이하의 ‘미세 플라스틱’, 현미경으로도 관찰하기 어려운

너희도 ‘멸종 위기종’이라고.

‘나노 플라스틱’까지 나뉘어져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수백 년에 걸쳐도 썩지 않는 플라스틱 폐기물과 지구 인간과의 공존은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를 떠나야 할 판

지구는 이미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잃었다. 나무심 기를 하면 공기가 맑아지고, 깨끗이 정화하면 맑은 물 을 먹을 수 있다고 믿던 시대는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쓰레기 속에 갇혀 마스크를 쓰고 좋은 먹거리가 아닌 깨끗한 먹거리 걱정을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 심으로 우리는 동물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국이다. 당장 플라스틱 봉투를 들고 있다고 하지 않더라도, 지금 당신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셔츠의 단추와 합성섬유는 물 론이고 당신이 오늘 아침 사용했던 치약에도, 식탁에 올라 왔던 생선의 뱃속에도 플라스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멸종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임을 깨달아야 한다.

93 조은아


플라스틱의 개발과 역습, Plastic pollution -플라스틱의 발견 신이 창조할 때 실수로 빠뜨린 유 일한 물질로 꼽히는 이 플라스틱이 탄 생한 것은 당구공 덕분이었다. 1860 년대, 아프리카 코끼리의 수가 급격하

에릭 솔하임 유엔환경계획(UNEP)

고 있다. 바다 생물들이 미세 플라스

사무총장은 “현 수준대로라면 2050

틱을 먹이로 착각해 먹고 있을 뿐 아

년에는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의

니라 먹이사슬을 통해 이동하고 있음

무게가 물고기의 무게와 맞먹게 될

을 보여주는 결과다. 이미 유럽에서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해 세계의

는 평균적인 유럽인이 홍합과 굴 섭

플라스틱병은 4천800억개로 집계됐

취를 통해서만 해마다 1만1000개의

고 2021년에는 그 수가 5천830억개

미세플라스틱을 먹게 될 수 있다는

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게 감소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일

1997년 태평양에서 발견된 거대

사람의 체내로 들어온 미세 플라스

로 당구공의 재료로 쓰이던 상아 값이

한 쓰레기 지대는 2007년에 이미 한

틱이 인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천정부지로 뛰어오르자 미국 당구업

반도 크기의 7배 이상으로 불어났고,

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 결과가 쌓

자들은 상아를 대체할 물질을 개발하

현재의 기술로 바다 위의 쓰레기를

이지 않아 과학자들도 확실한 결론을

는 자에게 1만 달러의 상금을 지급한

모두 치우려면 약 7만 5000년이 걸린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세 플

다는 공모에 나서게 된다. 1869년 하

다고 한다.

라스틱 제조 과정에 첨가된 다양한 유

야트란 인쇄업자가 상금을 탈 욕심으 로 동생과 함께 톱밥과 종이를 풀과 섞어 당구공을 만들려다, 우연히 니트 로 셀룰로오스와 장뇌(녹나무를 증류하 면 나오는 고체 성분)을 섞었을 때 매우

단단한 물질이 된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것이 천연수지로 만든 최초의 플라 스틱 ‘셀룰로이드’다. 이러한 플라스틱이 본격적으로 활 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벨기에

플라스틱 해양폐기물 문제는 이미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더는 견딜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미세 플라스틱이 식탁을 위협 하고 있다. 크기 5㎜ 이하의 플라스틱으로 정 의되는 미세 플라스틱은 발생원에 따 라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있는 다른 유해물질까지 끌어당겨 흡 착하기 때문에, 몸 속에 들어온 미세 플라스틱이 체외로 배출될 수 있다 하 더라도 플라스틱에 함유돼 있던 이 유 해물질은 체내에 흡수될 위험이 있다. 유엔환경계획은 2019년 5월 발표 보고서에서 “마이크로플라스틱보다 작은 나노플라스틱은 태반과 뇌를 포 함한 모든 기관 속으로 침투할 수도

의 베이클랜드가 합성수지를 만들어

처음부터 작은 크기로 만들어져 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나

내고 그는 이로 인해 1919년 퍼킨상

약, 스크럽 등 사용된 뒤 하수도를 통

노플라스틱이 조직과 세포 속으로 이

까지 수상했다. 그 후 1938년, 뒤퐁사

해 배출된 1차 미세플라스틱과 바다

동한 이후의 위험을 ‘블랙박스’로 표

(社)의 캐러더스가 나일론을 합성, 스

로 들어온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자외

현했다.

타킹을 만들면서부터 플라스틱의 수

선과 바람, 파도의 힘으로 부서지면서

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만들어진 2차 미세 플라스틱이다.

-잠복기를 끝내고 증상이 나타 난 암과 같은 ‘플라스틱’

지 않을 정도로 작고, 처음에는 보였던

이들은 대부분 맨눈으로는 잘 보이 것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이크로미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Stop Using! If not, Reduce Reuse Recycle

육지에서 버려졌건, 바다에 직접

터(100만분의 1m)와 나노미터(10억분의

전체 플라스틱 제품의 약 40%를 차

버렸건 대부분의 쓰레기가 모이는 곳

1m) 크기까지 쪼개져 결국은 보이지

지하는 포장재, 일회용 봉투와 컵 사용

은 바다가 된다. 해양 쓰레기는 분포

않아 마치 바닷물에 ‘함유된’ 미량 물

금지 등이 가장 기본으로 꼽히는 실천

에 따라 해안쓰레기, 부유쓰레기, 해

질 가운데 하나로 보일 정도가 된다.

덕목이지만 이마저도 외면하는 사람

저 침적 쓰레기로 분류할 수 있다. 해 양 쓰레기는 선박 사고의 원인이 되

미세 플라스틱은 바다 생태계의

고 어업 생산량은 떨어뜨릴 뿐 아니

기초인 동물성 플랑크톤에서부터 갯

라 해양 동물의 생존과 우리의 식생

지렁이, 새우, 게, 가재, 작은 청어에

활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서 대구와 참다랑어 등의 대형 어류 에 이르는 다양한 생물종에서 발견되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94

해 화학물질 뿐 아니라 물 속에 녹아

들이 아직도 많다. 지금 당장 전 인류가 플라스틱 사용을 중지한다고 해도, 이 미 버려진 쓰레기와 앞으로 몇 백 년을 더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비 가 오면 빗물의 흐름을 막고 버티는 쓰레기 더미로 인한 범람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강 하류민들의 생활은 처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 없이 마구 버리는 사람들도 범람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1분 마다 200만개의 비닐 봉투가 사용되고 있 고, 한 개의 비닐봉투는 평균 12분 동안 사용되어진 뒤 버려진 다. 비닐 봉투 1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석유의 양으로 자동차 를 11m 운전할 수 있다. 당장 사용을 중지할 수 없다면, 줄이고, 다시 쓰고, 재활용하 는 방법이 지금의 최선이다.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땅에 묻어 자연스럽게 해소하게 하거나 열로 소각하는 방법 등이 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막대한 비용과 함께 2차 환경 오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플라스틱이 분해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500년. ‘오늘만 하루만, 이번 한번만’ 이란 안일한 생각을 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환경운동은 특정 단체, 특정인들만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편 견도 버려야 한다. ‘BBPB’(Bye Bye Plastic Bags)은 2013년 당시 10살, 12살이던 멜라티와 이자벨 자매가 발리에서 만든 환경 보 호 NGO 단체다. Youth Climate Action은 심각한 기후 위기에 맞 서 스웨덴의 십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를 중심으로 모인 청소년 환경 단체다.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애쓰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환경운동이 아니라 처절한 생존 싸움이기 때 문이다.

95 조은아



조현영

Cho Hyun Young 인작 3년, 설레임은 덜해도 우리는 알지요. 서로에게 옆구리 따땃하게 지져줄 아랫목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또 다른 빛깔로 그려진 인작 웹진 3호 발간을 축하합니다.

조현영 / Cho Hyun Young 틈틈이 사진기 <manzizak>거리고 자카르타경제신문에서 1하고 있으며 여전히 ‘지금-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박 /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 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 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 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 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 는 마음이었다

뒷담화 / 조현영

“단정할 순 없지만 그런 사람들은

람을 이용할 기회를 만들어요. 입에 발

대부분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린 소리도 잘 하고 자기가 얼마나 잘

거죠. 알려고도 하지 않구요. 자기가

난 사람인지 들이대는데에는 아주 도

내뱉은 말이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사예요. 막 별거 아닌데 칭찬하구 환심

비수로 꽂히는지 따위는 관심 1도 없

사는 소리 해가면서 허세도 쩔어요.

어요. 그냥 온통 자기상처 자기연민 덩어리죠. 아니다, 병적인 자기애가 맞겠네요.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게 가능하겠어요? 한다 해도 그건 접대용이죠, 자기에게 유 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겉으로만 그런 척 하는거예요. 자기보다 더 힘있고 얻을 게 있다 생각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든 그 사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98

처음에는 얼마나 잘 하는데요. 자 기가 되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 드는거죠. 그게 다 위선이라는 걸 알 게 될 때는 이미 한번 당하고 난 다음 이예요. 사람 사이에 계산이 정말 빨라요. 거기다 말빨까지 좋아서 거짓말을 해 도 진짜 같이 하거든요. 자기가 하는 거짓말에 자기가 속을 정도로. 그러니


까 죄책감 같은 게 있을리가 없죠. 혹

도 하면 후폭풍이 장난 아니죠. 한번

시 그 인간이 미안하단 말을 해도 그

씩 겪어본 주위 사람들은 다 아는데

거 다 개뻥이예요. 아직 이용가치가

자기만 몰라요, 자기 문제를. 어떤 심

있다 싶은 사람한테 하는 작전상 후퇴

리상담자가 그러던데, 정작 이런 사

같은 거예요. 절대 믿으면 안돼요.

람들은 상담치료 같은거 절대 안 받

그러다가 자기가 뭘 잘못한 게 들 통나잖아요? 급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자기가 모두 당한 것 마냥 행 세를 하더라구요..와, 이거 모르는 사

고 그 인간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이 되려 상담을 받는다구요. 자만심 으로 뭉친 인간이 자기에게 뭔 문제 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람이 보면 그게 진짠 줄 알아요. 하긴

이 인간 진짜 피하고 살아야 되는

사기치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많

데,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인구의 4%

다고는 하던데.

나 된다네요. 헐. 안 마주치기가 더 힘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다가 이용 가치가 떨어진다 싶거나 좀 불리해진 다 싶으면 싹 돌아서요. 그냥 돌아서 고 안 보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쩌다 가 자기가 상대에게 밀렸다 싶으면 바로 복수 들어갑니다. 지고는 못 사 는 타입. 자기가 세상 제일 잘 난 줄 아는 인간이 졌다고 생각해봐요. 미 치는거죠. 교묘하게 뒤집어 씌우거나 이간질은 보통이고 대놓고 상처되는 말 막 던지거든요. 그거 안 당해본 사 람은 모릅니다.

들 정도.. 어쨌거나 겉으로는 사람 좋 아보이고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사람 들이니 막상 겪어보지 않으면 저 인 간 속을 알 방법이 없어 보이네요. 저 런 인간이 나한테 접근한다는 건 내가 자기한테 도움될 만한 능력있는 사람 이란 반증이기도 한데,..그 순간 내가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에 그만 엮이기 시작하면 인생 피곤해지는 거예요. 기

만하면 피하고 사는 게 좋아요. 상담자 말로는, 어쩔 수 없이 마주 쳐야 할 때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포커페이스로 상대하라네요, 그래야 저 인간도 나를 파악할 수가 없다고, 감정이 안 드러나니까 지 맘대로 조 종을 못 하는거죠. 워낙 남의 감정을 조정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니 빌미를 주지 말라는 거겠죠? 나한테 막 칭찬하고 띄워주는 말 해도 고맙단 말 같은거 하지 말고 ‘별 말씀을요.. 과찬이세요’ 뭐 이런 식으 로 둘러대는 게 요령이랍니다. 그게 말은 쉬워도 막상 부딪히면 어렵잖아 요. 만일 회사에서 만난 관계거나 일 상에서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라면요, 정 안되면 가만있거나 잘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라도 피하는게 저런 인간 에게 내가 상처받지 않을 방법이라고 하네요. ”

분은 좀 드러워도 ‘그냥 나 별거 없는

이 뒷담화에 누군가가 떠올랐다면

사람이야’ 이 쪽으로 방향잡고 빠져

가능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피하시길

야 해요. 그 인간 주변에서 당했던 사

권합니다.

람들이 같이 ‘그 인간에게 더 이상 속

그런 인간들의 제일 큰 문제는 자

지 말고, 서로 쉴드 쳐주고, 피해자 코

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스프레에 속지 말자’ 이런 협약(? )까

않고, 알려고도 안하고, 알려주기라

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네요. 아휴, 웬

그 사람이 소시오패스일 수도 있 습니다.

99 조현영


숨바꼭질 / 조현영

지는 해는 빌딩 숲에 숨어 숨바꼭질 하잔다 못 찾겠다 꾀꼬리! 외치고 나니 내가 찾고 싶었던 건 해 말고 나.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 제1회 디카시 공모전 장려상 수상)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00


답답한 속내 / 조현영

속을 뒤집으니 그 속이 보이네 속이 보인다고 그 속을 다 알까 내 속 뒤집지 말고 너의 속을 보여줘 알고 싶어 너의 진짜 속마음

101 조현영


인생은 타이밍 / 조현영

물반 고기반 때가 왔다 날자, 지금이야!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02


103 조현영



채인숙

Chae In Sook 세상의 모든 뱀이 출현하는 다큐멘터리를 본다. 바닥을 읽는 400개의 갈비뼈와 물의 흐름을 읽는 2개의 촉수를 가진 촉수뱀은 길고, 날렵하고, 소름 끼치고, 아름답다. 다리가 없으나 온 몸을 문지르며 땅을 이동하고, 지느러미가 없으나 물에서 유영한다. 나의 시는 언제쯤 그런 몸을 가질 수 있을까... 인작이 벌써 세 번째 허물을 벗는다. 게으른 것은 여전히 부끄럽지만, 아무튼 자축할 일이다.

채인숙 / Chae In Sook - 가끔 시를 씁니다 - 2015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 등단 - 계간 <디카시> 해외기획위원 - 한국작가회의 회원


이 / 응준

홀로 있는 자정의 괘종시계 소리

꽃씨 하나에도 우리가 세우고 무너뜨릴 국가가 있다는 당신의 그 말이 좋 아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 모래알 같은 꽃씨 하나의 그다음의 세 계가 보고 싶어서 어느 날 당신이 저렇듯 중요하지만 무서운 일을 시작하 였듯이. 이것은 사실 파란 장미의 장례식. 나는 자정에 홀로 책상에 앉아 만년필로 글을 쓰고요, 같은 종끼리 학살하는 것은 인간과 쥐 같은 것들 몇 개뿐이라고 한 줄 쓰고요, 행복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까지는 관여하 지 않겠다던 당신이었으나 불행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에 우리의 사랑 에는 희망이 없었던 겁니다. 왜 세상은 다 혈투 아니면 혈서 같은지요. 인 간 아니면 쥐 같은지요. 그러니까 뭐 주로 그런 것들, 왜 말도 안 되는 이야 기 같은지요. 꽃씨 하나에도 우리가 세우고 무너뜨릴 국가가 있다는 당신 의 그 말이 좋아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만, 모래알 같은 꽃씨 하나 의 그다음 세계인 당신, 나의 파란 장미 장례식 같은 당신, 행복하다는 말 은 위험한 태도였던 겁니다.

무슬림 여성으로서 글쓰기 –인도네시아 여성작가협회 회원들과 / 채인숙

몇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자바의 건기가 올해 유난히 길 었다. 아시안게임으로 들썩였던 도시의 공기가 채 가라앉지 않아 더욱 텁텁하고 메마르게 느껴지던 건기의 끝, 인도네시 아 여성작가협회(KPPI)의 창립자인 라트나(Ratna M Rochiman이하, 라) 시인과 두 명의 소설가, 타티(Tati Y Adiwinata-이하, 타)

와 디안(Dian Rochmikawati-이하, 디)을 만나기 위해 서부 자바의 주도인 반둥(Bandung)으로 향했다. 평소 자카르타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반둥은 인도 네시아의 대표적인 교육 도시이며 동시에 너른 차밭과 온천으 로 유명한 휴양 도시이다. 그곳에서 인도네시아 여성작가협회 가 탄생한 것은 어쩐지 매우 적절하게 느껴졌다. 라트나 시인 과 나(채인숙-이하, 채)는 한국의 한 문예지에 시를 번역 소개했 던 인연으로 이미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고, 다른 소설가들은 첫 대면이었다. 우리는 만나자 마자 서로에게 뺨을 대는 인사 로 반가움을 나누었다. 앗살람말라이쿰(atsallamalaicum)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06


왼쪽_채인숙 시인 (왼쪽 첫번 째)이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작가협회 회원들 오른쪽_계간 ASIA2018 에 실린 본 인터뷰 글 (사진=채인숙 제공)

채: 라트나, 우리 꽤 오랜만에 만

(Cerpen)이라고 하는데 인기가 많은

로 개인적으로 공모를 해서 작품을

나는 군요. 다른 두 분도 이렇게 만나

장르예요. 두 사람은 SNS를 통해 일

발표합니다.

게 되어 반갑습니다.

반적인 소설 뿐 아니라 츨펜으로 대

라: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일

중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어요.

라: 곧 인도네시아 작가들이 모여 서 마자스(majas)라는 새로운 문예지

이 자꾸 생긴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

타: 얼마 전에 소설가들이 모여 단

를 발행할 거란 소식이 있어요. 지면

뻐요. 인터뷰니까 제 소개를 하자

지 세 문단만으로 이야기를 완성하는

이 다양하지 않으니 저 같은 경우엔

면, 인도네시아 여성작가협회(KPPI)

츨펜 단편집(Kitap cerpen Tiga Paragraf)

시 낭독회에 자주 참여해요. 그런 자

를 만든 라트나 로치만 시인입니다.

을 출판한 적이 있어요. 아주 재미있

리에서 신작시를 발표하죠. 아주 연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썼고,

는 기획이었지요.

극적인 시 낭송이 이루어지는 공연도

지금은 시와 소설을 쓰면서 작은 사 업을 하고 있어요. 여기 두 분은 소설 을 쓰는 타티와 디안입니다.

채: 인도네시아 작가들은 주로 어 떤 경로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나 요? 한국은 등단 제도가 있어서 주

디: 안녕하세요. 저는 디안 로치미

로 문예지나 신문을 통해 데뷔를 하

카와티(Dian Rochmikawati)이고 필명

고, 그후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은 디안 라치마(Dian Rachma)입니다.

시집이나 소설집을 내거든요. 물론

반둥에서 태어나 1998년에 파자자란

출판사와 바로 계약을 맺고 책을 내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소설

는 분들도 많지만요.

을 쓰고 있어요.

디: 인도네시아에는 아직 문학 전

타: 저는 타티 아디위나타(Tati Y.

문지가 많지 않아요. 호리손(Horison)

Adiwinata), 나이는 47세입니다. 고등

과 움미(Ummi), 안니다(Annida) 정도

학교 2학년 때부터 소설을 썼고 1992

의 문예지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년 하리안 우뭄 피키란 락얏(Harian

신생 문예지들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

Umum Pikiran Rakyat)이라는 신문에

지곤 해요. 최근에 인터넷 문학 사이

처음으로 제 단편이 실리면서 소설가

트가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는 것은

로 살고 있어요.

반가운 일이지요. 대신 신문마다 주

라: 인도네시아에는 아주 짧은 단 편소설을 츠리타 펜덱(Cerita Pendek 짧은 이야기라는 뜻-역) 줄여서 츨펜

말판에는 반드시 문학면이 있어서 작 품을 발표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 다. 지방 신문들도 마찬가지고요. 주

많은데, 책을 통해 시를 접하는 것보 다 직접적이고 강렬해요. 개인 시집 을 출판하는 것 뿐만 아니라, 뜻이 맞 는 시인들이 모여 자주 시선집을 발 간합니다. 2014년에는 여성작가협회 에서 인도네시아 여성 시인 100인의 신작시를 모은 시선집(Antologi Puisi 100 Penyair Perempuan)을 출판했어요.

대규모 작업이었지만 아주 보람있는 일이었지요. 채: 제 아들이 고등학교 때 발리 (Bali)에서 열리는 Readers & Writers

페스티벌에 간 적이 있었는데, 엄청 나게 다양한 시극, 낭송 공연, 작가와 대화하며 함께 작품을 만드는 걸 보 고 흥분하며 행복해하더군요. 자카르 타에서 20년을 살았는데 사실 인도 네시아 문학에 대해서 너무 단편적으 로만 알고 있어서, 그런 낭송회가 며 칠 동안 대규모 축제처럼 해마다 열

107 채인숙


린다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나요. 타: 그건 발리(Bali)여서 가능한 일 이기도 해요. 인도네시아는 엄청나게 큰 섬나라고 지역과 종족에 따라 너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저는 양

가장 유연하고 구체적으로 삶의 방법

계장에서 닭을 사고파는 일을 하면서

들을 알려 줍니다. 문학은 그곳을 향

글을 쓰는데, 오히려 그 일에서는 남

해 가는 다리와도 같습니다.

자들의 인정을 받지요. (웃음)

무나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같

라: 이슬람 종교로 인해 때로 제

디: 저 역시 저는 바소(*Baso: 국수

은 나라 안에서 완전히 다른 나라를

글이 제약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에 넣어먹는 완자- 역)를 만드는 일을 하

여행하는 기분이 들 정도죠. 그런 뚜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경전에 있는

면서 글을 씁니다. 쉽지는 않아요. 어

렷한 지역성(Kearifan lokal)은 인도네

기본적 신념을 훼손시키지 않고 어떠

떤 매체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쓴 제

시아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

한 오해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글을

글의 주제 때문에 배척을 받았던 아픈

예술적 가치를 가졌다는 걸 말해주는

써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가지고 있

기억도 있어요. 그렇지만 흔들리지 않

것이고, 앞으로 인도네시아 문학이

습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은 제 일상

는 고유한 작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발전해서 세계로 나아가는데 큰 강점

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죠. 최근 들

저의 여정을 멈추지 않았어요. 사실

이 될 겁니다.

어 시와 단편소설에 인도네시아 사회

저는 마음의 소리를 바로 듣지 못했

문제에 대한 저의 고민을 많이 다루

습니다. 삶의 권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지만, 언제나 제 종교가 가리키는 올

모든 일을 평소처럼 다룰 수 없게 되

바른 방향을 향해 글을 쓰려고 노력

었지요. 휘몰아치고 있는 생각들을 해

합니다.

소하고 싶은 감정에 불타올랐습니다.

라: 하지만 다른 문화 예술 분야에 비해 문학이 가장 발전이 더디고 늦은 편입니다. 아직 독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낮고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탓

머리 속에서 복잡한 저의 생각과 보편

이기도 합니다. 시집을 읽는 것보다

타: 제가 여성인 것도, 무슬림인

시 낭독회를 보는 사람이 더 흔할 정

것도 당연히 자랑스럽습니다. 종교

도예요. 부끄럽지만, 인도네시아 현대

때문에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데

문학은 이제 겨우 태동기를 지나고 있

제한을 받지는 않습니다. 인도네시아

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최근 들

는 다양한 지역 사회로 구성되어 있

어 문학의 주제도 다양해지고 작가들

고 그만큼 각자의 차이점을 존중하니

의 활동 영역도 넓어지고 있어요. 최

까요. 오히려 종교는 제 모든 글의 가

채: 세 분 모두 인도네시아 여성작

근에는 한국 문예지에 많은 시가 소개

장 강력한 토대입니다. 이슬람은 타

가협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들었습니

되고 소설이 출판되었잖아요.

인에 대한 사랑과 모두를 위한 이로

다.

채: 여러분은 이슬람 사회에서 여 성 작가로 살아가고 있고 또 본인들 도 무슬림입니다. 종교가 여러분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 다. 사실 이 질문을 드리는 것이 조심

움(Rahmatan Lil Alamin)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줍니다. 수평과 수직이 조화를 이룬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연, 사회적 관계, 신을 향한 사랑에 대해 글을 쓰도록 만들지요.

적인 세상의 사고, 그리고 상상의 세 계가 뒤범벅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만드는 관조의 공간 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것을 응시 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라: 인도네시아 여성작가협회 (KPPI)는 2012년 12월 22일 타식말라

야 치파성에서 설립됐습니다. 제가 이 협회를 만든 장본인인데, 여성 작가들 이 계속해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

스럽기도 해요. 굳이 종교와 성별을

채: 물론 보편적인 사회 문제이긴

록 동기를 부여하고 작품을 서로 평가

따져가며 문학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기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

나 싶거든요.

때문에 문학 활동을 하는데 차별이나

기 때문입니다. 반둥과 자카르타를 비

제약을 받지는 않나요?

롯해 여러 도시에 회원들이 있는데,

디: 아니요, 좋은 질문이예요. 제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08

하고 독단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문학에서 종교는 특별한 역할을 합니

라: 우리 사회가 아직 여자는 문학

다. 제가 창조주와 같은 특별한 존재

이나 지성적인 일을 하는데 맞지 않다

라는 걸 일깨워 주고, 하나의 질서로

는 고정관념이 강한 것은 분명합니다.

제 삶에 작용합니다. 망운위자야(YB.

대부분(남자들) 여자가 글을 쓰는 것

Mangunwijaya) 작가의 ‘문학과 종교

에 대해 특별히 반대 의사를 나타내지

(Sastra dan Religiositas)’라는 책이 저에

는 않지만, 가정에서의 역할과 의미를

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종교는 강

주장하며 여성을 완곡하게 배척하고

작품을 발표한지 얼마 안된 신인 작가 와 이미 경험이 많은 작가들이 함께 어울려 글쓰기 훈련과 교육 활동을 진 행하고 있습니다. 여성 작가들이 지역 사회에 자신의 문학을 알릴 수 있도록 지지하고 더 나아가 좋은 작품을 산출 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타: 여성들은 강인하고 현명합니 다. 우리는 동시에 신이 주신 여성으 로서의 운명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함 께 나아간다면 거대한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수준 높은 문학 작품을 생 산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시민들의 의 식을 향상시키는데도 힘을 써야 합니 다. 그래서 최근에는 여성작가협회 주 도로 지역마다 독서 클럽을 운영하는 일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 런 일들을 꾸준히 해 나갈 거예요. 채: 고맙습니다. 의욕 넘치는 여러 분들을 만나서 너무 기뻐요. 많이 웃 는 자리여서 더 좋았고요. 마지막으

로 자신들의 대표작을 한 편씩 소개 하면서 인터뷰를 끝맺을까요? 디: 저는 독백을 좋아합니다. 정적 이고 신성한 자아를 품은 인간의 근 본에 대한 질문이 제가 다루는 주제 입니다. 그 주제에 부합하는 ‘마양 목 걸이(Selendang Mayang)’를 대표작으

라: 시는 ‘치렝가니스의 눈물(Derai Ciregganis)’을, 그리고 단편 소설은

‘찻잎의 노래(Nyanyian Daun Teh)’를 들게요. 소설은 서부 자바 주에서 일 어나고 있는 미성년자 결혼 문화에 대 한 이야기를 쓴 것인데, 가룻의 대학 교에서 학습 자료로 사용되고 있어요.

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Mayang: 종

채: 제가 먼저 여러분의 글을 열심

려나무 꽃, Selendang: 어깨나 목에 걸치는

히 읽는 애독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스카프 형식-역)

이 드네요. 앞으로 인도네시아와 한

타: 아직 최고의 작품을 쓰지는 못 했지만, ‘운명의 게임(Permainan Nasib)’ 이라는 단편 소설을 들고 싶어요.

국의 문학이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만나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디카시(Dica詩) 쓰고 놀자! / 채인숙

*

**

***

여행을 떠났다가, 길을 걷다가, 아

디카시는 SNS가 생활화된 시대에 떠

디카시는 누구나 쉽게 창작할 수

름다운 자연과 대면하다가, 누군가와

오르는 새로운 문학 장르다. 자연이나

있고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詩)

만나다가, 차 한 잔을 마시다가, 혹은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카

를 나눌 수 있다. 영상과 문자가 어우

무수히 드나들던 동네 어딘가에서,

메라로 찍고 5줄 이내의 문자로 표현하

러져 시를 보는 즐거움, 시를 읽는 즐

문득 시(詩)가 되는 풍경을 만나게 되

면 된다. 사진과 시가 한덩어리가 되어

거움, 시를 생각하고 창작하는 즐거

는 순간이 있다. 감정의 어떤 미묘한

새로운 문학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기

움을 동시에 얻는다. 꼭 시인이 아니

움직임이 오고 “이건 그냥 그림이고,

존의 포토포엠과는 다르다. 포토포엠은

어도 된다. 남녀노소, 외국인, 한국인

시(詩)야!”라는 느낌이 딱 오는 순

시의 내용과 어울리는 사진을 배치하여

가릴 것도 없다. 문학이 거창한 예술

간. 그때 재빨리 핸드폰 카메라를 꺼

사진이 시를 감상하는 보조 역할을 하

분야가 아니라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내서 사진을 찍고, 그 순간의 정서와

는 반면, 디카시는 아예 사진이 시의 영

수 있는 생활 속의 활동이 되도록 권

느낌을 5줄 이내의 짧은 시적 문장으

역 안에 포함된다. 한마디로 사진과 시

한다. 이런 장점 덕분에 디카시 창작

로 표현해 보자. 그것이 바로 디카시

가 묶어져 하나의 문학이 되는 것이다.

인구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Dica詩)다.

찰나에 스치는 감각을 사진으로 포착하

고, 자연과 사물과 인간이 던지는 메시

지를 받아 적듯이 쓰면 된다.

109 채인숙


**** 디카시(Dica詩)는 2018년부터 한국의 중,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새로운 문학 장르 로 소개되었다. 한국디카시연구소의 이상옥 시인이 2004년에 처음 ‘디카시’라는 용어 를 썼고, 2016년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 에 ‘디카시’가 정식 문학 용어로 등재되면서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현재 중국과 미국,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외국으 로도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중국과 미국 에서는 ‘한글 디카시 공모전’이 해마다 열리 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황순원 디카시 문학 상’ ‘오장환 디카시 문학상’ ‘이병주 디카시 문학상’을 비롯하여 각 지방단체에서 실시 하는 ‘부산시 에코 디카시 공모전’ ‘고성 국 제 디카시 페스티벌’ 등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 인도네시아에도 디카시(Dica詩)를 쓰면서 보다 친근하게 한글을 접하고 수준 높은 한 류문학을 향유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채 인숙 시인(필자)이 한국디카시연구소의 해외 기획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인도네시아 여성 작가협회, 인도네시아국립대학교 한국학과 와 반둥교육대학교, 가자마다대학교 한국어 학과 학생들의 디카시가 한국의 문예지에 수 차례 게재되었다. 또한 지난 2019년 한글날 에는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과 한국디카 시연구소가 협력하여 ‘제1회 인도네시아 한 글 디카시 공모전’이 실시되었다. 인도네시 아에 살고 한글을 사랑한다면 남녀노소, 나 이,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 자! 이제, 신나게 디카시(Dica詩) 쓰고 놀 자!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10


<제1회 인도네시아 한글디카시공모전> 인니인 수상작

111 채인숙



최장오

Choi Jang Oh 살다가 문득 등불처럼 가슴을 환하게 밝히는 얘기들… 글로 쓰고, 다듬고, 또 부끄러워하다가 여기에 남깁니다. 지난 두 차례, 인작의 결실에서 느꼈던 경이로움이 올해도 나의 일년을 가슴 벅차게 마무리해 줄 것입니다.

최장오 / Choi Jang Oh - 천연가죽 가공/ 파이톤 가죽 수출 - 취미 생활로 시와 산문을 쓰며 인도네시아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 / 해인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 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묻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마음에 드는데……’ 하고나직이 속삭이며 미소 지어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고향집 / 최장오

고향집 면천에는

따스한 햇살

푸른 솔 냄새가 납니다

가볍지 않은 산 냄새

언덕 위 우뚝 선 소나무 밑에는

긴 꼬리를 물고

솔잎들이 켜켜히 쌓여 있고

토방까지 찾아 옵니다

솔잎 두께만큼

살살거리는 솔 바람에

훈훈한 이야기들이 겹겹이

면천집 소나무밑의 봄은

쌓여 있습니다

노란 송홧가루 속에 묻힙니다

산자락 감아 돌아

멀리서 소쩍새 긴 여운

앞 마당까지 드리우던 솔 향기

고향의 봄은 익어 갑니다

아직도 코 끝에 가지런히 묻어 있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에 둥지 틀고 각각거리던 산새들 양지바른 앞산을 향하여 뻐꾸기를 부릅니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14


마호가니의 꿈 / 최장오

결 고운 살을 만드느라 날 선 햇살을 엄살도 부리지 않고 꼿꼿이 받아 내 는구나 빈틈없는 살을 위하여 거무칙칙한 피부를 마다하지 않고 뜨거운 햇살을 받아 들이는 구나 붉은 태양의 빛깔과 말간 수액을 퍼 올려

나무 별

황토 빛 살을 꼼꼼하게 만드는 구나

/ 최장오

흐린 날도 비 오는 날도 구김없이 작은 빛조차 갈무리 하는구나

별 따러 간다 나무에 올라간다

백 년도 성이 차지않아

대낮에 왠 별을 딴다고,

천년을 살기 위한 몸부림인것을 몰랐구나 백년 동안 바람이 쓰 담던 손길을

아이는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별을 따

천년의 세월에 맡기려는 구나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 맑은 웃음도 저버리고, 밝은 연둣빛조차 아무리 찾아도 별은 보이지 않는다

감춰버린 무표정하게 견뎌내는 너,

컴컴한 나뭇가지 사이 샛노란 브림빙이 숨죽인다

천년을 살기 위한 몸부림 이었구나

햇살이 틈을 비운 곳마다 촘촘히 박혀있다.

천 년을 견디어 내기 위한 꿈 이었구나

어둑한 저녁, 별이 식탁에 앉아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고, 반짝인다 새콤한 즙이 입 안에서 터진다. 흐릿한 도시의 별하나 나의 풋풋한 별 하나 브림빙 나무에 걸어둔다.

115 최장오


브로모

주홍글씨

/ 최장오

/ 최장오

구름인줄로만 알았다

이태리타월로 빡빡 밀어본다

안개인줄로만 알았다, 아……

모음과 결탁된 주홍글씨는 몸 속으로

우리는 어쩌다 순교한 언어로 문장의

더욱 선명하게 파고든다

부호를 대신 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듯싶다.

그 시절, 지우개

난 길을 걷다가 더 갈 수 없는 길을 만난다

검지에 침 발라 곱게 지우던 작은 손가락

한 바퀴 휘 돌아도 내려갈 수 없는 길

잘라진 고무조각으로 새까맣게 지우던

내려오라고 흰 손으로 유혹해도 길은 없다

자음 한 조각조차 정성스럽게 지우다

뱉고, 토해내고 아직도 게울 것이 많아 웅웅대는

지우다 구겨지고 찢어지던

마음대로 쏟아내는 네가 부러워 게워낸 속살을

끝내는 새까만 때처럼 밀려

한 움큼 집어 만져본다,

너덜너덜, 깔끔하게 지우던.

화맥과 심맥이 잠시 소통하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새로운 세상으로 내려간다

그 시절,

뜨거운 가슴으로 토해내는 몸부림인줄도 모르고,

마법의 화학공장굴뚝에서 피어나던 연기처럼

구름인줄로만 알았다

수정액으로 감쪽같이 덮는다,

안개인줄로만 알았다

덧칠한다,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는지는 몰랐다

한 자씩 한 자씩.

네가 만드는 세상으로 함께 미끄러져 내려온다 약지로 살짝, 문장을 통째 ‘Del’ 너무 쉽다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16


117 최장오


2019 '인작' 활동

1월

일시: 1월12일 장소: 한인니문화연구원 논의: 2019년 전반적인 운영 방향에 대해

2월

일시: 2월9일 장소: 한인니문화연구원 발표: 조연숙:삼일운동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배동선: 1.인도네시아인이 자기 영웅을 대 하는 태도 , 2.재물주술(2가지 주제)

3월 일시: 3월9일 장소: 한인니문화연구원 발표: 김성석:삼일운동의 전개와 의의 및 6개의 임시정부

5월

4월

일시: 4월13일 장소: 그래티파이 카페 발표: 이강현:2019 인도네시아 대통령선거 전망 김용수 소나무시네하우스 PD(초청): 인도네시아 영화계와 영화 제작과정에 대한 경험

PAGE - 나는 나의 페이지다 118

일시: 5월11일 장소: 한인니문화연구원 발표: 채인숙:디카시 소개 조은아:플라스틱 쓰레기와 환경오염


9월

시간: 9월 14일 장소: 한인니문화연구원 발표: 이동균:정신분열증 개론 발표 조현영:우울증 자가진단 테스트

8월

일시: 8월 24일 장소: 아그네야 레스토랑 발표: 사공경:인도네시아 국립갤러리에 대해

11월 시간: 11월 16일 장소: Javanegra Gourmet Atelier 발표: 김현숙:'내가 사랑하는 시' 낭송과 감상나누기

10월

시간: 10월 26일 장소: 한인니문화연구원 발표: 노경래:남십자성(남십자좌)에 대해 김순정:인니사회에서 한국인 커뮤 니티의 역할 증대

12월 시간: 12월 14일 장소: 이혜자 회원 자택 주제: 와인 레슨 및 웹진출판기념 연말파티

119 인작 활동


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 3 injak2019PAGE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 3 인 작 injak2019PAGE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 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 3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 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 3 인 작 injak2019PAGE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 3 인 작 injak2019PAGE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 3 인 작 injak2019PAGE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 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3 injak2019PAGE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 3 인 작 injak2019PAGE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작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 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 3 인 작 injak2019PAGE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 3 인 작 injak2019PAGE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 3 인 작 injak2019PAGE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 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3 injak2019PAGE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 3 인 작 injak2019PAGE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 3 인 작 injak2019PAGE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 3 인 작 injak2019PAGE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 3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 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 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 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3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작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injak2019PAGE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 클럽인작 호인작 3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 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 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 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 3 injak2019PAGE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래배동선 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3 인 작 injak2019PAGE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현숙노경 3 인 작 injak2019PAGE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김의용김 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인작 3 injak2019PAGE현숙노경래배동선사공경이강현이동균이혜자조연숙조은아조현영채인숙최장오인도네시아인문창작클럽인작 호 나는나의페이지다김성석김순정 3 인 작 injak2019PAGE-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