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 제1회 <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 문학상 수상작품집

Page 1

제 11 회 &amp; 제 1 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수상작품집

제 11 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제1회

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 ‘따로 또 같이’ 2021 년 ■

후원:


격려사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시상식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대한체육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문학과 막역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에는 체육과 문학의 연결 고리가 마땅치 않던 때입니다. 문화산업 육성에 앞장서는 상징적인 이름 ‘문화체육관광부’가 있었음에도 크게 의식하지 못한 채 체육회 대표로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시상식에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큰 규모에 경탄했습니다. 바람 소리 같은 앙클룽 연주와 인 도네시아 가요(Gayo)족의 문화유산인 사만 춤(Saman dance)의 전율도 느꼈습니다. 많은 인도 네시아 예술가들이 불러주는 축가를 들으며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문화가 어우러지는 현장을 목 도했습니다. 그날 저는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행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여력이 닿는 다면 지원을 하겠다며, 한층 더 분발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 뒤,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문학상의 계절이 왔고 저는 거의 매년 참석했습니다. 인도네시 아에 사는 한인들은 우리만의 섬에 갇혀 지내는 경우가 흔하지만, 이날만큼은 양국이 문화와 예 술로, 문학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흐뭇했습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한층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즐거웠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나의 한국이야기’를 쓴 인도네시아 친구들도 초대되었습니다. 올해는 인도네시아 친구가 특별상으로 수상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10회 (2019년) 때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참석한 분들에게 시상식에 대해 물어 보 았습니다. 해마다 주제를 달리하는 시상식의 10회 주제는 &lt;수마트라 페스티벌&gt;이었고 한인과 인도네시 아인, 외국인이 1/3씩 참석하였고 영어로 진행했다고 합니다. 행사를 기다리는 관객들로 꽉 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


워진 시상식장은 엄숙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고 들었습니다.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이 국 제행사로 발전했다는 생각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에 관심을 갖고 공모하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 다.

매년 인쇄되어 배포되던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 올해는 준비하기 힘들다 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거운 종이책에서 벗어나 웹진으로 선보인다는 말도 일리는 있지만, 시 대가 변해도 종이책이 주는 느낌은 남다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종이책을 발간하도록 격려했습니 다.

인도네시아 한인 여러분, 어떤 여건 속에서도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이 해를 잇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도네시아 이야기’를 모국어에 담아 활자로 새기는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PT. TAEWON INDONESIA 회장 양영연 양영연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


목 차 발간사·격려사·축사 심사평 수상작품

16

(수필)맹그로브 나무의 삶/ 권영경

26

(수필)아직도 나는 배우고 있다 / 오선희

31

재인도네시아한인회 한인이주101주년기념 특별상 (수필)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 고찬유

37

재인도네시아한인상공회의소회장상 (시)회사를 그만둔 날 / 윤세귀

42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이름을 기억하자 / 고찬유

(수필)시는 힘이 있다 / 유호종

44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이름을 기억하자 / 고찬유

(수필)미냑 까유 뿌띠 / 김선혜

47

(수필)오만과 편견 / 김진연

51

한인기업가 인도네시아인 특별상 PT. TAEWON INDONESIA (수필)함께 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 까리나

56

발리 예술가 Sudirana상

(소설)발리 / 우지수

59

(수필)아버지의 삶 / 이재현

66

Lembaga Kebudayaan Betawi상 (수필)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 손예리

69

Indonesia Korea Friendship Association상 (수필)또게의 침공 / 배대호

72

한인니문화연구원상

(수필)전염병 시대의 행진 / 박소영

74

한인니문화연구원상

(동화)그림자 소녀 / 정지영

77

(시)깜보자 사랑 / 배외순

86

(시)나는 나대로 / 데위

88

7

25

일반부 대상 주인도네시아대한민국대사상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우수상

이름을 기억하자 / 고찬유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장상

인문창작클럽회장상

특별상

장려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 인도네시아인 특별상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


학생부

대상 주 ASEAN 대한민국대표부대사상 (소설)발바닥이 뜨거운 아이 / 성유림(JIKS, 12 학년)

91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수필)잎사귀 / 김채희(JIS, 10 학년)

95

최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수필)고통 로용(Gotong Royong) / 이하늘(GMIS, 12 학년)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수필)나의 우편배달부 / 박승헌(ACS, 7 학년)

99

102

우수상 한인기업가상 PT. TAEWON INDONESIA (수필)선물 / 인서연(SIS Semarang, 11 학년)

106

한-인니산림협력센터 특별상 (수필)까뿍 해변을 달리다 / 최형우(ACS, 7 학년)

110

KOICA 소장상 (수필)한센인의 미소 / 김민서(BSJ, 12 학년)

115

인문창작클럽회장상 (수필)내 꿈의 씨앗 / 임형원(JIKS, 11 학년)

118

인니갤러리 F. Widayanto상 (소설)어린 세라의 꿈 / 홍선주(GMIS, 11 학년)

122

Saung Angklung Udjo상 (시)골목친구 / 임서영(JIKS, 10 학년)

125

특별상

수상소감

128

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 수상작품집

157~191

《한인니문화연구원》 ·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연혁

192·194

초등부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수상작품집

『따로 또 같이』

발행처

한인니문화연구원,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발행일

2021 년 10 월 23 일

제작·편집

이영미 표지 디자인 사공경

교정·교열

이영미 · 사공경

이 책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시려면 발행처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


발간사 · 격려사 · 축사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


발간사

새로운 시작입니다 - 다시 첫사랑에 관하여

코로나로 문명이 전환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무너지고 부서지면서 새로움을 창출하고 우리 사회의 표준을 바꿔놓았습니다. 소소한 일상이 더욱 소중하고, 사람의 향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 사이에 흐르는 내면의 강물은 더 깊고 풍성해졌음을 응모작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내 삶이 바뀌었다고. 그 외로움이, 그 막막함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파릇함으로 되살아났다고 말하는 수상자들도 있었습니다. 인내하고 절제하는 시간이 사람과 사회를 더욱 성숙하게 하는 ‘반전의 모멘텀’이 되어 두려움이 아닌 가슴 뛰는 설렘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한-인니 산림협력센터》와 공동주최로 문학상을 추진하여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더구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제1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을 신설하게 되어 의미를 더합니다. 처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은

청소년들을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의 사회과 교사로 재직 중이던 저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문화의 경계에 서 있는 학생들에게 뜻 깊은 경험을 안겨 주고 싶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한 갈증을 글로 풀어내며 아세안의 리더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은 올해로 열한 살이 되었습니다. 2010년에 시작되어 십여 년이 흐른 뒤,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합니다.(2020년 문학상 미개최) 1회 공모전의 가슴 뛰는 순간은 첫사랑과

같은

힘이

되어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아우성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시간과 회한을 견디며 화석처럼 남는 애틋한 첫사랑처럼.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말처럼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에

참여한

참가자들의 작품 하나하나가 첫사랑처럼 기억됩니다. 저의 첫사랑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에서 첫사랑을 다시 만나시기를.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


&#39;고갤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39;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은 누산따라의 가을과 함께 옵니다. 서른다섯 분의 이야기가 곱게 배색(配色)된 제11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제1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이 가을이 드리는 선물입니다.

《재외동포재단》,

《주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대사관》,

《재인도네시아한인회》,

《한인상공회의소》,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KOICA》, 《문예총》, 《인문창작클럽》 등, 많은 기관과 단체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아낌없는 지원과 관심을 주신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인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한인니문화연구원》 여러분의 노고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특히 PT. Taewon Indonesia 양영연 회장님에게도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제1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를 훌륭하게 이끌어준 이영미 작가의 수상작품집 표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어루만진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합니다.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인도네시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한인들의 사람 사는 향기를 담았습니다. ‘다양성 속의 통합(Bhinneka Tunggal Ika)’을 지향하는 인도네시아의 국가철학처럼 혼자일 때보다는 함께 어우러질 때 더욱 아름다운 법입니다. 인도네시아를 가슴에 품어 주십시오. 나의 첫사랑 여러분. 2022년에는 과거와 현재, 예술과 삶이 만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지닌 역동적인 꽃을 피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한인니문화연구원》원장 사공경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


기념사

산림과 문학 - ‘마음의 생태학’을 찾아서

문화를 통해 인도네시아와 한국과 소통하는 《한인니문화연구원》과 제11회 &lt;인도네시아 이 야기&gt; 문학상 공모전을 공동 주최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한-인니 산림협력센터》는 산림 을 통한 삶의 질을 향상하고 산림관리와 기후변화 등 인류의 당면과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힘쓰 고 있습니다. 문학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깊은 사고를 절제된 언어에 담아 내어 우리 삶을 돌아보고, 보다 가치 있는 미래로 나아갈 방 향을 제시해 줍니다. 기억을 담고, 감정을 비추며, 사상을 조율하고, 진리를 모색하면 인간중심 주의에서 벗어나 ‘마음의 생태학’이 가능해집니다. 예로부터 산림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숱한 문인(文人)들이 언어의 조탁(彫琢)을 통하여 산림의 아름다움을 담아냈으며, 산림이 주는 풍요(豊饒)와 장엄(莊嚴)은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습니다. 다락방이 몽상가를 키운다면 산 림은 사색가를 키웁니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한 줄기가 문장으로, 한 권의 이야기로 탄생하는 곳, 바로 산림입니다. 작금의 코로나 사태는 인류에게 자연의 소중함과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줬습 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개최된 이번 공모전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 도전이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문학을 통해 산림과 생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의지의 결과입니다. &#39;쓴다&#39;는 것은 &#39;생각한다&#39;는 뜻입니다.

환경과 생태에 관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실시해야 합니

다. 어릴 때 배운 환경과 생태의 소중함은 평생 기억되고 실천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lt;인도 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에 초등부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 문학상&gt;을 신설한 것은 더욱 큰 의 미를 지닙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


나무나 숲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닙니다.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와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이 저마다의 가슴에 담긴 설레고 벅 차고 때론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정성스레 꺼내어 선보이며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내딛는 소 중한 발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수준 높은 작품으로 본 공모전에 참여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특히 본 행사를 위해 노 고를 아끼지 않은 《한인니문화연구원》 사공경 원장님과 연구원 팀원들, 함께하신 심사위원들 과 제1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공모전을 전담하여 총괄한 이영미 작가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2021년 10월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센터장 이성길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


축 사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이 올해로 열한 번째를 맞이한 것을 축하 드립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도네시아 동포 사회의 쉼터이자 위안과 희망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 기쁘게 생 각합니다. 또한,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몇 년 동안 계속 되어 온 팬데믹이 우리의 삶에서 많은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바 깥 활동의 제약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감염병은 단지 육신을 힘 들게 하는 질병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피폐하게 하는 마음의 병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문학은 더 강력한 힘을 발산합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해 내려는 인간의 본성이 문학적 감수성으로 무장하여 우리를 새로운 공기 속에 숨 쉬게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글을 읽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위로와 공감의 통로를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변함없이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과 &lt;인 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노력해 주신 《 한인니문화연구원》 사공경 원장님과 관계자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특히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응모작이 몰리고 수준 높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소 식을 들었습니다. 대상을 수상한 권영경님을 비롯하여 모든 수상자분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 을 드립니다. 그리고 비록 수상작에 들지 못했지만 공모에 참여하신 다른 분들도 문학적 감수성 과 창작의 능력을 계속 발전시켜서 내년에는 좋은 결과를 내시길 기원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


인도네시아에 계신 우리 동포들의 문학적 자질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상을 매년 주최하는 《한 인니문화연구원》의 열정에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내년에는 팬데믹이 극복되어 &lt; 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과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이 더욱 활기차고 성대하게 개 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0월

주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대사 박태성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


축 사

좀 아프고 나면 사람이 성숙해지듯 코로나가 우리에게 그런 성숙의 시간을 선물한 것 같습니 다. 많은 사람이 같은 이유로 이동과 만남을 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며 견뎌야 하는 시간 탓에 좀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안합니다. 특히 최근 1년간 우리를 장악한 것은 불안이었습니다. 상 당한 기간을 촉각을 세우며 살았습니다. 여기에 응모하신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것을 이미 자기 안의 양분으로 받아들이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고 계신 분들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무도 꽃도 태양도 비도 절기에 맞춰 온도를 달리하며 무심한 듯 우리 곁에 한결같이 있었 습니다. 일 년 내내 작렬하는 태양과 내리꽂는 빗줄기 속에도 가락이 있고 노래가 있다는 걸 알 기까진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타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곳의 자연을 들여다보며 새롭게 다가오는 초록의 아름다움에 다 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곁에서 나를 지탱하게 다독여주는 것은 역시나 자연 이고, 가족이고, 내 집이었습니다.

국경을 넘나들기가 어려워지고 서로를 잠재적 감염자로 봐야 하는 위기도 있었지만 내가 숨 쉬는 이 땅에 대해 다시금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택트는 물리적 거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 심리적 거리까지 포함하지 않습니다. 관심에서 나오는 소소한 행동에서 상대에 대한 애 정과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


제각기 자신의 일터에서 일상을 담당하다 보면 사람에게는 어딘가의 출구를 통해 마음을 풀 어놓고 타인과 소통하고픈 바람들이 있습니다. 타국생활이 주는 다양한 소재와 그 정서를 글로 풀어내는 여러분의 소통 방식이 부럽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계통에 재능과 관심을 나누고 이런 발표의 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고를 아 끼지 않으신 《한인니문화연구원》 사공경 원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웹진으로 발간되는 수상 작품집에 실린 인도네시아이야기를 통해 이곳 의 한인동포에게 위로와 공감을 이끌어내고 동시대를 함께 사는 유대감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 기를 소망합니다. 11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수상자 여러분 축하합니다.

2021년 10월

《재인도네시아한인회》 회장 박재한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


심사평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6


일반부 심사평 심사: 나영순, 채인숙, 해인, 사공경

다양한 이유로 인도네시아에 살게 된 분들의 다름을 인정한 글들을 읽는 내내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정서가 사뭇 다르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문화는 차이가 아니라 다름이라는 수평적 인식에도 동감합니다. 어떤 연유에서든 사는 곳이 다를 뿐이지 삶의 방식은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부분이 엿보였으니까요. 사랑이 있고, 뭉클함이 있고, 아픔이 있고, 쓸쓸하고 외로움이 있게 마련인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분들에게 분명한 힘은 마음에 샘솟는 희망과 에너지가 넘쳐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편 한 편의 글을 읽어내는 시간 여행은 구구절절이 말하지 않아도 타국 생활의 경험과 이국적 정서에서 느끼는 견딤이 희망으로 가득 찬 일렁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문학적으로 수준 높은 글들을 접하면서 순위를 매겨야 한다는 의무감에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감상자의 느낌에서 말씀 드리자면 글의 주제도 중요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전략적인 문제도 더 절실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절실함이 독자의 절실함과 맞부딪히는 지점이니까요. 진실을 떠나 진실성이 한결 더 소중해지는 말씀드립니다. 시와

이유입니다. 고심 끝에 산문을

곁에

늘어놓고

순위를 비교하는

정했지만 노릇도

절대적인 모순이겠지만

선택은 엄연히

아님을 다른

갈래입니다. 권영경 님과 오선희 님, 고찬유, 윤세귀, 유호종 님의 글은 절실함과 진실성을 산문과 시라는 각기 다른 그릇에 오롯이 담아냈습니다. 불행을 긍정으로 바꾸는 역동을 잘 그려냈습니다. 우리 삶이 어찌 바라는 대로 행복에만 그치겠습니까? 고통과 불행을 행복으로 이끄는 삶이야말로 소중한 게 아닐는지요? 또한 장애인의 존엄성에 대한 내용의 글이 수상작에 오른 특별함도 무척 좋았습니다.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긍정성을 보여준 많은 응모자님들과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가교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애쓰시는 《한인니문화연구원》 사공경 원장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글: 나영순(시인, 수필가)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7


학생부 심사평 심사: 채인숙, 나영순, 해인, 사공경

무엇보다 공모전에 작품을 보낸 모든 학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서 고백하자면, 길고 힘겨운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모두가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시기에 2021년 《한인니문 화연구원》의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공모전이 과연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졌습니 다. 더구나 긴 온라인 수업에 갇혀 지내고 있을 학생부 작품에 대한 기대는 사실 그리 크지 않 았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많은 작품들이 이메일을 통해 속속 도착했고, 올해도 변함없이 심사위원 모두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면서 수상작을 선정해야 했습니다. 이 즐거운 심 사의 현장이야 말로 《한인니문화연구원》 공모전에 대한 교민들의 신뢰와 높은 기대를 보여주 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스무 편의 글은 각각의 목소리로 각자의 이야기를 개성 있게 담고 있었 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당기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소재를 벗어나 새롭고 참신한 접근법을 보이는 글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유림 학생의 &lt;발바닥이 뜨거운 아이&gt;는 작품의 소재뿐 아니라 글의 전개 방식 과 마지막 소설적 반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감동을 준 작품이었습니다. 4살 때 길에서 사고 로 부모를 잃은 호준은 어머니의 친구 집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호준을 데려와 아무런 대 가 없이 키워 준 인도네시아 어머니는 알고 보니 호준의 부모와 어떤 조그만 인연도 없는 분이 었습니다. 단지 길에서 죽어가던 호준의 친어머니가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선뜻 호준을 데려와 친아들처럼 키우셨지요. 호준은 성인이 될 즈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 려운 환경에서도 호준을 끝까지 책임지려 했던 인도네시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호준은 어머니가 물려주신 마음의 유산을 기억하며 유엔난민기구에서 일하며 자신이 받은 사랑을 더 큰 인류애적 사랑으로 되돌려 줍니다. 글을 읽고 난 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가족을 잃은 사람 들과 아프간 난민들의 비극이 뉴스를 장식하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이 이야기는 허구의 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적 기교와 구성은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글쓰 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마음의 감동을 아낌없이 선사한 글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호준의 인도네시아 어머니 같은 초월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가장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릅니다. 그야말 로 제목처럼 발바닥부터 뜨거운 인류애를 느끼게 한 감동적인 소설이었습니다. 김채희 학생의 &lt;잎사귀&gt;는 탄탄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척추측만증과 거북목을 만성으로 달고 살았던 한국에서의 학교생활과 녹색 짙푸른 잎사귀들과 탐스럽고 윤기 나는 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인도네시아에서의 학교생활을 비교하면서 심리적 변화를 묘사해내는 돌올한 글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직도 방학이면 한국에 나가 학원 을 다녀야 하고 그때마다 역류성 식도염과 만성두통에 시달리지만, 적도의 햇빛을 받으며 점차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8


긍정적인 아이로 변해가는 자신을 인도네시아의 자연과 엮어 그려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습 니다. 이하늘 학생의 &lt;고통 로용(Gotong Royong)&gt;은 인도네시아 인들이 서로 힘을 합쳐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전통을 소개하며, 학교생활에서 배운 고통 로용의 정신이 팬데믹 시대에 어떻게 적 용되는 지에 대해 썼습니다. 좋은 예도 있고 나쁜 예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역시 모두 가 한마음 한뜻의 고통 로용으로 극복해야 할 큰 숙제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 냈습니다. 단순히 마스크와 페이스 실드로 단단히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야 하는 일임을 깨닫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박승헌 학생의 &lt;나의 우편배달부&gt;는 아직 7학년의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능숙한 글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례없는 감염성 질병으로 가족 붕괴가 걱정된다는 신문기사가 끊임없 이 보도되는 와중에,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머물며 진정한 가족애를 느끼는 모습을 탁월하게 그 려내었습니다. 특히 우편배달부 외삼촌 이야기는 ‘일 포스티노’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 큼 아름답고 따뜻했습니다. 앞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떤 글을 써내게 될지 무척 궁금하고 기 대되는 학생입니다. 인서연 학생의 &lt;선물&gt;은 인도네시아에서 살면서 내가 받은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인지에 관 해 글을 썼습니다. 글 전체가 풍성한 이야기로 꽉 찬 느낌을 주었고, 일상의 소소한 경험들을 통해 해외에 살면서 느끼는 남다른 가족애과 이웃과의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특히 부모님이 겪는 희생을 통해 자신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성숙함과 집안일을 돕는 까까를 가족 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읽는 이를 흐뭇하게 했습니다. 학생부 응모작 중에는 이처럼 평 범한 일상을 소재로 쓴 글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글이 자칫 빠지기 쉬운 이야기 의 느슨함을 잘 극복하고 단단하고 야무진 글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작품들이 나름의 이야기를 개성 있게 담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글의 소재를 고 르는 과정이 너무 안이하거나 구성이 허술한 글들도 많았습니다. 학생부 심사에서는 아무래도 글의 기술적 완성도보다는 얼마나 매력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는가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고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 다. 여러분이 인도네시아에 살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르게 쓸 수 있는, 더욱 참신하고 재기 발랄 한 작품들을 내년에는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글: 채인숙(시인)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9


초등부 심사평 인도네시아 재외학생들의 가슴에 꿈과 자연을 심은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심사: 이영미, 사공경, 이성길

코로나 19 가 각종 문학상까지 강타했습니다. 한국의 굵직한 공모전도 예년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접수에 문학상이 취소되거나 수상작을 내지 않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미증유의 질병도 문학을 통해 사유를 확장시키고 아픔을 보듬고 세계를 바꾸는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50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정성을 다해 응모한 작품들을 보내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공모전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작품도

있었으나

많은

작품들에

아이들의

동심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고 탐구하여 얻은 감동에, 동화적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들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읽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 귀한 글에 등위를 정하며 심사위원들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한때 아이였던 어른들의 과거 경험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서 ‘현재를 사는’ 아이들의 ‘지금, 여기’가 반영된 작품을 고르도록 노력했습니다. 보고르 센툴 숲 속의 소나무를 새와 다람쥐가 모여 사는 아파트로 표현한 한예성 학생의 &lt;향긋한 소나무 아파트&gt;는 끄나리(카나리아) 부부의 알을 훔치려 나타난 도둑 구렁이를 힘을 합쳐 물리친다는 재치 있는 동시로 삽화까지 그려 넣은 정성이 돋보입니다. ‘마음씨 착한 동물들에게는 무료 분양’이라는 따뜻한 주제의식도 잘 드러납니다. 또 다른 동시 &lt;보고르 센툴 생태교육숲&gt;은 주말마다 고마운 자연 쉼터가 되어주는 보고르 숲을 유쾌하게 노래했습니다. 하행 길에 한 뼘 자랐는지, 곯아떨어진 엄마의 발을 마사지해주는 의좋은 형제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조규희 학생의 &lt;안전 가옥&gt;은 맹그로브 나무를 ‘아늑한 집’ 삼아 사는 물고기 친구들 ‘테오’와 ‘방카’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물고기들을 노리는 도마뱀들로부터 물고기 친구들을 지켜주는 맹그로브

나무

숲에

쓰나미가

밀려옵니다. 사람들의

거주지마저

휩쓸려갔지만

맹그로브 나무 뿌리가 안전하게 물고기들을 보호해줍니다. 쓰나미가 몰려간 뒤 사람들은 맹그로브 나무 숲에 쌓여있던 쓰레기를 치웁니다. 책을 많이 읽어본 솜씨입니다. 단순히 읽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부지런함과 영민함이 글 전체에서 느껴집니다. &lt;잘락 발리(Jalak Bali)&gt;는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아직 발리를 가보지 못한 학생이 사파리에 가서 본 멸종위기종 ‘잘락 발리’를 본 뒤 인도네시아의 생태에 관심을 갖게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0


된다는 내용을 매끄럽게 표현한 수작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끝난 뒤 발리에 가서 ‘잘락 발리’를 보고 싶다는 소망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법을 아는 김민서 학생은 앞으로도 글을 꾸준히 쓰길 바랍니다. 한국의 저명한 학생부 문학상 수상작에서 김민서 학생의 글을 읽게 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봅니다. 김가온 학생의 시 &lt;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gt;를 읽고 나면 화자가 사는 동네가 머릿속에 환하게 그려집니다. ‘잘란 잘란’이라는 반복 어구를 사용하여,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직접 걸어본 느낌을 줍니다. 매일 똑같은 것 같아도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동네를 시선을 달리하며 묘사해 거리감이 잘 느껴집니다. 산문으로 풀었어도 늘어지지 않게 이야기를 잘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우수상을 차지한 강 율 학생의 &lt;토리와 뚜뚜의 코모도섬 대모험&gt;은 초등학교 4 학년이 EBS 다큐멘터리 세계견문록 ‘아틀라스-원시섬 인도네시아 야생모험 편’을 보고 작성한 동화입니다. 지구 바로 밑의 행성에 사는 외계인 토리와 뚜뚜는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나 맨 처음 도착한 ‘코모도섬’에서 배가 고픈 코모도왕도마뱀에게 잡아 먹힐 뻔하다가 탈출하지만 믿었던 외계인 형에게 배신을

당하는

내용을

재치

있게

그렸습니다.

지금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학생입니다. 함께 여행을 가지 못한 누나에게 보내는 정가온 학생의 편지 &lt;누나에게&gt;, 직장이나 코로나 같은 상황으로

고향인

한국에

가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국

교민들의

마음을,

인도네시아에만 산다는 새 ‘말레오’에 비유하여 쓴 김보현 학생의 시 &lt;말레오&gt;, 한국의 친구에게 인도네시아의 화산, 발리, 코모도섬과 자신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를 소개하는 황은솔 학생의 편지 &lt;다움이에게&gt;, 이번 공모전의 최연소 수상자인 박서준 학생의 &lt;소나무 숲 놀이터&gt;는 짧은 분량임에도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져 경쾌하게 읽힙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갑갑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런 의미 있는 공모전을 마련해 감사하다는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문화를

통해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소통을

이끄는

《한인니문화연구원》과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임업 및 산림경영 분야의 협력 증진에 앞장서는 《한-인니 산림협력센터》의 큰 뜻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기를 놓쳐 응모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분들과 다음 공모전을 위한 작품 구상을 시작했다는 학생들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코로나 19 가 하루 빨리 종식되어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이 더 많은 아이들의 멋진 작품과 함께하는 문학상으로 정착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 이영미(아동문학가)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1


심사위원 프로필 글뜰 나영순 | 시인, 수필가 2012, 2015, 2021년 충북문예진흥기금 수혜 청주시1인1책펴내기모범지도우수강사(독서지도사), 프리랜서 글바구니도서관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술인우수

예술인상수상(청원, 증평지회), 독서유공자문화관광부장관상 표창 등

시집『쥐코밥상』(2012, 월간문학), 『맹물은 뜨겁다』(2021, 현대시기획선54,한국문연) 산문집『시간의 잠』(2015, 동쪽나라)

채인숙 | 시인 &lt;실천문학&gt;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 (2015) KBS 서울 프라이즈 다큐멘터리 대상수상 (2012) KBS 서울 프라이즈 다큐멘터리 우수상수상 (2011)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수석 편집위원 (2020, 순정아이북스) 현 한국디카시연구소 계간 &lt;디카시&gt; 해외기획위원

『라라 종그랑』 (한국-인도네시아 시인 공동시집) (2021, 역락)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2


해인(海印) | 시인 철학박사 및 명예문학박사학위(문학, 역사) 취득 『 시외 시학 』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 아름다운 서재 》

(1999~) 대표, 《영화 평론 클럽 문화가 있는 삶》 (2010~) 공동대표, 《해인인문학아카데미》 (2021~) 대표

『몽골의 페미니스트 왕비들』 (2015, 운주사), 『시님이 무슨 죄가 있겠노』 (시집, 2015, 운주사), 『비로소 별이 되는가』 (시집, 2021&#96;천년의 시작) 충북대인문학특강을 시작으로 전국 50여회 순회강연

사공경 | 한인니문화연구원 원장, 시인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1999년) 한국-인도네시아 문화예술활동가, 칼럼니스트, 바틱 연구가,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 사회과 교사 (1997~2010) KBS서울프라이즈다큐멘터리 자카르타한국 K-TV방영(2015.11, 2016.1), &lt;오랑 꼬레아, 참 소통의 길에 서다 ‘구루 사공의 길’&gt; 출연

『자카르타 박물관 노트』(2005) 『서부자바의 오래된 정원』 (2009)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수석 집필위원) (2020, 순정아이북스) 외 공저 10권, 『막스 하벨라르』, 『인 도네시아 위안부 이야기』, 『쁠라우 라뚜 해안의 고양 이』, 『내가 품은 계절의 진언』외 5권, 출판기념회 주최·협력, 출판권 약정·번역협력, 섭외·총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3


이영미 | 아동문학가 제43회 샘터동화상 수상 (2021) 제3회 제주기독신춘문예 당선(동화) (2021) 제4회 생태동화공모전 대상 수상 (2019) 서울시 아동인권동화 동상 수상 (2019)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집필위원 (2020) 현 《한인뉴스》 편집위원, 재외동포재단 해외통신원,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 글쓰기 강사, 한국아동문학인 협회 정회원

『맹꽁이의 집을 찾아주세요』(2020, 국립생태원),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공저 (2020, 순정아이북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4


일반부

수상작품

일반부 대상 주인도네시아대한민국대사상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5


수필

마음 둘 곳 찾아 뿌리를 내리면 그곳이 어디든 내 집

맹그로브 나무의 삶 Kehidupan Pohon Mangrove 권영경(주부전 환경조경연구원, 자카르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고 한다. 행여 따라오지 못한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 주기 위한 배려에서다. 2020년과 2021년, 지나온 시간과 얼마만큼 남았을지 모를 앞으로의 시간들이 어쩌면 우리 인류에겐 바로 그런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신의 영혼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Covid-19, 이름도 생소하던 고약한 바이러스 하나로 온 세상이 멈춘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말을 막 하기 시작한 어린아이부터 아흔이 넘은 어르신까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코로나를 떠올 리는 세상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만약 이런 시기에 한국에 있었다면 지금보단 활동이 조금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몇 번을 고민했지만 결국 가족이 함께 이겨내자는 마음으로 이곳에 남 았다. 그렇게 1년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모님과 가족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나는 하늘의 떠가는 비행기를 보며 그저 꿀꺽꿀꺽 그리움을 삼킬 뿐이다. 4년 전,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고작해야 세계적인 휴양지 발리(Bali)와 불교 유적지 보로부두르(Borobudur,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족자카르타에 위치한 불교 사원)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자카르타도 아닌 자바섬 작은 소도시 찌 까랑(Cikarang)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2017년 2월 어느 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엔 태어난 지 200일 갓 넘은 아이와 남편 퇴근 시간만을 목 빠지도록 기다리는 육아에 찌든 서른 후반의 한 여자가 있었다. 출산 후 6개월 정도가 지난 시기의 모든 엄마들이 그러했겠지만 우울했고, 무기력했다. 무료 함을 달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가족사진을 찍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 그 누구 도 만나지 않던 시간들을 그저 흘러가게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시작한 일이었다. 비록 매주 같은 배경, 특별할 것 없는 표정이었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가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질 뻔했던 수많은 순간들에서 나를 건져내 주었다. 그곳에서 살던 3년의 시간 동안 146장의 가족사진이 남았고 아이의 성장과 우리 부부의 시간도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는 일’은 수련하는 마음과도 같아서 자꾸 흩날리는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로 모아지는 마음(일심一心)이 나와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6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하라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 밑에 땅을 느껴라 농장 일이나 산책,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근심 걱정을 떨치고 그날그날을 살라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를 나누라 혼자인 경우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무엇인가 주고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도우라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라 할 수 있는 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으라 모든 것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관찰하라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지라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중, 헬렌 니어링 이사 오기 전 살았던 곳에선 단지 주변을 매일 걸을 수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유일하게 허락된 외부 활동이라 산책에 유독 집착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주택단지에 살았고 세월의 크기만큼 큰 나무들이 많았다. 매일 오후 4시가 넘으면 아이와 운동화를 신고 단지를 서너 바퀴 돌았다. 자연주의자들이 알려주던 방법들을 실천하며 그렇게 두 발로 땅을 밀어 걷고 뛰었다. 힘을 쓰고 나면 신기하게 더 많은 힘이 생겼다. 매번 같은 길을 걸었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4시와 5시가 달랐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 구름이 흘러가는 것, 푸른 나무를 보는 것. 아침, 저녁으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 그저 제 할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해 핀 길가의 들꽃들을 보는 것, 이런 것들을 관람료 없이 실컷 소유 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했다. 한참 확진자가 급증해 도시가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기에 바깥세상과의 만남은 더욱 절실했다. 그리고 다행히 풀과 나무들은 아직 코로나로부터 안전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우리에게 자연마저 허락지 않았다면 아마 인류는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진작 참패했을지도 모른다. 고맙다. 길가의 모든 풀들아. SF영화 제목 같던 ‘2020_이공이공’의 해가 시작되자마자 찾아온 이 망할 역병 COVID-19는 한순간에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다. 어느 한 나라도 예외란 없었다. 이리도 어수선한 시기에 우리 가족은 인도네시아에 온 지 3년 만에 지방 도시에서 자카르타 대도시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는 입주자를 제외한 사람들의 출입이 불가했고 외출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나마 지방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7


도시에서 매일 하던 산책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해 느꼈던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다시 몰려왔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매주 가족사진을 찍던 것과 비슷한 이유로, 집안에서 식물들을 키우고 글을 쓰며 흩날리는 마음을 다시 하나로 모은다. 지금은 비록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와서 엄마로만 살고 있지만 엄마 이전의 나는 아이들의 숲속 놀이터를 디자인하는 조경가, 실내조경 기사였다. 삶의 가치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찾으려 애쓰던 꿈 많은 공상가이기도 했다. 지방 도시에선 문만 열면 볼 수 있었던 초록 나무들을

거대한

도시에선

쉽게

없어(아파트를

나서면

바로

도로이고

인도네시아는 도보가 잘 갖추어진 곳이 아직은 그리 많지 않다) 식물들을 집에 들이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식물과 포트를 온라인으로 주문해 매주 한 번 아이와 나란히 앉아 식물을 심는다. 그렇게 흙을 만지고 식물을 바라보고 각자의 얼굴에 맞는 이름을 짓는다. 뿌리 위로 소복하게 덮은 흙을 탁탁 다지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가까이 다가가 생김새를 구석구석 살피며, 이 답답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반복되는 하루의 끝에서 돌아보면 식물을 보살피는 행위가 결국 나를 보살피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엄마 이전의 삶은 환경과 숲, 공원과 자연 교육 등의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학부 때부터 따지면 스무 살부터 서른 중반까지 15년도 훨씬 넘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직에 있지 않아도 여전히 나무와 환경에 관심이 간다. 숲과 환경에 대한 교양프로그램들을 챙겨 보거나 충격적인 이슈를 접할 땐 직접 나서진 않지만, 방구석에서 소심하게 하루 이틀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자카르타에 와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맹그로브 나무였다. 그래서 락다운이 풀리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 간 곳은 자카르타 북부 공항 근처 해변에 심어진 맹그로브숲이었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공공기관은 여전히 만 4세 아이들의 입장을 제한하고 있어 아이와 남편을 두고 나 혼자 그 바다 위 둥둥 떠 있는 물 위의 숲을 걸었다. 거짓말처럼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보통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그런데! 물속, 그것도 염분을 가득 머금은 바닷물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맹그로브 나무다. 바다와 육지 경계에 사는 이 나무는 덥고 습한 곳에서 잘 자라 동남아 해안가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고맙게도 이들 덕분에 태풍과 해일로부터 육지가 보호를 받는다. 실제로 2004년 동남아시아 쓰나미로 11개 국가에서 23만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 중 바닷가에 심겨진 맹그로브숲이 파괴되지 않은 지역의 피해가 가장 적었다고 한다.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파도를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은 후에야 사람들은 이 나무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맹그로브 나무는 수형도 독특하다. 바다 아래로 뿌리를 뻗기도 하지만 공중으로 뿌리가 노출되기도 한다. 뿌리는 산소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강한 파도로부터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 또한 촘촘한 뿌리가 염분을 걸러내는 여과 기능을 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뿌리는 물고기와 게, 다양한 해양 동물들의 안전한 서식처가 되어주고 지역 주민들은 뿌리 안에 모인 물고기와 목재를 팔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8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동남아 국가에선 휴양지나 새우 양식을 위해 맹그로브를 무차별하게 베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다뤄지는 맹그로브는 언제나 슬프다. 지구 최대 맹그로브 서식지였던 필리핀 팔라완 해변은 새우 양식으로 나무가 반 이상 없어진 상태이고 최근에야 맹그로브의 환경 가치가 부각 되면서 보호지로 관리되고 있다. 염분에도 끄떡없이 바닷속 갯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 나무는 환경에 놀랍게 적응하는 능력을 갖는다. 보통

나무는

씨앗을

통해

번식하는데

맹그로브는 긴

열매

같이

생긴

주아(새끼)를 낳아 바다로 떨어트린다. 그리고 이 ‘주아’는 바다의 물살을 이용해 이동하다가 적당한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 안착해 뿌리를 내린다. 기록에 의하면 물에 둥둥 떠서 40일까지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엄마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새끼 나무는 그렇게 다른 곳에 독립을 하고 군락을 이루며 정착해 살아간다. 식물들이 꼭 한 자리에서만 나고 자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자리를 이동해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다.

바닥에 떨어진 기다란 것이 맹그로브의 새끼인 ‘주아’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는 150여 종의 무화과나무가 서식하는데 그 중 땅무화과나무는 땅바 닥에 열매를 맺는다. 땅을 파서 먹이를 찾는 야생 멧돼지가 낮게 열리는 이 열매를 먹고 멧돼지 이동 경로에 따라 무화과가 번식한다. 수마트라가 원산지인 자색 문주란은 꽃이 지면 씨방의 씨 앗이 생기는데 그 씨앗은 호두알만큼 크다. 무거운 씨앗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줄기가 픽 쓰러 져 버리는데 결국 그 틈을 타 씨앗은 데굴데굴 굴러 바다로 이동한다. 부력이 있는 씨앗은 물에 떠내려갈 수 있고 그렇게 떠내려간 씨앗은 어딘가 해변에 닿아 적당한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식물도 여행을 한다.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바다 건너 전혀 다른 나라에 터를 잡 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의 모험과 용기로 거칠고 메마른 땅이 커다란 숲이 되기도 한다. 맹그로브 나무도 그렇게 엄마 나무에서 독립해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는다. 물속에선 해양 자 원들의 안식처로, 물 위에선 열대 우림의 5배가 되는 엄청난 양의 탄소를 흡수하며 우리 지구 를 지금도 부지런히 살려내고 있다. 자카르타를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또는 살고 있다면 맹그로브 숲(Taman Wisata Alam Mangrove)을 찾아가 조용히 걸어 보길 추천한다. 어느 선진국 공원처럼 근사하고 쾌적한 환경 은 분명 아니지만 바다에 뿌리내리고 사는 이 나무들의 삶을 누군가는 한 번쯤 인정해 주면 좋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29


을 것 같다. 언제나 그러하듯 자연은 그 가치를 알고 나면 그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 진다. 자연 의 선함엔 끝이 없다. 코로나 때문에 마치 마스크를 얼굴에 이식한 것처럼 쓰고 다니니 얼굴 가까이 자연 바람을 허락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 부드럽고 간질거리는 바람의 촉감을, 눈, 코, 입을 스치는 한없이 청량한 바람의 냄새를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쭉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앞으로 80년은 더 살아갈 세상이다. 티가 나진 않지만, 우리가 자연에 행하는 작은 ‘선함’들이 쌓이고 쌓인다면 언젠가 다시 모진 쓰나미가 닥쳐도 전부가 무너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멈춰 있어도 좋으니 더 이상 이 세상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바쁘게만 살아온 우리 인간들에게 ‘걸음이 느 린 영혼’을 기다리는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진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자 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 배려의 신호를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발은 육지에, 다른 한발은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저 맹그로브 나무들이 꼭 우리 삶의 모습 같다. 한국 사람이지만 인도네시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 이곳에서 우리는 아이를 키우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산다. 우리가 여기서 내린 뿌리 사이에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더 단단해 져야 지 다짐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힘주어 말해준다.

마음 둘 곳 찾아 뿌리를 내리면 그곳이 어디든 내 고향, 내 집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선한 마음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저 푸르른 맹그로브 나무들처럼. 사람(man)과 숲(grove)의 합성어를 가진 mangrove는 정말로 그 이름처럼 인간을 살리는 나 무가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희망의 나무. 아이가 이 나무의 삶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좌) 자카르타 맹그로브 숲(jakarta Taman Wisata Alam Mangrove) 중) 아래로 촘촘히 뻗은 뿌리 덕분에 그 사이사이 여러 어린 해양 동물들이 서식할 수 있다. 우) 공중으로 뿌리가 자라기도 한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0


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수필

아직도 나는 배우고 있다 Saya Masih Belajar 오선희(주부, 발리)

88 올림픽 지날 즈음 우리 가족은 남편의 의류수출 사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 인도네시아 자 카르타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거의 3년이 지났을 때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는 옷을 수출하기 위 해 발리로 사업장을 옮기게 되었다. 바다와 햇볕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남편은 발리 동쪽 사누르 해변부근에 청기와가 예쁘던 아늑한 집을 마련했다. 그이는 발리가 지상 낙원인양 행복해했고 우리는 이곳에서 여생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다. 아들과 우리 세 가족은 즐겁고 여유로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발리 정착 10여 년, 남편은 간경화증으로 몇 년을 고생하다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사랑만 받고 살아온 나와 아들을 낯 설은 이 땅에 두고 59세의 아직은 이별이 이른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벌써 14년이 지난 일이다. 아들은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금은 가정을 이루고 손 자도 안겨 주었고 사업도 든든히 일구어 안정된 가장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발리에 남게 됐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도 잘하고 만족하며 감사한 마음 으로 살고 있다. 푸른 바다, 계절 없는 초록의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주는 풍요로움이 있 고 정다운 친구들이 많이 있기에 좋다. 또한 매년 시시때때로 한국에서 방문하는 가족들과 친지 들을 맞이하는 기쁨도 있기에 즐겁다. 이제는 발리아줌마, 발리동생 그리고 발리할머니로 불리 며 살아가고 있다. 남편이 있을 때부터 우리 집 일을 돕는 마음이 곱고 성실한 발리인 도우미가 있었는데, 밤마 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시일이 제법 지난 후 조심스레 물었더니 고향집에 있는 어린 여동생이 그의 나이 한살이 막 지나면서부터 12년이 지난 그때까지 피부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정도가 심하므로 동생을 본 사람들은 땅에 침을 뱉기도 하고 두려워하며 피하기에 어린 동생은 줄곧 집에서만 지낸다고 했다. 아주 몹쓸 피부병에 걸린 동생을 늘 생각하며 언니 는 눈물을 흘리며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날 밤 그 동생이 나의 꿈에 나타났다. 참으로 역겨운 모습이었다. 온 몸이 울퉁불퉁한 종기로 가득하여 흡사 괴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괴물 같은 그 아이에게서 도망치다 넘어지며 놀라 잠 에서 깼다. 다음날 아침, 나는 도우미에게 고향집에 있는 동생을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내가 왜 그 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1


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시골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골에 도착하여 그 의 가족과 여동생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그 아이는 내가 꿈에서 본 그 아이와 거의 동일한 모습 이었다. 다만 꿈에서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온 몸에 흐르고 있는 피고름에서 나는 썩은 냄 새가 진동했다. 냄새의 놀램을 감추려는 나에게 그 아이는 내가 세상에서 여태 보지 못했던 아 주 부끄럽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미소를 지을 때 마다 얼 굴의 수많은 종기는 모두 일그러져 그야말로 괴물의 형상과도 같았다. 나는 이미 그 아이를 꿈 에서 보았기에 두려움 없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울퉁불퉁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지만 내 마 음 구석구석에는 도무지 잘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과 함께 밀려드는 왠지 모를 미안함과 안타 까움으로 가득했다. 그의 아버지는 DUKUN (점쟁이 무당) 인데 동네의 병자들을 주술이나 약초, 기름, 이상한 동물의 뼈 같은 기구들을 사용해 환자들을 치료하며 생계를 이어 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는 고칠 수 없다고 했다. 주술인 아버지의 혼탁하고 오묘한 모습이 그 아이를 더욱 불쌍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우연히 아이의 눈 속을 가만히 바라보니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맑은 영혼을 가진 눈이 었다. 비록 몸은 엉망이지만 맑은 눈을 가진 그 아이를 나는 도와주고 싶었다. 무슨 용기에서 인지 남편의 허락도 없이 나는 그 아이를 집에 데려오고자 아이 부모의 허락을 받아냈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 우리를 묵묵히 맞이하는 남편과 아들에게서 안도와 감사를 느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발리에서 가장 큰 국립병원 피부과를 찾아가 담당 의사를 만났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 미 수 차례 내원했던 기록이 있었고 피부과의 모든 의사가 알고 있던 유명한 환자였다. 그날 만난 담당의사는 내게 아이가 앓고 있는 병명이 ‘몰로스컴’ 이라 했고 그 당시엔 치료약 이 없어 수술로만 가능한 피부병이라고 했다. 이 병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발생한 균이 어린아 이의 몸에 기생을 시작해 점차 번지고 퍼져 겉으로 종기 모양을 하고 살 속으로는 깊이 뿌리를 내리는 병으로서, 아이는 이미 고치기 힘들 정도의 크고 작은 2000여개의 종기가 온 몸에 고루 퍼져 있는 상태였다. 치료하려면 오직 메스로 종기 주위 네 군데를 찢어 핀셋으로 그 주변을 힘 껏 누르면 겉에 돌출된 종기의 크기보다 더 큰 브로콜리 모양의 하얀 뿌리가 드러나는데, 피부 깊숙이 송송 박힌 그것을 하나하나 뽑아 낼 때 마다 힘도 들지만 아이가 겪는 고통은 극심한 수준이라 했다. 그 많은 종기들을 일일이 뽑아 내기에는 수술시간이 오래 걸려 하루 2-3개 이 상 제거하기 힘들고, 늘 환자들로 북적이는 국립병원의 사정상 의사 선생님들도 사실상 포기한 상태라며 솔직한 속내를 말해 주었다. 나는 의사선생님께 간청했다. 내가 의사가 아니기에 칼을 사용할 수 없지만, 만일 작은 종기 들을 제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떼를 썼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의사 는 종기 주위를 메스 대신 주사바늘로 흠집을 낸 후 핀셋을 사용하여 뿌리까지 뽑은 후 소독하 고 거즈로 덮으면 된다고 알려 주었고,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 왔다. 아이와 나는 그 날 이후 1년 반 동안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마취도 않은 생살을 바늘로 뜯어 벌리고, 핀셋으로 종기 주위를 누르고 당기며 깊이 박힌 브로콜리를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2


뽑아내는 일은, 매일 매일이 비명과 눈물로 가득한 잔인한 전쟁터 같았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 수록 아이는 적응해 갔고 피고름 냄새는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날로 잔인하고 용감해 진 나는 중간 사이즈의 종기에도 겁 없이 손을 대기 시작했고, 감사하게도 종기를 제거한 모든 곳이 염증 하나 생긴 곳 없이 잘 아물며, 새살이 나오자 아이의 예쁜 미소도 살아났다. 남편과 아들, 도우미, 온 가족이 함께 응원하며 아이의 인내심에 혀를 내두르며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무섭고 두꺼운 큰 종기 20여개만 남았을 때 우리는 다시 의사를 찾아 남아있는 큰 종기들의 수술을 부탁했다. 아이의 달라진 모습과 그간의 오랜 사투를 전해들은 의사는 무척 놀라워하며 한동안 말없이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마음 착한 의사는 곧 미소를 띠며 수술 스케줄을 잡아 보겠다고 했고, 이후 세 달 반에 걸친 힘겨운 수술 끝에 드디어 2000여개 넘던 모든 종기가 제거되었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고향 부모 님 품에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소문을 전해 들었는지 우리 집에는 각종 피부병 환자, 불치병 환자와 가족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 의 행렬은 이어졌다. 급기야 나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의 출장치료를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기 시작했다. 큰 가방을 준비해서 그 안에 피부연고, 거즈, 소독약, 진통제, 소염제, 소화제, 해열제 등 가벼운 약들과 함께 체온계 혈압계 등을 넣고 다녔다. 신분증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외지에서 온 판자촌 빈민들은 논 근처 조그만 땅을 세 얻 어 무허가로 판자 집을 지었다. 이들은 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았는데 판자촌 대부분이 논 근처였기에 조금만 땅을 파도 쉽게 물을 얻을 수는 있었으나, 농약 섞인 지 표수를 생활식수로 사용했고, 더욱 큰 문제는 우물 가까이 위치한 화장실이었는데, 땅만 파고 가마니로 대충 둘러 문을 삼고 있었다. 생활하수조차 아무 곳에나 버렸기에 오폐수가 모두 식수 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로 인해 피부뿐 아니라 장기에도 손상이 있으리라 생각하 니 마음이 아팠다. 마침내 피부병과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주원인을 발견한 나는 몇몇 판 자촌을 돌며 그들에게 그나마 위생적인 화장실과 우물을 그들 거주지 양쪽 끝에다 마련해 주었 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3


그 애달픈 동네들 중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곳은 6개의 방이 서로 마주보게 지어진 12개 방의 판자촌 이었는데, 입구 첫 번째 1호방은 하루 24시간 언제든 찾아오는 남자들에게서 적은 화대를 받으며 일하는 여인들의 일터였고, 그 방과 붙어 있는 2. 3호 방은 그들의 거주지였다. 너무나 어색한 것은 일반 가정의 어린 자녀들이 이 좁고 좁은 공동체 안에서 부모와 함께 살아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난잡한 소음과 낯선 이들의 방문을 외면하며 함께 지내고 있는 참담한 모습에 나는 기가 막혀 입이 벌어졌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묘한 감정을 느끼며 이후 매일 그곳을 방문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간식을 나눠 주고, 미소로 정 을 나누며 판자촌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낯선 남자들은 어린아이들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정네들의 출입이 심한 날이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논두렁에 가서 노래도 하고 송사 리도 잡고 놀았다. 그마저 한계를 느끼던 어느 날 포주가 나의 집을 방문했다. 이유는 경찰이 급습하여 여자들을 조사한 후 버스터미널로 데려가 각자의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태워 추방했기에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다며 내게 그 장소 모두를 저렴한 가격에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의 부탁대로 그곳을 구입해 환경을 바꾸고, 청결과 위생을 위주로 교육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의식은 조금씩 개선되며 형편들도 점차로 나아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 당시의 꼬 마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더 나은 곳으로 이주하여 가정도 꾸리며 살고 있다. 그곳에 여전 히 살고 있는 가정은 몇 안 되지만 이제는 비루함을 벗어나게 되었고, 공동체는 새 가족들로 채 워져 갔다. 이제는 가족과 같은 그들은 머리가 하얗게 변한 나를 ‘옴마’ 라고 부른다. 서울 평창동에 살았던 나는 바다를 좋아했던 남편과는 달리 산을 좋아한다. 몇 년 전 현지인 친구의 도움으로 아궁산 아래 자리한 저렴하고 넓은 대지를 얻어 작은 집을 지었다. 내가 늘 꿈 꾸어 오던 일이었다. COVID-19팬데믹으로 인해, 가끔 들르던 산집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생 활하다 보니 전원생활이 좋아 아예 눌러 살게 되었다. 지금 발리는 이 역병으로 인해, 세계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북적이던 때와는 달리, 거리와 해 변은 한산하다. 오래 전 발리에 폭탄테러가 발생했을 적에도 이렇게 거리가 음산했던 적은 없었 다. 지금처럼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었고 거리는 다시 북적이는 예전 모습을 되찾 았었다. 국제공항이 장기간 폐쇄되고 연간 오천만 명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자, 수많은 호텔과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상권이 집중된 곳은 그야말로 유령의 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친근감 을 주던 변두리의 예쁘고 조그만 가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하나 둘 문을 닫아가는 모습이 안 타까워 나의 마음마저 울적해진다. 게다가 주변 친구들의 사업장이 줄도산 하게 되어 귀향을 하 거나 문을 닫고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좋은 날을 기대하며 신음하는 동일한 처지에 놓인 우 리들은 서로가 어떤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없어 더욱 가슴 아프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이방인으로서 100퍼센트 힌두인들이 살고 있는, 해발 800미 터 오지 산골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곳의 의식주는 우리나라 7-80년대와 같이 고루하다. PDAM(Perusahaan Daerah Air Minum, 국영 지역상수도사업회사)의 관리 부실로 하루 한 시간 만 가동되는 펌프는 고장도 잦다. 그나마 우기에는 비가 많은 곳인지라 동네 꼬마 녀석들은 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4


가 오면 비로소 목욕을 한다. 나 역시 물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그릇들을 꺼내 줄을 세우고 빗물 을 받아 목욕과 빨래를 하고 식수로도 사용한다. 청정지역의 혜택일까 빗물이 깨끗하고 맛이 달 다. 아궁은 산 전체가 화산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몇 년 전 발생했던 큰 화산폭발로 많은 화산재 가 쌓여 토양이 무척 윤택하다. 초목은 무성하고 울창하며, 밭농사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비료를 따로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천수에 주로 의존하다 보니 건기에는 좀 더 힘든 삶을 살 아야 하고, 지구 온난화 탓인지 변덕을 부리는 날씨 탓에 지금은 종자선택에도 애를 먹고 있는 산촌의 현실이다. 특히 COVID-19팬데믹으로 인해 시내의 큰 장터, 호텔, 식당 등지에 보내던 야채와 힌두제사용 꽃 등이 판로를 잃어 아이들의 끼니를 거르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초등학 생 정도면 누구나 밭농사 거들기와 소여물을 구해오는 것이 그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왜소한 체 격에 아침저녁 16-20°로 떨어지는 기온 때문에 콧물을 달고 살지만 다행히도 주변에 흔한 약 초와 열매, 저절로 유기농인 자연산 허브와 야채들을 먹고 자란 덕분에 대부분이 건강하다. 하 지만 한참 먹을 나이에 끼니를 거르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나는 하루 한 끼를 아이들과 함께 하 기로 결정했다. 허브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아이들은 지천에 널 부러진 잡초들의 이름과 효능을 알려 주었고, 나무와 열매들의 이름과 잎의 효능들도 가르쳐 주었다. 만날수록 아이들의 자연에 대한 지혜와 지식에 감탄했고, 어린 나이에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단순하지만 행복하 고 강한 그들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은 주변 밭에서 나오는, 시내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싱싱하고 저렴한 가격의 야채, 과일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운 녀석들에게 나는 작은 농장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메기, 닭, 오리, 거위 그리고 칠면조도 키우며 싱싱한 알들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모두가 행복하다. 건기인 요즈음 나는 아이들을 차에 가득 태우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 맑은 강에 데려가 강변 에 무성한 깡꿍을 뜯으며 멱도 감고, 빨래도 하며 질리도록 물놀이를 하다 해가 뉘엿해야 아쉬 움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물이 귀한 곳에 사는 꼬마들 인지라 물에서 놀다 보면 모두가 집에 가는 것을 잊을 정도이다. 이렇게 산골의 짧은 하루는 빨리도 지나간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역병은 변이에 변이를 더하며 극성을 부리고 있지만 나는 매일 아침 구름 속에 있다가 잠깐 얼굴을 보여주는 아궁산의 장엄함에 감탄하며 고개 숙여 기도한다. 같은 산이건만 매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참으로 경이롭다. 일찍이도 일어나 부지런히 지저귀는 온갖 새들과 아침을 여는 닭들의 회 치는 소리는 이제 정겹기만 하다. 점심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오후의 햇볕 속에 떼로 날아다니는 메뚜기와 잠자리 를 잡아 농장의 새 모이로 주겠다고 마당을 누비며 깔깔거린다. 밤이면 밤마다 진하게 울어 대 는 풀벌레 소리에 섞여 여기저기 반짝이는 반딧불 들은, 나를 심란한 세상으로부터 해방시켜 주 고 있음을 느낀다. 자연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새롭고 지루하지 않아 좋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잘 웃어서 좋다. 그들은 배가 좀 고파도, 며칠 씻지 못해도, 또 힘에 좀 버거운 집안일을 도울 때도 여전히 잘 웃는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5


지루하지 않은 자연의 얼굴들이다. 단조로운 듯 바쁜 하루하루 산속의 생활이, 외롭지 않고 오히려 행복 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이 탓일까? 독서를 즐길 수 있는 한가로운 시간, 아이 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오찬, 그 가운데 그들의 단순함과 웃음을 배우고,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 과 바람이 오고 가는 길을 배워가는 나의 눈과 귀는 날로 더욱 새로워지고 있다. 아~ 벌써 노을을 머금고 붉어졌던 해는 아궁산을 넘어갔다. 까아만 하늘에 무수한 별들 마냥,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며 나만의 사색에 잠겨보는 여유롭 고 아름다운 밤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6


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 한인이주 101 주년기념 특별상

수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Ingatlah Nama Mereka 고찬유(한국일보자카르타특파원, 자카르타)

망자의 이름과 발자취를 반년 넘게 쫓았다. 원고지 240매 분량, 4만7,872자의 기록이 쌓였다. 관련 도서 7권을 읽었다. 의문과 질문은 오히려 늘었다. 듣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종국엔 달아 나고 싶었다. 그 현장을 마주한 뒤에야 망자는 뇌리에서 살아나 말을 걸었다. 혼이 들린 듯 며 칠을 앓았다. 2019년 8월 1일, 중부자바주 암바라와 역사의 현장은 화장실로 변해 있었다. 2,000루피아만 내면 누구든 쓸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선을 매몰차게 긋듯, 함께 일렬로 늘어서 썩어가는 19칸 방과 달리 그곳만 푸른 페인트가 칠해지고 멀쩡한 문이 달렸다. 자초지종을 물어도 주민 들은 심드렁했다. 그들은 그곳이 일본군 종군 위안소였다는 사실을 대개 몰랐다. 나머지 19칸의 면면은 참담했다. 폭 2.5m, 길이 3.6m, 높이 3m의 방들은 쓰레기 더미와 함 께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창고로 쓴 듯했다. 돌침대와 침대 안쪽을 가리는 천을 걸 어 물체를 고정했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만 양쪽 벽에 두 개씩 남아있었다. 버려진 짐승 우리와 흡사했다. 자물쇠로 잠긴 방도 많았다. 그나마 보존이 잘 돼 있는 오른쪽 끝에서 다섯 번째 방 돌침대 위에는 녹슨 풍로와 전기밥솥, 먼지 수북한 오토바이 헬멧 등이 버려져 있었다. 세월에 짓이겨 손만 대도 부스러지는 벽엔 나 무뿌리가 들러붙었다. 바닥엔 눈물을 쥐어짜듯 이끼가 발걸음을 방해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습 하고 역한 냄새가 목구멍을 깨웠다. 침대를 딛고서야 손이 겨우 닿는 폭 0.5m, 길이 1.5m 거미 줄투성이 나무 창살로 쏟아지는 적도의 햇살은 너무 눈부셔 징글징글했다. ‘소녀도 저 하늘을 바라봤겠지…’ 누군가 가지런하게 놓아둔 추모용 꽃들이 침상 위에 희끗희끗하게 말라붙어있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7


왼쪽 벽에 적힌 정체불명의 낙서를 보고 통탄했다. 누군가 ‘소녀시대’라고 써 놓았다. 그 옆과 위엔 한자(少女時代)와 영어 약자(SNSD)로 역시 소녀시대를 적어 놓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보통 우리나라 사람이 한글을 표기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ㅅ’을 적을 때 나눠 쓰지 않고 한번 에 그린 모습이다. 방 입구엔 다윗의 별도 그려져 있다. 다윗의 별은 오랜 역사 동안 유대인의 긍지를 드러내는 문양으로 활용됐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노란색 다윗의 별 을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선별과 배제의 상징으로 둔갑시켰다. 홀로 코스트 대학살 당시 다윗의 별은 핍박과 고통을 불러오는 낙인이었다. 저 해괴하고 망측한 낙서 들을 누가 그렸는지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화장실이 있는 건물 너머엔 폐가 두 동이 더 있다. 9칸, 15칸으로 추정된다. 지붕과 벽이 무너 진 자리에 수풀이 우거져 떼를 입힌 무덤 같았다. 방들의 폭이 1.5m밖에 되지 않아 더 답답해 보였다. 질퍽거리는 통로를 오리 몇 마리가 거닐었다. 위안소 앞에 흐드러지게 핀 분홍 꽃들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이곳에 오기 전 수없이 들었던 정서운 할머니의 생전 육성을 다시 수십 번 들었다. 할머니의 담담한 한마디한마디는 여전히 살아있다. 할머니의 증언을 날것 그대로 옮겨 본다. “나는 이제 자카르타에서 내려가지고 자바섬 스마랑이란 데가 있는 기야. 거기를 13명이, 그래 가지고 갔다 아이가. 그래서 그 때사 여기가 일본 땅이 아니고 먼 나라다 하는 걸 알았지.” “처음에 인제 저녁에 장교 한 놈 오더라고. 술을 잔뜩 쳐먹고 오는 기라. 그래 뭐 벌벌 떨릴 거 아이가. 열다섯 살, 거기 간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어. 그래 갖고 이제 강간을 당한 기지. 자꾸 이제 상대 안 하려고 내가 막 발악을 하고 그러니까 아편을 찔러 넣는 기라. 그래 갖고 이리 돼서 그만 중독이 돼 버린 거라. 숫자도 헤아릴 수 없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말도 못 해. 줄을 서 가지고 옷도 안 벗고.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아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하러 가거든. 병원이 야전 병원이 부대 안에도 있고, 또 따로 큰 데가 있어요. 거기 나가면 인도네시아 원주민들, 그 사람들을 보면 그리 반갑고 그렇더라고. 얼굴이 새까맣거든. 그래도 반갑고 남자들만 보다가 그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솟구치는 기 라.” “둘이 죽었다. 고마 개 한 마리 죽으면 갖다 묻어버리듯이 그랬지. 장례식이 어디 있노, 거기 서. 금계랍 말라리아약으로 먹는 거 그 약을 40알을 내가 구한 기라. 두 개씩, 세 개씩 한국사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8


람이 군의관이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내가 모아 가지고 그걸 한번에 털어 넣었는데. 그랬는데 그것도 죽는 것도 맘대로 못 죽겠더라. 3일 만에 깨어났다. 같이 있는 사람들이 얘기를. 코로 입 으로 귀로 전신에서 피가 쏟아지더래.”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일제가) 손든(항복한) 줄 몰랐는데, 13명이 가 가지고 3명이 죽었네. 3명 죽고 나머지 10명은 이제 방공호, 그 방공호 하나에 다 들어갈 순 없거든. 몇 명만 데리고 방공 호로.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다 매장을 시켜버린 거라. 10명 중에서 그러니까 4명이던가, 3명 이던가 방공호에 먼저 들어간 이들은 죽었다.” 증언이 너무 생생해 현장에 할머니와 함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을 맺 었다. “목숨만 부지하고 살자, 목숨만 살면 내 몸을 빼앗아가도 내 마음만은 안 뺏긴다. 그런 정신으로 내가 살았지.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우리를 끌고 간 일본이, 그리고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망자의 발자취는 더 있다. 위안소에서 10여 분 거리부터 암바라와 의거 현장이 펼쳐진다. 조 선인 포로감시원이던 고려독립청년당 민영학 손양섭 노병한 3의사가 갑작스런 전속 명령에 불 만을 품고 1945년 1월 4~6일 사흘간 일본군 십여 명을 죽인 뒤 모두 자결한 항일 의거다. 그들의 행적은 의거 현장에서 18㎞가량 떨어진 수모워노 보병훈련장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1944년 12월 29일 밤 11시쯤 훈련장 취사장에서 결성된 고려독립청년당의 당원이 됐다. 고려 독립청년당은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등 세 가지 강령을 발 표했다. 75년이 흐른 2019년 8월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이 혈서를 쓰고 당가를 불렀던 취사장엔 학생들 과 가방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훈련장은 청소년 야영장으로 변했다. 오랫동안 네덜란드 국기가, 한동안 일장기가 걸렸을 연병장 깃대에 인도네시아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포로감시원들이 묵 었을 막사는 학생들의 숙소로, 매점으로 변해 있었다. 매점 주인도, 학생들도 옛 네덜란드 훈련 장인 건 알았지만 일본군이 썼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하물며 자신들이 누운 자리의 의미를 알리 없다. 1945년 1월 4일 오후 3시쯤 일본군이 자바포로수용소 스마랑분소 제2분견소로 쓰던 암바라 와의 성요셉성당에서 트럭 한 대가 출발했다. 전날 싱가포르(당시 말레이반도) 전속 명령을 받 은 조선인 포로감시원 6명과 일본인 인솔 하사관 등이 타고 있었다. 포로감시원들은 갑작스런 명령에 비분강개했다. 3의사는 성당으로부터 8~9㎞ 지점에서 운전병에게 총을 겨누고 차를 멈 추게 한 뒤 성당 옆 무기고에서 경기관총과 소총 등 무기를 탈취했다. 무기고는 현재 학교 주차 장으로 쓰이고 있다. 이어 3의사는 분견소장(대위) 관사를 습격하고 밤늦게까지 암바라와 시내를 돌며 일본군 군 납업자와 의사(위생병), 형무소장 등을 사살했다. 일본군의 추격을 당해 민영학 의사는 5일 총 상을 입은 수수밭에서, 나머지 두 사람은 6일 위생자재창고에서 잇따라 자결했다. 당시 일본군 공식 행정 문서에 3의사의 사망 사실이 적혀 있다. 위생자재창고는 공용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 다. 암바라와 의거는 그렇게 서서히 잊혀졌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39


고려독립청년당은 당 선언에서 ‘희생 없이 광명은 획득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후대인 우리 는 광명을 획득했는가,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력을 했는가. 이정표 하나 남기지 못한 암바라 와 의거 현장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자카르타로 돌아온 뒤 6개월이나 미뤄둔 숙제를 풀었다. 1920년 9월 20일 이 땅에 ‘정착’해 인도네시아 한인 이주 100년의 역사를 시작한 장윤원 선생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이었다. 선생 은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이 땅에 망명했다.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고문과 투옥을 당했다. 1945년 8월 종전 후 해방 조국 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고문후유증을 이기지 못한 채 1947년 11월 23일 자카르타 자택에서 통한의 27년 망명생활을 죽음으로 마쳤다. 여정은 아트마자야가톨릭대 교정에서 시작했다. 본관 복도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앉은 의자 구석 너머 건물 벽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석판이 하나 붙어있다. ‘GEDUNG IR. J. P. CHO 1927-1995’. 장윤원 선생의 차남 장순일을 기리는 건물명이다. J는 주니치(Junichi), P는 영세명 바울(Paul)이고, 초(Cho)는 장씨 성의 일본어 음독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다 고문과 투옥을 당하고 그로 인해 숨진 선생의 못다한 유지 를 실천한 후손을 기리는 석판에 어떤 이유로 일본식 이름이 붙었는지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 장윤원 선생이 투옥됐던 형무소 등은 민간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 에 없었다. 장윤원 선생의 자취를 쫓는 일은 그의 무덤에서 마무리했다. 선생은 남부 자카르타 타나쿠시 르 공동묘지 정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100여m 떨어진 곳에 부인, 차녀와 합장돼 있다. 묘비의 ‘장윤원(張潤遠)’ 한자 이름 밑에도 일본어 음독이 표기돼 있다. 그나마 출생지를 ‘SEOUL’이라고 새긴 묘비가 반갑고 서글펐다. 그날 적도의 바람이 울었다. 기실 이 기나긴 여정, 앞으로도 이어질 여정의 단초는 양칠성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현지 역사단체가 양칠성 도로를 만든다는 소식에 관심을 기울인 덕분에 수많은 망자들과 인연 을 맺은 그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올 수 있었다. 양칠성은 세 개의 이름, 두 가지의 죽음을 가진 인물이다. 생몰(1919~1949년)과 역사로 추 정컨대,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20년은 한국이름 양칠성(梁七星)으로, 6년은 일본이름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로, 4년은 인도네시아이름 코마루딘(Komarudin)으로 각각 살았다. 코마루딘 은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0


그는 1942년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인도네시아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반둥과 족자카르타를 잇는 철도와 도로를 공격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다. 네덜 란드 군의 포위를 저지하기 위해 치마눅 다리를 파괴했을 정도로 폭파 전문가였다는 얘기도 있 다. 1948년 11월 네덜란드군에게 붙잡혔다. 이듬해 8월 10일(5월 말이라는 설도 있다) 양칠성은 일본인 동료 두 명(아오키, 하세가와)과 함께 가루트시장에 끌려 나왔다. 공개 총살 직전 최후의 순간은 두 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하나 는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하나는 과장돼 보이는 신화로 기억된다. #아오키의 선창으로 기미가요를 제창한 뒤 만세를 삼창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현장을 목격한 일부는 그냥 “만세”라고도 했다. #“메르데카(자유 또는 독립), 메르데카!” “나는 죽어서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바란다.” 1975년 다후란, 스코토 등 옛 동료들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공식 청원하면서 양칠성은 처형 26년 만에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추서된다. 우리나라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는 한국 시민단 체 등의 노력으로 묘비명이 ‘KOMARUDIN, YANG CHIL-SUNG, 양칠성 대한민국’으로 바뀐다. 죽음의 순간에 대한 엇갈린 증언 탓에 평가도 양극단으로 갈리지만 그가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한 건 확실하다. 인도네시아 한인 사회는 지난해 이주 100주년을 맞았다. 수많은 이들이 이 땅에서 꿈을 꾸고 꿈을 이뤘다. 누군가는 사업에 성공했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잘 길러냈다. 그러나 이주 초창기 우리 선조들의 꿈은 역사의 혼돈과 삶의 고초 속에 파묻혔다. 역사의 현장은 세월의 더께에 방 치되거나 흔적마저 사라진 채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기록조차 후세가 속 시원할 만큼 풍부하지 않다. 장윤원 선생 비석과 그 아들을 기리는 석판에 일본어 음독으로 새겨진 이름을 바꾸고, 암바 라와 의거 현장과 위안소에 푯돌을 세우는 일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산 자의 바람이다. 혹자는 흐지부지됐다고 넘겨짚지만 2019년 한국일보 보도 이후 지금도 여전히 차근차근 그 일에 매진 하는 누군가의 정성이 결실을 맺으리라 믿는다. 푯돌처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귀한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름이나 마 부르고 기억하는 일은 어쩌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일지 모른다. 이 땅의 우리만은 그 이름들을 잊지 말길 소망한다. 하여 그들의 이름을 남긴다. 장윤원(인도네시아 이주 100년 역사의 시작), 정서운(일본군 성노예로 고초), 민영학 손양섭 노병한 이억관 김현재 임헌근 이상문 조규홍 문학선 백문기 박창원 오은석 신경철 지주성 박승 욱 변봉혁 한맹순 금인석 송병기 김춘식 김민수 김규환 김선기 신재관 김인규 안승갑(이상 고 려독립청년당) 그리고 양칠성(인도네시아 외국인 독립영웅). 인도네시아와 한국엔 비슷한 명언이 전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 호 선생), “역사를 잊으면 나라가 변질된다”(인도네시아 국부 수카르노). 기억은 응당 우리의 몫 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1


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상공회의소회장상

회사를 그만둔 날 Hari Saya Berhenti Bekerja 윤세귀(프리랜서, 말랑)

회사를 그만둔 날. 아내는, 餞別金(전별금)도 없이 돌아와 면도도 잊은 채 서러운 맨발로 나서는 내 민망한 손을 쥐고 삭밤에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꿈 밑에 베었던 어제의 일기장이 미처 탑승 못한 오늘을 만 지작거리다 허락도 없이 내일을 뱉어버리고 상상임신으로 산을 넘는다.

아내의 어머니는, 住所地(주소지)에도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산모퉁이에 얹혀 지나친 가난에 시들어가는 한 평 그림자로 살았다. 부러진 산허리에는 저녁 한 때를 준비하는 미련한 기도가 허물어진 담벼락 뒤로 연기처럼 일어나 가파른 내리막에 서서 내용 없는 방문을 기다린다.

아내의 남편은, 산모기에 뜯겨 뒤척이던 선 새벽의 옹알이에 생존의 안부만을 전하고 쏟아지 는 하품을 참으며 젖은 몸을 말렸다. 뒤늦게 출발한 하루가 주소지도 없이 찾아와 기척 없는 이 방인의 아침을 자꾸만 쪼아댔다. 아직 한겨울이라는데 작년부터 기다리던 적도의 눈 소식은 아 직 없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 날. 나는, 철없이 찰랑대는 이슬 한 모금이 방안에 붉은 강물로 차오를 때 미안한 외출을 준비한 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2


뉴 노르말 Normal baru

한 사람. 두 사람. 얼굴 없는 산 사람들이 준비도 없이 빈손의 일상을 넘어갑니다. 산 밑에 주름진 호흡들이. 울면서 떠나는 차에 올라 헤어진 체온을 걸쳐 놓고 빨간 불을 켜고 먼저 눕습 니다. 어제 잠들고 흔들어 깨우면 오늘인데, 오늘 묵었다 내일 떠나는 감기라던데, 쏟아지는 잔 기침은 젖은 땅의 매듭을 따라 지나온 흔적을 지우며 덜컹거립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만 문득. 어젯밤 세상과의 불화가 그리워집니다.

하얗게 입을 꼬맨 사마리아인은. 눈만 남은 이방인에게 다시 올 거라며 기다리지 않는 방문을 예약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3


일반부 최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시는 힘이 있다

수필

Puisi Memiliki Kekuatan 유호종(발리한글학교장, 발리)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 중에는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 살아온 환경, 성격, 취미, 생각이 다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다름이 있다. 다름은 서로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질감은 관계 시작에 긴장을 준다. 긴장을 느끼며, 나는 발리에 살고 있다. 발리에 살면서 여러 가지 다름 중에서도 언어의 다름을 깊게 느끼고 있다. 언어의 다름은 현지인과의 유대감을 깊게 만들기도 했고, 얕게 만들기도 했다. 언어의 다름을 다름으로 느끼지 않게 돕는 현지인 통역사와는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되었고, 언어 장벽에 막힌 다른 현지인과는 얕은 유대감을 갖게 되었다. 언어의 다름은 다른 언어를 가진 존재 간에 깊은 차별을 발생시킨다. 차별로 생긴 마음의 벽에 갇혀 고립감을 느끼던 중에 5월경 “한인니 문화연구원(Indonesia &amp; Korean Culture Study)”을 통해 인도네시아인 장애인 시인의 시를 공모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인 장애인 시인의 글을 선정해서 한국어로, 한국 장애인 시인의 시를 인니어로 번역해서 공동시집으로 출판한다고도 했다. 얘기를 듣고, 감흥은 없었다.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언어의 다름에서 오는 고립감이 커져갔다. 그 커짐은 언어의 다름을 “같음”으로 만드는 이번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작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욕구를 나로 하여금 갖게 했다. 언어의 다름이 다른 언어를 가진 존재 간에 깊은 차별을 만들고, 고립감을 준다면, 언어의 다름을 같음으로 만드는 작업은 차별과 고립감을 파쇄 할 실마리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장애인 시인? 발리에 장애인 시인이 있을까?, 누구를 추천하지?’ 발리에서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시인에 대해서도, 장애인에 대해서도, 더군다나, 장애인 시인에 대해서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다. 도움을 요청했다. 덴파사르 시청의 대외협력부 부서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에게 발리에 장애인 시인이 있는지 자문을 구했다. 공무원은 장애인복지기관(Rumah Bisabilitas di Bali)을 연결해주었다. 이곳은 발리 덴파사르 시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서로 연대시키는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연락을 했다. “장애인 시인 2명을 찾고 있습니다.” 기관에서

우리에게

장애인

시인

2명을

추천했다.

발달장애인이라고 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4

1명은

시각장애인이고,

1명은


‘장애인이 시를 쓸 수 있을까? 쓴다고 해 봤자, 시각장애인이 살면서 얻는 제한 된 삶의 정보가 비장애인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킬까? 지적 장애를 가진 발달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정서와 정신에 감동을 불러올 시를 쓸 수 있을까? 시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의 삶에 드리워진 편견과 차별의 경험은 비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내가 겪었던 편견과 차별보다 더 심한 삶의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한 발 양보해서 인정하지만, 그 경험치를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시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발달장애인이 비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해서 시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생각을 하며 나는 꽤나 대단한 척 실소를 머금었다. 웃는 중에 나는 장애인 시인의 시가 비장애인에게 또 다른 이질감과 역차별을 줄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장애인 시인의 시는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이기 때문에 겪는 일을 비장애인에게 일부분 볼 수 있게 해주는 가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이 생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존재적으로 다르다고 인정하는 나의 내면에서 시작되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존재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 때까진 내 생각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한인니문화연구원》에 장애인 시인 2명을 추천했다. 그들의 작품은 “2021년 아시아장애인 공시집 발간(주최/주관: 보리수 아래, 후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한인니문화연구원)”에 선정 되었다. 정해진 날에 장애인 시인 2명에게 전달할 상금을 송금 받았다. 상금 전달식을 진행해야 한다는 공문을 덴파사르 시청과 장애인복지기관(Rumah Bisabilitas di Bali), 그리고 장애인 시인 2명에게 전했다. 모두 기뻐하면서 장애인 시인 2명에게 상금 전달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번 행사에 덴파사르 시청 산하 PKK(Pembinaan Kesejahteraan Keluarga: 가족복지기관)의 대표로 계시는 분(現 덴파사르 시장의 아내)이 참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전히 장애인과 비 장애인을 존재의 다름으로 생각하면서 상금 전달식 행사에 참여했다. 상금 전달식은 정부 기관 의 진행 하에 규모 있게 진행되었다. 덴파사르 시청 산하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매체에서 취재를 나왔다. 나는 한국어로 인사말을 하고, 통역사가 인니어로 인사말을 전했다. 상금 전달식이 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5


행 되던 중에 시각장애인 시인과 발달장애인 시인은 자신들의 시를 낭독했다. 우리 쪽에서 빳빳 한 고급 양지에 인쇄해서 전달 해준 인니어와 한국어로 이중 번역된 원고를 손에 들고, 인니어 로 시를 낭독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한국어 번역에 번갈아가며 집중했다. 시각장애인은 감 정전달의 핵심 매개체를 눈 떨림으로 모으더니 울부짖듯 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났다. 내 눈은 알 수 없이 젖었고 힘겹게 박수를 쳤다. 힘겨운 것은 지식,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감동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은 차분한 어조로 쑥스러운 듯 시를 낭독했다. 발달장애인의 그리움 에 관한 경험치는 내 경험치를 압도했고, 그대로 정수리부터 발끝을 관통했다. 그 순간 이들이 낭독하는 인도네시아 글이 한글 위로 올라왔다. 이 겹쳐짐은 글씨의 겹쳐짐이 라기보다는 시 언어 안에 숨 쉬고 있는 영혼의 겹쳐짐이다. 인도네시아 글과 한글 안에 숨 쉬고 있는 영혼이 서로 겹쳐지니, 지금 내가 듣는 것은 인니어로 된 시가 아니라, 시인 내면의 영혼 의 소리였다. 시인이 낭독하는 영혼의 소리가 내 가슴 한 가운데로 들어왔던 것이다. 시각장애 인의 시 한 편에 담긴 영혼의 소리가 내 가슴에서 인생고락을 사무치게 했던 것이고, 발달장애 인의 시 한 편에 담긴 영혼의 소리가 내 심장이 기대고 싶은 그리움을 만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가 주는 감동에 녹아질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존재적으로 다르다고 인정했던 나를 경멸했다. 장애인의 경험을 녹여낸 시가 비장애인에게 깊은 공감을 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나는 나를 경멸했다. 인도네시아인 장애인들의 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영혼을 가진 존 재임을 증명했고, 그 시는 시 언어 안에 숨 쉬고 있는 영혼의 겹쳐짐으로 서로 언어가 다른 인 도네시아사람과 한국사람 간에 발생하는 차별과 고립감을 파쇄 했다. 언어의 다름에서 오는 고 립감은 시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인도네시아인 장애인 시인의 시를 들으면서 언어의 다 름에서 오는 차별과 고립감을 느낄 수 없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다름에서 오는 존재적 차별과 고립감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정의했다. 시는 다른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모든 차별과 고립감을 없앤다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에서 언어의 다름에서 오는 고립감을 여전히 겪는다. 나는 다른 언어를 들을 수 없는 장애인이다. 다른 언어로 모두가 대화하지만, 나만 대화에 참여 못할 때, 찾아오는 차별과 고립감이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또 발생했다. 어? 그런데, 그것을 파쇄 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인 장애인의 시를 듣는 것처럼 상황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 를 듣는 것처럼 사람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를 듣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시를 듣는 것처럼 현실을 듣게 되니, 언어의 다름이 같음으로 바뀌면서 장애인이 비장 애인과 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차별과 고립감이 나의 내면에서 비껴갔다. 여전히 못 듣고, 대화 못하지만, 시를 듣는 것처럼 현실을 보니, 그들이 보이고 인간적으로 이해되었다. 다른 언어를 들을 수 없는 장애인이었던 나는 다른 언어를 들을 수 있는 비장애인들과 이제는 인간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인간적으로 함께 하니, 차별과 고립감이 수그러들었다. 시는 힘이 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6


일반부 최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미냑 까유 뿌띠

수필

Minyak kayu putih 김선혜(국어과교사, 자카르타)

인도네시아로 파견 근무를 나오기 전까지 내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드라마 ‘발 리에서 생긴 일’에 나오는 발리섬이 인도네시아에 있다는 것 정도? 대체적으로 내 주변 사람들도 인도네시아에 대해 잘 몰랐고 책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고 해도 생각보다 인도네시아에 대해 다룬 글이 많지 않아서 간접경험도 별로 못해본 채로 인도네시아 에 정착하게 되었다. 생활하면서 내가 느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지만, 정말 친절하게 웃고 있지만, 일 처리가 빠르지 않았고 빈틈이 많았다. 텔콤셀 매장에 가서 핸드폰을 개통할 때도 손님이 거의 없었지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고 마트에서 물건 계산할 때도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지 한국의 대형마트 계산대 모습과 비교했을 때 울컥울컥 화가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물건 값이 제대로 안 찍혀 있으면 계산대 직원이 직접 매장으로 들어가 그 물건을 찾고 또 직원들끼 리 킥킥 대고 웃고 카드 계산 한번 하려면 크레딧 카드인지 데빗 카드인지 묻고 루피아인지 원 화인지 그리고 아주 천천히 물건 가격을 확인하면서 입력하고... 안 그래도 되는데 천천히 장바구니에 물건 담아주고. 대략 이런 과정들을 거치고 나면 나의 인내심은 너덜너덜해질 때가 많았다. 이렇게 천천히 일이 진행되어서 완벽한가 하면 가격 실수 도 종종 있고 내가 원한 물건이 있는데도 없다고 하거나 잘못 찾아주고도 맞다고 우기고 엉뚱 한 색깔로 찾아오고 할 때가 있으니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듯 답답한 일 처리에 혼자 속을 끓이곤 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7


먼저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분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더더욱 이런 생각들은 깊어져 갔다. 운전 기사에게 오늘 가야 할 곳을 말해주고 이 장소들을 아는지 물어봤더니 물론이라면서 환히 웃었 는데 3곳 다 정확히 간 곳이 하나도 없었다든지, 자카르타 국제공항에서 수하물 처리가 하도 늦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늦었다고 하소연했더니 직원이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마음의 평화 를 찾으라.”고 두 손 모아 인사했다든지 하는 에피소드를 듣고 있자면 ‘내가 이상한 나라에 정 착했구나, 보통의 성질로는 살기 어렵겠구나, 이 나라 사람들과는 같이 일하기 어렵겠구나.’하는 부정적인 생각들만 많아졌다. 인도네시아 자연 환경은 멋지고 아름다운데 사람들이 이 나라의 자원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개선되어야 할 점이 너무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 투덜댔던 내 태도가 달라지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을 겪은 뒤부터다. 그날은 자카르타의 예쁜 카페를 찾아서 딸들과 함께 모처럼 나들이를 나갔을 때다. SNS에 사 진이 많이 올라오는 카페로, 카페 내부에 나무도 있고 아름다운 실내 분위기를 연출하는 젊은 분위기의 카페. 그 카페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난 뒤 집에 오기 위해 택시를 불렀는데 그날따 라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을 받으면서 좀 덥다고 느끼며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데, 갑자기 딸이 쓰러졌다. 말 그대로 바닥에 픽 쓰러진 것이다. 더위를 먹었는지 어지럼증이 왔는지 정말 바닥에 머리를 쿵 박을 정도로 쓰러졌다. 그때의 내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생각이 멈춘 듯 뇌 회로가 멈춰버렸고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직 인도 네시아 지역 감각도 없던 때라서 그 지역이 어딘지 자세히 설명하기도 어려운데 딸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인도 없고 위급한 순간에 부를 사람이 생각나 지도 않았다.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은 오만 가지 생각들로 가득했다. ‘병원 응급실로 가야 할까?’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병원에 가면 해결할 수는 있을까?’ ‘당장 딸을 차에는 어떻게 태우지?’ 그때 쇼핑몰 문 앞에 서 있던 경비원이 달려와서 딸에게 정신차리라고 흔들며 깨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다급히 뭐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야외 식당 직원과 사장님이 뛰어나오고 이어서 상 가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뛰어 나왔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그 사람들은 내 딸을 안아서 식당 의자들을 붙여 눕히고 옷을 편하게 입히고 계속 말을 걸었다. 그리고 코와 목에 계속해서 뭔가를 발라주었다. 어떤 사람은 연신 손 발을 주물러주고 계속 머리 쪽과 코에 뭔가를 바르면서 숨을 쉬라고 숨을 쉬라고 외쳤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8


아이가 숨을 좀 쉬는 것처럼 보이자 식당 직원들은 주방으로 달려가서 마실 것을 들고 나와 서 천천히 마시게 했고 계속 손발을 주물러 주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이 소지품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혼자 시간이 멈춘 듯 현실감 각이 없는 것처럼 멍했다. 뭘 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오고 ‘저렇게 부산 떨어도 되는 건가, 아이 를 그들 손에 맡겨도 되는 것인가’ 이런 불안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가 병원에 가라고 택시를 불러주고 아이를 택시 안에 잘 눕혀 주었다. 그리고 내 손에 무슨 약병처럼 생긴 것을 쥐어주고 가지라고 했다.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잘 모르자 직접 행동으 로 보여주면서 그 약병의 액체를 코에 바르고 숨을 쉬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리고 차가 떠나는 동안에도 계속 아이에게 숨을 크게 쉬라고 금방 괜찮아진다고 소리치고 있던 사람들. 정말 정신 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그때는 그 사람들의 행동이 마뜩잖게 느껴져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택시 안에서 내 손에 쥐어진 약병을 봤더니 초록 색에 든, 무슨 장난감 약병처럼 생겼는데 문 방구에서 파는 싸구려 액체처럼 보였다. 무슨 성분인지 알 수도 없어 보이는 이 액체를 아이에 게 계속 발라줘도 되는지 판단이 안 섰지만 그 사람들이 하도 간절히 말한 것이 신경 쓰여서 코와 목에 발라주고 숨을 쉬라고 얘기하면서 병원 응급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아이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고 정말 이제 괜찮은 것 같다고 병원에 가지 말고 집에 가서 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주말에 병원 응급실에 가도 특별한 조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아이가 진짜 괜찮 은 건지 조심스러웠지만 일단 집에 가서 상태를 보기로 했다. 아이는 집에 가서 잠시 안정을 취 한 뒤부터는 밥도 잘 먹고 평소와 다름없는 컨디션을 회복했다. 잠시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그때서야 그분들이 준 약병이 뭔지 찾아볼 정신이 생겼다. ‘미냑 까유 뿌띠(Minyak kayu putih)라고 쓰여 있는 초록색 병. 알고 보니 유칼립투스 기름으로 천연성분이라서 인체에 해가 될 성분이 전혀 없는 거였다. 인도네시아에는 풍부한 오일이어서 가격도 싸기 때문에 인도네시 아 사람들은 이 약을 여기저기 아플 때마다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풀 냄새와 파스 냄새가 섞인 허브 냄새가 나고 몸에 바르면 발한 효과가 있어서 후끈해지는 기분이 든다. 실제 로 약 효능을 찾아보면 두통, 근육통, 벌레 물렸을 때, 몸살감기, 체했을 때 등 진짜 광범위한 효능을 자랑하고 있다. 더욱 믿음이 가는 것은 예전에 한국에서 호랑이 연고로 통했던 연고의 주성분과 이 미냑 까유 뿌띠의 주성분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Cajuput oil이 주성분으로 성분 자 체에 소염제, 진통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49


알고 나면 더 보인다고 이 약을 알게 된 뒤에 자세히 보니 마트나 약국 등 굉장히 많은 곳에 서 이 오일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 뒤로 믿음이 생긴 나도 두통이나 근육통, 벌레 물린 곳에 자 주 바르곤 하는데 특히 근육통에 효과가 좋은 것 같다. 피부가 가렵거나 아플 때도 자주 바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피부가 진정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 내 가방에는 상비약처럼 이 미냑 까유 뿌띠가 들어있다. 그리고 아이들 가방에도 하나씩 챙겨주고 피부에 바르라고 안내해 주고 있다. 인도네시아 만병통치약 전도사가 된 기분이다. 그 리고 한국 갈 때 꼭 지인들에게 선물로 갖다 주라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약을 소개해주고 있 다. 진짜 효과 좋다고. 우리 아이가 기절했을 때 이 약 바르고 좋아졌다고. 누가 보면 약장수 단골 멘트 같을 수도 있지만 이 약을 볼 때마다 인도네시아의 따뜻한 마음 이 느껴져서 가슴 뭉클한 기분이 든다. 그때, 나 혼자 멍하니 서있을 때 득달같이 달려와 준 그 인도네시아 사람들. 미냑 까유 뿌띠 오일을 바를 때마다 고맙고 또 고맙다. 피부에 퍼지는 알싸 한 그 향처럼 오래오래 잊히지 않을 장면이다. 누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내 손에는 이 약이 어 김없이 들려 있을 것 같다. 음식이 좀 늦게 나오면 어떠랴! 나는 이미 인도네시아의 달콤한 얼굴을 보고야 만 것이다. 그 순수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 내 손에 쥐어준 그 만병통치약! 나도 이제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여기는 인도네시아잖아? 마음의 평화를 가져!”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0


일반부 우수상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장상

오만과 편견

수필

Kesombongan dan Prasangka 김진연(간호사, 자카르타)

2019년 1월 말 수카르노하타국제공항에 닿았다. 한겨울에 출발했는데 무더위에 도착했다. 공 항의 밤공기는 그야말로 고온다습, 덥고 습한 공기가 얼굴과 콧구멍에 확 들어왔다. 동남아시아 라곤 필리핀 보라카이 여행이 전부였던 터라, 미리 온 남편이 구한 월세 아파트로 향하는 도로 에서 불 켜진 빌딩들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한국이랑 다를 게 없네요.” 문득 한국에 두고 온 게 떠올랐다. 정규직 전환까지 약속 받은 직장을 남편 때문에 그만뒀다. 출국 전날까지 일했다. 원하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일이 풀리지 않으면 화가 났던 생활, 물질과 감정 면에서 인색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쉬움일까, 후련함일까.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인도네시아라는 표지판과 나침 반이 알려주는 대로 시나브로 나아가고 있다. 그 길은 깨달음으로 충만해지고 있다. 실망은 기 대로, 오만은 겸손으로, 편견은 존중으로 바뀌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경험이다. 시작은 고달팠다. 집 한가운데 기둥만 없으면 구조가 괜찮은 거라던 아파트는 낯설었다. 겨우 잠들었다가 새벽에 누가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깼다. 집 안에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 같은 소음, 알고 보니 새벽 기도시간(아잔)을 알리는 이슬람사원 4곳의 확성기들이 안방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간 푹신한 침대를 버려두고 아잔 소리를 피해 거실에 이불을 깔고 잤다. 그렇게 싫더니 나중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몇 마디 알아 듣게 됐고, 아이는 아잔 소리를 노래처 럼 흥얼거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사도우미와의 인연도 순탄치 않았다. 한국에서 친정엄마 찬스로 하숙생처럼 지내왔기에 한 달 만에 몸살이 났다. 주위 추천으로 시간제 가사도우미를 고용했다. 출근시간을 5분, 10분 지 나 튀김 봉지를 덜렁덜렁 들고 오는 게 거슬렸다. 코로나19 전이라 아이 도시락 싸고 아침식사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늘 그랬다. ‘5분 먼저 와서 일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30 분 일찍 출근해 1시간 늦게 퇴근하는 직장생활을 20년 했던 기억이 나 더 얄미웠다. 산낙지를 손질하는데 기겁하거나 훈제오리를 요리하는데 헛구역질하는 모습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귀한 인연이었다. 그분이 1년 넘게 일하면서 없어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그분 덕분에 인도네시아어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준비한 월급을 ‘깜빡’ 하고 주지 못한 날 그분은 착하게 웃으며 “Tidak apa apa(괜찮아요)”라고 했다. “출근시간 전에 미리 와서 준비하라고 하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1


는 건 너무 고용주 입장만 요구하는 것”이라던 남편 말이 떠올랐다. 그분처럼 “Tidak apa apa”라고 왜 흔쾌히 말하지 못했을까 후회한다. 나의 실수에 관대하고 상대에게 내 기준만 강요한 그날들을 반성한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비겁함을 내려 놓는다. 이 땅에 오기 전 화산과 지진 소식이 인도네시아 뉴스의 전부라고 착각했던 것처럼 고 용주와 피고용인 관계라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다.

한 번의 값진 경험이 전체 인상을 바꾸기도 한다. 선교사를 돕기 위해 나선 시타날라 한센인 마을 의료 봉사가 그렇다. 구글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아 물어물어 헤매다 도착한 마을 어귀에 서 꼬마들이 해맑게 인사하며 따라왔다. “안녕하세요!” 한국어였다. 한국에서 병원밥을 20년 먹 었지만 한센인을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당뇨합병증으로 발이 썩어 들어간 환자들, 수술 후 감염으로 배가 열린 환자들을 치료한 경험이 있었기에 담담할 수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발가락이 온전하지 않아도 그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발에 맞는 슬 리퍼를 구하지 못해 맨발에 까만 비닐봉지를 신고 다녀도 웃고 있었다. 마을회관 마당에 선풍기 도 없이 세 시간이나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플라스틱 의자에 쪼그려 앉아 상처를 치료했는데 힘들지 않았다. 그 웃음들 덕이다.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도와주러 갔다가 오히려 얻어왔다. 그 수많은 사랑의 눈빛들. ‘나는 얼마나 풍요롭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소유한 사람인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지 못하고 있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그들을 통해 한없이 낮아져 깨끗해지고 싶다. 한 달 전 장을 보고 나오는데 운전기사가 차문을 열다 말고 헛구역질을 하며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난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코로나19에 걸렸구나 싶었다. 평소에 마스크 잘 쓰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도 마스크를 내리고 다른 기사들과 대화하는 걸 목격한 게 떠올라 화가 났다. 그는 검사 받는 방법도, 어디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걸 외국인에게 묻는 게 답답했 다. “돈이 없다.”고만 했다. 집 근처 검사소에 데려가 유전자증폭검사(PCR)를 했더니 역시 양성이었다. 남편에게 정보를 얻어 보건소에 가라고 알려줬다. 출근하지 못하더라도 월급과 검사비용을 줄 테니 걱정 말고 푹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2


쉬라고 했다. 그는 혈액 투석 환자인 아내와 어린 세 딸을 걱정했다. 실제 가족 모두 코로나19 에 감염됐다. 그제서야 그의 삶이 머리에 들어왔다. 일요일 하루 쉬는 날 몸이 아픈 아내를 대신해 온 집 안 식구들의 빨래를 손으로 해야 하는 고단한 가장, 매일 열심히 일하는데도 늘 돈이 부족한 인 생, 그럼에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그 모습이 바로 인도네시아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와 그 가정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한 선교사도 물질 을 보탰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렇게 모아 전달해 준 금액이 신기하게도 치료비와 약값에 딱 맞 아떨어졌다고 기사 아저씨가 알려줬다. 기사 아저씨는 정부 격리시설에서 2주간 머물며 완치됐 고, 가족도 순차적으로 회복됐다. 기사 가족의 코로나 치료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땅의 의료 수 준은 열악하지만 시스템은 건재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코로나19 사건 덕에 기사 아저씨가 친구처럼 느껴졌다. 아저씨도 부쩍 수다가 늘었다. “(코로나19로) 쉬는 동안 딸들에게 요리를 해줬는데 맛있다고 했다”고 자랑까지 한다. 인도네시아는 나를 울게 한다. 두 달 전 해질 무렵, 마트 입구에 앵그리버드 탈을 쓴 엄마와 예닐곱 살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앉아 있는 것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내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 음료수를 고르는데 자꾸 그 아이가 눈에 밟혔다. ‘저 아이도 과자, 음료수를 좋아할 텐데 … 집에 가서 저녁 먹을 시간인데 이 시간까지 거리에 있는 걸 보면 인형탈 대여료를 다 벌지 못했나 보다.’ 우유와 한국 과자를 사서 빨간 지폐와 함께 쥐어주고 달아나듯 차를 타고 나오는데 기사 아 저씨가 “저기 아이가 인사한다”고 보라고 했다. 아이는 너무나 해맑게 웃으며 계속 손을 흔들었 다. 나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먹고 싶은 거 부족함 없이 사줄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 복한 엄마인가,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물 달라, 과자 달라 채근하는 내 아들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가, 인형탈을 쓴 엄마 옆에 앉은 저 아이도 분명 이 땅에 할 일이 있어서 태어난 귀한 생명일 텐데…’ 웃으며 손을 흔드는데 두 눈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속물 같은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 고민했다. ‘당장 오늘 저녁 먹거리만 해결돼도 세상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저 사람들이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 냉장고에 먹을 게 넉넉한 데도 장보기 목록을 적고 있고, 사계절 옷이 옷장에 가득한 데도 신상을 보면 사고 싶은 소유욕이 끝이 없는 내가 가난한 사람이 아닌가.’ 깨달음을 준 모자가 너무 감사하다. 그날 이후 지갑에 잔돈을 항상 준비하고 특히 저녁 무렵 거리의 악사나 인형탈을 쓴 사람을 보면 창문을 열고 “Semangat(힘내세요)”과 함께 마음을 전하게 되었다. 나누면 행복해진다. 거 리의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그들이 범죄자가 될 수도 있으니 그들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라는 ‘전 세계 기부 1위 국가’ 인도네시아의 바른 생각을 배워서 다행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3


인도네시아는 나를 웃게 한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울고 다니던 아들은 이제 여기서 고 등학교까지 마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적응했다. 주입식 교육이 아닌 토론식 수업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과제를 해야 하는 교육 방식이 아이에게 잘 맞는 모양이다. 한국의 상대평가 제도와 달리 타인과 비교할 필요 없이 자기 할 일만 성실하게 잘 해내면 되는 절대평가 방식이라 엄마 인 나도 마음이 편하다. 아이를 믿어주고 응원하며 기다려준 것밖에 없는데 잘 적응해준 아이에 게 고맙다. 인도네시아는 아이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게 해줬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아이도 행복하고 나도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일 년 내내 맛있고 싱싱한 과일을 값싸게 맛보는 것도 이 땅이 선사하는 행복이다. 요즘 망 고스틴이 제철이라 매일 저녁 세 식구가 도란도란 망고스틴 까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국에서 냉동 망고스틴을 맛본 아들은 얼린 게 더 맛있다고 하다가 요즘 생과일 맛을 알게 됐다. 아들 녀석이 말했다. “인도네시아는 맛있는 과일이 많아서 굶어 죽는 사람은 없을 거 같아요.” 내가 답했다. “그래, 여기가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르지.” 인도네시아에 와서 루왁 커피도 처음 맛보게 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밖에 못 나가니 집에 서 원두를 갈아 핸드 드립으로 마시는데 커피 원산지답게 다양한 맛의 원두가 많이 있어서 너 무 좋다. 아체, 수마트라, 토라자 등 하나하나 맛이 달라 좋다. 쌉싸름한 발리 원두에 꽃향기와 초콜릿향이 있는 플로레스를 섞어 마시거나 깊고 부드러운 루왁에 플로레스를 섞기도 하는데 무료한 요즘 소중한 재미다. 코로나 이후 여행을 못 가고 있지만 그 전에 갔던 코모도섬과 발리, 롬복은 너무 아름다웠다. 코모도섬의 핑크 비치만해도 예전에 갔던 버뮤다 핑크비치에 비해 훨씬 핑크색이 선명했다. 인 도네시아가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 나라인지 날이 갈수록 실감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한인 사회도 더없이 소중하다. 불혹을 넘어 타국에서 친구를 사귀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한국에서는 워킹맘이라 엄마들 모임에 낄 수 없었던 반면 이곳에선 함께 인도네 시아어를 배우고 아이들 양육의 어려움을 공유하며 끈끈한 동지애를 나누고 있다. 내가 정착하 는데 도움 받은 만큼 새로운 사람이 오면 언어 배우기, 쇼핑 꿀팁, 아이들 과외 교사 구하기, 가사도우미 구하기 같은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고 그 사람들과 또 친구가 됐다. 한인회와 한인 커뮤니티도 든든하다. 마스크가 귀할 때 한인회가 무료 배포한 마스크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한인들이 커뮤니티에 올려주는 정보를 얻어서 첩보작전 수행하듯 일시 귀국 후 호텔 격리도 잘 마칠 수 있었고 백신도 2차까지 접종할 수 있었다. 한인회와 대사관이 힘을 모 아 코로나 확진 한인들에게 구급약과 산소포화도측정기, 체온계를 보내주고, 방학 때 귀국했던 12~18세 미만 청소년과 가족이 백신 접종을 우선 받을 수 있게 애써준 건 특히 눈물겹게 감사 하다. 사실 나는 이중인격자였다. 백인에겐 한없이 너그럽고 친절하면서도 동남아시아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한국인이 있다는 걸, 나 역시 그랬다는 걸 고백한다. 이 땅에 오기 전 인도네시아 를 잘 몰라서 그랬다. 독학으로 한글을 배워 한국 소설을 번역하는 인도네시아인이 있다는 기사 를 보고 그들의 한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확인했다. 천천히 말해달라고 하면 착하게 웃으며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4


단어 하나하나 끊어서 친절하고 느긋하게 말해주는 인도네시아의 성품을 이제 안다. 단단한 편견의 껍질이 깨지자 비로소 인도네시아가 보였다. 그들을 그들 자체로 인정하게 됐 다. ‘다양성 속 통일(Bhinneka Tunggal Ika)’을 지향하는 인도네시아가 내 영혼을 깨운다. 인도 네시아의 3년은 40여 년 묵은 내 ‘오만과 편견’을 깨뜨렸다. 이 글은 반성이자, 성찰이자, 고백 이자, 감사다. 인도네시아의 선물을 모두 누리길 소망한다.

Epilogue. 이 땅에 온 후 1년간 남편을 원망했다. ‘잘하고 익숙한 일을 그만두게 하고 왜 이곳에 데려왔 냐’고. 불현듯 내 결혼 전 이상형이 떠올랐다. ‘똑똑하지만 겸손하고 나의 시야를 넓혀줄 수 있 는 사람.’ 글을 쓰면서 내가 이상형과 결혼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 역시 인도네 시아의 선물이다. 감사하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5


일반부 우수상 한인기업가 인도네시아인 특별상 PT. TAEWON INDONESIA

수필

함께 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Orang Normal dan Disabilitas yang Hidup Bersama 까리나(발리한국어학당교사, 발리)

인도네시아는 장애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한 다자간 협약인 장애인권리협약에 서 명한 국가 중 하나다. 인도네시아 국민에게는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 증진 및 보장하고 법의 관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보장할 의무가 있다. 장애인과 관련해 제정된 최신 법률은 2016년 법률 제8호(Undang Undang Nomor 8 Tahun 2016)이다. 법에 따르면, 장애인의 정의는 장기적으로 신체적, 지적, 정신적, 감각적 제한을 경험하기 때문에 환경에 대해서 어려움을 경 험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인권평등에 기초한 다른 시민과 상호 작용하는 데 완전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법은 장애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역 할을 한다. 법은 장애인의 권리를 강화하고, 이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한다. 법이 있지만, 여전히 장애인은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과소평가된다. 그들이 가진 한계는 그들을 약하고 무력한 그룹으로 간주하게 하고 도움만을 필요하게 한다. 사 람으로 존재하는 그들의 권리는 생존권, 양질의 일자리, 더 나은 교육 및 공공시설에 대한 쉬운 접근에 대한 권리지만, 종종 무시된다. 지금까지 장애인의 존엄, 권리, 복지를 대변하는 정당과 기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충분한 대변은 없었다. 정당과 기관의 충분 한 대변이 없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장애인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고 그들이 삶에서 불 평등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야 한다. 그들이 고립되거나, 차별을 경험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6


이러한 도움의 인식을 하고 있던 중에, 나는 9월 13일 《한인니문화연구원》(원장: 사공경)에 서 총괄해서 진행하게 된 장애인 시인 두 명의 격려금 전달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전달식은 Rumah Bisabilitas Denpasar에서 열렸다. 나는 전달식에서 한국어와 인니어 통역을 담당했다. 인도네시아인과 한국인의 언어 교환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언어 중재자로서 장애인이 행복한 사회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일깨워주는 많은 가치들을 통역 하던 중에 깨달을 수 있 었다. Rumah Bisabilitas Denpasar의 방과 책꽂이에는 시와 수공예품의 형태로 된 다양한 작품들이 줄지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어떻게?’ 이런 생각은 나도 모르게 장애인의 능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나의 사고방식 은 여전히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차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별할 수 없다. 실제로는 장애인의 능력과 재능은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과는 다른 차별 없이 높은 능력과 재능이다. 내가 항상 가 지고 있던 하나의 사고방식은 끔찍하게 잘못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고유한 방법이 있다. 마찬가지로 장애인도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고유한 방법이 있다. 장애인 의 능력에 따른 결과물은 비장애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물과 질적 차이는 있어도 존재적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애인들이 많 았다. 따라서 장애인도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며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Rumah Bisabilitas Denpasar 같은 현장에서 장애인 시인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장애인 시인이 지은 시를 직접 읽고, 낭독 할 수 있는 현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시민들 은 이 현장에 참여해서 바로 눈앞에서 낭독되는 시를 듣는 것이다. 그 자리는 시와 공예 등의 예술 작품을 통해 무한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자리다. 그러한 자리를 장애인에 게 제공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이번 전달식 자리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7


전달식에서 덴파사르 시청 산하 PKK(Pembinaan Kesejahteraan Keluarga: 가족복지기관)의 대표로 계시는 분(現 덴파사르 시장의 아내)의 말씀을 들었다. 전체 대화의 모든 요점은 기회를 열고 모든 장애인을 격려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활동을 통해 장애인들이 계속 일하고 자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씀이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 는 것처럼 장애인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도움과 격려 중 하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어 그들이 미래에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장애인의 생존권에 대해서 생각했다. 장애인은 생존권을 방어 할 권리를 얻는 데 장애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인도네시아에서 장애인 보호의 근거는 1945년 헌 법 28A조 (Undang Undang Dasar Tahun 1945 Pasal 28A) 조항에서 볼 수 있다. 생존권은 모 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다. 생존권은 협상할 수 없는 인권의 일부이다. 모든 사람은 생 명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생명에 대한 권리가 없으면 다른 인권도 없기 때문이 다. 장애인 취업의 장을 정부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장애인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 장애 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포용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이러한 포용이 우리 대다수 시민 정신의 근간이 된다면 미래에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이 편협함과 급진주의를 줄이고 궁극 적으로 섬 국가인 인도네시아 민족의 사회통합을 성장시키거나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8


일반부 우수상 발리 예술가 Sudirana 상

발리

소설

Bali 우지수(주부, 자카르타)

왕복에 348,000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왕복 항공료가 가장 저렴한 곳이었다. 인천에서 발리까지는 편도로 약 7시간이나 걸리니 언제나 동남아 여행지에선 항공료가 비싼 관광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십 년 결혼 생활에 해외여행은커녕 딱 한 번의 제주도 여행이 전부였던 혜영 부부에게 발리는 두 번 다시 못 가보는 꿈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번엔 웬일인지 다른 휴양지보다 4만원이나 저렴한 초저가로 나와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혜영은 발리행 왕복항공권을 예약했다. 발리…. 그래, 혜영은 발리에 가본 적이 있다. 그녀의 신혼 여행지였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넉넉지 못한 형편의 시댁에서는 혜영의 결혼에 단 한 푼도 보탬을 주지 못했다. 때문에 이제 막 입사 4개월 차인 기석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결혼준비를 했다. 친정부모는 귀한 딸을 시집 보내는 것이라 뭐든 다 해주고 싶었지만, 끝끝내 만류하는 기석의 눈치를 보며 혹시나 시댁에서 기우는 혼사라고 도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타박이나 하지 않을까 싶어 더 나서지도 못했다. 그래서 겨우 해줄 수 있는 것이 신혼여행 비용을 부담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결혼이 혜영은 뒤늦게 못마땅했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엄마가 더 해줘! 하려면 똑같이 해야지!” 혼수에, 집수리에 이미 여기저기에 목돈이 들어간 친정 부모의 지출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나름대로 저렴한 신혼 여행지를 고른 곳이 발리였다. 하긴 고르자면 얼마든지 저 저렴한 곳들도 많았으나 &#39;허니문&#39;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기본 금액은 앞자리가 하나씩 더 늘어났기 때문에 &#39;허니문&#39;이 아닌 일반 여행으로 예약을 했었다. 그렇게 하니 태국이나 필리핀의 유명 관광지 허니문 여행보다 훨씬 저렴해졌다.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풀빌라 정도는 다녀와야 하지 않느냐고 주위에서 떠들어대는 바람에 알량한 자존심에 구색을 갖춰 간 것이었다. 하지만 돈을 아낀 만큼 쓸데없는 시간을 더 써야 했다. 대나무공예 전문매장에도 끌려가고, 가죽공예 전문 매장에도 끌려가고, 향신료와 비누, 마사지 오일 등 컨셉이 불분명한 기념품들로 가득한 매장도 따라다녀야 했다. 4박 5일의 일정 중에 동행한 어르신들의 자식 자랑을 듣지 않고 혜영과 기석이 단 둘이서만 보낸 시간은 갑작스런 소낙비가 하루 종일 쏟아져 일행들과 협의 끝에 그날 일정을 모두 취소했던 단 하루뿐이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59


그 하루를 혜영은 잊지 못한다. 기석은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온종일 공주마마를 모시듯 혜영에게 맞춰주었다. 혜영이 기석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 밥 먹여줘? 당신이, 당신 혼자만 그렇게 착하게 구니까 다들 당신한테만 매달리는 거야. 우리는 뭐 넉넉해서 이러고 살아? 우리는 살만해서 이 꼴로 사는 거냐고! 우리가 제일 힘들어, 우리가 제일 불쌍하다구!” 불과 이틀 전에 혜영이 했던 말이다. 착한 기석은 혜영이 발악하는 소리에도 그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 부아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 착한 기석은 그의 부모가 생활비가 없다며 처연하게 하소연할 때도, 시동생이 사고를 쳐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만삭의 여자를 데려와 방 한 칸을 마련해 달라고 할 때도, 막내 여동생이 혜영은 평생 처음 보는 액수의 카드값 지로를 내밀려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도 그렇게 그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그들 모두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주었고, 그 답은 오직 혜영에게만은 불만과 울화가 터지게 하는 것이었다. ‘착한 사람이 밥 먹여줘?’ 혜영은 다시 한 번 속으로 뇌까렸다. 생각할수록 분이 올라왔다. 분이 올라왔지만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화를 낼 대상이 눈 앞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고 무작정 집을 나선 것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발리니? 사네 마네 하면서 너는 굳이 거길 가고 싶니?” 사정 아는 동네 친한 언니 미경이 힐책하듯 말했다. 그녀에겐 차마 돈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면 분명 “네가 안 써도 그 돈은 네 시댁에서 다 쓸 텐데 너 혼자 아등바등 아껴서 뭐하냐”는 잔소리가 이어질 게 뻔했다. 물론 뾰족한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신혼 여행지에 다녀와서 마음 다잡고 또 착하게 살아볼 작정이냐”고, “그럴 거면 네 신랑도 같이 데려가지 그러냐!”고 한 차례 더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친언니와도 같은 미경은 적어도 시누이처럼 남의 속을 긁는 소리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막상 오늘 아침이 되니 조심히 다녀오라고, 가서는 머리를 싹 비우고 딴 생각은 하지 말라며 굳이 20만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렇게 오직 한 사람의 배웅만 받고 혜영은 발리행 비행기에 탔다. 신랑은 까마득히 모를 일이었다. 애들은 오늘 아침 친정으로 보냈고, 친정 엄마에게는 동네 아줌마들끼리 여행을 가는 것이라 둘러댔다. 벌써 2년 전부터 계를 들어 모아둔 돈이라 안 가면 손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서방에게는 무조건 모른다고만 하라고 부탁해뒀다. 입이 무거운 혜영이 그 동안 띄엄띄엄 털어놓은 몇 마디 이야기에서 친정 엄마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구나 눈치를 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기석이 퇴근을 하고 들어오면 집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제일 먼저 혜영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혜영은 로밍도 하지 않고 3박 4일을 지낼 셈이니 기석은 &quot;해외 수신&quot;이라는 안내 멘트를 듣고도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혹시나 친정에 전화를 하고 싶어도 벌써 한 달 째 둘이서 대화를 않고 있는 마당에 큰 배짱 없는 기석에게는 그조차도 힘든 일일 것이다. 이틀째가 되면 궁금하고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기어이 친정에 전화를 걸겠지만, 친정엄마는 “모른다”고만 할 게 뻔하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0


‘당신도 한 번 답답해 죽어봐라. 마누라가 없어져 봐야 귀한 줄 알지! 그 좋아하는 시댁 식구들이랑 실컷 살아!’ 다시 끓어오르는 분을 혜영은 속엣말로 삭였다. 하지만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고 몸이 바닥에서 떠오르는 기분이 들 때 일순간 혜영의 기분도 함께 떠올랐다. 십 년 만에 타보는 비행기라 혜영은 어찌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따위는 생각나지 않을 만큼 이내 흥분에 사로잡혔다. 덴파사르 공항은 조그만 했다. 혜영은 모든 게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친숙하게 느껴졌다. 사실 혜영이 발리를 선택한 이유는 또 있다. 외국어라고 아는 건 몇 마디 인도네시아어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다정한 기석은 신혼여행에 앞서 인니어를 미리 공부했다고 했다. 매사에 열심인 기석이었다. 그런 모습도 혜영은 마음에 들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식구들 굶겨 죽일 사람은 아니다” 기석이 혜영의 집에 처음 인사를 다녀간 날 저녁, 친정아버지는 이 한 마디로 기석을 허락했었다. 혜영 역시 기석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을 높이 샀지만, 살다 보니 요령 없이 열심히만 하는 것 같아 그 역시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혼자 죽어라 열심히 일하면 뭐해! 일하는 사람 따로, 노는 사람 따로인데. 열심히 한다고 자기 회사 되는 것도 아니잖아!” 늘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기석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쌓이고 쌓여 도로 잔소리만 나왔다. 속상한 마음은 타박으로 바뀌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그럴 때마다 기석은 그저 한 숨만 내쉴 뿐이었다. 출국장을 나오자마자 스케치북만한 종이에 &#39;Lee Hye Young&#39;이라고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혜영이 예약한 리조트의 직원이었다. “슬라맛 소레!” 기내용 캐리어 하나만 끌고 나타난 혜영을 보며 직원은 ‘싱글’인지를 한 번 더 물었다. 자신의 단출한 짐을 끌고 가는 직원의 뒤를 따라가며 혜영은 ‘나는 어떤 여자로 보일까?’ 괜한 생각을 해봤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1


숙소는 우붓 시내에서 조금 들어간 산 속에 있다. ‘시크릿 가든 인 정글’ 낯익은 간판이 예의 모양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기석과 4박 5일을 함께 보낸 호텔이었다. 혜영이 발리행 티켓을 예약하고 다음으로 검색했던 것은 발리의 숙소였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남아라고는 하나 서울의 숙소 가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사이 더 큰 체인 호텔들이 여러 개 오픈을 했고, 겨우 방 한 칸 호텔의 1박 객실료가 100만원이 넘는 곳도 있었다. 숙박 포털 사이트의 추천 순으로 검색을 하고, 다시 인기도 순으로 검색을 해봐도 감히 혜영은 결코 예약 버튼을 누르지 못할 곳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한참을 뒤적이다 혜영은 검색어에 ‘시크릿 가든 인 정글’을 쳤다. 검색 결과에 예의 그 호텔이 떴다. 있었다. 객실이 겨우 16개 밖에 없는 작은 호텔. 이걸 호텔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대단한 퍼실리티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발리의 관광산업계에서 살아남아 준 것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1박에 124,000원, 물론 4박을 묵으면 왕복항공료의 두 배에 가까워지지만 하룻밤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호텔들이 즐비한 가운데에서 십만 원대의 리조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안내된 방에 짐을 풀고 호텔을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가 팔이 네 개인 코끼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조각상을 보았다. 직원들의 관리 덕에 이끼 하나 끼지 않은 모습이 예와 다름없었다. 그 때 메이드 복장을 한 직원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Halo! 그건 가네샤 여신상이예요” “이 조각상을 10년 전에도 봤어요.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왔거든요.” 그녀는 혜영이 혼자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가 사별이거나 하는 좋지 않은 일일까 봐 말을 아꼈다. 혜영이 그런 일은 아니라며 웃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요. 너무 기대하지도 말구요. 혹시 당신이 이곳을 혼자 찾은 이유가 있다면, 그런 일이 왜 당신에게 일어났는지도 고민하지 말고 다 내려놓으세요. 저 여신상을 보듯이 편안하게 자신을 바라보세요.”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2


그녀는 다시 자신의 길을 따라 사라졌지만 혜영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인생의 방관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볼 수 있단 말인가! 팍팍한 현실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모든 걸 내려놓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말이다. 혜영은 입꼬리 한 쪽만 올리며 나지막이 코웃음을 쳤다. 다음날 우붓 시내로 관광을 나왔다. 호텔에서 출발하는 셔틀 버스가 있어 편하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모든 걸 잊고 즐기기만 하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가고 친정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선물할 장식품과 머리핀을 한참 동안 둘러보았다. 주책없이 이 와중에 기석에게 어울릴만한 이국적 무늬가 프린트 된 셔츠도 몇 장을 골라냈는데,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한 혜영은 오랫동안 머뭇대는 것이 멋쩍어 여주인을 보며 말했다. “어렵네요. 다 좋아 보여요. 어떤 게 좋을까요?” “우리 할머니께서 당신을 보았다면 ‘고통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고통을 붙잡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선물을 고르는 건 즐거운 일이지 당신을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에요. 어느 쪽이 됐든 다 옳아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 자체로 즐겁거든요.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주는 거니까요.” 정말 그랬다. 고통을 붙잡고 있는 건 어쩌면 혜영 자신일지도 모른다. 가끔 손 벌리는 부모와 형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기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마음 약한 혜영은 시댁 식구들의 딱한 사정 얘기를 들을 때마다 기석 몰래 통장을 펼쳐보며 얼마 정도 내어줄 수 있는지 먼저 셈해보곤 했다. 여주인의 말대로 그 동안 혜영이 건네주었던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며느리이고 새 식구인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런 걸로 단 한 번도 생색을 낸 적이 없고, 공로를 알아주길 바란 적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이나마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인 것에 감사한 때도 많았다. 갑자기 머리가 텅 비는 기분이 들어 혜영은 보이는 대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거리가 보이는 창 쪽으로 붙은 바 테이블에 앉은 혜영은 자연스럽게 ‘발리 커피’를 주문했다. 곱게 갈은 커피가루를 그대로 물에 타서 휘휘 저은 뒤, 몇 분 후 커피가루가 가라앉으면 천천히 마시는 발리식 커피였다. 기석과 혜영은 이 커피를 맛보기 위해 인터넷에 소개된 유명한 카페를 찾아갔다가 작은 매장을 가득 메운 손님들 때문에 결국 그냥 나왔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발리 커피는 발리의 어느 카페에나 있는 메뉴였다. 점원은 발리커피가 처음이라면 이왕이면 따뜻한 커피를 추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망연히 창 밖을 내다보는 이방인을 위해 친절하게 에어컨 온도를 2℃ 더 내려주었다. 창문에는 짧은 문장이 적힌 몇 개의 포스터 같은 것이 붙어 있었는데, 마침 커피를 가져오던 점원이 말했다. “라양 라양 뿌뚜스 딸리냐(Layang-layang putus talinya),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라’는 뜻이죠. 인도네시아의 속담이에요. ‘저건 밀물과 썰물이 있게 마련이다(Air pun ada pasang surut)’는 뜻이지요.”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3


몇 장의 그림을 하나, 하나 가리키며 읽어주던 점원은 할 일을 해치운 듯 생긋 웃으며 미련 없이 계산대로 돌아갔다. 그렇다. 운명이라는 것은 사람의 욕심만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고난이 있으면, 내일은 또 기쁨이 찾아온다. 지금껏 살아온 삶은 그랬다. 늘 좋지도, 늘 나쁘지도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고난이라 할 만한 일은 그다지 없었지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또 기석과 뜻을 모아 계획한 일들을 하나씩 이뤄낼 때마다 소소한 즐거움은 수시로 찾아왔으니 혜영의 운명은 그런 대로 순탄한 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보다 진보적이고 발전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도 같았다. 텅 빈듯했던 머리는 다시 뭉글뭉글 구름 같은 것으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반면에 몸은 급속도로 나른해져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조식을 마치고 미리 예약한 호텔 내 마사지 샵으로 갔다. 이달 말까지 투숙객에 한해 반값 행사를 진행 중이라는 안내를 보고 망설임 없이 예약을 했었다. 발리에 가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마사지였다. 기껏 신혼여행이라고 와서는 몇 만원씩이나 하는 마사지를 둘이나 받는 게 아까워 결국 포기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표지판을 따라 열대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코티지에 도착했다. 미리 로비로 나와 혜영이 맞는지를 확인한 중년의 여자는 자신을 ‘베비’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라임과 소금을 담근 시원한 물에 먼저 발을 씻겨준 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몸 구석구석을 문지르고 눌러주었다. “목과 어깨가 딱딱하네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상황이 얼마나 나쁘건 간에 상황은 곧 변할 거니까요.” “저는 열심히 살아왔고, 그래서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요.” “저는 늘 타인의 삶과 비교하지 말라고 배웠죠, 해와 달이 서로 비교하지 않듯이 말이죠. 그들은 단지 그들의 시간대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에요. 당신도 당신의 영역에서 빛나고 있어요.” 혜영은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더듬더듬 늘어놓았지만, 정확한 말로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러면 정답은 뭘까요?” “그 답은 당신 스스로 찾아야 해요. 인생은 가장 어려운 시험이죠. 신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두 다른 시험지를 주셨어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남을 따라 하려고만 하면 틀릴 수밖에 없어요.” 혜영은 왜 하필 자기에게는 이처럼 어려운 시험지가 주어졌는지 원망이 들어 엎드린 채로 눈물을 흘렸다. 베비는 쓰다듬듯이 목 끝에서부터 손목까지 여러 번 쓸어 내렸다. “과거가 얼마나 힘들었든지 간에 당신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자신의 능력을 믿으세요. 분명히 당신은 강한 사람일 거예요.” 한 쪽 얼굴이 다 젖을 정도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탓인지, 베비가 위로하듯 온 몸을 쓸어내려준 탓인지 몸도 마음도 한결 개운해졌다. 방으로 돌아온 혜영은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작지만 매번 새로운 꿈을 계획했고 지난 날 동안 그 꿈을 차근히 이뤄왔다. 알뜰한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책임감 있고 성실한 기석이 있었기에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4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기석의

성격은

누가

봐도

칠순을

넘긴

연세에도

바지런히

일을

찾아다니시는 아버님과 자식들에게만은 헌신적이신 어머님께서 주신 것이다. 혜영은 남이 되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기석의 무엇에 불만이었는지. 그의 융통성 없는 우직함인지,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지극한 효성인지, 또는 그가 혜영에 대해 무리한 요구와 배려를 바라거나 비난한 적이 있는지. 부끄럽게도 그 어떤 질문에도 혜영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쁜 사람!’ 혜영은 기석이 그리워졌다. 대뜸 전화를 걸었고, 신호가 두 번도 채 울리기 전화 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영아,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어디야? 괜찮아?” 기석의 다급한 목소리에 혜영은 감정이 치밀어 올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자기야, 오빠! 우리 그냥… 딱 우리만 생각하면 안돼? 남들보다 우리 먼저 생각하면 안돼요? 나, 자기 한 사람만 보고 결혼했어, 자기만 믿고 결혼했어. 우리도 한번쯤은 남들처럼 우리 생각만 하면 안돼? 우리도 그렇게 살면 안돼? 그런데 나도 그게 잘 안돼, 그래서 속상해!” “그래, 그래. 아픈 덴 없는 거지? 괜찮은 거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기석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혜영은 자신이 아주 많이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반대로 자신은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자신이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제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몇 일만에 듣는 기석의 목소리는 웅웅대며 혜영의 귓속을 파고들었고 그것은 더욱 커다란 의미로 그를 그립게 만들었다. “당신이 무척 보고 싶어!” 혜영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울었고, 저 너머에서 그녀를 가만히 다독여 주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5


일반부 우수상 인문창작클럽회장상

수필

아버지의 삶 Kehidupan Ayah 이재현(현대자동차 책임매니저, 자카르타)

‘Macet Sekali’ 오늘따라 길에 차가 가득하다. 나의 짧은 인도네시아어에 운전기사는 그냥 웃을 뿐이다. 장황 하게 이유를 설명해줘도 어차피 내가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이후부터 시작된 차량운행 홀짝제 덕분에 한동안은 도로 사정이 조금은 여유로웠다. 덕분에 코로나의 유행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하며 지냈는데 오늘은 그런 억지 위로조차 허락되지 않는 날이다. 습관처럼 스마트폰 속 세 상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이 무료한 시간을 달래 줄 소식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오히려 마음만 답답해진다. 통행을 제한하고, 사람들 사이의 모임을 제한하면서 세상은 이전보다 조용해졌지만, 스마트폰 속 세상은 서로를 탓하고 비난하느라 이전보다 더욱 시끄러워졌다. ‘변이 바이러스, 백신 접종, 이동제한, 경기침체, 사람들의 시위……’ 오늘따라 이런 단어들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스마트폰을 얼마 보지 못하고 이내 화면을 꺼버리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오토바이가 참 많고 운전하는 사람들이 쓰고 있는 헬멧은 형형색색이다. ‘헬멧 종류도 참 다양하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네 식구가 함께 타고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온다. 큰아이는 운전 중인 아빠 앞에 앉아 있 고, 아빠 뒤에 탄 엄마는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있다.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맞다. 우리 가족도 그랬었지.’ 나의 아버지는 이런저런 장사를 많이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장사 품목이 자주 바뀌었다는 건 그만큼 한 가지에서도 제대로 재미를 본 적이 없으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중에 기억나는 한 가지가 배추 장사다. 소위 ‘밭떼기’라는 방식으로 어느 농부가 농사지은 배추를 밭 통째로 몽땅 사들인 다음 그것을 서울로 가져와서 트럭에 싣고 이 동네 저 동네를 오가며 파셨다. 초등 학교 저학년 때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배추밭에 대한 기억과 오대산이라는 단어가 항 상 머릿속에 함께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배추를 사 오던 곳은 강원도였던 것 같다. 배추를 수 확하는 시기가 되면 꽤 오랜 기간을 온 가족이 강원도에서 지냈었는데, 그때 임시거처와 ‘밭떼 기’한 밭을 오고 갈 때 가장 자주 썼던 이동수단이 바로 오토바이였다. 그때 나의 아버지도 항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6


상 앞쪽에는 나를 뒤쪽에는 어머니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몰곤 하셨다.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셨을까 아버지도 참……’ 지금 내가 내 아내와 아이를 그런 식으로 태우고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 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것이 마냥 신나기만 했었다. 그렇게 온 가족 이 함께 오토바이를 탔던 시절을 회상하다 보니 한국에 계시는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인도 네시아로 건너올 때, 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건네신 말씀은 ‘건강 잘 챙겨라’ 정도가 전부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몇 년을 타국에서 보내게 될 아들에게 전하는 인사로는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 이후로 나는 아버지와 긴 이야기를 나누 어 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반지하 전셋집을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던 풍족하지 못했던 생활과 항상 고생하시는 어머니 를 보며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참 많이 원망했다. 거기에 아버지는 항상 엄하고 무서웠기 때 문에 아버지에 대한 나의 반감은 점점 커지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나는 잔소리를 하시는 아버지께 ‘내가 알아서 잘 살 테니 더는 간섭하지 마세요’라고 날을 세웠었다. 그 말이 서운하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당시 나름대로 공부를 잘했던 나를 그냥 놔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로 조언이든 잔소리이든 뭔가 나의 의사결정과 관련된 종류의 말씀은 일절 하지 않으셨다. 대학에 지원할 때도, 결혼을 준비할 때도 큰일이 있 을 때면 나는 항상 어머니와 상의를 했었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통해 그 결과를 전해 들으실 뿐 이었다. 그렇게 큰 교감이 없었던 아버지인데 오늘 창밖에 보이는 오토바이를 보니 그 아버지 생각이 난다. 사실 이곳 인도네시아에 와서 생활하는 동안 아주 조금은 이전보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 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을 통해 아버지가 한참 고생하시며 일하시던 70년대, 80년대 대한 민국의 모습을 그리고 내 아버지의 삶을 모습을 간접적으로 엿보고 있다. ‘너희는 정말 호시절 에 산다.’ 이런 어른들의 말씀에 나는 속으로 ‘모든 세대는 다 저마다의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닌 가.’하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과거보다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는 하지 만, 입사를 위해 100통이 넘는 지원서를 작성해야 하고 집을 사려면 10년 치 월급을 고스란히 모아야 하는 우리 세대를 과연 호시절에 산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보통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정말 어려운 시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 이 짐작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인도네시아의 생활상이 과거 우리나라가 못살던 시절의 모습과 얼 마나 닮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 아버지의 삶도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인도네시아 사 람들의 삶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차를 살 형편이 안되기에 온 가족을 오토바이에 태워 이동하는 차창 밖 아저씨의 모습. 돈을 벌러 한국으로 갔다는 옆집 가정부의 오빠 이야기. 내가 일이 있을 때면, 늦은 시간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대기하는 나의 운전기사 아저씨의 모습을 통해, 온 가족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강원 도를 누비셨던, 돈을 벌고자 가족과 떨어져 사우디아라비아 공사현장에서 몇 년을 보내셨던, 항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7


상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고 내가 잠든 뒤에나, 집에 오셨던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이곳의 보통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분명 그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 문이 아니라, 가족들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더 간절한 무엇이 있으므로 저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 각을 하게 된다. 아마 30여 년 전, 나의 아버지도 그때의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무 게와 고민 탓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있지 않으셨을까. 이제는 일흔을 훌쩍 넘기시고 시골에서 소일거리를 하시며 적적하게 지내시는 아버지에게 아 마 가장 궁금한 것은 먼 이국땅에 가서 사는 아들 내외의 소식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 으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없었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 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하고, 아무 말 없이 스마트폰을 통해 손주의 사진을 몇 장 보낼 뿐이었다. 오늘 퇴근길 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는 정말 과거의 아버지 에 대해 더 이해하고, 현재의 아버지께 더 다가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 안 아버지를 향한 마음의 벽을 세워왔기 때문일까. 그 다가섬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그 마음의 벽을 허물고 쌓여 있는 어색함을 털어 내려면 아직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곧 기회가 생겨서 한국에 가게 되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소주라도 같이 마시면서 하나씩 하나씩 그 어색함을 누그러뜨려 보기로 마음먹는다. 오늘도 쉽게 전화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죄송하지만 그래도 나를 대신해 우리 가족의 인도네시아 소식을 한국으로 전해줄 특파원이 있는 것은 다행이다. 무뚝뚝한 아버 지를 유일하게 활짝 웃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특파원. 오늘도 난 여섯 살 난 나의 딸에게 스마트폰을 넘기며,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봐야겠다. ‘Ayah, terima kasih.’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8


일반부 특별상 Lembaga Kebudayaan Betawi 상

수필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Tidak Mudah Luntur 손예리(일본어통번역사, 자카르타)

2021년 10월을 앞둔 지금, 여전히 마스크와 한 몸인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두 눈만 내놓고 바라봐야 하는 상황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문득문득 슬프기도 하다. 어린 딸아이를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작년 3월이 떠오른다. 자카르타에 공식적인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근처 마트의 생필품들이 하나 둘 동나기 시작하면서 내 몸과 마음은 바이 러스 공포에 서서히 무너져갔다. 그전까지 그토록 날 설레게 했던, 온통 이국적이고 생경한 이 곳 자카르타의 풍경이 하루아침에 두렵고 막막한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건강염려증과 불안감에 몸 상태는 안 좋아졌고 고립감마저 더해지니 이건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탈 출하듯 한국으로 일시 귀국했다. 한국에 도착해 차창 밖으로 수줍은 듯 피어있던 연분홍 벚꽃나무를 보며 비로소 마음이 놓이 고 편안해졌다. 베란다 너머 완연한 봄기운에 위로 받으며 한편으론 마음껏 이 봄날을 만끽하지 못하는 상황이 속상했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 자 연스레 짐작되었다. 코로나 이산가족이 되어 기왕 한국에 온 이상 그냥 흐지부지 있다 가긴 싫었다. 마스크를 쓰 고 아이와 함께 뮤지컬도 보고 전시회도 관람했다. 드넓은 공원과 한강 산책로를 원없이 걸었다. 내 눈엔 감사할 것들이 넘쳐났다. 어쩌면 코로나가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하 루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몇 개월 후 나는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코로나로 인해 비행기 타는 것도 입국하는 것도 일이 되었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 공항도 기내도 더 이상 설레는 공간이 아니다. 긴장하고 경계해야 하는 위태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피곤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 덕분에 평범한 일상, 건강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뼈저 리게 느끼고 있다. 2주의 격리 후 바깥에 나와 땅 위를 걸었을 때 느꼈던 환희를 잊을 수 없다. 밖을 나와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느꼈 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69


그 감사했던 순간들을 지나 지금 이 곳 자카르타에 돌아온 나는 이전보다 담대해지고 의연해 졌다. 코로나 감염자 수가 한국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내 마음은 편안했 다. 이슬람 기도 소리도, 새까만 밤하늘도 그저 다 반갑다. 한국에서 들고 온 마스크와 영양제 가 주는 마음의 여유가 크겠지만 어느 정도 파악한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 영향도 있 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6월, 감사하게도 외국인에게도 백신을 무료로 접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서 무사히 접종을 마쳤고 곧 좋은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설렘이 무색하게 며칠 사이 감염자 수가 급증하더니 주변 지인들의 확진 소식도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감염 이 아니라 가까운 이들의 감염 소식이 들리니 안타까웠고 여유를 조금씩 되찾은 그간의 일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섭게 퍼지는 코로나가 지긋지긋하다 못해 징글맞았다. 7월이 되고 코로나 감염자 수가 하루 2만 명을 훌쩍 넘어서기 시작하자 인도네시아 정부의 사회활동제한(PPKM)도 보다 강력해졌다. 8월 초부터는 만 12세 미만의 몰 출입 금지 조항이 새롭게 생겨 아이를 둔 부모로서는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감사함을 느낀다. 해외여행을 떠나기 힘든 이때에 나는 어쩌면 이곳에 여행을 온 셈이니 말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가 여전히 마냥 신기하고 새롭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왔을 때 매일 5번 울리는 기도 소리마저 이국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이 슬람 국가에 내가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확 들면서 설레는 여행자 세포를 다시금 일깨워주 기 때문이다. 기도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시간을 알 수 있어 또 좋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까지 는 멋진 카페와 좋은 노래들이 이렇게 많은지 미처 몰랐다. 인도네시아의 멋진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고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인도네시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매운 걸 정말 좋아하고 잘 먹는다. 감자튀김이나 피자, 햄버거, 심지어 스타벅스 샌드위치를 시켜도 기본으로 나오는 것이 그냥 케첩이 아니라 삼발 소스가 들어간 매운 케첩이다. 한국인 식사에서 ‘김치’를 빼놓을 수 없듯이 인도네시아에선 ‘삼발 소스’가 늘 나온다. 이렇게 매운 것을 좋아하는 인도네시아이다 보니 한국의 ‘불닭볶음면’은 지천에 널렸다. 현지 대형 마 트 어디서나 흔하게 불닭 패키지를 만난다. 불닭볶음탕면 등 종류도 이렇게 많았나 싶을 만큼 다양하다. 너무 흔하다 보니 되려 안 먹게 되는 것 같다. 그 밖에 춘천 불닭갈비, 신라면 수퍼 스파이시면까지 한국에서도 미처 보지 못 했던 매운 라면들이 쭉 늘어서 있어 시선을 잡아끈다. 어릴 때 한국인들만 매운 것을 잘 먹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내가 그저 몰랐던 것일 뿐이다. 더 ‘배달의 민족’이고 더 ‘매운 걸 잘 먹는’ 인도네시아를 매일 경험한다. 그래서 나는 외국에 나와서 보고 느끼고 알아가는 것이 좋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이해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0


의 지평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하루도 외국에 있다는 것 자체로 신선한 자극을 받고 발견하고 감동하는 것들이 늘 나타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하루하루가 그래서 내겐 선물 같다. 다른 언어와 낯선 풍경이 우리에게 주는 긴장과 설렘. 서울과 똑같은 24시간일터인데 시간의 농도와 밀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단 며칠을 있어도 누군가는 인생의 방향을 새로이 정하 고 시각과 관점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머물 듯 여행하듯 하루하루를 지낸다. 인도네시 아 자카르타를 여행하듯 일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 지금 나는 인생의 특별한 경로를 지나고 있 는 셈이다. 어느새 4년의 주재기간 중 이곳에서의 시간이 1년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더 애 틋하게 느껴지는 자카르타를 마음 속 깊이깊이 담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 매일 여행하듯 아이와 다니던 자카르타. 그 순간이 지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든 후회 없이, 나답게 오늘을 제대로 살기, 코로나가 내게 알려준 것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1


일반부 특별상 Indonesia Korea Friendship Association 상

수필

또게의 침공 Serangan Tokek 배대호(한국어교사, 반둥)

새벽녘 아잔(Azan) 소리와 모기에 잠을 설치며 힘들어 했던 인도네시아 생활이 이제는 10 여년이 지나고 보니 아잔 소리도 귀에서 멀어지고 모기 또한 그러려니 생각하며 침 한번 바르고 만다. 그런데 요즘 우리 집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집 뒤에 작은 마당이 있고 그 뒤 담 너머로 작지 않은 공터가 있다. 이 공터에 대나무와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면서 우리 집을 덮고 있다. 이때부터 별의별 녀석들이 우리 집을 자기 집 안방 마냥 드나들고 있다. 함께 사는 녀석들 가운데 한 녀석을 소개해볼까 한다 “또게(tokek)”라 불리는 도마뱀 녀석이 주인 허락도 없이 살고 있다. 또게는 인도네시아에서 복을 가져다 주는 도마뱀으로 알려져 있고, 민간요법에서는 약으로 쓰이고, 의료학계에서도 귀한 약재로 각광을 받는 귀한 몸이다. 종류와 크기에 따라서 몇십만 원까지도 하는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이 녀석이 집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밤마다 울어대기 시작한다. 소리가....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예민한 나는 잠을 설칠 정도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녀석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놈이 이사를 갔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집 안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머리를 대면 잠드는 아내와 달리 3 층집을 짓고 나서야 잠을 자야 하는 나에게는 이 냄새가 고통이다. 그래서 원인을 찾을 때까지 작은 옆방에서 피난 생활에 접어들면서 냄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들쑤시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 방에 쥐가 있어! 어떡해!“ 소리치는 아내의 소리를 듣고 작대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나라고 해서 무섭지 않고 징그럽지 않겠는가? 그래도 남자라고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긴장감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라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2


아내에게 용감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남자의 허세다. 할 수만 있다면 아내가 잡아주면 더없이 고마울 텐데. 방에 들어서자 아내는 제 뒤에 몸을 숨긴다. 아내의 호흡에서 긴장감을 느끼며 나는 재빠르게 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닫고 손아귀에 힘을 주고 조심스레 침대 쪽으로 접근을 한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다. 침대를 옮기며 이쪽 저쪽을 살필 때 크기가 쥐보다 크고 긴 생명체가 재빠르게 몸을 피하는 장면이 포착이 된다.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에도 뒤에서 아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에 작대기를 툭툭 치며 앞으로 전진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속으로 끊임없이 외쳐본다. ‘제발 가라! 창문으로 도망가라!’ 외치는 마음속 말과는 달리 이놈이 내 쪽으로 달려온다. 이때 나는 기적을 보았다. 30 여년을 아내와 살며시 아내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도망을 가며 소리치는 장면을 처음 보았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살았는데 고작 도마뱀 때문에 남편을 두고 도망을 간다. 차오르는 배신감과 두려움에 작대기를 쥔 제 손이 허공을 갈랐다. 은혜였다. 배신감에 휘두른 작대기에 도마뱀이 와서 맞고 기절을 하였다. 와우! 무려 길이가 25cm 넘는 도마뱀이다. 이놈 또한 우리 집에 살고 있는 녀석이기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아니 죽일 용기가 없다. 기절한 녀석이 깨어나기 전에 비어 있는 앞집 나무에 또게를 올려놓고 쿵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또게라는 도마뱀으로 인해 아내의 기적을 본 후 3-4 일 동안 평안한 삶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였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며칠 후 평안을 깨뜨리는 또게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놈이 돌아 온 것이다. 도마뱀이 맞으면서 그렇게 외쳤던 모양이다. “I will be back!” 어쩌겠는가? 이것이 인도네시아서의 일상인 것을.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에 배를 뒤집고 누워있는 바퀴벌레, 냉장고 속에 들어가 죽어 있는 도마뱀, 과자 부스러기 하나에도 수없이 몰려드는 개미… 이제는 이런 것들 조차도 대수롭지 않은 듯 처리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인도네시아 생활에 편안해진 우리의 모습을 본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3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수필

전염병 시대의 행진 Parade Era Pandemi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어제 읽은 신문기사에서는 전기밥통 머리, 오래된 브라운관 TV의 몸통을 한 로봇이 골목을 누비 면서 소독약을 뿌리고 있었다. 수라바야의 한 박사가 지역사회에 기여 하고자 만든 코로나 방역 로 봇 델타의 이야기였다. 재활용한 가전제품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자가격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 과 비타민을 전해주며 사람 대신 사람을 돌보고 있었다. 로봇의 몸에서 만들어내는 온기. 가족이 아 닌 사람과 부대끼며 살던 코로나 이전과 다르게 가족 이외의 거리는 어느새 모두 2m 이상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떨어진 타국에 살면서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지내던 지인들, 이웃들은 서로에게 해가 될까 싶어 먼발치에서 인사를 하고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코로나가 시작되던 초기, 우리의 대화 말미에는 항상 “우리 코로나 끝나면 같이 여행가자”는 야심 찬 계획이 오갔었다. 하지만 몇 개월 동안 비슷한 대화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기약 이 없는 여행계획은 짜지 않는다. 이 전염병의 시간들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니까. 이 시간은 혼자 있는 아이에게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했다.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과 매일 화면으로 인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 절대로 익 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요가나 피아노 같은 온라인 클래스에 적응이 되고 아주 더딘 속도로 실력 이 늘고 있다. 한 달, 두 달만 참으면 헬스장에 갈 수 있을 거라 미뤄두었던 운동을 집에서라도 시 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실 력은 공간의 한계가 주는 답답함을 조금씩 열어내 생각보다 큰 성취감을 주었다. 코브라 자세를 해 도 더 이상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지 않았고 매일 20분으로 시작했던 요가는 30분, 40분으로 집중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이는 악기를 전혀 다루지 못했다. 나도 남편도 음악에 소질이 없을뿐더러 어릴 적 무서운 피아노 선생님으로부터 엄격하게 배웠던 좋지 않은 기억에 선뜻 아이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하지 않았다. 어 느 날엔가 아이가 티브이에서 나오는 가락을 응얼거리다가 먼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말했다. 그 렇게 음악에 통 소질이 없는 우리는 아이가 응얼거리면 치고 싶다는 그 곡에 피아노 건반이 몇 개 필요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온라인으로 가장 저렴한 전자건반을 주문했고, 피아노를 게임처럼 재미있 게 배울 수 있다는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했다. 일주일 동안 신나게 따라 치던 아이는 선생님이 필요 하다고 했다. 어차피 온라인 수업이면 거기서 거기일 거라며 피아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학교 종이 땡땡땡’이나 몇 번 치고 싫증 낼 줄 알았던 아이는 1달도 채 되 지 않아 응얼거리던 그 곡을 외워서 치기 시작했고 하루 대부분을 시간을 피아노와 보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4


형제가 없이 혼자 있는 아이에게 피아노는 놀이였고 답답한 세상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세 계였다. 더 많은 건반이 필요하다는 아이의 성화에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한 가장 저렴한 전자건반 을 2옥타브가 더 있는 전자피아노로 바꾸어야 했다. 아이는 자신이 직접 보고 피아노의 소리를 듣고 정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악기들을 모아놓고 파는 블록엠의 한 상가에서 커다란 전자피아노를 사서 고박스와 함께 돌아왔다. 아이는 갈색 빛이 도는 피아노에 ‘브라우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의 피아노 솜씨와 더불어 같이 느는 것은 내 음식 솜씨였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에 나는 한 번도 해외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랬기에 먹고 사는 문제를 지금처럼 고민한 적이 없었다. 서울의 내가 살던 아파트 앞에는 몇 걸음만 걸어가면 4페이지에 빼곡히 적힌 메뉴가 있는 음식들의 천국이 있고 지하슈퍼 옆에는 매일 메뉴를 바꾸어서 저렴한 가격에 파는 반찬가게와 백반식당이 있어서 굳 이 식재료를 사다가 냉장고에 두지 않아도 됐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외식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 은 한국의 맛에 가장 가깝다는 한식당과 유명한 현지식당을 찾아다녔다. 서울이 음식의 천국이라면 자카르타는 세계음식의 천국이었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끄망 지역에는 다양한 종류의 레스토랑이 많았다. 음식의 가짓수에 놀라 입이 떡 벌어지고 눈물을 쏙 빼도록 매운 인도네시아 빠당식당, 야외 간이식당이라는 ‘와룽’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터키 현지의 고급 식당에서 먹는 분위기를 낼 수 있 는 터키식당, 항아리처럼 생긴 담배통에 각종 향기를 넣은 물을 넣어 피우는 인도식 시샤카페, 라틴 댄스 기획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멕시칸음식점, 그리고 한국에서 쉬이 접하지 못했던 네덜란드 식당에서 네덜란드식 크림수프나 작은 팬케잌 포포릿제 등을 그나 기분에 따라 골라 먹었다. 이런 세계미식기행 중에 터진 코로나 상황은 나를 부엌으로 끌어들여 묶어놓았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걱정하며 집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재 료를 사다가 씻고 다듬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전부터 주변에 오랫동안 해외살이 경험 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어오던 이야기들 ‘사먹다 보면 결국 해먹게 된다’, ‘해외살이 3년차에는 김 장을 하기 시작한다’는 말에 공감하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부엌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깻 잎, 배추, 상추 등 한국서 보던 채소들을 먹다가 나중에는 분찌스, 깡궁, 가는 셀러리 같은 한국서 자주 먹지 않았던 채소도 사다가 먹었다. 고추장이 떨어져 우연히 사본 삼발이 입에 잘 맞아서 밥에 비벼 먹기도 하고, 처음 먹어보는 과일들에 감탄하고 빠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좋은 재료, 조금 더 맛있는 밥상을 고민하고 아침에 눈 뜨면 하루 먹을 음식들을 계획하 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가족끼리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일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있었다. 삼시 세끼 잘 챙겨 먹는 것이 일생 최대의 과제인 우리는 식탁을 과감히 베란다로 옮겼다. 내가 사는 곳은 운이 좋게도 시야가 탁 트인 전망을 한 자카르타 고층 아파트로 베란다에 나가면 아파트를 둘러싸고 흐 르는 강을 따라 조로록 지어진 작은 집들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갈빛에 가까운 개울 가에 모여서 수영도 하고 연을 날리며 하루를 보낸다. 나의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함께 같 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집에서만 있지만 루프톱 카페 못지않은 전망. 해가 떨어지는 저녁이면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다. 분홍색, 보라색, 파란색. 하늘의 색깔이 매일 다르 다는 것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5


매일 덥다는 것만 알았었지, 어떤 날은 양말을 신고 싶을 정도로 선선하다는 것, 어떤 날에는 구 운 김을 손에 쥐고 먹어야 할 만큼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도 몰랐었다. 사원에서 저녁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나는 요리를 시작한다. 퇴근한 남편은 밥솥에 밥을 한번 휘휘 저어 소복하게 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밥과 국을 뜨는 일을 남편에게 맡겼을 때 어떤 날은 평소 먹는 양보다 많이 담아서 남 겨 버려야 했고 어떤 날에는 너무 조금 담아서 밥솥까지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지금은 나와 아이, 본인이 먹는 양을 안다. 모두에게 각각 적당하게 담아다 준다. 아이는 보던 텔레비전을 끄고 숟가락 과 젓가락을 식탁에 놓는다. 어느 날은 숟가락과 젓가락이 또 어느 날은 포크와 나이프만 필요하다. 가족이 모두 아침에 먹을 것을 함께 정하기에 이미 어떤 것을 놓아야 할지를 미리 알고 있다. 아이는 오늘도 피아노를 친다. 어디서 보았는지 눈을 감고 느끼면서 건반을 하나하나 누른다. 하 나하나의 건반들이 아름다운 선율들을 만들어서 집안을 돌아다닌다. 알라 투르카. 터키행진곡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이 곡은, 아이가 처음으로 피아노를 알게 한 곡 이다. 터키행진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로 당시 빈에서 유행하던 터키풍을 가미하여 대중적인 곡이 되었다고 한다. 한 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긴장감 넘치는 연주를 지나면 웅장한 군대의 행 진을 연상시키는 귀에 익은 리듬을 만날 수 있다. 그 선율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전까지 아이는 연습을 반복했다. 집에만 있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즐기는 상쾌하고 긴장감 넘치는 행진곡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활기를 더해주었다. 엄마 행진이 뭐야? 아이가 물었다. 나는 행진은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걸어갈 때 그냥 가면 힘드 니까 함께 부르거나 듣는 경쾌한 노래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설명 뒤에 아이는 바로 말했다. 그럼 지금은 못 하겠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건 안전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지리한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요리를 하고 아이는 피아노를 친다. 터키행진곡에 맞춰 만든 우리의 저녁 메뉴는 마 늘을 넣어 볶은 깡꿍요리와 삼발을 곁들인 템뻬튀김 그리고 된장찌개이다. 누군가 처음 터키풍의 행 진곡을 피아노로 연주했을 때처럼 누군가에게는 어색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삼합만큼이나 친근한 조합이다. 소리가 집안에 하루 종일 퍼지는 날들. 코로나는 이렇게 우리 가족을 집에 묶어두고 살아보라고 하 고 있다. 그동안 밖으로 다니느라 집이 가족이 밥이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었냐 고 묻는다. 그리고 사람들끼리 모여 노래하고 행진하고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것이 어려운 지금. 그 때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 돌아본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6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그림자 소녀

동화

Gadis Bayangan 정지영(서울시교육청 초등교사, 자카르타)

- 차례 1. 어떻게 하지? 다른 아이를 따라가고 말았어! 2. 그림자 규칙 3. 삐뜨리(Pitri) 4.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멘탈 붕괴! 5. 슬라맛 말람(Selamat Malam) 6. 다시 내 짝꿍 채안에게로

1. 어떻게 하지? 다른 아이를 따라가고 말았어! “얘! 안 내리고 뭐해? 네 짝꿍 내리고 있잖아!” 누군가 재촉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후다닥 가방그림자를 챙긴 후 채안이의 뒷모습 을 보며 차에서 따라 내렸다. 차에서 내린 후, 내 앞에 서 있는 채안이처럼 손을 흔들다 차 속 에서 웃고 있는 진짜 채안이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나와 닮은 그림자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 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악~~~~~!’ 내 이름은 채림. 채안이의 그림자다. 12세 생일을 앞둔 얼마 전 아빠의 일 때문에 온 가족이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로, 여기 자카르타라는 도시에 오게 되었고, 오늘은 채안이와 처음 학교에 다녀온 날이었는데…… 맙소사! 채안이와 헤어지다니! 한국도 아니고 낯선 곳이라 혹시 채안이를 놓쳐버릴까 봐 온종일 긴장하며 잘 따라다녔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스쿨버스에서 잠시 마음을 놓은 바람에 그만 다른 아이를 따라 내리고 말았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7


내 눈 앞에서! 나의 운명의 짝꿍 채안이를 태우고 출발하려는 스쿨버스를 보고서도 나는 채안 이를 닮은 아이를 따라 손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이 아이의 그림자인 것처럼. ‘난 이제 어떻게 하지이이이이이~~~!’ “삐뜨리 바이~!” 스쿨버스의 기사 아저씨가 눈을 찡긋하며 인사하는 소리가 뒤따랐지만 이미 내 머릿속은 새 하얗게 되어 버렸다. 구름 한 점, 그늘도 없이 해가 쨍쨍한 이곳의 날씨까지 괜히 미워졌다. 나무나 빌딩 그늘 아 래였으면 어떻게라도 해봤을 텐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채안이와 헤어지다니! 아마도 멍하니 있 던 나를 내리도록 채근한 그 그림자는 채안이 또래인 이 아이의 그림자였나 보다. ‘스쿨버스에서 나와 채안이를 힐끗힐끗 훔쳐볼 때부터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 그 녀석의 정체 는 뭐야? 이유가 뭐지? 채안이 그림자가 되고 싶었나? 그림자는 짝꿍을 바꿀 수 없는데? 인도 네시아에는 한국과 다른 그림자 규칙이 있는 건가? 이 아이 이름은…… 삐뜨리라고 했었나? 이 아이는 어떤 아이지? 내일 다시 채안이를 만나 돌아갈 수 있을까? 난 이제 어떻게 하지? 으아 아악!!!!! ’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어차피 내 울음소리는 이 사람아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 니깐. 갑자기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나는 돌덩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 었다. 아닌가? 난 그림자니까, 무게가 없으니 마치 종이인형처럼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는 생각이 들었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가짜 채안이 아니 삐뜨리처럼 즐거 운 걸음걸이로 춤추듯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금은? 아니 오늘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내가 이 아이, 삐뜨리의 그림자가 되어버렸으니까!

2. 그림자 규칙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 엄마보다 조금 작은 키에, 조금 더 구릿빛 피부를 가진 상냥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슬라맛 소레~!”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삐뜨리를 맞아주었다. 어색 하지만 최선을 다해 삐뜨리를 흉내 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나를 보며 아주머니 뒤의 어른 그림자가 미소를 지었다. 삐뜨리와 아주머니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 내가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네시아 말로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도 잠시 삐뜨리의 발 밑에 쭈그리고 앉아 아주머니의 그림자와 그림자 언어로 이 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바양삐가 오늘은 너희 집으로 갔구나? 나는 삐뜨리 엄마의 그림자 바양이부라고 한단다. 바 양삐 이 장난꾸러기 녀석! 혹시 너에게 미리 말도 해주지 않고 그림자 짝꿍을 바꿔 버린 거니? 내일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혼내 주마. 그런데 너는 이 나라 아이 그림자는 아닌 것 같은데.” 눈가에 그림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꼼꼼하게 살펴보던 바양이부가 위로해 주었다. 인도네 시아에서는 나 같은 어린이 그림자를 바양안아낙(bayangan anak-어린이 그림자라는 뜻)이라 부르고, 그 바양삐란 녀석은 삐뜨리 그림자의 이름이며 호기심이 많은 그림자소녀라고 이야기해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8


주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무척 많고, 또 즉흥적이며, 장난꾸러기여서 바양삐가 학교에 입학한 이후 오늘처럼 다른 그림자아이를 집에 보낸 적이 벌써 여러 번이라며 덧붙여 말해 주 셨다. 내 짝꿍 채안이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나아진 나는 궁금했던 것들을 바양이부에게 물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그림자예요. 제 이름은 채림이고, 채안이라는 아이의 그림자예요. 그림자 규칙은 나라마다 다른가요? 제가 온 한국의 그림자 규칙에 따르면……”

그림자 규칙 (사람 그림자 편) 1. 아기가 태어난 순간 그림자도 같이 태어나 둘은 짝꿍이 되어 평생을 함께한다. 2. 그림자의 모양은 항상 짝꿍 사람의 행동과 같아야 하며, 빛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변한다. 짝꿍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나 모자, 물건들의 그림자를 잘 챙겨야 하고, 빛에 따라 물건의 크기와 모양을 바꿔 만들어야 한다. 3. 그늘이나 빛이 없는 어둠(밤) 속에서 그림자는 짝꿍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4. 그림자언어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음역대이고, 전 세계 그림자들의 공통언어이다. 5. 혹시 짝꿍이 바뀔 경우 반드시 3일 이내에 다시 원래 짝꿍에게 돌아가야 한다. ★ 중요 : 3일 이내 다시 돌아가지 못한 경우 짝꿍은 평생 바뀌게 된다. ★ 주의 : 3일 이내라도 바뀐 짝꿍 사람의 행동과 그림자의 모양이 다를 경우, 누군가(사람)에게 들킨다면 주인 없는 그림자가 되어 어둠 속에서만 살게 된다. 6. 그림자들은 종교가 없다 등 다른 규칙 이하 생략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 그림자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그림자 규칙 5 번을 떠올리며 바양이부에게 물었다. “그림자 규칙은 전 세계 그림자가 공통으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란다. 바양삐도 물론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바양삐는 삐뜨리를 아주 좋아해. 겁이 없고 호기심이 많아 자꾸 이런 일을 벌인단다. 내가 그림자 규칙에 대해 그리 일러줬는데도. 하지만 다음 날에는 항상 집으로 돌아오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다 가렴. 바양삐 고 녀석이 동작은 참 재빨라서 다른 사람을 기가 막히게 잘 따라하니 일단 너는 오늘 삐뜨리 동작을 잘 흉내 내 보렴. 참! 지난 번 바양삐가 채림이 너처럼 집으로 보냈던 그림자 아이는 5 번 규칙 때문에 계속 걱정하며 울었어. 몇 번 위험했었지만 결국 다음 날 학교에서 주인을 만나 돌아갔단다.” 바양이부는 위로인 듯 위로 아닌 위로 같은 말을 남기고 삐뜨리의 엄마와 식당 쪽으로 사라졌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79


한국에서도 그림자를 바꾸는 장난을 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서 그림자 친구들끼리 한 두 시간 짝꿍 사람을 바꿨었다는 그림자 모험담? 하지만 그림자 규칙 5 번 주의위반으로 주인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는 괴담을 듣고 나는 절대 장난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심지어 오늘 처음 만난 아이와!

3. 삐뜨리(Pitri) 삐뜨리의 방은 이층이었다. 삐뜨리를 따라 방에 들어갔더니 낯선 곳의 벽에 낯익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 같았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채안이도 좋아하는 블랙핑크라는 이름의 한국 아이돌 가수였다. 삐뜨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블랙핑크의 노래를 틀더니 서툰 한국어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스쿨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들은 첫 한국어. 갑자기 우리 집에서 날 걱정하고 있을 엄마그림자, 아빠그림자, 동생그림자 수림이가 생각이 나며 잠깐 울컥했지만 삐뜨리가 블랙핑크 안무를 시작하면서부터 곧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 마이 갓!’ 몸치였던 채안이와는 달리 삐뜨리는 아주 춤을 잘 추는 아이였다. 삐뜨리의 짝꿍 바양삐 동작이 재빠르다는 바양이부의 말이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현란한 춤 동작을 잘 하는 삐뜨리와 12년을 함께했다면 바양삐도 블랙핑크 안무 고수임에 틀림없다. 춤을 추며 살펴 본 삐뜨리는 채안이보다는 조금 더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그란 눈과 동그란 얼굴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20여 분간 정신없이 블랙핑크의 노래와 춤 아니 삐뜨리의 동작을 따라하는 나를 구해 준 사람은 삐뜨리의 엄마였다. 삐뜨리의 엄마는 우유 색의 음료와 크림색의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간식을 가지고 삐뜨리의 방으로 들어오셨다. 물론 바양이부도 함께. “아까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저는 몸치 사람 짝꿍과 12년을 함께한 몸치 그림자예요. 삐뜨리는 동작이 재빠른 편인데, 저 오늘 하루 잘 버틸 수 있을까요?” 바양이부에게 속삭이며 어느새 바양이부를 의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냄새는 대체 어디서 나는 거예요? 무슨 발 냄새 같기도 하고, 뭔가 상한 냄새 같기도 한데……” 혹시 삐뜨리의 엄마에게 내 서투름을 들킬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며 삐뜨리가 음료를 마시는 동작을 조심히 흉내 내면서 바양이부(아주머니 그림자)에게 이상한 냄새의 정체를 물어보았다. “이 크림색 과일은 두리안이라는 열대 과일이란다. 냄새는 좀 구리지만 맛은 아주 달콤하지. 부드러운 크림치즈를 얹은 고구마 맛이라고나 할까? 삐뜨리가 이제 먹는구나. 느껴보렴! 그리고 그 하얀색 음료는 시르삭 주스야. 건강에 아주 좋아.” 바양이부가 웃으며 설명해 주셨고, 그제서야 나는 지난 주말 가족들과 함께 처음으로 가본 인도네시아 마트에서 봤던 뾰쪽한 뿔들로 덮인 과일과 그 과일에서 났던 냄새를 떠올릴 수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0


있었다. 삐뜨리가 두리안을 맛보는 순간, 입 안으로 들어온 두리안 그림자를 느낀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지만, 냄새와는 다른 부드러운 달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양이부의 친절함에 마음이 좀 놓이고, 두리안의 냄새와 맛에 익숙해지자 천천히 삐뜨리의 방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삐뜨리의 옷걸이에는 긴 천이 여러 개 걸려있었다. “저 긴 천은 뭐예요? 이곳에 온 지 일주일밖에 안됐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목도리나 스카프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는 유독 더위를 타는 채안이를 떠올리며 물었다. “히잡이라고

해.

이곳

인도네시아에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슬람종교를 가진 여성들은 머리와 목 등을 가리기 위해 저 히잡을 쓴단다. 삐뜨리와 그 가족들도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는 무슬림이지.” 바양이부의 설명에 나는 아까 스쿨버스 밖 풍경들 중 히잡을 쓴 여자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식을 먹은 후 삐뜨리의 엄마와 바양이부가 방을 나가던 그 때 갑자기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양이 한 마리와 까까머리 남자애가 갑자기 삐뜨리의 방으로 들어와 삐뜨리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은 내게로. 삐뜨리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다.

4.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멘탈붕괴! 삐뜨리와 남동생은 손을 잡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나도 처음 만난 남동생 그림자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뛰었다. 남동생의 그림자는 심심했었는지 조잘조잘 말을 시작했다. “바양이부에게 들었어. 바양삐누나 오늘 또 다른 집에 갔다면서? 나는 삐뜨리 동생인 하리의 그림자야. 바양하라고 불러줘. 난 9살이야. 오늘은 삐뜨리와 하리가 마당에서 노는 수요일이야! 바양삐누나가 어젯밤에 내일은 좀 쉬고 싶다는 둥, 뛰기 힘들다는 둥 하더니만 결국 다른 그림자를 보냈네?” 바양하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삐뜨리가 왜! 오늘! 나를! 여기에! 말도 없이! 보냈는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나는 알 수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마당에서 삐뜨리와 하리는 무슨 포대자루를 입더니만 콩콩콩 뛰기 시작했다. 내 짝꿍 채안이처럼 나도 태어나면서부터 아파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 뛰어 노는 것은 절대 금지였는데 집에서 동생과 뛰어 노는 게 가능하다니! 삐뜨리를 따라 하리와 뛰어다니는 내 뒤통수에는 금방이라도 엄마의 “뛰지 마!”하는 잔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이건 발랍까룽이라는 놀이야. 개구쟁이 하리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지. 저 나무 보이지? 이 자루를 입고 저 나무까지 갔다가 다시 여기로 먼저 도착하면 이기는 게임이야. 하리는 자기가 지면 계속 고집 부리며 “다시! 다시!”를 외치곤 해서 보통 10번씩 하곤 해. 하리는 절대 지치지 않아. 그런데 삐뜨리도 절대 져주지 않아. 오늘은 몇 번 만에 끝날지 모르겠어. 이거 처음 해 보는 거지? 채림 누나 괜찮겠어?” 바양하의 걱정 어린 속삭임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포대자루를 입으며 조금 설레었다. 한국에서 채안이와 동생 수안이는 아랫집과 아파트 경비실에서 민원이 들어오니 절대 뛰지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1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늘 방에 앉아 블럭을 조립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놀았었다. 채안이가 학교에 입학한 후 5학년이 된 요즘에는 여러 학원에서 앉아만 있느라 정적인 동작만 주로 했는데, 오늘은 삐뜨리의 여러 동작을 따라하면서 힘들기도 하지만 몸으로 놀고 몸으로 즐겼던 유치원 시절이 생각났다. 하지만 발랍까룽을 5번 하고 6번째 시작할 때 설레었던 기분은 멘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으아악! 난 더 이상은 못 움직이겠어. 바양하! 얘들의 체력은 대체 어디까지야?” 나는 숨을 헐떡이며 바양하에게 물었지만 바양하도 정신없이 하리를 따라 다니느라 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사건은 7번째 시합에서 일어났다. 7번째 시합을 시작하고 목표 나무를 향해 통통통 뛰어가는 삐뜨리와 하리. 아직도 쌩쌩한 삐뜨리와 달리 지친 나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어 앞서가는 삐뜨리를 놓치며 넘어지고 말았다. 내 귀에는 바양하리의 의미 없는 외침만이 들렸다. “채림 누나, 어서 일어나! 그림자 규칙 5번!!!!!!” 짧은 순간 내 뇌리에는 지난 12년 동안 운명의 짝꿍 채안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채안이와 처음 걸음마를 연습했을 때, 커가면서 어린이집에서 그리고 유치원, 학교에서 채안이와 함께했던 즐거운 나날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난 이제 주인 없는 그림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게 되겠지. 그리고 채안이에게는 내가 아닌 새로운 짝꿍 그림자가 생기게 되겠지. 삐뜨리와 채안이는 같은 나이이고, 오늘 내가 착각할 만큼 체형은 비슷했으며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노는 것들이나 사는 모습은 꽤 많이 다르다. 2주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의 채안이는 학교를 마치면 영어학원, 수학학원에 다니느라 바빴다. 나도 늘 학원 버스를 타고 채안이와 학원에 가서 책상에 앉아 있었더랬는데. 집에 돌아오면 학원 숙제들을 하느라 바빴었고…… 아! 그런 생활들이 오늘의 나와 채안이를 몸치로 만들었나. 난 결국 삐뜨리의 동작을 따라하지 못하고 말았다. 난 그림자 규칙 5번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채안이를 사랑하는데. 우린 운명의 짝꿍인데. 7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나도 채안이도 자카르타 생활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는 매일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학원에 다니지 않아 나도 채안이도 좋았는데…… 내 가족들은 다른 곳에 있는데.’ 불과 3시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내 볼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난 결국 이제 여기서 한국도 아닌 일주일 전 처음 온 나라의 어둠 속의 그림자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찰라 내 그림자 위의 고양이가 눈으로 들어왔다. “야옹!” 고양이와

고양이의

그림자가

갑자기

위로

올라오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삐뜨리와 하리는 나무를 돌아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다 갑자기 뛰어든 고양이를 발견하고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둘이 아니 고양이까지 셋이 엉켜 넘어지고 말았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2


“채림 누나! 정신 차려!“ 나와 바양하리, 고양이의 그림자가 엉켜있는 사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삐뜨리와 하리의 모습도 살펴보았다. 그 둘은 숨을 헐떡거리며 그림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둘이 경기에 몰두하느라 나무만 보고 있었지 뭐야? 그리고 채림누나가 넘어진 그 순간 우리 야옹이가 넘어진 누나 위로 올라가 누나를 가려주었어. 아무도 이상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어. 아직 그림자 규칙5번을 어긴 건 아니야. 삐뜨리도 하리도 보지 못했거든. 우리 야옹이 말고는.” 다시 희망이 생긴 나는 고양이 아니 야옹이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며 다시 삐뜨리의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젠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거야!’ 정확히 11번째 만에 하리가 발랍까룽 시합에 이기고 나서야 나와 바양하는 지치지 않는 두 [철인] 남매를 따라 나무 그늘 아래에 앉을 수 있었다.삐뜨리는 힘들지도 않은지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계속 스트레칭을 했다. 그늘에서는 꼭 따라할 필요가 없었지만, 짝꿍 채안이 그리고 가족과 생이별 직전까지 간 나는 열심히 삐뜨리의 동작을 따라했다. ‘아! 여긴 어디고 난 누구지? 채림이가 나인지 바양삐가 나인지 내가 바양삐인지?’ 정신 없이 몰아친 일들 때문인지 나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던 찰나 이번에는 하리가 스키처럼 생긴 긴 나무 신발을 가지고 왔다. “그건 또 뭐야?”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바양하에게 물었다. “이건 라리까유라는 놀이야. 이 긴 나무로 만든 신발을 같이 신고 박자를 맞추어 걷는 거야. 이건 넘어질 때만 잘 따라하면 될 꺼야. 지난 번 바양삐 대신 여기 온 친구는 넘어질 때 제대로 따라하지 못 해서 아슬아슬 했지. 원래 주인이 발이 커서 그동안 잘 안 넘어져 봤다나? 그리고 그 때는 심지어 온 가족이 다 구경 중 이었어. 하지만 다행히 누구에게도 들키지는 않았지. 나도, 바양이부도 얼마나 놀랐던지. 들켰다면 그림자 규칙 5번에 따라 그 누나는 이미 어둠의 그림자가 됐겠지? 히히히” 바양하는 낄낄대며 말했지만, 나는 혹시나 다시 실수해서 그림자 규칙 5번 주의위반으로 채안이에게 돌아가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라리까유는 재미있었고, 삐뜨리와 하리는 그동안 자주 놀아 서로의 합이 좋아서인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둑어둑해질 무렵, 기다란 그림자로 모습이 변해진 우리는 그제서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림자 규칙을 잘 지켜서 꼭 내일 채안이를 만나 돌아가야 해!’

5. 슬라맛 말람 (Selamat Malam) 저녁 식사는 나시고랭이라는 볶음밥과 른당이라는 갈비찜 맛이 나는 요리였다. 그 사이 퇴근하신 삐뜨리 아빠 그림자와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새로운 요리의 맛을 즐기고 나니 어느새 식사시간이 끝나 있었다. 삐뜨리 가족들은 “슬라맛 말람!” 이라는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3


들어갔다. ‘굿 나잇 같은 인사인가? 아직 8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초저녁인데도 삐뜨리는 씻고 잘 준비를 하더니만 침대에 누워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오늘 새로 갔던 학교에서도, 그리고 이 곳 삐뜨리네 집에서도 온종일 바짝 긴장했던 나는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어제도 밤 10시까지 깨어있던 채안이의 생활 습관 때문인지 잠이 오질 않아 삐뜨리 옆에 누워서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다 열 번도 넘게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던 오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오늘 나는 채림이 아닌 바양삐로 몇 시간을 지냈어. 어쩌면 내 실수로 영원히 채안이를 못 만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 동안의 생활이랑 다른 많은 것들을 반나절 만에 경험할 수 있었어. 한국과는 다른 인도네시아의 음식, 놀이 등등. 처음에는 무척 낯설고 어색했지만 나름대로 즐겁고 해볼 만한 경험이었어. 다행히 경험으로 끝나고 내일은 꼭 채안이에게로 돌아가서 다행이야. 채안이도 보고 싶고 엄마 아빠도 보고 싶다! 앞으로 여기 인도네시아에서 얼마다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자카르타에 온 지난 일주일의 생활도 곱씹어 보았다. 한국과 다를 게 없던 높은 빌딩 숲 사이에 빌딩과는 너무 다른 허름한 집들, 그리고 냄새 나는 물이 흐르는 하천들을 보고 놀란 채안이에게 엄마가 하셨던 말도 생각이 났다. “우와, 한국의 70년대 풍경과 8,9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의 모습이 공존하는 곳이네!” 놀라워하시던 엄마와 채안이의 대화를 떠올리며 나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6. 다시 내 짝꿍 채안에게로 밖에서 들리는 사원의 기도 소리와 함께 삐뜨리도, 나도 잠에서 깨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일찍 잠자리에 든 삐뜨리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가방과 한국에서는 도시락이고 불렸던 스낵 박스를 챙겨 스쿨버스에 탔다. 한국에서는 9시까지 등교였기에 늘 7시 50분에야 일어났던, 여전히 이곳에 적응이 안 된 나는 하품을 하며 삐뜨리를 따라 스쿨버스에 올라탔다. “헤이~ 친구, 어제 어땠어?” 버스에 올라타는 나에게 말을 거는 그림자는 삐뜨리의 그림자 바양삐였다. 스쿨버스에는 채안이와 그리고 바양삐가 타고 있었다. 채안이를 다시 본 나는 반갑고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 어제의 발랍까룽 놀이가 생각나 바양삐를 노려보고 소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어둠의 그림자가 될 뻔 했단 말이야! 이 말썽꾸러기 바양삐 녀석아!” 삐뜨리와 채안이는 여전히 어제처럼 말없이 어색하게 앉아있었지만, 바양삐와 나는 오랜 친구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그 나무신발 라리까유 놀이가 문제야? 혹시 무슨 일 있었니?“ 바양삐는 궁금했던지 여러 가지 질문을 동시에 했고, 바양삐의 물음에 나는 어제 본 것, 먹은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4


것, 그리고 신기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하다 문득 되물었다. “넌 어땠어? 우리 가족 그림자들이 걱정 많이 하지 않았어? 혹시 이상한 짓이나 그림자 규칙을 어기는 행동은 안했겠지? 특히 중요한 그림자 규칙 5번 주의사항 말이야! “ “진정해 채림!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아. 난 이미 여러 집을 바꿔서 가봤거든. 그림자 규칙 5번 정도야 나에겐 지키기 쉬운 규칙이라구! 물론 한국인의 집에는 어제 처음 가 봤지만.” 바양삐가 으스대며 말하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그런데 김치찌개는 많이 맵더라. 난 너무 매워서 물을 많이 마시고 싶었는데, 채안이는 맵지도 않은 지 물을 한 모금도 안 마셔서 곤욕이었지. 어제 난생 처음 돼지고기 맛을 봤어.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거든. 그 동안 먹어본 고기들과는 다른 맛이던데? 그리고 난 일찍 자야

하는데

어젯밤

채안이가

늦게까지

블랙핑크

노래를

듣고

늦게

자서

지금

엄청

피곤하다구!“ 바양삐는 특별한 것이 없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곧 아까의 나처럼 우리 가족들과 우리 집에 대해서 나에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리 둘 다 하품을 해가며 각자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중에 학교에 도착했고, 나는 채안이와 그리고 바양삐는 삐뜨리와 각자의 교실로 향했다. “채림아, 오늘 한 번 더 어때?” “안 돼! 집에 갈 때 스쿨버스에서 봐. 오늘은 장난칠 생각 꿈도 꾸지 말라구!” 새 학교에 온 지 이제 겨우 이틀이 된 채안이와 그리고 나도 연신 두리번거리며 생소한 학교 풍광을 눈에 담았다. 어제는 너무 긴장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이 학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여서 다양한 생김새의 친구들이 많았다. 어제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서 두렵기만 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이곳 인도네시아에 대한 낯섦과 두려움이 좀 사라졌다고나 할까?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 살짝 기대가 되고, 이곳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처럼 채안이도 그럴 수 있겠지? 오늘 다시 만난 채안이도 어제와 조금은 다르게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멀어져 가는 삐뜨리와 바양삐를 보며 나도 채안이의 걸음에 맞춰 교실로 향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5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깜보자 사랑 Cinta Kamboja 배외순(주부, 찌까랑)

살랑살랑 흔드는 손길만으로 마음 속 사랑 보내지 못해 애잔한 마음 향기로 변해 그 향기 바람 곁에 보내 드리리

당신 찾아줄 양지 바른 땅 이 세상 끝 저 세상 문턱 애가 탄 마음 그리움 맴돌고 감실감실 자태 그 자리 가득

눈웃음 짓던 내 향기 생각나 술 한 잔 나누자 찾아온 당신 황망함은 몽글몽글 꽃이 되어 눈길 멈춘 그곳 사뿐히 내려가리.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6


브로모 Gunung Bromo 새벽이 어둠을 밀어내면 살포시 내딛는 개벽의 발등 붉은 자태 감도는 쁘나자칸

슬픔, 허탈, 녹아 내린 땅에 말발굽 소리 힘이 박차지면 마부 살림살이 출렁거린다.

가쁜 숨 몰아쉬며 한 계단 한 계단 정성으로 빚은 꽃송이 품에 안고 신들의 손짓 찾아 산등성이 오른다.

태고의 숨결 잔잔하게 뿜어지고 바람의 소리마저 딸꾹 멈추어버리자 항아리 속 꿈들은 하늘로 치솟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7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 인도네시아인특별상

나는 나대로

Inilah Saya 데위(인도네시아 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과 5학년, 수방)

그들은 말했다 여기서 벗어나야 잘 살게 될 거라고 자식들을 멀리 보낼 그들의 마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굳이 수준이 있어야 잘 사는 것인가 여기서 뭐 하면 잘 안 되는 거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들 이미 부정된 생각으로 살지 말라 어느 순간에도 위기를 복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야 멀리 가고 싶지는 않다 나도 여기에 쓸만한 사람으로 남을 거고 여기를 더 성장하게 만들 것이다 학교 안 가는 사람들을 줄이고 가족을 위해 굶어 살아야 하는 사람도 충분히 잘 살게 해 주고 싶다 밖에 있는 나랑 비슷한 나이를 가진 여자들을 행복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8


더 크게 해주고 싶다 여기서 태어나서 자라난 아이로 미래 아이를 위해 좋은 삶과 행복을 다 해주고 싶다 이제 용감해 질 시간이고 절대 두렵지 않고 나는 멀리 있는 같은 피를 가진 나비랑 더 잘할 것이고 높게 올라갈 것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89


학생부

수상작품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0


학생부 대상 주 ASEAN 대한민국대표부대사상

발바닥이 뜨거운 아이

소설

Anak Bertelapak Kaki Panas 성유림(JIKS, Jakarta Indonesia Korean School, 12학년)

“유독 하늘이 맑네. 그 시절처럼.” 호준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곧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가서 즐겨 마시는 SariWangi 홍차와 인도네시아 전통차인 메르모 차를 타서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따라 유독 어머니가 그립네요. 잘 지내시나요.” 이 말과 함께 호준이는 아주 어릴 적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마시고 있는 메르모 차가 자신을 과거 여행으로 이끄는 것처럼. 나는 친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내가 4살 때 함께 놀이공원을 가던 중 교통사고로 인해 두 분이 돌아가셨다. 어려서 뭘 잘 몰랐던 건지, 아니면 잊고 싶은 기억이어서인지 그 당시 외롭고 쓸쓸했던 기억이 없다. 다만, 그 순간 나에게 어머니가 영웅처럼 나타나던 순간은 기억이 난다. 어머니께서는 자신이 내 친부모님의 친구 분이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친자식처럼 키워주셨다. 피부색이 달랐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맨발로 이른 아침부터 엄마를 쫓아다니며 다른 집의 일손을 거들었다. 점차 따가운 태양의 눈초리에 어머니와 피부색이 비슷해졌다. 어머니를 닮아가는 게 참 좋았다. 그리고 초등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학교에 가는 대신 신문 배달, 빨래, 세차 등 그 나이 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뜨거워진 발바닥만큼이나 고단했지만,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께 많은 것들을 배울 생각에 종일 들떠있었다. 잠들기 전, 어머니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사칙연산, 그리고 수많은 위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황홀함에 잠겼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붉게 타올라서 두근거리고 온몸이 따뜻해져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많았다. “어머 세상에, 어린 애가 신발도 안 신고 대낮에 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래. 학교는 안 가나?” “얘, 쟤 걔잖아. 4살 때 엄마, 아빠 죽은 그 애. 저기 저 아줌마가 자식처럼 키운다잖아. 꼬질꼬질하다 정말. 역시 친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자식이란.” “쉿.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래도 애가 참 착하고 영특하고 바르게 잘 자랐던데.” “그래도 고아는 고아지. 우리 애가 저런 애한테 물들까 봐 걱정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1


“얘, 말해 뭐하니. 당연히 걱정이지. 우리 동네 품격도 떨어진다니까.” 그래, 맞다. 우리 동네의 사람들은 우리를 아니꼽게 쳐다봤다. 어린 애라고 귀가 없는 것은 아닌데 다 들리게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나를 흔들지 못했다. 나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어머니와 하루하루를 잘 살아갔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13살이 되었다. 나는 13번째 생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호준아, 이리 와서 앉아 봐. 우리 호준이 케이크 먹고 싶다고 했는데 케이크는 못 사줘서 엄마가 미안. 가게 문이 닫혀 있더라고. 대신 엄마가 우리 호준이한테 아주 멋진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 상자 한 번 열어볼래?” 통장들이었다. 어머니가 번 돈을 모아 마련한 나의 대학 등록금이 들어있는. 순간 눈앞이 뿌예졌다. 입술을 꾹 물어서 참아봤지만, 왈칵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나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볼이 화끈거렸다. 끅끅거리며 끓는 눈물을 삼켰더니 목이 부어올라 타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믿을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을 받고 나는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되어서 어머니께 효를 다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밤낮으로 초등과정을 익힌 나는 마침내 14살에 중학교에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가 입학식을 마쳤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살았다. 시간이 흘러 18살이 되었을 때 햇빛만이 비출 것 같던 나의 인생에도 눈보라가 불기 시작했다. “야! 호삥아! 너 고아라며? 으, 징그러워서 어떻게 생판 남이랑 같이 사냐? 소름 끼친다. 야, 그렇지 않냐 수영아?” “하하…. 그렇지. 너 엄마 그거, 네 진짜 엄마랑 아는 사이도 아니야. 알고 있었냐?” 그때다 싶었는지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나를 놀렸다. 머릿속이 온통 새까매졌고 끝없이 혼란스러웠다. 잠시 생각한 후에 깨달았다. 그래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이었다. 서로 말하지 않더라도 잘 느껴졌다. 여느 가족들과 다른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래. 어머니께서 나 말로는 표현 못 할 정도로 따뜻하게 사랑해주신다는 거, 당연히 잘 알지. 말 안 해도 곁에만 가도 어머니의 온기 덕분에 발바닥부터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소름 끼친 적 단 한 번도 없고 남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 진짜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셔.” “하, 참. 기도 안 차서. 뻣뻣하게 고개 치켜들고 큰소리치는 것 봐. 눈은 또 왜 저렇게 뜬다니.” “저렇게까지 흥분할 일인가? 역시 뭔가 있는 게 틀림없네.” 아이들은 내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듯이 저희끼리 마저 수군거렸다. 어디에서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올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말하고 나니 수많은 감정이 막을 수 없이 밀려 들어와서 나를 덮어버렸다. 결국, 그 날 학교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깊은 밤 불도 없는 깜깜한 숲 속에서 굳세어 보이는 나무에 기대어 생각했다. 나도 이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2


숲처럼 울창하게 이 나무처럼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때 마음을 먹었다. 나의 어머니가 어느 분이든 간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내가 반 친구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한 대로라고. 그때의 나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차가운 아픔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잠시 잠잠해진 폭풍이 다시 휘몰아칠 것만 같은 예감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도 어머니께서 활짝 웃으면서 대문을 열어주셨다.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포근하고도 따뜻한 어머니 냄새에 하염없이 안기고 싶었다. 그래서 얼른 문 앞에 신발을 벗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에게 어릴 적의 나처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가서 품에 와락 안겼다. 왠지 그날따라 내가 이럴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토닥여 주시던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이상했다. 당황스러웠다. 정적이 흘렀다. 한참 뒤에 어머니께서 입을 떼셨다. “호준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호준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먹먹해져 있었다. 나는 몸이 떨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사랑하는 아들, 엄마가 할 얘기가 좀 있는데 들어주겠니?”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병원에 좀 다녀왔어. 요즈음 숨이 좀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싶었어. 그러다가 요 며칠 동안에는 기침이 너무 나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병원을 갔다 왔는데 호준아…… 엄마가, 엄마가 우리 호준이랑 같이 이렇게 있을 시간이 3달 정도밖에 안 남았다네?” 어머니는 애써 입 꼬리를 떨며 웃어 보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볼에 눈물이, 아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에 아주 크고도 뜨거운 석탄이 턱하고 가로막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강하기만 한 줄 알았던 어머니였다. “그리고 호준아. 엄마가 옛날부터 하나 말할 게 있었는데, 이제 말하게 되었네. 너무 늦은 것 같아 미안하다, 호준아. 엄마는 너희 부모님을 몰라.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그냥, 사고 났을 때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야. 119 부르려고 차 가까이 다가가서 의식이 있는지 확인하려 한 거였는데, 우리 호준이 잘 부탁한다고 너희 부모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어. 사랑한다고, 아껴달라고. 나름 최선을 다 해왔는데 아무래도 부모의 사랑에 견주어 본다면 많이 부족하겠지? 우리 남은 시간 더욱 행복하게 보낼래? 엄마는 치료받으면서 시간 보내는 것보다 우리 호준이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데…… 괜찮을까, 우리 아들?”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 잊지 못할 거라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속에서 증오나 배신감이 피어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존경스러웠고 덕분에 삶을 선물 받은 것 같아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지쳐 잠들면서 나는 결심했다. 꼭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나에게 들려주신 위인들의 이야기와 본인의 행동으로 한 평생 내내 보여준 봉사, 사랑, 배려를 나도 나의 삶이 다할 때까지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홀로 꿋꿋이 버텨오는 그들을 위해 살아가야겠다고. 그들에게 나의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누구보다 빛나던 나의 어머니는 하늘의 별이 되셨다. 슬퍼서 한동안 나의 삶으로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3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힘들 때면 이제는 여기에 없는 어머니가 생각나서 괴로운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어머니가 내가 이렇게 축 처져서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힘을 내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한 바람을 불어주며 살아 계신다. 내가 힘들 때마다 나의 곁에서 언제나 묵묵히 힘이 되어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삶 속 곳곳에 어머니가 녹아 있었기에 나는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치열한 20대를 보낸 나는 본격적으로 꿈에 그리던 유엔난민기구 소속으로 일하기 위해 더 뜨겁게 30대의 초·중반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꿈에 그리던 이곳에 있다. 인도네시아의 따사로운 햇볕 아래 따뜻해진 흙을 온 발로 느끼며 어린 시절부터 나의 모든 추억이 담겨 있는 뜨거운 발바닥으로 서 있다. 아이들의 눈부신 미소를 보면 나의 마음마저 밝아지는 듯하고 사랑과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 행복하다. 눈물이 날 듯 행복해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Jun, come on! Aren’t you done with your tea? Ayo, berangkat!” 창밖에서 나의 동료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하루도 어머니께서 주신 따스함을 세상에 나누며 뜨겁게 살아가자고 다짐을 한다. 으레 아침마다 해오던 나만의 의식 같은 다짐이었으나, 오랜만에 예전의 일이 많이 떠올라 유독 느낌이 싱숭생숭했다. ‘오늘도 살아낼 수 있는 이 따스함이 어머니께서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이 아닐까?’ 오늘도 아이들과 적도의 나라에서 맨발로

뜨겁게 뛰어다닌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4


학생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수필

잎사귀 Daun 김채희(JIS, Jakarta Intercultural School, 10학년)

후덥지근하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느긋하게 불어와 마스크 쓴 코끝을 스쳤다. 전례 없는 코로나 19 유행에 이제는 필수품이 되어버린 강력한 KF94 마스크도 막지 못하는 바람이다. 한국에서 출발해 자그마치 7 시간을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고통 받다가 방금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 착륙해 녹초가 된 내 몸은 이 끈적한 바람이 불쾌하게 느껴질 만했다. 그런데 이 바람이 오히려 살갑게 느껴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게 인지상정, 햇수로 년째 이 같은 경험을 하는 나에게 자카르타 시내 한복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자기주장 강한 바람은 삼발 소스와 나시고랭과 함께 인도네시아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되었다. 매년 8 월 즈음, 뇌까지 녹여버릴 듯한 여름이 한창일 때,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간다. 같은 여름 바람이지만 자카르타와 서울의 바람은 천지 차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바람은 누군가 땀이 난 손으로 나를 다정하게 어루만진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지나간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건조하게 나를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바람과는 사뭇 다르다. 이 퉁명스러운 서울의 바람은 고층 빌딩 사이사이의 신호등을 가득 메운 초연한 표정의 한국인들을 참 많이 닮아 있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말도 걸지 말라는 듯이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잰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걷는다. 게다가 무더위에 못 이겨 살짝 찌푸린 미간도 빼놓을 수 없다. 멋있어 보이려는 게 아니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경쟁하는 우리 한국인에겐 진짜로 힘든 일이 많아서 모두가 웃음을 조금 잃어버린 표정이다. 한국 길거리에서 종종 마주쳤던 낯선 이들의 일상 속에 퍼져 있는 사소한 우울은 자카르타에 있는 국제학교에 전학을 오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다. 처음 전학을 오고 나서 별일이 아닌데도 웃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보며 쟤네는 왜 저렇게 실없이 웃고 다니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 혼자 웃지 못해 생긴 수많은 무안한 상황들을 겪고 나서야 그들과 다름을 깨달았다.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방에 무성하게 자란 야자나무가 제일 먼저 눈길이 간다. 엄청나게 두꺼운 줄기와 왕관처럼 풍성하게 돋아난 잔가지들과 똑 따서 부채로 써도 될 만큼 널찍하고 인심 좋은 나뭇잎들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연예인들이나 타는 줄

알았던 거대하고 튼튼한 밴에 몸을 싣고 시내를 조금 달려 길이 익숙한 동네에 접어들면 형형색색 화려한 자태의 열대 꽃들과 마주친다.

쨍한 빨강, 하양, 노랑 꽃잎들이 화려함으론

뒤지지 않는 으리으리한 저택들 사이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 꽃들의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5


이름은 잘 모른다. 생김새가 빼어날 뿐이지 한국에서 질리도록 보던 길거리 보도블록 틈에서 자라난 이름 모를 꽃들과 비슷한 격이니 말이다. 내가 12 년을 나고 자란 한국의 동네를 그려보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꽃의 종류가 열 손가락을 채 꼽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소소한 슬픔 중 하나다. 기억나는 건 높다란 빛 바랜 회색 외벽들과 빽빽하게 깔린 보도블록들. ‘이 얼마나 삭막하고 샘솟던 감성까지 단번에 말려버리는 환경인가?’ 꽃이라고는 아파트 화단에서 자라 내 발목 부근을 간지이던 민들레와 옹기종기 피어난 하얀 꽃, 그리고 봄의 시작을 알리던 흰색 벚꽃 정도이다. 하지만 이 벚나무들마저도 차가 쌩쌩 다니는 길가 옆에서 자라던 터라 정말 앙상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친구가 없었던 나는 가끔 길거리에 주저앉아 사람들 발길과 매서운 자동차 바퀴를 피해 조용조용 자라나던 꽃들을 구경하곤 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쁘디 바쁜 한국인들은 길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거란 걸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미모를

뽐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숨어

살던

꽃만

탄식하며

바라보다가

자카르타에서 살 게 되었다. 길가에 우람하게 피어나 존재감을 과시해대는 열대 꽃들과 야자수들을 보면서 나 역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쉽게도 척추측만증과 거북목은 고칠 수 없었지만, 자카르타의 삶은 의학적인 효과 대신 심리적 당당함을 불러일으켰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오며 가며 녹색 짙푸른 잎사귀들과 탐스럽고 윤기 나는 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다. 실제로 자연에 자주 노출되는 게 심리상태에 도움이 된다는 여러 과학적인 연구자료도 많다. 우리 학교 사진 교과과목을 가르치는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인도네시아는 정말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이며 이렇게 자연 속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축복이라

했다. 십여

년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연환경을 사진으로 담는 걸 좋아했던 낭만적인 선생님은 휴가차 발리에 놀러 왔다가 인도네시아에 흠뻑 빠져 자카르타에 정착했다고 하셨다. ‘선생님도 나와 같은 인상을 받았던 걸까?’ 나도 발리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플루메리아 꽃향기와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에 매혹되어 마치 만화 속 휴양지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에서 평생 여유 부리며 살아가면 어떨까?’하는 유치한 단꿈에 젖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마다 바글거리는 관광객들과 그 음식 주위를 배회하는, 어쩐지 그들과 닮은 파리떼를 보고 정신을 차렸지만. 어쨌든 나는 &#39;초긍정적인 마인드로 공부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선생님도 여기 국제학교에 다니며 처음 만나보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나는 뭐든지 냉철하게 비판하기 좋아하는 한국인이라서 선생님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과장된 찬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한동안 내 나이를 족히 뛰어넘을 듯한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들을 보면 일단 공포심부터 든 적도 있다. 인도네시아에 온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6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엄마와 나무가 즐비한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언가 둔탁하게 추락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내 팔뚝보다 두꺼운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단 몇 걸음 차이로 아직 낯설고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응급실에 실려 가야 하는 아찔한 상황을 피한 셈이다. 그 뒤로 몇 달 간은 꽤 진지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나무를 피해 다니려고 했지만, 나무가 무성해도 너무 무성한 인도네시아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깨닫고는 그만두었다. 나무와 친해지기를 실패한 후, 좀 더 만만한 꽃과 친해져 보려고 시도해봤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걸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나는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덩굴을 타고 고풍스럽게 자라고 있는 꽃들과 마주했다. 그런데 그 자태에 홀려 가까이 다가간 순간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공격적인 생김새의 빨간 개미들이 떼를 지어 줄기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12 년간 셀 수없이 많은 길을 오가며 벌레들을 봐 왔지만, 이토록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개미는 없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길에 멈춰 서서 바늘보다 작은 개미를 찾아가며 관찰할 여유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온갖 부정적인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인도네시아는 특히 이 나라의 자연환경은 메마른 일상에 찾아온 단비 같은 존재다. 느긋한 바람이 나에게 주문이라도 건 것인지 예민의 극치를 달리던 나는 인도네시아에 오고 나서는 이상하게 여유롭고 유해졌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입을 모아 말할 정도로 나는 인도네시아에 와서 180 도 바뀌었다. 시험 기간이면 항상 불안에 떨며 피가 나도록 손톱을 깨물었었는데, 이제는 나무와 꽃과 바람을 만끽할 줄 아는 낭만 있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아침 커튼 사이로 비치는 생기 넘치는 뜨거운 햇살에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커튼을 활짝 젖힌다. 이때 창문 사이로 보이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싱그러운 짙푸른 나무들이 좋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매섭게 두드리는 소리에 조금은 불쾌하게 일어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빗줄기의 품에 안겨 행복해 보이는 나무와 꽃들을 보며 나 역시 미소 짓게 됐다. 열대기후 나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기 넘치게 퍼붓고는 금방 자기 일을 끝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양에 자리를 넘겨주는 소낙비 역시 좋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1 년 365 일 하루도 쉬지 않고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이 가장 좋다. 누군가는 변화가 거의 없는 온도와 습도, 거리의 풍경이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는 인도네시아의 기후가 좋다. 한국의 가을과 겨울은 싱그러움을 잃고 쓸쓸해 보이는 나무들 때문에 나까지 묘하게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든지 내가 방심한 사이에 무언가가 변할 수 있다는 불안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으나 이곳 자카르타는 변치 않는 싱그러움에 항상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때때로 현실에 지나치게 안주하면 급변하는 요즘 사회에서 도태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일 년 내내 짙푸른 나무들이 나에게 주는 생기는 오히려 나에게 활력소가 된다. 아직 나 자신을 활달한 사람이라고 칭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줄어들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7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자연환경에 더불어 내가 변화한 원동력 하나를 더 꼽자면 올해로 3 년째 다니고 있는 자카르타 소재 국제학교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 학교 캠퍼스 역시 자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학교 캠퍼스 한가운데 엄청나게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이 학교에 전학 왔을 때 정 붙일 친구가 없어서 든든한 나무 보기를 좋아했었다. 하루는 과학 시간에 친구들과 나무줄기 둘레를 재는 활동을 했다. 나무가 어찌나 컸던지 네 명이 손을 맞잡고 빙그르르 둘러싸도 모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나무 밑에만 서면 머리에

떨어지는

수많은

벌레와

나무줄기에

터를

잡은

손가락만

불개미들

때문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이가 되었다. 교실과 교실을 오가는 길에는 키가 작은 풀과 나무들이 즐비하다. 겉으로 보기엔 마냥 아름답지만, 한 번은 친구와 함께 그 길을 걷다가 친구 머리에 주먹만 한 벌레가 붙어서 비명을 질렀던 경험이 있다. 야외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으면 긴 바지도 뚫고 피를 빨아먹는 강력한 모기는 말할 것도 없다. 크고 작은 벌레들 때문에 가끔 질색하는 일들도 생기지만, 건강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나무와 꽃 옆의 벌레들도 참 생기 넘친다. 이제는 여유로운 인도네시아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지만, 매년 방학 때마다 한국에 나가면 빡빡한 학원 스트레스에 못 이겨 역류성 식도염과 만성두통에 시달린다. 처음 이사를 와서 모든 게 촌스러운 나라라고 짜증을 내곤 했는데 3 년 동안 생활하다 보니 나의 불만들이 햇빛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자연의 섭리는 빈자리를 가만두지 못하는 법. 어느새 나도 햇빛을 받으며 긍정적인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3 년이라는 시간이 긴 시간은 아니다. 강산을

바꾸려면 10 년이나 걸리니까. 그런데 3 년이면 강산은 아니더라도 잠시 머물렀던 모래알이 자기 위치를 한참 벗어나 이름 모를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을 만한 시간이고 꽃이 지고 다시 피는 것을 수십 번은 반복했을 만한 시간이며 무릎 주변을 맴돌던 나무 묘목이 훌쩍 자라 어느새 키보다 커졌을 만한 시간이다. 유유히 흐르는 잔잔한 강물 같은 이 나라에서 나는 거친 변화의 소용돌이를 맛보았다. 이것은 내 성격, 가치관, 꿈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도 학교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모든 게 문득 낯설어지면서 다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3 년 전처럼 허망하게 흩날리는 시든 잎사귀들을 보며 나의 처지와 닮았다는 우울한 망상에 빠지지는 않는다. 대신 씩씩하게 내일을 맞이한다. 창밖에서 변함없이 푸르른 나무와 힘찬 바람이 나를 응원하기 때문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8


학생부 최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고통 로용

수필

Gotong Royong 이하늘(GMIS, Gandhi Memorial International School, 12학년)

“모두같이 한마음으로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단다”, 어릴 적 도덕 선생님께서는 Pancasila와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가르치며 늘 이 문구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4학년이었던 아이들은 고개만 열심히 끄덕이고 지우개 가루를 손으로 돌돌 말아 엄지와 검지로 튕기거나 책상 모서리에 낙서하며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슬프게도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모범생의 표본적인 태도를 보여야 했다.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던 나와 친구들은 노는 것 외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흥미가 없었다. . 선생님은 필기와 숙제만 잘해온다면 우리들의 유치한 장난들은 어느 정도 너그러이 눈 감아 주셨다. 어느 날은 너무 배가 고파서 선생님이 잠시 등을 돌린 사이, 감자 칩을 한 움큼 집어 입에 와구와구 쑤셔 넣었었다. 짭조름하고 달곰한 것이 입을 가득 채우는데 아뿔싸,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반 아이들 모두에게 특별한 숙제를 내주셨다. “Gotong Royong” 단어 두 개를 달랑 칠판에 써놓고 선생님은 점심 종소리에 맞춰 나가셨다. 학교 끝나고 선생님께서 엄마와 상담을 위해 나를 부르실까 며칠 동안 마음 졸였지만, 다행히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복도에서 우리와 마주치면 손을 흔들어 주셨다. 숙제는 그저 타자기에 손을 얹어 단어 몇 개를 치면 끝나는 일이었다. “Gotong Royong”, “함께 힘을 합친다” 라는 깊은 뜻이 있는 인도네시아 단어였다. 나는 숙제만 끝내기 급급했고, 검색 결과의 맨 위에 있는 문서 하나를 복사해서 숙제를 제출했다. 나는 함께 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 함께 함으로써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체육 시간에 옆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 공을 패스받는 것, 숙제를 깜빡하면 친구에게 부탁해 이틀 분량의 숙제를 단 10분 만에 끝내는 것, 밥상에 먹기 싫은 콩밥이 나오면 언니와 환상의 호흡을 발휘해 콩을 모아 엄마 몰래 버리는 것만이 내게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정의였다. 식전 기도처럼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은 이 “Gotong Royong”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래서일까, 1년 동안 참 많은 것들을 도덕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지만, 나는 이 “Gotong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99


Royong” 말고는 아무것도 시험지에 적지도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을 했다. 중학생이 되자, 도덕 과목은 다른 선생님으로 교체되었고, 전보다 더 난해하고 어려운 인도네시아 전통 예법과 법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조금 더 느슨했던 초등학생 시절이 그리워서 초등학교 도덕 선생님께서 자주 생각났지만. 새로운 도덕 선생님이 칠판에 글을 쓸 때면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지금은 낙서할 책상도, 지우개 똥을 돌돌 말아 장난칠 친구들이 없는 모니터 앞에서 상의만 교복으로 갈아입은 채 수업을 듣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가기 싫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막상 집에서 수업을 들으니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신이 나 같은 아이들에게 벌을 내리신 거라고 생각도 했었다. 코로나로 인해 몸과 몸이 점점 더 멀어졌다.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많은 것들이 제한되고, 눈만 빼꼼 보이게 카메라를 뒤로 젖혀 수업을 들을 때면 가끔 학교가 가기 싫다고 했던 말들을 정말 후회했다. 집에서만 생활하며 사람들과 몸이 멀어졌지만, 마음도 함께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닌 주변 친구들도 겪고 있는 일이었다. 몸은 자석처럼 침대로 이끌렸고, 마음은 사람들에게서 더 멀어져 갔다. 만나지도 못하니, 오해가 생기는 일도 쉽게 풀지 못했다. 짜증도 쉽게 내고, 문자로 채팅 창에는 입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이 술술 나왔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이어오던 활동도 녹슬었다. 코로나가 나를 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사회와 나를 대립시키며, 마치 은둔 생활을 즐기듯 새벽까지 홀로 모니터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려니, 망가져 가고 있는 나 자신과 대인 관계를 내버려두고 있을 때쯤, 즐겨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아시아인은 모두 코로나의 원인이다” 라는 글을 발견했다. 황당한 글에는 백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고, 나는 당연히 모두가 비판하는 댓글을 작성할 줄 알았다. 하지만 댓글들은 “꺼지라고 아시아인들”과 “인종차별을 멈춰라”, 이 두 가지로 나뉘었다. 순간 “Gotong Royong”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함께 한다는 것은 좋은 의미만이 아니라, 이런 곳에서도 쓰이는구나. 잘못된 방향으로 멋진 의미가 악용되는구나. 나는 18살 고3일 뿐, 특별한 것도 없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다. 누구보다 코로나가 하루라도 빨리 종식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고 간절하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작다고 느껴졌다. 기본 거리두기 수칙들을 지키고 학업에 열중하지만, 결국 나는 한 사람으로서 홀로 코로나를 맞설 수 없다. 코로나는 진정한 “Gotong Royong”이 필요한 문제다. 나는 모니터 앞에서의 생활을 하며 코로나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노력해야 해결될 큰 숙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다 같이 마스크와 페이스 실드로 단단히 무장하는 것이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0


아닌,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야 하는 일이다. 특정 나라나 인종의 이름을 바이러스 이름 앞에 붙여 나가며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것을 그만두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해 일 모두 “Gotong Royong”을 실천해야 한다. 망가져 버린 나의 인간관계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난 불화라고 생각했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기 바쁜 우리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채,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바쁘다. 지구 반대편에 누군가가 죽어도, 분노하는 것에만 요점이 잡히면 안 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코로나가 어디에서 시작했든, 현재 전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모두를 고통 받게 하는 코로나는 시민 모두가 힘을 합쳐 이겨내야 하는 시련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현재 이 팬데믹은 발전하는 의학 기술과 계속될 연구가 마침표를 찍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모아 노력하지 않으면 미래에 변종 바이러스가 닥쳐와도 똑같은 피해가 반복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깨달은 도덕 선생님의 “Gotong Royong”의 중요성은 이상하리만큼 머릿속에서 계속 울린다. 꼬여버린 관계들을 정리하는 것이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첫걸음이다. 그렇게 다시 마음의 문을 열고, 내가 먼저 손을 뻗어, 도덕 선생님께서 그러셨듯, 피하고 딴짓하는 아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Gotong Royong”의 진정한 의미와 소중함을 세상에 널리 퍼뜨릴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숙제가 아닌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마음에 새겨두고 살아야 하는 문구다. “모두같이 한마음으로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단다”. 마스크를 벗고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띠는 날까지, 모두가 “Gotong Royong”을 목표로 한다면, 코로나 말고도 그 어떤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1


학생부 최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수필

나의 우편 배달부 Tukang Pos Saya 박승헌(ACS, Anglo-Chinese School, 7학년)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다고 엄청난 힘을 가진 초인이 되거나 공부가 쉬워지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미흡하다’는 수식어가 붙는 초등학생에서 벗어났다는 것으 로 충분하다. 어떤 친구들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중간에 낀’ 처지라고 투덜대지만, 나는 교 복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인도네시아에서 슬기로운 생활을 한 지 7년차. 아기 띠에 젖먹이 동생을 안은 엄마 손을 잡 고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 내리던 일곱 살 소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야자수가 길거리에 즐비했고 낯선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만 보였다. 무엇보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동차를 타며 통학을 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한국에서는 집 근처의 유치원에 다니며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문방구와 제과점, 놀이터를 지나 집으로 왔 었는데. 얼핏 보면 한국의 시골 풍경을 닮은 인도네시아는 닮은꼴만큼 다른 꼴도 많은 나라다. 잔디밭을 기어 다니는 송충이와 비가 오면 집으로 스멀스멀 집안을 넘보는 거머리까지. 이상하 게도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보면 낯선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더니, 사춘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 마음의 날씨는 꽤 오락가락했다. 두 번의 이사와 한 번의 전학을 거치며 인도네시아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중요하다는 6학년을 온라인 수업을 하며 집에서 보냈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신기하게도 이런 마음은 졸업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좋아하는 외 삼촌네서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게 되어서다. “눈치가 보여 한국을 못 온다니? 무슨 걱정이야. 외삼촌이 있는데!” 외삼촌한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코로나19로 올해는 한국에 가지 않으려 했었는데. 유례없는 감염성 질병으로 가족 붕괴가 걱정된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외삼촌의 사전에 그런 단어 는 없나 보다. 한 달 일정으로 한국 입국 준비를 서둘렀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인도네 시아에서 PCR 테스트 검사지를 들고 인천공항에 입국한 날 아침, 엄마의 체온이 37.3도가 나 왔다. 한국에 나오느라 신경을 써서 몸살이 났는데도 엄마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눈사람처 럼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을 따라 공항을 빠져나갔다. 여덟 살짜리 남동생의 손을 잡고 엄 마와 함께 목적지를 모르는 버스에 탔다. 한참을 달린 버스는 인천공항 검역소에 도착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2


“절대 나오지 마세요. 참고로 문은 외부에서만 열립니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 우리 셋만 남겨졌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를 안심시키는 엄마 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도 불안한 눈치였다. 두 번째 PCR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6시간이 6일처럼 길게 느껴졌다. 밖이 어둑어둑해지고서야 음성 판정을 받았다. 부산행 기차에 탄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곯아 떨어졌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외삼촌 집에 도착했다. 단조로운 회색의 인테리어와 하얗다 못해 푸른 조명이 켜진 집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2주간의 격리가 시작되었다. 나의 외삼촌은 우체부다. 세상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사나이. 아침 7시가 되면 밤새 주차되 어 이슬을 머금은 우체국 차량에 하루치 일거리를 싣는다. 멀리 떨어져 자주 만나지 못하는 가 족이나 지인에게 보내는 마음과 크고 작은 택배가 트럭에 실린다. 요즘은 손 편지보다 택배 물 량이 많다. 열에 아홉은 택배를 보내는데, 간혹 편지를 배달하면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발견 한 것처럼 기쁘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작년까지만 해도 외삼촌의 일에 무심했다. 지금 보니 외삼촌이 얼마나 힘든 일 을 하는지 눈에 보인다. 이 위험한 시국에 자칫하면 코로나19에 걸릴 수도 있는데도 계속 사람 들을 만나야 한다. 한 번 이런 생각이 들자, 집에 오는 택배 기사님과 음식 배달을 해주시는 분 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나도 철이 좀 들려나 보다. 새벽같이 일을 나가는 외삼촌을 위해 외할머니는 더 일찍 일어난다. 혼자 사는 외삼촌을 위해 할머니는 새벽마다 김밥을 싼다. 외할머니의 정성이 깃든 김밥은 20년도 더 된 낡은 자전거에 실려 외삼촌 집까지 배달된다. 매일 다른 사람을 위해 물건과 소식을 배달하는 외삼촌에게는 외 할머니가 ‘고마운 배달원’인 셈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녀서 쓰겠냐? 너 챙겨주는 색시라도 있어야 내가 맘이 놓이는데...” 이른 아침, 이불을 둘둘 말고 자는데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대화가 들렸다. 외할머니는 끼니를 놓쳐 가며 일하는 외삼촌이 못마땅한 듯 한숨을 지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한번은 새벽길을 달려오다 넘어진 외할머니에게 외삼촌이 역정을 냈다. “어머니,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 요즘 널린 게 김밥 전문점인데. 편의점 도시락도 잘 나와서 그거 먹으면 속이 든든해요.”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 봐라! 밖에서 파는 음식과 집 밥이 같은지. 그 뭐냐, 에아이(AI)? 그게 암만 발전한다 해도 이 어미 손맛은 못 따라온다.” 외할머니는 고집을 피우며 보자기에 꽁꽁 싼 도시락을 내밀었다. 우체국 쇼핑으로 산 수삼 선물세트를 포장했던 보자기에는 ‘우체국 쇼핑’이라는 글씨가 선명 하다. 할머니는 왜 하필 촌스러운 보자기를 사용할까. 궁금해 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안다. 대견한 아들이 우체국에서 일하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라는 걸.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받은 국제미술대회 상장과 처음 백 점을 맞은 수학 시험지를 간직하고 있는 엄마처럼.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3


‘이렇게 바쁜데 외삼촌은 어떻게 점심시간을 쪼개 운동까지 하는 걸까?’ 외삼촌의 배달 차량에는 아령 한 세트와 악력기가 실려 있다. 외삼촌의 건강을 책임져주는 ‘듬직한 트레이너’들이라나. 방학이 되어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다 잠이 드는 나는 점심을 후딱 먹고 낮잠을 자기 바쁘다. 이럴 때 보면 외삼촌과 나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 ‘그나저나, 외삼촌은 왜 장가를 안 가는 걸까?’ 외삼촌은 쌍꺼풀이 짙고 코가 오뚝하다. 석고상으로 유명한 아그리파 장군을 닮았는데 인기가 없을 리 없다. 석고상처럼 콧대가 무척 높으면 모를까. 인도네시아로 오기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때 유치원에 외삼촌이 온 적이 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면서 직업을 소개해주는 시간이었다. 재무 담당인 아빠가 바빠서 대신 외삼촌이 온 거였다. 잔뜩 심술이 난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앞문으로 들어서는 외삼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기뻐서 눈물이 난 건지 콧구멍이 매웠다. 그날 외삼촌은 예전에 우 체부가 메고 다니던 빨간 우편물 가방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우체국과 우체부의 일 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내 어깨를 잔뜩 올려놓은 외삼촌은 별일 아니라는 듯 씩 웃어주었다. 인도네시아의 우체국 시스템도 상당히 발달 되어 있다. 약 4,000여 개의 우체국이 인도네시 아 전역에 산재해 있다. 우편물을 보내면 보통 2~3일 안에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다. 우편물 배송 시스템을 통해 우편물이 배송되는 경로도 추적이 가능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물량이 늘 어 2021년 6월부터 인도네시아 우체국은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문을 연다. 2학년 때 인도네시아의 우체국에 가 본 적이 있다. 다른 나라의 친구에게 종이 편지를 보내 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우리 반은 담임선생님을 따라 현지 우체국을 방문했다. 구멍가게처럼 아 담한 인도네시아의 우체국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외삼촌이 일하는 우체국은 운동장처 럼 넓었는데. 허름해 보이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복을 입은 아저씨와 아줌마가 앉아 계셨다. 유니폼 이라도 제대로 갖춰 입었더라면 조금 신뢰가 갔으려나. 책상에는 달랑 컴퓨터 두 대뿐이었다. 과연 내가 보낸 편지가 한국에 제대로 배송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 뒤 잊고 지냈는데 한 달 뒤 한국에서 온 우편물을 받았다. 전 세계의 우편배달 시스템은 디 지털 코드처럼 잘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유치원 때 단짝이 꾹꾹 눌러쓴 손 편지 와 그림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오랜만에 받는 손 편지도 그렇지만 친구와 연락이 닿아 무척 기 뻤다. 종잇장처럼 얇은 편지 한 통이 주는 ‘치유의 힘’이란 절대 얇지 않다. 2주 격리는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한 달의 짧은 일정 중 반을 격리로 보냈기 때문에 격리 가 풀리자마자 병원 투어부터 했다. 외갓집과 친가 고모 댁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 사이 인도네시아에 코로나19가 심각해지고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확진자 수도 백 명을 넘어섰다. 인도네시아의 1일 확진자 수가 3만 명을 넘어 5만 명으로 가파르게 치솟았 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코로나19를 통제하고자 외국인들의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우리는 어 쩔 수 없이 외삼촌 집에 더 머물게 되었다. 개학을 걱정하는 엄마와 달리 나와 동생은 한국에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4


더 머물게 되어 기뻤다. 그동안은 한국에 오면 돌아다니기 바빴다. 외삼촌도 늘 바빠서 잠시 얼굴을 마주치는 게 전부 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니 자연히 외삼촌과 함께 있는 시간도 늘었다. 밥도 같 이 먹고 게임도 하면서 외삼촌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엄마한테 혼날 때 외삼촌이 내 편을 들어줄 때가 좋았다. 하지만 삼촌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엄마 편을 들었다. 한 날은 외삼촌이 진지하게 말했다. “승헌아, 너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지 말고 외삼촌하고 같이 살자. 엄마랑 승우만 보내자.” 엄마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로 잠깐 고민했다. 그만큼 외삼촌이 좋다. 그래도 나는 가족 과 함께하고 싶다. 이제 엄마 키를 훌쩍 넘어선 내가 엄마와 남동생을 지켜줄 차례다. 두 달 반이 지나갈 때쯤 입국 금지가 풀렸다.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던 날 외삼촌이 공항까지 데려다 준다고 말하며 짐을 날랐다. 그동안 삼촌 집에서 몇 번 지내는 동안 이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와 나는 외삼촌을 빤히 쳐다보았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외삼촌이 말했다. “입국 금지로 조카들 고생하는 거 보니 내가 마음이 짠해서 그래. 승헌아, 지금 시간을 낭비 하면 나중에 남들 천천히 산책하며 걸을 때 땀나게 뛰어야 해. 중학생 되면 더 열심히 해라.” 그 뒤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삼촌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 달이 금방 가네.” 우리는 외삼촌 집에 세 달이나 있었는데. 세 달을 한 달로 느낄 만큼 외삼촌도 우리와 함께한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았나 보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말간 얼굴로 되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나는 외삼촌 집에 일주일밖에 안 있었는데!” 마음이 통했나 보다. 백미러로 흘끗 뒤를 돌아보는 외삼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입국장에서 손을 흔드는 외삼촌을 보는 엄마의 눈가가 빨개졌다. 엄마는 외삼촌이 계속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지만 나는 반대다. 내년에는 외삼촌 옆에 웃는 모습이 꼭 닮은 외숙모가 있었으 면 좋겠다. 외삼촌이 장가를 간다면 더 이상 한국에 나와서 외삼촌 집에 머물지는 못하겠지만 상관없다. 내 사전에도 가족에 대한 서운함은 없으니까. 혼자가 아닌 둘이 된 외삼촌은 진짜 슈 퍼맨이 될지도 모른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하늘에는 비행기들이 별처럼 뜨고 진다. 하늘의 길을 더듬으며 세상 어딘가로 향하 는 사람들과 소식들. 마음먹었던 것들을 할 수 없어 답답한 지금의 시간은 어쩌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잠시 한숨을 돌릴 기회인지도 모른다. 졸업 후에 새로 운 시작이 있듯이 곧 지금의 힘든 시간도 떠나보내게 되리라 믿는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5


학생부 우수상 한인기업가상 PT. TAEWON INDONESIA

선물

수필

Hadiah 인서연(SIS Semarang, Singapore International School, 11학년)

2007 년 9 월, 아빠는 엄마와 아기였던 우리 남매를 인도네시아로 데리고 가기 위해 한국에 오셨다. 엄마에게서 그때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태어나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했던 딸과 태어나서 한번 밖에 보지 못한 7 개월 된 아들을 인도네시아에 데려오기 위해 아빠는 혼자 외로움을 묵묵히 견디며 우리가 함께 살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우리가 살 집을 준비하고 엄마가 애써 준비한 짐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가며 땀 흘리며 정리하면서도 아빠는 웃었을 것이다. 한참을 만나지 못한 딸이 아빠를 못 알아볼까 봐 걱정하면서도 상상하셨다. “서연인 아빠를 단번에 알아 볼 거야. 내가 두 팔을 벌리면 달려와서 내 품에 꼭 안기겠지.” 몇 달만의 부녀 상봉이 있는 날 아침, 아빠를 맞이하기 위해 한껏 꾸미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는 단번에 아빠를 알아봤다고 한다. 큰 목소리를 내면 내가 놀랄까 봐 10M 앞에서 “서연아, 아빠야” 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우리 아빠다. 목소리는 아마 떨리고 있었을 거다. 그런 아빠를 내가 알아보지 못 할까 봐 엄마도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그렇게 기뻤던 날 아빠의 눈은 왜 그리도 촉촉히 젖어 있었을까?’ 열 일곱 살이 된 지금도 나와 아빠는 둘만의 산책을 즐긴다. “우리 서연인 아빠를 제일 좋아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데려다 주신다. 주말이면 가족을 위해 온갖 요리를 해 주신다. 가끔 오빠로 착각할 정도인 우리 아빠는 나의 가장 크고 소중한 영웅이다. 버카시에 첫 둥지를 마련했던 우리는 그곳에서 12 년을 살았다. ‘천사 같은 두 아이를 인도네시아로 데려오기까지 부모님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까?’ 한국에서 아토피가 심해서 고생했던 내 동생은 인도네시아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아토피가 씻은 듯이 나았다. 동생을 낳고 7 개월 동안 얼굴 부분에 집중적으로 있던 아토피로 인한 가려움 때문에 여러 병원을 다녀보고 치료약도 써 보았지만 차도가 전혀 없었다. 점점 더 심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갔던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우리 가족이 인도네시아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남아시아 쪽은 따뜻한 기후여서 아토피 발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 가면 나을 수도 있다고 했단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6


반신반의 했던 엄마는 아토피에 좋다는 피부연고를 잔뜩 챙겨서 가져오셨다고 한다. 일주일 이란 짧은 시간 동안 아토피가 완전히 나았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놀랍다. 한국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너무 다행이라며 기뻐하셨다. “아무래도 우리 영광이는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아야겠네.”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다들 기뻐하셨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오자마자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그 첫 선물 덕분에 더 빨리 행복한 마음으로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을 우리였지만, 일년 내내 우리가 좋아하는 물놀이를 할 수 있고 추위에 떨며 두꺼운 옷을 껴입지도 않고 늘 가벼운 옷을 입고 가볍게 생활을 할 수 있는 이곳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앞집에 아스카, 아비, 아라 삼남매가 이사를 왔다. 내 소꿉친구는 우리 가족이 인도네시아에서 받은 두 번째 선물이다. 우리 집 까까와 아스카네 까까가 친해지면서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하교 후에 늘 함께 놀았다. 소꿉놀이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음식도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의 동생들을 잘 챙겨주었다. 몇 년을 아무런 말썽도 없이 우린 아주 잘 지냈다. 우리 집 앞뜰에서 주렁주렁 열매 맺은 바나나 잎을 재료로 삼아 봉숭아 꽃도 몇 장 올려 놓고 물을 부어서 국도 끓이고 반찬도 만들어서 몇 시간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소꿉놀이에 집중하다가 땀이라도 나면 엄마가 만들어주신 풀장에 들어가서 물놀이도 하면서 해질녘까지 열심히 놓았다. 엄마가 동화책에서 읽어주었던 이야기 중에 소꿉친구란 단어가 있다. 아스카 삼 남매는 나와 내 동생에게 가장 친하고 소중한 소꿉친구가 되어주었다. 아스카 덕분에 인도네시아어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면서 어느새 인도네시아인과의 대화도 무리 없이 할 정도로 실력이 늘어갔다.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맛보게 된 미 고랭과 른당도 아스카와 함께 먹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아스카네 부모님도 우리 남매를 특별히 아껴 주셨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 남매와 가장 친했던 소꿉놀이 친구인 아스카, 아라, 아비를 잘 대해주셨다. 우리가 처음 인도네시아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을 때 우리의 소중한 친구가 되어준 아스카 삼 남매 덕분에 외롭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아스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반둥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연락이 끊어졌지만, 지금도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첫 번째 소꿉친구인 아스카 삼 남매는 인도네시아가 준 두 번째 선물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빠는 이직을 하고 마글랑으로 가셨다. 한 달에 두 번은 만날 수 있었지만 아빠가 떠나던 날 아침 난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내 눈물을 보며 아빠도 같이 펑펑 우셨다. 그 날 아빠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늘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아빠가 멀리 간다고 생각하니 매일매일이 우울한 기분이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7


때마침 내 사춘기도 함께 찾아와 복잡한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처음 우리 집에 왔던 까까가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새롭게 만나게 된 바하사 선생님이자 친구 같은 언니 유윤 까까다. 내가 힘들었던 순간을 묵묵히 지켜봐 주고 위로가 되어주었던 세 번째 선물이다. 나보다 4 살이 많던 까까는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집에서 일한 지 4 년이 넘어 5 년이 다 되어가는 까까는 K-POP 을 좋아하고 한국드라마를 좋아한다. 늘 나에게 언니처럼 편하게 대해주고, 같이 노래도 듣고, 이야기도 나누고 바하사 공부도 함께 도와주는 언니 같은 까까다.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리 집이 첫 일터였을 텐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일을 해야만 했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늘 웃으면서 우리 가족을 대해주고, 시골이 싫고 도시생활을 하고 싶어서 버카시로 왔다던 까까 유윤은 우리 가족이 스마랑으로 이사 오면서 떠났던 고향에 3 년 만에 다시 오게 되었다. 이사올 때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는 게 좋다며 흔쾌히 우리 가족과 함께 온 유윤 까까가 너무 고맙다. 스마랑에 와서 새로운 학교에 빨리 적응하고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것도 우리 까까가 엄마를 도와 나를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얼마 전 학교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바하사 스피치대회에서 까까가 함께 써준 원고로 열심히 스피치 준비를 해서 당당히 1 등을 했다. 우리는 너무 기뻐서 만세를 불렀다. 늘 나에게 “서연이 너는 바하사를 가족 중에서 제일 잘해.” 라며 항상 칭찬해 주던 까까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엄마에게 비밀 선물을 받았다. 음식 솜씨도 많이 늘어서 온갖 인도네시아 음식을 다 만들어주고 함께 먹어보며 우린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2 년 뒤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기 위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때쯤이면 우리 까까도 결혼할 시기가 다가 올 것이다. “서연이 네가 있어서 나도 즐겁게 일할 수 있고 힘이 돼.” 라고 쑥스러워서 말은 못 하지만 편지에 적어서 건네주곤 한다. 내가 떠난 뒤에도 우리 집에 남아 잘 지내다가 결혼도 하고 예쁜 아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와 내 동생은 부모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 일찌감치 꿈과 목표를 정했다. 지금은 그 꿈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한국어 공부도 소홀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엄마가 신청해 준 한국어 교육과정도 수료했다. 얼마 뒤에 있을 재외동포 온라인 캠프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늘 큰 사랑과 애정으로 우리를 잘 길러주시는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는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내가 처음 태어났던 순간부터 나의 성장과정을 담아놓은 비디오를 보니 내 모든 순간에는 부모님이 계셨다. 내가 옹알이를 처음 하던 날에는 알아 듣지도 못할 말인데도 대답해주고 같이 이야기 해주신 엄마, 첫 걸음마를 할 때 내가 넘어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면서 두 팔 벌리고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 엄마, 처음 동생과 손잡고 유치원 입학하던 날 어색함에 울던 나를 멀찌감치 서서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8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엄마, 내가 처음 자전거를 배우던 날에 나보다 어린 동생이 먼저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나갈 때 내가 슬퍼할까 봐 내 뒤에서 나만 잡아주시던 우리 아빠, 초등학교 졸업식 날에 꽃다발 한아름 안겨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셨던 우리 부모님. 나와 동생이 꿈꾸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고향과도 같은 인도네시아에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내일도 난 노력 할 것입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09


학생부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 특별상

수필

까뿍 해변을 달리다 Berlari di Pantai Kapuk 최형우(ACS, Anglo-Chinese School, 7학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0


“너 매일 집에만 있으니 짜증이 많아진 것 같아. 엄마도 그렇고. 기분 전환하러 형찬이네와 바닷가 다녀오자.” 중학생이 되며 말수가 적어진 내가 걱정되었던지 엄마가 나들이를 제안했다. 나는 원래도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중학생이 되며 말이 더 줄었다. 엄마와 내가 사는 집에는 고양이 ‘야롱이’의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작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발령이 났다. 내 학업을 걱정하던 부모님들은 당분간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며 모두에게 좋은 쪽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며 결정을 미뤘다. 우리 집 요리 담당이었던 아빠는 주말이면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법한 요리를 준비한다. 어떤 날은 안마당에 커다란 꼬치구이 기계를 빌려와서 파티에서나 먹을 법한 대량의 꼬치구이를 준비했다. 그러면 나는 야롱이와 아빠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말을 걸곤 했다. 다른 때라면 자동으로 “싫어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을 텐데 바닷가라니, 게다가 친구를 만난다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작년부터 학교도 가지 않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확 줄어서 심심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악몽을 자주 꾼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몸이 많이 약했다.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 점점 늘었다. 밤마다 커다랗고 육중한 문이 철커덕 소리를 내며 닫히는 악몽에 시달렸었는데, 그때의 악몽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은 캄캄한 방안에 갇히는 꿈이다. 어떤 날은 화려한 조명이 켜진 백화점을 구경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건물이 폐쇄되며 칼을 든 해골 병사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 엄마한테 말하면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고 가볍게 넘긴다. 내 친구의 얘기를 하고 지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변형찬. 나처럼 이름에 ‘형’자가 들어간다. 어떤 친구들은 이름이 비슷하고 항상 붙어 다니는 우리를 보며 형제냐고 묻는다. 형찬이네 집은 까뿍 해변과 가깝다. 저녁을 먹은 뒤 내가 자전거로 우리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처럼 형찬이는 바닷가를 거닌다. “우기에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아도 빗방울이 떨어지면 집으로 달리면 돼. 게다가 내가 보통 빠르냐?” 넉살 좋은 형찬이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굳이 거창한 우정이니 남자의 의리니 들먹이지 않아도 형찬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자카르타의 북쪽 끝에는 한국의 송도를 연상하게 하는 매립 신도시가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아름답다고만 알려진 까뿍 해변(Pantai Indah Kapuk, PIK)은 화교 세력들에 의해 대규모로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된 차이나타운이 까뿍에 오픈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형찬이네 가족과 까뿍 해변에 가게 되었다. 자전거 두 대를 트렁크에 실은 자동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토도독.” 빗방울이 도토리처럼 떨어지며 유리창을 때렸다. 하나 둘 떨어지던 빗방울이 순식간에 굵은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1


소금처럼 변해 유리창을 후려쳤다. 형찬이와 나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하다. ‘자전거를 못 타면 어쩌지!’ 다행히 빗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곧 눈앞에 까뿍 해변이 펼쳐졌다. 얼마 만에 보는 바다인지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모두 소나기가 지나간 쪽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걱정을 안겨주더니 소나기 덕에 더없이 맑은 하늘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해변에는 예상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도 갑갑하고 불안해서 집안에만 있다가 우리처럼 나들이를 왔을 것이다. 애완견도 입장 가능한 해변이라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집에 혼자 두고 온 야롱이가 생각났다. ‘목줄을 하면 또 난리를 칠 텐데.’ 그래도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애완 고양이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 살살 달래서 고양이 이동용 가방에 담아올까 보다. 소나기가 내려 모래가 축축했다. 혹시나 하고 들고 내린 돗자리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지만 큰 불편함을 못 느꼈다. 손이 불편해도, 신발이 젖어도 그런 것쯤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해변을 거니는데 야자나무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형찬이와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하는 게임을 하며 일부러 야자수 밑으로 다녔다. 까뿍 해변은 조금 구조가 독특하다. 바다 가운데 뚫린 길 때문에 커다란 바다가 조그만 바다를 안고 있는 듯 보인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있었는데 아직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다음에 왔을 때는 다리를 건너 끝까지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까뿍 해변에 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 그리고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를 타기 위해. 우리가 까뿍 해변에 온 이유처럼. 사회활동제한조치(PPKM) 4단계가 한참이라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 대여소 문이 닫혔을 거라 생각했는데,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린 것처럼. 작년에 코로나19가 지금처럼 심각해지기 전에도 까뿍 해변에 왔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려볼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자전거 대여소가 전부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이 행군을 했다. 왕복으로 10Km쯤 되는 길을 끝도 없이 걸었다. 친구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금방 끝이 보이겠거니 싶어서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었다니. 하필 검은색 긴바지를 입어서 다리가 땀범벅이 되었다. 같이 갔던 친구가 쫄쫄이 레깅스를 입었냐고 놀릴 정도였다. 끝이 안 보여서 절망했지만 조금만, 그리고 또 조금만 더 가자는 생각으로 걷다 보니 끝이 보였다. 달콤한 휴식도 잠시. 다시 왔던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해서 자전거를 싣고 왔었는데 자전거 대여소가 문을 열어 형찬이와 전동 킥보드를 한 대씩 빌렸다. 한 손으로 타기는 기본, 슬쩍슬쩍 두 손을 놓으며 타다가 결국 갈림길에서 사고가 났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2


갈림길이 나오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반대편으로 흩어졌다. 다시 갈림길이 하나가 되는 길목에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잡아도 소용이 없어 운동화로 바닥을 긁으며 속도를 줄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쿵 소리를 내며 형찬이와 나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형우야, 괜찮아?” 세상에! 형찬이는 게임에서 가장 센 캐릭터 ‘보스몹’처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를 감싸 안은 나는 바로 일어날 수 없었다. 다리에 충격이 좀 심하게 왔는지 움직일 수 없었다. “오른쪽 다리에 아무것도 안 느껴져. 어, 자전거 온다. 조심해!”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며 길가로 피했다. 절뚝거리는 나를 꼭 잡은 형찬이. 체육대회에 ‘다리 묶어 달리기’ 경주를 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점은 그때는 이기는 게 목적이지만, 지금은 함께 걸어 안전한 곳을 이동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기는 것도 좋지만 친구와 오랜만에 어깨동무를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길가에 앉아있으니 자전거를 타며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다가왔다. 다친 다리를 봐주며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충격이 가시길 기다리며 우리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으니 달릴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는 멈춰야만 볼 수 있다는 것들이 있다. 어두워진 길을 밝히기 위해 하나씩 켜지는 가로등, 바람에 흔들리며 마르는 빨래처럼 바짝 말라 더 푸르스름해진 나뭇잎들, 그늘이 져서 도드라지는 친구 녀석의 수염 자국. 갑자기 뱃속에 바람이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자 기운이 솟았다. “다시 출발하자!” “걸을 수 있겠어?” “뛸 수도 있거든!” 한 번 사고가 나서 그런지 돌아가는 길은 조심스러웠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피하며 매끄럽게 닦인 길로만 다녔다. 모험을 찾아 떠나듯 울퉁불퉁한 길을 골라 다니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전통 킥보드의 손잡이도 꽉 잡고서. 어른들에게는 조금 전의 사고를 알리지 않았다. 엄마는 형찬이와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느새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주차장으로 걸어오는 길에 차이나타운을 지났다. 차이나타운의 입구에는 자카르타의 옛 이름인 ‘BATAVIA’를 옆구리에 새긴 빨간색 트램이 쓸쓸히 서 있었다. 오랫동안 운행하지 않은 것들은 티가 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물건들은 금방 삭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타고 내리며 쓰다듬었을 손잡이는 윤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물건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외로움을 타는 걸까?’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3


화려한 보라색 램프를 몇 겹으로 두른 까뿍 해변의 쇼핑몰 역시 드나드는 사람 없이 한산했다. 물방울무늬처럼 규칙적으로 박힌 새하얀 전구를 외벽에 매단 고층빌딩들이 쇼핑몰 뒤에 우뚝 서 있었다. 먹자골목을 거닐던 우리는 겨우 문을 연 식당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과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19임에도 주말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듯했다. 우리는 집에서 챙겨온 음료수로 목을 축이며, 자동차가 주차된 동쪽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맹그로브 생태공원을 지나왔다. 까뿍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맹그로브 생태공원의 정식 명칭은 ‘따만 위사따 알람 맹그로브 앙께 까뿍(Taman Wisata Alam Mangrove Angke Kapuk)’. 몇 차례 외부의 지배를 받은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있지만 1939년 네덜란드 동인도

총독령으로

산림생태공원으로

지정되었다니

불행

다행이다. 그

인도네시아는 맹그로브 숲을 잘 보존하며 현재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각자

마음속으로

다음

행선지를

정하는

눈치였다.

바로

맹그로브

생태공원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보호에 적극적이다. 신남방 정책으로 관계가 우호적인 한국에서는 《한-인니 산림협력센터》도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다. 올 3월에는 세계 산림의 날(3월 21일)을 기념하여 《한-인니 산림협력센터》와 《환경산림부》가 공동으로 온라인 산림 사진 공모전을 개최했다. 학교 과제를 하던 중 인터넷을 통해서 산림 사진 공모전 수상작을 보았는데 전문가가 찍은 것 같았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내년에는 산림 사진 공모전 수상작들이 숲에 전시되었으면 근사할 것 같다. 화가인 엄마한테 말하니 엄마도 고개를 끄떡이셨다. “숲속의 미술관이 따로 없겠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땀과 먼지로 이마에 달라붙었던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일 년 내 여름만 지속되는 인도네시아에도 바람은 계절풍을 타는 듯하다. 아침에 지나간 소나기로 미세먼지가 닦인 공기도 더없이 깨끗했다. 오늘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4


학생부 우수상 KOICA 소장상

한센인의 미소

수필

Senyuman Orang Kusta 김민서(BSJ, British School Jakarta, 12학년)

여전히 학교 수업의 시작은 내 방, 컴퓨터로 시작합니다. 고 2 가 되고 나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공부에 대한 부담도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학교에서 CAS 활동을 계획하던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난민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이었습니다. 요즘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철수로 인한 탈레반의 점령으로 여러 아픈 뉴스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인도네시아 보고르에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진국도 아닌 자국민도 돌보기 어려운 인도네시아가 일부 난민을 받아들여 그들을 돌보고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히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도 한국 아이 돌 가수나 노래가 불리어질 때는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BTS 와 아이돌 그룹의 K-POP 이 알려지고 한국을 알리고 있으니 해외에 사는 나로서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흐뭇한 건 사실입니다. 반면에 작년과 올해처럼 코로 19 나 바이러스로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기에 나라 없는 난민, 그들은 얼마나 힘들게 지낼까라는 걱정도 들면서 난민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잘 계획해 볼 생각입니다. 내 나라 대한민국이 있고 부모님이 있고 이렇게 정규적인 학교에 다니는 것들이 새삼 감사하게 여겨졌습니다. 요즘은 특히 감사한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그전까지는 즉, 코로나 19 가 이렇게 세계적인 위기로 몰고 가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부모님의 자녀로 학생으로 그것이 바뀔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코로나 19 는 내가, 우리가 누리는 모든 평범했던 것을 순식간에 소중한 것으로 감사하게 했습니다. 내 몸이 건강한 것도, 내가 자유의지로 육체를 쓸 수 있는 것도, 다닐 수 있는 것도, 호흡하는 것도, 자연을 주신 것도, 공기를 주신 것도, 먹을 수 있는 것도, 부모님이 계신 것도, 나라가 있는 것도 모든 것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이 있다는 것도,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일상이 감사하게 여겨졌습니다. 코로나 19 로 인해 슬프고 아픈 현실과 더불어 감사를 제대로 알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5


생각하고 보니 중 2 일 때 처음 한센인 봉사를 할 때가 그러했습니다. 많은 어른들이 말하는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던 중 2 일 때 교회에서 의료선교도 갔고, 한센인 봉사도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의 권고로 시작했지, 3 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감사가 되고 있습니다. 첫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문진표를 작성할 때 인니어 이름을 듣고 쓰기가 어려워 “이름을 써주세요.” 하고 볼펜을 내밀어 드렸을 때,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건네는 내 손이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볼펜을

그때서야 한센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아줌마, 아저씨들은 족히 200-300 명이 되었습니다. 이 분들 모두가 어디가 불편하셔서 치료를 받기 위해 오신 것을 보니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건강한 몸, 손가락, 눈, 코, 입, 건강한 다리를 가지고 서 있는 내가 좀 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아니, 이제까지 사춘기니, 중 2 병이니, 때로는 내자신 스스로에게 불평, 불만이 들 때도 있었는데, 여기 계신 이분들을 보니 그렇게 하고 지나왔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을 보니 신기한 점이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이 분들, 심지어 발가락이 다 잘려지고 썩어가는 것을 소독하기 위해 대기하는 분들을 포함해 더위에 짜증내는 사람도 없고, 오래 기다리고 아프다고, 몸이 불편하다고 찡그리고 인상 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건강한 몸을 가진 나는 오히려 투덜거리고, 짜증을 내고, 찡그리는 데 이분들은 모두 환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중에 기억나는 아줌마, 아저씨가 있습니다.

아저씨는 손과 발 치료를 받았습니다.

아주머니는 겉으로 보기에 괜찮은데 어디가 아프실까 했는데, 신발 안에 발이 문제였습니다. 발가락이 없이 발이 절반이나 잘려나가 진물이 나서 치료하고 소독하러 오셨습니다. 한참을 기다리고 치료를 끝내고 가시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던 아저씨가 오셔서 자신도 불편한 몸인데, 환하게 웃으며 아내를 부축하고 같이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두 분이 서로 기쁘게 다독이며 다정하게 걸어가는 뒷모습과 또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모습이 내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린 나의 눈에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분들에게 갈 때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다짐하게 됩니다. 저는 어릴 때 장기려 박사님을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가난하여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내며 아픈 몸을 치료해주시고, 상처받은 마음도 다독여 주셨다던 책을 읽고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했습니다. 이곳 인도네시아에도 장기려 박사님의 마음을 가진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이런 봉사활동에 동참하고 계심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유머러스하고 사람들을 웃게 하시는 따우판 의사 선생님, 치과 치료를 아프지 않게 세심하게 진료해주는 리키 선생님,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6


편안하고 듬직하게 진료해 주시던 필립 선생님, 섬기고 돕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의사 선생님들이 기억납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누릴 수 있음에도 섬기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분들이 참으로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그 중에 필립 선생님은 이번 코로나 19 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코로나 19 가 심한 작년에는 봉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 4 월부터 오랜만에 갔는데, 코로나 19 로 한센 마을 사람들의 환경과 아픈 부분은 소독이나 치료가 안 되어 더 힘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의 눈가에는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고, 친절하게 연신 고맙다고 했습니다. 나도 진심으로 그분들께 “고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는 그분들을 다 알 수도 없고, 치료해 드릴 수도 없고,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분들께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약을 전달해 주는 것이 다입니다. 그런 나에게

그분들이

건네주는

인사조차도

감사했습니다.

코로나

19

에도

견뎌주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미소 지어 주는 마음이 감사했습니다. 나는 꿈을 가지고 꿈을 꾸는 학생입니다. 그분들을 통해 꿈을 꿉니다. 그분들을 통해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분들의 환한 미소와 인사를 통해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밝은 세상을 꿈꿉니다. 나로부터,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할 것입니다. 나도 누군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주고, 꿈을 꾸게 하고,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코로나19로 더 힘들어질 세상이고, 환경이지만 내 마음에 심겨진 그들의 소중한 미소는 희망의 씨앗이 되어 미래를 향해 더욱더 열심으로 노력하며 꿈을 꿀 것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 소외되고 가려진,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 난민들과 한센인들의 미소가 계속되게 하기 위해 희망의 노력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7


학생부 우수상 인문창작클럽회장상

수필

내 꿈의 씨앗 Benih Mimpiku 임형원(JIKS, Jakarta Indonesia Korean School, 11학년)

그날은 해가 너무나도 쨍쨍 내리쬐는 날이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와 학생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쩌렁쩌렁 소리치는 선생님들의 외침이 들렸다. 학생들은 모두 옹기종 기 모여들기 시작했고 뜨겁게 비추는 뙤약볕 아래 우리들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 작했다. 인도네시아의 가장 무더웠던 그 날에 우리는 모두 운동장에 모였다. 그날은 8월 17일,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학교에서 ‘인도네시아 데이’를 개최한 날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국기에 있는 빨간빛과 하얀색 옷을 머리끝부터 발끝까 지 맞춰 입었다. 몇몇 선정된 학생들이 새하얀 단복을 맞춰 입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또각또 각 단상에 올랐다. 그들은 붉고도 하얀 인도네시아 국기를 게양하였고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한 마음으로 ‘Indonesia raya’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우리는 붉은 파도를 치는 것처럼 환호했다. 곧 아이들이 복작복작 모이기 시작했다. 한곳에서는 쿠루뿍(kurupuk) 먹기가 한창이었다. 쿠 루뿍(kurupuk)은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인도네시아 새우 과자다. 한 입 베어 물면 중독되는 맛 에 아이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대회에 참가했다. 양손은 뒤로 모아 하늘에 대롱대롱 달린 쿠루뿍(kurupuk)을 먹기 위해 까치발로 깡충깡충 뛰어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애썼다. 얼굴 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과자부스러기를 미처 털지 못해 과자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 순간 우리는 서로 옆에서 “Sedikit lagi!” 조금만 더 하면 돼! 와 같이 응원하고 격려해주며 하나가 되어 있 었다. 다른 곳에서는 인도네시아 바틱(Batik) 체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캐러멜같이 쫀득한 왁스를 따끈따끈한 불 위에 녹여 짠팅(canting) 을 이용해 한가득 펀 뒤에 손수 그려놓은 풋풋한 스케 치 위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녹인 왁스로 조심조심 이어 그리기 시작했다. 짠팅(canting)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힘 조절을 하기 퍽 어려워 잠시 한눈을 팔면 왁스가 한곳에 점점 스며들어 커다란 점을 만든다. 아이들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왁스를 지워보려 하 지만 왁스는 뜨겁게 데워질 대로 데워져 있었다. 자칫 화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바틱 방에선 항상 “hati hati” 조심하라는 바틱 선생님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온다. 짠팅(canting)의 조그 마한 구멍 사이로 왁스는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것이 대다수였다. 어떤 선은 얇고 정교했지만 어 떤 선은 삐뚤빼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구불구불한 미고랭(mie goreng)을 그려놓은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8


것도 같았다. 때때로 완벽하게 그려지진 않았지만 서툰 손짓이라도 그것 또한 매력적으로 느껴 지는 바틱 체험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국제학교에 다니며 애국가를 배우기 전에 ‘Indonesia raya’를 먼저 배웠다. 영어를 배우기 전에 인도네시아어를 먼저 습득했다. 인도네시아는 내 고향과도 같은 나라다. 한 국인이었지만 인도네시아라는 먼 타국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외국어로 대화했다. 부모님과 대화할 때 빼고는 계속 외국 문화를 접했기에 학교에서 한국말은 물론 한국문화에 대해서 자세 하게 알 길이 없었다. 종종 텔레비전에서 보는 한국문화가 그립고도 궁금했다. 그런 나에게 소 중한 기회가 생겼다. 학교에서 인터내셔널 데이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 데이는 직역하자면 다문화의 날로 인도네시아에서 국제학교에 다닌 학생들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인터내셔널 데이에는 모든 학생이 각자 자신들의 국가의 옷을 입고 등교를 한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응원하러 온 학부모님들부터 선생님들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형형색색의 전통의상을 입고 온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인도네시아에서 살아온 나에게 인터내셔널 데이란 우리나라 전통의상인 한복을 자랑스럽게 뽐낼 수 있는 날이다. 이날만큼은 칙칙하고 밋밋한 교복은 멀리 던져버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복을 입을 수 있는 날이었기에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인터내셔널 데이가 다가올 때의 설렘을 잊을 수 없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이 유치원에 공주님 드레스를 입고 가고 싶다고 조를 때 한국에 계신 할머니가 선물해 주신 한복을 입고 가고 싶다고 떼를 썼던 것 같다. 국제학교에 다닌 나에게 그만큼 한복이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증표였기에 나는 유독 한복을 좋아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19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터내셔널 데이의 특별한 점이라 하면 학교에서 준비해 주신 여러 부스 를 돌아다니며 한 곳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다 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의 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까지도 경험할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인터내셔널 데이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부스는 단연 대한민국 부스였다. 부모님들이랑 한국어 선생님들이 한복을 곱게 입고 오셨다. 그게 내 눈에는 참으로 빤짝 반짝 예뻐 보였다. 한 곳에서는 선생님들이 나풀나풀하는 진분홍빛 깃털이 달린 부채를 들고 우리에게 부채춤을 가르쳐 주셨다. 부채를 한 손으로 휙 하고 펼치는 모습은 너무나도 멋있었다. 우리는 고사리 같 은 손으로 선생님을 따라 해보았다. ‘차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펼쳐지는 부채, 까르륵 웃는 아이들의 미소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나라 전통 악기들을 연주해 주셨다. 가야금, 장구, 단소, 꽹과리 까지 정말 다양한 악기들이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 손에도 악기를 하나씩 쥐여 주며 우리는 각 자 “쿵 쿵쿵” 또는 “댕댕” 하고 신나게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지도에 맞추어 아이 들은 역량껏 연주를 했다. 우리는 마치 오랜 기간 연습을 같이 한 팀같이 찰떡궁합이었다. 적어 도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부스에 오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러 나라의 전통 음식이다. 우리는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통에 있는 우리나라 전통 음식을 친구들과 나눠 먹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엄마와 까까(kakak) 언니와 함께 정성스럽게 김밥, 잡채, 그리 고 떡꼬치를 준비해 왔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도시락통을 활짝 펼쳤고 아이들은 곧 둘러싸여 앉았다. 아이들은 한 손에는 매섭게 펄럭펄럭 손부채질을 하며 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식히고 한 손에는 달고 매운 떡꼬치를 종이컵에 담아서는 컵 안에 묻은 소스까지도 싹싹 긁어먹을 기 세를 보였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온 잡채를 처음 먹어보시고는 내게 너무 맛있다고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배워보고 싶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또 다른 친구는 스시(sushi) 가 너무 맛있다고 어떻게 만드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친구에게 스시(sushi)가 아니라 이건 한국 음식인 김밥이라고 올바르게 고쳐주었다. 나 스스로가 한국에 대해 알리고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마지막으로 ‘인터내셔널 데이의 꽃’인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온종일 학교에서 준비한 각종 액티비티에 지칠 대로 지쳐있는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시원한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물을 벌 컥벌컥 마셨다. 운동장 한가운데 배치되어 있는 선풍기 앞에서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때 퍼레이드의 시작을 알지는 종소리가 강당에 “댕 댕 댕” 하고 울려 퍼질 때면 아이들은 풀 어 헤쳐져 있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머리를 정돈하여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각 반과 학년으로 모여 부스를 돌아다니던 아침과는 달리 우리는 같은 국적의 아이들끼리 하 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와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한 땀 한 땀 지 은 바틱을 입은 인도네시아 국적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고 프랑스, 영국, 터키, 이탈리아, 뉴질랜 드, 인도, 그리고 대한민국까지 하나하나 이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많은 국적의 아이들이 한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0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렇게 같은 국가 같은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끼리 모여 줄을 맞춰 행진 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이 조화를 이뤄 무지개 색으로 학교를 채워나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느꼈다. 여러 다양한 민족이 이렇게 모여 있을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이다. 인도네시아라는 타국에서, 영어로 대화하고 배우는 국제학교에서, 한국문화를 배우고 한국인들이 다 같이 한복을 입고 하나가 되어 한민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뜻깊다고 생 각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문화를 알려준 인도네시아에 보답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소통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 또한 배 우고 형성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을 만들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영어, 인도네시아어, 한국 어를 능통하게 구사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 멋있는 자연경관, 그리고 희귀한 관 광 명소까지 나의 조국인 한국보다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러한 유용한 정보를 어떻게 활용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을 때 문득 예 전에 부모님이 DVD 가게에서 대여해 온 드라마가 생각났다. ‘발리에서 생긴 일&#39;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였다. 부모님은 인도네시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라 고 설명해 주셨다. 내가 아는 곳이 나오기에 너무 신기했고 새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는 17,50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섬나라지만 인도네시아 하면 발 리만 비치는 게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의 재능을 발휘하여 미래 에 인도네시아를 알릴 수 있는 인도네시아와 한국 합작 드라마를 만들 것이다. 인도네시아인 배 우와 한국 배우를 주축으로 해서 영어, 인도네시아어, 한국어가 공통으로 사용되는 드라마를 만 들 것이다. 드라마에는 인도네시아의 숨겨진 많은 아름다운 명소를 배경으로, 맛집부터 내가 좋 아하는 바틱(batik) 체험, 알꿀룽(angklung) 등 인도네시아의 여러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과 정을 기록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내가 만든 드라마를 보고 나서 이제 인 도네시아 하면

발리뿐만

아니라

롬복(Lombok),

자와(Java),

술라웨시(Sulawesi),

벌리퉁

(Belitung), 솜보리(Sombori)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인도네시아의 아름 다움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곳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이 드라마를 수출할 계획이다. ‘지금 전 세계를 들썩이고 있는 K - 문화처럼 I - 문화(인도네시아 문화)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작은 꿈의 씨앗이 전 세계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1


학생부 특별상 인니갤러리 F. Widayanto상

소설

어린 세라의 꿈 Impian Sera Muda 홍선주(GMIS, Gandhi Memorial International School, 11학년)

안녕?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글을 적을 거야. 너희들이 어디에 살건,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간에 내 얘기 좀 들어 줘. 지금 이 글이 언제 어디서 발견 될지는 잘 모르지 만 음 그래도 한번 적어 볼게! 나는 인도네시아 남쪽 자카르타라는 곳에 우리 부모님과 어린 동 생이랑 살고 있어. 아니. 함께 살았었지. 내 이름은 세라고 13살이야. 내 동생은 이제 막 3살이 되었어. 사실 너무 답답하고 해서 털어 놓고 싶은 얘기가 있어. 요즘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우리 가족 이 너무 많이 힘들었거든. 아빠는 힘들게 들어가신 일자리에 나가지도 못하고 엄마는 매일 같이 없는 돈에 우리 밥 챙겨 주고.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는데 그 러지 못하고 있어. 온라인 수업을 한다는데 고민이야. 인터넷 문제도 있지만, 마땅한 기계가 없 어. 내 동생은 태어나고 나서 제대로 한번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어. 물론 너희들 상황도 좋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그렇지만 이곳은 정말 무시무시해. 매일 같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부모를 잃고 있어. 높고 멋진 빌딩들 뒤에 빛을 받지 못하고 관심을 아예 받지 못하는 곳에도 정말 많 은 인구가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어. 그중에는 우리 가족도 있었지.

여기는 집들이 다 붙어있고 길도 좁아서 사람을 안 만날 수가 없어.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19 라는 바이러스가 생겼고 스쳐도 전파되는 델타 변이까지 생겨 버렸어. 우리 마을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이었지. 그렇게 우리 이웃들도 많이 아파했어. 내 옆집 사는 나랑 동갑인 친구는 친구랑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2


놀러 나갔다가 집단 코로나19 감염이 되어 돌아왔대. 아무도 그 애가 코로나19에 걸렸는지 몰 라서 가족들과 함께 할머니의 집에 내려갔는데 그제야 증상이 나타나 큰일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대. 온 가족이 코로나19 검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비용이 너무 비싸서 아무도 검사를 할 수가 없었대. 그렇게 그들은 체념한 채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 자신들의 앞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며 하루하루 힘들게 보내다 결국 모두 세상을 떠났어. 내가 사는 곳은 병원이랑도 많이 멀고 가려 면 병원비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게 참 많은 부담을 줬어. 올해 6월, 우리 부모님도 바이러스에 감염됐어. 격리를 해야 하지만 우리 집은 방이 없어 나 랑 동생은 이웃집에 잠시 지냈어. 그분들도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를 보호하고 보살펴 주 셔서 아직 우리 마을에 희망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어. 그렇게 12일째 지나지 않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 아빠는 원래 당뇨를 앓고 계셨어, 그래서 아빠에게는 더욱 치명적이셨대. 엄마는 코로나19 증상인 고열로 인해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가셨대. 병원에서는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게 약과 필요한 영양 섭취를 지 급해 준다는데 우리 부모님은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몸에 의존해 그 바이러스와 싸우 셨던 거야.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 우리는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보지도 못하고 보내드렸어. 코로나19로 인해 돌아가신 사람들은 장례절차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들었어. 우리 부모님은 마지막으로 우리를 보지도, 생전에 자신들이 아끼던 그리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작별인사조차 하 지 못한 채 차갑고 외롭게 땅속에 관도 없이 비닐에 싸인 채 묻히셨다고 어른들에게 들었어. 이 러한 상황을 보면 너무나도 처참하고 비극적인 우리의 현실이 나에게 뼛속 깊이 파고들어. 우리 가족도 치료와 백신을 맞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 너희들이 걱정할까 봐 하는 말인데 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이제 내가 가장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강해져야 하고 이를 악물어야 해. 그리고 동생이 있기에 나는 목 놓아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고 울지 않아. 앞으로 내가 무너지면 동생은 정말 기댈 곳이 없으 니까. 내 동생은 아직 우리 부모님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아직 몰라, 아마 말해 주어도 이해를 못할 거야. 지금도 막대 사탕 하나만 물려주면 엄마를 언제 찾았냐는 듯이 해맑게 그저 맛을 음 미하며 잠들곤 해.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왜 이런 비극을 주었을까. 우리 가족이 조금 더 부유 했더라면 달랐을 까?’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 동생은 매일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어. 나는 앞 으로 동생이랑 둘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너무 막막해. 학교 수업은 들고 싶은데 말이야. 우리 주위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3


굶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내가 공부를 못하면?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으면? 막막해. 이번 기회에 코로나19 보다 무서운 게 가난이란 것을 깨달았어.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가장으로 나와 같은 상황인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사회가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따뜻한 시선,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도와준다면 살아갈 희망이 생길 것 같아. 간절히 기도해. 뜻이 있는 단체에서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해줄 수 있기를. 나는 그저 동생과 공부를 마저 하고 싶을 뿐이야. 또한 모든 사람들이 하루빨리 백신을 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아프면 빨리 치료받을 수 있게 해주면 우리 마을에 정말 큰 희망과 변화가 있을 텐데. 내가 작은 불씨가 되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내에서 우리 마을이 소외되지 않으면 좋겠어. 여 기에도 많은 이가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고 있어. 그러나 나는 아직 너무 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어린아이일 뿐이야. 게다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 우리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은 이 글을 조용히 서랍장 안에 넣어둘 거야. 그리고 조금 더 노 력해 볼래. 더 열심히 노력하고 견뎌보다가 안 되면 그때 다시 이 글을 꺼낼게. 헤헤. 우리 모두 지금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하고 너희들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생기 면 속으로만 참지 말고 내게 글을 적어.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힘내자! 이 겨내 보자!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4


학생부 특별상 Saung Angklung Udjo상

골목친구 Teman di Gang 임서영(JIKS, Jakarta Indonesia Korean School, 10학년)

까맣게 그은 굴뚝 끝 하얀 연기가 거미줄처럼 얽힌 전깃줄 사이로 춤을 추면 향기로 돋아나는 추억들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화사한 웃음꽃을 피우는 나의 친구들

넘실거리는 망고 바구니를 머리에 얹고 갓 잡은 삼치를 어깨에 걸치고 태평한 걸음걸이로 하루를 시작한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5


쨍쨍한 햇살 아래 꺄르르꺄르르 배를 부여잡으며 넘어가는 아이들 땀방울이 송글송글 뜨거운 햇살에도 머금은 온화한 미소

어두운 골목길 낮의 태양이 저물고 밤의 태양이 인사를 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바다의 파도소리가 바람과 함께 나의 귀를 간질이면

떠오르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나의 골목친구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6


비 Hujan

밤새 추적추적 내리며 깊은 잠을 방해하는 비

내일은 어떨까, 모레는 어떨까, 저 작은 집들은 안전할까

마음과 마음이 모여 먹장구름을 어루만지면 고층빌딩에 가려진 인도네시아의 판자촌에도 볕이 든다 별이 뜬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7


수상소감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8


일반부 대상 주인도네시아대한민국대사상 권영경

수필

마음 둘 곳 찾아 뿌리를 내리면 그곳이 어디든 내 집

맹그로브 나무의 삶

사람이 풍경이 되는 사진을 좋아합니다.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고 걷는 뒷모습 이라든지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새벽 거리를 쓸고 있는 장면 같은 것 말이죠. 그런 것들은 어떤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마음의 울림을 주곤 합니다. 결국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주는 힘’으로 눈을 뜨고 감는 매일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섯 살 아이를 키우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십 대 주부에게 전혀 평범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네요. 수상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던 날 한참을 멍 하니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외로워서 한 줄, 때론 지쳐서 한 줄, 그 와중에 또 행복한 날도 있어 그렇게 또 한 줄 한 줄 ‘쓴’ 글이 아직 제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 말해 주는 것 같아 가슴이 뜨겁습니다. 제 글이 특별하거나 훌륭하 다 생각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고국을 떠나 이 먼 타국에서 이방 인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묵묵히 제자리 지키고 계신 모든 부모에게 주는 응원이 라 여기고 싶습니다. 그들을 위한 진심을 담은 글이기도 하고요. 수상자 사진을 내라는 주최 측의 말에 사진첩을 한참을 뒤적여도 최근 2~3년 사이 혼자 찍은 독사진이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가족사진 아니면 제 옆 엔 항상 아이가 있네요. 이 것이 지금의 제 삶입니다. 더 이상 주인공이 되지 않 아도 아무렇지 않은 부모의 삶. 하지만 오늘만큼은 마음껏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 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평범한 것들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을 계속 하려 합니다. 정말 기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아름다운 한글로, 어렵지 않은 말들로, 우리 아이들이 읽어도 자연과 어른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들을 매일매일, 꾸준히, 기록하는 삶을 지켜나가 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29


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오선희

수필

아직도 나는 배우고 있다

안녕하세요. 먼저 제 부족한 글에도 불구하고 귀한 상을 주신 주최측과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늘 가슴 뭉클한 순간들을 만나면 그 추억을 글 로 표현해 간직하고자 손이 가는 대로 그렇게 시를 써 왔습니다. 그러다 저희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본 공모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공모전 첫 시도 인지라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생각하다가 항상 내 삶 속 에서 늘 먼저 생각나고 내 맘 깊이 기억하는 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내 삶의 얘 기를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적어 보기로 했습니다. 스스로를 위해 시를 써 왔던 때와는 다르게 다른 분들에게 읽혀질 글이라는 생 각에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해 글을 다듬어 가다 보니 탈고에 제법 많은 시간과 정 성을 쏟으며 글 쓰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반면 내 마음이 글로써 다른 이 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깨닫고 여러 날을 끙끙대기도 했습니다. 결국, 적지 않은 나이에 글쓰기에 도전했던 솔직한 저의 마음은 내 글이 남에게 읽힌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창피만 당하지 말기를” 기도하며 글 속에서 가식을 걷 어내 가는 과정을 통해 프로작가님들의 마음도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상하지 못한 큰 상을 받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이 상 은 팬데믹으로 인해 우울하고 착잡하던 저의 삶과 마음에 큰 위로의 선물이 되었 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모든 분들이 건강하길 기원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0


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 한인이주 101 주년기념 특별상 고찬유

수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누구 말처럼 “타임머신이 있으면 찾아가 직접 묻고 싶었습니다”.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연결하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6 개월 가까이 자료를 뒤지고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찾았지만 도리어 갈급했습니다. 노트북에 쌓인 5 만 자 가까이

되는

활자를

두고도

망설였습니다.

사실과

추정

사이에서

깊이

고민했습니다. 기록의 부재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인 사회가 지난해 발간한 ‘인도네시아 한인 100 년사’는 후대를 위한 보물입니다. 제 알량한 성과물에 기대 100 년사 발간 전 집필자들과 교류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푯돌 설치 등 다양한 후속 조치를 이어가는 한인회를 응원합니다. 덕분에 전진할 동력을 얻었습니다. ‘경청하고 발로 뛰자’는 첫 마음도 다시 살아납니다.

“양칠성이

누구야”에서

시작했던

기나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완하고 추가할 현장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다음 이름들도 간직하고 기억하겠습니다. 김문환 김소웅 류완수 박재한 배동선 사공경 신성철 엄은희 이순형 이영미 이태복 조연숙 채인숙 최경희 홍윤경(직함 생략, 가나다순) 그리고 머릿속에 맴돌지만 미처 이름을 적지 못한 인도네시아의 한인 여러분. 제 글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과거라면 이들은 인도네시아의 현재 그리고 미래입니다. 인연의

실타래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수상도 없습니다. 아내 김진연과 아들 건우의 응원도 늘 귀한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1


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상공회의소회장상 윤세귀

회사를 그만둔 날 뉴 노르말 올 2월 말. 실직을 하고 7년간의 인니 생활을 접어야 할까 하는 고민과 재취업에 대한 여 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 아내(현지인) 손에 끌려 말랑 부링산 밑 31 번지에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내와의 아주 간단한 의사소 통을 제외하고는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손가락을 목구멍 에 집어넣어 가슴까지 차오른 것들을 시원하게 게워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말랑에 온 이후로는 새벽에 일어나 습관처럼 글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의 먹먹함을 잊어보려고 시작했던 것 같은데 지인으로부터 받은 성경 말씀을 필사하기도 하고, 하루의 일정을 계획하며 마음을 추스르거나 두서없는 글을 생각 나는 대로 쭉 적어 내려갑니다. 새벽이면 뭘 하는지 책상에 엎드려 꼼지락거리는 이방인 사위의 뒤꼭지가 안쓰러웠는지 장모는 매일 아침이면 사위가 좋아하는 토 라자 커피를 한 잔씩 끓여주십니다. 공모하고 당연히 수상작이 발표되지 않았음을 알았으면서도 심지어 마감일도 지 나지 않았으면서도 혹은 설마 하는 설렘으로 매일같이 이메일을 새로 고침하며 공 홈을 들락거렸었습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에 장모가 끓여준 토라자 한 잔에 참 인생이 쓰다는 생각 을 하다가 떨리는 마음으로 수상자 발표를 확인하고는 햇살에 찢어지는 하늘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적도에 내리는 눈을 보았습니다. 왜 눈물이 쏟아지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느껴지는 허기에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 다. 부르고 싶은 그리운 이름들이 참 많습니다. 타향살이하는 아들을 위해 매일같 이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 외지에서 만난 사이지만 형제처럼 격려해주고 걱정해 주시던 지인분들. 항상 곁에서 내 편이 되어준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이제 두 살 배기 우리 아들 윤하늘.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2


지금까지 우리 재외동포들의 피곤한 삶의 자리에서 그늘이 되어주시고 모퉁이 돌이 되어주신 《한인니문화연구원》과 사공경 원장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미 천한 글을 읽어주시고 수상작으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3


일반부 최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유호종

수필

시는 힘이 있다

수상 소식을 듣고 느낀 첫 감정은 ‘기쁨’이었습니다. 매우 기뻤습니다. 웃음이 났습니다. 왜 이렇게 기쁠까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아침 이고, 밤이고 기쁜 이유가 저의 수상소감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쓴 글을 나눌 수 있음에 기뻤습니다. 내가 쓴 글이 타인에게 읽힐 때, 그 글이 어떻게 살아서 움직일까를 생각하면, 소름 돋습니다. 그 소름을 구성하는 것은 부끄러움이 한 몫, 기쁨이 한 몫, 감사가 한 몫, 긴장이 한 몫입니다. 두 번째, 상이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인정받는 것 같아서 뭔가 뿌듯했습니다. 부 끄럽지만, 저는 왜 그렇게 누가 인정해주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인정받을 욕구 가 지나치면, 망가지겠지만, 적당하면 삶에 활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분명히 삶에 활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계속 도전할 거라서 기뻤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내 존재를 새기는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는 “나와 너”가 같이 할 때, 존재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번 공모전은 “혼자 쓰던 글”에서 이제 “함께 쓰는 글”로 전환 되는 계 기가 되었습니다. “혼자 파고드는 글”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글”을 써야겠다 는 인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 이유로 매우 기뻤습니다. 먼지 같은 글이 타인에게 읽힐 기회를 주신 《한인니문화연구원》에 감사 드리 며, 늘 한-인니의 문화 소통을 위해서 일선에서 최고로 수고하시는 사공경 원장님 이하 모든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기쁨을 또 갖도록 노력 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4


일반부 최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김선혜

수필

미냑 까유 뿌띠

수상 소식을 듣고 모처럼 마음이 설렜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난처하고 어렵고 속상한 일들도 많았지만 지금도 잘 하고 있 고, 앞으로도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거라는 축포의 신호탄 같은 소식이었습니 다. 낯선 인도네시아지만, 점점 색채가 느껴지는 수채화처럼 조금씩 조금씩 빗물에 젖어들 듯 인도네시아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네시아 사람들 의 생활 태도가 답답하고 융통성 없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참 마음 속에 ‘화’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그동안 왜 별거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울컥울컥 했을까요? 제 마음에 ‘화’를 한 스푼 덜어내고 ‘마음의 평화’를 찾 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경험하면서 제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이 많 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더불어 자연 앞에서 인간이 참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해지기도 했구요. 인도네시아 속담에 ‘비가 오고 더위도 오듯이 때가 되면 응답이 있다.’는 말이 있더군요. 어둠이 지나면 밝음이 오고 힘든 일을 이겨 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온다는 건 전 세계 불변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힘든 시기 를 지나면서 마음고생 많이 하셨던 분들이 동굴을 지나면 밝은 빛이 쏟아진다는 말을 믿고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글을 쓰는 것이 더욱 좋 아졌습니다. 앞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더 넓은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담아 좋은 글 들을 많이 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5


일반부 우수상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장상 김진연

수필

오만과 편견

덥고 낯선 나라에 와서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적응하는 일이 결코 순탄치 않았 습니다. ‘빨리 한국 가고 싶다’ 생각하며 첫 1년을 지냈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 록 미지의 나라였던 인도네시아가 크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내 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3년간 느꼈던 감정들을 글 로 쓰면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이런 행사를 기획하고 남편이 자꾸 써보라고 권유했 기 때문에 생각이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인도네 시아에서 한인들과 함께 겪은 것도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부끄러운 한 인간의 고 백을 읽어주시고 상까지 주시니 뭐라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낯선 땅에서 새로운 경험을 함께하며 함께 울고 웃은 남편과 아들에게 고맙 고 나의 어른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코로나가 완전히 끝나서 안심하 고 살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6


일반부 우수상 한인기업가 인도네시아인 특별상 까리나

수필

함께 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제 모국어가 아닌 한국어를 사용하여 쓴 글로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상을 받게 된 것은 저에게는 아주 큰 영광이자 특권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장애인에 대해서 느끼는 바를 마음으로 전하려고 했을 뿐인데, 제 글이 심사위원의 마음에 감동을 드렸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먼저 이번 공모전에 참여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신 발리의 《YAYASAN BINA ILMU 한국어학당》 학당장이시자, 이번 일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신 유호종 학당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시고, 저와 같은 인도네시아인들도 문학 공모전에 참여할

있도록

해주신

《한인니문화연구원》과

사공경

원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한국 문화와 한국어,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더 열심히 배우고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다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7


일반부 우수상 발리 예술가 Sudirana상 우지수

소설

발리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산다는데, 나이 마흔을 넘긴 여자들은 더 많은 이 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은 이것들이 오롯이 나의 이야기인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남의 이야기였는데 나의 이야기가 된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 다. 그래서 나이가 든 여자들은 할 얘기가 많습니다. 이것이 글재주도 없는 제가 펜을 들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남편과 함께 사는 여자, 정작 본인도 그러하지 못하면서 약지 못 한 남편이 불만인 여자, 종종 마음의 짐으로 느껴지는 시댁을 가진 여자, 대놓고 싫다 소리 못해 속으로 삭히는 여자... 제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크게 다를 것 없 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내 이야기 같고, 말하면 할수록 자기네랑 똑같다고 하더군요. 또래의 여자들이 서로를 쉽게 공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품고 사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 다. 바로 인도네시아에서 느낀 것들이죠. 처음 발리에 갔을 때, 그곳은 그 자체로 인생의 지혜를 품은 섬 같았습니다. 각종 신들의 형상과 크고 작은 탑들이 가정집 마당에까지 촘촘하게 세워져 있는 풍경은 신을 섬기는 이들이 일상에서 그들의 말 씀을 따르고 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죠. 이후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에 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을 인도네시아 속담에서도 여럿 찾아볼 수 있었어요. 지나 치게 낙천적이라고 오해 받는 인도네시아 인들이 오히려 인생을 얼마나 지혜롭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몇 마디 문장들이지만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품은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자리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지혜를 미처 다 깨닫지 못한 저로서는 완벽하지 못한 이야기만 담아내고 말았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공감과 이해로 남은 이야기를 마저 쏟아낼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8


일반부 우수상 인문창작클럽회장상 이재현

수필

아버지의 삶

부족한 제 글에 ‘우수상’이라는 과분한 타이틀을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 일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넘어온 후, 처음에는 많은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의료체계에서 오는 불안함,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가 주는 답 답함 등. 어느 날인가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곳의 사정들을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께 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도 다 그렇게 살았었다.’ 그 이후에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의 인도네시아가 아버지께서 가족을 위해 한참 고생 하시던 그때의 대한민국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에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일하며 사셨을까’ 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의 폭을 넓힐 기회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퇴 근길에 온 가족이 한 대의 오토바이에 타고 이동하는 도로 위의 인도네시아 가족 을 보고, 제 어린 시절 떠올랐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해 보며 했던 생 각들을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지내는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 배우 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통해, 제 부모님을 포함한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를 높이 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39


일반부 특별상 Lembaga Kebudayaan Betawi상 손예리

수필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권위 있는 인도네시아 문학상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공모전에서 ‘Lembaga Kebudayaan Betawi(자카르타 문화원) 상’을 받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제 수상소감은 아래 시로 대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lt;자카르타 연가&gt;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 아래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아잔소리

신을 향한 기도소리마저 애틋한 이곳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슬아슬 도로 위를 가로지르며 저마다의 목적지로 향하는 오토바이 행렬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0


길가에 나무 하나도 함부로 베지 않는 선한 믿음

형형색색 아름답게 수놓인 바틱에 시선이 머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선율에 작은 위안을 받는다.

어느덧 깊숙이 스며든 자카르타의 향기와 빛깔이 언제부턴가 내게서도 묻어 나온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1


일반부 특별상 Indonesia Korea Friendship Association상 배대호

수필

또게의 침공

코로나로 인해 의도치 않게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그동안 끄적거려 놓은 일상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다 우연히 접한 &lt;제 11 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gt; 공모전 소식에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한번 던져볼까 하는 마음에 보낸 “일상의 이야기”가 이렇게 큰 감격과 기쁨으로 돌아오다니 꿈만 같네요! 마주보는

얼굴과

전해지는

손길을

통해

소통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세상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삶이었기에 가슴엔 늘 답답함과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lt;제 11 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gt;은 편하게 내 이야기를 세상에

던져볼

있는

기회였고,

자신에게

주는

용기였고,

선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글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기뻐해준 아내(최하영)와 자녀들(한나, 동혁)에게 감사를 전하며 귀한 소통의 장을 마련해 주신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2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박소영

수필

전염병 시대의 행진

“더운 날씨에 저절로 살 엄청 빠져서 돌아오겠네~” 인도네시아에 가서 살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입니 다. 그때만 해도, 인도네시아에 얼마나 맛있는 음식들이 많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풍부한 기름에 튀기는 기술 또한 남다른 바삭바삭한 현지식 튀김 고랭안이 어찌나 입에 맛있는지, 넉넉하게 느는 뱃살만큼이나 푸근해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오늘도 충분히 감사하다, 오늘도 충분히 아름답다 느끼며 살던 중 &lt;제11회 인 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gt; ‘한인니문화연구원상’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그간 읽어 온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아름다운 글들이 떠올라 제게는 더욱 의미 있는 상입 니다. 이 수상의 영광을 삶의 비밀, 깊은 만족을 알게 해준 따뜻한 나라 인도네시아에 모두 돌립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3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정지영

동화

그림자 소녀

팬데믹 시대, 우리 삶은 일시정지(pause)가 아닌 재생(play)중입니다.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남편을 따라 자카르타로 온 지 5개월 째, 인도네시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폭발하던

때였습니다.

8월

우연히

눈에

인도네시아이야기 문학공모전. 문 닫은 학교로 온라인 수업 중인 첫째, 유치원 근처도 못 가본 둘째, 재택근무 중인 남편, 그리고 나. 우리 가족의 삶은 마치 일시정지(pause) 화면처럼 매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루 한 번도 신발을 신지 않고 집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날들, 그 속에서 발견한 한.인니문화연구원의 공모전은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던 저에게 play버튼이 되어주었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인니에 오게 되어 집 안에서 인도네시아를, 그리고 온라인으로 친구들을 만난

우리

아이에게

상상

인도네시아

삶이라도

경험시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소박한 생각으로 우리 아이 이름과 같은 소녀, 아니 소녀의 그림자가

주인공인

동화를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바루다땅이기에

인도네시아의 문화, 언어 등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아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가며 동화를 쓰는 도중 어느 새 저도 인니, 그리고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해 아는 것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잔잔한 일상 속 깜짝 불꽃놀이 같은 수상 소식은 미숙한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작은 자신감과 행복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제 팬데믹도 거의 터널의 끝을 향해 달려온 것 같습니다. 아직은 활짝 날갯짓을 하기에 추운 겨울과 같은 상황이지만, 조만간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오늘도 생각합니다. 겉보기엔 멈춰진 일상이지만 저, 그리고 우리 각자의 모든 삶들이 선명한 컬러로 재생(play)되고 있음을......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4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배외순

깜보자 사랑 브로모 “어려운 시기에 좋은 자리 마련해 주신 《한인니문화연구원》과 《한-인니 산림 협력센터 》 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공모전 10회에 이어 11회에 다시 공모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 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예쁘다, 좋다 단편적인 표현이 전부인데 이런 문학상 공모전을 통해 문학적인 언어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5


일반부 장려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 인도네시아인 특별상 데위

나는 나대로

안녕하세요. 인도네시아 교육 대학교 한국어 교육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데위라고 합니다. 한국어 연습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저에게 항상 이 길이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어를 좋아하지만 과연 제가 선택한 이 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닙니다. 한국어 연습도 혼자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한국어 말하기는 누군가 상대방이 되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아 1 인 2 역을 하며 항상 혼잣말을 하며 연습합니다. 그래서 글 쓰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말하기 연습은 두렵기도 하고 틀리면 바로 그 자리에 얼어버려서 잘 안 해서 대신 글로 많이 연습합니다. 일기 같은 것이나 아니면 드라마 대사를 많이 따라 합니다. 마침 문학 공모전이 있어서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수필과 시를 저만의 방식으로 썼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 실력이 어떤지 잘 아니까 처음부터 지원을 할 때 그냥 작은 희망만 품고 지원을 했습니다. 이렇게 상까지 주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제 작품에 관심과 사랑을 많이 주셔서 진심으로 드립니다. 앞으로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많이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6

감사


학생부 대상 주ASEAN 대한민국대표부대사상 성유림(JIKS,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소설

발바닥이 뜨거운 아이

먼저, 저는 ‘발바닥이 따뜻한 아이’라는 소설을 작성하면서 즐거웠습니다. 여름

방학에

한국에서

우연히

발리

산골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

인도네시아 국제커플의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불닭볶음면을 처음 맛 본 시골 아이들과 함께 발리 산골마을의 일상을 담고 있었습니다. 발리로 친구들과,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은 많지만, 흔히 아는 관광 명소만 방문했을 뿐 발리 산골마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흥미로웠습니다. 발리 산골마을만의 소위 &#39;생일빵’을 하는 모습도 담겨 있었고, 장작을 직접 모아다가 불을 피우는 소소한 모습까지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

영상에서

아이들은

모두

맨발이었으나,

뜨거워

보이는

땅바닥

위를

뛰어다니며 행복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아이답게 늘 에너지 넘치고, 걷기보다는 계속해서 뛰어다니는 모습이 저에겐 인상 깊었습니다. 해맑고 순수한 웃음을 보니 제 마음까지 따뜻해졌습니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늘 행복하고 활기 넘치게 뛰어다니는 모습. 성인의 해를 앞둔 저의 어린 시절을 짚어보며 저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이런 정겨운 모습을 소설로 풀어내 사람들과 인도네시아의 따뜻함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주인공처럼 잠시 생각에 잠겨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도네시아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7


학생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김채희(JIS, 10학년) )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수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잎사귀

안녕하세요.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을 수상하게 된 김채희입니다. 우선 이런 의미 있는 상을 받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이번이 처음 인도네시아 문학상에 참여하는 것인데,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문학을 통해 화합하는 장이라는 취지가 저를 참여까지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응모했고,

글을 글을

쓰는 쓰는

것을 과정도

즐기는

편이라서

저의

3

년간의

순수하게 짧지만,

즐기자는 평생

마음으로

잊지

못할

인도네시아에서의 추억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너무 좋은 경험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상까지 받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평소에 학교에서 쓰는 글들과는 다르게 저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또 편안하게 풀어낼 수 있어서 글을 쓰는 과정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이 상은 코로나 19 로 인해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을 때 저에게 찾아온 선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저는 한국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후 인도네시아에 들어와서 호텔에서 자가격리를 하고 있었는데, 글을 쓰는 것 덕분에 8 일간의 긴 자가격리를 지루하지 않고 알차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한국에서의 기억과 인도네시아에 돌아와서의 첫 느낌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을 때여서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특히, 좁은 호텔 방안에 갇혀서 창문을 바라봤을 때, 저를 약 올리듯이 피어있던 야자수 한 그루가 빌딩들과 도로 사이에서 눈에 확 띄어서 이 글의 주제인 ‘푸른 잎사귀들’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 글을 통해 더 많은 분이 인도네시아에 이해와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오랜 역사를 지켜온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이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푸른

인도네시아의

나무들처럼

굳건하게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8

자리를

지켰으면


학생부 최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이하늘(GMIS, 12학년) )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수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고통 로용

안녕하세요. 이번 11 회 인도네시아이야기문학상에서 ‘고통 로용(Gotong Royong)’ 이라는 수필로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게 된 GMIS(Gandhi Memorial International School) 12 학년 이하늘 입니다. 사실 글을 처음 쓰게 되었을 때 상당히 막막할 거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너무나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제 감정이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전달하는 것을 늘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던 학생으로서 글과 문학을 통해 전하고 싶은 저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코로나 때문에 격리 생활하기 바쁜 사회를 소재로 글을 쓰고 싶어서 제게 가장 소중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바탕으로 글을 준비했습니다. 좋은 글은 많은 사람이 알면 알수록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온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고통 로용을 통해 한인 동포, 재외국민뿐만이 아닌 전 세계가 모두가 한마음으로 같은 곳을 향해 달린다면 인류가 이겨내지 못할 시련은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학을 통해 제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여정에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큰 성과를 낼 수 있어서 다신 한번 진심으로 너무 감사합니다. 아직 많이 서툴고 투박한 글이지만 부족한 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만큼 열정의 불씨를 잃지 않고 앞으로 더 좋은 글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49


학생부 최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박승헌(ACS, 7학년)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수필

나의 우편배달부

행운을 배달해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2021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박승헌입니다. 일곱 살까지의 마냥 행복한 기억을 갖게 해 준 한국과 열네 살까지의 힘들지만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을 갖게 해 준 인도네시아. 두 나라 모두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책 읽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는 어머니 덕에 저희 집 책장은 한글책이 빼곡히 꽂아져 있습니다. 역사만화책과 추리물을 특히 좋아하는 저는 한국에 갈 때마다 여행가방 하나를 책으로 가득 채워 옵니다. 중학생이 되며 아쉽게도 올해부터는 ‘만화책 금지령’이 떨어졌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글쓰기를 배웠지만 쉽게 늘지 않는 실력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학교에서 ‘국어’ 과목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상까지 받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남들은 책을 읽으라는 잔소리를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조금 다릅니다. “책 좀 그만 읽고 네 할 일을 해!” 학교 공부나 숙제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늘 이런 잔소리를 듣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제 할일을 다 하고 책을 읽는 버릇을 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가족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습관을

들여보려

합니다.

스토리의 모델이 되어주신 삼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뒤돌아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0


학생부 우수상 한인기업가상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수필

선물

이번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저의 모든 순간에 아빠와 엄마와 동생이 함께 있었습니다. 주말이면 아빠와 엄마가 해주신 특별한 요리를 먹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책임져 주는 부모님께 너무 사랑하고 늘 감사하다고 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으로 대학교를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고, 인도네시아에서 살아갈 시간이 2 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가족과의 추억을 더 쌓아가려고 합니다. 모두가 힘든 이 시기가 잘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1


학생부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 특별상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수필

까뿍 해변을 달리다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안녕하세요. 저는 &lt;제 11 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gt;에서 ‘까뿍 해변을 달리다’로

우수상을

받은

최형우입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멈추었습니다.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2 년 가까이 받으며 바라보는 바깥 세상이 점점 낯설어졌습니다. 스트레스를 풀 방법을 몰라 답답했는데 ‘까뿍 해변(PIK, Pantai Indah Kapuk)’에 바람을 쐬러 가게 되었습니다. 해변을 거니는데 하얀 날개를 구름처럼 펼친 백조 떼가 물 위를 스치듯 날아갔습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습니다.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파도를 낚아챌 듯한 새들의 울음소리,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다. 수많은 인파 사이를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달릴 때 느끼는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때의 경험을 글로 썼는데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도 깨끗이 날아가는 기분입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한인니문화연구원》과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감사하다는 코로나

심사위원님들에게

말씀을

팬데믹으로

드립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여러분들이 제 글을 읽고 잠시나마

해변을

거니는

느꼈으면

합니다. 힘들

때나

기분을 기쁠

때나 언제나 저의 편에 서 주시는 부모님,

같은

시간과

공유하는

부모님에게

추억을 영광을

돌립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2


학생부 우수상 KOICA소장상 김민서(BSJ,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수필

한센인의 미소

먼저 저의 글을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카르타 살면서 한국에 한번씩 갔다 오면 맛있는 것도 많고 IT 강국답게 첨단의

좋은

것들로

눈이

휘둥그래지고,

‘우리

대한민국이

정말

잘사는

나라구나’라고 많이 느낍니다. 저도 계속 한국에 살았다면 한국의 친구들처럼 빡빡하게 학원과 집을 오가면서, 의료선교나 의료봉사, CAS 활동을 하며 많은 경험을 할 수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센인 환자들이나 난민들은 나와 동떨어진 다른 세계 사람으로 미디어에서나 접하고 살았을 것도 같습니다. 우리 아빠를 이 나라로 발령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봉사로 만난 한센인과 선교사님, 타우판, 리키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더 좋은 약들이 개발되어 한센인 환자들에게 널리 보급이 되어 한센병으로 고통 받지 않게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나라 없이 떠도는 난민들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전세계 지구촌이 다 함께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꿈꿔봅니다. 저에게

‘한센인의

미소’

뒤에

숨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가르쳐 주신 존경하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3


학생부 우수상 인문창작클럽회장상 임형원(JIKS, 11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수필

내 꿈의 씨앗

먼저 제가 인도네시아에서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기록될 수 있는 또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주신

《한인니문화연구원》과

《한-인니

산림협력센터》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와 같이 인도네시아에서 오랫동안 산 친구들이 우리들의 경험을 녹여 글로 쓴다는 것 자체가 뜻 깊은 경험이었고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한인 청소년으로서 차별도 많이 당했고 문화적 혼돈이라는 어려움을 겪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계기로 저 스스로 저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인 청소년으로서 제가 스스로 느끼고 배운 인도네시아 문화와 한국 문화 모두 저의 일부분이 되어 이 또한 ‘또 하나의 나’라는 것을 깨닫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너무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글에서도 말했듯이 저는 앞으로 제가 경험한 것들을 활용해서 무한한 꿈의 가능성을 펼치고 싶습니다. 이 글을 도화선으로 앞으로 제가 꿈꾸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할 것입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가 제 꿈을 펼치기 위한 불씨가 되었듯 앞으로 저와 같은 더 많은 한인 여러분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비록 처음에는 힘들진 몰라도 제 글을 읽고 위로를 받으시고 같이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를

준비하면서 글로 하여금 자유로울 수 있다고 느꼈듯 모두가 오히려 이를 기회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값진

경험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이를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 더 멋진 나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4


학생부 특별상 인니갤러리 F. Widayanto상 홍선주(GMIS, 11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소설

어린 세라의 꿈

안녕하세요. 제 11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에 특별상을 수상한 홍선주 입니다. 먼저

저의

창의력을

마음껏

표현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신

모든

관계자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인니문화연구원》과 《한-인니 산림협력센터》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처음으로 참가 하였고 참가 하는 데에 의미를 두었으나 상까지 수상하게 되어 너무 영광입니다. 이번 기회에 제가 살고 있는 나라인, 인도네시아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애정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글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상당히 많은 인구들이 살고 있고, 저희는 모든 사람들의 환경을 자세히 꿰뚫고 있지 않기에 그들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렇기에, 저는 모든 연령대가 이해하기 쉬운 어린 아이의 시점으로 이러한 힘든 현실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과 심각성도 더욱 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며 우리 또한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감사히 여기고 소중히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우리 모두의 미래를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5


학생부 특별상 Saung Angklung Udjo상 임서영(JIKS, 10학년)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시

골목친구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은

나에게

다른

도전이었다. 교내 행사에서 수상을 하곤 했는데 학교

밖의

문학

행사에

참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보자마자 나의 서툰 작문 능력과 부족한 어휘력을 생각하며 이 광범위한 주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시를 쓰면서도 문체와 이야기를 푸는 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수정하고 지우며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뻔한 답변일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도네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땅은 ‘발리’이다.

넘치는

관광객으로

복잡한

곳을

벗어나면

발리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한적함과 여유로움은 항상 나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평소라면 방학 때만 되면 부담 없이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갔을 곳이, 현재 코로나 19 때문에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리자 나에게는 허무한 꿈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 덕분에 나는 &lt;골목친구&gt;를 쓰면서 잠시나마 과거의 추억에 잠겨 그때 당시의 즐거움을 회상할 수 있었다. 여유롭게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두리번거리면서 눈에 담았던 발리의 풍경, 그리고 그곳의 순박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시를 써보니 단순히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수상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몇 줄밖에 안 되는 나의 짧은 시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을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조금 과분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뻤다. 이번 계기를 통해 앞으로도 글을 쓰는 것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계속해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제 11 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156


한예성

향긋한 소나무 아파트

조규희

안전 가옥

김민서

잘락 발리(Jalak Bali)

김가온

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강 율

토리와 뚜뚜의 코모도섬 대모험

정가온

누나에게

김보현

말레오

황은솔

다움이에게

박서준

소나무 숲 놀이터

후원: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57


목 차 수상작품

초등부

159

대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동시)향긋한 소나무 아파트 / 한예성(ACS, 5 학년) (동시)보고르 센툴 생태교육숲

160

최우수상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장상 (동화)안전 가옥 / 조규희(BSS, 6 학년)

163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수필)잘락 발리(Jalak Bali) / 김민서(JIKS, 6 학년)

166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동시)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 김가온(JIKS, 6 학년)

169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동화)토리와 뚜뚜의 코모도섬 대모험 / 강 율(MSA, 4 학년)

170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편지)누나에게 / 정가온(JIKS, 6학년)

173

한-인니산림협력센터 (동시)말레오 / 김보현(JIKS, 4학년)

176

한인니문화연구원상 (편지)다움이에게 / 황은솔(BSJ, 6학년)

177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동시)소나무 숲 놀이터 / 박서준(SPH, 2학년) (동시)폭포에서 만난 친구들

181

수상소감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58

182


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

수상작품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59


대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향긋한 소나무 아파트

동시

한예성(ACS, Anglo-Chinese School, 5 학년)

보고르 센툴 숲 속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 아파트는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양산 바람 따라 춤추는 초록색 풍선

‘마음씨 착한 동물들에게는 무료 분양’ 집 없는 산새에게 보금자리를 나눠주는 소나무 아파트 분양사무소의 다람쥐 소장님 어느 날, 향기로운 소나무 아파트에 구렁이 도둑이 나타났다! 소나무 아파트에 둥지를 튼 끄나리* 부부 점박이 알 세 개를 노리는 욕심쟁이 * Burung Kenari; 카나리아

솔방울 폭탄을 던져라. 뾰족뾰족 솔잎 화살을 쏴라. 혀를 날름거리는 악당에게서 산새 알을 지켜준 마음씨 좋은 이웃들 정겨운 노랫소리 번지는 향긋한 소나무 아파트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0


보고르 센툴 생태교육숲

동시

주말마다 유쾌해지는 우리 가족 엄마는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아빠는 빨리 가자고 빵빵빵 형은 게임 얘기를 주절주절 정신이 하나도 없네

바람은 솔솔 요람처럼 흔들리는 차 안에서 꾸벅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어느새 숲 어귀

땀 뻘뻘 흘리며 뱀 나올까 벌 나올까 벌벌 떨지만 인도네시아에 뱀이 많다는 건 뜬소문이었나 등산은 힘들다는 건 괜한 걱정이었나

소나무 위에서 짹짹대는 새소리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산 꼭대기에서 도시락을 먹고 나면 잠이 솔솔

이제 다시 밑으로 내려갈 시간 올라갈 때는 한 시간 내려갈 때는 사십칠 분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1


화끈거리던 발에 날개가 달렸네. 빨라지는 발걸음

집에 가서 엄마한테 발 마사지 해달라고 응석을 부리려 했는데 푹 쓰러진 엄마 발을 마사지해주는 사이 좋은 형제

주말마다 고마운 자연 쉼터에서 함께하는 우리 가족의 유쾌한 등산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2


최우수상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장상

안전 가옥

동화

조규희(BSS, Binus School Simprug, 6 학년)

“테오야, 생일 축하해!” 근처

맹그로브

나무

뿌리에서

태어난

또래

친구들이

알록달록

꾸며진

테오의

생일

파티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 요기, 네 생일선물이야” “우와, 이건 실지렁이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지. 고마워.” 싱글벙글 선물을 받아든 테오 옆에서 제일 친한 방카가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방카는 지난 한 달 동안 밀물에 밀려왔다, 촘촘한 맹그로브 나무 뿌리에 걸려서 발이 묶여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녔다. 그 쓰레기들 틈에서 반짝이는 것들만 모아 테오의 생일 선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방카가 부끄럽게 선물을 내밀자 테오는 “우와, 진짜 멋져, 직접 만든거야? 고마워 방카.” 라며 바로 목에 걸었다. 그때,

“처얼 썩~ 철썩!” 바닷물이 파티장으로 몰려왔습니다. 화창한 썰물 오후 시간에 무슨

일인가 보니, 초대받지 못한 왕 도마 뱀이 뚱뚱한 꼬리로 물탕을 튀기며 파티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맹그로브 나무 숲에서 포식자인 왕 도마뱀이 어슬렁어슬렁. 테오의 생일파티장을 보고,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3


“펑 펑!” 큰 콧구멍에서 콧김을 뿜어 내는 심술 맞은 왕 도마뱀 세 마리는 파티장 주위를 맴돌고, 물고기들을 위협했다. ”너희들은 모두다 오늘 우리의 저녁이다.” 깔깔깔 웃으며 연시 꼬리로 맹그로브 뿌리를 내리쳤다. 그때마다 파티장으로는 진흙탕 바닷물이 꿀렁꿀렁 몰려들었다. “윙~어으 엉~ 윙.” 큰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처럼 생긴 맹그로브 나무 뿌리는 괴상한 울림 소림을 냈다. 테오와 방카는 너무 무서웠다. 친구들은 어느새 뿔뿔이 각자의 안전한 맹그로브 나무 뿌리 집으로 도망쳤다.

인도네시아 해안에는 짠 바닷물에 뿌리를 내린 맹그로브 나무가 숲을 이루며 무성한 푸른 잎을 흔들어준다. 그래서 항공사진이나 위성 사진에 인도네시아의 해변을 보면, 어디까지가 육지인지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구별이 안가는 경계가 모호한 아름다운 초록 해안이 펼쳐진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풍경 좋은 해변에 리조트를 건설한다며 맹그로브 나무를 잘랐고, 수출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새우 양식장에 밀려서 맹그로브 나무는 또 자리를 내줬다. 거기다 해양 오염과 바다로 밀려온 쓰레기도 맹그로브 숲을 병들게 했다. 그래도 튼튼한 맹그로브 나무 뿌리는 테오와 방카, 친구 물고기들의 안전한 방패이자 안전가옥이 되어 주었다. 왕도마뱀 들은 촘촘한 뿌리 사이를 뚫을 재간이 없어서 ‘그림의 떡’을 보듯 물고기들을 위협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거대한 물기둥이 보이더니, 누군가 “해일이다. 스나미야!”라고 소리쳤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4


그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중 방카는 정신을 잃었다. 테오는 눈을 꽉 감은 채 방카를 품에 안고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얼마 뒤, 넘실대던 파도가 잔잔해졌다. 물고기들을 위협하던 왕 도마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맹그로브 나무 뿌리 사이사이에 몸을 피신했던 물고기들은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방카, 정신차려!” 테오도 방카를 흔들었다. 다행히 방카도 기운을 차렸다. 둘은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기뻤다. 쓰나미가 지나간 테오의 집은 햇볕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 위를 보니, 푸른 맹그로브 나뭇잎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방카의 집은 처참하게 뿌리가 뽑혀 사라지고 말았다.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도 들렸다. “맹그로브 나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네가 싹 사라질 정도로 해일 피해를 당했을 거야.” “암 그렇지요, 맹그로브 나무 덕분에 우리 아기가 살았어요.” “어서 맹그로브 나무 묘목을 심자고!” 해일로 가지가 잘려나가고, 뿌리가 뽑힌 맹그로브 나무 옆에는 분주한 사람들의 손길로 새로운 작은 맹그로브 나무 묘목이 심어졌다. 사람들은 그 동안 맹그로브 나무 뿌리의 틈과 틈 사이에 쌓이고, 쳐 막혀있던 쓰레기도 치웠다. 맹그로브 나무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건, 테오와 방카 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테오와 방카는 태어나 자란 집을 잃었지만, 새 맹그로브 나무 뿌리에서 안전하고, 행복한 보금자리를 다시 만들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5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잘락 발리(Jalak Bali)

수필

김민서(JIKS, Jakarta Indonesia Korean School, 6 학년)

예전에 사파리에 갔던 나는 잘락 발리라는 새를 보게 되었다. 몸집이 작고 앙증맞은 새였다. 어찌나 활발한지 사진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날아가 버려, 동영상으로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윤기 있는 하얀 깃털과 날렵한 몸매의 이 새가 예뻐 보였다. 동물소개가 적혀 있는 간판에는 멸종위기종이라고 쓰여 있었다. 잘락 발리가 귀여웠지만 다른 종류의 새도 워낙 많았던 탓에, 나는 이 새를 금방 스쳐 지나갔다. 사파리에선 박쥐도 보고 레드판다(레서판다, lesser panda)도 보고 신기한 동물들을 많이 보았다. 동물들에게 당근과 바나나를 주었는데, 엄마는 한국에서는 이런 사파리 구경은 쉽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로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아기자기한 동물 모양으로 만든 모자, 가방, 머리띠 등등 볼거리가 많았다. 이런 귀여운 소품들을 볼 때면 기분이 한층 좋아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며 열심히 쇼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잘락 발리 모양의 모자와 가방 등이 의외로 많이 팔고 있었다. 나는 이 중에 잘락 발리 모자를 하나 샀다. 모자를 소중히 안고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마무리까지 잘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달리며 궁금증이 생겼다. 그 많은 새 중 하필 잘락 발리 기념품을 유난히 많이 팔았던 걸까? 다른 새 모양의 기념품을 만들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런 궁금증으로 여러 추측을 해 보았다. 잘락 발리가 인도네시아 대표 새 중 하나인 게 아닐까? 혹시 나는 몰랐지만 잘 알려진 유명한 새가 아닐까? 아무리 멸종 위기인 새여도 그렇게

기념품까지

파나?

왜냐하면

나에게는

잘락

발리라는

새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사파리에서 집으로 가며 잘락 발리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날 차에서 피곤했는지 자세히 찾아보지 못해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냥 시간은 지나갔다. 몇 달이 지나 잘락 발리 모자를 보고 그때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에 다시 관심이 가게 되었다. 이번엔 자세하게 검색을 해보니 나의 궁금증의 답을 많이 알게 되었다. 잘락 발리는 발리섬에서 10마리쯤밖에 남지 않은 너무나 귀중한 새였다. 1994년에는 이 새가 거의 멸종 될 것으로 예상하였던 듯하다. 잘락 발리는 이름처럼 발리 섬에 사는 새다. 몸은 하얗고 눈 주변은 파란색, 날개와 꼬리 끝은 검은색이다. 이토록 귀하디 귀한 새였다니. 내가 이 새를 실제로 본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걸 몰랐던 나는 잘락 발리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6


잘락 발리 새는 발리를 대표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발행된 동전 200루피아 동전에도 잘락 발리 그림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새가 참새인 줄 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무관심 했었나 보다. 어쨌든 그만큼 인도네시아 발리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라 생각한다. 전 세계에 100마리 미만의 새가 있을 것으로 추정을 한다고 한다. 심각 수준의 멸종 위기 동물이다. 이 새의 개체 수가 늘어나게 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또 인간이다. 이런 희귀한 새들은 암시장에서 큰돈에 거래가 된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새를 잡아서 비싸게 파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파렴치한 행동은 새들의 개체 수 증가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사람들 때문에 잘락 발리가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멸종동물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는 많은 분께 존경심이 들었다. 이렇게 멸종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빛을 발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년 뒤쯤 나는 사파리에 다시 한번 가족들과 방문하게 되었다. 예전에 샀던 잘락 발리 모자 인형을 안고 갔다. 이 인형은 1년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인형 중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소중한 인형이 되어 있었다. 사파리에 도착하여 바로 새 공원으로 갔다. 잘락 발리 몇 마리는 새장 안에 있었고, 또 몇 마리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멸종 위기 동물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차게 날아다니는 새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동물원에 있는 것도 어쩌면 자유롭지 못할 것 같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게 나은 것 같다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많아져서 무리를 이루어 자유롭게 살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잘락 발리 덕분에 나는 발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발리를 아직 못 가보았다. 코로나가 안정되고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우리 가족은 꼭 발리부터 놀러 가기로 한 상황이다. 나는 잘락 발리 덕분에, 발리를 가려는 목표가 생겼다. 발리에 가서 이 새들을 보기로 말이다. 이 새를 위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고민해 보았지만, 너무 막연했다. 내가 동물 박사도 아니고, 개체 수를 늘리는 데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매일 조금씩 실천해 보기로 하였다. 사실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들 말이다. 우선 코로나 이후 우리 집의 쓰레기가 많이 늘었다. 급격히 늘어난 택배로 상자 비닐 포장지 등이 엄청나게 늘었다. 나는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을 고민해 보기로 했다. 간혹 사 먹는 포장 음식으로 인해 일회용 용기의 쓰레기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아졌다. 우리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의 양만 해도 이 정도인데, 인도네시아 전체 쓰레기는 얼마나 될까? 내일 당장 쓰레기를 확 줄일 수는 없겠지만, 좋은 해결점을 찾으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실천을 해보려 한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7


단연 잘락 발리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루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엄청난 종류의 동물들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부메랑이 되어 우리 인간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이라는 것 또한 모두 안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플라스틱을 사용하고 버리며 자연도 계속 개발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국토의 반 이상이 산림이고 세계 3위 열대 산림 자원 보유국이다. 그렇게 풍부한 자원이 있기에, 예로부터 개발이 활발히 진행 되어왔다. 힘센 나라들이 독차지하려고 전쟁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동물들의 터전이 사라져 가고 있다. 나에게 있어 인도네시아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나라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산림이 파괴되는 것이 더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물론 이런 것의 속도를 늦추려는 노력과 흐름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동물들과 인간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넓은 숲 속에서 잘락 발리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8


최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동시

김가온(JIKS, Jakarta Indonesia Korean School, 6 학년)

우리 집 정원에 우뚝 서 있는 기다란 선인장 뜨거운 해를 피해 선인장에 몸을 숨긴 작은 도마뱀 초록 도마뱀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는 길고양이 한껏 몸을 낮춘 길고양이를 멈칫 지켜보는 나 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앞집 큰 그늘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머리카락 람부탄 옆집 커다란 나뭇잎 거대하고 붉은 꽃에서 태어난 노란 바나나 끝집 초록 피부 주황 속살 까맣고 둥근 씨가 다닥다닥 파파야 다시 돌아오는 길 뒷집 묵직하고 탐스럽게 늘어진 침 꼴깍 망고 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우산에 구멍 날라 빗소리가 우박 소리 같은 우기 나무 그림자를 찾아라 땅도 하늘도 이글이글 건기 맑은 날이면 저 멀리 산도 또렷하게 보이는 선선한 아침 해가 떠난 자리를 그리워하며 시선을 빼앗는 노을빛 저녁 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마주치는 눈빛 따뜻한 웃음 반가운 인사 나를 따라 천천히 걷다가 내가 뛰면 같이 뛰고 그러다 신이 나서 빙글빙글 함께 춤추는 나무, 하늘, 달, 별 맨날 똑같은 것 같아도 매일매일 다른 풍경 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69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동화

토리와 뚜뚜의 코모도섬 대모험 강 율(MSA, Morning Star Academy, 4학년)

지구 바로 아래에는 별이 하나 있었다. 그 별은 참 아름다웠다. 어떤 외계인들이 그 아름다운 별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그 외계인들은 지구에 있는 인도네시아가 어떤지 보러가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토리, 뚜뚜, 조심히 잘 갔다 와!” 토리와 뚜뚜의 제일 친한 외계인 형이었다. 그렇게 토리와 뚜뚜는 인도네시아 여행이 시작되 었다. 그들이 맨 처음 도착한 곳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코모도 섬이었다. 코모도 섬에는 코모도 드래 곤이란 도마뱀이 산다. 희귀한 이 도마뱀은 현재 멸종 위기종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1980년 코모도 드래곤이 사는 곳을 코모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토리와 뚜뚜는 배를 타고 코모도 섬으로 향했다. 물론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도 잊지 않고. 이 제 코모도 섬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이 못 들어오게 막았다. “왜 그러는 거예요!” 토리가 소리치자 그 사람이 말했다. “코모도 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해! 게다가 섬 안에 일부 지역을 제외하 고는 출입이 불가능하고 반드시 저기 있는 인도네시아 안전요원이 함께 다녀야 해!”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이 저 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게다가 너희 같은 꼬맹이들이 코모도 섬으로 들어가는 건 더욱더 안되지! 너희가 코모도 섬 으로 들어가는 배를 탄 것도 놀랍다!”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이 건방지게 말했다. “알았어요!” 토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수풀 사이로 숨은 다음 더 큰 인간으로 변신했다. 그러고는 다 시 수풀에서 나왔다. “너도 이렇게 해봐” 토리가 작은 목소리로 뚜뚜에게 속삭였다.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은 어른으로 변신한 토리 를 보고 말했다. “어흠, 입장료를 내세요.” 하지만 토리는 돈이 없었다. 토리는 재빨리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한테서 도망쳤다. 계속 기다리던 뚜뚜는 화를 내고 있는 코모도 안내요원 옆에 나있는 작은 길을 발견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0


“오! 한번 가볼까?” 뚜뚜는 그 길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거기엔 어떤 표지판이 있었다. 뚜뚜는 표지판을 읽기 시작했다. 코모도 군도에 있는 플로레스 섬에선 키가 작은 난쟁이 부족의 뼈가 발견됐다. 그들 은 오늘날 호빗족이라 부른다. 뚜뚜는 다시 그 비밀스러운 길로 가기 시작했다. 한편, 정신 없이 달리던 토리는 숨을 헐떡거리며 멈춰 섰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헐떡거려지 는 찜통더위에 달리기까지 했으니. 코모도 드래곤들이 어떻게 이 더운 곳에서 생존해 나가고 있 는지 의문이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뛰어넘고 이 섬에 닿았을 코모도 드래곤의 아주 아주 긴 모 험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섬의 환경과 먹이에 따라 진화해 왔을 끈질긴 생명력을. 후드득,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졌다. 소나기를 피하려 토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근처 에 동굴이 있었다. 그 동굴에는 어떤 표지판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육지 코모도 드래곤 구역. 육지 코모도 드래곤은 먹이가 별로 없어서 주로 선인 장을 먹는다. 토리는 육지 코모도 드래곤이 있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한편 뚜뚜는 그 비밀스러운 길로 걷고 또 걸었다. 방금 비가 와서 그런지 습하면서 시원했다. 저 멀리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 생긴 코모드 드래곤이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러 고는 바위에 붙어 있는 해조류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다 코모도 드래곤이다. 바다 코 모도 드래곤들은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바다에 오래 있지는 못한다. 바다 코모도 드래곤이 욕심을 부리고 바다에서 오랜 시간 해조류를 먹으면 썰물이 올 때 목숨 이 위험해 진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뚜뚜의 등을 만졌다. 뚜뚜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그 무언가가 뚜뚜를 기절시켰다. 한편, 토리는 드디어 육지 코모도 드래곤을 만났다. 선인장을 먹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저기 어떤 사슴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육지 코모도 드래곤들은 선인장을 먹다 말고 풀숲을 지나가던 사슴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사슴에게 돌진하여 사슴을 먹어치웠다. 토리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또 다른 코모도 드래곤이 토리를 발견하고는 토리를 먹으러 달려왔다. 토리는 재빨리 코모도 드래곤으로부터 도망쳤다. 코모도 드래곤의 턱 아래 독샘에는 엄청나게 많은 치명적인 세균이 있어 위험하다. 한편, 뚜뚜가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뚜뚜를 줄로 묶어 놓고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뚜뚜는 그 무언가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바로 뚜뚜와 토리의 제일 친한 외계인 형 파인이었다. “도... 도대체 왜!” 뚜뚜가 말하자, 파인이 대답했다. “하하하! 사실 난 널 말 잘 듣는 최강의 코모도 드래곤과 바꾸기로 했어. 왜냐하면 코모도 드 래곤은 몸길이 3미터 70킬로 그램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마뱀이니까!” “이럴 수가! 그럼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도 악당이었군. 어쩐지 처음부터 느낌이 찜찜하더 라.”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1


파인이 뚜뚜를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거기에는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이 엄청나게 큰 코 모도 드래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파인은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야기를 다 마친 파인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왜 가격이 갑자기 오른 거야?” 파인은 화난 표정으로 뚜뚜의 손을 잡고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한테 주려고 하던 그 때였 다.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모두 피해요!” 토리가 소리쳤다. “토리야!” 뚜뚜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은 너무 놀란 나머지 엄청 큰 코모도 드래곤의 줄을 풀어 버렸다.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은 너무 놀라 그대로 도망쳤다. 두 마리의 코모도 드래곤들도 코모도 섬을 지키는 사람을 쫓아갔다. 뚜뚜는 토리에게 파인이 악당이었단 사실을 알려 주었다. 토리는 너무 화가 나서 파인에게 외계인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 파인이 사 라졌다. 뚜뚜와 토리는 할 수 없이 외계인 행성에서 코모도 섬에 간 이야기를 썼다. 이제 토리와 뚜뚜 는 인도네시아를 향한 두 번째 모험을 시작하려 한다. “가자, 뚜뚜!” “가자, 토리!” 반짝이는 눈을 마주친 두 친구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파인을 잡으러!”

강 율 학생이 또박또박 눌러쓴 &lt;토리와 뚜뚜의 코모도섬 대모험&gt; 원본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2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누나에게 편지

정가온(JIKS, Jakarta Indonesia Korean School, 6학년)

안녕 누나! 한국에도 코로나 환자가 많이 나와서 불안하고 답답하지? 나도 너무 답답해. 친구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싶은데, 맨날 집에만 있어야 하니 심심해. 방학인데도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 었어.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우리의 기분을 위해 안예르(Anyer) 바 닷가로 가자고 하셨어. 누나도 답답할 텐데 우리만 와서 미안해. 우리 가족은 여행 때마다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잖아? 이번 여행 에서도 그런 추억을 기대했어. 첫날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일찍 자고, 둘째 날에 우리는 엄마 가 아는 인도네시아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보트를 타고 작은 섬에 가기로 했어. 오랜만에 배도 타 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쐴 생각을 하니 흥분이 됐어. 스노클링도 하고 수영도 하고, 작은 누나와 공놀이도 할 생각이었어. 멀리 보이는 크라까다우 화산이 또 터질까봐 불안하기도 했지만 현지 인 아저씨 말로는 지금은 자고 있는 중이라 그럴 일이 없대. 다행이지? 아마 누나가 알았으면 절대 여행을 가지 못하게 했을 걸. 하하하. 푸른 하늘 위로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바다에서는 고기잡이 배들이 열심히 고기를 잡고 있었어. 마치 그림 같고,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공장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어. 당연히 매연이겠지? 마치 검은 악마가 푸른 하늘을 검은색으로 물들일까 겁났어. 더 놀랐던 건, 보트를 타고 섬에 가까워지니까 섬 주변에 뭔가 알록달록한 띠 같은 게 보이는 거야. 나는 ‘저게 뭘까?’ 궁금했어. 그런데 누나, 그 띠들이 뭐였는지 알아? 나는 정말 깜짝 놀 랐어. 섬에도 쓰레기가 가득했지만, 해변에는 컵라면, 과자, 비닐봉지 등 온갖 쓰레기가 둥둥 떠 있었어.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어. 그리고 스노클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 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깨끗한 곳에서 물고기들을 보기로 했어. 아빠와 작은 누나와 함께 물안경을 쓰고 물고기를 찾아 다녔어. 그런데 바닷속이 너무 뿌얘서 잘 보이지 않는 거야. 물고기들도 별로 안 보이고 해초 사이사이에 비닐봉지들이 걸려 있었어. 나는 그걸 본 순간, 비 닐봉지를 먹고 죽은 고래, 거북이 생각이 났어. 누나 ‘저 비닐봉지들을 물고기들이 먹으면 어쩌지?’ 내가 치워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저 많은 걸 언제 치워.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을 것 같았어. 작은 누나와 함께 쓰레기들을 주 워 비닐봉지에 담았어. 그냥 가면 바다와 물고기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결국 노는 걸 포기하고 다시 배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어. 돌아오면서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화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3


가 났어. 그런데 누나, 더 화가 났던 것은 그 쓰레기를 보고도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거였어. 쓰레기 몇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온 내 자신이 너무 창피했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잔인할까?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셋째 날에 우린 다른 바닷가로 가기로 했어. 그런데 차를 타고 좁은 골 목길을 지나가는데 현지인들이 사는 집 주변에 쓰레기가 여기 저기 쌓여 있는 거야. 오 마이 갓. 누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지? 왜 저 사람들은 쓰레기를 치우지 않을까? 거기에다 염소와 닭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더라고. 만약에 염소랑 닭이 바이러스에 걸리 면 같이 사는 주민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잖아. 나는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어. 나 같으면 저 쓰레기를 치우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을 것 같은데. 아무튼 난 그곳을 빨리 벗어 나고 싶었어. 우리가 오늘 간 바닷가는 어제 간 곳보다는 훨씬 깨끗했어. 푸른 바다를 보니 기 분이 좀 나아졌지. 살짝 재미있었던 일도 있었어. 배가 고파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거위 3마리가 나타났어. 꽥, 꽥, 울어대며 나를 쫓아다니는데 너무 웃겼어. 그곳에 있던 어떤 아 저씨가 얘기해 준건데, 개가 집을 지키는 것처럼, 거위도 용감해서 집을 잘 지킨대. 그리고 개 와 강아지 몇 마리도 있었어. 그런데 모두 비쩍 말라서 불쌍해 보였어. 나는 우리가 가져 간 고 기와 빵을 좀 나눠줬어. 거위와 개들은 어떻게 이곳에 살게 됐을까?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 겠지만 먹을 거라도 잘 줬으면 좋겠어. 아, 참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기로 해놓고 슬픈 얘기를 했네. 누나, 미안. 이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안 오나 봐. 어제 본 바다보다 깨끗하고 쓰레기도 적었거든. 그 래서 물안경을 쓰고 물고기도 실컷 구경했어. 바다 수영장이 만들어진 곳이 있더라고,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야. 신기하지? 그곳에서 다양한 물고기들이 많았어. 종 일 거위, 개, 물고기들과 놀았어.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린 것 같았어. 그리고 우리를 안내해 준 분이 새벽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이곳에서 낙지와 게를 잡을 수 있다고 해서 내일 아침에 다시 오기로 하고 우린 호텔로 돌아갔어. 다음날 아침 일찍 낙지와 게를 잡기 위해 어제 그 바닷가로 다시 갔어. 현지인들이 낚싯대로 낚지를 잡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어. 낚싯대에 게를 매달아서 바위 밑이나 돌 사이에 갖다 대면 낙지가 게를 잡아먹기 위해 다리를 뻗는 거야. 그때 아저씨가 낚싯대를 얼른 위로 올려. 그러면 낙지가 올라와. 신기하지? 나한테 해보라고 해서 해봤는데 나는 한 마리도 못 잡았어. 낙지를 잡은 아저씨들이 엄마한테 가져와서 낙지를 사라고 했어. 엄마는 별로 사고 싶지 않았지만 그분 들을 위해서 낙지를 사는 것 같았어. 도와주길 잘했지? 그분들은 낙지를 팔아서 가족과 먹고 살 아야 하니까. 나는 낙지를 구경하고 싶어서 비닐봉지를 뜯어서 아이스박스에 담았어. 그런데 이 게 뭐야! 낙지 절반이 새끼 낙지인 거야. 새끼 낙지를 본 순간 너무 불쌍하고, 이렇게 작은 새 끼를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누나, 내가 낚시를 좋아하잖아. 그래서 낚시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가끔 보는데, 거길 보면 한국에는 금어기가 있고, 잡을 수 있는 물고기 크기가 정해 져 있더라고, 그물도 작은 것을 쓰면 안 되고. 그런데 인도네시아에는 그런 게 없나 봐. 나는 낙지 새끼들이 불쌍해서 작은 누나랑 같이 새끼 낙지들을 풀어줬어. 새끼 물고기들이 커서 또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4


새끼를 낳아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데, 새끼 물고기를 다 잡아 먹으면 큰 물고기들이 사라질 거고, 결국 이러다가 물고기들도 다 멸종되고 말 거야. 책에서 미래의 동물원에 대해 본 적이 있어. 미래에는 동물들이 다 멸종돼서 아이들이 동물 그림이 붙여져 있는 동물원을 구경하게 될지도 모른대. 코뿔소도, 코끼리도, 바다 거북이도 멸 종돼 가고 있잖아. 바다가 오염되면서 바다 생물들도 점점 멸종해 가는데 이렇게 어부들이 작은 새끼들까지 다 잡아가면 언젠가는 우리의 후손들이 낙지를 못 볼지도 몰라. 사람들이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어. 누나, 이것은 좀 아닌 것 같아. 그렇지? 누나, 그날 밤에 나는 정말 무서운 꿈을 꿨어. 커다란 낙지들이 빨판으로 사람들을 들어서 던 지고, 검은 매연이 하늘에 가득 차 있는 꿈. 사람들은 매연 때문에 콜록거리면서 낙지를 피해서 도망 다니고. 그런 꿈을 꾸다니. 잠에서 깼지만 꿈이 아닌 것 같았어.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모두 죽겠지? 결국 사람이 자연을 파괴했으니 그 대가를 받겠지. 누나, 내가 철이 들었나 봐.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어쨌든 이번 여행은 쓰레기로 시작해 서 쓰레기로 끝난 것 같아. 우울한 여행이었어. 하지만 더 이상 환경을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접 배운 것 같아. 우린 더 더럽혀지기 전에 지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해. 환경오염 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리고 사람들이 실천하게 해야 해. 이번에 경험한 것을 카메라로 찍어서 동영상으로 올렸다면 좋았을 텐데. 다음엔 꼭 동영상으로 찍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어. 누나, 이런 마음보다 더 중요한 건 실천하는 거겠지? 누나에게 약속할게 꼭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다 고. 누나, 저 멀리서 아낙 끄라까타우 화산이 빨간 눈을 부릅뜨고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5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동시

말레오 김보현(JIKS, Jakarta Indonesia Korean School, 4 학년)

집에 돌아가는 길을 잃은 걸까 술라웨시 섬 한곳에 외롭게 정착한 새 말레오

매일 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을까 눈 주위가 노랗게 부은 새 말레오

꿈속에서라도 가족이 보고 싶은 맘인 걸까 맘처럼 몸도 새까맣게 탄 새 말레오

행운을 준다는 이야기에 기웃기웃 거리는 사람들 때문일까 굽은 등을 곧추세우며, 아무렇지 않은 척 푸른 하늘 아래 부릉부릉 말레오

직장이나, 코로나 같은 상황으로 고향인 한국에 가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국 교민들의 마음을 인도네시아에만 산다는 새 ‘말레오’에 비유하여 시를 지어 보았습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6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다움이에게

편지

황은솔(BSJ, British School Jakarta, 6 학년)

안녕 다움아.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알려줄게! 먼저 인도네시아는 18,200여 개의 섬이 있고 세계에서 제일 섬이 많아 그래서 탐험할 곳도 많지. 인도네시아는 바다와 산으로 인기 많아! 인도네시아의 인구는 약 2억 7,600만 명으로 미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세계 4위 나라고, 섬나라 중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아. 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어 (Bahasa Indonesia)를 사용하는데 언어는 말레이시아어랑 비슷해 그리고 글자는 영어를 사용해. 세계에서 제일 무슬림 비율이 많은 국가야. 섬마다 대표적인 종교가 있는데 예를 들어 자바는 무슬림, 발리 힌두교 등등이 있어.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섬은 자바(Java)이고 많은 여행지가 있어. 예를 들어 브로모, 보로부두르 사원, 프람바난 사원 등등 있어. 인도네시아는 많은 섬으로 인해 자연 환경에 맞춰 많은 동물들이 있어 예를 들면 표범, 승냥이, 긴팔 원숭이, 흰찌르레기, 술라웨시 섬에는 아노아와 바비루사라는 원시적인 형태의 물소와 멧돼지가 있어. 내가 가본 몇 군데의 멋진 장소들을 소개 해줄게. 카와 이젠(Kawah Ijen) 화산 이 화산은 지금까지 몇 백 년 동안 활동 중이야. 이젠은 밤에 나타나는 블루 파이어로 유명해. 이 블루 파이어는 유황 가스인데 아침에는 노란색이지만 햇빛이 가려지면 색갈이 변해. 이 화산의 블루 파이어를 보러 가려면 새벽 12시부터 나가고 두세 시간을 걸어야 해. 그리고 이젠은 높기 때문 온도가 많이 낮아.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이젠 입구에 가면 수레를 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힘들 수 있으니 돈을 받고 수레에 태워 정상까지 데려다 줘. 새벽부터 유황을 캐는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은 산 위에서 유황을 캐고 다시 밑으로 60킬로그램 자리 유황을 들고 내려가. 브로모(Gunung Bromo) 브로모도 이젠 화산처럼 활동 중이야. 그런데 2011년에 폭발을 크게 했어. 브로모에 가려면 센 모래바람을 뚫고 차로 가야 해. 그 다음에 언덕을 지나는데 2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말을 타는 거야. 차에서 내리면 말을 끄는 사람들이 있는데 돈 내고 말을 빌리는 거야. 두 번째 걸어서 가는 거야 그러면 꼭 안경이나 선글라스가 필요해. 왜냐하면 모래바람이 눈으로 들어갈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7


수 있거든. 정상에 다오면 동그랗게 구멍이 있는데 거기는 바로 분화구야! 그 안에 사람들이 꽃을 던져. 왜냐하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소원을 빌면서 꽃을 던지면 소원을 이뤄줄 거라고 생각 하거든. 이야기를 들려줄게. 먼 옛날 왕과 왕비는 신에게 막내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어. 그런데 왕과 왕비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신을 재앙을 내리려고 했지. 막내는 그걸 알고 스스로 브로모 화산으로 몸을 던져서 나라를 구했다고 해. 므라피 (Mount Merapi) 이 화산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활동이 왕성한 화산으로 알려졌고 2010년에 크게 폭발했어. 이 화산은 아직도 활동적으로 연기를 뿜고 있어.

스메루 (Mount Semeru) 이 화산도 아직 활동 중이며 등산 아니면 정상에서 화산재 구름을 구경해. 이 화산은 브로모와 가까운 화산이야. 발리 발리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섬이야, 관광지로 유명하지. 맞다! 발리는 인도네시아보다 더 유명해! 2019년에 대략 628만 명쯤의 관광객들이 왔어. 발리는 바닷가로 유명해, 바다가 깨끗해서 스노클링도 하고 서핑도 할 수 있어. 바다에는 신기한 동물도 있어. 그리고 보트를 타고 조금만 가면 돌고래들이 바다에서 즐겁게 헤엄치는 것도 볼 수 있어. 발리에는 92%의 힌두교 사람들 있어서 많은 공연과 사원들을 볼 수 있어. 뜨갈랄랑 라이스 테라스(Tegalalang Rice Terraces) 계단식 논인데 그 주위를 걸을 수 있어.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모든 게 초록 초록해. 위를 보면 높은 나무들이 있고, 앞을 보면 예쁜 논이 있어. 악마의 눈물(Devil’s tears) 발리랑 가까운 섬인데 섬의 절벽 끝으로 가면 예쁜 파도를 볼 수 있어. 파도가 절벽을 부딪치면서 물이 튀기는 모양이 엄청 놀랍고 신기해! 하지만 파도가 세서 만약 떨어지면 목숨을 잃을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해!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8


꾸따 비치(Kuta Beach) 꾸따 비치는 해변보다 파도로 유명해. 이 비치에서는 서핑 하기 딱 좋아! 그리고 현지인 사람들이 싸게 서핑도 가르쳐줘. 그리고 해가 지는 것도 훌륭해, 거기서 엄청난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어. 하지만 우기에는 쓰레기가 많아서 문제이기도 해. 몽키 포레스트 (Monkey Forest) 발리의 장점인 환경을 구경할 수 있어. 여기에는 말 그대로 원숭이들의 숲이야! 거기에는 동물원처럼 원숭이들이 갇혀 살지는 않고 맘대로 움직여. 그리고 나갈 수도 있어. 원숭이들은 아주 귀엽지만 귀여운 외모에 속으면 안 돼! 언제 너의 물건 중 하나를 가져갈 줄 몰라. 지갑을 가져갈 수도 있고, 선글라스를 가져갈 수도 있어. 코모도섬(Pulau Komodo) 코모도섬(Pulau Komodo)는 플로레스 섬이랑 가까운 섬이야. 코모도 섬에는 말 그대로 코모도가

많은

섬이야.

코모도는

거대한

몸집과

무서운

생김새로

유명했지만

우리가

코모도왕도마뱀의 서식지를 망가트려서 지금은 멸종 위기야. 그래서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먼저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코모도왕도마뱀은 위험해! 그 이유는 다 미생물 때문이야. 코모도의 침에는 온갖 유독한 미생물이 있어 코모도에게 물리면 그 독에 중독되어 죽게 돼. 그렇지만 이 침이 나쁜 것만은 아니야, 이 침 덕분에 코모도가 사냥을 할 수 있지. 사냥을 못하면 코모도는 굶어 죽었겠지. 코모도는 보통 2.5m쯤 되고 70kg쯤 돼. 하지만 가장 큰 코모도는 3.13m쯤 되고 몸무게는 166kg이었어! 자카르타 드디어 내가 사는 곳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대해 알려줄게! 먼저 자카르타는 건물이 한국만큼 많지 않아. 그리고 아파트도 많이 없어. 인도네시아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바구니를

가지고

돌아

다녀,

돈을

부탁

하는

거야.

인도네시아에 많은 사람들은 돈이 많지 않아 그래서 길에서 주차를 도와주거나, 노래 틀거나 악기를 연주해, 근데 그게 끝이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 몸 전체를 은색으로 칠하는 사람도 있어. 그 색이 몸에서 안 씻어질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집을 살 돈이 없어 쓰레기장에서 집으로 쓸 거를 가져와서 써. 인도네시아에는

사람도

많아서

차들도

많지

근데

차들보다

많은걸

오토바이야.

인도네시아에서는 배달 앱이 많아, 거의 다 오토바이를 사용해. 그게 끝이 아니고 배달만 하는 게 아니고 사람들도 태워. 그러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꽤 많아. 인도네시아의 집에 대해서 이제 말해볼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주택이나 쓰레기 집에서 살아. 인도네시아의 도로를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어, 한 곳을 비싸고 큰 집이 많고 한곳은 조금하고 쓰레기로 만들어진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야. 인도네시아에서는 다 똑같이 안 살아, 한마디로 다 돈이 똑같이 많이 있지 않다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부자, 어떤 사람들은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79


반대로 돈이 없어 힘들게 산다는 거야. 인도네시아에는 공기가 안 좋아. 근데 다 말하는 거는 아니야. 어떤 곳은 많이 공기가 안 좋지만 어떤 곳은 코가 뚫릴 만큼 좋지. 먼저 좋은 곳에 대해서 얘기할게, 인도네시아는 자연 환경으로 유명해. 인도네시아에는 숲도 많고 산도 많아. 여기 덕분에 숨을 편하게 쉴 수 있고 초록색도 많아 눈도 건강해져. 하지만 그 반대로 공기가 안 좋은 곳은 많이 안 좋아. 어떨 때는 자고 일어나면

공기가

온통

뿌옇지만

점점

나빠지고

있어. 칼리만탄(Kalimantan)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섬인데 광산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점점 많이 베거나 태우고 있어. 계속 그렇게 되면 나무는 없어지고 공기는 더 나빠지겠지. 인도네시아의 길을 가다가 어떨 때 뭐가 타는 냄새가 나고 연기가 올라와!. 다름 아닌 쓰레기 때우는 냄새야. 단지 냄새만 나오는 게 아니고 환경도 오염시켜. 쓰레기에는 화학제품이 있어 타면 서 연기가

나고

공기를

오염

시켜. 인도네시아에

나쁜

공기는

차뿐만이

아니라

쓰레기에서도 발생해. 이것을 막기 위해 인도네시아는 유기농과 비유기농을 분리할 수 있는 쓰레기통을 같이 두고 있지만 많지는 않아. 짧게 말하자면 나는 인도네시아가 조금만 더 발전하면 엄청 좋은 나라가 될 것 같아. 그 이유는 지금 인도네시아는 인도를 만들고, 재활용 쓰레기통도 만드는 등 환경을 위한 많은 정책들을 만들고 있거든. 계속 하다 보면 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거고 깨끗한 나라가 될 거야. 지금 네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인도네시아는 조금씩 발전 하고 있어. 나도 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도록 생활하고 재활용도 잘해서 인도네시아를 더 깨끗하게 만들 거야! -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0

은솔이가 -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동시

박서준(SPH, Sekolah Pelita Harapan, 2 학년)

소나무 숲 놀이터

폭포에서 만난 친구들

길고 우뚝 솟은 소나무야

슝슝 나뭇잎들아

하늘까지 솟을 거니?

너는 나의 부채가 되고

너를 타고 구름 사탕 먹고 싶다

촤악촤악 폭포들아 너는 나의 샤워기가 되는구나

울퉁불퉁 바윗돌아 맨들맨들 바윗돌아

끽끽 원숭이들아

너를 타고 씽씽 미끄럼틀

너희는 부채 뒤에 숨어서 무엇을 하니?

오늘도 즐거운

꼬물꼬물 물고기들아

나의 소나무 숲

너희는 바윗돌 뒤에 숨어서 무엇을 하니?

알록달록 나뭇잎 촤악촤악 폭포들 원숭이 물고기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1

너는 나의 친구들


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

수상소감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2


대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한예성(ACS, 5 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PT. TAEWON INDONESIA

동시

향긋한 소나무 아파트 보고르 센툴 생태교육숲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3


최우수상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장상 조규희(BSS, 6 학년)

/ 최형우(ACS, 7학년) 동화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안전 가옥

Semarang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BTS 의 팬클럽 ARMY Indonesia 가 지민의 생일을 기념에서 8,735 그루 맹그로브 묘목을 심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자연과 인간 모두의 안전을 위한 활동이란 생각에 &#39;안전가옥’이란 제목을 생각하고, 맹그로브 나무 뿌리에 사는 작은 물고기들의 생일 파티에 위험이 닥치는 사건을 글로 써 봤습니다. 처음 공모전 도전이라 전혀 예상도 못했는데, 최우수상이라는 결과에 너무 기뻤습니다. 부족한 저를 최우상에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7 천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인도네시아. 섬과 섬 사이 해안선을 아름답게 해주는 맹그로브 나무가 사람과 자연의 안전선이 되도록 잘 가꾸는 일에 제 글이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4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김민서(JIKS, 6 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수필

잘락 발리(Jalak Bali)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안녕하세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 6 학년 김민서입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최우수상을 받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글을 쓰는 동안 인도네시아의 동식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에 살기에 만나볼 수 있는 동물과 식물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중 잘락 발리(Jalak bali)는 저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새입니다. 발리에서 잘락 발리(Jalak bali)를 많이 그리고 자주 만나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5


최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김가온(JIKS, 6 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동시

잘란 잘란 동네 한 바퀴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안녕하세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 6학년 김가온입니다. 저는 찌부부르에 있는 주택단지에 살고 있는데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산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멸치, 누룽지, 망치라고 이름 지어준 길고양이들 과 인사도 하고 이웃집 마당에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구경도 합니다. 산책은 인니어로 ‘잘란 잘란’입니다. 처음에 잘란 잘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 슨 뜻인지는 몰라도 빙글빙글 춤추며 뛰어가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종종 산책길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빙글빙글 춤추며 뛰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밤하 늘의 별도 달도 빙글빙글 돌며 따라옵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 갇혀 지내 는 날이 많아서 답답하고 몸이 무거운 날이 많은데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무척 행복한 기분이 듭니다. 여러분도 코로나 때문에 힘든 하루지만 잠깐이라도 산책을 하며 건강하게 보내 세요. 저에게 이런 좋은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6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강 율(MSA, 4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동화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토리와 뚜뚜의 코모도섬 대모험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제가 이렇게 상을 타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뽑힐 줄 몰랐는데 절 추천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그땐 더 열심히 노력해서 글을 쓰겠습니다. 제가 동물을 좋아해서 다음 주제는 동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만들어 놓은 책이 집에 더 있어요. 제목은 &lt;푸른 사자 호리니&gt;인데 이현 작가님의 &lt;푸른 사자 와니니&gt;를 읽고 재미있어서 그 책을 본떠 만들었답니다. 만일 다음 주제가 동물이 된다면 푸른 사자 호리니 1 편에서 4 편까지 공모 전에 올리겠습니다. 저를 추천해주신 분께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7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정가온(JIKS, 6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편지

누나에게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처음 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황했습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에서 우수상까지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족 여행에서 빠진 누나에게 여행 후기를 말해주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썼는데 쓰다 보니 할 말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오랜만에 간 여행이라 안예르 바다로 가며 부풀었던 마음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까워서 자주 갔었던 안예르인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호텔 앞과는 다르게 비위생적이고 오염된 바다와 환경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과 걱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사람들이 반성하고 인도네시아 환경에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합니다. 반짝이는 글감을 같이 찾아주시고 항상 옆에서

저를

부모님께

든든하게

감사하고

떠받쳐주시는

사랑한다는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환경을 관찰하고

환경을

위한

실천

활동을

하겠습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8


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상 김보현(JIKS, 4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동시

말레오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안녕하세요 자카르타 국제학교 4 학년 1 반 김보현 입니다.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이라는 좋은 기회로 상을 받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큰 공모전에서 상을 받게 되니 자신감도 조금 생기고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쓴 시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에만 사는 새 ‘말레오’를 통해서 직장이나, 코로나 같은 상황으로 고향인 한국에 가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교민들의 마음을 비유하여 쓴 것 입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니 친구들과 선생님이 더 보고 싶어졌습니다. 동시를 쓸 때 말레오가 제 마음을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루빨리 이전처럼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현이 웃는 법을 잊은 걸까 파란 하늘 보며 한숨 폭폭 내쉬는 보현이 매일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울었을까 눈 주위가 발갛게 부은 보현이 꿈속에서라도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보고 싶은 맘인 걸까 맑은 눈처럼 마음도 고운 내 친구 보현이 띠롱띠롱 새소리처럼 울리는 스마트폰 메시지 보고 싶다는 문자 때문일까 굽은 등을 곧추세우며, 활짝 웃는 보현이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89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황은솔(BSJ, 6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편지

다움이에게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글을

있었습니다.

쓰면서

인도네시아에

인도네시아에서

인도네시아에는

아름다운

5

대한 년

자연과

여러

사실들을

동안

살면서

많은

문화가

있다는

알게 곳을

되었고

재미도

여행했습니다.

배웠습니다.

그곳들을

사진으로만 남기는 건 너무 아쉽다고 생각을 해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저에게는 다움이라는 사촌이 있는데 3 년 동안 못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움이에게 인도네시아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인도네시아에는

환경오염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다같이 노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90


장려상 한인니문화연구원상 박서준(SPH, 2학년) / 최형우(ACS, 7학년) / 인서연(SIS Semarang, 11학년) Semarang

동시

소나무 숲 놀이터

PT. TAEWON INDONESIA / 성유림(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12학년)

폭포에서 만난 친구들

박소영(주부, 자카르타)

안녕하세요. 저는 박서준입니다. 가족들과 소나무숲에 가서 도시락도 먹고 바위 미끄럼틀도 타고 계곡에 가서 물고기 원숭이들을 본 것이 재미있고 기억에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동시로 표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재미있고 인상 깊었던 내용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다음에도 이렇게 동시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동시를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91


Studi Kebudayaan Korea dan Indonesia (Asosiasi Korea) Indonesian &amp; Korean Culture Study (Korean Association)

《한인니문화연구원》 소개 및 연혁 한국·인도네시아 문화의 허브센터

주소

Gedung Asosiasi Korea Lt.1 한인회문화회관 1 층 (대사관과 메디스트라 병원 사이) Jl. Gatot Subroto Kav 58, RT.1/RW.4, Kuningan Tim. Kecamatan Setiabudi, Kota Jakarta Selatan, Daerah Khusus Ibukota Jakarta 12950

홈페이지

www.ikcs.kr

인원

한국인 봉사자 10여명, 인도네시아인 1명 - 원장 1명, 부원장 2명, 수석팀장 1명, 팀장 2명 - 수석연구원 1명, 책임연구원 1명, 특임연구원 2명 - 객원연구원(서울대사회과학연구원 소속) 3명 - 특별부서: 자카르타 역사연구팀 6명 - 국제교류팀(한국소재): 8명

주요사업

문화탐방: 인도네시아 유적지와 문화예술 탐방 열린강좌: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문화, 유적에 대한 연구와 이론 공유 자카르타 역사 연구: 자카르타 옛 도심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과 문화 연구, 현재 한인 언론사에 기고하며 책자 발간 예정 문학상: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및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개최 출판: 출판권 약정, 번역협력, 출판기념회, 섭외, 총괄 문화예술관련 전시회 및 세미나 개최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92


2021.08~10

제11회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제1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공모전 《한-인니산림협력센터》와 공동개최

2021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에 초등부문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공모전 신설

2021. 03

서울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VIP신흥지역연구사업단-재인도네시아한인회 공동학술대회 참가 및 후원: ‘한인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사’

2020 2019~2021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결성, 한인 언론사에 칼럼 연재 『막스 하벨라르』, 『인도네시아 위안부 이야기』, 『쁠라우 라뚜 해안의 고양이』, 『내가 품은 계절의 진언』외 5권, 출판기념회 주최·협력, 출판권 약정·번역협력

2019. 08

재인도네시아한인회, 히스토리카인도네시아, 우이(UI)와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 양칠성 세미나’ 공동 개최

2019.08~2020.12

재인도네시아한인회 제작 『인도네시아한인100년사』 연구원 팀리더 3인 집필 및 편집 참여, 한인100년사 기획탐방

2019. 03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 세미나’ 주관(주최: 한국문화원)

2018.10~11

한국문화원 초대전 ‘복주머니’, ‘소망을 담은 민화’ 한국퀼트페스티벌, 주관·기획·후원, 한국문화원과 서울예술대학교 장애인올림픽 축하공연 개최

2016~2017

인도네시아 융합형 아티스트 하리다르소노 한국 초청 강연 5회 기획·주관

2016~현재

&lt;바틱, 느린 영혼의 여행&gt; 전시회 6회 개최(한국 4회, 자카르타 2회)

2016~2018

서울예술대학교 인니아티스트 초청 교류협력추진

2014~현재

서울예술대학교, 서울대학교 VIP신흥지역연구단, 한국천연염색박물관, 여성인권 진흥원 일본&#39;위안부&#39;연구소 인한친선협회 등 15개 기관 및 단체와 업무협약 체결

2014

재인도네시아한인회 산하 《한인니문화연구원》으로 새롭게 시작

2012

&lt;누산따라에서 한반도까지&gt; 음악회 개최, EBS 세계테마기행 &lt;앙끌룽&gt;, &lt;사만가요&gt;현장진행, Apa Kabar Indonesia 발간

2011~2012

한국문화원 한국문화주간, JIKS 한국의 날 참여

2011~2014

사단법인 《한인니문화연구원》(이사장 김상태(2011~2013), 송재선(2014))으로 개원

2010~현재

‘열린강좌’ 72차례 개최. 양승윤, 가종수, 김문환, 노경래, 서울대연구원 등 강의

2010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문학상 공모전 신설 및 개최

2009

『서부자바의 오래된 정원』(사공경저)

2005~2006

&lt;Korean Ways&gt;, &lt;자카르타 아리랑(한국전통문화전시회)&gt; 기획·주관

2005

『자카르타 박물관 노트』(사공경저)

2001·2002·2004

&lt;인니 풍물 사진전&gt;, &lt;100회 문화탐방 기념&gt; 사진 전시회 개최

2001

《한인회 문화연구회》로 거듭남

1999~현재

‘문화탐방’ 335회(족자·솔로·스마랑·반둥·숨바 등) 개최, 인도네시아 관련 칼럼 기고

1999

재인도네시아한국부인회의 문화탐방반에서 시작한 비영리 단체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93


Korea-Indonesia Forest Cooperation Center (KIFC)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소개 및 연혁 대한민국 산림청과 인도네시아 환경산림부가 공동 설립한 한-인니 양국 간 협력을 위한 핵심 센터(Center of Excellence) 양국간 산림분야 협력을 강화하고 공동 산림 프로젝트를 개발·이행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임업기업의 활동 지원

주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환경산림부 청사(Manggala Wanabakti) #723,Wing C, 7th Floor, Block4,ManggalWanbakti,Jl.GatotSubroto,Jakarta,10270,Indonesia

홈페이지

www.kifcjakarta.org

인원

양국 공동센터장 및 인니 자문관 등 한국인 3명, 인니인 5명

주요사업

잠비 이탄지 복원 프로젝트 센툴생태교육모델숲 프로젝트 룸핀양묘장 지원 프로젝트 롬복 뚜낙 산림휴양 생태관광 사업 프로젝트 남부수마트라 산불재난관리센터 프로젝트(신규) 힐링 포레스트(신규) 기타 양국간 산림분야 협력 프로젝트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94


08~10

한인니문화연구원과 &lt;인도네시아 이야기&gt;,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공모전 공동 개최

09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개소 10주년 기념식

04

센툴모델숲 대강당(Millennials Hall) 이전 및 소강당(K-Forest Hall) 준공

06

10주년 기념 온라인 산림비디오 공모전 개최

2021. 03 11

이탄지 잠비 사무소 개소, 세계 산림의 날 기념 온라인 산림사진 공모전 개최 조코 위도도 대통령 룸핀양묘장 시찰, International Tropical Forest Nursery and Research Center로 조성할 것이라 밝힘

2020. 08 10

이탄지 복원 및 보전 사업 LoA 체결 센터 설립 RoD를 개정하여 Arrangement 체결

2019. 06

센 툴 생태교육모델숲 다리개설 준공

2018. 03

롬복 뚜낙 산림휴양·생태관광센터 개장

2017

뚜낙 생태관광 센터 2차 시설물 조성 06

2016. 05 12

뚜낙 산림휴양 생태관광 사업 이행합의서 체결, 뚜낙 생태관광 센터 1차 시설물 조성

이탄지 복원 및 산불관리협력에 관한 MOU 체결 롬복 뚜낙 산림휴양및 생태관광 센터설계완료

2015. 03

센툴생태교육모델숲 신축 다목적 강당 준공

2014. 07

센툴생태교육모델숲 운영에 관한 RoD 체결

10

한-인니 산림휴양 및생태관광 활성화 관련 MOU 체결

2013. 07

센툴생태교육모델숲 개장

2012

함발랑(센툴생태교육모델숲) 녹색협력단지 조성 착수 07

산림부내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개소

05

KOICA 사업 종료 후 룸핀양묘장 지원에 관한 RoD 체결

2011. 01

산림부내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사무실 설치

2010. 06

한-인니 산림협력센터 설립에 관한 RoD 체결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195


Special Thanks to Terima kasih secara istimewa kepada

제 1 회 &lt;인도네시아 생태이야기&gt; 문학상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