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장난- 복숭아와 나한지영(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나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 보통 복숭아 알레르기라고 하면 복숭아 껍질에 있는 까슬까슬한 잔털에 의해서 피부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털에 대한 알레르기에, 과육을 입술에 닿게 먹으면 입술이 붓는 특이 증상까지 더해진 경우였다. 문제는 이런 알레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숭아를 많이 좋아했다. 이보다도 아이러니한 상황이 또 있을까!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과일, 가장 먹고 싶은 과일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서 “복숭아”라고 말할…
와아! 산이 멋지다. 이태복(사산자바문화연구원장, 시인) 할아버지가 갑자기 몸져 누웠던 밤, 먹구름 속에 천둥치던 우기의 어젯밤이 너무 어두워서 아침을 걱정했었는데 머르바부 산이 멋진 풍경을 선물했다. 연구원에는 시계 같은 할아버지가 한 분 계신다. 아침 4시면 사원의 아잔 소리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와서 연구원의 모든 창문을 열고 밤새 떨어진 마당의 낙엽을 쓸고 하루를 시작하는 ‘랄’이라는 할아버지다. 값싼 동정심이었나? 오갈 때 없는 불쌍한 할아버지 한 분이 있어서 별 부담 없이 …
<수필산책 209> 업햄의 편지 하승창/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내 이름은 업햄, 계급은 상병이지만 행정 특기병과로 입대한지라 사실은 이제 막 훈련소를 수료한신참이라네.나는 바로 며칠 전에이 낯설고 머나먼노르망디에 왔지.각종 서류를 작성하고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레인저 부대의 지휘관이 나를 부르더라구. ‘라이언’ 이라는 일병을 찾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거야. 하늘이 노래지더군, 게다가 목적지는 적군이 우글거리고 있는 미지의 땅이라니! 하지만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군…
<수필산책199 > 단 하나의 질문 하승창/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내가 사는 집 건너편 길모퉁이에는 빈 저택이 한 채 있습니다. 비바람에 퇴색한 외벽은 군데군데 금이 가고, 잎이 우거진 나무들과 제멋대로 자란 잡초가 마당을 둘러싼 담장 사이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집이지요. 나는 그 곳에 불이 켜져 있거나 사람이 나드는 모습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버려진 집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발코니의 낡은 천장이 내려앉거나 갈라진 페인트 껍질이 뭉텅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면 며칠 …
<수필산책 198> 수첩 속 그 이름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수명을 다한 소중한 수첩을 들고 낙엽을 태우는 불 앞에 섰다. 수첩 속에서 가장 오래 일 순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생각난다. 신발재봉 최고 전문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던 P주임이다. 신발산업이 해외로 모두 떠나고 실업자로 있던 P주임에게 해외공장 근무를 제안했다. 그날 그는 해외에서 자신의 꿈을 다시 펼쳐보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갑자기 가장인 자신이 어머니를 두고 해외근무지로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P…
<수필산책 197> 사불삼거(四不三拒) 이병규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30년도 더 전이었다. 그 조용하고 작은 시골 동네가 한동안 버스터미널 이전 문제로 시끌벅적 한 적이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이 오래되고 협소해서 여러 번의 민원 끝에 마침내 새로운 장소를 찾았고 더 크고 모던한 터미널로 바뀌어 이전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 지어지는 터미널 부지는 원래 무성하게 잡풀만 자랐던 황무지로 어릴 적 그 곳은 건설장비나 공사 자재들과 케이블을 감아 놓던 나무로 된 큰 원형 널빤지들만 널부러져 있던 그런 곳이었다.…
<수필산책 196>기획 특집-한국문단 초대수필 내가 사랑한 법정스님의 사유와 문장 공광규 / 시인 책으로 만난 내 시의 스승이 정지용 시인이라면, 책으로 만난 산문의 스승은 법정 스님이다. 스님을 책으로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범우사 문고판 『무소유』에서였다. 김형석, 안병욱의 수필과 함께 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나 루이제 린저의 『왜 사느냐고 묻거든』, 헤세의 『인생론』 등이 독서 목록에 들어오던 때였다. 처음에는 법정 스님의 문장이 나의 현실 삶과는 동떨어지고 무관한 것처럼…
< 수필산책 195 > 익숙한 사람이 없는 날 지나/ 싱가폴 거주(한국문협 인니지부 명예회원)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 전 싱가포르의 새벽,“나 오늘 못 갈 것 같아. 너무 피곤해서… 미안...”산이 없는 섬나라에서 언덕이라고 하기엔 높고 산이라고 하기엔 낮은 유일한 곳, ‘Bukit Timah Hill Quarry’앞에서 새벽요가를 함께하는 친구가 보내 온 문자였다. 몇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친구는 새해가 코앞에 닥쳐서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빠 죽…
< 수필산책 194 > 스마트 시대의 질문과 답변 이재민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선생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그때는 무얼 하시며 지내셨어요?“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 나도 잠시 쉬어야 할 시간인데 스마트폰으로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을 스마트하게 보고 있던 제자 녀석이 내 시선과 마주치자 별 싱거운 질문을 다 해온다. “가만, 가만 있어봐. 선생님이 생각 좀 해보자.“ 스마트폰이 없던 내 어린 시절, 집 대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가면 친구들이…
<수필산책 193> 거꾸로 가는 시간들 김준규 / 시인,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눈에 보이지 않고 손끝에 만져지지 않는 것이 은둔의 꺼풀 속에서 세상을 지배한다. 기저(基低)에 파고드는 조용한 침입자는 이 땅의 도도한 문명 줄기에 일단정지의 붉은 폴리스 라인을 그어 놓았다. 모든 입구의 엄격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길게 늘어선 백색 마스크의 침묵, 포승줄에 묶인 채 억압된 시간이 일상의 라운드에 을씨년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제한된 이동 경로, 갖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