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고 안 먹고 운동 안 할 자유 조연숙 텔레비전 화면에 연예인의 고개 숙인 모습과 자막과 함께 이혼 이야기가 반복해서 흐른다. 개인의 애정사가 전국민의 현안이 됐다. 바람을 폈네 말았네… 불똥이 당사자 주변인에게 튄다. 잠시 후 어느 당 국회의원의 막말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막말한 국회의원은 당장은 욕을 먹는 것 같으면서도 인지도가 급상승해 대선 후보급이 됐다. 폭우가 내릴 거라고 주문을 외운다. 이어 침수된 논과 콸콸 흘러 넘치는 물이 화면에 가득 차서 안 빠진다. 발리 화산 분출 장면이 반복된다. 홍…
파자르 부스토미와 부야 함카 배동선 /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오늘은 영화 이야기입니다. 2017년 9월에 개봉된 CJ 엔터테인먼트 합작영화 <사탄의 숭배자> (Pengabdi Setan, 조코 안와르 감독)에 420만 명 관객이 들어 그해 로컬영화 흥행 수위를 차지하면서 당시 인도네시아 영화판은 목하 호러 영화 천지로 흘러갈 기세였어요. 하지만 불과 몇 개월 후인 2018년 1월 개봉된 <딜란 1990>(Dilan 1990)이 630만의 관객을 불러들여…
대나무 숲에서 최장오 댓 잎이 연 초록 치마처럼 흔들릴 때 댓 숲으로 가라 댓 숲이 침묵하면 참새조차 숨을 죽인다 가만히 귀 기울여 봐 마디를 키우는 소리가 들릴 꺼야 공명을 채워 부러지지 않도록 휘어지는 연습을 하는 거지 댓 숲이 비를 맞으면 마디마다 슬픔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만히 발걸음 멈춰 봐 텅 빈 대나무 속에서 옅은 울음이 들릴 꺼야 슬픔을 삭혀 공명을 채우는 거지 댓 숲에 바람이 불면 댓잎은 옅은 치마처럼 펄럭인다 가만히 그를 만져 봐 잎새가 전하는 떨림을 느낄 꺼야 청년의…
외로울 때 나는 해양 박물관에 간다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알고 싶던 것도 많았던 시절, 외로울 때 나는 바다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순다 끌라빠 지역에 있는 해양 박물관(Museum Bahari)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바다 향기에 흠뻑 취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해양박물관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유럽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던 육두구와 후추같은 향신료, 바틱같은 직물, 커피, 차, 구리, 주석, 인디고 염료 등을 보관하고 포장하는 창고였다. 이 상품들은 가까이 있는 순다 끌라빠 항…
무제 홍윤경 / Pleats kora Indonesia 대표 이상하게 그런 날이 있다 하늘이 너무 쨍하게 푸른날 아무런 이유없이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 날 이런 날은 왠종일 미열이 있는 것 처럼 심장도 종일 미열로 꿈틀거린다 이런 날에는 뭘해도 초조하다 음악을 듣고 있어도 금방 음률을 놓치게 되고 책을 읽고 있어도 같은 줄에서 맴돌고 만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내게 뭔가 왔다 간 것일까? 햇볕은 찬란하고 나뭇잎들은 건강하게 푸른데 무정하리만치쨍하게 푸른 …
자카르타에서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보낸 7개월 조인정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2019년 2월 논문 자료 수집 차 자카르타에 한 달 간 체류했다. 체류 기간 중 주말에는 로컬 NGO의 러닝센터를 찾아 학생 및 학부모, NGO 교사들을 인터뷰했고, 주중에는 아트마자야 대학교(Atma Jaya Catholic University of Indonesia)의 국제처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전략 개발과 홍보 책자 제작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다. 일본으로의 출국 이틀을 앞두고, 대학 국제처 오피…
"오늘은 죽기 좋은 날" 김은미 / CEO SUITE 대표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 녹아들고 모든 사악함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가겠나 -어느 인디언의 시 - …
시 절 시.김현숙 새들이 퍼덕일 때마다 꽃잎은 지고 바람이 펄럭일 때마다 꽃잎은 날린다 꽃은 한 번도 스스로 진 적이 없어 져야되는 때를 모르고 져야 다시 피어난다는 걸 모르고 가을이 질 때마다 소슬바람 잎새 하나 겨울이 올 때마다 찬서리 아픈 기억 긴 세월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아무도 마음에 들일 줄 모르고 붙잡아도 허무한 인연인 줄 모르고 (사진=김현숙) **시작노트 깨달음은 늘 한 발자국씩 느리다. 몰입과 집착은 아픔을 오래 유지하고 견디게 한다. 깨달음 뒤에도…
섬 마타하리 시.사진 박정자 1 날 때부터 나는 그 섬의 주민이었다 마타하리 맨발로 새벽바다를 걷다보면 저만치 나무 사이로 햇살이, 잘 웃는 친구의 얼굴처럼 볼우물 한가득 장난기를 물고 달려왔다 2 섬청년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기타를 칠 때 배를 타고 오거나 떠나가는 외지 손님들은 손을 흔들었다, 그때 한 젊은이의 눈빛이 떨리고 있던 것을 누가 누가 보았을까 3 마타하리, 섬처럼 간결하게 삶의 동선을 그리리라 꾸밈말 덜어낸 짧은 시를 쓰리라 잠시 여행이 아니라 날 때부터 그 섬의 주민이었다고 내게 말하듯 가오리…
맹그로브 숲에 가면 발가벗은 너를 만날 수 있다 시. 최장오 맹그로브 숲에 가면 바다가 가져다 준 달고 짭조름한 맛을 볼 수가 있지 썰물이 가져다 준 질그릇 닮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길게 난 상처를 치료하듯 둥그렇게 색칠을 하지 맹그로브 숲에 가면 맑은 수채화를 그릴 수 있어 바다와 하늘이 만들어낸 크로키 같은 영화 서로가 기대고 엉켜 영화를 볼 수가 있지 서로의 둥지를 떠나 함께 동행하는 친구 뿌리와 뿌리 사이로 숨바꼭질하 듯 서로 몰래 만나지 맹그로브 숲에 가면 친구를 만나 가벼운 영화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