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산책 210 > 한국문단 초대수필 시와 나는 서로 끌고 밀며 공광규 / 시인 내가 첫 시집을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이정옥의 『가시내』였다. 시골이라 다른 책들도 보기 드물었지만 시집을 보거나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시집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기억, 그리고 학교를 오고가면서 시를 써보려고 애썼던 추억이 있다. 시의 첫 대상은 고갯마루 산소 앞에 홀로 피어 있는 도라지꽃이었다. 그 시집을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유학 가면서도 가지고 갔었나보다. 시집의 비어있는 부분에 고등학교 때 쓴…
<수필산책 209> 업햄의 편지 하승창/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내 이름은 업햄, 계급은 상병이지만 행정 특기병과로 입대한지라 사실은 이제 막 훈련소를 수료한신참이라네.나는 바로 며칠 전에이 낯설고 머나먼노르망디에 왔지.각종 서류를 작성하고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레인저 부대의 지휘관이 나를 부르더라구. ‘라이언’ 이라는 일병을 찾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거야. 하늘이 노래지더군, 게다가 목적지는 적군이 우글거리고 있는 미지의 땅이라니! 하지만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군…
<수필산책 208> 고구마 사건 문인기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어제는, 파라볼라로 시청하는 CGN TV를 통해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고 눈물을 진하게 흘렸다. 캄보디아에서 봉사하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한국인 청년의 생전 사역지를 두루 비춰주는 영상이었다. 이미 떠나고 없지만 그곳에서의 짧은 삶의 모습을 자료화면과 돌아가신 분을 회상하는 캄보디아인들의 인터뷰 멘트로 진솔하게 편집하여 감동을 주는 특집이었다. 잔잔한 애도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영상은 채널을 바꾸지 못하게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
<수필산책 207> ‘찔라짭(Cilacap)’에서 생긴일 이태복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평소 사람을 좋아해 한국인 현지인 가리지 않고 만나는 걸 즐겼던 내게 팬데믹이 시작되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 해 지옥 같은 세월로 기억될 것 같다. 사산자바문화연구원을 개원해 놓고 돈벌이 보다 내가 좋아 하는 것만 하고 내 위주로 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한량이라 했지만 그 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영혼이 자유롭다고나 할까. 나는 이곳의 문화 탐방과 연구에 재미를 들…
<수필산책 206> 하얀 얼굴 시대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이제는 젊은 남자들도 하얗게 얼굴화장을 하고 다니는 시대라고 한다. 하얀 얼굴화장 유행은 한국에서 K팝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턱수염을 정리하고 하얗게 얼굴화장을 한 서양의 젊은이들도 많이 보인다. 친구는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화장을 하고 다니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 화가 치민다고 했다. 이런 남편을 보고 친구의 아내는 현재의 시대를 따라가고 있는 아들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두둔한단다. 도도해 보이듯 차…
<수필산책 205 > 번지 없는 주막 한상재 / 칼럼니스트 (한국문협 인니지부 고문) 어! 진짜 번지 없는 주막이네, 지난 가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원 화성을 돌다가 ‘번지 없는 주막집’을 만났다. 진짜 번지수가 없는 집이다. 이 작은 초가집은 화서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란색 초가지붕에 누구든지 걸터앉아 쉬고 갈만한 툇마루도 있다. 그야말로 이 집은 주막집이다. 그렇지만 주모는 없고 그저 지나가는 차만 있을 뿐이다. 나는 성문 앞의 슈퍼에서 커피 한잔을 사들고 툇마루에 걸…
<수필산책 204> 그래야 사니까 한화경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병실에 힘겨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흘렀다. “묻지 마세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흘러간 내 청춘 잘한 것도 없는데, 요놈의 숫자가 따라오네요...” 커튼 너머로 노랫소리를 듣던 옆자리에서 “할매요, 오늘은 노래가 나오는겨?”라고 말이 넘어오자 “내가 하도 서글퍼서 노래가 나오네요. 오늘따라 노래 가사가 하나같이 와 이리 다 맞노? 아이고 무서버라.” 이렇게 답하시…
<수필산책 203 > 키높이 구두 이재민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한 TV 프로그램에서 여성 패널이 180cm 이하의 남성은 루저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여 후폭풍이 거셌다. 특히 나처럼 169cm 키로 살아오며 한 뼘 아니 1cm만 더 컸으면 170cm인데 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여간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다. 프로그램 댓글 창에는 남녀가 편을 갈라 아옹다옹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나 역시 거친 말을 몇 줄 달다가 ‘이 뭐하는 짓인가’ 싶어 쓱 지워버렸다. 분명 잘 먹고 잘…
<수필산책 202 > 은밀한 거래 강인수 /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발을 헛디뎌 넘어 진 적이 있다. 무릎에 작은 생채기가 나고 피가 흘렀지만 이내 며칠 후 상처에 새살이 돋았다. 기쁨은 마음에 감동과 추억을 남기지만 슬픔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글로 남기고 싶은 슬픔이 가슴과 머리에 저장 되어 있었는데 오늘처럼 별이 쏟아지는 날은 넓은 대야에 먹물을 살살 풀어 헤치듯 그 모든 기억들을 꺼내어 손장난 치고는 “하하” 하고 웃으며 수채 구멍으로 흘려버려야겠다. 가끔…
<수필산책 201> 물구나무 선 김치냉장고 전현진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인도네시아에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이삿짐 견적을 위해 담당자가 집을 다녀간 다음 날 연락이 왔다. “견적 나왔습니다. 이사는 이틀 동안 진행됩니다.” “네? 이틀이요? 왜요?” “차가 막히면 짐이 그날에 다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빨리빨리’의 왕국에선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 50km 남짓을 이동하는데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