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왕이의 무인도 채인숙 (시인) 17세기 미국소설에서 보았던 가랑이가 찢어진 바지를 입은 소년이 눈을 찡그리며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자잎으로 엉성하게 엮은 오두막 지붕에 햇볕이 총알처럼 들이쳤다 우리는 오두막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해변에 2인용 텐트를 치고 야생도마뱀을 찍으러 간 혼혈소녀와 감독을 기다렸다 길다란 카메라 스탠드와 조명기구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줄담배를 피우는 소녀의 늙은 엄마가 아메리카의 고단한 일상을 이야기했다 골동품상을 하던 시아버지가 백인 며느리들을 제치고 자신에…
안 보고 안 먹고 운동 안 할 자유 조연숙 텔레비전 화면에 연예인의 고개 숙인 모습과 자막과 함께 이혼 이야기가 반복해서 흐른다. 개인의 애정사가 전국민의 현안이 됐다. 바람을 폈네 말았네… 불똥이 당사자 주변인에게 튄다. 잠시 후 어느 당 국회의원의 막말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막말한 국회의원은 당장은 욕을 먹는 것 같으면서도 인지도가 급상승해 대선 후보급이 됐다. 폭우가 내릴 거라고 주문을 외운다. 이어 침수된 논과 콸콸 흘러 넘치는 물이 화면에 가득 차서 안 빠진다. 발리 화산 분출 장면이 반복된다. 홍…
파자르 부스토미와 부야 함카 배동선 /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오늘은 영화 이야기입니다. 2017년 9월에 개봉된 CJ 엔터테인먼트 합작영화 <사탄의 숭배자> (Pengabdi Setan, 조코 안와르 감독)에 420만 명 관객이 들어 그해 로컬영화 흥행 수위를 차지하면서 당시 인도네시아 영화판은 목하 호러 영화 천지로 흘러갈 기세였어요. 하지만 불과 몇 개월 후인 2018년 1월 개봉된 <딜란 1990>(Dilan 1990)이 630만의 관객을 불러들여…
대나무 숲에서 최장오 댓 잎이 연 초록 치마처럼 흔들릴 때 댓 숲으로 가라 댓 숲이 침묵하면 참새조차 숨을 죽인다 가만히 귀 기울여 봐 마디를 키우는 소리가 들릴 꺼야 공명을 채워 부러지지 않도록 휘어지는 연습을 하는 거지 댓 숲이 비를 맞으면 마디마다 슬픔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만히 발걸음 멈춰 봐 텅 빈 대나무 속에서 옅은 울음이 들릴 꺼야 슬픔을 삭혀 공명을 채우는 거지 댓 숲에 바람이 불면 댓잎은 옅은 치마처럼 펄럭인다 가만히 그를 만져 봐 잎새가 전하는 떨림을 느낄 꺼야 청년의…
외로울 때 나는 해양 박물관에 간다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알고 싶던 것도 많았던 시절, 외로울 때 나는 바다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순다 끌라빠 지역에 있는 해양 박물관(Museum Bahari)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바다 향기에 흠뻑 취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해양박물관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유럽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던 육두구와 후추같은 향신료, 바틱같은 직물, 커피, 차, 구리, 주석, 인디고 염료 등을 보관하고 포장하는 창고였다. 이 상품들은 가까이 있는 순다 끌라빠 항…
무제 홍윤경 / Pleats kora Indonesia 대표 이상하게 그런 날이 있다 하늘이 너무 쨍하게 푸른날 아무런 이유없이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 날 이런 날은 왠종일 미열이 있는 것 처럼 심장도 종일 미열로 꿈틀거린다 이런 날에는 뭘해도 초조하다 음악을 듣고 있어도 금방 음률을 놓치게 되고 책을 읽고 있어도 같은 줄에서 맴돌고 만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내게 뭔가 왔다 간 것일까? 햇볕은 찬란하고 나뭇잎들은 건강하게 푸른데 무정하리만치쨍하게 푸른 …
자카르타에서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보낸 7개월 조인정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2019년 2월 논문 자료 수집 차 자카르타에 한 달 간 체류했다. 체류 기간 중 주말에는 로컬 NGO의 러닝센터를 찾아 학생 및 학부모, NGO 교사들을 인터뷰했고, 주중에는 아트마자야 대학교(Atma Jaya Catholic University of Indonesia)의 국제처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전략 개발과 홍보 책자 제작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다. 일본으로의 출국 이틀을 앞두고, 대학 국제처 오피…
"오늘은 죽기 좋은 날" 김은미 / CEO SUITE 대표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 녹아들고 모든 사악함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가겠나 -어느 인디언의 시 - …
자가격리 14일의 기록과 단상들 이혜자 / 푸드 코디네이터 인천공항 아침7시 도착,텅 빈 활주로와 텅 빈 공항,위생복을 입은 수 많은 군인들.코로나가 바꾼 풍경은 우리가 지금 팬데믹의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입국장에서는 군인들이 해외에서 입국한 사람들의 검역과핸드폰에 자가격리 앱을 설치 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건강검진표와 앱을 확인하면입국심사가 통과된다.방역 택시를 타고 지역보건소로 이동.긴 면봉 같은 것으로입안과 코안 점막에서 검체를 채취하는 방식이다. 보건소에서 대형쓰레기봉투와…
자카르타 그리고 전염병 노경래 남부 자카르타에 있는 리뽀몰 끄망에 자주 들렀다가 그럴듯한 레스토랑들이 있는 끄망 라야로 가곤 한다. 리뽀몰에서 끄망 라야로 가기 위해서는 차량 두 대가 교행이 어려운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그 골목길을 지날 때 마다 느끼게 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참 무던하다고……. 그 골목길의 초입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 오르막길이다. 그런데 그 오르막길에는 항상 하수구의 물이 넘쳐 흘러내리고 있다. 오르막길 위쪽의 하수구가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끝나버리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