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풍경 이병규(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짝수 날의 출근길은 자카르타 뿌삿(Pusat)의 좁디좁은 골목길로 길고 긴 항해다 암초 같은 오토바이들을 지나고 거친 와룽들의 파도를 넘는 길은 온갖 삶의 풍경들로 꽉 채운 삶의 현장이다 빈틈도 없을 것 같은 풍경 사이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삐쳐 나왔다 멈춰선 차들의 그림자를 밝고 선 차창 너머의 작은 그림자 삶이란 무게 딱 그만큼 휘어진 허리로 지푸라기 망태기를 걸친 엄마와 제멋대로 반대로 넘어가 가까스로 매달린 아이 깊은 삶이란 늪에서 살려달라고,…
이상하고 재미있는 동물들 강희중/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반둥의 ‘꼬따 바루’에서 산 지도 1년이 넘었다. 유난이 크게 들리는 아침 참새의 ’짹짹’ 소리에 알람이 필요 없다.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뜬다. 구름은 뭉실뭉실 떠다니며 사람이 살기 딱 좋은 습도와 온도가 마치 한국의 가을 날씨와 같다. 해발고도 700m, 사람 살기가 정말 좋은 곳이다.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람들은 살고 싶어 한다. 여기가 그런 곳이다. 가끔 버카시나 자카르타에 가면 한…
<수필산책 212 > MZ시대의유교(儒敎)보이를응원하다 이병규/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우리사무실에는A씨라는한국사람이근무하고있다. 2년 전 쯤코로나가막시작하기바로직전에이곳자카르타로발령받아서나온분인데나이는 40대중후반에딸둘이있는전형적인중년의직장인이었다. 본사에서는아프리카와동남아지역을두루담당한영업전문인력으로인도네시아장사한번잘해보라고보냈다고한다.지난2년간코로나상황에도그럭저럭잘버티고있고,몇번의위기가 있었지만그때마다운좋게위기를잘넘겨본인스스로꽤나자부심이높다. A씨는끝까지아니라고주장하는데,대화를하다보면경상도억양이느껴…
< 수필산책 211 > 장밋빛 기억 전현진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기억이란 게 참 그렇지. 나 어릴 때, 집 앞에 큰 공원이 있었거든 공원 나무에는 탐스러운 둥지들이 곳곳에 가득했어. 아침에 공원 나무에서부터 우리 집 창문으로 까치 소리가 넘어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아무 날도 아닌데 특별한 누가 올 것 같고, 설렜어. 얼마나 큰지 공원이 마치 숲 같았다니까. 꼬마가 걷기엔 늘 새로운 곳이었지. 공원에는 꽃나무가 가득했고 놀이터도 있었고, 운동장도 넓었어. 아, 현충탑도 있어서 유치원에서 소풍을 오…
< 수필산책 210 > 한국문단 초대수필 시와 나는 서로 끌고 밀며 공광규 / 시인 내가 첫 시집을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이정옥의 『가시내』였다. 시골이라 다른 책들도 보기 드물었지만 시집을 보거나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시집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기억, 그리고 학교를 오고가면서 시를 써보려고 애썼던 추억이 있다. 시의 첫 대상은 고갯마루 산소 앞에 홀로 피어 있는 도라지꽃이었다. 그 시집을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유학 가면서도 가지고 갔었나보다. 시집의 비어있는 부분에 고등학교 때 쓴…
<수필산책 201> 물구나무 선 김치냉장고 전현진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인도네시아에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이삿짐 견적을 위해 담당자가 집을 다녀간 다음 날 연락이 왔다. “견적 나왔습니다. 이사는 이틀 동안 진행됩니다.” “네? 이틀이요? 왜요?” “차가 막히면 짐이 그날에 다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빨리빨리’의 왕국에선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 50km 남짓을 이동하는데 우리는…
<수필산책199 > 단 하나의 질문 하승창/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내가 사는 집 건너편 길모퉁이에는 빈 저택이 한 채 있습니다. 비바람에 퇴색한 외벽은 군데군데 금이 가고, 잎이 우거진 나무들과 제멋대로 자란 잡초가 마당을 둘러싼 담장 사이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집이지요. 나는 그 곳에 불이 켜져 있거나 사람이 나드는 모습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버려진 집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발코니의 낡은 천장이 내려앉거나 갈라진 페인트 껍질이 뭉텅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면 며칠 …
<수필산책 198> 수첩 속 그 이름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수명을 다한 소중한 수첩을 들고 낙엽을 태우는 불 앞에 섰다. 수첩 속에서 가장 오래 일 순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생각난다. 신발재봉 최고 전문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던 P주임이다. 신발산업이 해외로 모두 떠나고 실업자로 있던 P주임에게 해외공장 근무를 제안했다. 그날 그는 해외에서 자신의 꿈을 다시 펼쳐보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갑자기 가장인 자신이 어머니를 두고 해외근무지로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P…
<수필산책 197> 사불삼거(四不三拒) 이병규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30년도 더 전이었다. 그 조용하고 작은 시골 동네가 한동안 버스터미널 이전 문제로 시끌벅적 한 적이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이 오래되고 협소해서 여러 번의 민원 끝에 마침내 새로운 장소를 찾았고 더 크고 모던한 터미널로 바뀌어 이전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 지어지는 터미널 부지는 원래 무성하게 잡풀만 자랐던 황무지로 어릴 적 그 곳은 건설장비나 공사 자재들과 케이블을 감아 놓던 나무로 된 큰 원형 널빤지들만 널부러져 있던 그런 곳이었다.…
<수필산책 196>기획 특집-한국문단 초대수필 내가 사랑한 법정스님의 사유와 문장 공광규 / 시인 책으로 만난 내 시의 스승이 정지용 시인이라면, 책으로 만난 산문의 스승은 법정 스님이다. 스님을 책으로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범우사 문고판 『무소유』에서였다. 김형석, 안병욱의 수필과 함께 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나 루이제 린저의 『왜 사느냐고 묻거든』, 헤세의 『인생론』 등이 독서 목록에 들어오던 때였다. 처음에는 법정 스님의 문장이 나의 현실 삶과는 동떨어지고 무관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