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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사 - 도라산의 외인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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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119회 작성일 202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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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전쟁사 - 도라산의 외인부대
 
배동선 /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1948년 10월 26일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힌 아부바카르 (본명 아오키 마사로 – 아오키 마츠히로라는 자료도 있음)는 어떻게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었을까?
 
빠렌따스 지역에서 살던 어린시절을 보낸 가룻 사람 하지 우딘(83)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가룻에서 네덜란드군과 싸운 빵에란 빠빡 부대(PPP)와 거기 가담했던 일본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부바카르는 타식말라야군에 속하는 찌갈론땅면 갈룽궁산과 도라산 산자락 구릉지대인 빠렌따스 지역 도라거데라는 고지대에 자리잡고 큰 오두막 네 개를 지어 본부로 삼고서 농사도 짓고 가축들도 키웠다. 그러면서도 매일 저녁이면 산에서 내려와 총을 어깨에 걸치고 짭빠디 사롱을 맵씨있게 걸치고서 부하들과 함께 마을 길을 따라 정글로 들어갔다가 강을 건너 와나라자-가룻을 통하는 길 근처를 은밀히 다녔다.
 
“이놈들~! 나중에 폭발음이 들리면 내가 네덜란드놈들을 혼내 준 증거라는 것만 알아둬!” 그는 우딘 나이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들이 그렇게 빠렌따스에서 나가면 나중에 실제로 저 밑에서 폭발음이 들려오곤 했다. 그건 야자열매같이 생긴 폭탄으로 수송차량이나 탱크, 장갑차같은 네덜란드 차량 하나를 박살내는 소리였다. 그런 후 보통 한 밤 중에 그들이 무기와 탄약, 옷과 먹을 것들을 잔뜩 들고 돌아오곤 했다고 우딘은 기억했다.
 
아부바카르라는 이름은 1945-1949년 사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사에 실제로 등장한다.  A.H 나수티온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사: 네덜란드 2차공세 제9권에서 아부바까르를 가룻-타식말라야 지역의 매우 능력있는 게릴라 부대장으로 그를 묘사하고 있다. 실리왕이 부대 연대기에도 그의 본명인 아오키 마샤로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이 아오키 마츠히로라는 자료도 있으나 여기서는 헨디 조 기자의 기사 원문에 따라 아오키 마샤로로 적는다)
 
아오키는 1946년 독립전쟁에 가담했다. 코사시 소령의 아들 바스로니에 따르면 아오키는 원래 1946년 반둥불바다 사건 이후 마잘라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PPP에게 사로잡힌 전쟁포로였다고 한다. PPP는 당시 아오키와 40여명의 부하들을 붙잡았다. 그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있었는데 모두 와나라자로 옮겨져서도 전쟁포로로서 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이에 감명받은 아오키는 코사시 소령에게 자신이 이슬람에 입교하고 PPP에도 가담하겠다고 밝혔고 코사시 소령은 그를 이슬람지도자 라덴 자야디왕사에게 데려가 이슬람 입교의식을 주선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아오키에게 아부바카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나비 모하멧의 친구 이름을 딴 것이죠” 라덴 자야디왕사의 손자 중 한 명인 라덴 오조 수빠르조(92)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아오키와 그의 부하 40명이 공식적으로  PPP 의 멤버가 되었다. 각자의 전문분야에 따라 코사시는 그들에게 군사교관, 각 부문의 지휘관을 각각 맡기게 된다. 그들 중에는 센야 또는 알리라고 알려진 이처럼 원래 군의관이었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급 받기를 거부했다고 라덴 주아나 사스미타 소위(PPP 부지휘관)의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전황은 분명 PPP에게 불리하기 그지없었다.
1948년 2월 초, 인도네시아군 실리왕이 사단은 렌빌조약에 따라 서부 자바의 근거지들을 떠나 중부자바와 족자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실리왕이 사단의 일원이 되어 있던 빠빡 왕자 부대(PPP)도 그 명령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족자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 저희 아버지는 PPP부대 상당수가 다시 가룻으로 돌아가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PPP부대장이었던 S.M 코사시 소령의 아들 바스로니(56)의 말이다.
 
하지만 코사시 소령은 당시 족자 군사령부 참모로 발탁된 상태였으므로 PPP 부대장직을 라덴 주아나 사스미타 소위에게 인계했다. 이후 PPP는 군사령부 명령에 의거 따루나자야 부대, 반뗑부대, 디삐띠우꾸르 부대 등 가룻 인근의 인도네시아군 게릴라들을 규합한 유격대를 구성했다.
 
“그들은 (가룻과 타식말라야 경계의) 빠렌따스 지방 도라산 정글을 근거지로 하여 가룽궁 게릴라 사령부(MBGG)를 구성했다” A.H.나수티온 비망록 7권 ‘렌빌조약 시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아나 소위가 그렇게 구성된 MBGG의 사령관이 되었다. MBGG는 수또코 중령이 이끄는 찌따룸 여단의 지휘권 아래에 있었는데 1948년 8월 수또코 중령이 네덜란드군에게 붙잡히면서 찌따룸 여단의 지휘권은 따루나자야 부대장 쭛쭈 아디위나타에게 넘어갔다.
 
“MBGG는 네덜란드군, 빠순단 괴뢰국군과 싸우는 것 외에도 실리왕이 사단 병력이 공화국 지역에서 가룻과 타식말라야 지역으로 침부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제6지역 실리왕이 군사령부 역사편찬팀이 쓴 실리왕이 연대기(Siliwangi dari Masa ke Masa)에 기재된 내용이다.
 
일본인들이 가담한 후 PPP는 귀신같이 출몰하며 네덜란드군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그들은 와나라자 지역과 가룻 시내에서 간헐적인, 그러나 사뭇 치명적인 공격작전과 사보타지, 파괴임무를 수행했다. 아오키의 부하 중 수바르조로 알려진 국재만과 꼬마루딘으로 알려진 양칠성은 각각 첩보수집 등 정보분야와 사보타지, 파괴작전을 주도하면서 부대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양칠성은 네덜란드군을 곧잘 함정에 빠뜨려 전과를 올리곤 했다. 그는 염소를 치는 목동처럼 변장하여 폭탄을 매단 염소를 네덜란드 군차량에 돌진시키는 방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즐겨 쓰곤 했다.
 
“양칠성의 기발한 염소폭탄은 네덜란드군에 적잖은 인명피해를 냈습니다.” 오조의 말이다.
 
PPP가 세운 가장 혁혁한 공로는 1947년 와나라자와 가룻을 잇는 찌누눅 다리를 파괴한 일이다. 어느날 수바르조의 첩보팀이 네덜란드가 곧 와나라자료 넘어와 점령작전을 벌일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함에 따라 꼬마루딘과 그의 팀이 즉시 찌누눅 철교를 폭파해 와나라자를 점령하려던 네덜란드군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그 결과 네덜란드군은 더욱 PPP에게 독기를 품었다. 그들은 아부바카르가 이끄는 일본인들의 존재가 네덜란드군의 가룻 게릴라 시스템을 분쇄하는 데에 걸림돌이라고 판단하여 P.W 판두인 중령이 지휘하는 엘리트 보병 강습부대 3-14-RI 대대를 투입해 도라산의 PPP 근거지를 습격하기에 이른다.
 
1948년 10월 25일 월요일 빠렌타스 마을에 밤이 깊어갈 때 MBGG 본부에서는 주아나, 아부바까르, 꼬마루딘, 우스만 등이 군침투작전과 빠순단군, 다룰이슬람군에게 어떤 전술로 맞설 것인지 심각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곳과는 별도의 방에 수바르조는 앓아 누워 있었다. 오두막 밖에는 아디위리오(우종수), 우마르(이길동)라는 두 명의 조선인과 수나리오란 이를 포함한 4명의 일본인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네덜란드군 3-14-RI 대대에 나포된 양칠성과 아오키
 
자정이 지나 10월 26일 새벽 1시반 경 갑자기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경비들을 해치운 네덜란드군이 MBGG회의가 한창이던 오두막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회의내용을 타이핑하던 중이어서 총을 잡을 틈도 없었습니다. 방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그대로 체포되고 말았어요” 주아나의 장남 깐다르가 그렇게 말했다.
 
기습작전에 성공한 네덜란드군 3-14-RI 대대는 일본인 세 명을 사살하고 수바르조, 아부바까르, 꼬마루딘, 우스만 그리고 주아나를 생포했다.경비를 섰던  아디위리오와 수나리오는 도주할 수 있었다. 수바르조는 그날 낮에 도주를 시도하다가 그대로 사살되고 말았다. “수바르조는 사살되었다”고 주아나의 일기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수바르조의 죽음과 함께 숨가쁘게 돌아가던 도라산의 드라마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사진: 처형 직전의 수바르조-국재만)
 
하지 우딘은 그날 빠렌따스 주민들이 애통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 네 명이 도라산에서 어떻게 끌려갔는지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들은 위험한 포로로 간주되어 손과 목을 묶은 밧줄을 3-14-RI 대대원들이 번갈아 잡아 끌고 가는 매우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아부바까르 외의 다른 포로들은 얼굴을 천으로 가렸습니다.” 당시 12살이었던 하지 우딘의 말이다.
 
네 명을 끌고간 네덜란드군의 목적지는 빠렌따스 이웃인 빠믕쁙 마을이었다. 그들은 공화국군 게릴라 동조라라고 의심되는 이들의 집을 불태웠다. 당시 목격자인 에멘(92)에 따르면 집을 불태우느냐 마느냐 결정하는 것은 네덜란드군을 돕던 한 현지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에 달려 있었다. “우린 그가 빠믕뿍 사람인 걸 알았지만 네덜란드의 첩자였다는 건 꿈에도 몰랐어요” 에멘의 말이다.
 
포로들은 와나라자 지역 네덜란드군 지휘본부가 있는 찌하루스에 압송되었고 그후 다시 자카르타로 옮겨졌다. 주아나의 메모에 따르면 그들은 그후 헤어지게 되는데 아부바까르, 꼬마루딘, 우스만은 글로독 감옥에 갇히고 주아나는 찌삐낭 교도소에 보내졌다.
 
1949년 2월 자카르타에서 열린 네덜란드군 군법회의에서 아부바까르, 꼬마루딘, 우스만에겐 사형이, 주아나에겐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1949년 5월 전 일본군이었던 이들 세 명은 다시 가룻의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 사건을 취재한 가룻의 저널리스트 요요 다스리오는 사형집행일을 이틀 앞두고 이들 세 명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레비(이슬람 지도자)에게 들었는데 그들 셋은 사형집행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국기를 상징하도록 붉은 색 사룽과 흰색 바지를 입게 해 달라” 했다고 2015년 요요가 기자에게 말한 바 있다.
 
1949년 5월 21일 (1949년 6월 24일 Nieuwe Courant의 서한에 기준하면) 이들 세 명은 가룻의 네덜란드 묘역(Kerkof)로 끌려가 찌마눅 강변에서 그들이 요구했던 붉은 색과 흰 색의 옷을 입은 채 총살당했다. 그들의 유해는 빠시르뽀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75년 현재의 가룻 뗀졸라야 영웅묘지로 이장되었다. (8월 10일 처형당했다는 다른 기록과 차이가 나지만 여기선 히스토리아 기사 내용을 기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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