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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소식 도종환시인 인도네시아 한인동포를 위한 문학특강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한인단체∙동호회 편집부 2015-06-0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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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5일, 오후 5시 자카르타 소재 한국문화원에서 ‘시에게 길을 묻다’를 주제로 한국문인협회 인도네시아지부 명사초정 시 낭송 및 문학 강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동포 200명과 신기엽 한인회장 등 초청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이번 행사는 재외동포문화재단과 아침을 여는 신문 ‘자카르타경제신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강연회를 마치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많은 통포들에게 전할 메시지는 또 없을까? 못내 아쉬웠다. 그 아쉬운 마음을 신문 지면으로 채워달라는 부탁에 흔쾌히 자리를 마주 앉았다.
 
 
도종환시인은 끝났는가?
강연회를 마친 그에게 인도네시아의 첫 느낌을 물어 보았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하니, 빨간 장미와 흰 장미로 수놓은 꽃 장식을 보았습니다. 마치 인도네시아의 국기의 색깔이더군요. 주위에 물어보니 순수함과 용기, 열정을 상징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가장 순수함에서 용기와 열정이 나오고, 가장 뜨거운 용기와 열정이 정말 수순하겠지요. 그러한 순수함과 열정을 인도네시아를 대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도종환(61)시인은 밀리언셀러 시집 ‘접시꽃 당신’의 기억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국회의원이라는 명함까지 하나 더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국회에까지 입성하게 되었을까?
 
19대 국회에 민주통합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 의원으로 입성하게 된 건 본인으로서도 뜻밖의 일이었다. 공천심사위원들이 심사를 다 끝내고 발표하기 직전까지 갔는데 살펴보니 여야를 통틀어 법조계 인사들은 차고 넘치는 데 반해 교육•문화예술계 대표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은 정말 자기 인생을 한 치 앞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에 와서 일하게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벌써 3년이나 지나고 있어요.”
 
급히 수소문한 결과 교사 출신으로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까지 지낸 도종환 시인이 맞춤한 인물로 포착됐다. 자신이 추천한 사람을 하나라도 더 국회에 보내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최고위원들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당 공식의결기구 투표까지 거친 끝에 당무위원 30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시인의 국회 입성이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국회에 들어오니 시인 도종환은 이제 끝났다고 검은 근조(謹弔) 리본을 매단 화분을 보낸 문인이 있더군요. 다른 축화 화분은 모두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했는데 이 근조 화분만은 3년째 책상 위에 올려놓고 출퇴근할 때마다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습니다. 정말 나는 끝났는가.”
 
 
그가 국회에 들어와 문화예술계 대표로 고군분투하며 이루어낸 성과는 만만치 않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예술인복지재단’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최재천 의원이 발의해놓고 상임위를 옮긴 뒤 국가가 책값까지 관여하느냐는 비판으로 표류할 위기에 놓인 도서정가제 법안을 총대를 메고 관련 단체의 이해를 조정해가며 통과시켰다. 그가 최근 역점을 두고 있는 법안은 ‘문학진흥법안’이다. 그리고 해외동포문학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재외동포문화재단에서 해외문학 및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미주문학회에 시평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시선을 넓혀 아시아국가에 살고 계시는 동포들의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도종환시인은 29세에 결혼해 32세에 두 살배기 아들과 젖먹이 딸을 두고 떠난 아내에 대한 통절한 심정을 담은 시집 ‘접시꽃 당신’을 펴내 밀리언셀러 시인으로 각광받았던 그이였다. 그때에도 일각에서는 ‘시인 도종환’은 끝났다고 했단다. 슬픔을 팔아서 시를 쓴다는 비판이었다. 6년 후 재혼했더니 헌책방으로 그의 시집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고 시집을 불태웠다고 전화를 한 이도 있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자신의 아픔을 넘어서서 남의 아픔에 공감하려는 태도’를 화두로 살던 그가 1년이면 300여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 그가 가르치는 그 어린 생명들의 아픔에 공감해 충북국어교사모임 회장으로 활동하다 감옥에 갔을 때, 또 누군가는 시인이 감옥에 가다니 ‘끝났다’고 했다.
 
10년 해직 생활을 거쳐 교사에 복직되고 민주화운동을 공식 인정받아 모처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과로로 배태한 ‘자율신경실조증’으로 산중에 들어가 5년 동안 홀로 지낼 때 다시 “도종환 선배는 끝났다”는 문화운동 후배들의 진단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다시 일어나 2006년 ‘해인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집을 내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고 작가회의 사무총장까지 이어지는 삶을 살았다.

“국회에 들어오니 시인 도종환은 이제 끝났다고 검은 근조(謹弔) 리본을 매단 화분을 보낸 문인이 있더군요. 다른 축화 화분은 모두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했는데 이 근조 화분만은 3년째 책상 위에 올려놓고 출퇴근할 때마다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습니다. 정말 나는 끝났는가.”
 
 
우리의 인생은 몇 시쯤 와 있을까?
 
시인은 자작시인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직접 낭송하면서, 우리의 인생시계는 어디에, 몇 시쯤 왔을까의 물음으로 강연회는 시작되었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후략)
 
 
 
하여, 다시금 그는 반문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시계는 지금 몇 시입니까? 이 자리에 오신 동포여러분은 어떻게 인도네시아에까지 와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지만, 어떤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업연이라고 하겠지요. 그리고 인생은 늘 낯선 곳에서 늘 낯선 일을 시작하는게 인생이 아닐까요?”
 
그는 시인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옷을 입고 있든 시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논산훈련소에서는 진흙탕 속에서 군용수첩에 썼고, 감옥에서는 젓가락 포장지에 썼다. 굽이져 흐르는 삶의 강물을 흘러가면서 누군가 ‘너는 이제 끝났다’고 말할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면서 시를 써왔다.
 
“나를 잔잔하고 고요한 강물 같은 사람이라고 많은 독자들이 말합니다. 맞습니다. 자갈로 막혀 있는 물길을 지나가야 할 때는 격류로 흐르고, 벼랑을 만나면 폭포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곧은 소리가 곧은 소리를 부르는, 온몸을 던져 살아야 하는 그런 때도 있는 거지요. 바다에 생을 인계하기 전까지 강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순례의 길과 비슷합니다. 어떤 길이 나에게 예비 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길을 언제 다 지나가게 될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길게 멀리 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문학은 걸음을 멈추는 것이라 한다. 인디언이 말을 타고 가다 자기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갑자기 정지하는 것처럼, 음표와 음표사이에 정지한다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의 말을 인용했다. 그리고 그는 꽃을 말한다.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을까’라며 손을 건넨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전문
 
 
“일찍 피는 꽃도 있겠고 늦게 피는 꽃도 있을 것입니다. 제 인생의 시계처럼, 저는 늦게 피는 구절초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찍 핀 꽃도 아름답고 늦게 핀 꽃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인생을 아름답게 살라 합니다.”
 
‘벌레 먹은 나뭇잎이 아름답다’는 이생진 시인의 시를 인용하면서,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안도현시인의 시를 인용하면서 나누는 인생을, 불꽃같이 살아온 인생을 말했다. 청춘의 시절이 외롭고 고독했다고 고독에 머물지 않았다. 벽을 만나야 살아 오르는 담쟁이처럼 그는 아픔을 시로 승화시키며 나와 다르게 아픈 이의 영혼까지 치유하고 있다.
 
어느새 시인의 나지막한 음성이 담쟁이가 되어 적도의 벽을 넘고 있었다. 
 
 
취재 및 정리 : 김주명 시인(롬복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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