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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조선인 양칠성,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영웅이 된 사연은? 사회∙종교 편집부 2018-09-1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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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교과서에 실린 독립 영웅 양칠성의 일화가 공개됐다.
 
9월 16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인도네시아 초, 중, 고 교과서에 실리게 된 한 한국인 영웅에 대해 소개했다.
 
1942년 전라북도 완주에 양칠성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칠성은 일본군에 강제 징용,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양칠성의 가족들은 전쟁 동안 그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전쟁이 끝나자 전주역에서 그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양칠성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수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인 1978년, 여동생은 양칠성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게 됐다. 놀랍게도 그는 일본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영웅 묘지에 묻혀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당시 양칠성은 인도네시아에서 포로감시원 일을 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됐다. 특히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연합군 포로 대부분은 인도네시아인이었는데, 양칠성은 억지로 전쟁에 끌려 나온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급기야 한 포로의 여동생과 혼인까지 하게 됐다.
 
1945년 일본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고, 양칠성은 전범으로 몰릴 수 있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숨어지내게 됐다. 얼마 뒤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가 다시 시작됐고, 누구보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잘 알았던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돕기로 했다. 이후 수년간 많은 공을 세웠던 양칠성은 1949년 안타깝게도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독립에 성공했고, 그의 부하들이 진급하면서 양칠성이 독립영웅으로 국립영웅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묘적비는 일본 이름 야마다 시치세이로 돼있었으나, 뒤늦게 한 일본인 교수에 의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여러 한국 단체들의 노력으로, 인도네시아 광복 50주년 기념식 날 비로소 양칠성 이름이 새겨진 새 묘비가 세워질 수 있었다.
 
이런 양칠성의 사연은 인도네시아 교과서에 독립을 도와준 고마운 한국인이라는 취지로 실린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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