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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 좋은 작품 비밀 캐기 ②> 자연회귀의 진수 판전(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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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612회 작성일 2019-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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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작품 비밀 캐기 ②>
 
 자연회귀의 진수 판전(板殿)
 
산나루 서생
 
 
이 영상은 <좋은 작품 비밀 캐기> 두 번째입니다. 저는 이 섹션의 바로 앞 영상 말미에서 자연회귀 현상이 아주 도드라진 작품을 영상으로 소개하겠다고 말씀드렸죠. 곰삭은 맛, 서툰 느낌 물씬한데 좋은 작품으로 정평이 난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을 소개하려는 생각에 제 앞 영상에서 그런 예고를 드렸던 것입니다.
 
작품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판전(版殿)입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사찰 봉은사 경내의 현판이죠. 이 작품은 추사 선생 서거 사흘 전 휘호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평자들은 대게 이 작품을 추사 일생일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추사 선생의 그 많은 명작과는 다른 특별한 가치를 이 작품에 부여하는 거죠.
 
흥미로운 것은 서예에 대해 문외한이나 초학자들은 이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서툴러 보이는 글씨가 그렇게 대단한가?”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합니다. 들여다볼수록 서툴음이 절절이 베어나는 글씨니까요. 아주 오래전 제가 처음 이 현판을 감상할 때 우연히 제 곁에서 함께 감상하던 한 초등학생도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고 거침없이 말했었으니까요. 그 아이 엄마의 당황하던 표정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린이다운 그 감상평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감상자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인상을 창출하는 작품이 바로 이 판전이란 작품이니까요.
 
자 그러면 여기서 잠시 이야기 방향을 바꿉니다. 과연 좋은 작품이라면 어떤 작품을 말하는 것일까요? 좋은 작품이라면 우선 독창성을 들 수 있겠는데요. 품격을 갖췄다거나 멋을 지닌 것도 좋은 작품의 조건일 것입니다. 아무튼 두루 장점을 갖춘 작품이겠지요. 그런데 작품은 감상자가 누구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우선 전문가와 문외한의 차이가 다를 것입니다. 전문가들 중에도 호불호가 있어 또 의견이 갈릴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사람은 개성이 강해서 좋다고 하는 작품을 또 다른 사람은 그 돌출한 개성 때문에 평가절하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품격을 강조한 작품을 보고 너무 점잖다거나 활기가 없다는 평가를 하는 거죠. 멋진 작품을 두고 멋이 너무 밖으로 드러났다고 점수를 깎기도 하고요. 이처럼 작품은 누가 어떻게 감상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다릅니다.
 
 
판전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학자 한 분이 추사 선생의 필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봉은사에 들렀습니다. 그는 추사 작품을 보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던 가 봅니다. 단번에 집어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죠. 그러나 판전이란 두 글자가 쓰인 현판일 줄은 짐작을 못했던 가 봅니다. 단순히 추사의 필적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간 그는 작품을 쉽게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글씨가 있는 곳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현판은 몇 번이나 스쳐 지났던 곳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못 찾았을까요? 영상에서도 보시듯이 작품의 낙관 부분이 희미합니다. 거기다가 흔히 쓰는 추사나 완당이란 아호를 적지 않고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즉 일흔 한 살의 과옹이 병중에 씀이라고만 쓰여 있으니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두 자에도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 학자께서 많이 보아온 추사 작품 특유의 꼿꼿한 기세를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보고도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 작품 판전을 자세히 감상해보시죠. 우선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매우 어눌합니다. 판(板)자나 전(殿)자 모두 왠지 어색하고 못나 보입니다.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함뿐입니다. 획의 시작이나 끝도 불분명하게 뭉뚱그려져 있습니다. 서예를 학습했다거나 서예에 관해 상당한 식견을 가진 분들마저도 도대체 이해가 잘 안 되는 작품일 수 있습니다. 글자 구성도 그렇습니다. 우선 오른쪽 판자는 나무 목 부분과 되돌릴 반 부분의 어울림이 어색합니다. 왼쪽 전자는 한 술 더 뜨죠. 변의 시(尸) 부분이 크고 내부 공간이 넓습니다. 따라서 그 아래 공(共)자는 더욱 억눌리고 찌그러져 보입니다. 방(方)의 수(殳)자도 마찬 가지입니다. 균형이 흔들립니다. 더구나 그 부분을 고문형식으로 씀으로서 현대 활자 폰트에 익숙한 분들은 선뜻 읽기조차 어려울 글자입니다. 감상자에 따라서 고개를 갸웃거릴 부분이죠.
 
자 이렇게 어색함 즐비한 이 작품을 왜 명작이라고 할까요? 곧 이 작품이 왜 추사 김정희 선생의 대표작으로 꼽힐까요? 중국과 일본 등 서예 문화권 작가들을 통 틀어도 필적할만한 작가를 찾기 어려운 추사 선생의 작품치고는 너무 허술하다 이 말이죠. 제가 앞에서 잠간 좋은 작품의 조건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 개성이 강한 작품, 품격이 넘치는 작품, 그리고 멋진 작품 등입니다. 그렇다면 본 영상의 작품 판전은 어디에 해당할까요? 쉽게 구분할 때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과연 이 작품에서 보듯이 어색함 충만한 이 작품을 개성파라고 손을 들어주며 좋은 작품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왠지 좀 부족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색함은 분명 부족함입니다. 그런데 때로 그 어색함이 장점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최고의 특별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아무것도 의도함이 없는 어린아이의 순수함, 초자연의 향내를 물씬 풍기는 작품이라면 바로 그 점 하나만으로도 최고의 개성이자 특별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론 뭐니 뭐니 해도 위대한 추사체가 그 기저에 있기 때문입니다. 추사의 천재성은 8살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습니다. 화면의 글씨와 같이 추사가 여덟 살 때 쓴 편지 글씨에서도 추사 글씨의 싹이 잘 드러나고 있거든요. 그는 20대에 멀리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50대 중반 제주도 유배시절에는 서예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추사체를 완성합니다. 그런 추사가 왜 이렇게 어색함 절절한 작품을 창작했을까요? 우리는 바로 여기에 감상 초점을 맞춰야 이 작품의 진수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목을 갖춘 많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자연회귀’입니다.
 
자연회귀가 뭘까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임을 모르는 이 없을 겁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 구원으로 풀어낼 수도 있습니다. 모든 도가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환동(還童)이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뜻이 자연회귀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 또한 서예의 경지를 빗댄 말이기도 하고, 서예의 의외성과 참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숙생(生熟生)도 같은 뜻을 지녔습니다. 생숙생에서 첫 번째 ‘생’은 태어남입니다. 시작을 의미하죠. 학습자로서 입문하고 널리 배우는 단계를 말합니다. 가운데 글자 ‘숙’은 익는 것입니다. 즉 성숙함을 상징합니다. 인생으로 빗대면 청장년 시기이죠. 의기양양할 때이고 화려할 때죠. 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때이기도 합니다. 다만 옳게 성숙하기란 참으로 지난하다는 것에 우리의 고민이 있죠.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에 노력이 커야 한다는 것도요.
 
자 생숙생 중 끝의 ‘생’자는 어떤 의미일까요?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살아 자연회귀를 맛보자는 의미죠. 어쩌면 가운데 숙의 단계가 99%의 노력이 필요한 때였다면, 마지막 ‘생’의 단계는 1%의 천재성이 필요할 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끝의 ‘생’은 서예창작 기법의 능숙함 따위가 아니죠. 오직 정신으로 도달해야 할 무위의 경지입니다. 추사 선생의 작품 ‘판전’이 바로 이 경지라 할 수 있겠고요. 추사 선생이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도달한 그 경지 말입니다.
 
작품 판전에 관한 서예작가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작가들은 이 작품을 보면 추사 선생의 용기에 넋을 잃습니다. 아무것도 의식함이 없이 기교나 법식을 사뿐히 떨쳐낼 수 있는 용기에 놀라는 것이죠. 과연 추사 선생임을 두 손을 들어 절대 공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욕심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에 입을 모읍니다.
 
사람의 오늘에는 누구나 어제란 기반이 있습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그리고 경험과 깨달은 만큼 높이와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붓을 잡으면 명작을 창작할 기반이죠. 만약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를 자신에게 물으셨다면 창작세계와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추사의 판전처럼 흠투성이 작품이야말로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듯하고 세련되게 잘 쓴 것이 아니라 절절한 자기 심중을 붓으로 드러낼 때 그것이 바로 명작이 된다는 것을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창작 실천이야말로 자기 삶을 스스로 명품으로 창작하는 일이니까요.
 
오늘 우리는 어느 모로 보나 어색함 많은 작품 판전이 추사 서예의 결정체임을 확인했습니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으면 이처럼 수수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빛나고 생명력이 긴 것의 본질은 화려함이 아니라 곰삭고 어수룩한 것임을 찾아봤습니다. 삶의 한 지혜를 엿 본 것입니다. 이 영상 끝까지 감상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또 다른 영상을 준비하여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아래 https://youtu.be/0uDyyfFVLuo영상 내용을 고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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