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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66 -유행과 사물의 감수성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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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788회 작성일 201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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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에서 시를 읽다 66>
 
 
유행과 사물의 감수성
 
글/ 황현산
 
 
 어느 신문에 “한국 시장이 마케팅의 시험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의 소비자들이 유행에 민감하고 특히 고급 소비재를 수용하는 속도가 빨라서 한국 시장에서 먼저 제품 반응을 타진한 뒤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특별히 유행에 민감한 나라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가장 빨리 낡아버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라는 뜻도 된다………………..
 
마음 속에 쌓인 추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이 슬픔이 유행을 부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의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출처: 밤이 선생이다 (도서출판 난다)
 
故황현산 문학평론가
 
NOTE*******************
이 글은 시가 아니다. 대다수의 문학인들이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흠모했던 황현산 평론가가 생전에 신문 연재한 글들을 모은 <밤이 선생이다>라는 산문집 속의 글이다. 나 역시도 선생을 한번도 뵌 적은 없었으나, 선생의 새 책이 나올 때마다 해외배송도 마다 않고 책을 구하고 문장을 열독했던 애독자였다. 나는 선생을 글 속의 스승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밤이 선생이라고 하셨지만, 외국에서 산다는 핑계로 세상 일의 이치를 읽는데 늦은 나에게는 선생의 글이 스승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지, 얼마 전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SNS에는 더 이상 선생의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슬픔을 전하는 애도의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문학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저 책에서만 선생을 만났던 많은 독자들도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선생의 책을 펼치고 애도를 표하노라 고백했다. 선생의 글은 우리가 그저 스쳐 지나기 쉬운 작은 현상들을 날카롭게 감지하였지만, 언제나 인간 중심의 오만한 태도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섭리 안에서 이를 이해하면서도 역사를 저버리지 않는 넓고도 깊은 시선을 보여 주었다.
 
이 글은 유행에 민감하고 세상이 바뀌는 속도에 재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대접 받는 세태에 명쾌한 한 방을 날리는 황현산 선생의 오래 전 글이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나 역시도 해마다, 계절마다 정신없이 바뀌는 유행을 따라가느라 부지런을 떨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 유행의 굴레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살지를 못한다. 나는 그것이 지극히 유약한 정신과 심리적 결핍에서 오는 것임을 선생의 글을 통해 알았다. 그리고 사물에도 내면이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다. 그때 잠시 유행하는 기억을 가지려는 몸부림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픈 일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진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는, 살아있는 정신을 가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떤 시를 읽는 것보다 선명하고 아름답고 실제적인 깨달음이었다.
 
 
* 채인숙 /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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