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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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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183회 작성일 2018-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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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속였다
 
                                 시. 이승훈(1942~2018)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가 다가가면 발로 차고
그가 도망가면 팔을 잡았다 그가 웃으면 울고 그가 울면 웃었다
그가 망하면 웃고 그가 팔을 쳐들면 웃고 그가 걸어가면 웃고
너를 안을 때뿐이다 인생이 그를 속이지 않은 건
너를 안을 때 해가 질 때 너의 눈을 볼 때
너와 차를 마실 때 그러나 너와 헤어지면 인생은 그를 속였다
추운 골목을 돌아가면 골목의 상점에서 담배를 사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인생은 속였다
밤이 오면 아파트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으면
밖에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 돌아누우면 잠이 안 와 문득 일어나면
새벽 두 시 캄캄한 무덤에 불을 켜면 무덤 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
책 상 위 전기 스탠드를 켜면 위통이 찾아오면 다시 불을 끄면
캄캄한 무덤 속에 누워 있으면 책상 위의 냉수를 마시면
책상 위의 사과를 먹으면 아아 <나>를 먹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문득 머언 무적이 울면 새벽 연필을 깎으면 이마에 술기운이 남아 있으면
다시 잠이 안 오면 문득 무섭다는 느낌이 들면 턱을 고이면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쓰면 돌덩어리 우울 황폐한 새벽 인생은 그를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를 속이고 그를 감시하는 이 인생이라는 놈!
 
출처: 붉은 방 (고려원 1995)
 
 
NOTE****************
오후 늦게 한국에서 날아 온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오늘 이승훈 선생이 돌아가셨다. 75세면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닌데. 대학 때 내 시를 보고 “오랫만에 천재 만났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황무지 같았던 대학에서 동력이 되기도 했는데..’
 
우리는 한국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을 대표하는 이승훈 시인에게 시론과 시작법을 함께 배웠다. 시인이 직접 쓴 ‘시작법’ 교재는 훌륭했다. 비로소 제대로 시를 공부하는 느낌이었다. 늘 깐깐하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시 이론을 가르치셨지만, 곧잘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셨다. 수업 시간 내내 긴장하다가 스승이 한번 웃으시면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고 괜히 명랑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나는 선배처럼 천재라는 칭찬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분에게서 많은 걸 얻었던 시의 수혜자다.
 
시 속에서, 언제나 똑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차를 마시고, 어두운 골목에서 담배를 사고,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해 서성이고, 사과 한 입을 베어 물며 연필을 깎아 시를 썼을 시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인의 시 중에서 가장 민낯 그대로의 당신을 드러내놓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존경했던 많은 시인들의 애통함 속에 나의 기도를 얹는다. 스승의 명복을 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故 이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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