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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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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3건 조회 9,495회 작성일 2017-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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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징조
                                                  시. 김길녀
 
 
사람의 정신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에 스며있다며 일 흔 살 처녀할머니 살아생전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툇마루 끝 부엌 달린 외양간 늙은 황소에게 붉은 눈길 보내며 중얼거리셨다 늦여름 땡볕이 끝 몸살 앓던 가을, 홍시 따려다가 말벌에게 뜯겨버린 손가락의 벌침독 어린 손녀 온몸 빨갛게 부풀게 하였을 때, 아홉 살 짜리 계집아이 몸 발가벗긴 채 처녀할머니 왕소금으로 생살을 문지르면 소름처럼 돋아나던 발바닥의 정신들이 해질녘 마당 귀퉁이에 피어난 붉은 맨드라미 살결처럼 보드라웠다 아홉 살 추석을 하루 앞둔 밤 사이 옆자리에 누운 할머니를 데려간 보름달의 긴 팔이 처녀할머니 발바닥을 억세게 간지럽혔다고 위안했던 아침이었다 곰소테*, 곰소테 뒷산 돌배나무 숲에서 불어오던 붉은 노랫소리, 일흔 살 그대로인 처녀인 할머니 꿈을 찾아서 보름달 속으로 떠나셨다
 
 *곰소테: ‘꿈을 찾아서’라는 뜻을 지닌 외래어
 
출처: 푸른 징조 (애지)
 
 
NOTE********************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찌 된 일인지 모두 내 앞에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나와 함께 설날에 먹다 남은 떡국을 드시다가, 그리고 할머니는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잠깐 귀국했을 때 마치 나를 기다리다가 숨을 놓을 생각이셨다는 듯, 하룻 동안 나와 긴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다음 날 주무시듯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어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녀가 시를 쓰는 사람이 되리라는 걸 아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래서 당신들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보도록 하셨던 것이라고 믿는다.
 
시인의 처녀할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처녀할머니’라는 낯선 호칭에서는 원초적이고 서늘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말벌에 물린 어린 손녀의 생살을 소금으로 문지르던 일흔 살의 처녀할머니는, 보름달 긴 팔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추석 전날 밤에 달빛만큼이나 몽환적인 추억을 남기고 어린 손녀의 곁을 떠나셨다. 그리고 어른이 된 손녀는 처녀할머니의 추억을 더듬으며 주술적이며 푸른 징조들이 가득 찬 시를 쓰게 되었으리라.
 
  • 지난 여름 김길녀 시인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라는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시인이 인도네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 몸과 영혼으로 느꼈을 푸른 징조들이 시집 못지않게 아름다운 문장과 사진으로 이어져 있다. 시를 읽는 모든 여러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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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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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전설님의 댓글

가을의전설 작성일

채 작가님.  이 시처럼 마침표도 없이 통으로 시를 쓰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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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mmachae님의 댓글의 댓글

Jemmachae 작성일

일단 시의 문법은 일반적인 문법과는 다릅니다. 시에서 하나하나의 부호는 시인이 전달하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단어를 선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장부호는 원래 문법에 맞춰 쓰던 거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문장부호 하나하나에도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을 때만 사용하는 곳이지요.

시의 목적은 감동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어떤 시에 문장부호가 없다면 감동을 전달함에 있어 문장부호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문장보호가 있다면 감동이나 의미를 전달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저같은 경우는 대부분 감정이나 의미가 끊이지 않고, 시가 한 호흡으로 연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마침표가 들어가면 호흡이 끊어지게 되죠.

물론 마침표나 쉼표가 의미 전달을 위해 꼭 필요할 때는 사용합니다. 호흡을 끊어야 할 때, 혹은 문장 사이에 이질감을 둘 필요가 있을 때도 마침표를 사용합니다. 앞 말과 뒷 말을 끊어버리는 효과를 바라거나, 혹은 어떤 의미를 단정적으로 말할 때 사용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이 시는 일상의 언어로 쓴 시’ 라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일반적인 문법에 맞춰 문장부호를 쓰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시에서 문장부호는 일부러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써야 할 필요와 이유가 있을 때만 쓴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답이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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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전설님의 댓글의 댓글

가을의전설 작성일

넵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다니..감사...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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