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마음이 맞는 이들과 건배하기 / 이영미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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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6) 마음이 맞는 이들과 건배하기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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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185회 작성일 2018-10-23 15:28

본문

<수필산책 26 >
 
마음이 맞는 이들과 건배하기
 
이영미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사계절이 없는 적도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눈으로 가을을 느낄 수는 없어도 이국땅에 사는 한국인의 가슴은 이미 추억이라는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10월, 낙엽이라는 보풀이 인 스웨터를 꺼내 입은 가을 산을 바스락 소리 내며 걷고 싶은 요즘이다.
 
지난 10월 20일 한국문인협회 인도네시아지부(이하 인니문협)의 10월 정기모임이 열렸다.
‘적도 문학상’으로 대표되는 인니문협의 크고 작은 행사의 기획과 추진을 논의하거나 시와 수필, 소설, 아동문학 등 회원들이 관심 있는 문학 분야의 글을 작성에 공유하고 합평하는 목적의 문학 모임이다. 사회 각계 계층에서 내로라하는 위치에서 열심히 소임을 다 하는 스물두 명의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정기모임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개인별 창작 노트를 공유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10월 모임은 11월 2일 출간 기념식을 갖는 인도네시아지부의 다섯 번째 동인지 <인도네시아 문학> 발간식 창작노트를 발표하는 예행연습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간 인쇄술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인도네시아에서 책자를 제작했었는데 올해는 인니문협 회원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제작하여 들여올 수 있었다. 고맙고 든든하기 그지없는 손길이다.
 
수백 권의 책을 쌓아놓고 보니 동인지 내에 수록된 김창범 대사님의 축사가 떠올랐다. ‘담벼락을 두른 벽돌과 비바람과 태양을 피하려 얹어 놓은 기왓장 하나하나에 하늘빛을 새겨 넣은 활자로 지은 견고한 집’ 인니문협 지부의 내실이 튼튼함에 대해 칭찬하시는 한편 멈추지 말고 건필에 더욱 정진하라는 격려의 말씀이다. 동인지에 실린 열아홉 명의 글을 살펴보며 인니문협 회원들이 컵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컵은 속이 깊다.
담을 수 있는 것과 담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컵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알고 있다.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겠다고 욕심 부리는 법이 없다.
 
 
 
인니 문협을 이끌고 계신 회장님은 자잘한 장미꽃이 가득 그려진 찻잔이다. 장미꽃에 비유했다고 해서 연약하거나 범접 못 할 도도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수백 송이의 꽃을 피운 장미 나무를 연상해 보라. 인니 문협의 담벼락을 뒤덮은 장미꽃이 그녀의 손끝에서 피었다고 한다면 오글거리는 과장법이 될까?
 
 
 
 
문협의 임원분들은 다기(茶器)다. 수백 번의 차를 담아내며 깊은 맛을 더해가는 은발의 신사들. 부처 앞에 물을 떠놓은 다기에 부처님의 미소가 담기듯 오랜 연륜이 묻어나는 자비로운 미소를 보여주신다. 나는 이 지식인들이 주고 받는 방대한 지식에 귀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10월 모임에서 1차 회의와 식사를 끝낸 회원들은 인니문협의 아지트 격인 GM bar로 자리를 옮겼다. 고급스러운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스팟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으면 밑에서 비치는 푸른 조명으로 납량특집이 따로 없는 회원들의 공포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유쾌한 곳이다.
 
그날의 감격스러운 동인지 출간의 열기는 사무국장님의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추가하며 순식간에 납량특집으로 전환되었다. 회원들은 저마다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역시, 알코올 한 잔이 들어간 취중진담에 빠지지 않는 맥주컵, 거품이 반이다, 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맥주 한 컵에 그날의 피로가 씻은 듯 풀리는 마법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런 맥주 컵을 닮은 회원이 있다. 우직한 외모와는 달리 감수성이 풍부하여 권해주거나 창작하는 글은 천상 예술인의 것이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는 소주잔은 소주 반, 한숨 반이 담긴다. 가끔 떨어져 내리는 눈물도 받는다. 회원들의 애환을 받아주는 소주잔 같은 인물이 있다. 쓴 소주를 나눠마실 수 있는 평생 친구 같은 존재, 이런 소주잔에 물을 담아 갈증을 없애려면 한두 잔으로는 어림도 없다. 예닐곱 번은 따라 마셔야 한다. 적당한 크기와 가격과 내구성을 지닌 흔하디 흔한 물컵이 중요한 이유다. 손닿는 위치에 두고 수시로 데이트를 신청하듯 손을 뻗쳐야 하는 곳에 보관해야 하는 물컵이야말로 인생의 반려자처럼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플라스틱 컵은 추락할 때 이를 악물고 버틴다. 참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똑같은 디자인의 컵에는 네임펜으로 소유자의 이름도 써지고,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공주나 로봇 스티커가 너덜너덜 붙기도 한다. 보리차를 담아 마셔서 전용 솔로 닦아도 바닥에 누런 음료 자국이 생기기 딱 십상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유리컵에는 세 가지의 종류가 있다. 열과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뜨겁거나 차가운 물을 붓는 일은 피해야 하는 일반 유리컵,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내열성이 좋아 오븐이나 전자레인지 사용이 가능한 고가의 내열 유리컵, 일반 유리를 500~600℃로 가열하고 압축하여 급랭시켜 표면의 강도를 높인 강화 유리컵. 충격에 가장 강한 내구성이 높은 강화유리에도 단점이 있다. 유리가 압축된 상태로 내부에서 단단하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쪽이 조금 깨지만 전체가 콩알만 한 파편으로 파괴되어 흩어진다는 점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조그만 상처에도 쉽게 깨져버리거나 자신의 강한 힘만 믿고 까부는 부류이다.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쉽게 깨져버린다니, 갑자기 뜨끔해진다.
 
“넌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야!”
 
한국 영화에서 빈번하게 재활용되는 이 대사가 수식어로 따라붙는다면 영락없이 주변에 악취를 풍기는 인물이다.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키는 일회용 컵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가진 재주와 인성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한 번 쓰고 버려진대도 두고두고 골치인 플라스틱보다는 종이로 만든 일회용 컵이 되어야겠다. 자연분해 되어 깨끗하게 썩어 무(無)로 돌아가는 존재, 와인잔은 외부적으로 문협을 빛내주시는 회원님들과 고문님들에게 잘 어울린다. 혹자는 옷의 종류가 다르듯 와인의 종류도 다양하니 종류에 따라 잔을 구분해줘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입술을 대는 림(Rim)의 두께가 얇을수록 좋은 와인 잔이라고 하니 나는 얼마나 좋은 와인 잔인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상대방이 와인을 따라 줄 때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듯 베이스 부분을 살짝 눌러주는 센스도 갖춘 와인 잔,
아! 와인 잔 같은 회원들의 마음에 담긴 포도주 향이 진동하는 가을이다.
 
주로 마흔 후반에 몰려있는 문협 인니지부의 평균 연령대를 낮추려면 신상 컵이 더 필요하다. 내년에 있을 제3회 적도문학상과 인니문협의 각종 행사를 통해 문학에 뜻이 있는 많은 분들이 인니문협을 찾았으면 한다. 생김새도 용도도 가격도 모두 다르지만 마음이 맞는 이들과 건배한다면 서로 잔을 부딪치는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으로도 챙챙 맑은 음이 들려온다. 컵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는 밥그릇, 소스 그릇, 각종 박스와 컨테이너, 중형 세단이나 소형 자동의 구매, 거주하려는 주택의 평수 선택에까지 확장할 수 있는 개념이다.
 
본인에게 할당된 지면의 규제와 얕은 지식으로 인해 쓸 말이 바닥났기에 ‘컵의 사물론’까지 논하지는 않겠다. 나는 고흐의 파란 방에 놓인 ‘귀 떨어진 컵’*이고 싶다. 코나 눈, 입술, 귀, 신체의 어느 한 부위가 심하게 뭉그러진대도 끊임없이 누군가의 목을 축일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한 글쟁이로 남고 싶다. 쓰레기장이나 우주 어딘가를 떠돌며 주워들은 ‘떨어져 나간 귀의 이야기’를 기억해 두련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 목마름에 손을 뻗은 그대들의 목에 그 시원한 글 줄기를 부어주고 싶다.
- 장이엽 시 <나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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