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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4)오만과 독단의 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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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184회 작성일 2018-03-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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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4>

오만과 독단의 성(城) 

신 정 근 / 수필가 (인도네시아 마카사르 거주)
 

삼월의 마카사르는 어느 시인이 언급한 사월 못지않게 잔인한 달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다가도 갑자기 억수같이 폭우가 쏟아지는 도시 속에서 이방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변화무쌍한 날씨와는 반대로 변함없는 것은 하루 다섯 번씩 제 시간마다 온 도시에 울려 퍼지는 이슬람 사원의 기도소리뿐이다.
 
나는 얼마 전 개인전을 끝내고 벌써 몇 달째 그림도 그리지 않고, 글도 읽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으며, 따분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도저히 심심하여 견딜 수 없는 날이면 몇 편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사실 단순히 몇 편이라기보다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6편의 영화를 봤으니 거의 중독적으로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영화 두 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틴스콜세지의2016년 영화 ‘사일런스’ (Silence)와 ‘시카리오’로 친숙한 캐나다 퀘벡 출신의 드니 빌뇌브가 만든 2010년 작품 ‘그을린 사랑’ (Incendies)이다. 6년의 시차를 두고 개봉된 두 영화는 사실 피상적으론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스토리 전개 속에서도 뭔가 묘하게 교집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있다. 
 
우연치 않게 보게 된 영화 ‘사일런스’는 리암니슨이 더 이상 액션이 아닌 현실 앞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연기하는 영화다. 일본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가톨릭 신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이 일본에 도착하여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 설파하고자 하는 가운데 일본 지도층과 대립하며, 인간과 인간 또는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과 배반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종교적 성격을 정면에 내세운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페레이라 신부 역할을 맡은 리암니슨은가톨릭 신부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고위직에 있는 일본인들의 박해 속에 고초를 겪다 결국 종교를 버리고, 그가 한 평생 믿고, 학습했던 신의 모습을 부정하는 현실 순응적인 역할을 연기한다. 그 모습은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스스로 파괴하는 것과 같았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 그는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일본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며 지도층의 수하가 된다. 그리고 그를 찾아 몰래 일본 땅으로 들어온 제자 로드리게스 신부는 페레이라보다는 젊어서인지 훨씬 거침없고, 급진적이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보여주는 데 그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탄탄한 사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가령,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입으로 쑤셔 넣다가 평신도들의 식전기도 모습을 보고서 그제야 입 안의 음식을 다시 뱉어내고 기도에 참여하는 행동들이 그렇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나약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역할에 더욱 연민의 정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그도 주변의 가톨릭을 믿는 일본인들의 박해와 고통을 지켜보면서 페레이라처럼 종교적 굴복을 선언하고 만다. 
그리고 이후, 페레이라의 죽음은 그가 배신한 하나님의 불로서 심판받는 것처럼 뜨거운 불길 속에 타오른다.
 
 
또 다른 영화 ‘그을린 사랑’은 프랑스어를 기본으로 하는 캐나다 영화다. 원제 Incendise는 사전적 의미로 번역하면 ‘화재’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제목을 바꾼 ‘그을린 사랑’과 그 의미가 더 문학적이고, 은유적으로 맞닿아있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장면을 오가며 엄마와 딸의 모습과 함께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테러와 전쟁, 고문과 폭행, 압제와 살인이 자행되는 모습이 그려져서 폭격 맞은 고아원이나 집과 자동차들이 검게 그을려진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서로 용인되지 않는 종교의 불관용 속에서 이슬람 남자와 기독교인 여자가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는데 이후 여자 집안의 남자들은 여전히 일부 국가에서 심각하게 대두되는 이슬람의 명예살인(Honor killing)처럼 이슬람 남자를 권총으로 처단하고 여자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녀에게마저 총구를 겨누지만 그녀를 죽음의 문턱에서 지켜내는 할머니의 결단으로 아이를 낳은 즉시 아이의 뒤꿈치에 일렬로 세 개의 점을 찍어 표시를 하고 이내 어딘가로 떠나보낸다. 
 
여자의 이름은 나왈마르완, 나왈은 할머니의 도움으로 도시의 삼촌 집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는 내부적으로 종교적 갈등이 깊어져 가고, 사회는 더 혼란스러워져서 급기야 내전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그녀는 떠나보낸 아들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지만 결국 군인들에 의해 산산조각 난 고아원의 잿더미 위에서 오열하고 만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그녀의 이란성 쌍둥이 잔느와 시몽에게 유언을 남기게 되는데 <첫째는 어딘가 있을 헤어진 나의 아들을 찾을 것>, <둘째는 너희들의 아버지를 찾아 나의 편지를 전해 줄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유언에 그녀의 딸 잔느와 아들 시몽은 적지 않게 당황하지만 잔느는 혼자 어머니의 흔적과 유언을 곱씹으며 레바논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나왈이 겪은 엄청난 고통과 추악한 역사의 민낯을 마주한 잔느는 동생 시몽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시몽또한 일행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의 후반부에서 이야기는 굉장히 비극적이고, 역겨운 모습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의 발단은 종교적, 이념적 차이에서 오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자신의 신(神)만이 절대선(善)이라고 믿는 인간의 편협한 오만에서 비롯된 피와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특히나 배경이 되는 곳은 중동의 레바논으로 지금도 끊임없는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불안, 그로인한 테러와 살인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한 곳이어서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렇듯 ‘사일런스’와 ‘그을린 사랑’은 종교적 괴리와 갈등 그로 인한 불가피하게 훼손되는 인권의 사각지대의 교집합을 형성한다. ‘사일런스’에서는 중세 유럽의 가톨릭과 일본의 불교문화와 토속신앙이 충돌하고, ‘그을린 사랑’에서는 지금까지도 오랜 종교적 갈등의 화약고인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거대한 역사적 충돌이 만들어낸 한 인간, 한 가정의 비극적인 희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어느 한 종교를 가진 종파의 우월성과 인간이 신을 대신하고자 하는 오만함을 토대로 다른 종교 또는 사회에 대한 일방적인 전파와 주입으로 인해 생겨나는 갈등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종교는 때론 어떤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내기도 하였으며, 때론 군중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가들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기본 교리는 사랑과 평화이다. 각기 다른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는 문화의 거시적 관점에서 서로 다른 풍습과 관습 그리고 사회분위기를 인정해야 한다. 영화에서 보여지듯, 유럽의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정신을 ‘개화’시키고, 사회적으로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들 유럽인의 종교를 전파하고, 도입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일본 나름의 문화가 있었고,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또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결국 서로에 대한 무지와 일방통행적인 대화법이 일본 지도층으로 하여금 유럽의 종교가 일본 사회와 자국민들 간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럽의 가톨릭 교인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지고, 그들을 추종하는 일본인들에게 조차도 무자비한 형벌과 순교를 강요했던 것이다.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갈등은 모두가 알다시피 여전히 심각하다. 그리고 외형적으로 더욱 파괴적이며, 살인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차별을 반드시 동반한다. 지금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자살테러와 서로에 대한 총기난사, 핵심 인사에 대한 암살 사건은 여전히 그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특히나 일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학살에 가까운 미움과 반목의 크기는 ‘그을린 사랑’에서 나타난 것처럼 다른 형태의 비극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공교롭게도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여행생활자로서 꽤 오랜 시간 체류 중이다. 알려진 것처럼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로는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이슬람 인구를 보유한 국가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이슬람 체제는 정치적 이슬람이 아닌 사회적 이슬람을 택하고 있기에 다른 중동 국가들보다는 이민족과 타종교에 대해서 더 유연하고 열린 자세를 취하는 나라이다. 현존하는 이슬람 국가 중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도 가끔 다수의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과 소수의 가톨릭이나 개신교도들 사이에 언쟁과 유혈 사태가 일어나곤 한다. 그래서인지 매주 일요일 도시의 큰 가톨릭 성당이나 개신교 교회 앞을 지키는 무장 경찰 병력들이 그 예민하고, 보이지 않는 종교적 갈등의 유리벽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몇몇 대도시의 백화점과 교회에서 성탄절을 주(州)의 법률로 금지하고, 산타클로스 모자조차 착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강압적이고, 차별적 공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런 것을 보면 여전히 어떤 부분에서는 다수가 속한 종교의 율법이 현대 문명사회와 선명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느낀다. 
 
하여, 나는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평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어떤 문화를 다른 사회에 전파하고 설득하는 데 있어서 그 선택적 가치 판단은 온전히 수용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머 코드가 미국과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한국 사람이 미국의 유머에 반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핀잔을 주거나 무뚝뚝한 사람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그 보다 더 민감하고, 예민한 종교와 그에 따른 인종의 문제에 있어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을 포용하는 영향력이 커서 새로운 것이 기존의 틀을 억지로 부수고 들어가 더 나은 것처럼 포장하거나 기존의 것보다 더 우월한 교리를 가진 것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결국 기존 사회와의 괴리는 불 보듯 뻔하다.
 
우리는 이미 16세기 프랑스의 칼뱅(Jean Cavin)이 종교개혁이라는 대의명분 하에 자행한 전 유럽의 이민족에 대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인권적 유린은 현대 사회의 IS로 대표되는 급진적이고, 공격적이며 잔혹한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로 포장되어 테러리스트라는 할리우드적 망토를 뒤집어쓰고 블록버스터처럼 우리 앞에 다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있어서 익숙한 것을 버리고, 혹은 완전히 버리지 않더라도 반대편의 잘 알지 못하는 무언가와 손을 잡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것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때론 나의 앎을 내려놓고 타자(他者)의 관점에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하는 복잡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정신적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고 그런 타협과 대화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야 함으로 다름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존중은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관계없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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