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살락 씨처럼 반짝이는 눈 / 하연수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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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32) 살락 씨처럼 반짝이는 눈 /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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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662회 작성일 2020-11-12 16:34

본문

< 수필산책 132 >
 
살락 씨처럼 반짝이는 눈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딴중까잇(Tanjung kait) 신전 옆 열대 나무들이 깊은 그늘을 내리고 있었다. 그곳 나무 뒤에 숨어 얼굴을 내미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여느 시골 아이들 얼굴처럼 흙먼지와 묵은 때로 가득했지만 눈은 방금 갈색 살락 씨가 흰 속살을 벗고 나온 듯 반짝거렸다. 마치 보문 호수 서북쪽 북천 한센병 환자 공동체 마을 희망촌 마당에서 본 미감아 소녀의 그 눈 같았다.
 
신전 앞 소녀의 반짝이는 갈색 눈이 어른이 되어서도 살아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이 소녀를 만나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딴중까잇 해수욕장으로 바로 가야할 차가 그만 큰 길을 벗어나 신전 옆 주차장으로 와 버렸다. 내가 분명히 해수욕장 먼저 가고 돌아오는 길에 신전이라고 말해 놓고 잠깐 졸았는데 기사는 신전 먼저로 들었다고 변명했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신전 앞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그 소녀의 눈에서 오래 전 잊었던 희망촌 미감아 소녀의 눈을 떠올리게 되었다. 휴일 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신전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웠다.
 
 
중국인들이 향을 사고, 불을 붙여 위 아래로 흔들며 원하는 것들을 얻게 해달라는 소망을 향과 연기에 실어 하늘로 보낸다. 이것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싶어 불안한 사람들은 정문 입구 양편 노란색 탑에서 소망을 적은 흰 종이를 태워 하늘로 올린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자기 능력 안이 아닌, 밖에서 찾으려니 얻기 어렵고, 그래서 괴로움은 더 커지는 모양이다. 신전을 나와 해수욕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희망촌 미감아 소녀를 떠올려 본다. 내가 대학 삼학년을 마치고 공의 선생님 심부름으로 친구와 보문호수 북천 희망촌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가는 그날의 모습들이 영화 장면이 되어 이어진다. 그 시절, 군 입대를 기다리며 빈둥거리고 있던 늦가을, 면소재지 공의(공공의료 담당 의사) 선생님께 군에 가게 되었다고 인사를 하러갔다.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했던 공의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침 잘 왔다며 보문호수 북천에 있는 한센병 공동체 희망촌에 가서 의사선생님이 주는 약을 받아오라고 부탁했다. 그 마을에는 완치된 한센병 병력자들만 사는 곳이라서 병이 전염되지는 않는다는 말을 믿고 친구 L과 같이 그곳으로 떠났다.
 
 
그 날 북천 희망촌 가는 언덕길은 살색 모래가 짜르르 깔려 있는 길이었다.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는 길에는 물까지 고루 뿌려져 있었다. 왼편 언덕 아래에는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청소하는 돼지우리는 친구 L의 자취방보다는 훨씬 깨끗해 보였다. 붉은 샐비어 꽃들이 가득한 언덕길 오른쪽 경사면을 타고 산 쪽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긴 단층 건물 일곱 체가 계단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공의 선생님이 준 약도에 따라 아래에서 세 번째 건물로 향했다. 길 위에서 보니 건물 앞에 좁은 마당과 긴 마루 사이에는 벌써 겨울 준비를 하는지 몸통이 짚으로 만든 겨울옷을 입은 파초들이 보였다. 계단을 타고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파초 나무 뒤로부터 작은 소녀의 얼굴이 쏙 나왔다. 한센병 마을에 사는 아이인데도 일그러진 얼굴이 아닐 뿐만 아니라, 까만 머루 같은 눈이 맑고 예쁜 소녀였다. 소녀가 부끄러운 듯 파초 뒤로 몸을 숨겼으나 빨간 점퍼 절반이나 파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장난기 많은 L이 “풀숲에 머리만 넣어 두고 숨었다고 생각하는 북천 꿩”이라고 낮게 소리치며 살금살금 다가갔다. 촌장님은 미소 지으며 그 아이는 부모 모두 병이 완치된 과거 병력자이고, 그 아이는 나선균 없이 깨끗하게 태어난 미감아라고 했다. 아이는 일반 사회에서 자랄 수 있는 사회 보장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나라에는 그런 제도가 없어서 안타깝다 했다.
 
내가 전해준 공의 선생님의 편지를 잠시 읽어 보던 촌장님은 미소를 지으며 걱정 말고 마루에 앉으라며 웃었다. 그래도 멈칫거리고 서 있는 우리들에게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완치된 환자들이 사는 곳이니 걱정 말라 했고, 우리들은 넓은 마루 가장자리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촌장님은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방안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찾았다. 열려있는 방안이 조금은 어두운 듯 했지만, 흐트러진 곳이 하나도 없이 잘 정돈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촌장님이 방안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한센병 시인 한 하운의 ‘황톳길’이라는 낡은 시집과 뜯지 않은 과자봉지였다.
우리들의 눈은 책과 과자 봉지에 그저 머뭇거리기만 했고, 책을 만지고 포장을 뜯어야 할 손은 감히 나오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촌장님은 포장이 잘 되어있는 캔디라서 안전하다며 웃었다.
 
지금 우리 사회풍토는 모두가 의무처럼 일등, 일류를 향해 달려가야 하고,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전부 다 가져야하고, 다 가지지 못하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고 쉽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회다. 그런데 희망촌 사람들은 얼굴이 망가지고 손발이 떨어져 나가는 괴로움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미래 꿈,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은 상실의 상태다. 지금 우리사회 풍토와 단순비교 한다면 심한 표현이지만 존재의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일 성취에 보람을 느끼며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공동체 촌장님은 원하는 것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기 때문이고, 이 공동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 안에서만 원하는 것을 찾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생기는 괴로움은 없다고 한다.
 
딴중까잇 해수욕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신전 주차장으로 갔다. 소녀는 보이지 않고 왼편 주차장 나무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 놀고 있던 아이들이 차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자 아이들 중에는 뻔야낏 꾸스타(penyakit kusta/한센병 환자)들이 섞여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는 운전기사 수다르노가 두 번이나 당부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멀리 쫓아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같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고?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불가촉천민 문둥이라며 마을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비록 그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아무도 그들을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취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딴중까잇 신전 앞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살고 있다한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에서 내리니 아이들이 시끄럽게 달라붙었다. 돈 달라고 내민 작은 손들이 마치 지붕 아래 새끼 제비들의 여린 주둥이들 같다. 늦은 오후임에도 신전 안에는 사람들이 보였고, 향 태우는 연기와 종이 태우는 냄새는 여전히 신전 주변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당 앞 한 중국인 여자는 한 두 개의 향이 아닌 대나무 젓가락보다 더 긴 향 묶음에 불을 붙여 흔들고 절하고를 반복한다. 그것은 차라리 하늘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고통의 양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원하는 것을 자신의 능력 안에서 찾으면 모두 얻을 것이라는 촌장님의 말을 되새겨 본다. 소녀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서원을 향 연기에 실어 신들의 세계로 올려 보낸다. 신전을 돌아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 보상선물로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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