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그 겨울의 외등 / 김준규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ae7a633ecc5aba50dda8fe8871ff253a_1671380259_2972.jpg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90) 그 겨울의 외등 / 김준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수필산책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266회 작성일 2020-01-24 09:39

본문

< 수필산책 90 >
 
그 겨울의 외등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골목길의 외등은 밤이 되어서야 빛을 내기 시작한다. 빌딩 속으로 태양이 숨어버리고 하나 둘 날개를 펴는 박쥐의 긴 행렬처럼 까맣게 도시를 점령하는 땅거미, 두개의 평행선을 이끌고 칠흑으로 달려가는 마지막 열차, 메커니즘의 균일한 운동으로 부서질 듯 내지르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하루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일상의 속박에서의 탈출구는 아직도 어둠 속에 가려져 있고 골목길의 두려움을 걷어내며 달처럼 떠오르는 외등, 백열구의 반사판은 제한된 단위의 각도로 빛을 땅에 뿌리고 하늘은 은둔을 향한 긴 침묵이 어둠속을 질주한다. 각각의 존재를 알리며 생존의 처절한 절규로 소란을 피우던 도시의 함성이 멎고 창백한 불빛이 담장 끝 모서리를 만나 괴사하듯 뭉개지면 이따금 다급하게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는 함몰하는 밤의 깊이를 가늠한다.
 
 
가난의 징검다리를 수없이 건너고 만난 풍요의 시대에도 아픔으로 얼룩진 과거는 아릿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수십 년 전, 서울 아현동의 산동네. 얼어붙은 도시의 골목길, 눅눅하고 비좁은 다락방에서 자취생활을 할 때는 연탄난로에서 새어나는 지독한 가스냄새와 싸워야 했다. 온기의 손실을 피해 밀봉된 작은 공간엔 방치된 반찬 그릇, 며칠간 모아둔 양말과 속옷들의 냄새로 진동한다. 궁색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던 때의 골목길, 주린 뱃속을 자극하는 빵 가게의 버터 향은 이국적이며 매혹적인 삶의 욕구로 다가오기도 한다. 온 나라가 가난을 물리치자며 팔소매를 걷어 올려 어른들은 건설의 현장으로, 교육의 대열에서 제외된 청소년은 열악한 공장으로 새나라 건설에 무참히 내몰리던 시절이 있었다.
 
비탈진 삼거리, 전봇대에 간신히 매달려 빛을 내는 외등은 어둠으로 밀려나는 소외된 무리들의 호젓한 집합소였다.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선술집에서 나온 작업복 차림의 중년들이 불그스레한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어떤 이는 담배를 입에 물고 어떤 이는 외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담벼락에 실례할 곳을 찾아 주춤거리기도 한다. 산동네의 작은 필통 공장, 야간 일을 끝내고 늦은 밤 귀가를 서두르는 소녀들, 기름때가 채 가시지 않은 가냘픈 손끝에는 야식으로 제공받은 삼립 크림빵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우울한 시대에도 젊음은 슬픔에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며 맑고 순수하다. 공장 문을 우르르 나서며 내 지르는 그들의 환호성, 하루의 근로에서 해방된 소녀들은 그렇게 어두운 밤길을 지키는 작은 외등 앞에 모여 하루가 남긴 자투리의 시간을 즐기며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곤 했다. 홀로서서 어두운 골목을 야경꾼처럼 지키는 외등의 눈빛이 더러는 차갑게 빛난다. 어떤 간곡함이 인간의 마음을 그토록 피폐하게 하는가. 높은 담벼락을 응시하는 도둑놈의 그림자를 쫓기도 하고, 벼랑 끝을 전전하는 남루한 걸인의 행색을 다독이며 밤을 새기도 한다.
 
 
 
산동네의 겨울 길은 미끄럽고 위험하다. 밤새 내린 진눈깨비로 얼어붙은 경사 도로, 출근길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엉덩방아를 찧고 청소차는 감히 접근을 포기한다. 담장 앞에 수북이 쌓이던 연탄재는 미끄러운 길 위에 뿌려 지기도하고 해동의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나기 마련이다. 라디오를 틀면 하루가 멀다하게 들려오던 연탄가스에 의한 중독사고, 먼 거리에 있는 직장을 가기 위해 만원 버스를 타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밤늦도록 2일치의 일당에 도장을 찍다보면 항상 모자라는 새벽 잠, 짓누르는 눈꺼풀과 전쟁을 한다. 그 시절 겨울을 나는 일은 터널처럼 길고 춥기만 하였다 .어머니가 씌어주는 목도리, 옷깃에 스미던 새벽바람, 외등은 아직도 시려운 새벽을 지키며 서리꽃처럼 피어 있었다. 산동네의 붉은 기왓장 처마 밑 사이로 간신히 드러난 뿌연 하늘은 연탄의 매캐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서울역을 출발하는 하행선 첫 열차의 기적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곤 하였다.
 
 
겨울 / 김준규
 
산동네에 연탄재가 수북이 쌓이면
골목엔 유행병 같던 죽음이
휩쓸려 가는 날이다
 
염창동 첫 열차 수증기 내뿜는 소리
희망은 끊긴 듯 이은 듯 아득하고
굴뚝의 뿌연 연기 속 서울은
해쓱한 아침을 맞는다
 
바람 부는 황막한 벌판
깡마른 팔소매 치켜들고
힘겹게 외쳐 대던 재건의 함성들
 
의욕이 머뭇대던
궁색의 담벼락은 끝없이 높고
눈 속에 덮인 겨울은
터널처럼 길기만 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