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비린내론 / 이영미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ae7a633ecc5aba50dda8fe8871ff253a_1671380259_2972.jpg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43) 비린내론 / 이영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404회 작성일 2019-02-19 17:17

본문

< 수필산책 43 >

비린내론
 
이영미 / 수필가,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익히지 않은 것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비릿하다는 것은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은밀한 욕구이다. 때로는 누군가의 욕망이나 비밀이 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처럼.
 
자연이 소유한 향기가 부러운 인간의 욕망이 향수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후각을 잃는 동시에 추억도 함께 잃어버린다”는 명대사가 나오는 <퍼펙트 센스>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효과적인 암기법으로 이미지 연상법이 유행이듯이 후각이 더해진 기억은 더 오래 지속된다. 이렇게 좋은 향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비린내는 ‘악취’취급을 받는다. 사전적인 의미부터 ‘날콩이나 생선, 동물의 피, 젖 따위에서 나는 역겹고 매스꺼운 냄새’라고 정의해 놓았다.
 
 
 
오랜만에 콩국수가 생각났다.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서리태 두 대접에 물을 부었다. 제아무리 단단한 살이라도 물을 만나면 풀어지기 마련이다. 타원형에 압축시켜놓은 제 몸을 둘로 쪼개는 콩알들, 그릇 속에서 잠방잠방 잠겼던 콩들은 하룻밤 새 몸을 불렸다. 
물 위로 머리를 쏙 내민 콩알 중에 성미가 급한 녀석들이 있다. 스스로 껍질을 벗은 알몸이 눈에 띈다. 머리만 벗겨진 녀석도 있어 웃음이 난다. 손으로 만지면 허물을 벗고 뽀얀 속살을 내보인다. 두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오열이라도 난 듯 껍질을 훌훌 벗어던진다. 
 
콩이 잠길 만큼 물을 붓고 굵은 소금을 뿌려 불 위에 올려놓는다. 콩이 익어가며 비린내가 집안 곳곳으로 퍼진다. 콩 속에 들어있는 사포닌 성분 때문인지 흰 거품이 냄비 위로 한가득 떠오른다. 인삼에도 들어있다는 항산화 물질이라 굳이 거품을 걷어낼 필요는 없다지만 습관적으로 거품을 걷어낸다. 콩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옷을 벗지 않겠다고 벋대던 콩들도 껍질이 홀랑 벗어졌다. 삶은 콩과 물을 믹서기에 넣고 곱게 간다. 마지막 비명을 지르듯 삶은 콩이 남아있던 비린내를 밀어낸다. 죽을 때 모든 것을 놓고 간다는 사람의 모습도 저럴까? 살얼음이 생기도록 냉동실에 보관했던 콩국물에 삶은 소면을 넣었다.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한다. 채 썬 오이를 고명으로 얹고 참깨를 송송 뿌리면 여름철 별미인 콩국수가 완성된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한 그릇씩 먹으니 든든하다. 
 
 
 
해산물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비린내’일 것이다. 그 냄새 때문에 해산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해산물에서 나는 비린내는 바다 내음일까? 온갖 생명체를 품은 바다이기에 냄새가 안 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물비린내는 갯벌이나 항구에 사는 바다 생물들이 부패해서 생기는 아민이라는 화학물질 때문이라고 한다. 음식물에 있는 비린내는 레몬이나 식초로 누를 수 있다. 콩이나 해산물에서 풍기는 비린내를 제거하면서 먹음직한 음식을 만들어낸 사람의 손에 비린내가 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린내는 악취가 아니다. 자연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비린내는 자신을 지켜내고자, 자연이 내뿜는 방어막이 아닐까? 신생아가 있는 집안에서는 젖비린내가 풍긴다. 곤히 잠든 어린 생명을 깨우지 않으려 까치발을 떼거나 속삭이게 하는 힘이 있는 묵직한 향. 어머니의 손에서는 항상 비린내가 났다. 논으로 밭으로 다니며 일을 하는 어머니가 묻혀온 비린내는 곧 당신의 살 내음이었다. 며칠 전, 치킨까스를 재웠다. 살이 부드러워 우리 집에서는 돈까스보다 인기 메뉴다. 몇 팩을 재워도 도시락을 싸거나 치킨 샐러드를 하면 금방 바닥이 난다. 욕심을 부려 냉동실 한편이 꽉 차도록 만들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쉬려니 올해 여섯 살이 된 둘째가 무릎으로 올라온다. 애교가 많아 나를 금방 웃게 하는 재주가 있는 공주다. 내 손에 제 얼굴을 비비다 코를 감싸쥐었다.

“엄마, 이게 무슨 냄새야?”
“응 닭고기를 만져서 엄마 손에 비린내가 뱄네.”
“뭐라고? 엄마가 닭의 비린내를 훔쳤다고?”
 
딸아이의 논리에 웃음이 터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닭의 고기도 훔치고 비린내도 훔친 못된 사람이구나. 그렇게 엄마 마음을 훔친 딸을 힘껏 껴안았다. 비누로 다시 손을 씻어도 희미하게 냄새가 남았다. 하룻밤 자고 나면 냄새는 없어질 것이다. 딸아이와 주고 받은 대화는 내 기억의 저장소에 남을 것이다. 
 
비 실은 먹장구름이 낮게 내려와 앉았다. 
소나기가 한줄 쏟아질 것 같은 본새이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난다, 난다! 먼 하늘의 비밀을 품었을 비린내가 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